노마드 NOMAD 4

변화하는 1980년대의 한국인의 삶에 대한 작은 기록 - 4



권태균展 / KWONTAEGYUN / 權泰鈞 / photography

2013_1204 ▶ 2013_1216

 

 

 


권태균_경운기위의아이들-경남 의령_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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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20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공휴일_11:00am~07:00pm / 마지막 화요일 12시까지


갤러리 룩스GALLERY LUX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Tel. +82.2.720.8488

www.gallerylux.net


한국인의 얼굴과 삶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사진 속의 얼굴들은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고, 나의 카메라에 담아졌습니다. '노마드'는 내가 좋아하고 즐겨 쓰는 말이기도 하고, 나를 표현하는 말이면 좋겠다고 생각 합니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던 나의 모습 그리고 나의 마음속 사진에 대한 느낌들, 그리고 사진 속의 노마드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20여년전 우리 삶의 모습이지만 그 사이 잊어버린 모습이 많습니다. 삶이 역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일상의 다양한 편린입니다.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삶의 얼굴을 묶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모양을 하고 살아가는가에 대한 관심, 단순히 외양이 아닌 사람들의 어떤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이 그 주변의 상황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입니다. 낱장의 사진이 묶여 기록이 되는 과정을 탐구해 보았습니다. 언젠가는 역시 사진 속 박제가 될 우리의 삶을 성찰해 보자는 의미입니다. ■ 권태균

 


권태균_아이와창-경남의령_1980

 

 

권태균_얼씨구나-경남고성_1983

 

 

권태균_결혼식가는 부부-전남구례_1988

 

 

권태균_미류나무길-경북청송_1989

 

 

권태균_집으로-경북상주_1983

갤러리룩스는 2013년12월 4일(수)부터 12월 16일(월)까지 권태균의 개인전 『노마드』를 개최한다.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다큐멘터리분야로 30여년 간 작업해온 사진작가 권태균의 「변화하는 1980년대의 한국인의 삶에 대한 작은 기록」이라는 연작시리즈로서 2010년 첫 전시를 시작으로 2013년 올해, 네번째를 마지막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개인전이다. 네 번의 개인전으로 풀어 낼 만큼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며 1980년대를 담아낸 방대한 권태균의 사진은 한국사의 생생한 역사이며 소중한 기록이다. 또한 그의 작품에는 역사를 바꾸는 커다란 사건이나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소한 생활 속에서 「미루나무 길(1989)」 처럼 시대를 따라 걷는 「의관을 정제한 노인(1988)」을 볼 수 있고 「가을 걷이 (1985)」 후 「경운기 위에 아이들(1981)」을 태우고 「집으로(1983)」가는 내 아버지를 만나 반갑게 과거를회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한다. ■ 갤러리 룩스

Vol.20131204g | 권태균展 / KWONTAEGYUN / 權泰鈞 / photography

ㆍ인사동 노화랑 4일부터 ‘꽃의 화가’ 송수남 매란국죽 유작전

한겨울 추위를 견디고 이른 봄 먼저 꽃을 피워 진한 향을 전하는 매화, 때묻지 않아 고결청초하면서 은은한 향의 난초, 꽃들이 져가는 서리 내리는 늦가을에 고고하게 꽃을 피우는 국화, 사시사철 푸른 데다 곧게 뻗어 강인한 기상을 지닌 대나무. 사계절과 때를 같이하는 매·난·국·죽은 각각의 특성이 덕과 학식을 겸비한 군자의 인품에 비유되면서 ‘사군자’로 불렸다.

동양 수묵화의 기본으로 중국 북송 때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사군자는 고려시대에 도입됐다. 선비정신을 상징하기도 한 사군자는 조선시대엔 문인 사대부 등이 문인화와는 달리 여가가 날 때 틈틈이 즐겼다. 요즘은 취미생활의 하나로 사군자를 즐기는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수만명에 이른다. 바쁘고 팍팍한 일상에서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려는 몸짓의 하나이다.

여기 특별한 사군자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노화랑(서울 인사동)이 마련해 4일 개막하는 ‘남천 송수남, 매란국죽’전이다. ‘현대 수묵화의 거장’ ‘꽃의 화가’라 불리다 지난 6월 타계한 남천 송수남 전 홍익대 교수의 유작들이다. “내 장례식에는 모두가 화사한 복장으로 꽃을 들고, 생전의 좋은 추억을 떠올리며 참석했으면 좋겠다.” 남천은 생전에 이 같은 유언을 남겼다. 소탈하고 격의 없는 인간적 모습을 보여준다.



                                                                                       ‘매화’, 한지에 수묵담채, 34×40㎝



이번 전시회에 나오는 작품들은 남천이 전시회를 염두에 두기보다는 평소 틈틈이 수양하는 자세로,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며 먹을 갈고, 붓을 든 것들이어서 의미가 새롭다. 한 거장 화백의 속내가 오롯이 담긴 작품들인 셈이다.

남천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노승진 노화랑 대표는 “남천 선생은 생전 수묵화 운동을 이끌 때나 2000년대 들어 유명세를 치르게 한 ‘꽃그림’을 그릴 때도 사군자를 등한시하지 않았다”며 “마음을 안정시킬 때, 혹은 여유로운 마음을 그림으로 드러내고자 할 때 특히 사군자를 그렸다”고 회고했다.

화면 한 가득 소담스러운 꽃을 채운 매화, 옆에 있는 괴석이 ‘향에 취해 앓는 소리’를 내게 하는 난초, 붉고 노랗고 때론 푸른색인 국화, 현대적 조형성과 함께 먹의 농담이 조화를 이룬 대나무는 남천만의 예술세계를 보여준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붓질이 보는 사람까지도 저절로 평안하게 만든다. 평소 “가장 행복한 순간 중의 하나는 한지에 먹물이 스며드는 때, 그때의 묵향이 참 그윽하다”고 한 남천의 말이 떠오른다.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 동양화과로 전과한 남천은 상업주의·복고주의 등에 반발해 수묵화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2003년부터 유화 등으로 화사한 꽃그림을 그려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2005년엔 사군자 작품을 엮은 화집 ‘매란국죽’을 펴내기도 했다. 12월18일까지. (02)732-3558

 


[韓中日 명산 섭렵한 곽원주 화백]

2년간 8000m급 高峰을 산수화로… 탈레반 위협·거머리 습격도 받아
히말라야가 '죽음의 등반'이라고요? 북한산보다 오르기 쉬운 산이에요


"히말라야 고봉은 동양의 산수화풍에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히말라야 산수화는 동양화의 모든 기법이 총동원되는 새로운 장르가 될 겁니다."

전통 산수화를 현대적 경향의 실경산수화풍으로 발전시켜 온 한국화가 곽원주(63) 화백은 국내 1000여곳의 산은 물론 중국·일본의 명산 100여곳을 오른 산악인이다. 2000년부터 등산 전문지 '월간山'에 그림 산행을 연재해 온 그는 자신을 '산꾼 화가'라 칭했다. 이 산꾼 화가가 2011년부터 지난달까지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모두를 다녀와 화선지에 옮겼다. 히말라야 14좌를 화폭에 담은 것은 동양화가로선 곽 화백이 처음이다.

지난달 28일 서울 인사동 작업실에서 만난 곽원주 화백이 준비 중인 작품과 스케치를 보이며 히말라야 고봉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윤동진 객원기자 

 

그도 2년 전까진 히말라야는 동양 산수화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산꾼으로서 히말라야를 가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이를 화폭에 담는다는 것은 다른 문제죠. 산이 각지고 음영이 심한 히말라야는 동양화풍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봤죠. 그런데 한국 문화·예술 사업을 후원하는 강태선 블랙야크 회장이 그러더군요. 우리 것이 가장 세계적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요."

2011년 9월 첫 원정대를 꾸려 안나푸르나(Annapurna)에 간 곽 화백은 히말라야가 동양 산수화에 어울리지 않을 것이란 선입견이 여지없이 깨졌다고 한다. "발밑에는 형형색색의 야생화가 만발했는데, 저 멀리는 짙은 녹음이 보여요. 산자락엔 완연한 가을이 찾아왔고, 정상에는 설경이 펼쳐집니다. 한 시야에 4계절의 풍미를 다 볼 수 있는 히말라야에선 동양화의 모든 기법을 한 작품 안에 담을 수 있더군요."

'동양3국 명산전', '동양삼국 명산 앙코르전' 등을 기획한 그가 말하는 삼국 산수화는 독특한 차이를 가진다. 산이 높고 곡이 깊은 중국의 산수화(山水畵)는 먹의 농담(濃淡)으로 산의 형상을 표현한 발묵법(潑墨法)이 발달했다. 독특한 색의 화산이 많은 일본에선 채색 산수화가 주를 이룬다. 이 둘의 중간에 있는 한국의 산수화는 실경에 주자학적 자연관의 관념성이 반영돼 있다. "깊은 산세는 발묵법으로, 4계절의 화려함은 채색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히말라야 산수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로 표현되는 관념성이죠." 2011년부터 시작된 작업은 지난달 18일 시샤팡마(Shishapangma)를 내려오며 끝이 났다. 그동안 숱한 위험과 대면했다. "인근 베이스캠프가 탈레반의 습격을 받는 일도 있었죠. 히말라야 거머리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래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람들입니다. 삶은 열악하지만 자기 삶에 대해 만족하고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알죠."

흔히 8000m 고봉이 즐비한 히말라야 등반을 극한의 스포츠로 생각한다. 하지만 곽 화백은 히말라야를 노년층에 권하고 싶은 산이라고 한다. 그의 작품 스케치도 주로 해발 4000m에서 이뤄졌다. 완만하게 4계절의 풍광을 감상하며 오를 수 있고, 장엄하게 솟은 고봉을 바라보며 인간의 미약함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4000m까지 오르는 것은 북한산·도봉산 오르는 것보다 쉽죠. 그저 험준할 것만 같은 히말라야도 봉우리마다 특징이 다릅니다. 히말라야 동편 네팔 쪽 고봉은 지리산에, 서편 파키스탄 쪽은 설악산에 비할 만하죠. 작품을 통해 히말라야의 다양함과 생동감을 담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내년 9월 서울 정동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열리는 '화폭에 담은 히말라야'전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인사동지역 갤러리 12월 전시일정
[스크랩 / 서울 아트가이드]

 

 

 

 

 


 

소리와 조형을 결합시키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는 정하응 작가. 김효원기자 eggroll@sportsseoul.com

 

정하응 ‘사운딩’. 김효원기자 eggroll@sportsseoul.com

 

정하응, ‘전파 거울’. 김효원기자 eggroll@sportsseoul.com

 

정하응, ‘ssaeng, 쌩, 生’. 김효원기자 eggroll@sportsseoul.com

 

설치작가 정하응이 최근작을 선보이는 개인전 ‘ssaeng, 쌩, 生’전을 오는 12월 15일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3에서 연다.

지금까지 꾸준히 폐자재와 소리를 결합하는 작업을 선보여온 정하응은 이번 전시에서 삶의 찰라적인 순간들을 채집해 우리의 눈 앞에 재현하는 설치 작업과 이 작업이 나오기까지 밑바탕이 된 드로잉들을 다채롭게 선보인다.

가장 핵심이 되는 작업은 전시 타이틀로 사용된 ‘ssaeng, 쌩, 生”이다. 커다란 박스 형태의 구조물 양쪽에 모니터를 설치하고 전시장 밖에 CCTV를 달아 전시장 밖에서 벌어지는 풍경들이 실시간으로 나타나도록 했다. 구조물에 부착된 스피커에서는 자동차 소음을 비롯한 일상의 소음들이 쏟아져 나온다.

정하응은 “우리 삶에서 느껴지는 일상적이고 찰라적인 현상들에 대한 이야기하고 싶었다. 작품에 설치된 모니터에서는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찰라적 현상들이 나타난다. 삶이라는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담았기 때문에 ‘ssaeng, 쌩, 生”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일상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듯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것을 잊는다. 그렇게 흘러가는 일상을 사람들이 느껴보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업에서 자동차 소리, 자동차 이미지 등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빠르게 지나가는 속도의 시대에 대한 반성의 의미다. 이번 전시에서도 자동차 소음을 통해 현기증 나는 현대인의 삶을 에둘러 이야기하고 있다. 낡은 폐자재를 주로 사용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흔적이 담겨있는 낡은 폐자재를 통해 새 것만을 쫓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 이같은 작업을 통해 결국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소통이다. 아찔한 속도의 시대에 빠르게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작가는 “걸음을 잠시 멈춰 서서 자신과, 혹은 타자와 소통해보라”는 메시지를 타전하고있다.

이같은 정하응의 작업에 대해 미술평론가 변종필은 “사물에 내재돼있는 소리를 작가적 시각에서 재생하는 정하응의 작업은 우리가 무심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지껄임같기도 하고 소음같기도 한 파편화된 소리와 폐품들의 조합은 태어났다 소멸하는 삶과 유기적 관계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소리와 조각을 연결하는 시도를 꾸준히 지속해온 정하응은 “내게 소리는 하나의 오브제다. 형태가 없는 오브제라고 할 수 있다. 조형과 소리를 연결하면 둘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난다”며 “앞으로는 사람의 언어를 이용해 시각적인 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소리 자체로 작업을 해보고 싶은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02)730-5322

[스포츠 서울]김효원기자 eggroll@sportsseoul.com

고인이 된 서양화가 박권수를 사랑하는 모임 (박,그,사)이 결성되어, 그 유작전을 마련하였다.
지난 11월29일 오후5시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3층전시실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유족을 비롯하여
생전에 친분있는 각계의 지인 200여명이 참석하는 대 성황을 이루었다.

 

'박그사' 박인식대표의 사회와 황예숙여사의 인사말로 시작된 개막식에는 무세중, 전유성, 송 현, 김명성,

이성룡, 이호성, 이효정,이두엽씨등 여러 벗들이 나와 지난 회고담으로 박화백의 생전 주벽을 털어 놓아
그 때 그 시절을 그립게 하였다. 그리고 아들 박상하군이 생전에 박권수씨가 즐겨 불렀던 노래를

불러 옆에서 듣던 어머니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게 만들었다.

 

고 박권수화백을 기리는 추모제로 행위예술가 김백기씨가 보여 준 퍼포먼스는 보는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얼굴에 촛물을 쏟아가며 고통을 끌고가는 그의 행위는 목숨보다 그림을 사랑했던 서양화가 박권수의
치열한 작품세계를 다시 한번 생각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뮤지션 김상현씨를 비롯한 후배가수의 공연이 이어졌고, 김정남씨와 일본사진가 후지 도모끼의

단소연주로 개막식은 마무리되었다.

 

이 전시는 12월 12일까지 이어진다.

 

 

 

 

 

 

 

 

 

 

 

 

 

 

 

 

 

 

 

 

 

 

 

 

 

 

 

 

 

 

 

 

 

 

 

 

 

 

 

 

 

 

 

 

 

 

 



Heart-Land

권인경展 / KWONINKYUNG / 權仁卿 / painting

 2013_1120 ▶ 2013_1126

 

 

 


권인경_저장된 파라다이스_한지에 고서콜라주, 수묵채색_160×130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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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인경 홈페이지_http://www.inkyungkwon.com


초대일시 / 2013_1120_수요일_06:00pm

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시행중인『Emerging Artists: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의 선정작가 전시입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Tel. +82.2.733.1045~6

www.grimson.co.kr


Heartland-유토피아의 입구에서 ● 권인경은 채색화 기법을 통해 풍경을 표현하는 작가다. 그런데 그 풍경은 전통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작품들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들이다. 권인경의 작품에서는 전통산수화에서 구사되는 먹과 붓의 흐름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화법에서 도입하지 않았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기도 하고, 화면 구성 방식에 있어서도 오래된 책들의 낱장들이 화면에 콜라주 되어 시간성을 상징하기도 하며 다시 그 위에 몽타주 기법으로 그려진 다양한 이미지들이 작가의 주변을 둘러싼 소소한 일상의 사유와 경험을 시각화하는 이중적 콜라주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 권인경의 작품 속에는 논리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풍경이 한 화면 속에 혼재해있다. 작가의 생활 반경에서 발견되는 주택과 상점, 그리고 작가가 방문했거나 먼 곳에서 바라본 빌딩들이 일관된 시점과 비례에 맞지 않게 바위산이나 나무, 숲, 아스팔트 도로 등과 공존하고 있다. 종종 권인경은 작품 속에 배치시킬 건물이나 풍경을 의도적으로 왜곡시켜 고층 건물의 바로 앞에서 올려다 볼 때의 급격한 원근법적 묘사나 마치 하늘 위에서 불규칙한 굴곡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듯한 이미지로 대상을 표현하기도 한다. 작품 속의 장면들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실내에 있음직한 의자나 탁자 등의 가구들이 그 풍경 안에 더해지고 때로는 이러한 장면들이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권인경_저장된 파라다이스2_한지에 고서콜라주, 수묵채색, 아크릴채색_194×130cm_2013

 

 

권인경_펼쳐진 집_한지에 고서콜라주, 수묵채색_126×156cm_2013


이렇게 구성된 권인경 작품의 화면 안에는 해자(moat)처럼 풍경을 둘러싸거나 거의 둘러싸듯이 감아 돌아가는 물길이 자주 등장해왔다. 황색 계열의 화면에 남색으로 화면을 휘두르며 흐르는 물은 색상의 대비효과만큼이나 화면 속의 공간을 대비적으로 분리시킨다. 푸른색의 강물은 때로는 이편과 저편을 갈라놓는 듯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 물길로 인해서 고립되는 공간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위협으로부터의 완충지대 역할을 수행하는 듯하기도 하다. ● 작가는 이렇게 창조된 공간을 Heartland로 명명한다. '심장부' 또는 '중심지'로 해석되는 Heartland는 지리학적인 좌표상의 중심이면서 마음속에서 관심을 집중하는 정신적인 사고의 중심지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 표현된 시각적 이미지들은 기억과 상상의 콜라주로서 작가의 심리적 heartland를 구성하는 요소들로 채워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암호해독 과정처럼 그 이미지를 읽어 나아갈 필요가 있다.

 


권인경_Heart-land_한지에 고서콜라주, 수묵채색_181.5×228cm_2013

 

 

 

권인경_경계의 바깥_한지에 고서콜라주, 수묵채색_130×96cm_2013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우리 인간의 성심리, 불안, 무의식과 잠재의식 등을 연구하여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연구 가운데 하나로서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적 불안을 외부에 표출하는 무의식적 반응 가운데 하나인 방어기제(defensive mechanisms)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연구 이론에 따르면 우리들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면 이성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그 불안을 통제하기 어렵게 되고 오히려 무의식에 기반을 둔 판단과 행동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방어기제는 우리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불안과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함으로써 자아를 붕괴의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동원되는 자기보호의 방법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 권인경이 작품을 통해 구축해가는 Heartland에는 외부의 어떠한 자극과 위협으로부터도 흔들리지 않는 유토피아적 안녕을 향한 자기보호와 행복 추구의 본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유토피아의 영토에 진입하기 전 단계에서 우리는 불안과 위협에 노출될 염려를 떨치지 못하는 시련의 과정을 겪을 수도 있다. 권인경의 작품 가운데 가파른 절벽 앞에 세워진 가상의 고층건물들이나 주변이 가라앉아 그 부분만 솟아오른 것처럼 좁은 땅위에 서있는 이국적인 건물들은「기억의 심연」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작가의 의식 속에서 지금까지 지나쳐온 심리적 불안과 시련의 단계를 시각적으로 회고하는 것일 수도 있다.

 


권인경_모호한 공간2_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채색_90×103cm_2013

 

 

 

권인경_가시돋는 나무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24×19cm_2013

권인경_녹는 나무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22×16cm_2013

권인경은 이제 Heartland를 지향한다. 작가는 그곳을 '그 어떤 외부적 요인에도 흔들리지 않는 요새'라고 한다. 그러나 요새는 이제 더 이상 지형적으로 방어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의 여유로 무장된 정신의 요새라고 할까. 작가는 Heartland의 가능성을 조금씩 엿보듯이 작품 속에서 방어적 구도를 이룬 경계의 지형을 조금씩 열어준다. 이제 강물은 작가의 Heartland를 보호하듯 에워싸지 않고 춤추듯 굽어 흐른다. 작가는 이러한 장면을「흐르는 시간」으로 명명 한다. 삶의 연륜이 쌓여갈 때 시간 앞에서 대상들을 관조하는 태도처럼 이제 작가가 새롭게 구축한 풍경에는 활짝 열린 원경의 강(혹은 바다)과 그 너머의 먼 곳의 산들이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게 화면의 구성요소로 등장한다. 색채 역시 이전보다 잘 정제되고 구도도 보다 깔끔하게 다듬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화면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면 그 안에는 구원의 상징인 십자가가 달린 아담한 교회의 모습도 작고 수줍게 등장한다. ● 권인경의 최근작「저장된 파라다이스」에서는 전통회화에서 볼 수 있는 괴석이나 식물 실루엣의 틀 안에 이제까지 작가가 구사해왔던 고서 콜라주, 이미지 몽타주, 작가 주변의 풍경과 사물의 데페이즈망 형식의 배치 등이 모두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공간이 코발트색 바탕을 배경으로 마치 우뚝 솟은 바위나 싱싱하게 성장하는 화분 속의 식물의 형상으로 대치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 유독 붉고 커다란 꽃송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가 드디어 Heartland의 입구를 발견한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 하계훈

Vol.20131120d | 권인경展 / KWONINKYUNG / 權仁卿 / painting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 2013

차기율展 / CHAKIYOUL / 車基律 / mixed media

2013_1120 ▶ 2014_0115

 

월요일 휴관

 

 

 


차기율_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_자연목, 음향스피커, 모니터, 스테인리스 스틸_225×52cm×2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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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율 블로그_blog.daum.net/chakiyoul

초대일시 / 2013_1120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차기율의 작업-방주를 짓고 강목을 짓고 우주를 짓고 존재를 짓다 ●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 형식논리가 강한 작업에서 주제는 형식적이거나 무의미한 것이어서 작업과 주제와의 연관성이 별로 없는 편이다. 이에 반해 서사가 강한 작업에서 주제는 작업의 의미내용을 압축하거나 상징하는 것이어서 주제가 작업을 확장하고 심화하고 변주한다. 마치 그 자체가 작업의 일부인 양 작업의 능동적인 또 다른 한 축으로서의 의미기능을 도맡고 있는 것이다. 차기율의 경우가 그렇다. ● 부유하는 영혼, 땅의 기억, 사유의 방, 그리고 순환의 여행 - 방주와 강목 사이. 세세한 차이가 없지 않지만, 작가가 그동안 자신의 작업에 붙인 주제들이다. 이 주제들 자체는 각각이지만 사실상 그 이면에서 서로 통한다고 보아야 하고, 상호 유기적인 관계로 보아야 한다. 이 주제들에는 그동안 작가의 의식을 지배했고 그 의식을 작업으로 풀어냈던 계기들이며 단서들이 고스란히 탑재돼 있다. 그렇게 작가의 의식은 부유하는 영혼들을 향한다. 영혼은 산 자들의 몫이 아니고 유기체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영혼은 산 자를 넘어 죽은 자를 향하고, 유기체를 넘어 무기질로 확장되고, 유형의 형태를 넘어 무형의 존재를 아우른다. 부유하는 영혼이란 도처에 편재하는 영혼이며 심지어 무의식마저 파고든 영혼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영혼이다. 이런 연유로 작가는 한갓 돌 속에 혼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하고 식물의 혼을 믿는다. 그렇게 작가는 콜로세움의 대리석 조각을 취하고 고비 사막의 사암에 취한다. 심지어 백령도 해변에서 조약돌들이 서로 부닥치면서 내는 가각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면 태초의 아련한 기억이 떠올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식물처럼 뿌리를 내리고, 그렇게 내린 뿌리털을 매개로 존재와 존재가 연결되고 세계와 세계가 연속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 밑바닥에는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이, 범신론과 물활론이 깊게 뿌리 내리고 있었다. 풍문으로나 떠돌던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숭고의 감정이 고스란히 복원되고 있었다.

 

 


차기율_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_포도나무, 자연석, 스테인리스 스틸_가변설치_2011


그렇다면 이처럼 존재와 존재가 연결되고 세계와 세계가 연속되고 주체와 타자가 연장돼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바로 기억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그 기억은 예사롭지가 않은 기억이다. 아련한 기억이며, 기억할 수 없는 기억이며, 기억의 수면 아래 잠재된 기억이며, 무의식적인 기억이며, 원초적이고 원형적인 기억이며, 땅의 기억이다. 융이라면 집단무의식 내지 원형이라고 했을 것이다. 논리로는 해명되지 않는 끌림이며 이유가 없는 끌림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그렇다면 땅은 무엇을 기억하는가. 시간을 기억하고, 공간을 기억하고, 역사를 기억한다. 피를 기억하고, 죽음(아님 주검?)을 기억하고, 삶을 기억하고, 존재를 기억하고, 시원을 기억한다. 그 기억용량은 당연히 인간과 인류의 그것을 넘어선다. 작가는 그 기억이 궁금하다. 그래서 땅을 파헤치는데, 선사시대 유적을 발굴하고, 통의동 한옥을 발굴하고, 인천 배다리를 발굴하고, 화성 시 집터를 발굴한다. 그렇게 한국근현대사의 생활사의 한 자락이 복원되고, 작가의 유년시절의 한 모퉁이가 현재 위로 호출된다. 모든 발굴은 흔적을 향한다. 발굴이란 곧 삶과 죽음의 흔적을 발굴한다는 것이며, 존재와 시원의 흔적을 발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을 발굴하는 작가의 행위는 땅이 기억하고 있을 존재의 흔적을, 자기가 존재하는 근거를, 존재의 원형을 발굴한다는 것이다. ● 그렇게 발굴되고 복원된 존재의 흔적이며 아득한 시원으로부터 작가에게까지 이식되어졌을 존재의 원형과 대면한 자기가 이전의 자기와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작업을 사유의 방이며 장으로 본다. 존재가 거듭나고 재설정되고 재부팅되는 계기로 본다. 작가에게 작업이란 곧 사유를 의미하며, 그 사유에 의해서 존재가 거듭나지는 계기이며 실천의 장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실천의 계기가 존재의 시원이며 원형을 향하는 것에, 그 원형이 현재 위로 호출돼 존재를 송두리째 바꿔놓는 것에 작가의 작업의 특이성이 있다. 그렇게 존재가 바뀌지 않으면 작업도 작업이 아니다. ● 그리고 그렇게 이른 주제가 순환의 여행 - 방주와 강목 사이이다. 그동안 경유했던 주제들, 이를테면 부유하는 영혼, 땅의 기억, 그리고 사유의 방에 연이어 최종적으로 정박된 의미론적 지점이다. 최종적으로 정박된 지점이라고는 했지만 작업에 최종이 따로 있을 수가 없듯 일정하게는 임의적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작가의 작업을 아우르는 종합의 계기 내지 분기점으로 볼 수는 있겠다.

 

 


차기율_고고학적 풍경-불의 만다라_소성된 갯벌, 철_1000×300×30cm_2013


주제도 그렇지만 작가는 작업을 여행으로 본다. 그리고 알다시피 여행은 길이며 연극과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삶의 메타포이다. 삶은 말하자면 자기를 찾아나서는 길 위에서의 여정이며, 그 길이라는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한 편의 연극과도 같다. 여기서 자기를 찾아나서는 여로에 의미론적인 방점이 찍힌다. 자기를 찾아나서는? 자기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지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며 자아, 주체며 에고는 그 실체가 있는 것인가 아님 그저 허무맹랑한 의식의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은 것인가. 불교에서의 진아는 무엇이며, 의식을 제로지점에다 설정하는 현상학적 에포케는 또한 무슨 의미인가(현상학에서 나의 실체는 추상된 의식이며 관념화된 의식이 아닌 지각된 의식의 소산으로 본다). 여하튼 그렇게 작가는 작업을 매개로 자기를 찾아 나선다. 그 여정에서 작가는 돌을 만나고, 식물을 대면하고, 선사와 시원과 존재의 흔적과 조우한다. 시공간적으로 작가를 초월해 있으면서 작가의 일부로서 이식된 것들이며, 작가가 분유된 성분들이다. 작가를 초월해 있으면서 작가가 분유된? 그래서 원형이다. 그 원형은 아득한 그리움으로 작가를 기다렸었고, 알 수 없는 끌림으로 작가를 유인했었고, 그리고 그렇게 작가 이전에 이미 작가를 예정했었다. ● 이처럼 작가는 여행을 하는데, 그 여행은 매번 자기에게로 되돌려지는 여행이고, 자기반성적인 여정이며, 자기라는 폐곡선 위를 따라 걷는 순환하는 과정이었다. 이처럼 순환하는 여행에는 범위며 스펙트럼이 있는데, 방주와 강목 사이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그 범위며 스펙트럼은 동시에 자기의 범위이며 스펙트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차기율이란 오디세이의 스펙트럼 상의 양 극에 해당하는 방주와 강목은 무슨 의미인가. 방주는 대홍수 이후 살아남은 노아의 방주를 의미하고 서양문명을 상징한다. 그리고 강목은 나무와 풀과 같은 한방에서 약초나 약재로 쓰이는 각종 식물의 대강(大綱)과 세목(細目)을 밝힌 서책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따온 것으로서 동양사상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서양의 문명과 동양의 사상을 오디세이의 양 극으로 세팅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각각 서양으로 상징되는 문명과 동양으로 상징되는 자연을 화해시키고 종합(요새 말로 치자면 융합)을 실천한다는 의미이며 의지의 표명이 아닌가. 서양과 동양을 화해시키고 문명과 자연을 융합시킨다? 이렇게 주제를 풀어놓고 보니 불현듯 작가의 작업의 스케일이 보인다. 신이 죽고 형이상학이 죽은, 진리가 죽고 진실이 죽은, 선이 죽고 악이 죽은, 주술이 죽고 신비가 죽은 미시담론의 시대며 표면의 시대 그리고 무미건조한 논리의 형해들이 실재를 대신(대체?)하는 시대에 들려주는 거대담론의 메시지라고나 할까. 그 의미며 울림은 그래서 오히려 더 크게 와 닿는다.

 

 


차기율_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_드랄루민, 책, 자연석_25×210.5×12cm_2013


그렇게 작가는 방주를 짓는다. 방주와 강목으로 설정된 주제로 볼 때 일정하게는 작가의 모든 작업이 방주를 짓고 강목을 짓는(실천하는?) 행위일 수 있다. 실재하는 방주며 강목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신화적 주체며 인문학적 주체를 지지하는 관념적 실체일 수 있다. 그런 만큼 그 꼴이 감각적 실재를 닮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서도 얼추 비정형의 유선형으로 나타난 조형물의 구조가, 그리고 바다에 떠 있었을 노아의 방주처럼 허공에 매달린 조형물의 전시 행태가 방주의 감각적 실재를 닮았다. ● 작가는 주로 포도나무 줄기를 소재로서 취하는데, 다른 나무들에 비해 뒤틀림이 강해 마치 근육과도 같은 유기체의 본성을 떠올려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포도나무 줄기를 취해와 끓는 물에 삶아 그 껍질을 일일이 벗겨낸 연후에, 그 토막들을 연이어 조립하는 방법으로써 거대한 구조물을 만든다. 전체적으로 유선형을 그리면서 세로나 가로로 길게 설치된 그 구조물은 마구 얽히고설킨 덩굴나무를 연상시키고, 비정형의 유기체적 다발이나 덩어리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구조물이 만들어지고 나면, 그 줄기의 표면에 주로 본초강목에서 인용한 자연과 관련한 한문자들이 붓글씨로 기입된다. 여기서 한문자들은 나무줄기로 표상된 유기체적 신체에 직접 작용하는 치유력과 주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로 구조물의 표면을 마치 불에 탄 숯처럼 검게 칠하기도 하는데, 마찬가지로 숯의 치유력과 재생능력을 의미할 것이다. 이처럼 검게 칠해진 구조물에서도 여전히 그 밑에 한문자가 잠재적인 형태로 기입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따라서 자연으로부터 유래한 능력들, 이를테면 자연치유력이며 주술작용 그리고 재생능력이 함축된 경우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구조물은 방주와 강목을 한 몸에 아우르고 있었다.

 

 


차기율_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_자연목, 스테인리스 스틸_28×230×53cm_2013


흥미로운 것은 이 거대한 구조물이 마구 얽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의 고리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마치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합체된 것 같은 이 구조물에서 역동성과 정치함이, 우연한 계획으로 나타난 이율배반적인 역학이 작동되고 있음을 알겠다. 뫼비우스의 띠란 알다시피 하나의 거대한 순환하는 고리이다. 뒤틀리고 비틀린 고리의 몸체를 따라 생과 사가 흐르고 삶과 죽음이 만나지기를 무한 반복하는, 그리고 그렇게 무한 순환하는 존재의 표상이다. 그렇게 무한 순환하는 뫼비우스의 띠 중간 중간에 작가는 납작한 조약돌을 장착해놓고 있다. 조약돌의 가운데를 뚫어 그 구멍 사이로 나무줄기가 관통하게 한 것인데, 반복의 마디 같고, 순환의 마디 같고, 윤회의 마디 같다. 무한 반복 속에 마디가 있고, 무한 순환 속에 경계가 있고, 무한 윤회 속에 분기점의 계기가 있다. 그렇게 억겁의 시간동안 축적된 존재가 호출되고, 억겁의 시간을 넘어 존재가 복원된다. 존재가 아닌 존재들이라고 해야 할까. 하나(一)이면서 다(多)인. 그렇게 마디가 있으면서 무한 순환하는 고리로부터 불현듯 질 들뢰즈의 주름이며 고원이며 뿌리(리좀)가 오롯이 복원되고 있었다. 특히 뿌리와 관련해선 서두에서도 말한 것이지만, 작가의 모든 작업엔 뿌리가 있다. 뿌리가 없는 경우에도 사실상 뿌리가 암시되고 있다. 이처럼 직접적이고 암시적인 뿌리를 매개로 생과 사가 연장될 수 있었고, 아(我)로부터 타(他)에로의 탈주를 감행할 수 있었고, 결정태로부터 가능태로의 이행이 가능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무한순환고리는 생과 사를, 아와 타를, 결정과 비결정의 계기를 한 아름에 싸안고 있었다. ●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를 형상화해놓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에게 방주란 말하자면 우주였고 만다라(우주를 도해한)였다. 그리고 그 우주가 세상을 바라본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매달린 구조물 밑에 이런저런 장치들을 보조하는데, 바닥에다 파문을 그린다. 여기서 파문은 기며 에너지를 표상한다. 그렇게 각각 나와 너로부터 발원한 에너지는 파문을 그리며 퍼져나가 너에게 가닿고 나에게 미친다. 뿌리도 그렇지만, 불교의 연기설을 표상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작가는 이와는 또 다른 버전에서 전시장 바닥에다 검은 물이 가득 담긴 바트(수조)를 설치한다. 그리고 바트 속에다 돌들(존재의 섬들)을 설치하고, 종교적인 도상이며 이데올로기의 표상들(이념과 역사 아님 이념의 역사)을 설치하고, 생활 오브제들(생활사)을 설치한다. 그대로 삶이며 세상사를 재현해놓은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렇게 재현된 세상을 허공에 매달린 우주가 바라본다. 흑경처럼 반영하는 성질로 인해 세상은 세상대로 우주(바트에 담긴 우주의 반영상이며 이미지)를 바라본다. 그렇게 우주는 세상을 그리고 세상은 우주를 반영한다. 특히 바트에 담긴 돌들은 존재를 표상하고 존재의 섬들을 표상한다. 존재의 섬들 각각은 고립돼 있지만, 보이지 않는 파문으로 서로 연결된다. 가시적인 파문이 비가시적인 파문의 형태로 재차 변주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나는 너에게 가닿고 너는 나에게 미친다. 가닿는다는 것 그리고 미친다는 것은 서로 반영하고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무한 반복되고 무한 순환된다. 재차, 불교의 인드라망(서로 반영하고 반영되는 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진 구슬그물)이 실현되고 있는 경우로 봐도 되겠다.

 

 


차기율_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_종이에 콘테, 오일컬러_100×70cm_2011


이처럼 작가가 방주를 짓고 우주를 짓고 작업을 짓는 동안 자연은 자연대로 집을 짓는다. 무슨 말이냐면, 작가가 인천 강화 작업실로 옮긴 이후 제작된 신작 이야기다. 알다시피 강화도는 서해에 위치해있고, 서해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편이라 광활한 갯벌이 조성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게 물이 빠지면 게들이 갯벌에 집을 짓는데, 갯벌 위로 흙을 퍼내 생긴 구멍 주변으로 일종의 방벽을 쌓는다. 이때 큰 집게손으로 흙을 돌돌 말아 밀어 올리는데, 그 흙 알갱이가 무슨 벽돌 같다. 해서, 게들이 집을 지을 때면 갯벌은 온통 게들이 만든 구멍과 방벽들로 장관을 이루는데 그 자체가 흡사 갯벌에 난 숨구멍 같다. 흔히 숨 쉬는 갯벌이니 정화하는 갯벌이라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님을 알겠다. 그러나 이렇듯 어렵사리 지은 집들은 잠시잠간 동안만 집 구실을 하는데, 다시 물이 들어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이처럼 매번 일시적인 집을 위해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 게의 본성(?)이 놀랍고 경이롭다. 사람으로 치자면 애써 그린 그림을 어떠한 미련도 없이 지워 없애는, 그리고 그렇게 허상과 이미지의 무상함을 실천해 보이는 티베트 승들의 모래 만다라에나 견줄 수가 있을까. 사람은 불심(?)을 깨쳐서 얻지만, 자연은 미처 깨칠 일도 없이 저절로 획득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 작가는 그 게가 예쁘고 그 집이 경이롭다. 그래서 그 집 그대로를 떠내기로 했다. 하지만 이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모종삽 같은 도구를 이용해 게집 주변으로 사각을 찔러 넣어 집 그대로를 떠내야 하는데, 이때 집의 원형 그대로를 보존할 수 있을 만큼 흙이 적절하게 굳어 있어야 한다. 평소 때는 그렇게 굳지도 않을뿐더러, 적당하게 굳었을 때에도 여차하면 타임을 놓치기가 쉽다. 조수간만의 차이에 대한, 물이 가장 많이 그리고 멀리 빠질 때(간조와 사리)에 대한, 물이 들고나는 때에 대한 평소 세심한 관찰과 이해가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작가는 이렇듯 오랜 기다림과 지난한 과정을 거쳐 떠낸 게집들을 자연 상태 그대로 소성하는데, 대개는 락꾸소성이나 노천소성의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 작가는 게가 만든 집을 모나드 삼아 또 다른 집(작업)을 짓는다. 이를 통해 작가는 아마도 숨 쉬는 자연이며 자연의 숨구멍을 조형하고 싶었을 것이다.

 

 


차기율_돌의 혼_자연석, 철, 드로잉과 나무_30cm, 30×21cm(액자)_2013


아트의 어원을 보면, 원래 아르스(ars)보다는 테크네(techne)라는 말이 먼저 있었다. 그리고 테크네는 이런저런 일을 해내는 능력을 의미했고, 원래 거미나 개미 그리고 벌이 집 짓는 것에서 착상되었다고 한다. 그 의미가 독일어 빌덴(bilden)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처럼 조형은 무엇보다도 집을 짓는 행위와 관련이 깊다. 그러므로 방주를 짓고 강목을 짓고 우주를 짓고 작업을 짓는, 그리고 종래에는 자연이 지은 집을 원형 그대로 가져다가 자신만의 또 다른 집을 짓는 작가의 작업은 어쩌면 작업의 수위를 조형의 원천으로 소급시키는 행위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조형의 근본에 대해서, 조형의 이유에 대해서, 조형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 자연에 조형이 개입해 들어가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면서 자연을 변형시키는 과정과 방법과 태도와 입장에 대해서 심각하게 재고하게끔 유도한다. 그렇게 반쯤은 자연이 조형하고 생성시킨 유기체를 떠올리게 하고, 자연의 본성에 존재의 본성을 합치시키는 미덕이 있고 겸허함이 있다. ■ 고충환

Vol.20131120i | 차기율展 / CHAKIYOUL / 車基律 / mixed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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