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展 / CHOHWAN / 趙桓 / sculpture

 

 2014_0108 ▶ 2014_0209 / 월요일 휴관

 

 

조환_Untitled_스틸, 폴리우레탄_311×452×10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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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0108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학고재Hakgojae

서울 종로구 삼청로 50(소격동 70번지)Tel. +82.720.1524~6

hakgojae.com

 

 

 

自序 ●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컴프레서에 고였던 물을 빼지 않아 전기 절단기 공기 호스가 얼어붙은 핑계로 엊저녁부터 밤늦게까지 마신 술은 깨지 않고 아침부터 눈보라가 치니 당최 작업장을 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게으른 농사꾼 밭고랑만 센다더니 내가 아예 그 짝이다. 전시는 코앞으로 다가와 있고 마무리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은데 또 술을 마셨으니 후회가 막심하다. 이게 어디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쉰여섯 해를 이렇게 살아왔는데 새삼스레 반성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보냐. 그나마 이런 뻔뻔함에도 믿는 구석이 아예 없지는 않다. ● 노자가 말했다. '회오리바람은 아침나절 잠깐이요 飄風不終朝, 소나기는 하루 내내 내리지 않는다 驟雨不終日'. 노자의 말은 그 둘레가 넓다. 내 편한 대로 억지를 부려 견강부회하자면 이렇다. '의도적인 조작을 삼가자. 자연 그대로의 변화를 받아들이자. 무위 본성에 따라 만물이 운동하고 변화할진데 그것의 자기 전개에 공감하지 않고 어찌 배길 것이냐. 세상에 고착화된 불변이란 없다.' ● 알코올 분해 능력이 예전보다 떨어져 주량이 점점 줄고 숙취가 길어지는 것도 내 몸 안에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변화다. 알고도 마시는 것을 두고 습習이라 할망정 '습' 또한 내 몸에 종자種子에서 싹을 틔운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게다가 나의 빈둥거림은 시간을 지우는 일만은 아니다. 무기력한 가운데 어쩌다 손에 잡히는 이런저런 책들이 뜻밖에도 예사롭지 않다. 그러다가 아무 서첩이나 펴서 임서를 해본다. 쓰고 또 썼던 것인데 어찌 그리도 새롭게 다가오는지 쓸 때마다 놀란다. 혼자 중얼거려 본다. 익숙한 것들은 덜 깨달은 새로움을 숨기고 있었구나... 새로움이란 새것이 아니라, 묵은 것에 대한 재발견이 아닐까... 깨달음의 미묘한 차이가 곧 나의 사유이자 나의 안목을 지탱하고 있구나...

 

 

 

조환_Untitled_스틸, 폴리우레탄_56×131×78cm_2013

 

조환_Untitled_스틸, 폴리우레탄_185×97×11cm_2013
 

 

그리 오래되지 않은 몇 년 전 어느 미술잡지에서 작가들에게 '내 인생에 오십 대는 무엇인가'를 물었다. 내 대답은 아마 '아직도 기다림' 아니면 '지금도 기다림'이라고 하며, 옛 그림이나 글씨를 베끼다 보면 굳이 겸손해서가 아니라 내 솜씨가 조금씩 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며 언젠가 예측 못할 방법이 있을 거라 주절거린 기억이 난다. 이는 내 시야가 경직되지 않고 유연할 수 있으며 또한 내 작업이 포용하는 경계 또한 넓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전의 작업은 민중을 축에 놓고 역사와 사회가 만든 역학 속에서 그들 삶의 양태를 종이에 모필과 수묵으로 특정한 상황이나 구체적 사건 또는 유의미한 풍경을 표출하려고 노력했다. 허나 우리의 삶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고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말초의 감각과 표피의 실촉성實觸性이 정직하기는 했으되, 그것은 본질이 아니었다.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서 구조적 모순을 환기해보려 했던 내 노력은 왠지 겉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면 그릴수록 갈급하기만 했던 내 몸부림은 허망한 몸짓에 머물고 있었고, 게다가 내 작업은 기능적 한계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더는 내 그림 속의 주인공을 불러낼 수 없었다. 삶은 상관相關이다. 어쨌거나 살아보는 것을 통해 삶을 이해하고 그 이해의 근거를 다시 삶에 반영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니던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궁극적인 물음이 내 작업의 총체적이며 전면적인 재고를 요구하게 되었다.        

 

 

조환_Untitled_스틸, 폴리우레탄_111×72×7cm_2013
 

 

뉴욕에서 5년 동안, 그림그리기와 사이를 두었다. 대신 조소에 힘을 기울였다. 어쩌면 그리기의 도피로서 만들기에 집중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막연하게 시작했던 조소지만, 그것은 습관적으로 또는 맹목적으로 써왔던 먹의 개념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공간에 대한 인식도 새로워졌다. 그것이 자연스레 회화에 영향을 주어 정형화된 사각이라는 틀을 깰 수 있었다. 그렇다고 서예와 옛 그림 등 고전의 세계가 어디로 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에 대한 나의 오랜 경도傾倒는 의식의 변방을 확장시켰다. 내용과 형식이 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듯이 작업의 표현 방식이 점차 달라진다는 것은 내가 삶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 그리고 미적인 직관과 감수성이 달라졌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한편으로, 지루했던 임모臨模 과정이지만 덜 깨달았던 의미를 찾아내는 즐거움도 있었다. 다만 형상의 이루어짐에 현혹되지는 않았다. 그 형상의 태동인 획劃을 보고 점點을 발견하는 일은 곧 '성불 여장(成不如將, 이루어짐은 이루어지는 것만 못하다)' 의 묘체를 체득하는 과정이었다. 본래의 지필묵이 갖고 있는 문화적 개별성을 더욱 심화시키려는 나의 내성은 내 작업의 전 과정을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밝히는 실마리가 되었다.

 

 

 

조환_Untitled_스틸, LED_325×732×338cm_2013

 

 

화선지에 한 점을 찍어본다, 어릴 때 흙바닥에서 하고 놀던 땅 따먹기다. 세력이 팽팽하게 느껴진다. 연결한다. 땅을 넓혀나간다. 언뜻 바둑판이 연상된다. 검은 점과 흰 화면은 계백당흑計白當黑이다. 대립, 충돌, 만남, 화해하는 환영幻影이 보인다. 철판을 놓고 구멍을 뚫는 순간, 구멍 크기만 한 공간이 나타난다. 철판은 그냥 오브제일 뿐이다. 구멍 안의 풍경과 오브제가 만난다. 어느덧 활연관통豁然貫通 한다. 철판으로 대나무 잎을 무수히 자른다. 모양새가 제각각이다. 바야흐로 손을 예찬한다. 이는 흉죽지죽胸竹之竹이 아니다. 완성의 전체를 고려하지 않으려 한다는 게 옳은 말일 게다. 작업하는 자의 주관적인 의식이 고집부리지 않는다. 단순하고 즐거운 노동이다. 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한다. 작업이 얼추 된 것 같다. 상처투성이인 물건을 작업장 구석에 던져놓는다. 자연스레 비를 맞고 이슬을 맞으며 부식되어간다. 나는 가끔 가서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세월의 흔적이 더께처럼 쌓인다. 어느 날 먼지와 오물을 털어내고 투명 우레탄 칠을 해 더 이상의 부식을 막는다. 아니면 흔적을 지우려 검은 칠을 한다. 하지만 깊은 상처의 흔적은 감출 수가 없다. 흡사 인생의 마지막 과정을 치러내는 것 같다. 조금은 허망하다. 아니다! 허망은 허상에 집착할 뿐이다. 철이라는 물질이 얼기설기 엮어졌을 뿐이다. 훗날 그 보잘 것 없는 물건을 벽에 걸고 빛을 비추면 벽과 물건 사이의 공간에서 그림자가 생긴다. 그 그림자와 물건은 중첩되는 또 다른 선들을 만들어 내면서 서걱거리는 바람 소리를 들려준다. 한 폭의 수묵화같이 보인다. 아니, 그 물건이 오롯이 실체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의 작업이 비로소 생성되었다. ● 그 기다림의 과정은 존재의 가치에 대한 질문인 동시에 본래의 모습(本源)인 큰 지혜의 저편 언덕으로 향하는 나룻배를 타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말은 어렵고 글은 희미할 뿐이니 무엇으로 내 손을 대신할꼬. ■ 조환

 

 

Vol.20140103e | 조환展 / CHOHWAN / 趙桓 / sculpture

종부 宗婦 Jongbu_First daughter in law in head lineage family

백지순展 / BEKJISOON / 白智舜 / photography


2014_0114 ▶ 2014_0126

 

 

 백지순_지촌종택이순희종부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0×150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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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0114_화요일_05:00pm

후원 / 한국예술인복지재단

관람시간 / 10:30am~06:30pm

 

류가헌ryugaheon

서울 종로구 통의동 7-10번지Tel. +82.2.720.2010

www.ryugaheon.com

 

 

성불평등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사진 작업을 해 온 사진가 백지순의 세번째 주제인 '종부' 전이 2014년 1월 14일~26일까지 갤러리 류가헌에서 열린다. 2003년 '아시아의 모계사회'展에서 여자로서의 이상사회에 관한 기록을 보여주었고 2008년에는 한국에서의 독립적 감성을 가진 싱글우먼의 생활기록부를 보여주었다. 이번 2014년에 새롭게 보여줄 대상은 종가집 맏며느리인 종부에 관한 사진과 동영상이다. 이 전시에서는 인고의 세월 속에서도 나눔의 미학을 실천하며 전통의 줄기를 잊지 않는, 부계사회 속에서도 주체적으로 실천적 삶을 살아온 종부를 들여다 본다. ● 백지순은 마음 한켠에 넘어서야 할 것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 가정에 여전히 저며 있는 남존여비 사상으로 인한 딸과 아들의 차별, 며느리와 아들의 불평등 대우 등에 대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가정문제를 미시적 세계문제라는 관점에서 모계사회를 그 대안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2003년에 '아시아의 모계사회'로 개인전을 열었다. 주요 일간지에 기사가 났고 유수의 주간지와 월간지에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이후 한국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여자들에 주목하여 2008년에는 '싱글우먼_Woman in the Big League'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가졌다. 싱글 우먼은 자아실현을 위해 공부나 일을 선택한 여자들이다. 인생이 매 순간의 크고 작은 선택으로 이어져 있다면 그녀들은 결혼을 위한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다. 결국 사회적 결혼 적령기에 자아를 구현하는 방법을 선택한 셈이다. '아시아의 모계사회'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사진계의 주목을 받았다. 기록 위주의 다큐멘타리 작업을 하는 동료 사진가들은 나의 작업을 두고 화인다큐라 불렀다. '싱글우먼'에 관한 작업을 하면서 한편 결혼에 의해서만 사회적 존립이 가능했던 시대의 여자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 때는 봉건 시대였고 사회구성체인 가정은 종부에 의해 통솔되었다. 그러자 사라져가는 종부를 기록해야겠다는 의무감이 찾아왔다. 부계사회에서 맏며느리로, 수십 년을 자신을 이루기보다는 한 가정과 가문의 그늘막이 되어준 존재가 종부가 아닌가. 요즘 대부분 종손은 집안의 얼굴로 잘 교육받고, 잘 교육된 여자를 만나, 괜찮은 연봉의 직업을 얻어 도시에서 거주한다. 그러니 젊은 종부는 그 명맥은 잇겠지만 그 역할에 있어서 어머니 대의 것과는 같을 수 없다. ● 종부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하는 전통적인 대가족제도에서 종손을 기반으로 하는 문중의 대표적인 대가족인 종가의 안주인을 의미한다. 종부의 덕목은 봉제사접빈객으로 4대조의 기제사와 불천위제사를 모시며 불시에 찾아온 친인척에게 밥상을 차려내는 것이다. 비단 친인척뿐만이 아니라 먹고 살길이 없는 걸인에게까지 밥한술 봉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종부는 하루가 빠듯한 현대사회에서 제례로써 조상을 받드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실천하는 살아있는 무형문화재이기도 하다. 종부로 인하여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는 살아 숨쉬고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백지순은 전통의 맥의 한 축을 현대사회에서도 꿋꿋하게 지켜나가고 있는 이러한 종부의 모습을 지난 2007부터 2013년에 걸쳐 심도 있게 담아내고 있다. 밀도 있고 신중한 그녀의 작업은 이미 2008년에 강원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비디오작업으로까지 작업의 영역을 확대시켜나갔다. 스틸사진에서는 종부와 종택인 공간의 조화롭고 적절한 배치를 통하여 종부의 삶을 은유적진 표현을 추구하였으며, 동영상작업에서는 종부의 의연한 모습과 고된 일상을 생생하게 담아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

 

 

 

백지순_학봉종택이점숙종부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0×150cm_2012

 

 

백지순_석계종택조귀분종부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0×150cm_2013

 

                                                            백지순_갈암종택김호진종부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2×78cm_2013
 

종부(宗婦): 우리시대 마지막 숭고한 초상 ● 백지순 작가는 현대 여성들의 당당한 삶과 정체성을 다큐멘터리로 작업해 왔다. 『아시아의 모계사회』(2003)는 순수하지만 강인한 모계사회의 부족을, 『싱글 우먼』(2008)에서는 성공한 '골드 미스'들의 삶에 내면화된 사회적인 편견과 잠재적으로 지속되는 가부장적 질서를 독신녀들의 애매한 표정과 불안한 시선으로 포착하였다. 반면에 무형문화재 기록화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작가의 우리시대의 『종부』연작은 부계중심의 전통적인 대가족 공동체의 유대와 친화를 위해 중추적인 역할을 해온 여러 문중의 종부들을 기념사진의 맥락으로 기록한 것이다. 작가는 종부들을 페미니스트의 저항적인 시선으로 남녀 성(性)차로 차별 받은 가부장제의 희생양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점점 사라져가는 전통적인 미풍양속을 지키며 종손과는 또 다른 문중의 중심축으로서 박식한 생활지식, 당당한 리더십, 후덕한 포용력을 겸비한 전문직을 실천하는 종부의 '경계지울 수 없는 또 다른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 이상사회 구현을 위해 조선왕조의 통치체제였던 유교의 조상숭배, 남녀유별, 장유유서와 같은 도덕규범들은 한국 근대사회의 가부장제 원리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와 산업구조의 변화, 부부중심의 핵가족 이념의 수용, 페미니즘 운동에 따라 남성 중심의 부계가족 원리가 약화되고 가부장적 성별 분업의 명확한 경계도 해체되었다. 탈근대사회에서 '가족'이란 핵가족, 일인가족, 다민족가족처럼 점차 다원화, 다양화되어 가고 있어 더 이상 획일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가사와 자녀 교육은 여성의 책임 비율이 높다. 특히 유교를 이념으로 한 가부장적 대가족 제도에서 종부는 숙명적으로 조상 제례를 비롯한 문중의 접객처럼 가족 공동체를 위한 의무와 책임을 갖는다. 그렇지만 작가는 종부들의 책임감 있는 행동이 '단순한 가사 노동 너머 하나의 '직업'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즉 아내, 며느리, 어머니와 같은 다중적인 모습으로 구조화 되어가는 종부의 정체성 외에 문중을 위한 과중한 업무가 단순한 가사노동이 아니라 가족공동체 간의 화목을 위한 사회적 행위로 기록한 것이다. 작가는 엄정한 기념사진의 방식으로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의 미풍양속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온 종부의 무형문화재적 가치를 種宅의 안채, 사당채, 안마당, 뒷마당을 배경으로 카리스마 넘치는 기품으로 가시화 하였다. ● 우리사회에서 근대가족의 형상은 서구와는 달리 근대적 요소와 전통적 요소가 공존하기 때문에 핵가족화의 이상화보다는 가부장적 전통이 잔존한다. 종부는 전통적인 미덕을 살려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재생산되는 성별 위계를 간과하거나 은폐하는 것을 지연시킨다. 근대사회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여성의 가사노동을 무가치하고 사적인 것으로 치부하여 왔기 때문에 여성운동가들은 헌신적인 모성신화를 상품화한 이미지의 허구성을 해체하고 여성들의 주체적 경험을 강조해 왔다. 그런데 작가가 더 나아가 종부들이 실천하는 기제사, 봉제사(奉祭祀)를 자기희생적인 가사노동으로 보지 않고, 자기주도적인 또 다른 사회활동임에 주목하게 해준다. ● 가계의 혈통만큼이나 오래된 역사를 입증하는 고색창연한 種宅에서 정갈하게 정돈된 가재도구, 식재료와 함께 당당하고 여유 있는 모습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종부들의 모습에서 남성적인 기백과 단호함은 물론 여성적인 단아함이 잘 조화되어 경계지울 수 없는 초상과 마주하게 된다. 다시 말해 백지순은 종부들에게서 남성의 사회적인 노동에 비해 차별받았던 여성의 주변적인 역할 넘어 전통적인 대가족제도의 사회적 가치를 발견하게 해준다. 따라서 우리시대의 『종부』는 유교의 가부장적 규율로 구조화된 모습이라기보다는 '우리시대 마지막 숭고한 초상'이라 할 수 있다. 강인하고 당당한 풍채에 내재화된 '명확히 규정하고 한계지울 수 없는 힘'은 오랜 시간 기제사의 책임에 따른 노고, 대가족과의 갈등과 긴장을 지혜롭게 극복해온 결과물일 것이다. ● 작가는 우리시대의 『종부』 작업을 통해 탈근대사회가 주장해 온 다원주의의 외침 속에서 점점 해체되어 가는 가족 공동체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의미와 기능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해준다. 아울러 조상숭배, 대가족의 연대와 화목을 위해 부단히 실천해 온 '종부'의 대내외적인 활동이 지닌 미풍양속의 의미를 되새기며 새롭게 인식되고 보존해야 할 전통문화의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하게 해준다. ■ 김화자

 

 

백지순_춘우재종택조동임종부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2×78cm_2013

 

백지순_김윤기가옥심순옥종부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52×78cm_2008

 

                                                      백지순_병곡종택박규임종부_아카이벌피 그먼트 프린트_52×78cm_2012
 

 

나는 왜 종부를 기록하게 되었는가? 어렸을 적 외할머니께서는 식구들의 밥을 다 푸시고는 한 켠에 또 한 무리의 밥을 재워두셨다. 그것은 언제 찾아올지 모를 손님과 걸인에게 줄 밥이었다. 어렸을 적엔 집집마다 할머니들은 다 그렇게 하시는 줄로 알았는데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외할머니는 소종가의 종부셨기 때문에 그리하셨던 것이다. ● 종부의 덕목 중의 하나가 접빈객 接賓客으로 일가친척이 언제 어느 때 예고없이 찾아와도 기쁜 마음으로 따뜻한 밥상을 차려내어야 했으며 거기서 더 나아가 연고도 없는 걸인이 걸식을 원할 때도 밥과 반찬을 내어 주었다. 그러면 종부는 부잣집 맏며느리라서 그리한 것인가? 물론 부잣집도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중류층 정도의 외갓집에 시집오신 외할머니는 "먹을 것 다 먹고 언제 남을 도와주겠느냐?" 하시며 항상 밥을 한 쪽에 남겨 두셨다. ● 종부의 덕목 중의 또 다른 하나는 봉제사 奉祭祀 이다.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우리 집에는 항상 약과나 강정과 같은 전통과자 등이 끊이질 않았다. 우리집엔 기제사만 일년에 아홉번이었다. 그런데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지역의 종부들을 만나보았더니 기제사만 열두번 이상이다. 이쯤되면 종부는 직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다. ● 종부는 산업자본주의시대의 해체된 가족제도 속에서도 여전히 신앙처럼 받들어지고 있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제례로써 조상을 받드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실천하는 살아있는 무형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가족 공동화 속에서도 우리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전통을 잘 가꾸며 꿋꿋하게 종부의 덕목을 실천해 나가는 강인한 여성의 또 다른 이름, 종부를 소중히 기록하여 후손이 본받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 백지순 

 

     

Vol.20140114a | 백지순展 / BEKJISOON / 白智舜 / photography


 

한국 아날로그의 현재

한국근대사진과 현대사진의 만남 Ⅱ展

2014_0110 ▶ 2014_0304 / 월요일 휴관


 

정해창_뒷모습여인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95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4_0110 ▶ 2014_0128

참여작가 / 정해창_구본창

 

2014_0206 ▶ 2014_0304

참여작가 / 서순삼_민병헌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트렁크갤러리

TRUNK GALLERY

서울 종로구 소격동 128-3번지Tel. +82.2.3210.1233

www.trunkgallery.com

 

2014년 트렁크갤러리는 이제 7주년을 맞는다. 앞만 바라보며 Contemporary Art 만으로 사진의 현재를 대변하겠다는 트렁크갤러리의 의지가, 오늘 여기에 이렇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난 7년을 뒤돌아보면서 미술시장이 갖는 사진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에 도전하겠다는 그 의지의 미숙함에 스스로 부끄럽지만, 그 겁 없음으로서 오늘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아직 할 일들이 많아 기쁘게 생각한다. 2013년에 이어『한국 근대사진과 현대사진의 만남』展, 그 두 번째 전시를 또 진행하게 되었다.『한국 아날로그사진의 현재』라는 소주제로 사진 3세대, 구본창과 민병헌의 아날로그 프린트 사진전을 기획하였다. 한국미술시장에서 아날로그사진의 컬렉션문화, 그 싸늘함의 원인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그 이유를 찾아내 보려 한다. 그 간 "Contemporary Art"로의 사진과 우리시대의 PhotoArtist들에 대한 지지와 지원만이 관심이었던 트렁크갤러리가 아날로그 프린트의 소중함을 호소하고 새롭게 관심을 모아보기 위해서다. 급속한 사진산업의 디지털 프로세스화된 오늘, 아날로그로 프린트된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에 대한 소중함을 새롭게 일깨워 내는 것도 트렁크갤러리의 할 일 같아서다. 사진선배들의 Photo Art Work을 재조명 한다는 것, 우리시대의 아날로그 PhotoArt Work들을 선보인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의 사진1세대와 사진2세대를 거처 사진3세대로 불리는 작가 두 분의 작품, 아직도 아날로그작업을 꾸준히 해 온 바로 사진3세대 두 분의 Art Work을 자랑하며 1세대와 3세대의 만남 전을 하려 한다. ● 어제는 오늘의 표본이다. 어제 없이 오늘을 이루어 낼 수 없었다는 것 그 것은 너무 당연한 생각이다. 그 것은 1세대사진가들이 당대에 어떠한 상황에서 작업해 왔는가를 살피며, 이제 3세대는 그들과 어떻게 다른 사유체계 갖고 있는지를 살피며 그 차이들을 비교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할 것 같아서 이다. 이 차이의 비교는 오늘의 과제를 새롭게 받아들이는데 또 다른 창의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들의 선배인 1세대들은 오늘에 비해 모든 것이 풍부하지 못하였지만 당대에 최대의 창의력 주체들 이였다. 부단한 노력으로 풍성하지는 못하나 극한 의 노력으로 해 낸 작업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작품들이 제대로 보존되어지지 못해 겨우 일부만의 유작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만을 다행으로 감사 할 뿐이며, 또 그 시대 창작활동이 어떠했나를 감지 해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미처 인식하지 못해 오늘의 컬렉션문화에서 소외 되어지고 있는 아날로그사진 그 Photo Art Work들을 자랑하고 싶다. 우리의 근대사가 복잡했었기에 1세대의 작업이 잘 보존되지 못 했음을 반성하며 아날로그사진들을 위한 보존의 소중함을 더더욱 강조하며 컬렉션문화에 새로운 과제, 바로 "한국 아날로그사진의 현재"가 바르게 소통되어지기를 희망 한다. ● 오늘 사진산업은 아날로그사진을 위한 모든 미디어들이 완벽하게 무너져 가고 있다. 필름도, 인화지도 그리고 약품들까지 그 생산이 미미하다. 우리들에게 오늘의 디지털이미지시대를 가능하게 한 바로 그 아날로그이미지로의 미디어들에 대해 감사와 예찬을 말 해 보지도 못한 체 묻혀버릴 것만 같아 트렁크갤러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생각이다. 한국의 모던한 Photo Artwork들이 아직도 각 작가들의 Photo Box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세계적 옥션들에서는 아날로그사진의 컬렉션이 활발하다. 그런데 우리 미술시장의 컬렉터들은 잠잠하다. 이해가 부족해서 인지 반응이 너무 냉랭하다. 수공이미지로의 회화에 대응해 발명된 화학이미지로의 아날로그사진, 그에 대한 예찬이 있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갈 길, 그 앞이 안보인다. "한국 아날로그사진의 현재"라는 전시는 그래서 또 다른 도전이 된다. ● 트렁크갤러리는 2013년 1월에 민충식과 현일영에 강운구와 주명덕을 조우 시켜내었다. 한국사진 1세대가 어떤 2세대를 배출 해 냈었나를 살폈던 것 이다. 이제 2014년 1월은 정해창과 구본창의 "정물"에 대한 사유의 비교와 작업의 형식차이를 살펴볼 수 있고, 2월은 서순삼과 민병헌의 '누드'에서도 역시 서로 다른 두 세대가 여성의 몸에 대하는 사유와 작업의 형식의 비교는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사진작품을 아직도 아날로그프린트를 고수하는 작가 구본창과 민병헌은 작업의 본질, 내용과 이미지로의 효과를 위해서 아날로그 인화지가 주는 그 깊은 맛을 포기할 수 없다고 고집한다. 이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 져 하는 '멋'을 그래서 더 자랑하고 싶다. 지금 오늘의 현실에서 너무나 귀한 아날로그사진. 그 컬렉션에 대한 바른 질문을 유도하려는 의도에서 이기도 하다. ■ 박영숙

 

 

구본창_Breath 01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95

 

 

구본창_Object 07-1-C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04

 

2014 / 01. 정해창 : 구본창의 '정물'사진 조우 ● 트렁크갤러리에서 2014년 1월전으로는 정해창의「인형의꿈 (1),(2)」그리고「정물 (1),(2)」를, 구본창의「정물」시리즈를 조우시켜 내려 한다. 정물이란 본래 한 개인이 한 사물에 대한 사유에서 시작된다. 작가가 그 오브제에서 느끼게 되는 어떤 상징적 너레이티브를 읽어 내어, 그 이야기를 이미지로 표현 해 내고 싶은 충동이 곧 '정물'작업이다. 그 대상과의 사유에서 말 하지 않는 대상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르게는 작가의 정신세계나 은밀한 내면세계를 반영하듯 그 작가와 작품이 등가적으로 느껴지는 은밀함이 정물사진의 큰 묘미로 흥미로운 지점이다. 우리민화들에서 활용되는 오브제들은 기원의 상징체계로 이미 깊게 자리 맥임 하고 있음도 미학적 관점에서 받아드릴 수 있어 '정물'작업의 본질을 읽게 한다. "...예술사진 운동시대(1920~1940)의 작가 정해창의 작업은 "우리문화가 온통 외래문화홍수에 허우적 거릴 때 사진을 통해서 진정 우리체질에 맞는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실험하고 표현하려 애썼다..." (박주석, 새롭게 태어난 근대작가 5인의 사진세계 한미출판 글에서) ● 정해창의 "인형의 꿈"은 그 시대의 불가능을 가능으로 읽어내려 한 정해창의 꿈, 그 것 이었다 싶다. 반면 구본창의 '정물' 시리즈는 그가 유럽유학시절 만났던 벼룩시장의 오브제들로 작가의 정서, 또는 그 감각반응을 읽어내게 한다. 작가 만의 내면세계, 그 비밀스러운 세계를 캐어 내 볼 수 있어 더욱 흥미로울 수 있어 즐겁다. "죽음 앞에 힘겨워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며 '숨'이라는 단어를 떠 올렸다. 나는 사멸 될 수 밖에 없는 모든 것들을 기리며, 이 시리즈를 제작했다. 스페인 여행 중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시계, 망가진 시계이지만 그 가냘픈 시계바늘이 내 시선을 끌었다." (구본창)

 

서순삼_누드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50년대

 

2014 / 02. 서순삼 : 민병헌의 '누드'사진 조우 ● 서순삼 선생님은 1903년 생으로 1928년 평양사진조합을 창설하고 서울에 결성된 경성사지협회의 회원들과 교류를 활발히 했었다. 1930년에 평양에서 개인전을 한, 그는 정해창 다음으로 그 시대에 개인전을 한 작가였다. "많은 작품이 지금 보존 되어지지 못해,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없어 안타깝다. 릴리프기법 또는 고무인화기법, 브롬오일 인화들 다양한 사진기법적 실험을 많이 한 작가로 직업적으로는 저널리즘을 추구하였지만 예술사진에 많은 실험들을 한 기록이 남아있고, 그의 작품세계를 대변하는 이곳 저곳에서 발견되어 서순삼의 작품세계를 대변하고 있다..." (박주석, 새롭게 태어난 근대작가 5인의 사진세계 한미출판 글에서) ● 서순삼의 '누드'와 민병헌의 '누드' 그 조우는 또 다른 차원, 사진예술에 대한 그 맥락은 다양하다. '누드'란 남성사진가들이 제일 좋아하는 작품 소제이다. 여성을 대상화 한 오브제로의 전통 또한 회화에서나 사진에서 그 양상은 다양 하다. 여성의 몸이 벗겨진다는 것은 남성들에게는 섹스에 대한 호기심에 기초하여 발생하기에 그 형식도 서로 차이가 많다.

 

민병헌_74MG187 BHM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10

 

민병헌_MG247 BHM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10

 

그런데 오늘날에는 여성의 몸, 그 것, 몸이라고 하는 대상은 같지만 'Nude' 와 'Naked'의 언어적 개념은 미학적 차이를 크게 다른 맥락으로 읽게 한다. "누드(Nude)"가 여성의 몸을 대상화 한, Sexuality와 관계 맺고 있다면. 옷을 벗은 '여체' "Naked Bod"는 Sexuality 와 관계 맺기 보다는, 몸을 통한 성 정체성이거나 정신에 대한 육체를 말하려 하는 몸, 그 몸 담론의 장 으로의 기능하는 미학적 태도로 읽히게 하는 그 차이가 크다. 두 사진가 '서순삼'의 '누드'는 다분히 여체를 탐하는 남성의 시각이 분명한데 비해, '민병헌'의 '누드'는 여체의 조형성과 그 몸에서 묻어나는 표현의 수단, 몸을 통한 감성적 표현에 호소함이 더 강하다. "...민병헌의 '누드'는 신체가 아니라 피부가 중요하다. 피부가 대지처럼 펼처져 있거나 공기처럼 흐르고 있는 사이사이에 체모나 유두가 자리하고 있다. 섬세한 피부의 질감이 더 잘 보이도록 톤을 조율했다..." (박영택, 열화당 출간 민병헌 책 글에서) ● 두 작가의 삶의 시대가 다르므로 여체에 대한 관심과 여체를 통해 표현되어짐의 그 차이가 우리들의 사유체계와 사유의 실체로 들어나, 그 다른 지점을 만날 수 있어 참 좋은 조우의 표본이었다. 두 작가 모두가 여성을 생각하는 방식, 그 여성의 몸을 다르게 읽는 차이에서 'Nude' 와 'Naked'의 그 차이를 밝힐 수 있는 이 기회 또한 좋았다. ■

      

Vol.20140110e | 한국 아날로그의 현재-한국근대사진과 현대사진의 만남 Ⅱ展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展··· 서울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 17일 개막

 

 

박수근 '고목과 행인', 1960년대, 캔버스에 유채, 53x40.5cm /사진제공=가나아트

 

"괜찮아, 괜찮아"
박수근 화백이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던 말이란다. 그의 장남 박성남씨(67·서양화가)는 아버지를 회상하며 "'괜찮아'라는 말은 아버지의 트레이드마크였다"고 했다.

1950년대 고단한 시대를 살았던 화가는 서민들의 정서를 그렇게 보듬었고,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에도 몸 녹일 따뜻한 아랫목이 있다는 것이 고마웠고 화우들과 낱개 물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대다수의 동네사람들이 인정하듯 '무능력한 성남이 아버지'라 불려도 괜찮았다. 당시 누가 그의 정신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겠나.

올해로 박수근 화백의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1914년 그가 태어난 때는 우리 근대미술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다. 바로 전 해에 춘곡 고희동이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칭호를 받았으니 그 시절 태어난 박수근이 성장해 이룬 업적은 곧 우리 근대미술의 성과인 셈이다. 그의 예술세계를 되짚어보기 위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다. 오는 17일부터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그가 남긴 유화 작품 90여점과 수채화·드로잉 30여점 등 모두 120여점을 만날 수 있다. 역대 최대 규모의 기획전이다.  

 

박수근 '빨래터', 1959, 캔버스에 유채, 50.5x111.5cm /사진제공=가나아트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의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故 박수근 화백)

'국민화가'로 칭송받기 이전 박수근 화백은 '서민화가'로 일컬어진다. 남루하고 가난했던 그의 삶도 서민 그 자체였고,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모두 서민의 일상이다. 골목길 풍경, 일하는 여인, 장터의 여인, 기름장수 여인, 아기를 업은 소녀, 공기놀이 하는 소녀들···.

그는 남자보다는 여인과 소녀들을 주로 그렸다. 당시 억척스러움으로 시대를 버텨내야 했던 것은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연약하지만 지혜롭고 어진 마음으로 가정을 돌보며 이웃 간에 정을 나누는 주체인 아낙들의 모습에서 민족의 희망을 발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희망을 화려한 색감이나 화사한 꽃, 인물들의 밝은 표정으로 담아내진 않았다.

대표작 '빨래터'(1960년대 초)를 보고 있으면 그렇게 덤덤할 수가 없다. 바위 질감의 재료가 주는 무게감도 있지만 빨래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결코 화기애애하거나 수다스럽지 않다. 심지어 물소리도 멈춘 듯하다. 하지만 묵묵히 빨래하는 모습에서 얼룩지고 때 묻은 시대의 고난을 깨끗이 지우고픈 서민들의 애환과 희망은 더 뜨겁게 전해진다.

박수근 그림에 나오는 벌거벗은 나무의 의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뭇가지에 돋아나는 잎새 표현에도 인색했고 꽃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모란꽃'과 '목련'을 남겼지만 두 작품 모두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애잔한 흰 꽃들이다. 가진 것 없이 외롭고 고단한 삶을 받아들인 채 조용히 새 봄을 기다리는 서민들의 간절한 희망을 그는 그리고 또 그렸다.
 

박수근 '책가방', 수채화, 25x31cm /사진제공=가나아트

 

박수근의 예술세계를 말할 때면 독특하고 매력적인 유화 작품이 크게 주목받지만, 수채화 역시 아름답고 완성도가 높다. 그의 수채화 작품 '고무신' '책가방' '과일쟁반' '복숭아' 등은 그 시절 서민들의 일상이 눈에 그려질 정도로 정겹고 서정적인 소품들이다. 고무신은 아내가 새로 사온 꽃신이었고, 책가방은 동덕여고 다니던 딸의 가방이었다.

인간정신의 고귀함을 사상이나 논리가 아닌 평범한 인물과 사물에 대한 지극한 애정으로 표현했기에 '서민화가'이지만 그림 값은 가장 비싼 화가로 남게 된 것이 아닐까. 소박하고 남루했던 그의 삶, 그리고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오롯이 들여다보게 할 박수근 화백의 작품들은 일상에 쫓겨 각박해진 우리네 마음도 다시 한 번 챙겨보게 한다.

전시는 오는 3월16일까지 59일간 휴관 없이 열리며, 매주 수요일은 저녁 9시까지 개관한다. 무료 특별강연도 열린다. △1월 19일 오후 2~4시 유홍준 △1월 24일 오후 2~4시 박성남 △2월 22일 오후 2~4시 윤범모 (사전신청 없이 현장에서 선착순 50명). 티켓은 일반 1만원, 초등학생 6000원. 문의 (02)736-1020. 


 

박수근 '과일쟁반', 1962, 수채화, 25x31cm (왼쪽). '청색 고무신', 1962, 수채화, 20.5x30.5cm /사진제공=가나아트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앞서 부친 회고
1월 17일부터 3월 16일까지, 관훈동 가나 인사아트센터에서
'빨래터' 등 희귀작 포함 120여점 전시
총 작품가만 약 1000억원

박성남 화가가 부친 박수근 화백이 그린 자신의 어릴 적 초상화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가나아트센터)

[이데일리 김인구 기자]

 “아버지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가장 한국적인 화가였다.”

박수근 화백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열리는 기념전에 앞서 박 화백의 아들이자 화가인 박성남(66)씨가 부친을 회고했다. 박씨는 7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간담회에 참석해 부친의 그림과 거기에 얽힌 사연을 하나 하나 소개했다.

박씨는 “아버지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담백하고 솔직한 예술관을 갖고 있었다”며 “그래서 평범한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즐겨 그리는 등 예술관을 그림으로 실천했다”고 말했다.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은 17일부터 3월 16일까지 관훈동 가나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다. 평창동 본사 전시장 대신 관훈동을 택한 건 이옥경 가나아트센터 대표의 의지였다. 평창동보다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고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인사동 거리에서 우리나라의 대표 작가 작품을 선보이고 싶었다.

전시되는 작품은 근래 들어 가장 많은 120여점. 주로 개인 소장가들에게 빌렸으며 총 작품가만 1000억원을 넘는다. 특히 위작 의혹이 제기됐던 ‘빨래터’를 비롯해 그동안 화집으로만 접했던 ‘시장 사람들’(1950), ‘노인과 소녀’(1959), ‘귀로’(1964) 등을 볼 수 있다.

박씨는 “평생 개인 화실 하나 없이 창신동 집 마루에서 그림을 그렸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감상에 빠지곤 한다. 그런 그림들을 모아 이번에 다시 서민 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기쁘다”고 덧붙였다.


전시가 개막된지 45일만에서야 차기율씨의 '순환의 여행/ 방주와 강목사이 2013'을 관람할 수 있었다.
두 달 간이나 이어지는 장기 전시는 틈이 날 때 가볼 수 있는 이점이 있는 대신 미루다 보면 자칫 놓치기 싶다.
미루고 미루다 지난 주말에야 시간을 내어 조계사 옆에 자리잡은 'OCI미술관'을 찾았다.

전시장 문을 열자 마치 박물관에 들어 선 것 같은 태고의 장엄과 침묵이 느껴졌다.
1,2,3층을 가득메운 웅장한 작품들에 일단은 머리가 숙여졌고, 벽에 걸린 그림들도 너무 좋았다.
부유하는 영혼을 향한다는 작가 의식은 그 다음 문제이고, 방대한 분량의 작업량과 치밀하고 섬세한 손길에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선시시대 유적같은 돌 조각이나 나무넝쿨같은 덩어리의 엉킴에도 혼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에 공감이 되고,
작가의 작업 밑바닥에는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미술평론가 고충환씨의 말에 수긍이 됐다.

이 전시는 오는 1월15일까지 전시되니 꼭 한 번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서양으로 상징되는 문명과 동양으로 상징되는 자연을 화해시키고 종합(요새 말로 치자면 융합)을 실천한다는 의미이며 의지의 표명이 아닌가.
서양과 동양을 화해시키고 문명과 자연을 융합시킨다? 이렇게 주제를 풀어놓고 보니 불현듯 작가의 작업의 스케일이 보인다.
신이 죽고 형이상학이 죽은, 진리가 죽고 진실이 죽은, 선이 죽고 악이 죽은, 주술이 죽고 신비가 죽은 미시담론의 시대며 표면의 시대
그리고 무미건조한 논리의 형해들이 실재를 대신(대체?)하는 시대에 들려주는 거대담론의 메시지라고나 할까.
그 의미며 울림은 그래서 오히려 더 크게 와 닿는다" -고충환-

 

 

 

 

 

 

 

 

 

 

 

 

 

 

 

 

 

 

 

 

 

 

 

 

 

 

 

 

 


명랑한 기억

2013 Flux展

2013_1226 ▶ 2014_0121 / 1월1일 휴관

 

 


구현모_Decalcomanie_비디오_00:06:47_2010

초대일시 / 2013_1226_목요일_06:00pm

참여작가구현모_노석미_노정하_사타_홍인숙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공휴일_11:00am~07:00pm / 1월1일 휴관


갤러리 룩스GALLERY LUX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Tel. +82.2.720.8488

www.gallerylux.net


『명랑한 기억』은 단편적인 삶 속에서 의미 있는 순간을 발견하고, 이를 시각이미지로 환원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모았다. 그들이 생산한 시각이미지 뿐만 아니라, 작업의 모티브로 작용하는 태도에 주목하고자 한다. 우리는 삶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맺고, 평범한/특별한 사물과 풍경을 마주한다. 인간관계, 일상의 사물과 풍경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에 잠기게 하고, 무수한 말들을 쏟아내게 한다. 무엇보다 그러한 경험에 의해 특수한 감정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그 감정에 따라 삶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사소하고/ 우울하고/ 고단하고/ 외롭게 느껴진다. 어떤 이는 전자보다 후자의 감정을 빈번하게 느꼈을지 모른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우리가 '삶'에 대해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은 이미지를 근거로 '삶'을 판단하기 때문에 후자를 친숙하게 느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무의미한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유의미한 이미지를 기억하지 못해 삶이 사소하고/ 우울하고/ 고단하고/ 외롭게 느끼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진단에 따라 처방을 내린다면, 의미 있는 순간들을 흐리지 않게, 밝고 환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시각이미지는 대상을 기억하거나 경험을 보전하기 위해 고안된 방식들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시각이미지를 생산하는 이들은 보통의 사람보다 주어진 삶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망각되기 쉽지만 의미 있는 순간을 포착한다. 반복되는 것과 결코 반복될 수 없는 것들이 공존하는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생각하고, 반성하는 차원으로 나아간다. 결과적으로 일상이라는 얇은 표면에서 발견되는 미세한 차이와 굴곡을 읽어내 '지금-여기'를 보여준다. '지금-여기'란 커다란 테두리인 거대담론일 수도 있으며, 미묘하고 개인적인 미시담론일 수도 있다. 『명랑한 기억』은 담론의 형태보다는 평범한 순간의 이미지로, 밝고 유쾌하면서도 우울하고 진부하게 다가갈 것이다. 그러나 이를 명랑하게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하게) 시각화하는 구현모, 노석미, 노정하, 사타, 홍인숙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태도를 닮은 시각이미지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며, 우리에게 '괜찮다'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 우리의 삶은 명확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상투성과 그로부터 오는 우울함을 견뎌내기 위해서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하게' 유의미한 이미지를 기억한다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낼 수 있을 것이다. ● 구현모의 영상작업은 일상생활에서 마주했던 사물이나 풍경을 관찰한다. 천천히, 그리고 조용한 '움직임'에서 우리는 삶 속에서 '시간'이란 선택적인 동시에 지속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또한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향하여 열려진 순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은은하게 담아내는 방식은 관자의 기억과 생각이 중첩시킬 수 있는 틈을 만든다..

 



노석미_우리지금만나! 당장만나_종이에 아크릴채색_25×19cm_2011


노석미는 일상의 사물과 풍경, 어구들을 작은 화면에 그린다. 집 주변의 나지막한 야산, 동네 어귀, 먹을 거리, 고양이 같은 동물, 혹은 '우리지금만나! 당장만나!'. '왜 길 위에 있나요? 길 위에서 많이 배우니까요.' 와 같은 평범한 어구들이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 속의 이미지들이 발견되고 따뜻한 시선으로 시각화된다.

 


노정하_14st of Manhattan_핀홀, 디지털 프린트_45×105cm_2010


노정하는 핀홀 카메라로 여러 장소들을 촬영했다. 그 장소는 단순히 3차원의 형태가 아닌, 공간 안에 존재했던/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와 유기적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일상적인 장소는 우리의 순간들과 기억들이 겹겹이 쌓아진 공간이다. 특히 핀홀 카메라의 흐릿하고, 어둑한 느낌은 우리를 꿈을 꾸는 듯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사타_SaTAND ZOO #06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80×80cm_2013


사타의 작업은 유년시절 키웠던 병아리로부터 시작된다. 병아리를 온전하게 성장시키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도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스스로 견고하게 쌓아 올렸던 두려움의 벽을 허물어냈다. 사타의 기억 속의 닭은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삶 속에서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마음의 벽을 허물면서, 닭은 치유와 성장의 표상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그는 작업 속에서 동물과 자신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등장시키며 과거의 기억을 유희한다.

 


홍인숙_옛날식행복-나무가 옆에 있으면 그 어떤 것도 외롭지 않다_드로잉, 지판화_130×76cm_2009


홍인숙의 그림은 삶의 무수한 인연들 사이의 관계망에서 파생된 기억을 일상적으로 담아낸다. 어린 시절 즐겨 그렸던 그림처럼 누구에게나 친숙한 것을, 한편으로는 무심히 여겨졌던 것을 드로잉과 종이판화의 방법론으로 담아냈다. 종이 위에 먹지, 연필 등을 이용해 드로잉을 하고, 종이를 조각 조각 오려 판을 만들어 잉킹을 하는 종이판화 작업 과정은 일상에 대응하는 태도를 되돌아보고, 기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깨닫고, 반성하는 마음, 그리고 무수한 마음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 갤러리 룩스

Vol.20131226e | 명랑한 기억-2013 Flux展

미인도

이동연展 / LEEDONGYEON / 李東娟 / painting

 2014_0101 ▶ 2014_0114

 


이동연_환유(幻遊)_장지에 백묘 부분채색_162×122cm_2013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510a | 이동연展으로 갑니다.

이동연 블로그_http://blog.naver.com/ldyeon701


초대일시
/ 2014_010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GANA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Tel. +82.2.734.1333

www.ganaartspace.com


작가 이동연은 동양화과 출신으로, 전통적인 조형기법과 현대적인 감각을 접목한 미인도를 통해 자신을 찾아간다. 그는 동양화과 출신답게 꼼꼼하고 간결한 전통적 기법을 갖추었는데,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작가만의 다져진 안목과 필력을 통해 우리가 작품을 보는 순간 작가와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한다. 여류화가라는 이름이 점점 사라져가는, 어쩌면 이 시대의 마지막 여류화가로서의 목소리를 작품을 통해 호소하는 듯한 절박감은... 아마도 신세대에는 더 이상 나올 수도, 불려질 수도 없는 여류화가로서의 마지막 외침인지도 모르겠다.

 


이동연_가벼운 짐?_장지에 담채_162×122cm_2013

 

 

이동연_야단법석(野壇法席)_장지에 담채_162×122cm_2013

 

 

이동연_고요_장지에 담채_162×122cm_2013

특히 작가의 미인도에서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인물들의 눈이다. 전신사조는 동양화의 정통기법 중 초상화를 그릴 때 가장 중시하던 가치이다. 곧 초상화가 형상재현에 그쳐서는 안 되며 인물의 정신까지 담아내야 한다는 것. 작가의 미인도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행위 이전에 눈동자를 먼저 주시하도록 하는데, 이 눈동자에서 우리는 작가를 발견한다. ● 미인도는 조선 중기이후 풍속화의 형태를 빌려서 발전한 그 시대의 여성상을 그린 장르이다. 작가는 미인도의 Originality를 그대로 작품 속에 반영함과 동시에 시대를 재조명한다. 다듬어지지 않은 옷고름 사이로 흘낏흘낏 드러나는 속살과 하얀 속치마 속으로 드러난, 그러나 과감히 벗기지도 못하는 작가는 그런 갑갑한 미인에게 소통의 도구를 쥐어준다. 미인은 핸드폰을 들고 있거나 음악을 듣거나 하며 사회와 소통한다고 믿지만, 기실 그러한가? 작가는 소통되고 있으나 소통되지 못한 단절된 사회 속의 여성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동연_동심(童心)_장지에 담채_122×162cm_2013

 

 

이동연_혼자, 아니면 둘_흑피운용지에 담채_162×122cm_2013

여성작가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아내로서... 특히 화가의 아내로서의 역할은 여성작가를 참 많이도 힘들게 했나 보다. 2007년 개인전 『호접지몽』에서 작가는 그의 이런 삶과 그림의 관계를 잘 보여준 바 있다. 아이가 잠든 틈을 타서 밤새 작품의 세계로 들어가고픈 화가엄마는, 죽어도 놓지 못하는 붓을 잠이 들어도 쥐고 있다. 그리고 꿈속에서는 화가남편의 작품 위에 편안히 기대어 붓질하는 자신을 그려 본다. ● 회화는 정해진 공간 안에 작가의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작지만 큰 공간이다. 그 큰 공간은 관람객이 작품을 이해하고 함께 교감을 나누려고 하는 준비된 마음만 갖춘다면, 전문가 혹은 작가도 보지 못한 부분마저도 좀 더 자유롭고 부드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교감이야말로 경계를 지을 수도 관계를 규정할 수도 없는 만남이 될 것이다. ● 작품과 작가, 작품과 관람객 등의 관계는 어느 한 쪽만으로 환원되지 않고 또 다른 현존의 무엇인가와 관계를 맺으면서 '차연된 만남'으로 한없이 지연되고 연기된다. ■ 크리스틴 박

 

 


이동연_빈자(貧者)의 섬_한지에 발묵채색_119.5cm_2013

 

Artist Lee Dong-Yeon, who has roots in Oriental art, finds herself through 'the portrait of a beauty', engrafting modernistic senses onto traditional formative techniques. She possesses meticulous and concise traditional techniques representative of Oriental artists. This is coupled with her own skilled discernment and refined brush strokes, allowing the viewers to communicate with the artist as they view her paintings. She is perhaps the last of the female artist line in a society in which such phrase is rarely used. The desperateness found in her paintings may be a last cry from a line of 'female artists'; a somewhat outdated label in the modern society. ● The eyes of the models are features that stand out in her paintings The idea of 'Jeon-Shin-Sa-Jo(傳神寫照)'; that a portrait painting must depict not only the physical form, but the spirit that embodies it as well,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values amongst traditional Oriental art techniques. When we view her paintings, we are drawn to the model's eyes before we take in what kind of physical actions the model is taking. In the eyes, we can find the artist herself. ● 'Portrait of a beauty' is a genre of art that developed from the paintings of the mid Chosun dynasty. She portrays the originality of 'the portrait of a beauty' as well as recasting a light upon the period in her paintings. The beauty's bare skin beneath her rumpled breast strings and her thin white underskirt is somewhat visible, but at the same time, her clothes are not taken off completely by the artist. This kind of frustration imposed to the model is alleviated by the method of communication given to her by the artist. The model believes that holding a cell phone or listening to music allows her to connect to the society, but is this the truth? The artist paints a picture of a woman who is communicating with the society, but is at the same time, also cut off from the society. ● Amongst her many roles such as a female artist, as a mother, and as a wife, her role as a wife probably gave her a lot of hardships. In her 2007 private exhibition 『Zhuangzi's Dream of Butterfly(胡蝶之夢)』, she portrayed the relationship between such lifestyle and her paintings extremely well. The artist/ mother who longs to delve into the world drawn in her paintings after her child goes to sleep holds on to her brush even in her sleep. Furthermore, in her dream, she also draws herself painting comfortably leaning against the painting her husband drew. ● The painting is a small but large space in which the artist reveals her inner world. If the audience is open to understanding the painting and to communicate with the artist, they will be able to see freely the parts of the painting that experts, and perhaps even the artist herself, was not able see. Such a communication will be one where borders and relationships are not able to be defined. ● Relationships like those between the work of art and the artist, and that between the work of the art and the audience do not revert to one specific side, but create a relationship with some other existing thing. This results in a 'Rencontre différante'; a combination of differing and deferring that is forever delayed and postponed. ■ Christine Park

     

Vol.20140102a | 이동연展 / LEEDONGYEON / 李東娟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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