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부산에 사는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꼭 서울 나들이를 한다. ‘최우선 순위의 일’은 우리의 동인들을 만나는 일이다.

언제부턴가 40년 만에 우리는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인사동에 있는 한 찻집이 우리의 아지트다. ‘우리’란 문학을 시작할 때 한데 모였던 동인들. 나까지 포함해 이제는 칠순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들.

K는 젊은 시절 희귀병에 걸려 삶의 좁은 골목길을 유난히 힘들게 걸어, 이제 겨우 빠져나온 것 같다. 독실한 가톨릭 시인인 그는 ‘용서’라는 한 마디 말로 인생을 요약할 줄 안다. J는 아직도 꼿꼿한 선비의 기질로, 그러나 이제는 젊은 시절의, 그 우직하기까지 했던 고집으로, 세상을 어루만질 줄을 안다.

그의 시가 그러한 그의 어루만짐을 그대로 전한다. S는 스님이다. 4개국어에 능통하고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선(善)지식을 지니고 있음에도 세상에 함부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은 채,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 오늘의 세상을 정확히 볼 줄 아는 그런 선사의 지혜를 지녔다. 재주가 많은 Y는 그림을 그리는 소설가·시인답게 인생을 웃음과 촌철살인의 지혜로 그린다. 뿐 아니라 그의 시와 소설은 철학과를 나온 그의 삶이 녹아 서늘하기까지 하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많이 ‘좁디좁은 골목길’을 걸어가야 할 것 같다.

우리는 그 옛날에는 멈칫거리며 얼른 내놓지 못하던 ‘고래’라는 ‘거대한’ 이름으로 합동시집도 냈다. 모두 육순(六旬)이 지난 나이에, 칠순이 가까워오는 나이에.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문학을 하기 때문이라는 데 동의하는 ‘젊은 정신’으로(아니 아직 철이 없는 것인가?).

오늘도 나는 밤늦은 기차 속에서 우리의 동인들의 웃음이 떠다니는 것을 본다. 이제는 삶을 어루만질 수 있는 나이가 되어 모든 것을 축복으로 여길 수 있게 된 동인들. 예술은 그런 것이 아닐까. 가능한 한 따스함을 꺼내는 것. ‘어둡고 찬바람 부는 좁은 골목길’에서 ‘한없이 넓은 꽃 핀 정원’을 꺼내는 것. 아마도 그것은 모든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고향 같은 젊은 날이 주는 것일 것이다.

어두운 그 찻집에 오늘은 따스함의 분홍구름이 떠다니고 있다. 아 삶이여, 나에게 시를 주셔서 생큐. 함께 시의 길을 가고 있는, 이제는 ‘늙었으나 젊은’ 친구들을 주셔서 생큐. 바라건대 언제나 오늘이기를. 분홍구름이기를.

강은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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