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애展 / PARKJUNGAE / 朴正愛 / sculpture.painting

 

2013_1211 ▶ 2013_1217

 

 

박정애_낮잠 A Midday Nap_패널에 투조, 아크릴채색_91×71×1.2cm_2012

초대일시 / 2013_121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서울아트센터 공평갤러리GONGPYEONG ARTCENTER GONGPYEONG GALLERY

서울 종로구 공평동 5-1번지 공평빌딩 1층Tel. +82.2.3210.0071

www.seoulartcenter.or.kr


그것이 전부다! ●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 그리고 고적함이 빈들에 가득한 까마귀 소리와 뒤섞여 떠도는 날이다. 아직 아침 햇살은 찬란하고 따스해서 겨울이 오기까지의 심리적 거리를 만들어주긴 하지만 이 계절의 농촌은 분명 쇠락의 기운으로 잦아든다. 그만큼의 고요와 또 그 무게만큼의 덧없음이 땅으로 밀려들어가는 시간에 나는 박정애의 작업실에서 그녀의 근작을 보았다. 이곳 양평군 지평면 옥현리로 이주한지 십 여 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에 작가의 작업도 이전과는 많은 변화의 과정을 겪었던 것 같다. 작업실 바깥에서는 까마귀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박정애_그리고 집으로 갔다 And They're Gone Home_패널에 투조, 아크릴채색_108×91×1.2cm_2011


근작은 대부분 합판을 이용해 그 위에 선을 새기거나 구멍을 뚫은 흔적들이다. 더러 동을 용접해 형상을 이룬 것들도 있는데 그것들은 또한 원형과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서 그림을 그려 보이고 있다. 12mm 두께의 합판위에 밑칠로 젯소를 2~3회 칠하고 뒷면 또한 처리를 했다. 합판은 흡사 캔버스가 되어 이미지를 받쳐주고 있다. 평면은 분명 회화적 공간이고 이미지가 서식하는 본연의 장소다. 반면 조각은 공간에 자존하는 물질들이며 공간에 사물을 밀어 넣거나 물질의 물성을 하나의 시각적 볼거리로 만드는 일이 조각하는 일이다. 물론 부조의 예처럼 조각 역시 표면에 시각적 환영을 만들거나 주름을 잡아왔다. 박정애는 동이나 철 대신에 식물성의 나무를 대상으로 그 표면에 이미지를 새기고 투각했다. 그 이후에 표면에 채색을 했다. 회화적 공간에 기생하는 작업이자 그 표면에 여전히 조각적 행위를 시술하고 있다. 부드럽고 중성적이며 온화한 단색조의 색감은 나무의 표면을 적시고 합판의 존재를 색채덩어리로 만든다. 해서 마치 색채를 지닌 물질의 피부에 난 이미지를 손금을 보듯 내려다보게 한다. 손금은 손바닥에 난 상처/주름이면서 무한한 독해가 가능한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미 한 인간이 모태 속에 자리 잡는 순간에 형성되어진 운명의 선들이다. 손바닥을 여러 방향으로 긋고 지나가는 선, 손금의 자취를 헤아리는 일은 흥미롭다. 그것은 스스로 움켜쥔 힘에 의해 배태된 자국일까?

 


박정애_새벽 Dawn_패널에 부조, 아크릴채색_81×91×1.2cm_2013

박정애가 긋고 파고 떠낸 자취는 나무의 표면에 선연하게 자리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그려낸 형상들과 선들이 나무의 피부위에서 자연스럽게 응고되어 있다. 마치 눈 속의 발자국 같은 것,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연상시키는 선들이다. 동시에 사람의 형상과 개와 새, 눈물의 이미지가 있고 낮잠을 자고 있는 이나 술자리에 앉은 여러 사람들의 자취가 있다. 문득 삶에서 마주친 것들의 형상화이자 그것들을 가슴 속에 담아둔 사연이나 상념들이다. 애초에 박정애의 모든 작업들은 일상에서 깨달은 것들을 시어처럼 단출하게 잡아채어 이를 응고시켜왔다. 간결하고 압축적이며 힘 있는 형상과 또한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물질의 연출은 이 작가의 매력이다. 더구나 삶의 반경에서 접한 모든 것에서 작업을 견인해내고 현상 너머를 굽어보는 예지랄까, 맑고 따스한 마음의 결이 감촉되는 점이야말로 의미 있는 지점이다. 작업을 삶과 분리시키거나 특정한 미술의 담론에 국한시키는데서 벗어나서 자기의 생 자체에서, 삶의 수행에서 자연스레 작업의 실마리를 잡아내고 있다. 동시에 일상을 소재로 한 무수한 작업들이 지닌 소재주의나 얄팍한 감성과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빛난다. 좋은 작업은 세상을 보는 눈과 마음의 맑음에서 풀려나온다.

 


박정애_오는길 The Road Through Which They're Coming_패널에 부조, 아크릴채색_121×91×1.2cm_2012

 


끌과 조각도, 칼과 여러 기계의 힘을 빌어 합판의 표면, 내부에 상처를 내면서 깊이를 만들어 보인다. 표면에서 내부로 이어지는 수직의 층들이 여러 시간의 결을 안겨주는 한편 그 상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을 한 눈에 조망시킨다. 그래서 보는 이들은 그 화면을 깊이로 받아들이고 부재(무)가 이미지로, 내용으로 다가오는 역설의 체험을 만난다. 납작한 평면의 합판은 일정한 두께를 지니고 있어 비교적 깊이 있는 공간이 되었다. 따라서 나무가 이룬 두께, 깊이의 내부로 들어가 모종의 흔적을 만드는 일은 회화이자 동시에 조각의 일이기도 하다. 두꺼운 나무의 속살을 파내면서 그림을 그리고 더 나아가 합판의 깊이 자체를 소멸시키는 투각, 구멍 뚫는 일은 그리기의 극한, 조각 행위의 바닥을 드러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박정애_길고 긴 풍광 The Extended Scenery_패널에 부조, 아크릴채색_122×244×1.2cm_2013

「새벽」이란 작업은 투명한 블루 톤으로 적셔진 화면에 마치 한 획으로 그어진 듯, 무릎에 손을 얹혀 놓고 상념에 잠긴 듯 한 이의 측면 실루엣이다. 얇은 깊이를 가진 이 음각의 표면은 홀로 있는 이의 고독과 그 고독으로 인해 가능해진 투명한 경지를 선화처럼 안긴다. 모종의 선미가 감도는 이미지이자 깊이를 지닌 선의 맛이 일품이다. 나무의 피부에 새긴 드로잉이자 음화이며 동시에 판화이기도 하다.「길고 긴 풍광」은 합판의 표면에 거칠고 즉흥적으로 보이는 사선을 상처처럼 남겨놓은 작품이다. 비/빛의 이동, 시간의 흐름, 혹은 유성의 추락이나 생멸의 소멸을 은연중 떠올려준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흐름, 사라짐, 흘러감을 은유화 한다. 지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은 다들 저렇게 사라지면서도 동시에 시간의 바깥에서 영원히 순환할 것이다. 공존할 것이다. "그것만이 전부"이다. 유사한 작품으로「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것인」이 있다. 수직으로 내리는 선은 비처럼, 눈처럼 보인다. 혹은 눈 위에 생겨난 발자국을 연상시키는 구멍, 상처다. 음각의 깊이는 시선을 헛디디게 하고 빠지게 한다. 구멍으로 파 들어간 칼의 힘과 그 칼을 조율했던 작가의 신체가 공존하는 순간이 그 위에서 어른거린다. 종내 합판의 두께를 거둬버린 작품도 있다. 사람과 개, 코뿔소의 형상은 지워지고 구멍이 뚫려있다. 실루엣만 남고 내부는 사라지고 비어있다. 그 자리에 들어 있었던 것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는 남아 그 몸을 한 것들은 지속해서 유전할 것이다. 생의 이치가 그럴 것이다. 술자리에 둘러앉은 이들의 몸은 구멍(무)이 되어 사라지고 버려진 듯 남은 식탁과 음식들만이 자리하고 있는「그리고 집으로 갔다」는 떠들썩한 술자리가 파한 후 모두 집으로 가버리고 남은 빈자리를 통해 인간 존재의 허무함이나 우리네 삶의 어쩔 수 없는 공허함을 군더더기 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여전히 반복되고 이어진다. 박정애의 근작은 심각하고 쓸쓸한 내용이지만 그것을 유머와 여유로 받아들이고 사는 이의 깨달음이 묻어난다. 그리고 보는 재미가 있다.

 


박정애_퍼즐 A Puzzle_패널에 아크릴채색_240×366×1.2cm_2013

 

 

박정애_들판의 幻 Illusion on the Field_철, 동_145×300×75cm_2013

양평에서 보낸 10여년의 시간동안 작가의 시선과 마음은 더없이 헐거워지고 부드러워졌다. 모든 것을 그 존재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 앞에서 생사와 소멸의 섭리를 그대로 허용하고 계절의 자연스러운 변화 앞에 묵묵히 자기 생을 이어가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애도와 그 하나하나에 대한 사랑과 존중의 마음이 묻어난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우리는 무한한 시간의 흐름 위에 잠시 머물다 소멸하겠지만 그 소멸과 동시에 또 다른 흐름, 시간의 바깥에서 영원을 살 것이다. 작가는 그러한 단상을 단호한 합판의 피부위에 자신의 온 몸을 극진히 밀어내면서 이미지, 구멍으로 새겼다. 빈자리가 역설적으로 모종의 이미지를 안겨주었다. 구멍, 빈자리로 생겨난 저 형상은 무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우리가 무에서 태어나 무로 사라져버리듯이 말이다. 그러나 저 부재의 자리는 있음의 소중함을 정성을 다해 기술하다 자진하는 자리다. 나는 이 깊을 대로 깊은 가을날 그 자리를 보고 왔다 ■ 박영택

Vol.20131211j | 박정애展 / PARKJUNGAE / 朴正愛 / sculpture.painting

통인옥션 갤러리-- 최 석운전 <TV 세리나데>개막

 

 


2013년 계사년(癸巳年)의 마지막 달을 맞이하여 통인옥션갤러리에서는 한 해 동안 우리의 삶을 조금 특별한 시각에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최석운의 <TY 세레나데> 을 개최한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TV 상자 안에는 작가의 폭넓고 예리한 관찰로 그려진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들이 펼쳐진다. 어쩌면 하나도 특별할 것 같지 않은 소재들이지만 작가는 특유의 익살, 은유, 블랙유머, 그리고 패러디와 해학을 통해 그림에 담아낸다. 이번 전시는 바보상자로 인식되어온 TV라는 매체를 이용해 우리, 그리고 우리 이웃의 이야기로 관객과 소통하고자 한다. 평면의 캔버스를 벗어나 입체적 조형 속에 펼쳐지는 그의 그림은 강렬한 원색과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화면구도, 평범한 대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리고 과장된 표현과 독해하기 쉬운 내용이 어우러져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담는 동시에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것이다.

 

 

 

 

 

 

 

 

 

 

 

최석윤 개인전 ‘TV 세레나데’

 

서양화가 최석운(53)은 개와 돼지, 아줌마와 아저씨 등을 화면에 담아낸다. 이를 통해 특유의 익살, 은유, 블랙유머, 그리고 패러디와 해학을 펼쳐 보인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난다. 미소(微笑) 실소(失笑) 조소(嘲笑) 폭소(爆笑) 등 갖가지 웃음. 이번에는 캔버스가 아니라 도자기로 만든 TV상자에 웃음의 코드를 집어넣었다.

‘바보상자’로 인식돼온 TV상자 안에는 작가의 폭넓고 예리한 관찰로 그려진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들이 등장한다. 잘 생긴 배우들도 아니고 평범한 남녀와 동물들이 맨손체조도 하고 조깅도 하고 부둥켜안고 키스도 한다. 하지만 그의 그림 앞에 서서 마냥 즐겁게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는 우리의 허구적 삶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1984년에 그린 ‘낮잠’ 때문이었다. 작업실에서 곯아떨어진 자신과 함께 쥐와 바퀴벌레를 그렸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데 한 관람객이 보고는 파안대소를 하더란다. 비루한 일상, 힘든 삶을 그린 것이었지만 웃음이 난다? “바로 이것이다!”하고 무릎을 쳤다. “힘들고 각박한 세상, 웃음으로 숨통이 트이게 되는 그림을 그리자.”

이후 30년가량 ‘최석운표 그림’으로 인기작가에 오른 그의 개인전 ‘TV 세레나데’가 30일까지 서울 인사동 통인옥션갤러리에서 열린다. 강렬한 원색과 명쾌한 화면구도로 해학과 풍자를 TV상자에 담은 20여점을 내놓았다. 이를 통해 세태에 대한 뼈있는 농담을 하는 그의 그림은 조선시대 혜원 신윤복과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와 맥을 같이 한다(02-733-4867).

국민일보 / 이광형 선임기자

12월11일까지 인사동 백악미술관서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백악미술관에서 12월5일 오후2시부터 한국전통지화 특별전이 개최됐다.

‘종이, 꽃으로 피다’는 주제로 대한불교천태종 총무원이 주최하고 한국 전통지화연구보존회가 주관, 문화체육관광부, 금강대학교, 금강신문, 윈테크가 후원해 마련된 이번 전시는 석용 스님의 지화들로 꾸며졌다.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중요무형문화제 제 50호 영산재 장엄이수자(전통지화)인 석용 스님은 전시에 앞서 마련된 리셉션에서 “순수 국내산 닥만을 이용한 전통방식의 한지에 천연염색을 통해 색을 냈다”면서 “문헌 및 사료를 통한 전통기법의 고증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고 밝혔다. 전시된 작품들은 지화뿐만 아니라 잔칫상 등도 재현됐다.

이날 (재)한미문화예술재단의 박종복 회장, 이태미 이사장, 김진강 사무차장 등도 자리를 함께 했다. 한미문화예술재단은 미연방기관 NEA의 지원을 받는 예술지원 단체로 미국에 한국의 문화 및 역사를 알려오고 있다. 석용 스님 역시 재단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태미 이사장은 “지화 전수자들의 노고에 감동했다”며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종이꽃에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이와 관련해서 이 이사장은 내년 3월 워싱턴의 학교 등지에서 석용 스님의 종이꽃 강연과 워크숍을 진행되고, 9월에는 전시가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 전시는 백악미술관에서 12월11일까지 계속된다. 이후에는 12월말부터 2014년 2월말까지 단양 구인사 불교천태중앙박물관으로 장소를 옮겨 전시가 계속된다.

 

 

 

 

 

 

[월드코리안뉴스 /. 김양균 기자 ]
 

 



 

 
 
          
 
 
 

 

  

      
  
          
 
 
   
 
 
 
 
 
 
 
 
 
 
 
 

한국콘텐츠진흥원, 인사동 인사아트센터1층 전시장서 개최

 

아주경제/박현주 기자
(hyun@ajunews.com

컷스틸러(Cut Stealer); 칸을 훔치는 사람들'을 주제로 한국만화원화전이 열린다.

 한국콘텐츠진흥원(원장 홍상표)은 오는 18~29일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 1층 전시장에서 이 전시를 열고 이후  오는 25일부터 29일까지 코엑스에서 열리는 제2회 서울 아트쇼에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2013 만화원작프로모션’ 사업의 일환으로 국내외에 한국만화와 그 원화(原畵)를 소개하고 예술적 가치가 충분한 만화원화의 판매까지 연결하여 만화의 새로운 가치를 부각시킬 예정이다.

 전시는 만화가 독자들에게 더 가깝게 예술로써 다가갈 수 있도록 구성했다.

 최근 ‘씬 스틸러 (Scean Stealer)’란 이름으로 영화 속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캐릭터와 배우들이 영화 관객들에게 호평 받은 작품들이 대거 쏟아진다. 
 


 2013년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Hun, <꽃가족>의 국중록, <목욕의 신>의 하일권, <웃지않는 개그반>의 현용민 등의 작가들의 앞서 열거한 작품들의 컷 스틸러들을 원화로 전시한다.

 또한 <스쿨홀릭>의 신의철과 만화 의 임강혁 작가 역시 자신의 또 다른 작품 <슈퍼우먼> 속 캐릭터로 전시에 참여한다. 또한 한국만화 역사에 길이 남을 신문수, 차성진, 이현세, 이두호, 김형배 등의 원로 작가들도 뜻을 모았다.

 <열혈강호>의 양재현, <스페이스 차이나드레스>의 원현재 그리고 <리니지>의 신일숙, <불의 검>의 김혜린, <바람의 나라>의 김진, 의 박희정 등의 순정만화 작가들까지 참여했다. 전시작품은 구입이 가능하다. 자세한 정보는 공식 홈페이지 www.manhwa101.kr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권태균씨는 그동안 “룩스”갤러리에서 네 차례에 걸쳐 “노마드(변화하는 한국인 삶에 대한 작은 기록)”전시를 가져왔다. 그 전시된 사진 한 장 한 장은 우리들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기록이었다. 짚단을 싫은 경운기에 올라 신기한 듯 작가를 쳐다보는 어린이들의 집중된 시선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틋한 향수와 함께 그 시절로 향하게 하는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었다. 때가 반질반질한 마루, 하늘을 치솟은 가로수와 자갈길, 순박하기만 한 우리 이웃들의 모습들은 급속한 현대문명의 물결에 밀려 잊어버렸던 소중한 우리 삶의 기록이자 정서였다. 다시 한 번 다큐멘터리 사진의 중요함을 인식하는 시간이었다.

다큐사진가 권태균씨의 작품들을 보면 먼저 사진가 강운구씨가 생각나고, 강운구씨를 생각하면 지금은 없어진 잡지 "뿌리 깊은 나무"가 생각난다. 많은 사진가들이 아름다운 풍경만을 찾던 시절에 '뿌리 깊은 나무"의 강운구씨가 주축이 된 젊은 사진가들이 이 땅의 기록을 위해 방방곡곡을 찾아다녔기 때문이다. 그동안 예술이란 미명의 순수사진에 가려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왔던 그 삶의 기록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가치를 더해 영원히 빛날 것이다.

지난 12월 4일 오후5시 무렵, 관훈동 “룩스”갤러리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 권태균씨의 “노마드4” 사진전 오프닝이 있었다. 전시장에는 권태균씨를 비롯하여 강운구, 한정식, 황규태, 김대수, 한옥란, 김광수, 이갑철, 김선민, 정영신, 이상엽, 안해룡, 육상수, 곽명우씨 등 많은 사진가들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하며 반가운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이 전시는 12월 16일까지 계속된다.

 

 

 

 

 

 

 

 

 

 

 

 

 

 

 

 

 

 

 

 

 

 

 



 
Do-or it yourself

김성우展 / KIMSUNGWOO / 金成佑 / sculpture

2013_1204 ▶ 2013_1210

 

 


김성우_gamble door_60×60×60cm_2013

초대일시 / 2013_120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토포하우스TOPOHAUS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6(관훈동 184번지)Tel. +82.2.734.7555/+82.2.722.9883

www.topohaus.com


문(門)전(展)성(成)시(示) ● 김성우의『Do-or it yourself』전시장의 문을 열자마자, 우리는 기둥에 기묘하게 접합된 문(「대리기둥알바」)과 맞닥뜨리며, 그 뒤로도 각기 다른 패턴들로 중첩된 실제 크기의 화려한 문짝들(「A rabbit burrow series」)이 펼쳐진 광경을 보게 된다. 고개를 돌려보아도, 전시장 한 벽면 전체에 회색계열의 문들(「25개의 벽」)이 빼곡히 들어차 있을 뿐만 아니라 접혀지고 구부러진 문(「Gamble door」)까지 그 공간을 꽉 채우고 있다. 수많은 문들로 전시장을 가득 메운 그 광경은 '대문 앞이 저자를 이룬다(문전성시 門前成市)'라는 고사성어처럼, 그야말로 '문전(展)성시(示)'다. 그의 평평한 문짝들은 화이트 큐브에 걸려있는 평면작품으로서, 그리고 입체적인 문들은 이편에서 저편으로 미끄러지는 토끼굴과 같은 설치작품으로 '성시'를 이룬다. 건축적 의미에서 한 장소의 경계를 개폐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구조물로서의 문은 보통 한 장소와 다른 장소를 연결시키는 접점에 위치'됨'으로써 담, 벽 등의 경계요소와 함께한다. 이러한 연속된 경계요소의 성격은 그것의 특징과 명칭을 좌우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공간과 공간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문에 관한 속성은 그것을 상징적 의미로 활발히 작동시키기도 한다. 문학에서는 이를 비유의 힘으로 충분히 이용하여, 타자와 타자를 연결하는 관계로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며 자아와 타자의 시공간을 드나들 수 있고 차단하거나 연결할 수도 있는 메타포로 자유로이 결합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문의 외연을 이리저리 열어가다 보면, 그것이 독립적 구조물로서 보다는 경계요소와 병존할 때, 즉 타자와의 부딪침에 충실할 때 그 자체의 주체적 역할을 온전히 수행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김성우가 매우 사실적으로 재현한 그 문들은 실제적인 그 사물의 역할과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문고리가 없거나 혹은 열지도 닫지도 못하는 그 문들과 마주한 우리는 일반적 표상으로 해석하여 그 사물들을 우리 자신 앞에 불러 세우기가 난감하다. 말하자면, 그 사물에 대한 의미가 텍스트라는 잘 만들어진 세계에서는 형식적으로 확장될 수 있지만 실용적 목적에 따라 의미가 통제되고 고정되는 사회적 실천의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점에서 작가는 자신의 예술적 수사학을 열어젖힌다. 그는 충실한 사물로서의 문이 "소통의 과정으로 자신을 온전히 내놓지만 정작 절대적인 수동의 입장"으로 벽에 고정되어 누군가의 사용에 '의하여' 결정되어지는 면을 회의한다. 이에 그는 "수동적 오브제로서 관계를 맺고 형성되어지는 데에는 선택권이 없는" 이 익숙한 사물로서의 문을 단순한 수동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의미(significance)의 역동적 생산자로 불러낸다. 다시 말해, 작가에게 문은 구조 사이에서 획득된 상관관계에 묶여진 규정성들을 통해서 타자들에게 무언가를 나타내는 혹은 대리하는 사물이 아닌 것이다. 그는 수동적 종합으로 성립된 그러한 문에게 주체적 선택권을 돌려주면서 무기력한 존재로 그것을 전락시키는 '사물화'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한 상실로부터의 회복은 '문'이라는 주체의 자기 변형을 요구하며, 이러한 요구는 '문'의 자기에의 물음을 반복하게 한다. 이제 생명 없는 그 문들은 마치 제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해내듯이 행동하면서 온갖 까다로운 질문을 던진다. 예컨대 사물의 주체성을 폭넓게 인정하는 한국어에서 "문이 열린다"라는 일상적 어법의 표면적 의미만을 본다면, 그 사물은 문장 안에서 주어 노릇을 하면서 사람에게나 어울릴 법한 능동사를 거느리기까지 한다. 영어에서라면 문장의 주어 자리는 사람이 되거나, 사물이 주어가 되는 대부분의 경우처럼 수동태의 형식을 취하며 그 사물을 어디까지나 인간 행위의 대상으로 국한시킬 것이다. 사물이 주어자리에 오더라도 피동문보다는 능동문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우리말에 일상적 어법으로, 그리고 수사학적으로 의인법에 해당하는 김성우의 예술적 수사법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철학적 연장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만물에 생명이 있다'고 보는 물활론(物活論)으로, 더 밀고 나아간다면 '모든 사물이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 범심론(汎心論)으로까지의 확장이 그것일 것이다. 작가는 수동적으로 틀(frame) 지워진 문을 다양한 관계적 의미로 확대시키기 위하여 그것을 능동적 행위자로 불러낸다. 활기 없이 고정되어 있는 수동적 사물로서의 문은 "Do-or it yourself"라는 작가의 예술적 발화를 통해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화한다. 명사로서의 문(door)은 자기 스스로를 동사적 주체로 변형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문체(門體)를 '두(do)'드리는 능동적 행위를 수행해 간다.

 

 

 김성우_gamble door_60×60×60cm_2013_부분

 

김성우_a rabbit burrow series_194×74×5cm_2013

 


 

김성우_a rabbit burrow series_194×74×5cm_2013

이를 위하여 작가는 우선 일반적인 규칙성을 갖고 있는 문짝의 전체 도안을 MDF합판으로 자르고 잇대어 붙여 원하는 형태로 구성한다. 그리고 이 납작한 합판들에 다양한 문짝의 세부 패턴들을 선택하여 새기고(彫), 깎고(刻), 맞추고(構), 쌓는(築) 방법으로 그 조형적 형상을 재구축한다. 일례로「A rabbit burrow series」에서 4개의 문들은 3cm 정도의 직사각형 합판에 다양한 문짝에서 선별된 문양을 새기고 깎은 후, 그 위에 다시 직사각형 아이폰 대문 화면의 동영상 패턴을 쌓아 올리며 요철 있는 부조조각으로 통합된다. 미묘한 깊이와 높이를 대응시킨 요철 있는 화면에 정교하고 화려한 색채가 더해지면서 그 문들은 술어들을 하나씩 갖추며 서서히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25개의 벽」은 그러한 직사각형 프레임들이 반복되는 구조를 통해서 전시장의 한 벽면 전체를 회색계열로 뒤덮어 틀 없는 거대한 사각의 화면을 재형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제작과정은 마치 계열체의 수직축과 통합체의 수평축에 따라서 기호의 선택과 조합을 이루면서 생산되는 소쉬르적 뉘앙스를 풍긴다. 이 두 축이 단어들을 문장으로 만들어 언어로 조직하는 틀을 제공하듯이, 작가는 '문'이라는 단위에서 선별된 공통적인 요소를 연쇄시켜 서로 결합될 수 있는 관계로 집합시키고 그렇게 선택된 계열체적 조합으로 문에 대한 전체적 예술문법을 통합시킨다. 그러나 의미는 통합체의 축을 따라 축적되지만, 계열체적인 영역에서의 선택은 하나의 문장 속의 특정한 지점에서 의미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25개의 벽」처럼 수직수평이 엇갈리고 만나면서 구축된 기하학적 구성에서 모든 개개체의 문은 그 자신만의 고유한 힘을 품고 각각에 존재하는 실체의 단자(monad)로 표상되는 다양성을 이루어낸다. 그리고 일종의 캔버스와 같은 의미를 가진 그 평평한 문짝의 면들은 기호의 연쇄를 새겨 넣기 위한 평면의 역할을 하며,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렇듯 '문'이라는 술어적 주체는 그 사물을 구성하는 각 범주들에서 추출된 규정들이 계열화됨으로써, 연접(conjunction)을 형성함으로써 구성된다. 즉 한 주체는 무수한 규정성들의 계열체이다. 이것은 술어들의 그물 속에서 문-자신의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며, 자신의 이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그물에 단지 고착되어 있다면 문-자신의 구성은 상투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Gamble door」의 문은 스스로 직사각형의 몸체를 구부리고 접어가며 주사위 형태로 변화한 후, 스스로 던져지면서 매번 상이한 숫자를 자초하여 지표 위에서 우발적 사건들을 연속시키려 한다. 적극적 모험의 관계로 굴러가려는 주사위 문체는 고정된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계속적으로 바꾸기 위하여 놀이한다. 일종의 수동의 능동'되기', 능동의 수동'되기'를 번갈아 가는 이러한 과정에서 차연(différance)이 진동한다. 데리다(Jacques Derrida)라면, 능동태도 수동태도 아닌 이러한 형태를 하나의 '중간태'라고 명명하였을 것이다. 그의 차연은 출구가 없는 자기애정이나 자폐성의 아집에 얽매이지 않고 텍스트의 무한한 연쇄성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끝없이 지연되는 그 과정에서 '문'에 대한 다른 단어와 또 다른 단어, 그리고 또 다른 언어를 참조하기 때문에 의미는 고정된 기의를 폐기하며 기표의 사슬로 미끄러진다. 이것은 기묘하고 의인화된 생명체들이 사는 환상의 세계로 미끄러져가는 앨리스의 토끼굴처럼, 김성우의 평평한 문 주변에서 깊숙한 패러독스의 출로와 입구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김성우_a rabbit burrow series_194×74×5cm_2013

 

김성우_a rabbit burrow series_194×74×5cm_2013

 

김성우_대리기둥 알바_650×278×78cm_2013

문(門)으로 선문(問)답하기 ● 김성우의 문전(門展)에서 발견되는 역설은 문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진술을 만들려는 우리의 노력에서 계속해서 빠져나간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와 같은 것을 실체화하고 표상화하려는 모든 시도를 부정한다. 이는 작가가 사실적으로 재현한 그 문들이 단순히 상징적인 형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재현이 대신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에 대한 의미로 구성되고 있는 점을 역설해준다. 따라서 그의 문들은 상대의 경직된 관념을 역으로 활용하는 장치이며, 이 장치로 상대를 유인한 다음 결국 해체시킴으로써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작가는 주체화의 선상에서 '문'의 고정된 양식이라는 통념(doxa)에 반하는(para) 계열화를 유발하며 규정된 양식의 힘과 대결하고 그것을 무력화시키는 역설(paradox)로 향해 간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이를 또 다른 '의미의 논리'로, 통상적인 의미의 논리 혹은 사건화의 방법을 해명하면서 그것에 머물지 않고 그와는 다른 변이와 생성의 선을 그리는 새로운 의미의 논리, 사건화의 방법으로 제안한다. 그리고 김성우는 고정된 의미를 제시하는 양식과 통념에 반하여 이전과 다른 '문(門)'이라는 또 다른 사유의 가능성으로 그것을 '물음 문(問)'으로 변이시켜 문답의 사건을 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문은 명사로서의 문(door)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문체를 '두(do)'드리는 동사적 주체로 생성되어 가는 것이다. '문으로 선문답하기', 그 과정에서는 말해지는 순간, 말해지는 것을 버려야만 하고 일체의 상식과 양식에 대한 전제들에서 멀어져야만 한다. 선문답과 같은 해체는 절대적 진리를 설명하는 대신에 무한한 사유의 공간을 주파하며 한정된 우리의 인식을 뒤흔든다. 풍부한 인식의 장치를 지닌 선문답은 일치되지 않는 문답일지라도 관점에 따라 화두를 해석해 냄으로써 수많은 가능태의 물음들을 '두'드리며 황당하고 모순투성이의 선문답으로 김성우의 문들을 전시장에 늘어서게 한다. 전시장의 한 구석 벽면에 붙여진 전시지원서에서 그 문은「May I join?」이라고 우리에게 물으며, 자신을 화두로 하여 우리와의 선문답을 요청한다. 그러나 '주체'라는 문에게 '우리'라는 타인은 언제나 힘겨운 존재일 것이다. 사회적 장 안에서 '문'이라는 '나'에게 붙여있는 규정성들 하나하나는 타인들의 눈길 하나하나를 함축한다. 그러한 현실을 회피하려는 이들은 오직 자신의 이해에 관련되는 것들만이 실재라고 생각하며 세상 모든 모순들로부터 눈을 돌리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사물들 사이에 존재함으로써 세계를 얻게 된다"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전언을 상기하며 만일 내가 보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대상이 없다면 나는 볼 수도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즉 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순투성이의 문이 발화하는 소리, 그것의 불확실한 첫문장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불충분함을 안다고 하여도, 작가는 자신만의 예술적 수사로 우리의 문답을 계속해서 '두'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허무한 잡담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김성우는 향후의 많은 문전(門展)을 통해서도 끊임없는 선문답을 반복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주체화의 선상을 따라 이루어지는 '문'의 자기 만들기에서 나아가 실재적인 자기 만들기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관계를 떠난 순수 내면적 자기 만듦은 어쩌면 허구적 주체성으로 침잠되어가는 상상적 만듦에 지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에 직접 부딪치며 새로운 변이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의 선문답적 수사법을 열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 오윤정

Vol.20131203e | 김성우展 / KIMSUNGWOO / 金成佑 / sculpture


그래도...난다 Nevertheless...Fly

이원경展 / LEEWONKYUNG / 李嫄景 / sculpture

 

2013_1204 ▶ 2013_1217

 

 


이원경_그래도...난다 Nevertheless...Fly_스테인리스 스틸 주물_76×230×10cm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1224a | 이원경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리서울 갤러리LEESEOUL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23-2번지Tel. +82.2.720.0319

www.leeseoul.com


'거울-구속'에서 우물신화로 : 용쓰는 현대인의 푸른 눈빛 ● 이원경의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대체로 소품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개별화된 단품들이 아니라 9개 소품들이 하나의 주제로 묶이는 단편집에 가깝다. 문학적으로 바꿔 말하면 그것들은 '비행(飛行)'에 관한 짧은 장편(掌篇)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모니터로 켜 두고 천천히 살펴가면서 전체를 이어 붙여 보았다. 소년에서 노인으로 옮겨가는 시간의 격차를 다스려보기도 하고 중년들의 외줄타기 같은 불안과 비락(飛落)의 순간들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불현 듯 한 목소리가 들려 귀를 기울였다. 그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이원경_꿈꾸는 날개 Wings with dream_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_36×190×25cm

권진규_허영과 종교로 분절한 모델, 그 모델의 면피를 나풀나풀 벗기면서 진흙을 발라야 한다. 두툼한 입술에서 욕정을 도려내고 정화수로 뱀 같은 눈언저리를 닦아내야겠다. 모가지의 길이가 몇 치쯤 아쉽다. ● 김종길_1971년 12월 10일, 명동화랑에서 열린『테라코타_乾漆』展 포스터가 떠오르는 군요. 선생께서는 선생의 얼굴사진 뒤로 자소상(自塑像) 연작을 마치 "나풀나풀 벗기면서 진흙을 발라"놓은 형상처럼 배치하셨지요. 이원경의 작품들에서 선생이 말년에 실험하셨던 건칠작업이 떠오르시나요? ● 권_굳이 내 작품이 떠올라서만은 아니요.「悲樂-飛落」을 봅시다. 한 사람이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날고 있소. 그는 무척 평안해 보이오. 그의 두 팔이 마치 하얀 날개처럼 보이지 않소? 관객은 이 사람이 저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오. 그가 보고 있는 세계는 푸른 하늘이오. 그는 지금 이 지상으로부터 날아올라 저 하늘 속으로 날아오르고 있는 것이오. 그런데 작가는 이 작품에 '飛落'을 덧붙였소. 날면서 또한 떨어지고 있다는 뜻인데, 가만히 보니 저건 사람이 아니라 빈껍데기가 아니겠소? 마치 유충의 번데기 집이었던 고치(cocoon) 껍데기 같은 거 말이오. ● 김_그랬군요. 그렇다면 그 껍데기의 실체였던 사람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그는 과연 자기 껍데기를 벗고 나와서 가볍게 훨훨 날아가 버린 것일까요? ● 권_그것을 이해하려면 그 밑에 설치해 놓은 거울을 먼저 해석해야 할 것 같소. 저것은 혹시 수선화(水仙花)가 되어버린 그리스 신화의 아름다운 소년 나르키소스를 상징하는 게 아니겠소? 내가 보기엔 자기 리비도(libido)에 빠진 상태, 즉 나르시시즘에 풍덩 빠져버린 상태의 '거울-구속'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말이오. ● 김_'거울-구속'이라, 아주 흥미로운 개념이군요. 저 흰 고치 신체의 껍데기로부터 변태를 거듭한 새 몸이 너무도 투명한 자신의 몸에 홀려서 '자기보기'의 나르시시즘에 빠졌다는 가설이라.... 그런데 저는 이 작품이 일종의 욕망충동으로서의 나르시시즘적 리비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저 거울을 우물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거울이 2차원적인 평면으로서 외부를 반사하는 것에 갇혀있다면, 우물은 반사면 아래로 깊숙이 심연(深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 권_그렇소. 우물은 어두운 심연이 아니라 맑고 투명한 심연이오. 깊어질수록 그 물밑의 세계는 샘의 근원과 맞닿게 되지. 그뿐만 아니라 우물은 하늘과 연결되는 하나의 통로 같은 구멍이외다. 대지의 숨구멍에서 솟은 물이 둥글게 하늘을 담고 있는 것이 우물이지. ● 김_바로 그렇습니다. 그런 숨구멍의 세계로서 하늘과 대지를 연결하는 통로라고 생각해 보는 거지요.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껍질을 두고 그가 풍덩 빠져든 세계는 어디로 이어져 있는 것일까요? 옛 선인들은 나무뿌리가 가 닿는 곳과 우물의 뿌리가 가 닿는 곳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 했습니다. 신화적 상징으로 그 근원에 이르면 한 마리 거대한 '용(龍)'이 있지요.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구 중부에 룽징이 있습니다. 용정(龍井). 우물에서 용이 나와 승천했다는 곳입니다. 경주 분황사에는 돌로 만든 우물(石井)이 있지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 우물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살았다고 합니다. 위례성 우물이야기도 있어요. 백제시조 온조왕이 밤이면 용이 되어 위례성 우물로 들어가서는 부여 백마강에서 놀다가 날이 밝으면 다시 이 우물로 나와서 왕 노릇했다는 것이죠. 이렇듯 우물과 용에 얽힌 신화는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 퍼져 있습니다. 왜 우물에서 용이 나오는 것일까요?

 


이원경_푸른 시선 Bluish stare_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_48×80×80cm

권_그러고 보니 저 거울은 우물 같기도 하오. 하지만 이원경의 작품들이 고대 신화나 전설을 모티프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 용이란 것도 상징으로서만 작동해야 하지 않겠소? 그렇다면 지금 여기의 현대인들에게 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 같소만. ● 김_제가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원경에게 있어 아니, 그가 표현하고 있는 인물들에게 있어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인물들과 용의 상관성을 추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작가가 굳이 용을 떠올리거나 또는 용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어떠한 조각적 형상을 구체화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용을 표현하려는 것이 이 작품들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용과 엇비슷한 상태에서의 신체적 변이와 그 변이가 내포하는 현실적 상징에 관심이 있는 듯합니다. 즉,「悲樂-飛落」로부터 탈피(脫皮)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하고 있는 셈이죠.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하잖습니까? "용쓰고 산다."고들 말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는 지금 이곳에서 용쓰고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용이 되려고 사는 사람들일 테니까요. ● 권_그렇겠군. 이원경의 작품에 등장하는 날개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바로 그 용과 연결되니 말이오. ● 김_저는 누구나「유년의 날개」가 보여주듯이 날개 하나씩은 다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키가 크듯이 날개도 자라서 힘차게 비상할 순간을 준비하는 것이지요. 저 소년의 몸은 아직 미완의 상태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이제 막 그의 오른쪽 어깨 위에서 날개 하나가 싹튼 것을 보세요. 푸릇푸릇한 저 날개가 저 소년의 희망이 아닐는지요. ● 권_저 몸이 가장 싱싱한 몸이요. 저 몸이 이제 막 어미의 껍질로부터 탈피한 순수의 덩어리요. 저 소년이 내민 손을 보시오. 저 소년의 눈빛을 보시오. 저 소년은 당당히 세계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소. 현실을 밀어내지 않고 함께 가길 청하고 있는 순간이외다. 그의 몸속에는 푸른 피가 가득해서 푸른 날개 따위 금방이라도 키워낼 듯 충만하오.

 


이원경_단연한 숨 Resolute_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_35×80×20cm

김_그동안 이원경이 보여주었던 조각들과 달리 이 작품은 인간의 근원적인 형상성이 내포한 '삶의 진실' 같은 것을 보여줍니다. 더군다나 그는 바로 그 근원의 형상과 삶의 진실 같은 것이 실제로는 인간의 신화가 잉태되는 첫 순간이라는 것도 암시하고 있지요. 예수가 말했잖습니까? 저 소년과 같지 않다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요. 그러나 우리는 모두 저 순간을 거역하며 어른이 되고 맙니다. 우리 자신의 투명한 형상이니 진실이니, 또는 내 자신의 신화 따위는 깡그리 잊은 채 말이죠. ● 권_「간절한 비행」의 늙은 육체를 보시오. 어머니 우물에서 솟았다고는 하나 자기 자신의 신화를 망각하고 살아 온 자들의 초상이 아닐 수 없소. 소년의 어깨에서 푸르게 자랐던 날개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지 오래요. 늙어서,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잊고 살아온 삶의 진실을 다시 찾게 되지. 하지만 수차례 변이를 거듭하면서도 욕망을 내려놓지 않았던 자들의 삶은 결국 늙은 육체만 남게 된다오. 우물 속을 아무리 들여다본다 한들 그가 상실해 버린 날개는 결코 찾지 못할 것이오. ● 김_그래도 작가는「간절한 비행」의 우물 면에 날개 깃 하나를 붙여 두었어요. 저는 저 깃이「깃」에 깃들어 있는 어떤 회상의 메타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간절한 비행」에 등장하는 저 늙은 육체의 주인이 더 늙어갈 지라도 '비행'에의 집착은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러면 그럴수록 그가 살아 온 삶의 그림자는 그를 더 붙잡아 당길지도 모를 일이지요. 늙은 육체의 마지막이란 결국 죽음이라는 최종의 고치(棺) 상태로 회귀하는 것 아니겠어요?「깃」의 작품들이 사각의 큐브 공간에 투영된 얼굴들과 깃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은 그런 회귀 공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깃」의 공간은 사념이 머물러 있는 기억의 사물함 같은 것이기도 할 테고요. 그런데 저는 이쯤에서 어떤 의문에 휩싸입니다. 용을 쓰든 용이 되든 왜 그는 이렇듯 '용 되기'의 '날개'에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가 저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시되어 있었습니다. "인생에 날개가 있다면, 두 개의 이상적인 날개를 가지고 태어나 끝까지 날 수 있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완벽한 날개라고 믿고 정말 끝까지 날 수 있다고 생각 하는가? 사람들은 모두 화려한 비상을 꿈꾸며 살고 있다. 자유의 날개, 꿈의 날개, 욕망의 날개.... 사람들은 대부분 부족한 날개를 가지고 있다. 너무 작은 날개, 외 날개, 이미 늦어버린 날개. 그러나 부족한 날개로도 꺾을 수 없는 의지가 있다. 날개가 어떻든 꼭 날것이라는 의지이다. 각각 다른 불편한 날개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들. 내 인생의 날개는 어떤가? 내가 가지고 있는 자아의 날개는 어떤 형태인가? 내게서 한쪽만 있는 나의 날개를 보았다."

 

 


이원경_간절한 비행 Desperate flight_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_40×58×45cm

권_그 의문이 나를 이곳에 호명한 이유인 듯하오. 나도 이원경 작가처럼 '각각 다른 불편한 날개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들'에 주목했소. 그러던 어느 해 사찰에 잠시 들렀다가 깨닫게 되었소. 날개의 진실은 본연의 자기 초상에 다가서는데 있다는 것을 말이오. 그래서 자소상에 매달렸던 것이오. 그리고 그 자소상은 부처와 동일시해야만 했소. 자소상은 자각상(自覺像)이기도 했으니 말이오. 나는 이원경의 날개에서 비상하게도 나의 자각상에 관한 사유를 발견하오. 초기 불교미술에서는 부처의 형상을 인간을 초월한 이상적 존재로 상징화했었소. 부처가 된 석가모니를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진리의 부처는 그 자체로 상징이며 '그 자리에 있다'는 암시만으로 존재를 드러냈소. 부처의 형상을 드러냈던 최초의 상징은 탄생, 깨달음, 설법, 대열반의 네 가지 사건을 다룬 것이었다오. 부처의 탄생은 세상의 풍요였지. 그래서 첫 상징인 풍요를 표현할 때는 풍요의 여신 락시미가 풍요의 항아리위로 피어오른 연꽃 위에서 코끼리들이 뿌리는 물을 맞고 있는 것이었소. 깨달음은 지혜의 나무 보리수로 그렸고, 설법은 법, 즉 진리의 바퀴로 새겼소. 설법을 표현할 때는 간혹 사슴을 그렸는데, 최초의 설법이 사르나트 녹야원에서 이뤄졌기 때문이오. 그리고 대열반은 수투파(탑)에 응결되었소. 스투파는 니르바나(열반)에 들어간 순간을 나타내므로 절대적 진리를 구현한 기념물이기도 하오. 자 그런데 말이오. 그러다가 한 5백년이 지났을 무렵이었을 것이오. 인간들은 결국 부처를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오. 그 부처의 형상이 어땠는지 아시오? 그는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팽팽한 뺨과 미소 띤 입, 반쯤 감은 눈을 가진 청년이었소. 이원경의 인물들 눈빛을 보시오. 그의 눈빛들은 하나같이 푸르오. 그가 어린 소년이든 늙은이든 상관없이 말이오. 이원경의 인물들은 현실 속에 있으나 그들은 그렇게 던져진 푸른 영혼의 소유자들이오. 그 푸름의 상징과 날개의 상징이 어디를 향하고 있다 생각하시오? ● 김_「푸른 시선」의 인물을 보니 그가 드디어 한 세계로부터 다시 한 세계로 비상하려는 듯 서 있음을 보게 되는 군요. 우리 모두는 어머니 대지의 우물로부터 왔으니 곧 이 세계에 던져진 순간들이 날개를 상실한 순간일 것입니다.「베를린 천사의 시」에서처럼 날개를 상실하면 지상에 떨어지고 말잖아요. 그렇지만 우리는 날개를 가졌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날개를 가졌던 순간의 기억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이 푸르게 빛나는 순간일 테고요. 그러므로「푸른 시선」의 그는 누가 뭐라 해도 날개를 가진 사람입니다. 인간의 신화와 삶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비상을 준비하는 그의 눈빛은 너무도 강렬합니다. 그는 지금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그의 존재성은 충만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서 있고 팽팽한 뺨과 결의 찬 입, 크고 푸른 눈빛의 용이군요. 이미 그는 용이었고 용의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원경_유년의 날개 Wing of childhood_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_41×50×25cm

그런 대화가 오갔다고 생각했을 무렵, 나는 나 스스로 떠들고 있는 나를 보았다. 모니터에는「단연한 숨」의 인물이 쭈그리고 앉아 깃을 보듯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 앉아 사찰의 하늘을 보았던 권진규의 얼굴 같기도 하였다. ■ 김종길

 


이원경_깃 Feather_합성수지_24×30×24cm×3

인생에 날개가 있다면, / 두 개의 이상적인 날개를 가지고 태어나 끝까지 날 수 있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 완벽한 날개라고 믿고 정말 끝까지 날 수 있다고 생각 하는가? // 사람들은 모두 화려한 비상을 꿈꾸며 살고 있다. / 자유의 날개, 꿈의 날개, 욕망의 날개 등... // 사람들은 대부분 부족한 날개를 가지고 있다. 너무 작은 날개, 외 날개, 이미 늦어버린 날개 등 / 그러나 부족한 날개로도 꺽을 수 없는 의지가 있다. 날개가 어떻든 꼭 날것이라는 의지이다. // 각각 다른 불편한 날개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들. // 내 인생의 날개는 어떤가? / 내가 가지고 있는 자아의 날개는 어떤 형태인가? / 내게서 한쪽만 있는 나의 날개를 보았다. // 이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의연하게 꿈꾼다. / 그래도...꼭...난다고. (2013) ■ 이원경

Vol.20131203j | 이원경展 / LEEWONKYUNG / 李嫄景 / sculpture


Sonoration

김범중展 / KIMBEOMJOONG / 金凡中 / painting.drawing
2013_1204 ▶ 2013_1210

 


김범중_Sonoration_장지에 연필_80×105cm_2013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관훈갤러리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작은 진폭의 생각들이 모여 거대한 파장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증폭된 희망일수도 있고 증폭된 절망일수도 있다. 언제나 번뇌의 파장은 또 다른 전이를 일으키고 새로운 형질의 번뇌로 재생산된다. 갖가지 생각으로 고뇌하지만 그것은 비슷한 틀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다지 크지 않은 진폭의 파장들일 뿐 일 때가 많다. 그러나 파장이 점점 강해지고 흡수할 수 있는 한계에 도달하면 기존의 믿음들은 무너지게 되고 새로운 믿음들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세월 속에 쌓이면서 어느 덧 커다란 신념으로 찾아온다.

 


김범중_Ignition_장지에 연필_112×160cm_2013

 


김범중_Dissipation_장지에 연필_120×160cm_2013

 


김범중_회절의숲-Diffraction Forest_장지에 연필_45×55cm_2012

 


김범중_Stereophonics_장지에 연필_45×55cm_2012

물질계의 분자는 열과 같은 자극을 가하면 약간의 운동을 시작하다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 또 다시 가하면 점점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계속해서 가하면 마침내 대류와 같은 구조의 새로운 체계가 만들어진다. 이른바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인 것이다. 인간의 정신계 역시 온갖 번뇌의 파장들로 들끓지만 뇌파가 극점을 치고 나면 각각의 새로운 틀을 만들고 자리를 잡는다. 자극을 받지 않을 때는 평온하고 안정적이지만 그것은 활력이나 별다른 변화가 없는 정태적인 상태다. 그러나 대류와 같은 구조는 사고의 활발한 움직임 속에서 점화되는 새로운 발아이며 역동적인 질서다. 그리고 이는 완전한 상태에 이르는 과정이 아닌 혼돈으로부터 질서로, 또 다시 혼돈에 이르며 끊임없이 반복하는 순환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수많은 번뇌 속에서 태어나고 반복되는 새로운 깨달음들이고 삶의 전환점들이다. (작가노트 중) ■ 김범중

Vol.20131204f | 김범중展 / KIMBEOMJOONG / 金凡中 / painting.dra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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