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or it yourself

김성우展 / KIMSUNGWOO / 金成佑 / sculpture

2013_1204 ▶ 2013_1210

 

 


김성우_gamble door_60×60×60cm_2013

초대일시 / 2013_120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토포하우스TOPOHAUS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6(관훈동 184번지)Tel. +82.2.734.7555/+82.2.722.9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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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門)전(展)성(成)시(示) ● 김성우의『Do-or it yourself』전시장의 문을 열자마자, 우리는 기둥에 기묘하게 접합된 문(「대리기둥알바」)과 맞닥뜨리며, 그 뒤로도 각기 다른 패턴들로 중첩된 실제 크기의 화려한 문짝들(「A rabbit burrow series」)이 펼쳐진 광경을 보게 된다. 고개를 돌려보아도, 전시장 한 벽면 전체에 회색계열의 문들(「25개의 벽」)이 빼곡히 들어차 있을 뿐만 아니라 접혀지고 구부러진 문(「Gamble door」)까지 그 공간을 꽉 채우고 있다. 수많은 문들로 전시장을 가득 메운 그 광경은 '대문 앞이 저자를 이룬다(문전성시 門前成市)'라는 고사성어처럼, 그야말로 '문전(展)성시(示)'다. 그의 평평한 문짝들은 화이트 큐브에 걸려있는 평면작품으로서, 그리고 입체적인 문들은 이편에서 저편으로 미끄러지는 토끼굴과 같은 설치작품으로 '성시'를 이룬다. 건축적 의미에서 한 장소의 경계를 개폐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구조물로서의 문은 보통 한 장소와 다른 장소를 연결시키는 접점에 위치'됨'으로써 담, 벽 등의 경계요소와 함께한다. 이러한 연속된 경계요소의 성격은 그것의 특징과 명칭을 좌우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공간과 공간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문에 관한 속성은 그것을 상징적 의미로 활발히 작동시키기도 한다. 문학에서는 이를 비유의 힘으로 충분히 이용하여, 타자와 타자를 연결하는 관계로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며 자아와 타자의 시공간을 드나들 수 있고 차단하거나 연결할 수도 있는 메타포로 자유로이 결합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문의 외연을 이리저리 열어가다 보면, 그것이 독립적 구조물로서 보다는 경계요소와 병존할 때, 즉 타자와의 부딪침에 충실할 때 그 자체의 주체적 역할을 온전히 수행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김성우가 매우 사실적으로 재현한 그 문들은 실제적인 그 사물의 역할과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문고리가 없거나 혹은 열지도 닫지도 못하는 그 문들과 마주한 우리는 일반적 표상으로 해석하여 그 사물들을 우리 자신 앞에 불러 세우기가 난감하다. 말하자면, 그 사물에 대한 의미가 텍스트라는 잘 만들어진 세계에서는 형식적으로 확장될 수 있지만 실용적 목적에 따라 의미가 통제되고 고정되는 사회적 실천의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점에서 작가는 자신의 예술적 수사학을 열어젖힌다. 그는 충실한 사물로서의 문이 "소통의 과정으로 자신을 온전히 내놓지만 정작 절대적인 수동의 입장"으로 벽에 고정되어 누군가의 사용에 '의하여' 결정되어지는 면을 회의한다. 이에 그는 "수동적 오브제로서 관계를 맺고 형성되어지는 데에는 선택권이 없는" 이 익숙한 사물로서의 문을 단순한 수동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의미(significance)의 역동적 생산자로 불러낸다. 다시 말해, 작가에게 문은 구조 사이에서 획득된 상관관계에 묶여진 규정성들을 통해서 타자들에게 무언가를 나타내는 혹은 대리하는 사물이 아닌 것이다. 그는 수동적 종합으로 성립된 그러한 문에게 주체적 선택권을 돌려주면서 무기력한 존재로 그것을 전락시키는 '사물화'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한 상실로부터의 회복은 '문'이라는 주체의 자기 변형을 요구하며, 이러한 요구는 '문'의 자기에의 물음을 반복하게 한다. 이제 생명 없는 그 문들은 마치 제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해내듯이 행동하면서 온갖 까다로운 질문을 던진다. 예컨대 사물의 주체성을 폭넓게 인정하는 한국어에서 "문이 열린다"라는 일상적 어법의 표면적 의미만을 본다면, 그 사물은 문장 안에서 주어 노릇을 하면서 사람에게나 어울릴 법한 능동사를 거느리기까지 한다. 영어에서라면 문장의 주어 자리는 사람이 되거나, 사물이 주어가 되는 대부분의 경우처럼 수동태의 형식을 취하며 그 사물을 어디까지나 인간 행위의 대상으로 국한시킬 것이다. 사물이 주어자리에 오더라도 피동문보다는 능동문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우리말에 일상적 어법으로, 그리고 수사학적으로 의인법에 해당하는 김성우의 예술적 수사법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철학적 연장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만물에 생명이 있다'고 보는 물활론(物活論)으로, 더 밀고 나아간다면 '모든 사물이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 범심론(汎心論)으로까지의 확장이 그것일 것이다. 작가는 수동적으로 틀(frame) 지워진 문을 다양한 관계적 의미로 확대시키기 위하여 그것을 능동적 행위자로 불러낸다. 활기 없이 고정되어 있는 수동적 사물로서의 문은 "Do-or it yourself"라는 작가의 예술적 발화를 통해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화한다. 명사로서의 문(door)은 자기 스스로를 동사적 주체로 변형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문체(門體)를 '두(do)'드리는 능동적 행위를 수행해 간다.

 

 

 김성우_gamble door_60×60×60cm_2013_부분

 

김성우_a rabbit burrow series_194×74×5cm_2013

 


 

김성우_a rabbit burrow series_194×74×5cm_2013

이를 위하여 작가는 우선 일반적인 규칙성을 갖고 있는 문짝의 전체 도안을 MDF합판으로 자르고 잇대어 붙여 원하는 형태로 구성한다. 그리고 이 납작한 합판들에 다양한 문짝의 세부 패턴들을 선택하여 새기고(彫), 깎고(刻), 맞추고(構), 쌓는(築) 방법으로 그 조형적 형상을 재구축한다. 일례로「A rabbit burrow series」에서 4개의 문들은 3cm 정도의 직사각형 합판에 다양한 문짝에서 선별된 문양을 새기고 깎은 후, 그 위에 다시 직사각형 아이폰 대문 화면의 동영상 패턴을 쌓아 올리며 요철 있는 부조조각으로 통합된다. 미묘한 깊이와 높이를 대응시킨 요철 있는 화면에 정교하고 화려한 색채가 더해지면서 그 문들은 술어들을 하나씩 갖추며 서서히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25개의 벽」은 그러한 직사각형 프레임들이 반복되는 구조를 통해서 전시장의 한 벽면 전체를 회색계열로 뒤덮어 틀 없는 거대한 사각의 화면을 재형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제작과정은 마치 계열체의 수직축과 통합체의 수평축에 따라서 기호의 선택과 조합을 이루면서 생산되는 소쉬르적 뉘앙스를 풍긴다. 이 두 축이 단어들을 문장으로 만들어 언어로 조직하는 틀을 제공하듯이, 작가는 '문'이라는 단위에서 선별된 공통적인 요소를 연쇄시켜 서로 결합될 수 있는 관계로 집합시키고 그렇게 선택된 계열체적 조합으로 문에 대한 전체적 예술문법을 통합시킨다. 그러나 의미는 통합체의 축을 따라 축적되지만, 계열체적인 영역에서의 선택은 하나의 문장 속의 특정한 지점에서 의미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25개의 벽」처럼 수직수평이 엇갈리고 만나면서 구축된 기하학적 구성에서 모든 개개체의 문은 그 자신만의 고유한 힘을 품고 각각에 존재하는 실체의 단자(monad)로 표상되는 다양성을 이루어낸다. 그리고 일종의 캔버스와 같은 의미를 가진 그 평평한 문짝의 면들은 기호의 연쇄를 새겨 넣기 위한 평면의 역할을 하며,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렇듯 '문'이라는 술어적 주체는 그 사물을 구성하는 각 범주들에서 추출된 규정들이 계열화됨으로써, 연접(conjunction)을 형성함으로써 구성된다. 즉 한 주체는 무수한 규정성들의 계열체이다. 이것은 술어들의 그물 속에서 문-자신의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며, 자신의 이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그물에 단지 고착되어 있다면 문-자신의 구성은 상투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Gamble door」의 문은 스스로 직사각형의 몸체를 구부리고 접어가며 주사위 형태로 변화한 후, 스스로 던져지면서 매번 상이한 숫자를 자초하여 지표 위에서 우발적 사건들을 연속시키려 한다. 적극적 모험의 관계로 굴러가려는 주사위 문체는 고정된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계속적으로 바꾸기 위하여 놀이한다. 일종의 수동의 능동'되기', 능동의 수동'되기'를 번갈아 가는 이러한 과정에서 차연(différance)이 진동한다. 데리다(Jacques Derrida)라면, 능동태도 수동태도 아닌 이러한 형태를 하나의 '중간태'라고 명명하였을 것이다. 그의 차연은 출구가 없는 자기애정이나 자폐성의 아집에 얽매이지 않고 텍스트의 무한한 연쇄성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끝없이 지연되는 그 과정에서 '문'에 대한 다른 단어와 또 다른 단어, 그리고 또 다른 언어를 참조하기 때문에 의미는 고정된 기의를 폐기하며 기표의 사슬로 미끄러진다. 이것은 기묘하고 의인화된 생명체들이 사는 환상의 세계로 미끄러져가는 앨리스의 토끼굴처럼, 김성우의 평평한 문 주변에서 깊숙한 패러독스의 출로와 입구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김성우_a rabbit burrow series_194×74×5cm_2013

 

김성우_a rabbit burrow series_194×74×5cm_2013

 

김성우_대리기둥 알바_650×278×78cm_2013

문(門)으로 선문(問)답하기 ● 김성우의 문전(門展)에서 발견되는 역설은 문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진술을 만들려는 우리의 노력에서 계속해서 빠져나간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와 같은 것을 실체화하고 표상화하려는 모든 시도를 부정한다. 이는 작가가 사실적으로 재현한 그 문들이 단순히 상징적인 형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재현이 대신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에 대한 의미로 구성되고 있는 점을 역설해준다. 따라서 그의 문들은 상대의 경직된 관념을 역으로 활용하는 장치이며, 이 장치로 상대를 유인한 다음 결국 해체시킴으로써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작가는 주체화의 선상에서 '문'의 고정된 양식이라는 통념(doxa)에 반하는(para) 계열화를 유발하며 규정된 양식의 힘과 대결하고 그것을 무력화시키는 역설(paradox)로 향해 간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이를 또 다른 '의미의 논리'로, 통상적인 의미의 논리 혹은 사건화의 방법을 해명하면서 그것에 머물지 않고 그와는 다른 변이와 생성의 선을 그리는 새로운 의미의 논리, 사건화의 방법으로 제안한다. 그리고 김성우는 고정된 의미를 제시하는 양식과 통념에 반하여 이전과 다른 '문(門)'이라는 또 다른 사유의 가능성으로 그것을 '물음 문(問)'으로 변이시켜 문답의 사건을 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문은 명사로서의 문(door)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문체를 '두(do)'드리는 동사적 주체로 생성되어 가는 것이다. '문으로 선문답하기', 그 과정에서는 말해지는 순간, 말해지는 것을 버려야만 하고 일체의 상식과 양식에 대한 전제들에서 멀어져야만 한다. 선문답과 같은 해체는 절대적 진리를 설명하는 대신에 무한한 사유의 공간을 주파하며 한정된 우리의 인식을 뒤흔든다. 풍부한 인식의 장치를 지닌 선문답은 일치되지 않는 문답일지라도 관점에 따라 화두를 해석해 냄으로써 수많은 가능태의 물음들을 '두'드리며 황당하고 모순투성이의 선문답으로 김성우의 문들을 전시장에 늘어서게 한다. 전시장의 한 구석 벽면에 붙여진 전시지원서에서 그 문은「May I join?」이라고 우리에게 물으며, 자신을 화두로 하여 우리와의 선문답을 요청한다. 그러나 '주체'라는 문에게 '우리'라는 타인은 언제나 힘겨운 존재일 것이다. 사회적 장 안에서 '문'이라는 '나'에게 붙여있는 규정성들 하나하나는 타인들의 눈길 하나하나를 함축한다. 그러한 현실을 회피하려는 이들은 오직 자신의 이해에 관련되는 것들만이 실재라고 생각하며 세상 모든 모순들로부터 눈을 돌리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사물들 사이에 존재함으로써 세계를 얻게 된다"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전언을 상기하며 만일 내가 보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대상이 없다면 나는 볼 수도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즉 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순투성이의 문이 발화하는 소리, 그것의 불확실한 첫문장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불충분함을 안다고 하여도, 작가는 자신만의 예술적 수사로 우리의 문답을 계속해서 '두'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허무한 잡담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김성우는 향후의 많은 문전(門展)을 통해서도 끊임없는 선문답을 반복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주체화의 선상을 따라 이루어지는 '문'의 자기 만들기에서 나아가 실재적인 자기 만들기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관계를 떠난 순수 내면적 자기 만듦은 어쩌면 허구적 주체성으로 침잠되어가는 상상적 만듦에 지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에 직접 부딪치며 새로운 변이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의 선문답적 수사법을 열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 오윤정

Vol.20131203e | 김성우展 / KIMSUNGWOO / 金成佑 / sculp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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