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난다 Nevertheless...Fly

이원경展 / LEEWONKYUNG / 李嫄景 / sculpture

 

2013_1204 ▶ 2013_1217

 

 


이원경_그래도...난다 Nevertheless...Fly_스테인리스 스틸 주물_76×230×1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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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리서울 갤러리LEESEOUL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23-2번지Tel. +82.2.720.0319

www.leeseoul.com


'거울-구속'에서 우물신화로 : 용쓰는 현대인의 푸른 눈빛 ● 이원경의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대체로 소품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개별화된 단품들이 아니라 9개 소품들이 하나의 주제로 묶이는 단편집에 가깝다. 문학적으로 바꿔 말하면 그것들은 '비행(飛行)'에 관한 짧은 장편(掌篇)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모니터로 켜 두고 천천히 살펴가면서 전체를 이어 붙여 보았다. 소년에서 노인으로 옮겨가는 시간의 격차를 다스려보기도 하고 중년들의 외줄타기 같은 불안과 비락(飛落)의 순간들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불현 듯 한 목소리가 들려 귀를 기울였다. 그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이원경_꿈꾸는 날개 Wings with dream_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_36×190×25cm

권진규_허영과 종교로 분절한 모델, 그 모델의 면피를 나풀나풀 벗기면서 진흙을 발라야 한다. 두툼한 입술에서 욕정을 도려내고 정화수로 뱀 같은 눈언저리를 닦아내야겠다. 모가지의 길이가 몇 치쯤 아쉽다. ● 김종길_1971년 12월 10일, 명동화랑에서 열린『테라코타_乾漆』展 포스터가 떠오르는 군요. 선생께서는 선생의 얼굴사진 뒤로 자소상(自塑像) 연작을 마치 "나풀나풀 벗기면서 진흙을 발라"놓은 형상처럼 배치하셨지요. 이원경의 작품들에서 선생이 말년에 실험하셨던 건칠작업이 떠오르시나요? ● 권_굳이 내 작품이 떠올라서만은 아니요.「悲樂-飛落」을 봅시다. 한 사람이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날고 있소. 그는 무척 평안해 보이오. 그의 두 팔이 마치 하얀 날개처럼 보이지 않소? 관객은 이 사람이 저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오. 그가 보고 있는 세계는 푸른 하늘이오. 그는 지금 이 지상으로부터 날아올라 저 하늘 속으로 날아오르고 있는 것이오. 그런데 작가는 이 작품에 '飛落'을 덧붙였소. 날면서 또한 떨어지고 있다는 뜻인데, 가만히 보니 저건 사람이 아니라 빈껍데기가 아니겠소? 마치 유충의 번데기 집이었던 고치(cocoon) 껍데기 같은 거 말이오. ● 김_그랬군요. 그렇다면 그 껍데기의 실체였던 사람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그는 과연 자기 껍데기를 벗고 나와서 가볍게 훨훨 날아가 버린 것일까요? ● 권_그것을 이해하려면 그 밑에 설치해 놓은 거울을 먼저 해석해야 할 것 같소. 저것은 혹시 수선화(水仙花)가 되어버린 그리스 신화의 아름다운 소년 나르키소스를 상징하는 게 아니겠소? 내가 보기엔 자기 리비도(libido)에 빠진 상태, 즉 나르시시즘에 풍덩 빠져버린 상태의 '거울-구속'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말이오. ● 김_'거울-구속'이라, 아주 흥미로운 개념이군요. 저 흰 고치 신체의 껍데기로부터 변태를 거듭한 새 몸이 너무도 투명한 자신의 몸에 홀려서 '자기보기'의 나르시시즘에 빠졌다는 가설이라.... 그런데 저는 이 작품이 일종의 욕망충동으로서의 나르시시즘적 리비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저 거울을 우물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거울이 2차원적인 평면으로서 외부를 반사하는 것에 갇혀있다면, 우물은 반사면 아래로 깊숙이 심연(深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 권_그렇소. 우물은 어두운 심연이 아니라 맑고 투명한 심연이오. 깊어질수록 그 물밑의 세계는 샘의 근원과 맞닿게 되지. 그뿐만 아니라 우물은 하늘과 연결되는 하나의 통로 같은 구멍이외다. 대지의 숨구멍에서 솟은 물이 둥글게 하늘을 담고 있는 것이 우물이지. ● 김_바로 그렇습니다. 그런 숨구멍의 세계로서 하늘과 대지를 연결하는 통로라고 생각해 보는 거지요.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껍질을 두고 그가 풍덩 빠져든 세계는 어디로 이어져 있는 것일까요? 옛 선인들은 나무뿌리가 가 닿는 곳과 우물의 뿌리가 가 닿는 곳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 했습니다. 신화적 상징으로 그 근원에 이르면 한 마리 거대한 '용(龍)'이 있지요.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구 중부에 룽징이 있습니다. 용정(龍井). 우물에서 용이 나와 승천했다는 곳입니다. 경주 분황사에는 돌로 만든 우물(石井)이 있지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 우물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살았다고 합니다. 위례성 우물이야기도 있어요. 백제시조 온조왕이 밤이면 용이 되어 위례성 우물로 들어가서는 부여 백마강에서 놀다가 날이 밝으면 다시 이 우물로 나와서 왕 노릇했다는 것이죠. 이렇듯 우물과 용에 얽힌 신화는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 퍼져 있습니다. 왜 우물에서 용이 나오는 것일까요?

 


이원경_푸른 시선 Bluish stare_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_48×80×80cm

권_그러고 보니 저 거울은 우물 같기도 하오. 하지만 이원경의 작품들이 고대 신화나 전설을 모티프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 그 용이란 것도 상징으로서만 작동해야 하지 않겠소? 그렇다면 지금 여기의 현대인들에게 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 같소만. ● 김_제가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원경에게 있어 아니, 그가 표현하고 있는 인물들에게 있어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인물들과 용의 상관성을 추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작가가 굳이 용을 떠올리거나 또는 용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어떠한 조각적 형상을 구체화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용을 표현하려는 것이 이 작품들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용과 엇비슷한 상태에서의 신체적 변이와 그 변이가 내포하는 현실적 상징에 관심이 있는 듯합니다. 즉,「悲樂-飛落」로부터 탈피(脫皮)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하고 있는 셈이죠.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하잖습니까? "용쓰고 산다."고들 말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는 지금 이곳에서 용쓰고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용이 되려고 사는 사람들일 테니까요. ● 권_그렇겠군. 이원경의 작품에 등장하는 날개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바로 그 용과 연결되니 말이오. ● 김_저는 누구나「유년의 날개」가 보여주듯이 날개 하나씩은 다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키가 크듯이 날개도 자라서 힘차게 비상할 순간을 준비하는 것이지요. 저 소년의 몸은 아직 미완의 상태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이제 막 그의 오른쪽 어깨 위에서 날개 하나가 싹튼 것을 보세요. 푸릇푸릇한 저 날개가 저 소년의 희망이 아닐는지요. ● 권_저 몸이 가장 싱싱한 몸이요. 저 몸이 이제 막 어미의 껍질로부터 탈피한 순수의 덩어리요. 저 소년이 내민 손을 보시오. 저 소년의 눈빛을 보시오. 저 소년은 당당히 세계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소. 현실을 밀어내지 않고 함께 가길 청하고 있는 순간이외다. 그의 몸속에는 푸른 피가 가득해서 푸른 날개 따위 금방이라도 키워낼 듯 충만하오.

 


이원경_단연한 숨 Resolute_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_35×80×20cm

김_그동안 이원경이 보여주었던 조각들과 달리 이 작품은 인간의 근원적인 형상성이 내포한 '삶의 진실' 같은 것을 보여줍니다. 더군다나 그는 바로 그 근원의 형상과 삶의 진실 같은 것이 실제로는 인간의 신화가 잉태되는 첫 순간이라는 것도 암시하고 있지요. 예수가 말했잖습니까? 저 소년과 같지 않다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요. 그러나 우리는 모두 저 순간을 거역하며 어른이 되고 맙니다. 우리 자신의 투명한 형상이니 진실이니, 또는 내 자신의 신화 따위는 깡그리 잊은 채 말이죠. ● 권_「간절한 비행」의 늙은 육체를 보시오. 어머니 우물에서 솟았다고는 하나 자기 자신의 신화를 망각하고 살아 온 자들의 초상이 아닐 수 없소. 소년의 어깨에서 푸르게 자랐던 날개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지 오래요. 늙어서,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잊고 살아온 삶의 진실을 다시 찾게 되지. 하지만 수차례 변이를 거듭하면서도 욕망을 내려놓지 않았던 자들의 삶은 결국 늙은 육체만 남게 된다오. 우물 속을 아무리 들여다본다 한들 그가 상실해 버린 날개는 결코 찾지 못할 것이오. ● 김_그래도 작가는「간절한 비행」의 우물 면에 날개 깃 하나를 붙여 두었어요. 저는 저 깃이「깃」에 깃들어 있는 어떤 회상의 메타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간절한 비행」에 등장하는 저 늙은 육체의 주인이 더 늙어갈 지라도 '비행'에의 집착은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러면 그럴수록 그가 살아 온 삶의 그림자는 그를 더 붙잡아 당길지도 모를 일이지요. 늙은 육체의 마지막이란 결국 죽음이라는 최종의 고치(棺) 상태로 회귀하는 것 아니겠어요?「깃」의 작품들이 사각의 큐브 공간에 투영된 얼굴들과 깃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은 그런 회귀 공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깃」의 공간은 사념이 머물러 있는 기억의 사물함 같은 것이기도 할 테고요. 그런데 저는 이쯤에서 어떤 의문에 휩싸입니다. 용을 쓰든 용이 되든 왜 그는 이렇듯 '용 되기'의 '날개'에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가 저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시되어 있었습니다. "인생에 날개가 있다면, 두 개의 이상적인 날개를 가지고 태어나 끝까지 날 수 있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완벽한 날개라고 믿고 정말 끝까지 날 수 있다고 생각 하는가? 사람들은 모두 화려한 비상을 꿈꾸며 살고 있다. 자유의 날개, 꿈의 날개, 욕망의 날개.... 사람들은 대부분 부족한 날개를 가지고 있다. 너무 작은 날개, 외 날개, 이미 늦어버린 날개. 그러나 부족한 날개로도 꺾을 수 없는 의지가 있다. 날개가 어떻든 꼭 날것이라는 의지이다. 각각 다른 불편한 날개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들. 내 인생의 날개는 어떤가? 내가 가지고 있는 자아의 날개는 어떤 형태인가? 내게서 한쪽만 있는 나의 날개를 보았다."

 

 


이원경_간절한 비행 Desperate flight_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_40×58×45cm

권_그 의문이 나를 이곳에 호명한 이유인 듯하오. 나도 이원경 작가처럼 '각각 다른 불편한 날개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들'에 주목했소. 그러던 어느 해 사찰에 잠시 들렀다가 깨닫게 되었소. 날개의 진실은 본연의 자기 초상에 다가서는데 있다는 것을 말이오. 그래서 자소상에 매달렸던 것이오. 그리고 그 자소상은 부처와 동일시해야만 했소. 자소상은 자각상(自覺像)이기도 했으니 말이오. 나는 이원경의 날개에서 비상하게도 나의 자각상에 관한 사유를 발견하오. 초기 불교미술에서는 부처의 형상을 인간을 초월한 이상적 존재로 상징화했었소. 부처가 된 석가모니를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진리의 부처는 그 자체로 상징이며 '그 자리에 있다'는 암시만으로 존재를 드러냈소. 부처의 형상을 드러냈던 최초의 상징은 탄생, 깨달음, 설법, 대열반의 네 가지 사건을 다룬 것이었다오. 부처의 탄생은 세상의 풍요였지. 그래서 첫 상징인 풍요를 표현할 때는 풍요의 여신 락시미가 풍요의 항아리위로 피어오른 연꽃 위에서 코끼리들이 뿌리는 물을 맞고 있는 것이었소. 깨달음은 지혜의 나무 보리수로 그렸고, 설법은 법, 즉 진리의 바퀴로 새겼소. 설법을 표현할 때는 간혹 사슴을 그렸는데, 최초의 설법이 사르나트 녹야원에서 이뤄졌기 때문이오. 그리고 대열반은 수투파(탑)에 응결되었소. 스투파는 니르바나(열반)에 들어간 순간을 나타내므로 절대적 진리를 구현한 기념물이기도 하오. 자 그런데 말이오. 그러다가 한 5백년이 지났을 무렵이었을 것이오. 인간들은 결국 부처를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오. 그 부처의 형상이 어땠는지 아시오? 그는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팽팽한 뺨과 미소 띤 입, 반쯤 감은 눈을 가진 청년이었소. 이원경의 인물들 눈빛을 보시오. 그의 눈빛들은 하나같이 푸르오. 그가 어린 소년이든 늙은이든 상관없이 말이오. 이원경의 인물들은 현실 속에 있으나 그들은 그렇게 던져진 푸른 영혼의 소유자들이오. 그 푸름의 상징과 날개의 상징이 어디를 향하고 있다 생각하시오? ● 김_「푸른 시선」의 인물을 보니 그가 드디어 한 세계로부터 다시 한 세계로 비상하려는 듯 서 있음을 보게 되는 군요. 우리 모두는 어머니 대지의 우물로부터 왔으니 곧 이 세계에 던져진 순간들이 날개를 상실한 순간일 것입니다.「베를린 천사의 시」에서처럼 날개를 상실하면 지상에 떨어지고 말잖아요. 그렇지만 우리는 날개를 가졌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날개를 가졌던 순간의 기억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이 푸르게 빛나는 순간일 테고요. 그러므로「푸른 시선」의 그는 누가 뭐라 해도 날개를 가진 사람입니다. 인간의 신화와 삶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비상을 준비하는 그의 눈빛은 너무도 강렬합니다. 그는 지금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그의 존재성은 충만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서 있고 팽팽한 뺨과 결의 찬 입, 크고 푸른 눈빛의 용이군요. 이미 그는 용이었고 용의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원경_유년의 날개 Wing of childhood_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_41×50×25cm

그런 대화가 오갔다고 생각했을 무렵, 나는 나 스스로 떠들고 있는 나를 보았다. 모니터에는「단연한 숨」의 인물이 쭈그리고 앉아 깃을 보듯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 앉아 사찰의 하늘을 보았던 권진규의 얼굴 같기도 하였다. ■ 김종길

 


이원경_깃 Feather_합성수지_24×30×24cm×3

인생에 날개가 있다면, / 두 개의 이상적인 날개를 가지고 태어나 끝까지 날 수 있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 완벽한 날개라고 믿고 정말 끝까지 날 수 있다고 생각 하는가? // 사람들은 모두 화려한 비상을 꿈꾸며 살고 있다. / 자유의 날개, 꿈의 날개, 욕망의 날개 등... // 사람들은 대부분 부족한 날개를 가지고 있다. 너무 작은 날개, 외 날개, 이미 늦어버린 날개 등 / 그러나 부족한 날개로도 꺽을 수 없는 의지가 있다. 날개가 어떻든 꼭 날것이라는 의지이다. // 각각 다른 불편한 날개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들. // 내 인생의 날개는 어떤가? / 내가 가지고 있는 자아의 날개는 어떤 형태인가? / 내게서 한쪽만 있는 나의 날개를 보았다. // 이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의연하게 꿈꾼다. / 그래도...꼭...난다고. (2013) ■ 이원경

Vol.20131203j | 이원경展 / LEEWONKYUNG / 李嫄景 / sculp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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