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강지혜 기자

주인을 다섯번을 바꾼 고려청자, 알고보니 가짜였다.

돈이 급히 필요했던 정성규(가명·52)씨. 평소 알고 지낸 정병남(가명·56)에게 '돈 빌릴 곳이 없느냐'라고 물었다. 정병남은 "고미술품을 자신에게 맡기면 고미술품 전문가를 통해 5000만원을 빌릴 수 있다"고 귀뜸했다.

그러자 정성규는 평소 알고 있던 김민호씨(가명)의 고려청자에 눈독을 들였다. 정성규는 김씨에게 요청해 고려청자와 '시가 3억5000만원'임을 증명하는 감정서를 함께 빌리는데 성공했다.

지난 2월5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 한 커피숍. 정병남과 곽상구(가명·54)는 정성규로부터 고려청자와 감정서를 건네받았다. 이들은 성규씨에게 청자를 담보로 고미술품 전문가에게 대출을 받아주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이들은 애초에 대출을 받아 줄 마음이 없었다. 3억5000만원짜리 고려청자를 손에 쥔 이들이 달려간 곳은 다름아닌 인사동이었다. 인사동 3명의 감정가들로부터 진품 감정을 의뢰하기 위해서다.

감정 결과는 허무맹랑했다. 이들 손에 들린 푸르딩딩한 고미술품은 시가 1만원도 안 되는 가짜 도자기였다. 부당 이득을 챙기려 성규씨와 연락까지 끊은 두 사람의 계획은 틀어졌다.

3억5000만원짜리 '보물'에서 1만원짜리 '애물단지'가 된 가짜 도자기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사기행각에 활용된 것이다.

곽상구는 채무가 있던 최재일(가명)씨에게 "고가의 청자를 담보로 맡기겠다"며 청자를 건넸다. 이후 최씨는 또 다른 지인인 김영수(가명·55)씨에게 도자기를 건넸다.

세상은 좁았다. 도자기를 받은 김영수는 원주인 김민호와 아는 사이였다 고려청자는 또 다른 두 사람의 손을 거쳐 결국 원소유자에게로 돌아갔다. 김민호→정성규→곽상구와 정병남→최재일→김영수를 거쳐 다시 원주인의 손으로 들어간 것이다. 경찰은 이 도자기가 중간에도 다른 사람 여러 명의 손을 거쳤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현재 도자기의 행방이 묘연하다. 원소유주 김민호는 현재 다른 사건으로 교도소에 구속돼 있는데, 구속되기 이전에 내연녀에게 도자기를 맡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내연녀는 다시 모 사채업자에게 도자기를 넘겼고, 이 사채업자는 현재 연락이 두절됐다.

의문이 꼬리를 문다. 허위감정서를 만든 사람은 누구이며, 처음 정성규씨에게 도자기와 감정서를 전달한 김민호는 이 도자기가 시가 1만원도 안 되는 '짝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최재일과 김영수는 이 도자기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받았을까. 내연녀는 사채업자에게 무엇을 대가로 도자기를 넘겼을까.

따져보면 피해자인 정성규가 입은 피해는 1만원이다. 그래도 피해자를 속이고 고려청자를 훔쳤기 때문에 죄는 죄다. 서울 동작경찰서는 4일 곽상구와 정병남씨을 사기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그러나 1만원짜리 가짜 도자기는 또 어디선가에서 3억5000만원이라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의 마음을 동하게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면 피해액수가 엄청나게 불어날 수 있다. 경찰이 내연녀와 허위 감정서 작성자 등의 행방을 쫓고 있는 이유다.

jhkang@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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