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부터 '금강경' 작품전 여는 전각작가 최규일

 

 

한 칼에 한 획. 일도일각(一刀一刻)이다. 한 번 칼이 지나간 자리에 한 획이 솟아난다. 단단하기로 이름난 옥돌이지만 그는 힘으로 제압하지 않는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눕힌다. 무쇠 칼이 돌의 결을 따라 달리며 그를 드러내준다.

 현노(玄老) 최규일(74)씨는 전각(篆刻)을 “돌과 하는 여행”이라고 부른다. 사방 한 치 넓이 방촌(方寸), 손톱만한 돌에 파는 문자의 세계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할 만큼 좁쌀만 하지만 때로 우주를 품는 심장의 박동이 담긴 너른 대지다.

 “다른 건 몰라도 열심히 한 건 나와 대적할 자가 없을 거요. 평범한 자보다 치열하게 살았다고 평가받는 사람의 500배쯤 노력하는 게 나요. 새벽 4시부터 자정까지 목숨 부지할 정도로 먹고 쉬는 외엔 오로지 도장 파는 놈으로 살았소. 우리나라가 ‘도장의 나라’로 유명한데 아마 역대 도장을 다 모아도 내가 판 도장의 양을 못 따라갈 거요.”

 현노는 “내가 방촌을 깨뜨려버렸소”라고 말했다. 소위 각(刻) 좀 한다는 이들이 모두 방촌에 갇혀 옴짝달싹 못할 때 그 사각의 틀을 깨고 칼 놀이를 예술의 경지로 자유롭게 춤추게 했다. 『도덕경』 『지장경』을 거쳐 올해는 『금강경』이 그의 무쇠 칼 밑에서 놀았다. 27일부터 12월 3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는 ‘현노 최규일 금강경’ 작품전은 전각에 대한 기존 시각을 뛰어넘어 돌연(突然)과 아연(啞然)이 교차하는 격을 보여준다.

최규일씨의 `금강경` 전각.

 

 

 “우리 예술계는 전통과 보수에 절어서 새것을 받아들일 줄 몰라. 겉만 번지르르하게 발라 그걸 돈으로만 평가하니 진품은 어디 가고 명품은 또 어디 있느냐 말이요. 나라가 발전하려면 눈이 바로 박혀야 하는데…. ”

 그는 “한때 중국과 일본의 전각이 한국보다 300년 앞섰다 했지만 이젠 우리가 100년쯤 앞지른 수준에 올랐다”고 자평했다. 유럽이 먼저 우리 전각의 예술성을 알아보고 초대전을 열어줬다는 것이다.

 “비단이 오백년 가고, 종이가 천 년 간다 하지만 돌에 새긴 전각은 우주가 끝날 때까지 갈 겁니다. 내 딴 건 몰라도 한다는 놈들 ‘양으로 기 죽이기’ 분야에선 일등일겁니다. 경전 판 돌 도장 5000개가 내 두둑한 자산이자 양심이오. 나라가 내가 흘린 땀과 피를 좀 알아서 기념관을 지어준다면 좋겠지만….”

 “작업할수록 날카로워지는 나의 칼 맛을 알아줄 이 어디 계신가.”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글=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최규일=1939년 생. 호는 현노(玄老). 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 사진작업을 하다 나이 서른이 넘어 전각의 세계에 입문해 독학으로 한 경지를 이룬 뒤 일본·독일·프랑스 현지 전시로 큰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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