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식선생의 서거 1주기를 맞은 추모 사진전 ‘북촌’이 지난 19일 ‘갤러리인덱스’에서 개막되었다.

 

‘북촌’은 선생께서 태어나고 자란 서울의 북촌 일대를 기록한, 1978년부터 1990년대 까지의 북촌 풍정이다.

 

선생께서는 생전에 기록사진이야말로 사진의 존재 이유임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보낸 북촌을 기록했는데, 찍을 무렵부터 서울은 변하고 있었다고 한다.

 

기록사진은 된장이나 와인처럼 묵혀야 더 깊은 맛이 난다는 말씀처럼,

30년이 지나서야 ‘북촌’사진집을 펴내며 작품을 발표했다.

 

선생께서 남긴 리얼리즘 사진으로는 ‘북촌’ 외에도 ‘흔적’과 ‘마구간 옆 고속도로‘가 있다.

 

사진의 예술성에 뜻을 두신 선생께서는 '중앙대' 사진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리얼리즘 사진과 결별한다.

 

그 이후부터 법문 같은 ‘고요’라는 정적감 도는 예술사진에 천착하며 일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나라 사진사에 주명덕선생의 검은 풍경보다 ‘혼혈아’가 먼저 오르고,

한정식선생의 ‘고요’보다 ‘북촌’이 호출되는 것이 무엇을 말하겠는가?

 

사진의 기록성에 초점을 맞춘 선생의 작품들은 세월에 숙성된 사진이라

보면 볼수록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켜, 마음이 따뜻해진다.

 

전시된 ’북촌‘사진에는 근대화, 도시화 물결 속에서 차츰 변해가는 거리와 골목,

가지런한 기와, 다소곳한 처마, 고즈넉한 창살,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오롯이 담겼다.

 

“이 ‘북촌’은 내 개인 기록이다.

사진으로 엮은 나의 고향이야기로, 내가 아는 서울, 내가 느끼는 서울,

내 기억 속의 서울이 여기 담겨 있을 뿐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서울의 북촌지역이었다.

그리하여 ‘서울’하면 내게 그것은 그대로 북촌을 뜻한다.

나의 발길이 북촌에만 머문 이유요, 북촌만으로 이 사진집을 엮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기야 서울이라고 하면, 특히 옛 서울은 대개 북촌지역이 중심이었다.

따라서 이 ‘북촌’은 북촌이로되 실은 그대로 나의 서울이야기다”고 사진집 서문에 썼다.

 

한정식 ‘북촌’ -나의 서울-128페이지 230*280mm 서적 40,000원

‘북촌’ 사진집에는 흑백사진 80여 점이 실려있다.

 

추모의 시간을 가진 사진전 개막식에는 생각보다 추모객이 적었다.

 

긴 세월 강단에서 선생의 가르침을 배운 제자들은 다 어디 갔으며,

수시로 불러 모아 인사동에서 정 나누었던 주변 사진가들은 다 어디 갔는가?

‘죽고 나면 명예도, 작품도, 인연도, 아무 소용없다’는 생전의 말씀이 생각나는 시간이었다.

 

그날 개막식에는 ‘갤러리인덱스’ 안미숙 관장을 비롯하여

전민조, 강용석, 이일우, 이기명, 최연하, 김정일, 곽명우, 정영신, 한선영, 김창주씨 등

20여명의 사진가들이 모여 조촐한 추모의 시간을 가졌는데,

공교롭게도 이 전시를 기획한 ‘눈빛’ 이규상 대표마저 늦은 코로나에 걸려 참석하지 못했다.

 

전시는 7월 31일까지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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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사진가 한정식선생께서 건강에 빨간불이 켜진지 오래다.
인사동 오피스텔을 처분하고 자택에 들어 가신지가 일 년이 가까워 온다.
해마다 신년만 되면 가까운 분들을 인사동에 불러 모아 오찬회를 베풀었으나,
올해는 나오실 수가 없어 못한 것이다.
일체 바깥출입을 하지않아 문안드리고 싶었으나 그마저 사양하셨다.





지난 16일 모처럼 정영신씨의 주선으로 한정식선생 댁을 방문하게 됐다.

사모님과 함께 계셨는데, 한 때는 사모님이 더 위중하셨으나, 이젠 선생님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



 


선생님의 구체적인 병명은 알 수 없으나, 잠을 통 주무시지 못한다는 것이다.

술도 수면제도 통하지 않아, 용하다는 한의원마다 다녀보았으나 소용없었다고 하셨다.

소문난 대부분의 한의사나 침술사들이 엉터리라 믿을 수 없었단다.

의사의 치료나 처방을 받아보면 대개 그 속내가 들여다보인다는 것이다.

침을 맞고 약을 먹어도 술수를 훤히 알아 믿지를 못하니 나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설사, 밀가루로 만든 가짜 약이라도, 믿는 환자는 나은 사람도 있었다는데...



 


외출도 멀리는 못하지만 가까운 곳은 조금씩 움직여 외식 정도는 드시러 가셨다.

인근의 고기 집에서 함께 식사를 했는데, 드시는 데는 전혀 지장 없었다.

식사 도중, 댁으로 손님이 찾아온다는 전화가 왔는데 사전에 약속을 했다고 하셨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선생님의 북촌사진을 소장하기 위해 찾아 온 단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니, ‘예술종합상사 봄을 운영하는 문화기획가 이일우씨와

역사박물관학예사 한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준비해둔 견본 사진들을 보여주며, 모두 가져가 필요한 사진을 고르라고 하셨다.

그런데, 몇 장을 매입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머지 사진을 기증해 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평소에 선생님께서도 원고료 없이 주는 사진이나 사진 기증하는 문제는

어렵게 작업하는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절대 안 된다고 말씀하셨으나, 그 날은 묵묵부답이셨다.



 


추측컨대, 사진하는 제자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하기 힘드셨거나,

아니면 오래 사지지 못한다고 생각되니 확실한 곳에 넘겨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손님들이 자리를 떤 후 선생님께 간곡하게 부탁 말씀드렸다.

선생님! 절대 사진을 그냥 주지 마십시오. 힘들게 사는 후배들의 희망이 끊깁니다.”고 했다.





어느 분야의 예술이건 작가들의 삶이란 곤궁하기 짝이 없다.

예술계 전반의 문제지만, 그중에서도 가난한 작가는 사진가이고, 사진 중에서도 기록에 전념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사진 수집은 가난한 다큐사진가들이 국가에서 보상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바늘구멍 같은 곳인데,

기증하는 사례가 늘어나면 그 구멍마저 막힐까 걱정하는 것이다.



 


사실 국가 기록사업은 정부에서 해야 할 일이지만, 그동안 손을 놓고 있었다.

돈과는 무관한 기록 사진 찍느라 가정이 파탄되거나 온갖 어려움을 겪는 사진가들이 많으나 정부에서 도와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큐멘터리사진을 전공하고 사회에 나와도 대개 버텨내지 못하고 전업하는 실정이다.

아무리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지만, 모든 걸 희생하며 찍어 온 결과물을 털도 뽑지 않고 통째로 먹겠다는 게 말이 될 소리냐?

어떻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사는 사진인들에게 좌절을 안겨주려 하는가?



 


이미지 홍수시대에 살고 있으나, 오래된 사진이나 기록적가치가 높은 사진은 차원이 다르다.

예술 보다 소중한 기록의 역사성을 하잖게 여기니, 어찌 역사가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수 많은 사진가들의 소중한 사진자료들이 쓰레기더미에 쓸려나가도 누구하나 나서는 이가 없고, 정부도 사회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평생 찍어 온 필름들이 집안의 애물단지처럼 굴러다니다 본인이 세상을 떠나면 그냥 사라지고 만다

이제 정부도 대승적인 차원에서 대처해야 되겠지만, 담당 공무원들도 실적 위주로 그냥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진인들도 개인적인 이해득실보다 다른 사진가들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스스로의 권익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다.



 


하기야! 사진을 전공한 사람조차도 사진인을 등쳐먹는 사례가 한 둘이 아니다.

대개 사진라이브러리 운영하는 사람들인데, 정직하게 계약대로 주는 경우는 더물다.

맡긴 사진의 판매된 곳을 알 수 없으니, 도용이 발각되어야 변명하며 돌려주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 여지 것 사진라이브러리를 불신하여 한 번도 원고를 맡긴 적이 없으나, 8년 전 믿을 만한 사진후배의 부탁에 처음 주었다.

유로 크레온이란 라이브러리를 만들었다며. 외국 포토에이전시와 연결되어 잘 팔릴 거라는 막연한 말을 믿었다.

전통문양이나 불교문화에 관한 팔릴만한 많은 사진들을 주었는데, 여지 것 감감소식이다.

물론, 팔 년동안 한 컷도 팔리지 않아 돈을 보내지 않을 수도 있으나 전화는 물론 우편물 한 장 받은 적이 없다.

 

더구나, 처음 시작할 때는 전모씨와 동업했는데이해관계로 전씨가 먼저 물러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유로 크레온자체가 어떻게 되었는지 오리무중이고, 두 사람 모두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만약 사업을 접었다면, 최소한 사정에 의해 폐업했다고 통보하며 원고라도 돌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지 것 그의 체면을 보아 기다렸지만, 이젠 소송절차를 밟기로 했다.

나 혼자만의 피해가 아니라 많은 사진인들을 위해서라도 그냥두지 않을 것이다.

유로 크레온은 물론 다른 라이브러리에서도 피해를 본 사진가는 모두 나서자.

힘을 합쳐서 기어이 손해배상을 받아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퇴를 가해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사진인들의 원고를 사후에 한 곳에 기증하여 보관하는 협동조합을 만들자.

그 곳에서 다양한 원고를 관리 판매하여, 가난한 사진가들의 작업비나 사진인 복지에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

많은 사진가들이 참여하여 투명하게만 활용한다면 정부에서 활용하는 것 보다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고,

그 수익금으로 미래의 사진가들을 도울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물론, 장터사진가 정영신씨도 평생의 기록물을 흔쾌히 기증하겠다고 답했지만,

원로사진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진원고 기증을 권할 생각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혜를 모아, 사진가들의 삶이 나아지고, 우리나라 사진 발전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권익은 우리가 찾아야지, 아무도 대신 해 주지 않는다.

 

 

사진, / 조문호








한국의 사진발통 곽명우씨가 사진 소장의 가치를 일깨우는 전시로 훈훈한 연말을 연출하고 있다.

작품을 소장하는 기쁨“의 사진전은 지난 18일부터 오는 30일까지, '사진위주 류가헌'에서 열렸다. 

이 소장전에는 국내외 작가의 사진 40여점이 선 보인다.



이갑철작

 

 

그는 2003년 프랑스사진가 베르나르 포콩의 사진가의 방이라는 오픈행사에서,

추첨에 당첨된 행운의 사진이 소장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한 점 한 점 모우기 시작했는데, 원로사진가 황규태선생을 비롯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도 있어,

유 무명을 가리지 않고 스스로 좋아하는 사진들을 골랐음을 알 수 있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사진을 소장할 수야 있지만, 가난한 사진가의 소장전이라 더 돋보인 것이다.



 


사진하는 사람이 곽명우를 모른다면 간첩이나 마찬가지다.

사진판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어디든 마다않고 달려가 

사진바다블로그를 통해 알리는 일을 해 온지도 어언 10년이 넘었다.





이젠 전시 개막식에 곽명우씨가 나타나지 않으면 다들 의아해 할 정도로 기다리는 사진가가 되어버렸다.

파워 블로그로서의 홍보 역량만이 아니라 상대의 소중한 자료를 기록하지만,

보수는커녕  인사도 제대로 없는 야박한 현실이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부지런하게 몰아 붙이는 사진기록에 대한 소명의식은 오늘도 쉼 없이 사진발통을 굴리게 한다.



 


가난한 처지에 허구한 날 봉사만 하고 어떻게 사는지 늘 궁금했는데,

좋아하는 사진을 구입해 소장전 까지 연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사례로 받은 작품도 있다지만, 형편에 맞추어 꾸준히 사 모았다고 한다.

장가를 들지 못한 노총각이라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벌써 쫓겨났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진을 구입해 이득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진인이 사진을 사주지 않는 현실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라 더 가상한 것이다

사진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될 수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할 것 같아요

순수한 곽명우 작가의 말에서 사진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지난 22일 오후5시 무렵 전시장을 찾았는데, 곽명우씨는 스스로의 오프닝 행사를 찍기 위해 장비를 챙기고 있었다.

전시장에는 양재문, 엄상빈, 이기명, 이규철, 박찬원씨 등 반가운 사진가들도 여럿 만났으나, 모르는 분이 더 많았다.

이미 잊혀진 구세대, 즉 꼰대가 되었다는 걸 다시 절감한 것이다.



    

 

그 날 따뜻하게 데운 와인 두 잔에 마음이 따뜻해 진건, 술 기운보다 사진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아하는 사진을 갖고 싶어도 사진가들이 가난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현실이 아니던가.

사진가끼리 좋아하는 작품을 교환하는 방법은 어떨까? 생각들기도 했다. 






사진 사랑의 곽명우씨 인사말에 이어 '레드로우'의 공연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었으나,

다른 약속이 있어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다.





아무쪼록, 그 작품들이 또 다른 분들의 소장으로 이어지는 빛나는 전시가 되어지길 바란다.

새해에는 여러분의 소망이 다 이루어지길 기원한다.


 

사진, / 조문호





-전시 작품 사진가-

베르나르 포콩, 황규태, 조문호, 엄상빈, 김남진, 양재문, 김대수, 최광호, 김광수,

진동선, 이갑철, 최병관, 신현림, 최영진, 이정록, 양승우, 이동준, 박태희, 이순행,

현경미, 김원섭, 이건영, 차경희, 이주영, 조병준, 최인수, 사  타, 최수정, 정희승,

권도연, 조현택, 박재현, 권오철, 김지연, 손기헌 남 준, 허영환.

우리카미 마스카즈. 래드로우 고니,










앙드레 케르테츠展 / André Kertész / photography
2017_0609 ▶ 2017_0903 / 월요일 휴관



앙드레 케르테츠_몬드리안의 안경과 파이프 Mondrian's Glasses and Pipe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26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주관 / 성곡미술관

협력 / 프랑스문화부_주드폼 국립미술관_디크로마 포토그라피


도슨트 / 02:00pm, 04:00pm / '문화가 있는 날'은 07:00pm 추가 진행


관람료

성인(만 19~64세) 10,000원 / 청소년(만 13~18세) 8,000원

어린이(만 4~12세),국가유공자,장애인,만 65세 이상 6,000원

단체 20인 이상 20% 할인 / 만 4세 미만 어린이 무료관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문화가 있는 날(매월 마지막주 수요일)_10:00am~08:00pm*

전시종료 30분전 매표 및 입장 마감



성곡미술관

SUNGKOK ART MUSEUM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42(신문로 2가 1-101번지)

Tel. +82.(0)2.737.7650

www.sungkokmuseum.org



성곡미술관은 여름특별전으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앙드레 케르테츠(André Kertész, 1894-1985)의 사진전을 개최한다. 케르테츠는 70여 년의 오랜 활동 기간 동안 부다페스트, 파리, 뉴욕을 옮겨다니며 작품 세계를 펼쳤다. 그는 사조나 유행에 얽매이지 않고 사진을 통해 일기를 쓰듯이 자신의 솔직한 감성을 자유롭게 담아냈다. ● 독학으로 사진을 익힌 케르테츠는 "내가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표현한다"는 자신의 작업원칙에 충실했으며, 나아가 사진매체의 잠재적 표현 가능성들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새로운 과학 기술을 기반으로 한 신속, 정확한 카메라를 통해 일상의 풍경을 치밀한 화면 구성과 흑백의 농담으로 더 깊고, 세밀하게 담아내었다. 케르테츠는 어떤 사조나 그룹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다다, 초현실주의, 구성주의 같은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때로는 그들을 앞서나가는 혁신적인 작업을 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이 "우리가 해온 것들은 모두 그가 처음으로 했던 것"이라는 말로 칭송했던 케르테츠는 브라사이Brassaï, 로버트 카파Robert Capa 등 사진의 거장들을 리드하며, 향년 91세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작업을 이어갔다. ● 이번 전시는 그가 일생에 걸쳐 작업한 189점의 작품들을 헝가리(1912-1925), 파리(1925-1936), 뉴욕 시기(1936-1985)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선보인다. 케르테츠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84년 필생의 작품들을 보존하겠다는 열망으로 10만 점의 원판 필름과 1만5천 점의 컬러 슬라이드 소장본을 프랑스 문화부에 기증했다. 본 전시는 그 원판으로 프린트한 모던 프린트로 구성되었다. ● "나는 빛으로 글을 쓴다." / "나는 기록하지 않는다. 나는 해석할 따름이다." / "좋은 사진은 우리 눈에만 뭔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을 건드린다. 두 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시각은 항상 이미지와 영혼 사이를 오간다." / "나는 오직 파리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파리에 갔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한동안 생활할 수 있는 약간의 돈이 있었고, 그리고 내겐 창조적 힘과 꿈이 있었다." (앙드레 케르테츠)


시기별 작품세계 - Ⅰ. 헝가리 시기(1912-1925) ● 1894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앙드레 케르테츠는 1912년 처음으로 카메라를 구입한 후 마치 일기를 쓰듯 전원의 목가적 생활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촬영했다. 특히 남동생 예뇌Jenö를 비롯한 가족들, 친구들은 작가의 모델로서 훌륭한 피사체가 되어 주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으로 징집된 그는 전장에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는데, 드마라틱한 전투 장면보다는 군인들의 소소한 삶의 모습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 이 시기부터 케르테츠 사진에는 휴머니즘적 감수성과 아방가르드적 실험성의 전조가 동시에 드러난다. 사진작가로서 첫 발을 내디딘 그는 자유로운 사고와 감성에서부터 발원하는 영감을 기반으로, 자신이 애정을 두고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 풍경들을 시적이고, 서정적으로 표현하고자 다양한 방식을 모색했다.


앙드레 케르테츠_수영하는 사람 Swimmer Under Water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17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Ⅱ. 파리 시기(1925-1936) ● 1925년, 현대미술의 본거지인 파리의 몽파르나스 구역에 자리를 잡은 케르테츠는 다다, 초현실주의, 구성주의 등 모더니즘 예술운동의 선구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한다. 특히, 만 레이Man Ray, 몬드리안Mondrian, 브랑쿠시Brancusi, 샤갈Chagall, 그리고 콜레트Colette와 짜라Tzara와 같은 예술가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파리에서 예술가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 케르테츠는 파리의 수많은 신문과 잡지에 자신의 사진 작품을 출판하였고, 주요 전시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필름과 포토Film und Foto』(1929) 국제전에 만 레이와 함께 파리 아방가르드를 대표하는 작가로 참여한다. 1933년 여성의 누드를 뒤틀리게 표현한 「왜곡」 시리즈를 내놓아 보다 전위적인 시각적 실험을 전개했다. 이러한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케르테츠는 자신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특정 예술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대신 모더니즘의 실험적 조형 언어인 '거울 유희', '반사', '그림자와 복제', '전면 구성', 혹은 '야경과 명암의 대비' 등을 자신의 표현기법으로 소화하여 작업에 반영함으로써, 자유로운 정신과 새로운 비전을 추구하는 사진적 아방가르드의 주역이 된다.



앙드레 케르테츠_포크 The Fork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28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앙드레 케르테츠_깨진 원판 Broken Plate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29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왜곡 Distortions」(1933) 시리즈 ● 1930년 『뷔VU』 잡지가 카를로 림Carlo Rim 신임 편집장의 초상화를 앙드레 케르테츠에게 주문하자, 그는 편집장을 놀이동산의 '뒤틀린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하게 한 후 촬영하여 괴물처럼 변형된 놀라운 이미지를 제작한다. 이어서 케르테츠는 1933년 도색 잡지 『미소Le Sourire』의 주문을 받아 한층 더 왜곡된 여성 누드 사진을 제작함으로써 자신의 예술적 실험을 한발 더 전진시킨다. 이렇게 탄생한 「왜곡」 시리즈를 케르테츠는 '파리 시기'에 본격적으로 작업하였다. 하지만 이 실험적 작업은 이미 '헝가리 시기'부터 일종의 '광학적 변형' 또는 '그림자의 투영'에 관심을 두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기하학적 구도가 돋보이며 빛을 효과적으로 다룬 「수영하는 사람」(1917)과 「포크」(1928)는 「왜곡」시리즈의 전조를 알리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기이함과 기괴함을 통해 역설적으로 여성신체의 신비로움을 깊게 탐닉한 「왜곡」 시리즈는 이미지에 대한 케르테츠의 반 사실적, 반 묘사적 개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축 쳐진 목과 늘어난 발, 기괴하게 뒤틀린 이미지들은 곡선으로 이뤄진 루벤스Rubens의 풍만한 여성의 몸이나 앵그르Ingres의 지나치게 긴 척추를 가진 여인의 메아리로 보이기도 하고, 또는 벨머Bellmer의 절단되고 불구가 된 인형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한편으로 이러한 시도는 초현실주의가 추적한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실험과도 맞닿아 있는데, 당시 케르테츠를 비롯해 만 레이, 브라사이, 카르티에 브레송과 같은 작가들 역시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를 이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현실을 변형, 왜곡시키는 실험적 이미지들을 다수 제작했다. 이러한 「왜곡」 시리즈는 당시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한참 뒤에 재조명되었는데, 뉴욕 시기의 후반부인 1976년에 이르러서야 12컷의 왜곡 이미지로 구성된 책이 출판되었다


앙드레 케르테츠_샹젤리제 Champs-Elysée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29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Ⅲ. 뉴욕 시기(1936-1985) ● 1936년 케르테츠는 사진 대행사 키스톤Keystone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고 아내 엘리자벳과 함께 뉴욕으로 떠났다. 하지만 계약은 1년 남짓 지속된 후 파기되었다. 『보그Vogue』, 『하퍼스 바자Harper's Bazzar』 등 다수의 잡지사들이 케르테츠의 작업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의 사진은 대중적 이미지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37년 뉴욕의 PM갤러리와 1946년 시카고미술관에서의 전시회에도 불구하고 뉴욕에서의 그의 생활은 심적으로 물질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했다. 적은 수익, 연이은 실패, 「왜곡」 시리즈에 대한 몰이해와 외국인으로서의 장벽 등이 결국 그에게 우울증을 안겨주었다. 1944년 미국 시민권을 얻은 케르테츠는 1947년 『하우스 앤 가든House & Garden』지와의 작업을 위해 콘데 나스트Condé Nast 그룹사와 독점 계약을 체결했지만, 주로 인테리어 사진을 제공해주던 그는 안정된 수입원을 확보할 수는 있었으나 상업적 작업을 지속하기가 힘들었고 결국 1961년 은퇴를 한다. ● 아울러 워싱턴 스퀘어가 내려다보이는 5번가 12층 아파트에 정착한 1952년 이후 다시 작업의 열정을 되찾기 시작하는데, 아파트의 테라스에 머물며 망원렌즈의 줌을 이용하여 주변의 생활을 포착하는 작업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트리트 포토그래퍼'처럼 거리와 장소를 옮겨 다니며 시대적, 사회적 장면에 몰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광장에 머무는 사람들의 특이한 행태와 풍경을 오랜 시간 기다림 끝에 마치 '발견된 오브제'처럼 찾아내었다. 케르테츠에게 뉴욕은 자신의 다양한 생각들의 공명상자와도 같아서, 그 생각들을 사진이라는 메아리로 돌려주는 것뿐이었다. 직관적이고 암시적인 그의 스타일은 뉴욕의 황폐한 벽돌 담, 그림자나 철근, 외부 계단의 얽힘 속에 자신의 멜랑콜리를 주입하기에 충분했다. ● 케르테츠의 예술성은 삶의 후반에 들어서며 높이 평가받기 시작했다. 1959년 『인피니티Infinity』지가 게재한 케르테츠에 관한 기사는 그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1964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하게 된다. 이 전시를 계기로 세계 주요 도시에서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순회전이 이어졌다. 또한 이즈음 그는 뉴욕으로 건너오기 전 파리에 남겨 두었던 원판 필름 상자를 찾아왔다. 헝가리와 파리 시기의 자신의 작품들을 다시 접하게 된 케르테츠는 생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어서 발행한 두 권의 책 『나는 파리를 사랑한다J'aime Paris』(1974)와 『뉴욕에 대하여Of New York』(1976)는 케르테츠가 파리와 뉴욕의 서로 다른 문화 환경 속에서 겪은 갈등을 보여준다. 1977년에는 파리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에서 케르테츠의 개인전이 열렸는데, 안타깝게도 부인 엘리자벳이 전시 개막 직전에 사망한다. 이후 케르테츠는 세상을 떠난 엘리자벳에 대한 사랑을 담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다수 제작한다. 그에 따르면 폴라로이드는 "작품의 내재적 요소를 보다 더 수월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었다. 케츠테츠는 1985년 9월 28일 뉴욕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앙드레 케르테츠_길 잃은 구름 Lost Cloud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37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앙드레 케르테츠_우울한 튤립 Melancholic Tulip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39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라이프Life』지 편집장은 1937년 케르테츠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그의 작품을 게재하기를 거절했는데, 왜냐하면 그의 이미지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케르테츠의 사진들은 우리를 반성하게 만들고 문자 그대로의 뜻과는 다른, 어떤 의미를 암시했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중)성곡미술관


전시연계 특별강연회 (장소 / 성곡미술관)

1. 앙드레 케르테츠와 모더니즘 예술운동 | 6월 24일 (토) 2-4PM   - 박상우 (중부대학교 사진영상학과 교수)

2. 앙드레 케르테츠의 헝가리와 파리 시기의 사진 | 7월 8일 (토) 2-4PM   - 진동선 (사진평론가, 현대사진연구소 소장)

3. 미국 현대사진에 대한 앙드레 케르테츠 | 7월 15일 (토) 2-4PM   - 박상우 (중부대학교 사진영상학과 교수)

4. 앙드레 케르테츠의 뉴욕시기의 사진 | 7월 29일 (토) 2-4PM   - 진동선 (사진평론가, 현대사진연구소 소장)

5. 포토저널리즘과 앙드레 케르테츠 | 8월 12일 (토) 2-4PM   - 이기명 (『사진예술』 발행인)

6. 스냅사진과 그 대가들 | 8월 19일 (토) 2-4PM   - 최연하 (사진평론가, 독립큐레이터)


* 당일 전시 입장권 소지자 강연회 무료 참석

* 이메일 info@sungkokmuseum.org 로 사전 신청가능

케르테츠 패스 30,000원 



Vol.20170610e | 앙드레 케르테츠展 / André Kertész / photography





지난 2월16일, 사진가 양재문씨의 ‘비천몽’전시가 율곡로 ‘아트링크’에서 열렸다.
기다린 전시였으나, 꾸물대다 30분이나 늦었다.

전시장에는 작가를 비롯하여 ‘아트링크’ 이경은 관장, 사진가 황규태, 김녕만, 곽영택, 이기명,

강홍구, 김복남, 곽명우씨등 많은 사진가들이 보였으나, 강홍구씨의 노래는 이미 끝나버렸고,

춤꾼의 치맛자락만 봄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전시된 작품들을 돌아보니, 추는 춤과 걸린 작품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아트링크’갤러리가 마치 이 전시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처럼 생각되었다.

정사각형으로 이어진 한옥의 회랑  마당에서 춤을 추었는데,

실제의 춤사위보다, 벽에 걸린 꿈결같은 춤이 더 아름답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사진에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난 사진의 가치를 기록에 두어 그런지,

비현실적이거나 작가의 주관에 의한 작품은 사진보다 미술로 보는 고집스러움이 있다.

현실보다 비현실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에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도 느꼈다.

양재문씨는 30년 지기의 오래된 사이지만, 살기가 바빠 그런지 참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전시를 보니 20여 년 전에 보았던 ‘풀빛여행’이란 전시가 떠올랐다.

그 몽환적 춤 여행이 아직 선명한데, 이번엔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었다.

마치 한 폭의 수묵채색화처럼 아름다워, 육감까지 동했다.


작가는 어머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춤사위에 담았다고 한다.

느린 셔터로 잡은 흔들리는 동작은 자신도 느끼지 못한 무아의 경지에 달했는데,

내가 볼 때는 흥행이 될 것 같았다.

사진평론가 이경률씨는 “어떠한 구체적인 정보도 주지 않는 작가의 사진들은 하늘로 비천(飛天)하는

영혼을 보여주듯이 춤사위 그 자체의 기록을 넘어 그것으로부터 반사되고 전이(轉移)된 정신적 생산물로

이해된다”고 말했으나, 에둘러 말하는 관습 때문인지, 원고지 채울 요량인지, 머리가 좀 지끈거렸다.

어쨌든, 오늘 좋은 사진전과 반가운 사람들 만나 기분 좋았다.
양재문씨의 작품이 쌕시하다는 곽영택씨 말처럼, 내 식으론 꼴리는 사진이었다.
뒤풀이는 '북촌만두'에서 인사동 ‘촌’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마셨다.


자기자랑에다 면전에서 상대방 칭찬까지 해 대는 친구가 있어 좀 껄끄러웠지만,

맞은편에 앉은 미녀 복남씨의 눈웃음에 술은 술술 잘 넘어갔다.

취기가 너무 올라, 마구초 한대로 진정시켜야 했다.

‘귀천’에서 모과차 한 잔으로 속 풀고, 돌아오는 길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내 십팔번 “연분홍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라는 노랫말처럼,

조지피면 같이 웃고, 조지지면 같이 울고 싶었다.


"꿈에서 몽정이나 한 번 했으면..."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7일 우리시장 기살리는 '장에 가자' 전람회가 한 달간의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동안 많은 관람객들이 본 프로젝트에 동참하였고, 1,216명의 초상사진을 촬영해 드렸습니다.
전시 첫 날에는 개막행사로 인해 참석하신 많은 분들을 촬영해드리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KBS다큐 촬영에 의해 정선으로 떠난  2일에는 사진가 곽명우씨가 수고해 주셨고,
전시 마지막 날에는 누님 장례 치루느라 약속을 못 지켜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4월부터 전국 장터를 순회하며 힘을 결집할 생각입니다.
캠페인에 함께 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리며, 지속적인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도예가 김용문씨

 

철학자 채현국선생

 

원로 언론인 임재경선생

 

가정주부 장봉숙씨

 

사업가 이대훈씨

 

아프리카 봉사활동가 노인자씨

 

장봉숙, 심우성, 강송림시인

 

포항MBC 편성국장 최부식씨 부자

 

미래촌 김만수 동장

 

클라라, 사업가 김영재씨

 

2018평창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유승근 인력물자부장

 

서양화가 서길원씨

 

회사원 김기훈씨

 

사업가 권영진씨

 

시인 강송림씨

 

소설가 김정례씨

 

도예가 황예숙씨

 

문화기획가 홍명도, 이상철부부

 

사업가 김욱수씨

 

영화배우 양희경씨

 

사진가 이기명씨

 

회사원 심지윤씨

 

회사원 김중호씨

 

경기도미술관장 최효준씨

 

사업가 김택호씨

 

가정주부 조근숙씨

 

 

 

 

 

 

 

 

 

 

 

 

 

 

 

 

 

 

 

 

 

 

 

 


 

지난 12일 인사동 ‘양반댁’에서 이명동선생님을 모시는 사진가들의 오찬 모임이 있었다.

이명동 선생을 비롯하여 육명심, 한정식, 황규태, 이완교, 구자호, 전민조, 유병용,

이기명씨 등 열명이 모여 정겨운 환담을 나누며 또 한 해를 떠나 보내는 아쉬움을 달랬다.

그 날은 돌아가며 차례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육명심선생의 제안으로

사진에 관한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대구사진비엔날레’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구자호선생으로 부터 여러 가지

그 뒷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고, 이완교씨는 파리비엔날레에 초대되었던 당시의 보람과

애로를 말했다. 그리고 육명심선생은 몇일 후에 티벳 작업을 정리한 사진집이 나온다는

말씀을, 한정식 선생은 지병에서 해방되어 사진촬영을 다녀 온 말씀을 하셨고,

이기명씨는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제주 해녀’ 프로젝트 대한 뒷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전민조씨는 역사박물관에 소장된 작가들을 초대한 심포지움에 대한 이야기를,

유병용씨는 내년 5월에 있을 개인전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내 정영신과 600여개 오일장 순례를 마감하고, 그 보고서 형식의 전시를

올 연말에 하기로 했으나, 출판이 지연되어 내년 1월20일로 연기되었다는 말을 했다.

마지막으로 황규태 선생 차례가 되자 황선생의 말씀이 걸작이었다.
“나는 할 말도 없고, 조형! 그 팔팔이나 하나 줘요”


사진,글 / 조문호

 

 

 

 

 

 

 

 

 

 

 

 

 

 

 

 

 

 

 

 

 

 

 

 

 

 

 

 

 

 

 

 

 

 

 

 

 




그동안 이명동선생을 모시는 오찬회를 인사동에서 정기적으로 가져왔으나, 이번에는 이명동선생의 전시가 열리는 ‘한미사진미술관’이 있는 ‘어양’ 중식레스토랑에서 모임을 가졌다.

지난 7월 28일 정오에 가진 오찬회에는 이명동선생을 비롯하여 육명심, 한정식, 이완교, 전민조, 조문호, 구자호, 김영수, 유병용, 이기명, 고 김기찬씨 미망인 최경자씨등 모두 열 한 명이 참석하였다.

오랜 세월동안 한국사진사를 정리해 오신 육명심선생께서 우리나라 근대사진사에서 이명동선생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다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나라 초창기 사진은 대부분 사진관 인물사진이었지요. 그 때의 사진관은 상류층들이 주로 활용하는 곳으로 대개 연미복을 입고 찍었어요. 사진관을 운영하는 사진가들도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엘리트로 국내작가로는 이해선, 서순삼, 현일영, 박필호씨 등이 주도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명동선생께서 당시로는 아마추어 사진가에 불과한 임응식씨를 내 세워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하며 사진계 흐름을 완전히 뒤집은 거지요. 그렇지만 그때 나는 이명동 선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사진협회 창설이나 '동아사진콘테스트'로 사진판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이 싫었거든요. 그런데 이명동선생의 숙적이나 마찬가지였던 사진가 이종화선생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갔더니, 문상 오신 이명동선생께서 달구 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장례가 끝 날 동안 지키고 계셨어요. 결국 이명동선생의 인간적인 면모에 끌려 생각을 바꾸게 된거지요. 그동안 사진계에서 이명동선생의 도움을 받지않은 분이 별로 없지만, 그중에서 임응식선생과 임선생의 직계였던 홍순태교수가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한 번 도와주기 시작하면 끝까지 도와주는 그런 분이예요. 모든 공적과 실리를 임응식선생께 돌리고 뒤에만 계시던 이명동선생께서 임응식선생이 세상을 떠나시니, 그 아들 임범택씨를 위해 팔방으로 애쓰셨어요. 분명한 가치관과 인간적인 의리로 똘똘 뭉친 분이지요.”

올해로 이명동선생의 연세가 아흔다섯에 이르지만 건강상태는 물론 기억력까지 너무 좋아 팔순 정도의 연세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 백수는 물론 아직도 십년 정도는 건강하게 사실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사진계의 최고 원로이자 산증인이지만, 병석에 계신 사모님 간병으로 만년을 쓸쓸하게  보내고 계신다. 사진인들의 모임이 있을 때면 나오셔서 사진계 비사들을 들려주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면 낙이다. 유병용교수가 인터뷰를 가져 많은 사료들을 기록해 놓았다니, 머지않아 한국사진사의 볼만한 책 한 권이 나올 것 같아 기대가 된다.

그리고 이번 모임에는 이명동선생 이야기 외에도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얼마전 사진가 전민조씨와 고 김기찬선생의 미망인 최경자씨가 독일 사진비엔날레에 초대되어 다녀 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울시가 일억 오천만원 상당의 전민조씨 작품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동안 순수사진에 밀려 뒷전에 머물던 기록사진의 가치가 늦게나마 인정받았다는 것은 다큐멘터리사진을 하는 입장에서 엄청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좌로부터 사진가 육명심, 전민조, 이기명, 한정식씨, 한미수석큐레이트 손영주씨, 원로사진가 이명동선생, 고 김기찬

      미망인 최경자씨, 사진가 이완교, 김영수, 구자호, 유병용씨와 앞 줄은 필자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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