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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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브레송’기획전의 “사진인을 찾아서” 세 번째 작가,
이영욱씨의 ‘텅 빈 의미’ 사진전 개막식이
지난21일 오후6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렸다.
난, 사진가 이영욱씨를 20여 년 전에 처음 알았다.
‘삼성카메라’에서 일할 때였는데, 그곳에서 ‘자유공원’이란 사진전을 했다.
그 때는 대개 틀에 박힌 사고에 젖어 있을 때라, 그의 사진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말없는 말들은 ‘자유공원’ 자체를 다시 생각게 했다.
그 후 그를 잊어버렸다. 이름은 잊었으나 ‘자유공원’은 잊지 않았다.
티비, 신문, 잡지 한 권 안보고 살았으니, 세상 돌아가는 꼴을 간첩보다 더 몰란거다.
작년부터 페북과 가까이 하며 모든 걸 알았다.
컴퓨터에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으나, 때로는 정치나 사진판의 구태에 열받기도 했다.
얼마 전, 이영욱씨 사진에 대한 이광수교수의 글이 ‘오마이뉴스’에 올라 있었다.
“사진으로 맥아더 목을 잘라버린 그 남자”를 보고, 이영욱이란 이름을 다시 기억해 낸 것이다.
오랜 기억의 ‘자유공원’을 비롯하여, ‘대상과 침묵의 접촉’, ‘이상한 도시산책’, ‘이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은 무엇인가’,
‘거울의 기억’, ‘북간도’, ‘사진일기, ’불확실한 여행‘, ’아카이브‘ 등 그동안의 작업들을 정리해 놓았는데, 놀라웠다.
그의 시비는 20여 년 동안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기다리던 전시 개막식 날, 서둘러 나왔으나 전시장은 축하객으로 발 디딜 틈 없었다.
김남진 ‘브레송’ 관장이 나와 작가소개를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작가 이영욱씨와 이광수교수가 서있었다.
엄상빈, 정진호, 성남훈, 이상엽, 이갑철, 박신흥, 신동필, 윤성준, 이은숙, 남 준, 김영호, 곽윤섭, 곽명우, 정영신,
강제욱, 고정남, 정태만, 이경자, 권혜진, 이상봉씨 등 많은 분들을 만났으나, 아는 분보다 모르는 분이 더 많았다.
사람이 많아 사진을 꼼꼼히 살펴볼 수 없는 게 아쉬웠으나,
모든 사진은 사물들에 시비를 걸고 있었다. 대상에 대한 반론 재기인 것이다.
기존의 관념을 깨부수는 작품은 마치 선승의 “이 뭣고?”라는 화두 같았다.
처음에는 좀 낮 선 것 같았지만, 신화에 불과한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나라 했다.
그 안에는 역사도, 사회도 없고, 오로지 중지된 현상만 있다고 말했다.
이광수 교수는 작가의 화두가 사실에 대한 '객관성'이라며 열변을 토해냈다.
어떤 현상에 달라붙은 단일적 대표성에 대한 그의 시비는, 신화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라 했다.
'텅 빈 의미'도 아무 의미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의미가 너무 많아 하나의 의미로 고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어찌나 논리 정연한 달변인지, 그의 사진에 푹 빠져 이해하게 했다.
강연이 끝나고 다들 뒤풀이 집으로 옮겼는데, 식당이 꽉 차벼렸다.
즐겁게 술 마시다, 전시장에선 미처 못 본 사진집을 만난 것이다.
‘접촉’이란 이영욱사진집이 눈빛사진가선 23호로 나왔는데, 일단 ‘접촉’이란 제목이 너무 마음을 끌었다.
대충 보았으나 너무 갖고 싶었다. 작품도 꼼꼼히 살펴볼 겸, 다시 찾을 작정이다.
그런데, 그 날 뒤풀이 비용이 제법 많이 나왔을 텐데, 술값을 거두지 않더라.
일단 지갑은 굳었지만, 다들 뻔한 처지라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 전시 제목은 “텅 빈 의미”였지만, 사진은 “꽉 찬 내용”이었다.
이 달 30일까지 계속되니, 꼭 한번 보시기 바란다.
전시장에서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접촉’사진집(12,000원)도 살 수 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이영욱씨의 전시작품과 이광수교수의 글을 보실 분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blog.daum.net/mun6144/3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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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갤러리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 3
이영욱 편 '텅 빈 의미 - obtus'
3월 21일부터 30일까지 / 갤러리 브레송
오프닝 : 21일(월)오후 6시 30분
이영욱, 자유공원, 23.5x105cm, archival pigment print, 1995.
이영욱, 자유공원, 23.5 x 105cm, archival pigment print, 1995.ⓒ 이영욱
이영욱, 자유공원, 23.5 x 105cm, archival pigment print, 1995.ⓒ 이영욱
사진이 보여주는 모양새를 서로 나눠 보고, 그 안에 담긴 뜻을 서로 헤아려 보고, 그 안에서 내 세계를 그려보고, 그로부터 지적 유희를 즐기고, 그것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그런 평가가 있었으면 한다. 그 안에는 주류도 없고, 패거리도 없는 그런 평가가 있었으면 한다. 재미있게 말하자면, 이 땅에 숨겨진 고수를 찾아서 놀이를 하자는 것이다.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물고, 패거리도 없고 갑과 을의 관계도 없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한 세상 멋지게 놀 수 있는 이 땅의 고수를 찾는 놀이다.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글 / 이광수 (부산외대교수, 사진비평가)
아주 아주 오랫동안, 역사학의 관심은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록하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언제 누가 무슨 일을 했고, 왜 그리고 어떻게 했느냐에 관한 관심이었다. 목격이 가장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됐고, 그 위에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어떤 구조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유럽에서 '그 과거를 규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문에 봉착하면서 역사학은 사실 그 자체보다는 사람들이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안에 객관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해석일 뿐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진가 이영욱의 문제의식은 이런 맥락과 연결된다. 그에게 가장 큰 화두는 사실에 대한 '객관성'이다. 신화에 대한 의문이다. 그 의문은 어떤 현상에 대해 남긴 기록이라는 것에 달라붙은 단일적 대표성에 대해 건 시비이고, 나아가 사진에게까지 달라붙은 그 객관성이라는 신화에 대한 도전이다.
사진가 이영욱의 작품을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가 던진 사진에 대한 사진을 통한 문제 제기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워서 그렇다. 바닷물 속에서 사는 용왕이 토끼에게 들은 땅이라는 개념을 전혀 이해할 수 없듯이 그가 던진 기록과 객관이라는 신화에 대해 평소에 의문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의 사진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의 사진이 어려운 것은 독자들이 보기에 왜 이런 평범한 사진이냐는 사실에서부터 먼저 시작될 것이다. 그의 사진은 누구나가 다 찍을 수 있는 사진이다. 그런데 누구나가 다 읽을 수 있는 사진은 아니다. 사람들이 빛과 색으로 만든 현란한 이미지에 물들어 있고 그것이 가진 특정 현상에 부여된 의미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 익숙함 속에서 이영욱이 전혀 생뚱맞은 사진을 내걸어 전시를 하고, 책을 내니, 사람들은 의아해 할 뿐이다.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1. 신화로부터 탈주
이영욱은 1995년 발표한 첫 작업 <자유공원>에서 그 화두를 꺼냈다. 그는 인천의 '자유공원'이 왜 인천 시민의 마음의 갤러리 혹은 관념이 됐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자신의 긴 사진사의 화두를 꺼냈다.
과연 그들이 품고, 개념화하고, 소비하는 그런 '자유공원'이라는 실체는 존재하는 것일까? 이 의문을 사진으로 던지는 작업이다. 맥아더 동상, 자유의 여신상, 비둘기, 경찰서, 반공 캠페인 표지판, 충혼탑,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 등 역사를 해석하는 어떤 권력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되는, 그리고 그 해석돼 만들어진 하나의 역사를 객관의 진리로 받아들여 시민들의 표상으로 자리 잡힌 역사에 대해 냉정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맥아더의 목을 쳐버리거나, 충혼탑의 글귀를 보이지 않도록 처리해버린다거나 하는 비판과 느닷없는 안마시술소나 지저분하고 전혀 '자유'스럽지 않은 비둘기집을 집어 넣어버리는 방식으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스토리텔링이다.
처음 이 공원의 이름이 '만국공원'이었다가 왜 '자유''공원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왜 1990년대 이후 민족자주 진영의 진보운동가들이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 했는지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사진가가 사진으로 맥아더 동상을 죽여버렸지만, 그것이 그렇다고 민족자주 진영이 시도한 물리적 동상 파괴에 대한 옹호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맥아더를 통해 자유냐 반미냐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신화냐 실재냐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다음 작업은 1998년의<대상과 침묵의 접촉>이다. 전작에서 출발한 신화에 대한 고민이 거시사의 해석이었다면,<대상과 침묵의 접촉>은 미시적 일상사의 해석이다. 이 점에서 이영욱은 롤랑 바르트의 전사다.
바르트에 의하면 세상은 '일정한 구조에 의해 형성되고, 그 구조는 특정 의미를 지니는 기호'로 이뤄져 있는데, 사람들은 그 기호에 종속돼 그 안에서 발생한 어떤 제도나 현상을 마치 자연스럽거나 합리적이거나 심지어는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화일 뿐 보편적인 것이라 할 수 없음에도 사람들은 그 신화에 함몰돼 어떤 것이 옳은지 싸운다. 나아가 그 옳지 않은 것은 처단해야 한다고 싸운다. 목숨 걸고 싸운다.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의 해석만을 기독교 성경 바이블처럼 받드는 어리석은 일이다.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이영욱, 대상과 침묵의 첩촉,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3), 1998.ⓒ 이영욱
이영욱, 이상한 도시산책- 중앙동, 100x150cm, archival pigment print, 2014.ⓒ 이영욱
이영욱, 이상한 도시산책- 용현동, 100x130cm, archival pigment print, 2014.ⓒ 이영욱
이영욱, BLOW_UP. 이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은 무엇인가,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12(1993-1998촬영)ⓒ 이영욱
이영욱, BLOW_UP. 이 도시가 꿈꾸었던 그 꿈은 무엇인가,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12(1993-1998촬영)ⓒ 이영욱
이영욱, 거울의 기억,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1. ⓒ 이영욱
이영욱, 거울의 기억, 8x10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1. ⓒ 이영욱
이영욱, 북간도, 90x100cm,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이영욱, 북간도, 90x100cm,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이영욱, 사진일기 - 즐거운 유배지, 5x7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이영욱, 사진일기 - 즐거운 유배지, 5x7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이영욱, 사진일기 - 즐거운 유배지, 5x7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이영욱, 사진일기 - 즐거운 유배지, 5x7inch,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7.ⓒ 이영욱
이영욱, 불확실한 여행, 60x90cm,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8.ⓒ 이영욱
이영욱, 불확실한 여행, 60x90cm, archival pigment print(1, 2), 2008.ⓒ 이영욱
이영욱, 집이다. 인천-화평동, 60x9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이영욱
이영욱, 집이다. 인천-북성동, 60x9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이영욱
이영욱, 아카이브 - 섬프로젝트 - 이작도, 100x13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이영욱
이영욱, 아카이브 - 중구프로젝트 - 송학동, 100x13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이영욱
이영욱, 농촌, 60x8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 이영욱
이영욱, 농촌, 60x80cm, Pigment inkjet print, 2015.ⓒ 이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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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진_서해안 새만금_2004~2008
2016갤러리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 2 -
최영진, '공생(共生)을 묻다'
전시 : 2016년 2월 19일부터 29일까지 /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
"사진을 서로 나눠 보고, 그 안에 담긴 뜻을 헤아려, 그것을 즐기고 소통하는 곳.
그 안에는 주류도 없고, 패거리도 없는 평등한 곳으로 오직 사진으로 이야기한다.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무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한 세상 멋지게 놀 수 있는
진정한 고수를 찾는 사진놀이다. "
[최영진論] 있는 그대로 그렇게, 그 모태를 재현하다
이광수 (사진비평가 / 부산외국어대 교수)
사진가 최영진은 20년 가량 작업한 것들을 2000년대 초부터 꾸준히 전시와 책으로 내고 있다. 처음 세 딸과 부인을 소재로 한 '네 여자'를 필두로 갯벌, 밤, 새만금, 서해안, 대공(大空) 등을 소재로 하여 생태와 자연을 말하는 작업을 해왔고, 지금은 서해안, 섬, 새만금을 동시에 작업하면서 산에 대한 작업도 같이 하고 있다.
섬과 바다, 간척지와 땅, 산과 도시 그리고 문명이 엮는 장대한 서사시를 때로는 바다의 시선으로 때로는 땅의 시선으로 때로는 산의 시선으로 보는 작업들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도시와 문명의 주인공의 입장에서 바다를 보고, 산을 보아 왔다. 그때 산과 바다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도시와 문명에 의해 대상화 된 존재다. 최영진의 사진은 그런 이분법적, 분별적, 문명적 세계관에 대한 반성이다.
도시에서 산을 바라보지 않고, 산에서 도시를 바라보면 우리네 삶은 어떻게 될까? 산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일까? 바다가 인간 욕망의 배출구로 소비되면 그 끝은 어떻게 될까? 산이 문명을 낳고, 바다가 문명을 낳는 모태인데, 그 모태를 소비해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이런 의문에 대해 사유의 실마리를 넌지시 던지는 작업이다.
최영진_네 여자_1997~2000
최영진은 전라도 영광에서 나고 자랐다. 그에겐 서해안 갯벌과 바다가 추억의 공간이자, 돌아가고 싶은 귀소(歸巢)다. 지금의 작가 정신을 지탱하는 기둥이기도 하다. 바다 곁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바다와 갯벌은 곧 자연이다. 달리 설명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그런 존재다. 그 자연을 자연의 시각으로 담으니, 그의 작업은 결국 자연에 대한 헌시가 된다.
바다가 산보다 위대한 것은 아래에 있기 때문이라는 노자의 생각을 사진으로 말하고자 한다면, 굳이 인간을 중심으로 놓고 유한한 시간을 기록하는 방식을 따를 필요가 없다. 인위적 방식으로 만들어 내는 예술의 방편을 따를 이유도 없다. 노자의 자연을 사진으로 말하려면 쉬운 사진이 좋다. 그래야 여러 쪽에서 울림이 생긴다. 결정적 순간이라든가, 기존 프레임의 파괴, 예리한 운동성 같은 특별한 (혹은 창조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담는다. 때로는 은은하게 때로는 세밀하게.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 <도덕경> 56장
사진가 최영진이 자연과 생태의 삶을 주제로 삼아 하는 작업 가운데 말하기 방식의 관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서해안'이라는 이름으로 2013년에 전시하고 <West Sea of Korea>라는 이름으로 낸 책이다. 이 책은 멀리서 본 어느 서해안의 해수욕장 사진 몇 컷으로 시작한다. 아련하고 낭만적으로 보이는 사진들이 한동안 계속해서 나온다.
주로 하늘 여백이 넓고 빛이 은은하고 사람들이 아주 작게 나오는 이미지들인데, 흔한 키치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흔한 동양화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서양의 추상화적 풍경화 같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누구나 좋아하는 전형적인 소재주의 사진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책의 끝 부분으로 가면서 소용돌이가 한 번 인다.
시커먼 하늘 밑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이미지 하나가 나오는데, 누가 봐도 어? 이게 뭐지?라고 의문을 가질 만하다. 노자가 말하는 현공(玄空)일까? 그리고 곧 이어져 느닷없이 죽은 철새 한 마리 대가리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다. 섬뜩하다 못해 소름 끼친다. 그리고서는 또 죽은 새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가 나오면서 책이 끝난다. 끝 부분의 사진 몇 컷 때문에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은 혼란스럽게 된다.
▲ 최영진_ 서해안 새만금,2004~2008
사진을 보는 사람들이 작가의 메시지를 쉽게 간파하기가 어려운 것은 그의 이러한 말하기 방식 때문이다. 이런 작업의 경우, 책이나 전시장의 첫 이미지와 끝 이미지, 각 파트의 첫 이미지와 끝 이미지에 주목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의 경우 작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끝 부분의 사진들에 주목하지만, 난 첫 부분의 사진들에 주목한다. 첫 부분의 해수욕장 풍경 사진들은 평화스럽고 아늑한 느낌이다. 반면에 끝 부분의 사진들은 죽어서 썩어가는 새와 물고기라 심란하다.
첫 부분 사진들만으로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혀 읽을 수가 없는 반면, 끝 부분의 사진들은 그것만으로도 작가의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사실, 첫 부분 사진들은 독자를 고의로 안심시키는 일종의 기만전술로까지 읽을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 책 첫 부분의 사진들은 이발소에 걸어놓으면 딱 이발소 사진이고, 응접실에 걸어놓으면 딱 살롱사진이다.
그렇지만 죽은 새와 물고기 사진들과 함께 보면 작가주의에 충실한 작품의 일부가 된다. 그런데도 그의 사진 하나 하나는 애호가에 의해 구입되어 단독의 장식품으로 사용되고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사진가가 말하고자 하는 묵시록의 메시지는 소거되어 버리고 새로운 차원의 감상 미학이 발생한다. 전적으로 독자가 주체가 되어 사진을 읽어내는 방식이다.
'사람은 땅을, 땅은 하늘을, 하늘은 도를, 도는 자연을 닮는다.' - <도덕경> 25장
고대 힌두 현인들은 땅을 품이 넓은 자라 했다. 그리고 그 품이 넓은 자를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어머니로 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 어머니를 암소로 보았다. 그들에게 땅은 만물에 생(生)을 주고 기(氣)를 주는 암소였다. 그런데 그 대지의 어머니 신 쁘리트위(Prithvi)는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주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인간에게 내어 주는데, 인간은 그를 착취한다.
땅은 모든 식물을 낳게 하는 어머니다. 끝없이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는 생명의 모태다. 곡식은 생명이 되고, 그 생명으로 인간의 생명을 낳게 하고, 죽으면 그것을 품어 다시 또 다른 생명으로 올려주는 너른 터다. 생명과 죽음이 순환하고, 그것이 윤회하는 거대한 유기체다. 그 땅, 어머니 대지가 곧 사진가 최영진의 갯벌, 라 마르(La mar)다.
▲ 최영진_라 마르, 살아있는 갯벌, 2000~2003
'라 마르. 살아 있는 갯벌' 사진들은 모두 현미경적이다. 전체적으로 사람의 살갗 느낌이다. 어떤 것은 살갗이 튼 자국 같기도 하고, 모세혈관 같기도 하고, 모공 같기도 하다. 숨을 쉬는 듯한 생생한 이미지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낸다. 사방이 꽉 막힌 프레임 안에서는 모든 생명을 잉태한 태초의 땅을 느끼고, 위로 열린 하늘 공간으로 나뉜 프레임으로는 코스모스로 가기 전 카오스의 꿈틀거림이 느껴진다.
갯벌 속에서 나온 모든 존재가 어디론가 가는 운동을 보여주는 듯, 힘이 넘쳐흐른다. 프레임이 막혀 있든, 열려 있든 '라 마르. 살아 있는 갯벌' 사진들은 꿈틀거리면서, 갯벌 위 모든 존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 작은 것이라고 해서 무시당하거나 없어도 되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얼마나 작은지 우리의 눈과 인식 체계로는 파악할 수 없지만, 그 작은 존재들이 이루는 전체를 인식할 수는 있다.
어머니의 손길 하나만으로도 어머니의 우주적 사랑을 파악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분은 보되, 전체를 보지 못하거나 전체를 보되 부분을 보지 않는다. 이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갯벌을 파괴하는 것이란 곧 그 안에서 숨 쉬고 있는 뭇 생명체를 죽이고 나아가 대지의 순환 체계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모든 존재가 인(因)과 과(果)의 거대한 체계 속에서 산다는 말이고, 모든 존재는 그 안에서 반드시 대가를 지불한다는 법칙이 작동한다는 말이다. 현대 문명이 지금같이 자연을 대상화 하고, 약탈하고, 그것을 소비하는 데만 몰두하고 탐닉에 빠진다면 결국 그만큼 자연은 그 명(命)을 재촉하게 된다. 철저한 되갚음, 응보(應報)의 세계다. 그 자연의 보복을 경외하자는 말을 하는 것이다, 사진가 최영진은 지금.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추한 것이 있어서다.' - <도덕경> 2장
최영진은 분노한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식으로 처리해버린 새만금에 대해 분노한다. 그렇지만 그는 그 분노를 열정으로 쏟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격문으로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직설적이고,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지로 넌지시 말한다. 고인돌을 찍은 'Stone, Full of Life. 돌, 생명을 담다'는 그러한 그의 사진 언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고인돌 위에 끼어 있는 이끼, 돌이 갈라지고 그 갈라진 틈이 만들어내는 구멍, 그 사이에서 자라나는 초록의 생명, 그것들이 빛과 더불어 무시로 그려내는 파노라마 같은 그림, 소나무 밭을 주위에 두고 마치 카멜레온처럼 색을 초록으로 만들어버린 오브제 ... 그 어디에도 시간의 흔적이 박혀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사람의 발자취는 보이지 않는다. 고인돌을 작업한 또 다른 사진가 권태균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권태균의 고인돌 작업에는 내러티브가 있다. 그 중심에 사람이 있고, 그래서 그의 사진은 고인돌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사는 삶의 풍경이다. 따뜻한 인간미가 나는 포토저널리즘에 입각한 다큐멘터리 스타일이다. 그런데 최영진은 다르다. 그의 사진에는 사람이 있지 않다. 자연에 대한 사유만 있다. 냉정하다. 사람의 역사보다 더 큰 차원의 자연에 대한 지구사적 다큐멘터리인 셈이다.
▲ ⓒ최영진_돌,생명을 담다_2009~2011
최영진의 사진은 전반적으로 내러티브를 잘 만들지 않는다. 'Stone, Full of Life. 돌, 생명을 담다'가 그렇고, '라 마르La Mar'가 그렇다. 굳이 말 하고자 하는 바를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드러내지 않는 방식이다. 사람이 들어가지 않고, 사람 사는 모습이 들어가지 않고, 그것을 파괴하는 현장을 이성적 시선으로 분석하거나 기록하지 않는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유를 나누는 방식이다.
고인돌이 사람들 사는 마을에서 놓여 있는 모습을 그리는 방식은 문화를 다루는 방식이다. 하지만, 고인돌을 카멜레온의 보호색을 보여주 듯, 주변의 자연과 더불어 있는 듯 없는 듯 그 경계도 찾기 어렵고, 분별하기도 어려운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은 문화를 낳은 자연을 따르는 방식이다. 갯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경우와 달리, 내러티브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서쪽 바다, 새만금'에서다. 이는 다른 작품과 달리 새만금 간척사업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기록물이다. 그래서 내러티브가 있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장편 서사시에 '새만금'에서 구체적인 에피소드 하나를 취해 끼어 넣는 방식이다.
그 안에는 조개를 채취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주인 따라온 개도 보인다. 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시에서나 보일 법한 고급 승용차도 보이고, 그 차가 남긴 바퀴 자국도 있다. 서서히 방파제는 쌓이고, 갯벌은 갈라지면서 물은 빠지고 뭇 생명들이 죽어가는 곡소리가 들려온다. 사진가는 갯벌이 어떻게 죽어가고 그것이 어떻게 인간을 죽이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아 배를 가르듯이 시간이 점점 지나가면서 뻘은 메말라 갈라지고, 그 속에 감추어진 생명체들은 불 속에 타들어가듯이 최후의 순간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 ⓒ최영진_서해안 새만금_2004~2008
그의 사진은 기호와 상징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자연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규정하거나 표현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호나 상징은 대상화를 통한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 자연은 대상화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사진 어디를 보더라도 그가 말하려는 바, 생태학에서 흔히 말하는 근원, 회귀, 순환, 복잡계 등을 드러내는 기호화 된 이미지는 없다.
사진이 자연을 담고자 한다면, 그 방식은 자연의 속성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결국 그의 사진은 노자의 미학을 – 만약 이런 용어가 성립할 수 있다면 – 사진으로 시각화하는 것이다. 노자가 보는 미(美)와 추(醜)를 노자가 말하는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노자가 말하는 비어 있음과 유기체의 방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인공은 여백을 꽉 채우고, 자연은 여백을 만들어낸다. 인공은 부분을 잘라서 인식하고 자연은 부분을 연계시켜 인식한다. 최영진은 인간이 손댈 수 없는 대지(大地)와 대해(大海), 대공(大空)을 보여줌으로써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이상향을 말하고자 한다.
▲ ⓒ최영진_서해안 새만금_2004~2008
그의 사진을 보는 내내 'West Sea of Korea'에 나오는 죽어 다 말라 버린 물고기 한 마리 이미지가 쉬 사라지지 않는다. 그 사진을 통해 난, 노자가 말하고 최영진이 따르는 자연의 미와 추에 대해 생각한다. 죽은 물고기의 몸이 썩고 말라 부서진 모습이 흡사 꽃이다. 부서진 자연을 말하려 산화해 버린 꽃. 느닷없이 그 이미지가 화가 최병수의 '너의 몸이 꽃이 되어'에 중첩된다.
미군의 폭격에 죽은 아들이 아비의 품 안에서 꽃으로 산화하듯, 파괴된 새만금 갯벌에서 죽은 새 한 마리가 말라버린 죽음의 땅 위에서 꽃으로 산화한다.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이 따로 분별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존재가 함께 어우러질 때 그 안에 추함이 있고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다. 바다가 바다로서, 갯벌이 갯벌로서 그 자리에 그렇게 있을 때 그것이 아름다움이다. 보지 않았던가, 고인돌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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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브레송’의 2016년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가 드디어 막을 올렸다.
그 첫 번째 작가로 고정남씨가 선정되어, “Unlimited” 바람의 봄을 선보인 것이다.
지난 20일 오후6시에 열린 개막식에는 작가 고정남씨를 비롯하여 김남진관장, 이광수교수,
김보섭, 류은규, 김영호, 마동욱, 남 준, 정영신씨 등 많은 사진인들이 자리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사진평론가 이광수교수는 고정남씨의 작가론에서 평범한 대상을 보는 주관적인 작가의 시선을 첫 번째로 꼽았다.
두 번째는 장소성에 두었다. 그 장소는 누군가 그 의미를 매개해 주는 사람이나 사물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작가의 기억에 두었다. 평범한 사람이나 오브제 등 모든 것이 기억을 매개로 이어졌다.
네 번째는 대동 세상을 들었다. 평범한 세상을 통해 장소 속으로 들어가 기억의 나래를 펴는 세상은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대동세상이라는 것이다.
처음 작품을 볼 때는 작가의 기억에 따라 아주 자유롭게 찍었다는 생각만 했는데, 듣고 보니 공감되었다.
작가의 관점으로 사진을 보는 재미가 솔솔했다. 이광수교수의 서문처럼 앞으로는 어떻게 나갈지도 궁금했다.
그의 작품은 물같이 흐르는 그 어떤 것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 없고, 낳지 못할 것이 없는 그 사진세계의 무궁무진함이
가히 불교가 말하는 유정의 세계와 같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30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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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부터 좋은 사진과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다.
‘스페이스22’에서 개막된 권태균씨의 유작전에서다.
기다린 전시였으나 인사동에서 강 민 선생님을 만나 지체되었다.
부리나케 달려갔으나 30분이나 늦었다.
생전의 약속 따라 첫 유고사진집을 펴낸 ‘눈빛출판사’ 이규상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었다.
관람객들이 많아 운신이 어려웠지만, 곳곳에 반가운 사람들이었다.
몇 번이고 전시된 사진들을 돌아보았다.
보았던 작품도 몇 장 있었으나, 대부분 처음 보는 사진이었다.
잊고 있던 80년대 추억들을 얼마나 끌어내는지 가슴이 애렸다.
나른한 자세로 앉아있는 세 가족의 모습에서, 그 시절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 땐 몸은 피곤했지만, 곳곳에 화롯불 같은 온정이 있어 행복했다.
“어찌할꼬! 이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이건 곡마단 광고판에 적힌 문구다.
우린 그런 기구한 삶을 보며 웃고, 울었다.
행여 누가 볼가, 곁눈질하며 눈물도 훔쳤다.
사진들이 너무 좋았다.
난 권태균씨가 의령 촌놈이라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맛을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런 맛을 낼 수 없다.
우연히 한 두 컷이면 모를까, 모든 사진에 특유의 애수가 묻어 있었다.
시골다방에서 담배피우는 남정네 표정이나 다방분위기 한 번 보라.
집에서 자판기를 두드리다, 또 열불이 터졌다.
그 흔한 사진상, 이런 사람한테 안주고 대체 누굴 주었나?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끼리끼리 돌려먹다, 이젠 그 제자들이 돌려 먹는다.
시류에 눈치 안보고, 초지일관 떠돌며 찍은, 이토록 진솔한 언어가
어떻게 빤짝 생각들에 밀려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제 그는 우리 곁을 떠나고 없다.
저승에서 잠시 내려와, 우리에게 말 걸고 있는 것이다.
이게 진짜 사진이라고...
다행스럽게 ‘눈빛출판사’의 이규상씨가 생전의 약속대로 근사한 책을 펴냈다.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마치 오리지널 프린트 같았다.
내 가난함을 불쌍히 여긴 한정식선생께서 책을 사 주셔서
이제 보물 상자 하나 두게 되었다.
'눈빛출판사'에서 주요작 100여점을 실어 펴낸 사진집 <노마드> 값은 70,000원
2월22일까지 서울 강남역 1번출구에 있는 '스페이스22'에서 작품들을 볼 수 있고, 사진집도 살 수 있다.
개막식에서 많은 분들을 만났다.
대구서 올라 온 양성철씨와 석재현씨도 만났고,
부산의 이광수씨, 광주에 사는 오상조씨, 장흥의 마동욱씨도 만났다.
그 외에도 한정식, 전민조, 엄상빈, 김보섭, 성남훈, 김남진, 이기명, 안해룡, 이갑철, 이상엽,
장 숙, 김상현, 마기철, 강재욱, 남 준, 김동희, 이재갑, 견석기, 이한구, 정진호, 최재균, 김영호,
박종우, 김대수, 구본상, 안미숙, 이순심, 정영신, 이은숙, 성윤미, 노형석, 고정남, 권양수씨를 만났다.
마치 심봉사 딸년 잔치 집에 온 듯 기분 좋았다.
전시를 주관한 눈빛출판사 이규상, 안미숙 내외 따라 뒤풀이 장소로 옮겼다.
술집 ‘북촌’에서 술꾼들만 남아 더 마셨다.
와! 서울 이빨과 부산 이빨이 주고받는데, 막상막하더라.
경상도와 전라도 말이 짬뽕된 이광수교수 구라도 대단했다.
술좌석에서 '사진예술'이기명씨가 이렇게 물었다.
"젊은 마누라와 살 수 있는 비결이 뭡니까?"
할 말이 없어 이렇게 말했다. "몸 안 아끼고, 최선을 다 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나중엔 총알이 떨어져 사진도 찍을 수 없었지만, 김보섭씨가 먼저 가라고 눈치주네.
촬영 : 2016.1.4. /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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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 사진작가
내가 이광수선생을 좋아하는 건 단지 588사진집의 발문을 써주어서만이 아니라 불의를 두고 보지 못하는 피 끓는 그의 정의감 때문이다.
이광수 교수를 알게 된 것은 오래지 않았다.
올 들어 전시장에서 몇 차례 만나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마침 지난 동강국제사진제에서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는데, 그의 강직한 의지와 소탈한 인간적 면모에 매료된 것이다.
무슨 일이던 개혁을 하려면 혁명가기질의 총대를 멜 사람이 필요하다.
바른말을 쏟아내는 이규상선생의 투사정신도 이광수선생 못지않지만 '눈빛출판사'를 운영하며 긴 세월 얽혀 온 사진판의 인맥들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느지막이 사진평론가로 등장한 이광수선생은 그 부분에서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일신상의 손해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왕따에다 직업 또는 사업상의 불이익을 당 할 건 불을 보듯 훤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약자들을 위해 강자들과 싸울 전사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면 사진판 개혁을 운운하는 네가 직접 나서 칼을 휘두르라 할지 모르지만, 난 그렇게 나설 자격을 이미 상실했다.
긴 세월 이어져 온 공모비리에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여러 사진단체 일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에 문제점들은 하나하나 끄집어 낼 수는 있을 것 같다.
지난 14회 동강국제사진제 워크샵의 첫 회 발제자인 진동선선생께서 최민식사진상 문제를 언급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내용인즉 몇몇 사람의 문제 제기에 대부분의 사진인들이 입을 다물었고, 특히 2-30대의 젊은 사진인들이 나서지 않아 힘을 얻지 못했다는 말에 공감했다.
왜 사진인들이 남의 일처럼 등짐만 지고 지켜보고 있을까? 귀찮아서, 아니면 찍힐까봐..
그리고 동강사진제에 다녀 와 올린 모씨의 글도 이해는 되었다.
기득권에 줄 대려 살살거리는 꼬락서니에 염증을 느껴 이후로 아예 신경을 끊겠다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10여 년 전 똑 같은 생각을 하며 내 일만 하고 지냈으나, 뿌리만 더 깊어졌다.
이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일이기에 끝까지 물고 널어져야 하는 것이다.
똥이 무서워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 피한다는 말도 있지만, 더러워도 밟아 짓이겨버려야 한다.
이 명경알 같이 밝은 세상에 아직까지 개 같은 일들이 계속된다는데 분통이 터진다. 힘들어도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는 많은 다큐사진가들의 좌절감을 생각하니 속이 뒤집힌다.
최민식사진상에서 터져 나온 논란은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사진판의 병폐 중 조그만 불씨에 불과하다.
이제 시작된 기득권과의 전쟁에서 기어이 이겨내야한다.
*사진작가 조문호 선생은 30여 년 동안 사회 환경을 기록해 온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동아미술제’와 ‘아시안게임기록공모전’에서 각각 대상 수상. ‘전농동 588번지’, ‘87민주항쟁’, ‘동강백성들’, ‘두메산골 사람들’, ‘인사동 사람들’, ‘장날 그 쓸쓸한 변두리 풍경’ 등 열 여섯 번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저서로는 <동강 백성들> 포토 에세이집,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집,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 사진집, <전농동 588> 사진집 등을 출판했다.
조문호 선생은 한때 문학도를 지망했던 사진작가로 그의 글은 직설적이고 해학적이며, 예리하게 문제를 파헤치는 뷰파인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격한 언어들도 있겠지만 애써 정제하지 않겠습니다. 불합리와 비정상 투성이의 답답한 현실에서 독자 여러분들께서 대리 만족을 느끼시실 바라는 뜻에서 입니다. 조 선생은 어느 날은 사진현장에서 또 다른 날은 인사동 선술집 귀퉁이에서 선생의 성격처럼 때로는 껄껄 웃음을 담기도 하고, 결 고운 감수성에 어느 날 눈물 뚝뚝 흘리면서 글을 보내올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모두 문화예술계에 몸 담고 살아가는 예술인들의 삶의 희노애락이 곰삭아 올라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연재의 첫 시작은 조 선생이 운영하는 블로그 ‘조문호의 사진아카이브 인사동이야기’에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유는 최근 사진계에 이슈가 되고 있는 <최민식사진상>과 <동강사진제> 문제를 짧지만 정곡을 깊이 찌르는 글이기에 두루 공유하고 공감하기 위해서 입니다. 앞으로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지면을 통해 만날 <조문호의 빼딱한 세상, 제대로 보기>에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편집의 글) |
[조문호의 빼딱한 세상 바로보기] '국제' 너무 좋아하지 마라 (0) | 2015.1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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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호의 빼딱한 세상 바로보기]미술시장 대중화, 작품 값 거품부터 빼자. (0) | 2015.09.28 |
[조문호의 빼딱한 세상 바로보기]인사동을 우리나라 미술시장의 메카로 만들자. (0) | 2015.0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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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를 두고 보지 못하는 피 끓는 그의 정의감 때문이다.
이광수 교수를 알게 된 것은 오래지 않았다.
올 들어 전시장에서 몇 차례 만나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마침 지난 동강국제사진제에서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는데,
그의 강직한 의지와 소탈한 인간적 면모에 매료된 것이다.
무슨 일이던 개혁을 하려면 혁명가기질의 총대를 멜 사람이 필요하다.
바른말을 쏟아내는 이규상선생의 투사정신도 이광수선생 못지않지만
'눈빛출판사'를 운영하며 긴 세월 얽혀 온 사진판의 인맥들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느지막에 사진평론가로 등장한 이광수선생은 그 부분에서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일신상의 손해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왕따에다 직업 또는 사업상의 불이익을 당 할 건 불을 보듯 훤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약자들을 위해 강자들과 싸울 전사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면 사진판 개혁을 운운하는 네가 직접 나서 칼을 휘두르라 할지 모르지만, 난 그렇게 나설 자격을 이미 상실했다.
긴 세월 이어져 온 공모비리에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여러 사진단체 일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에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낼 수는 있을 것 같다.
지난 14회 동강국제사진제 워크샵의 첫 날 최민식사진상 문제가 언급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몇몇 사람의 문제 제기에 대부분의 사진인들이 입을 다물었고, 특히 2-30대의 젊은 사진인들이 나서지 않아 힘을 얻지
못했다는데, 왜 사진인들이 남의 일처럼 등짐을 지고 지켜보고만 있었을까? 귀찮아서, 아니면 찍힐까봐..
그리고 동강사진제에 다녀 와 올린 어느 사진가의 글도 이해는 되었다.
기득권에 줄 대려 살살거리는 꼬락서니에 염증을 느껴 이후로 아예 신경을 끊겠다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10여 년 전 똑 같은 생각을 하며 내 일만 하고 지냈으나, 뿌리만 더 깊어졌다.
이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일이기에 끝까지 물고 널어져야 하는 것이다.
똥이 무서워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 피한다는 말도 있지만, 더러워도 밟아 짓이겨버려야 한다.
이 명경알 같이 밝은 세상에 아직까지 개 같은 일들이 계속된다는데 분통이 터진다.
힘들어도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는 많은 다큐사진가들의 좌절감을 생각하니 속이 뒤집힌다.
최민식사진상에서 터져 나온 논란은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사진판의 병폐 중 조그만 불씨에 불과하다.
이제 시작된 기득권과의 전쟁에서 기어이 이겨내야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영월을 아름답게 한 거리 설치전 (0) | 2015.0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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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사진제 숙소에서 '투영' 동인회 이야기 듣다. (0) | 2015.07.28 |
‘프로젝트 장에가자2’가 정선에서 시작되었다. (0) | 2015.07.24 |
이제 작가주의 포상식 사진상은 그만두자. (0) | 2015.07.16 |
난 예술지상주의를 거부한다. (0) | 2015.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