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게 끌어 온 제2회 최민식사진상 부정심사 의혹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자리가 ‘온빛사진가회’의 주선으로 지난 22일 오후4시부터 충무로에 있는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열렸다.

다큐멘터리사진가 석재현씨의 사회아래, 이 문제의 핵심이었던 이상일 당시 운영위원장과 정주하 심사위원장, 그리고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온몸을 던졌던 이광수 사진비평가와 ‘눈빛출판사’이규상대표가 패널로 자리했다,

그런데 안성용씨 작품을 지지한 송수정씨는 물론 다른 심사위원들은 왜 부르지 않았을까? 그들은 이 문제에서 아무런 관계가 없단 말인가? 특히 심사위원 이갑철씨는 1회 수상자로서 최광호씨와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 그 심사에 관련되었던 전원을 불러내 의혹을 푸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다 알고 있는 내용의 질의나 변명으로 일관된 토론보다 방청석에 앉은 사진인들의 질의 듣는 시간을 더 많이 할애했어야 했다

인본주의와 사회정의를 추구한 최민식선생의 사진철학을 지향한다는 1회 때의 공모 목적도 슬그머니 사라졌고, 미 발표작으로 한정된 공모요강이 한마디 언급도 없이 기 발표작도 가능하다는 등, 엿쟁이 마음대로 방향을 바꾸었다. 최광호씨의 출품작이 발표작인데다, 최민식선생의 사진철학과는 전혀 동 떨어진 작품이었으니, 어찌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하지 않겠는가?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볼 수 없는 최광호씨의 ‘천제’라는 출품작에 대한 평가는 이미 박진호씨가 세세하게 밝힌 내용처럼, 일고의 가치 없는 사진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천제’라는 출품작 제목의 한자까지 틀려 ‘천제’에 대한 정확한 뜻도 모른다는 의혹까지 샀다. 그 외에도 의혹을 살만한 일이 한 둘이 아닌데, 이처럼 문제투성이 작품을 밀어 붙인 것이 부정심사가 아니고 도대체 무어라 말인가?

사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이왕이면 가까운 사람에게 상을 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라 그 문제에서는 대부분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공모전이나 각종 시상의 운영시스템 자체를 뜯어 고쳐야 한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해왔다. 훌륭한 원로나 중진에겐 돈보다 명예를, 열심히 현장에 매달리는 가난한 사진가에게는 조그만 지원금이라도 나누어 주는 실질적인 사진상이 필요한 것이다. 제도적 개선이 더 시급했던 사진상 문제였기에, 이 문제의 핵심인 이상일씨의 사과 한마디로 사진계의 화합을 이끌 것으로 기대했으나, 예상은 한참 빗나갔다.

“최민식사진상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유명 사진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가난한 친구인 최광호씨를 지지했다”는 이상일씨 발언 자체가 부정심사임을 스스로 밝힌 꼴이다. 그리고 이상일씨의 발언들을 종합해 보면, 자신이 이 상의 주체로서 마음대로 주물렀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나 반성이나 사죄의 기색은커녕, 야유 썩힌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토론의 장을 지켜보던 온빛사진가회 조대연회장과 ‘스페이스22’의 정진호 대표께서 사과를 유도하는 발언을 하였으나, 그는 변명과 자기자랑에만 치중하다 끝까지 사과 한 마디 하지 않고 끝냈다. 이 건 우리나라 전체 사진인 들을 능멸한 처사다. 오죽하면 토론자로 나선 이광수교수가 사진인들에게 대신 사과했을까?

“아! 이 사람 정말 구제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아마추어 단체인 ‘사협’에서 일어 난 문제라면 신경 쓸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 배울 만큼 배웠고, 옳고 그럼을 훤히 아는 자가 저지른 일이라 더 화가 난 것이다. 안타깝지만, 더 이상 토론할 대상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매장시켜, 그 뿌리 자체를 뽑아야한다는 판단을 했다.


먼저, 우리나라 사진판에 끼리끼리 나누어 먹는 관행은 원로사진가들이 먼저 만들었다. 지금 문제가 되는 비리들도 선생들께서 만들어 놓은 구태를 직계 제자들이 이어받아, 돌려 먹은 것이다. 이런 일이 터졌으면 진작에 제자들을 불러 타이르거나 이런 공론의 자리라도 나오시어 발전적으로 이끌 수 있는 충언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데,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하기야, 무슨 면목으로 나서겠냐마는, 그래도 나서야 했다. 노학자로서 사진계 발전에 앞서, 사회정의를 위해...


공론의 장에 참석한 사진가로는 엄상빈, 박진호, 정진호, 김문호, 김남진, 성남훈, 신동필, 강제욱, 이상엽, 조대연, 이기명, 천수림, 박이찬, 이규철, 박영규, 김주혁, 서준영, 윤정원, 황서진, 남 준, 곽명우, 이은숙, 이혜숙, 강홍구, 이세연씨 등 60여명이 좁은 토론장을 가득 메웠다.


공론의 자리가 파한 뒤에는 모두들 술집에 모여앉아 독주로 분노를 다독여야 했다. 그 파편이 튀어 우리 마누라의 가슴에 박혔다.

이제 내 갈 곳은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인을 찾아서 ⑨] 이수철론 -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레퀴엠


글 / 이광수 (사진비평가)

사진가 이수철은 일본에서 사진을 배웠다. 일본에서 사진을 배울 때 그는 '순수' 사진이라는 모순으로 가득한 어휘의 사진 범주를 전공했다. 왜 굳이 '순수'라는 말을 쓸까? 그 상대적 개념은 불순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 '순수'란 사회적 메시지나 시대 정신을 담지 않는 예술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시대의 불온함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지사적인 행위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그 안에 담겨 있다.

그 '순수' 사진을 일본에서 배워 귀국한 그가 처음 작품을 발표한 것이 1998년의 일이고, 그가 잡은 주제는 기억이었다.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거시사의 종말을 공공연히 말하던 것이 무르익을 때, 개인과 복합과 감성이 인간 세계의 중심 화두로 떠오를 때 그 때의 일이다. 사진가는 이후 꾸준히 사진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사진을 그 자체의 본질을 갖지 않는 한낱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도구론적 입장으로 생각한다면, 문제는 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사진의 존재론적 범주의 최후의 조건인 뭔가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을 찍는 것이 사진이다, 라는 전제조차 허물 수 있다.

카메라로 대상을 찍어 필름에 담고 그것을 인화하는 것이 보통의 프로세스라면, 카메라와 필름이 없이 바로 인화로 들어가 버리는 것도 사진 프로세스 중의 하나가 된 것이 1924년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아예 뭔가를 찍지 않아도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고, 그 창조된 이미지로 뭔가 작가만의 방식으로 말 하고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예술의 한 방식 아니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 질문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건 매우 궁색하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사진이냐, 정도이지 않을까. 그렇다. 그것이 무엇이든 개의치 않는다. 그것이 포토그라피(photography)면 어떻고, 그것이 이미지그라프(imagegraph)면 어떻고, 그것이 디지그라프(digigraph)면 어떠냐? 사진가 이수철에게 카메라는 현상을 포착하는 메커니즘의 하나일 뿐이다.

1. 디지그라프 : 저작권도 없고 장르 구분도 없는 세계



Hello Thomos-4 archival pigment print (2007)ⓒ 이수철

The Space for Renovation-1 archival pigment print (2007)ⓒ 이수철


The Space for Renovation-3 archival pigment print (2007)ⓒ 이수철


The Space for Renovation-4 archival pigment print (2007)ⓒ 이수철



사진가 이수철이 2008년에 연 <환상의 에피파니>전은 사진에 관한 몇 가지 통념을 깬다. 우선 남의 것을 훔쳐오는 것에 대해 당당함을 부르짖는 것이다. 이수철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가 토마스 루프의 사진을 스캔해서 베껴 와 자신의 작품에서 다른 의도로 사용해버렸다. <환상의 에피파니>다.

그가 토마스 루프의 별을 가져온 이유는 비단 그가 말 한 바, 사랑하는 딸에게 아빠의 어렸을 적 추억이 담긴 그 별 헤는 밤, 그 꿈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것만은 아니다. 작가로서 사진의 존재 담론에 대한 도발을 시도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토마스 루프의 별을 베껴 왔지만, 사실은 토마스 루프 또한 어느 천문대 대원이 우주 관측용 망원 카메라로 찍은 천문 자료 사진을 가져와 사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있는 대상을 그대로 찍어 놓은 것을 이리 사용하고 저리 사용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자연에 존재하는 돌과 나무와 흙을 이리 배치하고 저리 배치해서 작품을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저작권에 대한 강력한 도발이다. 그 안에서 조작이나 왜곡은 기존의 근대적 개념을 넘은 하나의 창조적 예술 행위가 된다.

사진가 이수철이 토마스 루프의 사진을 무단으로 가져와 자기 마음대로 사용함으로써 던진 도발은 단지 저작권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사진의 성격상 또 다른 맥락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할 점이 있다.

전유다. 전유는 존재의 성격이 그것이 처한 위치에 따라 달라짐을 말하는 것이다. 본질도 없지만, 실존이라는 개념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의 별 사진은 문자 그대로 다큐멘트다.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은 사물에 대한 본인의 시각이나 재현의 의사를 전혀 갖지 않는 것으로 마치 물이나 거울이 하듯 사물의 반영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무미건조한 과학의 산물이다.

그렇지만 그 이미지가 다른 위치에 전유되면,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원래 가졌던 성격은 무시하고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바꿔 사용하는 사람의 뜻대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때 원 저자의 허가는 필요 없다. 원래는 자료 사진이었던 것이 토마스 루프에 의해 흑과 백과 점들로 구성된 조형적 예술 사진으로 갔다. 그것을 이수철이 사랑하는 딸을 위한 아름다운 밤하늘 풍경 사진으로 만들어버렸다. 장르의 경계를 넘는 포토그라피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다.


기억의 풍경-red archival pigment print (2006)ⓒ 이수철

기억의 풍경 industrial complex-4 archival pigment print (2006)ⓒ 이수철

기억의 풍경 industrial complex-3 archival pigment print (2006)ⓒ 이수철


<환상의 에피파니>나 그보다 먼저 발표되었던 <기억의 풍경>은 모두 복합 생성물이다.  <환상의 에피파니>의 경우, 각각의 이미지에서 아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미지 즉 다리나 들판 등은 모두 사진가가 직접 찍은 것이다. 카메라에 의한 전형적인 생산 방식에 의한 것이다. 거기에 독일 사진가 토마스 루프의 별을 무단으로 가져와 합성시켰다.

그런데 합성은 카메라나 필름 등 전통적 사진의 메커니즘을 통해 한 것이 아니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했다.  카메라로 시작했지만 컴퓨터로 완성한 것이다. 이런 생산물을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 카메라가 종이 되고 컴퓨터가 주가 되어 만들어낸 그 이미지를 포토그라피 혹은 사진이라 부르지 않을 방도는 없다.

후보정이 종이 아닌 주가 된 것은 <기억의 풍경>에서 더 잘 드러난다. 대상을 정하고 그것을 촬영한 것이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하는 기록적 성격이 강한 사진이라면 그것에 후보정을 통해 색을 입히거나 톤을 바꿔 만들어내는 것은 예술적 성격이 강한 사진이다. 후보정이 보정이 아니고, 본 공정이 되는 것이다.

결국 사진가 이수철에게 사진이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선 작업보다 후 작업이 더 우선이 된다면, 있는 대상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포토그라피이지만, 그 범주를 넘어선 것이라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사진 후(後)적 존재 포스트 포토그라피라고나 할 수 있을까?

상황이 이렇더라도 사진가 이수철이 갖는 포스트 포토그라피에 대한 철학은 분명하다. 사진을 만들어내는 것이 비록 컴퓨터라는 기술일지라도, 자신의 그 사진이 기술의 현란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면 안 된다. 기술이란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 사용 목적은 개인의 감성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사진은 말하기 방식의 차원에서 볼 때 지금까지 사진이 취해온 기존의 방식과 동일하다. 사실 혹은 리얼리티를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닌, 이미지가 주는 어떤 느낌을 주려 하는 전통적 예술 방식 그대로다.

2. 전유 : 개인 감성을 위한 미시 이미지의 세계


<화몽중경> Over the Dream - 1ⓒ 이수철

<화몽중경> The Last Lady-1ⓒ 이수철

<화몽중경> The Last Lady-2ⓒ 이수철

<화몽중경> 신데렐라 나를 찾아 나서다-1ⓒ 이수철



사진가 이수철의 <화몽중경(畵夢中景)>은 문자 그대로 꿈속 풍경을 그린 것이다. 물론 그린 것도 아니고 꿈속 풍경도 아니다. 현실을 카메라로 찍되 꿈속 풍경처럼 찍은 것이다. 컴퓨터로 작업한 것이 아닌 필름을 사용한 스트레이트 사진이다.

사진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 눈에는 마치 미니어처를 찍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을 미리 세팅해놓고 4"x5" 카메라로 초점을 조절해 몽환적인 분위기가 나도록 촬영한 사진들이다. 역시 기억 혹은 꿈에 관한 이야기다.

<환상의 에피파니>가 사진가가 속한 그 세대가 보았던 과거를 딸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존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기억 즉 집단의 기억으로서의 꿈이었다면, <화몽중경>은 사진가라는 한 개인이 경험했던 혹은 경험한 것으로 여기는 지극히 사적인 꿈이다. 내러티브가 있는 사진임에는 분명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그 내러티브를 정하지 않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가 들려주고자 하는 것은 정해진 이야기에서 특정 메시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기억이 잘 나지 않은 세계로 돌아가 마치 물고기가 유영하듯 자유롭게 해석하고 느끼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화몽중경>은 작가가 2000년 중반 독일의 유형학 사진에 푹 빠졌을 때 그로부터 빠져 나오면서 새롭게 시도한 작품이다. 전작에서 디지털 작업을 통해 포스트 포토그라피를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다시 필름으로 돌아가되, 전통적인 스타일이 아닌 새로운 스타일을 찾아보고자 하는 작업이다. 식상함이라는 것은 싫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은 아무리 메시지가 좋아도 따라가기 싫다.

<환상의 에피파니>가 특별한 내러티브가 없는 유형학적 사진으로 토마스 루프의 사진들을 닮았다면 <화몽중경>은 일정한 내러티브를 미리 설정하고 장면을 세팅해서 찍었다는 차원에서 그가 좋아하는 또 다른 사진가 샌디 스코글런드의 사진들을 닮았다. 그렇다고 해서 <화몽중경>이 스코글런드가 보여주는 일련의 사진과 같이 사회적 메시지를 강하게 담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코글런드는 환경이나 여성 등 사회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만 이수철은 그런 목소리를 내려 하지 않는다.

스코글런드가 사회를 말할 때 이수철은 개인을 말하고, 스코글런드가 이성을 말 할 때 그는 감성을 말한다. 다만 그는 스코글런드가 견지하는 실체보다는 이미지, 실존의 세계보다는 가상의 세계를 더 소중하게 여길 뿐이다.

3. 크로스오버 : 넘나들기가 일어나는 무경계의 세계

인천여자 #02ⓒ 이수철

인천여자 #03ⓒ 이수철

인천여자 #05ⓒ 이수철

인천여자 #12ⓒ 이수철



사진가 이수철은 한 때 상업 사진을 했다. 그러다가 컴퓨터로 하는 디지털 예술 사진으로 바꿨다. 그러다가 다시 필름 작업을 했다. 그렇게 오는 동안 그는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메시지로 담은 작업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작업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하나 있다.  <인천 여자>다. 이 작업은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이미지보다는 사회적 의미에 방점을 찍은 사진이다.  <인천 여자>는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인 윤사비나를 모델로 해서 제작한 작업이다. 인천 여자라 말하지만, 인천의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닌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상업적 틀에 맞추어 외형과 내면까지도 지배당하는 현실' 속의 여성을 말하는 것이다.

윤사비나씨는 전신탈모를 동반한 자가면역결핍이라는 희소병을 20대 초반부터 앓아오면서, 희소병, 그에 대한 사회의 편견, 연극에 대한 애착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여성스러움'이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여성 혐오와 맞서 싸워 온 사람이다. 인천문화재단과 선광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진행해 온 이 작업은 먹고 살아야 하는 사진가로서 피할 수 없는 프로젝트 수주를 통해 제작한 작업이다.

그렇지만 그러하다고 해서 주문자의 뜻을 받들어 작업한 영혼 없는 제품 생산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해 온 이미지를 위한 감성의 환상곡으로서의 사진이 아닌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2008년에 발표한 <Architectural Photography>는 미완의 작품이다.

세콤이 된 건물ⓒ 이수철

피닉스모텔ⓒ 이수철

정체불명ⓒ 이수철



엄밀하게 말하면 완성했다고 해서 발표하였는데, 전시를 하는 동안 그 완성도에 대해 불만을 가져 스스로 미완을 선언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해 온 동안 줄기차게 이어 온 잊혀 져 간 것들에 대한 기억에 대한 작품이다.

작업의 대상은 이런 저런 여러 사연으로 건축물로서의 생명을 끝내고 죽어버린 그러나 여전히 눈앞에 존재하는 우리가 사는 집이다. 사람이 사는 집, 사람이 살기 위해 지은 집 그러나 버림받아 폐기 되어버린 그 집은 흉물스럽다. 버려지고 잊혀 졌으니 흉물스러운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숨을 거두고 생명을 다 한 채 몸뚱아리만 살아 있는 사람들 눈앞에 덩그렇게 남겨 둔 형상과 같다.

사진가는 우선 그 버림받은 집들을 반듯하게 위치시킨다. 아니, 조금 더 나아가 프레임의 정 중앙에 폼 나게 위치시킨다. 그리고 잡아 낸 그 이미지 위에 화사하게 색칠을 해줬다. 사라져 가 버렸던 것들에 대한 예우다. 타키타 요지로 감독이 만든 일본 영화 <굿바이 (Departure)>에서 장의사 주인공이 죽은 사람을 곱게,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예쁘게 화장을 해주는 장면이 떠오르는 일이다.

사진가가 택한 대상은 한 때나마 하나같이 웅장하고 세련되고 멋졌던 건물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보여주고 함이 아니고 말하고자 함이다. 사진가 이수철은 그 형식이 어떻든 간에, 그 경계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괘념치 않는다. 예술가는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다. 요란하지 않는 경계 넘나들기다.

상상외 風景-1ⓒ 이수철



사진가 이수철이 해 온 경계 넘나들기의 대표작은 화가 조미영과 협업한 <상상 外(외) 풍경>이다. 사진가가 찍은 이미지에 화가가 깃털을 그려 넣어 사진과 회화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매체를 통해 존재하지 않은 풍경을 상상으로 만든 콜라보 작업이다.

사진가 이수철은 물질의 세계에서 얻은 구체적 풍경을 이미지로 만들어냈고, 화가는 그 위에 가벼운, 그래서 언제 어디서고 간에 그 존재를 무시하고, 망각해 버리는 것을 상징하는 깃털 하나를 그려 넣는다. 이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는 모든 사라져 간 것들에 대해 부르는 레퀴엠이다.

글이든 사진이든 그것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아니, '사실 그대로'라고 하는 개념은 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세계는 그 자체가 불립문자일 수 있다. 세계는 이미지로 구성되고 이미지로 소통된다. 그것이 비현실이 지배하는 현실의 세계다. 그 안에서 사진은 결국 왜곡이고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조금 더 아니 좀 더 적극적으로 왜곡하고 '거짓말'로 말하게 한다는 것이 하등에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은가. 사진가 이수철이 사진으로 말하고자 하는 사진의 방식이 바로 여기에 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때로는 합성을 통해, 때로는 덧칠을 통해, 때로는 타 매체와의 협업을 통해 그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레퀴엠(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미사 음악)을 바친다. 그가 노래하는 존재에 대한 노래는 그가 자유롭게 넘나드는 포스트 모던 세계의 전유 안에서 불러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무궁무진한 이미지의 세계를 맛본다.






촛불시위 (2002)


’사진가를 찾아서‘ 여덟 번째 브레송 기획전 ‘신동필론, 부르지 못한 노래“ 개막식이 지난 22일 오후6시30분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렸다.

그 자리에는 신동필씨를 비롯하여 김남진관장,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 사진가 엄상빈, 김문호, 김보섭, 김봉규, 성남훈, 강제욱, 안세홍, 고정남, 김영호, 윤길중, 남 준, 곽명우, 정영신, 이영욱, 이한구, 차홍규, 김진석, 박홍순, 고형모, 양재호, 안옥철, 임지원, 최승희, 김종현, 장병국, 신미식, 신희수, 이현동, 이영준, 노원섭, 조태용, 유승준, 박춘선, 김명정, 우종성, 최문선, 조웅현, 최지은, 정윤숙, 김현숙, 한선정, 한선희, 이정원, 민선희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부르지 못한 노래’전은 거리의 투사로 역사의 증인으로 온 몸을 내던지며 기록해 낸 작업으로 새로운 형식이나 창의력보다 모두가 힘들게 살아 왔던 그 시대 상황 자체만으로 감동을 준다. 이 번 전시와 함께 징용인들의 한을 담은 ‘교토40번지’ 사진집이 눈빛사진가선 30호로 출간되기도 했다.



광부 이춘하



여지 것 사진가 신동필 사진을 본 것은 2005년도 ‘강원다큐멘터리 사진사업’에 내놓은 사진이 전부였다. 그 당시 난 ‘두메산골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었고, 그는 “탄광촌을 지키는 막장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 사진들이 강원다큐멘터리 사진 사업에 선정되며 알게 되었는데, 그 때 그의 사진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그의 작품은 잿빛 탄광촌이 카지노의 화려한 불빛에 묻혀가는 아픈 시대상을 기록하고 있었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탄광노동자들의 처절한 삶은 인간 존재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줄기차게 민족으로서의 핏줄을 내세워 온 그의 작업이 인간의 노동에 대한 문제로 옮겨 간 시점인 것 같았다.



교토 40번지



그리고는 한동안 사진판에 비켜 서 있던 그가 10여년 만에 사진을 내놓은 것이다. 처음 보여 주었던 “탄광촌을 지키는 막장 사람들”과는 달리 광부 이춘하 개인의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한 막장 노동자를 통해 노동자들의 위기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초창기 작업이었던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록에서부터 비전향장기수문제, 입양아문제, 강제징용 일세대인 ‘교토 40번지“, 위안부문제, 원폭피해자문제 등 한 민족의 아픔을 골고루 다루고 있었다.

사실 말은 쉽지만, 돈 안 되고 힘만 드는 이 같은 작업을 꾸준히 이어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아픔을 지켜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함께 아파하지 않고 찍을 수도 없지만, 찍더라도 금방 본색이 드러난다.



명동성당 (1991)


그런데, 그가 초창기에 작업한 민주화운동은 나도 기록했는데, 왜 신동필을 그 당시엔 몰랐을까? 모두 민주화를 열망하며 분노한 것은 같았지만, 그는 민주화운동의 주체인 학생 측 입장이었고, 난 한 걸음 물러난 일반인의 입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 완장 없이 현장을 어슬렁거렸으니, 그의 눈에는 경찰 프락치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한국외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권 철, 양승우와 함께 각각 정치, 사회, 민족 문제들을 일본에서 기록한 삼대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특히 그가 작업했던 강제징용자 일세대의 삶을 다룬 ‘교토40번지’를 유배된 조선인을 가둔 유형지로 해석하고 있었다.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채 버려 진 그들이 겪는 가난과 질병, 정신분열증 등을 보여주며 파렴치한 일본인들의 염치와 치욕의 역사를 눈감은 대한민국 정부를 나무라고 있었다.



비전향장기수 (2000)


그런데, 사진전을 열며 그가 사진을 그만 두겠다는 말을 다시 끄집어냈다. 왜 사진에 대한 미련을 떨치려는지, 그를 좌절케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가난하게 살아 갈 수밖에 없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설음이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건만, 희망이 보이지 않는 한국 사회의 암담한 현실이나 끼리끼리 나눠 먹어 온 사진판의 오래된 갑질 권력에 대한 환멸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전시한 사진들을 조건 없이 관련 사회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단다. 정신대할머니들의 사진을 비롯하여 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자료를 모두 내놓겠다는 것이다. 그 사진이란 결국 당사자들의 몫이기는 하지만, 사진을 그만 두겠다는 그의 말에 구체성을 띈 것이라 더 가슴 아프다.


예술은 신동필의 사진처럼 인간의 존엄, 진리, 정의 등을 담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의 사진들은 어두웠던 터널을 함께 뚫고 왔던 우리 모두로 하여금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 우리 시민 공동체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도록 하는, 그리고 그 위에서 전율하도록 하는 작품이다. 작품이란 이처럼 심장을 열어젖히는 것이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사진비평가 이광수씨가 말했다.

이 전시는 갤러리 브레송(02-2269-2613)에서 30일까지 이어진다.



사진가 신동필씨





-아래 사진들은 개막식과 뒤풀이 모습이다-

























































































1985 부산 남포동



부산의 다큐사진가 문진우가 상경하여, 30여 년 전에 찍은 사진들을 펼쳐놓았다.
지난 22일,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된 문진우의 ;비정도시‘가 바로 그 것이다.
다소 신파적인 ’비정의 도시‘라는 말을 들으니, 바로 80년대 이전으로 필름이 돌아간다.

그가 찍은 남포동 사진들은 그 당시의 수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게 했다.. 

내가 운영했던 남포동의 '한마당'에서  최민식 선생을 만나 사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부산매일‘사진부장으로 있던 장정수 소개로 문진우를 몇 차례 만난적은 있지만, 

사진에 미쳐 서울로 도망치며, 이내 그를 잊어버렸다.




1991 부산 남포동



작년 무렵, 폐북에서 문진우를 기억하게 되었으나,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갤러리 브레송'에서는 35년 만의 만남이었는데, 사진들이 너무 좋았다.

이런 사진이 3-40년 동안 잠자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한정식선생의 말씀처럼 “사진은 된장이나 와인처럼 숙성되어야 제 맛이 난다”는 게 실감났다.

그가 다시 보였다.


1985 부산 해운대


그 당시 사진판의 선배들이란 트리밍자 들고 다니며 후배들 사진을 이리 저리 짜르는 게 일 이었다.

그기에 걸렸다면 문진우의 사진도 이리저리 잘려나가 반병신 되었을 게다.

스승을 두지 않고, 꼴리는 대로 찍었기에 지금의 문진우가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기본에서는 벗어났지만, 사진의 전달 메시지는 강하다.

기록성에 자신의 감성을 더한 이미지라 울림이 컬 수밖에 없었다.



1987 부산 기장



80년대 초반, 부산에 있었던 문진우씨와 나는 알게 모르게 최민식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접근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휴머니즘을 향한 정신 하나는 확실하게 이어받았다.

난, 그 당시 시건방이 들어 인간성상실을 낡거나 날카로운 기계에서 찾았지만,

그는 인간을 등장시켜 다큐멘터리 사진의 수필을 쓴 것이다. 그가 선택한 접근법이 옳았다.

인간 자체가 사진 최고의 가치기준 아니던가?



1984 부산 자갈치시장



지금도 다를 바 없지만, 사진만 찍어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사진 찍는 직업들을 선호했는데, 그 당시 신문사 사진기자는 사진인 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사진기자로서 일하며 자신의 작업을 할 수 있었고, 난 여기 저기 사진잡지에 밥 빌어먹으며,

아마추어 사진판의 비리나 지켜보며 눈을 더럽혀 왔다.

그나저나 여지 것 부산의 문진우 사진을 몰랐다는 게, 더 부끄럽다.

한동안 내 사진의 주인이었던 산골사람들과 지내며 사진판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1985 부산 남포동



그를 생각하니, 또 열 받는다. 어떻게 이런 사진가가 학맥이나 인맥으로 범벅된 속칭 성골 진골에 가려

구석방 신세지고 있었단 말인가? 말 많은 부산의 최민식사진상 후보는 물론 ‘부산참견록’이라는 프로젝트조차

한 번 해보지 못했을까? 하기야! 끼리끼리 노는 바닥에 그야말로 개밥에 도토리 격이었을 게다.


평생 부산을 향해 카메라를 겨누어 왔지만, 그의 줄은 짧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

철저하게 밀려난 변방의 사진가였다.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문진우 사진을 영혼이 없단다. “영혼 좋아하시네,” 욕 나올라 한다.



1984 부산 충무동



인간에 대한 애정을 냉소로 토해내는 초창기 ‘불감시대’ 사진들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진가 김문호의 ‘온더 로드’를 많이 닮았다.

두 사진가가 드러내고자 한 도시인의 상실감은 구체적 사실보다 전체적인 해석이었는데,

그 방법의 하나로 이질감을 끌어들이고 있다.


신축빌딩 앞에 가면 쓴 사나이를 등장시켜 건물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하고,

쭈그려 앉은 노인들 앞에 멈춘 승용차로 인간존재를 위협하는 현대문명을 비판했다.



1992 부산 범일동



부산에서 활동하는 사진가가 부산을 찍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는 일편단심 부산을 찍어왔다.

소재주의고 뭐고 그런 생각은 할 필요도 없이 바다가 좋으면 바다를 찍었고,

부산의 슬픈 역사와 인간 소외를 담으려 산복도로에 메달리기도 했다.

사진은 자기 마음 가는 대로 당면한 상황에 따라 찍었던 것이다.

 


1993 부산 해운대



바다를 찍기 위해 해운대로 이사하는 열정도 보통은 아니지만,

궂은 날씨 따라 달라지는 바다의 암울한 풍경을 줄곧 찍어왔다.

그 사진으로 1997년 ‘바다, 하늘 그리고 오브제’란 전시를 했다.


산의 배를 갈라 길 내고, 동네 만들었다는 산복도로는 그에게 소외된 도시 사람들의 상징처로 자리 잡았다.

허리 굽은 노인밖에 없는 볼품없는 동네였지만,

그만의 어법으로 ‘산복도로에서 부산을 보다’(2013)란 전시를 만들어냈다.



2010 부산 산복도로


2010 부산 하야리아



그리고 돈 받고 찍은 사진이긴 하지만, 1950년 부산에 들어 선 미군부대 ‘하야리야’의 폐쇄된 모습을 찍어

‘하야리아, 사진 속에 잠들다’(2011)란 사진전도 했다.

 

지금은 낙동강 철새도래지였던 명지 뉴타운이 들어서는 과정들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모든 기록들도 80년대에 찍은 ‘불감시대’처럼 시간이 흘러 숙성되면 그 가치가 빛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5 부산 명지 뉴타운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는 그의 사진을 두고 “사진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라도,

그것의 속성이 기록에 가깝든 예술에 가깝든 순수 다큐멘트이든 관계없이

모든 경우에 통용되는 가치 하나만 골라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오래됨’이라 했다. (중략)

그의 사진은 구도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 죽어있지 않고, 그 안에 세계의 해석까지 들어 있다면,

그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 전시는 30일까지 이어지고, 눈빛출판사의 사진가선28호로 문진우‘비정도시’(12,000원)사진집도 출간되었다, 

(갤러리 브레송 / 02-2269-2613)


사진가 문진우씨



아래사진은 전시 오프닝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가 문진우를 비롯하여 ‘갤러리 브레송’ 김남진관장,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 사진가 엄상빈, 김문호, 김영호, 김봉규, 고정남, 마동욱, 고 헌, 곽명우, 신인식씨, 그리고 최철민, 박태진, 신은정, 정지윤씨 등 부산에서 온 사진가들도 많았으나, 대부분 성함을 모르는 분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가부키초

가부키초


'갤러리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 여섯 번 째 작가로 ‘권철 론’이 전시되고 있다. 6월20일 오후6시30분에 개막된 권철의 사진전은 오래 전부터 기다려 온 전시였다.

개막시간을 맞추려고 기다리는 중에 ‘아라아트’ 김명성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미스터 브레인워시전' 기자회견이 열리는데, 왜 오지 않냐는 것이다. ‘브레송’가는 길에 들릴 생각으로 서둘러 나갔으나, 전시장은 기자들로 만원이었다. 그 많은 기자들이 취재하는데, 나 까지 끼어들 필요가 있나 싶었으나, 인사동에서 열리는 대형전시라 사진만 찍고 충무로의 ‘갤러리 브레송’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철로 가는 중에 아내로부터 독촉이 왔다. 개막식을 못하고 기다리니, 빨리 오라는 것이다. 사진판의 기록자 곽명우씨가 늦어, 대신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데, 사진도 사진이지만, 시간이 늦어 마음이 바빴다.

전시장에 도착하니 주인공 권 철을 비롯하여 ‘브레송’ 김남진 관장,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 ‘눈빛출판사’ 이규상씨, 사진가 김문호, 성남훈, 강제욱, 신동필, 마동욱, 양시영, 이한구, 이일우, 김 원, 정영신, 김지연, 이정용, 이주영, 김진석, 송주원, 나떠구, 홍윤하, 김영호, 박영환, 마기철, 김주혁씨 등 많은 분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나중에는 하재은, 구자호, 곽명우씨도 나타났다.

개막식에서 이광수교수의 작가론과 작가 권철의 힘들게 사는 이야기를 들으니, 가라앉았던 분노가 또 다시 치밀어 올랐다. 한 동안 정치, 사회적으로 만연한 부조리와 사진판 비리에 목소리를 높여 왔던 것도 권철 같은 고통 받는 다큐멘터리사진가 많았기 때문이다.


최민식 사진상이 끼리끼리 해 처먹는 것도 모르고, 작년에 권철씨가 들러리를 선 적도 있었다. 사진을 모르는 어린애가 보아도 수상작보다는 권철의 사진이 뛰어나다는 것은 안다. 그리고 사진도 사진이지만, 권철은 어렵게 작업을 이어가는 의지의 사진가가 아니던가? 




 야스쿠니. 군국주의의 망령


 야스쿠니. 군국주의의 망령


 야스쿠니. 군국주의의 망령


 야스쿠니. 군국주의의 망령



'브레송'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사진인을 찾아서’란 이 기획전은, 사진은 좋지만, 속칭 진골 성골에 가려있는 진정한 사진가를 찾아 내어 작가의 전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라, 한 가지 주제로  보여주는 일반 전시와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보아왔던 회고전 형식의 원로전과도 다른 것은 이건 종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생각이나 형식들이 변해가는, 작가들의 주제와 접근방식, 그리고 진전하는 과정들을  한 눈에서 본다는 것은 한 작가를 이해하는데 안성마춤인 것이다.


이번에 초대된 다큐사진가 권철은 못 말리는 독고다이다. 이십대 중반에 사진 공부하러 일본 들어가 환락가 신주쿠 가부기초를 촬영했다. 보통 깡다구가 아닌 것이다. 자칫하면 야쿠자 한데 맞아 죽는다. 18년 동안 기록한 그 사진으로 고단샤 출판문화상 사진상도 수상했다. 그렇다고 주먹들의 세계만 보여주는 소재주의에 빠진 사람도 아니다.


그는 모두가 외면하는 한센병회복자의 삶은 담은 ‘텟짱’으로 데뷔한 인간미 넘치는 사진가다. '텟짱' 이야기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작업들이 진실을 찾아내어 밝히고 그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텟짱’은 소외에 대한 이야기다. 일본에서 소외당하고 멸시당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일본 한센병회복자 요양원에서 찾았는데, 주인공은 요양소에 살았던 시인이자 한센병 회복자인 텟짱이었다. 권철은 텟짱이 사망하기 까지, 14년 동안 그의 삶을 사진으로 담아 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철이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헌신적인 정신으로 무장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결정적인 사진 한 두 장만 찍으면 먹고 사는 데 지장 없는, 안정된 기자 자리를 사진을 위해 박차고 나온 사람이다.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을 취재하다, 무너진 건물에 끼여 양 다리를 절단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한계를 느낀 것이다. 사람에게 닥친 고난이 자신의 밥벌이라는데, 어찌 회의감이 들지 않았겠는가?

 


이호테우

이호테우

이호테우




저널리즘 사진기자는 뉴스를 찾아가지만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스스로 뉴스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서 권철은 조직이나 배경보다 세상과 독대하며 세상을 찍어 왔다. 그러면서도 외양이나 현상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 그리고 구조와 본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의 근대사가 만들어내는 풍경을 자신의 주제로 삼았는데, 가부키초, 야스쿠니, 오오쿠보 코리안타운, 우토로 등 모두가 일제 식민 경험과 연결된 사건들이다.

그 이후, 그의 자식이 태어난 지 100일째 되는 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터졌다, 가족을 위해 안정된 생활권을 모두 버리고, 무작정 한국으로 귀국하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한국 사회와 사진계의 현실을 주위에서 알려주었으나,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제주 거리에서 풀빵 장사로 연명하며 어려운 작업을 어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제주에 정착하며 시작한 ‘이호테우’작업은 중국 자본 침탈의 역사를 한 해녀를 통해 풀어 간 것이다, 돈이 얽히면서 뺏고 빼앗기는 추악한 인간 세계를 들춰내는 작업이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평생을 살아 온 해녀 할망의 집념과 쓸쓸함이 사진에 묻어있다.

그리고 신 자유경제 물결로 인해 서서히 중국인들이 점령해가는 제주의 모습을, 바다 멀리 중국인 관광객들을 가득 실은 어마어마한 크루즈선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권철은 작년 여름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기도 했다.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을 사진으로 고발하기 위해 제주시 제주목관아 안에서 사진전을 열겠다고 요청하자 제주시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허가 해줬다. 그런데 광복회 회원 몇 명이 나타나 일장기가 드러난 사진을  광복 70주년에 걸려 하느냐고 항의하자, 제주시는 그 항의를 받아들여 사진전을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린 것이다. 일장기가 있으면 친일이라는 그 단순 무지한 문맹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어찌해야 좋은가?,

그래서 야스쿠니 사진들을 이호테우 해변 길거리에서 전시 한 후, 모두 불태워버렸다.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항거였지만, 잘못된 사회구조에 대한 항거의 뜻도 담겨있다. 그는 있는 사건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건을 이미지화 한 후 그것을 퍼포먼스를 통해 새로운 사건으로 만들어가는 사진가다.


그는 야스쿠니 사진을 불 태웠던 곳 이호테우 매립장에서부터 시작하여 제주 전 지역을 순회 전시한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에서 행동하는 사진가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권철이 세상을 독대한다는 것은 곧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망각해버린 역사에 대해서만도 아니다. 자기들끼리 나눠 먹고, 예술이라 이름붙여 노닥거리는 한국 사진판에 대해서도 저항하고 있다. 




텟짱

텟짱



권철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걸 뒤늦게 후회하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사진판 자체가, 일그러진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그가 20년간 살아온 일본은 많은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나쁘고, 무식한 나라가 아니다. 일부 정치인들이 제국주의적 근성을 버리지 못해 판을 깨고 욕을 먹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에 대해 배려할 줄 알고, 돈이 없거나 힘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무시하지 않는다. 실력이 있으면 그만큼의 대접을 해 준다.


그렇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정글이고, 철면피의 세계다. 비단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진판은 더욱 심하다. 권력 있는 기득권자는 자기 패 끼리 판을 짜고, 어중간한 사진가는 그 주변을 서성거리며 온갖 추파를 보낸다. 권철이 좌절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한국 사진계의 연줄과 인맥이었다. 실력은 뒷전이고, 줄서기를 잘 해야 하는 이 썩어 문드러진 사진판에 어찌 구역질이 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의 작업은 중단되지 않는다. 2011년 일본 동일본대지진 피해지와 후쿠시마 원전을 취재한 후 국내 노후 핵발전소도 찍는 중이다. 두 나라의 핵발전소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만으로 메시지 전달은 분명하다. 그의 다음 작업은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제주에서 땅을 침탈하는 중국인들이라고 한다.

비평가 이광수교수는 권철이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면서  문학적으로 약간의 표현 방식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개 두 마리가 서성거리는 이미지에서 세상이 망해 인류가 사라진 후의 지구를 암시하고, 새끼줄에 묶인 죽은 굴비의 쭈그러진 모습에서 인간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미래를 말한다는 것이다. 


갤러리 브레송’ (02-2269-2613)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630일까지 이어진다.

 


글 : 조문호 / 아래사진 : 정영신, 조문호




-권 철 사진전 개막식과 뒤풀이 사진이다-
































































































































'갤러리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 다섯 번째 사진가,
이재갑의 ‘역사, 사진을 만나다“ 전이 지난 23일부터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린다.
전시와 함께 ‘눈빛사진가선 24호로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사진집도 출판됐다.

지난 23일 오후6시30분부터 열린 개막식에는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 김남진관장,

사진비평가 이광수씨를 비롯해 구자호, 엄상빈, 정진호, 김문호, 박신흥, 성남훈, 이상엽,

강제욱, 마동욱, 방종모, 하지권, 이경문, 정재열, 노승장, 이은숙, 윤승준, 남 준, 곽명우,

이한구, 오혜련, 이혜숙씨등 많은 사진가 들이 참여해 전시를 축하했다.

개막식에서 사진비평가 이광수, 이규상대표가  말했듯이. 사진이 너무 좋았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들이 독버섯처럼 피어 있었다.
일제의 잔재와 한국전쟁에 의해 희생된 동족의 처참한 학살현장,
베트남에서 저지른 잔혹행위와 우리민족 치욕의 현장들을 샅샅이 찾아냈다.


이재갑의 사진들은 자극적이거나 이상적으로 치장되지 않고,
조용히 대상을 관조하며 사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30년 가까이 지속된 그의 사진작업들은 하나같이 역사의 이면을 조명했다.
정면에 기록된 승리의 역사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고 묻힌 침묵의 역사였다.
바로 국가가 감춘 치욕의 역사였다.


또한 사족을 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 울림이 더 크다.
울분을 삼켜야 했던 사진가의 감정이 보는 이에게 바로 전달되었다.
이건 예술지상주의에 빠진 사진가들에 대한 일대 경종이기도 하다.

그는 처음부터 광대들의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무대 뒤의 쓸쓸한 풍경을 보여주며 사진판에 등장했다.
모두들 무대의 화려함에 관심 가질 때, 그는 뒤에 숨겨진 것들을 보여준 것이다.

사회적 소수인 혼혈인 역시 냉담하고 무표정한 표정으로 세상에 항변했다.
경산코발트 광산 민간인 학살현장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 그들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과 일본에 흩어진 조선인들의
유산 작업, 베트남의 증오비 등 하나같이 패자의 한을 들춰냈다.

그는 머리로 찍은 게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작업해 왔다. 
상처투성이의 현장과 정면으로 맞서는 아픔 또한 컸을 것이다.
그 트라우마에 벗어나려 시작한 ‘뇌안의 풍경’ 역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 건 기록과 기억의 역사를 넘어 개인의 주관적 기억을 담은 역사였다.   

가슴아픈 역사를 담은 대 서사시,  이재갑 ‘역사, 사진을 만나다“ 전은

오는 31일까지 이어진다.

사진, 글 / 조문호



눈빛출판사 발행, 12,000원














개막식과 뒤풀이의 이모 저모










































































































2016년 갤러리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 다섯번째 '이재갑 론'이 5월 23일부터 5월 31일까지 전시된다.


글 / 이광수 (사진비평가, 부산외대교수)


사진가 이재갑의 작업은 과거와의 대면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하여 지금까지 30년을 이어 왔다. 그가 대면하는 과거는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여러 작은 목소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일반화 할 수 없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그마저도 글이나 말로 규정하기 어려운 이질적이고 중층적인 과거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록과 기억 그리고 역사의 재구성에 관해 분명하고 확실한 인식이다.

이재갑 작업은 세 개의 솥발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역사'다. 역사 가운데 아픈 역사, 그 아픈 역사는 사람을 억압하고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식민과 전쟁에 관한 역사다. 그가 구성하는 역사는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전면에 등장한 것은 승리의 역사고, 환호의 역사일 뿐이다. 아픈 역사는 드러나지 않고 묻혀버린 침묵의 역사다. 이면의 역사, 이것이 이재갑 작업의 두 번째 솥발이다. 세 번째는 기억이다. 기록할 수 없는, 그렇다고 토해낼 수도 없는 트라우마. 잊기 위해 기억해야 하는 것. 이 기억에 대한 담론을 사진으로 작업한다. 이 셋이 모여 이재갑의 사진을 이루니 그것은 '아픈 역사를 이면과 기억으로 엮는 서사시'다.





1. 역사를 공유하는 방식

사진가 이재갑의 아픈 역사에 대한 작업은 논리적으로 매우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이 땅에 미국이 주둔하며 생겨난 혼혈인들에 대한 사진 작업으로 전쟁의 아픈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혼혈인'으로 출발한 그의 아픈 역사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그 기원을 찾는 방향으로 가면서 경산코발트 광산 민간인 학살과 일제강점기 그들이 이 땅에 남기고 간 건축물 유산에 대한 작업과 일본 내 흩어져 있는 조선인 강제 연행과 관련된 유산 작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는 베트남 전쟁으로 간다. 그는 역사를 말하되 아픈 역사를 말하고, 아픈 역사를 말하되 그것이 남기고 간 유산으로 말한다. 그런데 그 유산이라는 것은 여러 역사가 이질적으로 섞여 있는 것들이다. 그것을 국가가 정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잊어라 해서 잊히는 것도 아니다. 이재갑이 사진으로 역사를 말하는 방식은 그 아픈 역사에 담긴 중첩과 이질의 여러 면을 공유하자는 것이다.

사진가 이재갑이 그리는 아픈 역사는 항상 두 개의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의 '혼혈인'은 국가가 자유를 수호했다는 '국민'이 갖는 시선이 가려버리는 또 하나의 다른 시선을 말하고자 한다. 미군이 공산당 빨갱이들의 침략을 지켜내는 은혜를 베풀어주었다는 국가 중심의 거시사에 던지는 의문이다. 전쟁이라는 아픈 역사에 관한 두 개의 시선은 베트남 전쟁에 관한 작품,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국가에 의해 동원되어 남의 나라 민간인을 몰살한 것에 대해 이쪽에서는 영웅으로 기념을 하고, 저쪽에서는 불구대천의 원수로 증오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두 개의 시선은 반드시 특정한 시선 둘 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정된 둘이 아닌 드러나지 않은 여럿을 의미한다. 그것이 '혼혈인'에 관한 것일 때는 그들을 비정상 존재로 간주하는 한국 사회의 야만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베트남 전쟁에 관해서는 국가에 의해 동원되어 어쩔 수 없이 가해자가 된 그 피해자들을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사진가 이재갑이 말하는 아픈 역사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중첩되어 있다. 그들의 문제만이 아닌 우리들의 문제일 수도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그 역사를 표상하는 대상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재현할 뿐, 작가로서의 메시지를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의 사진은 중의적이다. 보여진 그 이미지에는 보여진 것과 감추어진 것, 그 둘의 의미를 동시에 담는다. 역사를 다루되 아픈 역사를 다루고 그 아픔을 사진가가 웅변하지 않고 독자가 그 안에 들어가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사진가가 그 아픔을 우선 가져야 독자가 공감할 수 있다.

사진가에게는 작업 때마다 부닥쳐야 하는 고통의 대면이다. 치부든 연명이든 자신의 사진이 삶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결벽스러울 정도의 작가 정신을 가진 터라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고통을 감내한다. 그래서 아픈 역사를 다룬 사진가가 못내 아프다. 그의 사진을 읽는 독자들도 아파야 하지 않겠는가?

2. 이면의 목소리를 듣는 방식

아픈 역사는 이면에서 침묵하고 있는 역사다. 침묵하다 보니 존재하지 않는 듯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하다. 크고 강하고 진지한 다수의 목소리에 눌려 작고 약하고 사소한 듯한, 여러 목소리들이다. 사진가는 그것들을 듣고 싶어한다. 사진가 이재갑의 첫 작업은 무대 뒤의 모습을 담은 1991년의 '무대 뒤의 차가운 풍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대 앞이 보여주는 그 화려함에 관심을 가질 때 그는 그 뒤에 숨겨진 이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졌다.



정리되지 않은 채 어지러운 연습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군상들의 모습이다. 그것이 무대든, 전쟁이든, 식민이든 이재갑은 드러난 것, 앞면, 승자의 모습 등에 묻혀 드러나지 않는 것, 기록이 아닌 기억, 기록이 언급하지 않으나 분명 실재한 것들, 사건이 남기고 간 이면에서 역사를 찾는다. 






  역사의 이면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1997년에 발표한 '혼혈인, 내 안의 또 다른 초상'부터다. 이 작업은 전쟁을 하러 (혹은 못 하게 하러) 온 미군이 남기고 (혹은 버리고) 간 그의 '사람'에 대한 작업이다. 한국 사회가 받아들이지 못한 시대의 이면이다.

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그 '혼혈인'에 대한 존재론적 기록인데, 그 기록의 형식과 제기하는 문제의 깊이가 시간이 가면서 바뀐다. 초기의 작업은 혼혈인의 일상을 중심으로 찍었다. 사진의 초점은 얼굴 모습이나 그들 생활의 주변성에 맞추어진다. 1992년 2월부터 작업한 이 작업은 15년의 작업 끝에 '또 하나의 한국인'이라는 제목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어 2006년에 발표된다. 사진은 냉담하고 무표정한, 메시지를 일부러 드러내지 않은 얼굴로 재현했다. 어떻게 보면 토종 한국인이고 어떻게 보면 백인이거나 흑인이기도 하는 듯한 모습들이다.

그들이 순종과 잡종, 도덕과 부도덕의 이분법에서 후자로 분류되고 그래서 정상이 아닌 비정상으로 취급되어 '우리' 아닌 '남'으로 분류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혼혈의 문제를 이른바 정체성의 문제로 올려 한국 사회의 병리를 지적함과 동시에 한강의 기적을 가져다 준 천조국 미국의 은혜에 묻혀 애써 쉬쉬했던 아픈 역사를 끄집어낸 작업이다. 그런데 얼굴 사진 밑에 그 '혼혈인'이 소지하는 주민등록증이 제시되어 있다. 주민등록증은 공식적 정체성의 표상이다. 공식적 기록으로 명토 박아준 그의 한국인임을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이재갑이 역사를 다루면서 처음 대상으로 삼은 혼혈이나 현재 가장 치열하게 작업하는 기념물의 공통점은 역사가 남긴 흔적 즉 이면이라는 사실이다. 사진가가 이면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이라는 건 전면에 나타난 것이 아니고, 이면에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승자의 기록이 진실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패자의 말, 기억의 말, 기념의 말 등이 모두 진실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재갑의 이면의 역사학은 전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사진가가 찾아가는 '진실'을 찾으러 떠나는 과정을 함께 보여줘야 사진의 역사학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전시라는 것이 그에게는 단순히 작품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독자가 진실을 찾는데 필요한 과정이다. 그래서 그 전시 안에는 사진가가 작업한 즉 진실과 만나러 갔던 길에서 사용했던 여러 가지 오브제가 설치된다.

그의 설치 전시가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말하는 장르의 크로스 오버가 아닌 것은 이 때문이다. 사진을 '진실'을 드러내(게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거기에서 다른 오브제도 반드시 사용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재갑은 예술 지상주의에 철저히 떨어져 있는 사진가가 된다.

3. 기억을 끄집어내 상생하는 방식

이재갑의 이면으로 하는 역사 작업은 기억 문제로 연계된다. 기억을 문제 삼아 사진 작업을 하는 것은 대개 사건의 현장이나 유물을 이미지로 만들어 보여주거나 기념물을 사진으로 찍어 보여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장이나 유품과 같은 1차 자료를 사진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불규칙적이고 이질적인 기억을 끄집어내려는 시도이다. 유물이나 유적이 가해자의 것이든 피해자의 것이든 그 역사적 경험을 독자들이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기념물 같은 것을 사진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국가나 관(官)이 기억을 배제하고 역사를 하나의 기록으로 지배하려는 시도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재갑은 이 두 가지의 방식을 모두 사용하였다. 전자에 속하는 것은 식민 일본이 한국에 남기고 간 적산가옥과 일본에 남긴 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의 유산에 대한 작업이다.



역사를 본격적으로 작업하기 시작한 1996년 이후 적산가옥과 서대문형무소 등 일제가 남긴 유산을 작업하면서 이재갑은 그 역사 안에 있을 한(恨)과 아픔을 기록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거기에서 기억의 문제를 끄집어냈다.


역사의 현장에서 기억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한 작업은 2008년의 한국전쟁 중 경북 경산의 한 코발트 광산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다룬 '잃어버린 기억'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후 2012년의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된 조선인 문제를 그들이 남긴 유적을 촬영하여 다룬 '상처 위로 핀 풀꽃'에서 그 작품의 완성도를 한껏 높였다.

그 사진들은 모두 어둡고, 음산하다. 대상이 어둡고 음산하여서가 아니다. 국가에 의해 학살되거나 국가가 방치한 채 끌려가 죽고 잊힌 그 죄 없는 사람들의 아픈 역사를 사진가가 어둡고 음산하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사람들의 비명이 있고, 물속에 수장돼버린 징용자들의 피울음이 있다. 동굴과 돌무덤에 갇혀 버린 한 맺힌 절규가 있다. 멈춰선 나가사키의 괘종시계에는 추모라는 이름 아래 애도는 없고 의례만 남은, 망각해가는 훼손된 역사의 시간이 있다.

이재갑은 2015년에 발표한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을 통해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억 문제를 작업하면서부터는 기념물을 대상으로 기억의 역사를 작업하기 시작한다. 아픈 역사가 기념의 대상이 되면 그것은 이제 공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순간 이후부터는 각 개인의 잡다한 기억들은 모두 망각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된다. 사진가 이재갑은 바로 이 국가에 의한 역사 독점이 갖는 폭력성을 말하고자 한다.

그의 사진에 이 시대의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추구하는 어떤 특별한 스타일을 만들어내려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저 기념물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 이외에 사진가는 별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다. 대상 그 자체가 국가주의의 폭력성을 충분히 갖기 때문에 그보다 더 극적인 어떤 요소들을 보여줄 필요가 없어서다.





이 맥락에서 이재갑이 굳이 다른 형식을 취하는 게 있다면, 베트남 전쟁을 놓고 한국과 베트남 두 국가가 역사를 어떻게 이미지화 하고 권력의 이데올로기로 삼는지를 비교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여러 사진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한다지만, 특별한 스토리텔링을 갖추지도 않는다. 결정적 순간을 담은 이미지도, 일부러 비틀어보는 프레이밍도 없다. 구조를 버리고 미시와 일상에서 역사성을 찾으려는 방편 같은 것도 시도하지 않는다. 예의 이재갑만의 독특한 컬러를 쓰지만, 화각이나 앵글 등 사진을 구성하는 물성은 거의 동일하다.

다만, 베트남 기념물을 찍은 경우 일부에서는 셔터 스피드를 길게 잡아 마치 어떤 혼을 찍은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정도가 다를 뿐, 기본적으로 둘의 재현 양식은 동일하다. 기념물은 권력의 이데올로기이다.

그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과거를 재현하고 구축해내는지를 독자들이 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그가 하는 두 나라의 기념물을 찍은 사진을 비교해서 보면 전쟁이라는 아픈 역사를 국가가 전유하여 이데올로기로 만들고 국민을 의식화 하는 행위는 한국의 경우에서 훨씬 강하게 나타난다. 기념물로 영웅 신화 만들기에서 한국이 훨씬 탁월함을 사진가가 드러내주는 것이다.

참전 군인이 아기를 안고 걸어 나오는 장면 같은 게 기념물에 조각되어 있는 것이 아주 좋은 예다. 사진가는 그 장면을 그냥 찍어 보여줄 뿐, 특별히 다른 메시지를 말하지 않는다. 사진은 (때로는 거짓말을 하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사실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사진가가 굳이 다른 짓을 하지 않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이재갑이 20년 넘게 천착해 온 식민과 전쟁은 결국 사람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사진가로선 정신적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인간적으로 매우 힘든 작업이다. 역사가 말해주지 않고 국가가 묻어버린 그 아픈 과거의 한(恨)에 대한 기록을 20년 동안 작업해 왔다는, 그것도 역사학자들이 하듯 냉정한 이성으로 한 것도 아니고 뜨거운 가슴으로 해왔다는 것은 어쩌면 그가 더 이상 그러한 작업을 진행하기 어려울 만큼 정신적으로 한계에 당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그는 최근 '나'에게 다가서는 중이다


'뇌(腦) 안의 풍경', 사회와 역사에 대한 사진가로서가 아닌 '나'에 대한 주체로서의 사진가가 보는 풍경을 작업하는 중이다. 사진가 이재갑 개인이 주관적으로 하는 기억을 담은 풍경이다. 그의 뇌는 풍경을 어떻게 기억하는 것일까? 사진가의 그 풍경들은 이성을 떠나 보고, 듣고, 느끼면서 철저히 자기 자신만의 감정들을 자아낸 것들이다. 기록의 역사에서 기억의 역사를 넘어 '나'의 역사로 가는 사진가의 길,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가 누구도 밟지 않은 길에 이재갑이 서 있다.

        
























 





어버이의 날에 즈음하여 다큐사진가 박병문의 “아버지의 그늘” 사진집(눈빛출판사) 출간과 전시회가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려 애잔한 가족애를 일깨우고 있다.

5월6일부터 21일까지 열리는 박병문 사진전은 검은 분진으로 휩싸인 탄광촌 철암의 오늘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 사진들은 쇠퇴해가는 탄광촌의 현실에 앞서 광부였던 아버지를 그리는 사진가의 애틋한 마음이 곳곳에 배어있다.

사진들을 보면 왠지 슬퍼진다. 그 삭막한 폐광에서 인간애를 느끼는 것은, 사진들이 주는 잔잔한 울림 때문이다.

사진가가 보여주려 한 것도 사라져가는 탄광의 빛바랜 풍경이 아니라 아버지가 힘겹게 살아 온 공간과,

그 안타까운 삶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올랐던 삼방동 언덕길, 빛바랜 월급봉투, 칠흑의 냉기에 휩싸인 지하막장,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까치발 건물과 분진이 날리는 저탄장 등 아버지가 살아 온 자취들이

마치 한 편의 흑백영화처럼 나른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사진가 박병문이 유년시절의 기억까지 들추어내며 추억 속 아버지의 발자취를 기록해 온지도 어언 십여 년이 넘었다.

꾸준히 아버지의 흔적들을 추적해 온 것은 아버지의 자취를 통해 탄광촌의 아픔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을 게다.

한 편으론 사진가의 기억을 통해, 보는 이의 아버지와 고향, 그리고 슬픈 기억들을 떠 올리게 하였다.

여지 것 탄광을 촬영한 사진가들이 여럿 있으나 대개 한 차례의 작업으로 끝냈지만, 박병문씨는 달랐다.

탄광 바깥에서 들여다 본 사진가의 시선이 아니라, 탄광은 그가 살아온 추억의 공간이고 아버지의 혼이 박힌 곳이었다.

선탄부(여자광부)에 이어 진폐에 대한 기록으로 이어갈 것이라는 그의 다짐은 한 개인의 가족사기 전에

우리 탄광의 소중한 역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박병문씨는 2010년 강원도사진대전 대상과 2013년 제1회 최민식사진상 특별상 대상을 받으며 사진계에 알려졌다.

2014년에는 “아버지는 광부였다”란 사진전을 열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사라져가는 탄광의 아픔을

슬픈 가족애로 이끌며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새까만 얼굴에 맺힌 아버지의 눈물은 한 개인의 슬픔을 넘어

우리의 시대적 아픔으로 닥아 왔던 것이다. 아버지를 기억하는 작업은 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난 해 “검은 땅 우금에 서다”에 이어 또 다시 ‘아버지의 그늘’을 펼쳐 보이는 등,

아버지에게 바치는 세권의 사진집을 연이어 펴낸 것이다.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는 “기록으로 불러들인 기억 그리고 광부 아버지“란 서평에서

박병문의 사진은 아버지께 바치는 헌시라고 말하고 있다.

지난 6일 오후6시에 열린 사진전 개막식에는 전시작가 박병문씨를 비롯하여 ‘갤러리 브레송’ 김남진 관장,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 사진비평가 이광수, 사진가 엄상빈, 황규범, 김문호, 강제훈, 김봉규, 노형석,

강제욱, 최영진, 하지권, 성남훈, 은효진, 김재영, 김가중, 정태만, 박영환, 방종모, 남 준씨 등

많은 사진가들이 자리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가 박병문 사진집 아버지의 그늘’ (눈빛출판사) 책표지


삼방동, 2014


삼방동, 2012년


폐가, 2007년


선탄장, 2012


대한석공, 2012년


퇴근하는 선탄부, 2007


선술집, 2007


철거 중인 철암시장, 2014


철거 중인 철암시장, 2014


눈 속의 광부 동상, 2015

 

철암 전경, 2012년


-전시 개막식 사진들-






















-전시 뒤풀이 사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