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경영난으로 은행에 저당 잡힌 ‘아라아트’건물이 중국사람에게 넘어갔다.

경매액은 495억이었으나, 여섯 차례의 유찰 끝에 반 값에 가까운 290억에 낙찰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낙찰 받은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으나, 잔금을 치루고 나타 난 사람은 중국인 하수인인 조그만 기업 이사였다.

그런데, 절차도 없이 막무가내로 건물을 접수하려 드는 것이다.

건물이 낙찰되기 오래 전부터 대관전과 기획전 일정이 몇 개월이나 짜여 있는데, 그 계약들은 어쩌란 말인가?

억울하게 건물 빼앗긴 주인이 어디 ‘잘 해 보세요“라며 위약금까지 물어가며 순순히 물러 날 사람이 있겠는가?

최소한, 비켜달라는 양도소송을 해도 6개월은 족히 걸린다.

문제는 중국 자본이 인사동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주도를 비롯해 곳곳의 요지가 중국인 손에 넘어간 것은 알고 있으나, 인사동마저 풍전등화 신세가 된 것이다.

문화예술의 요충지가 넘어 간다는 것은, 국민들은 물론 작가에게 심각 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전, 혜정병원과 몇 몇 건물이 중국자본에 넘어가더니, 이젠 인사동 최고의 갤러리 ‘아라아트’까지 접수하고 말았다.

뺏고 뺏기는 자본의 논리야 어쩔 수 없으나, 그 밑에 빌붙어 법까지 무시하는 매국노 같은 인간들이 더 얄미운 것이다.









지난 23일, 아내의 ‘장날’ 사진전 DP를 해야 하는데, 화물칸 에리베이터를 걸어 잠그고,

현수막을 걸러 온 업자를 돌려보내는 등 전시를 방해하고 나선 것이다. 돈이 예술을 밀어 내는 상황이 벌어졌다.

김명성씨가 경찰을 불러 업무방해죄로 고소하고, 늙은이가 들어 올리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으로 전시는 치루었으나,

전시기간 내내 갤러리 주위를 맴돌며 위압감을 조성했다.

그런데 전시가 끝나는 날, 또 다시 방해공작이 시작되었다.

작품철수를 우려한 조각가 김운성, 김서경 부부는 한 밤중에 짐을 실어 갔으나, 난 방심하다 그만 걸려던 것이다.

갑자기 문을 걸어 잠가 도와주던 조카사위 김중호와 함께 10여분 동안 짐칸 에리베이터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아라아트’ 김명성대표 지시로 열쇠 고리를 잘라 나오긴 했으나, 괘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 이튿날, 마무리하러 다시 인사동으로 나갔다.

인사동거리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는데, 왠지 거리 분위기가 침울했다.

‘아라아트’에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3,4,5층에서 치르기로 한 관광상품공모전에 다시 제동 걸고 나선 것이다.

다급한 주최 측은 '아리수'에서 작품을 접수하며, 갤러리 측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이라고 했다.

더 웃기는 것은 건달들이 일당주고 모아 온 연약한 노인들을 방패삼아 건물 접근조차 막았다는 것이다.

너무 늦어, 야비한 그 꼴을 기록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그리고 멀쩡한 전 층의 보안장치 교체 공사를 강행하며,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직원들을 내 쫓았다는 것이다.

법보다 주먹이 먼저라는 말이 있듯이, 고소할 테면 하라는 것이다. 

쫓겨나온 여직원들과 대표 김명성씨는 ‘허리우드’에 퍼져 앉아 밀고 당기는 협상을 했지만,

계속 약속을 번복해 상대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김명성, 박인식, 전인경, 이태규, 정영신, 전인미, 이상훈씨 등 여러 명이 모여앉아 술 잔에 시름 달랬지만.

대안은 없었다. 돈이나 힘이 딸리니 마음까지 딸렸다.


체념하고 돌아오다 배우 오광록씨를 만났으나, 친구가 옆에 있어 하소연 할 처지도 못됐다.









이튿날 사무실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전화에, 다시 인사동으로 나가야 했다.

나간다고 뽀족한 수는 없겠으나, 불안해 하는 여직원들의 힘이라도 되어주고 싶었다.

길거리에서 ‘통인가게’대표 김완규씨도 만났으나, 인사동은 평소처럼 관광객들의 발길만 분주했다.








‘아르아트’에 도착하니 어떻게 되었는지, '한국관광공사'에서 짐을 들이고 있었다.

전시 주최측이 다급해, 그 네들과 재계약을 한 것 같았다.


또 한 고비 넘겼으나, 앞으로 남아 있는 전시가 걱정스럽다.


추측컨데, 그들이 직접 운영하게되면 중국 그림들이 몰려 올게 뻔하다.
그 건축물은 용도변경을 할 수 없어 갤러리로 사용할 수 밖에 없는데,
적자운영을 지켜 본 그들이 가난한 한국 작가들 대관에 의지할 리 없다.
저희 끼리 서로 밀어주는 근성을 활용해, 중국작가의 국내진출 교두보가 될 것이다. 





찬 바람 부는 미술시장에서, 9개층의 전층을 갤러리로 운영한다는 건 처음부터 무리수였다.

그동안 '아라아트' 김명성씨는 경영에 허덕이면서도 가난한 작가들을 위해 많은 경제적 도움을 주어왔다.

이번에 전시한 정영신의 ‘장날’전과, 3개 층에서 전시한 김운성, 김서경 조각가 부부의 평화전도 무상으로 빌려 준 것이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밟혀 온, 힘없는 작가들의 한 가닥 불씨마저 꺼져버렸으니, 이제 살아갈 의욕조차 잃었다.

정부는 사면초가에 몰린 예술인들을 그냥 두고 볼 것인가?


이제, 살아 남으려면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24일부터 30일까지 아라아트센터


무주장 (1989) 디지털프린트 400x270cm(사진=정영신)


[아시아경제 임온유 기자]


사진가 겸 소설가 정영신이 1980년대 시장 풍경을 담은 사진전 '장날'을 연다. 오는 24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5층에서 열린다.

정영신은 지난 30년간 전국의 오일장 600여 개를 돌며 시골 사람들의 가난하지만 인정미 넘치는 삶을 사진과 글에 담아왔다. 

이번 사진전은 1980년대 초창기 사진들로 이루어졌다. 사람 사는 정에 전시의 초점을 맞췄다. 정영신은 "장터에 가면 고향의 냄새와 맛, 소리와 감촉까지 느낄 수 있다"며 "오일장들이 대형마트에 밀려나며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장날은 지역경제의 모세혈관"이라고 했다. 


남원장(1988) 디지털프린트 400x270cm(사진=정영신)


사진 속에는 물건 파는 일보다 사람 만나는 일이 즐거워 장에 나온다는 할머니, 장바구니 사이로 목을 내민 강아지의 정겨운 모습이 꿈틀거린다. 자기 몹집보다 큰 봇짐을 머리에 얹고 다닌다거나 따가운 햇살에 양산을 받쳐 들고 앉은 모습은 정겨우면서도 눈물겹다.

오래된 사진에서는 묵힌 장맛이 난다.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사진들은 각박하게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에 대한 안타까움과 잃어버린 이웃을 향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정영신은 "대형마트에서 느낄 수 없는 생생한 사계절을 장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며 "장에 가서 마트에서 주는 포인트 대신 사람의 손으로 건네주는 덤을 체험해 보라"고 권한다.

 

임온유 기자 ioy@asiae.co.kr




'정영신의 장날'사진전, 인사동 ‘아라아트' 24일~30일까지열려



▲정영신 '장날'사진집 표지



30여 년 동안 장에 미쳐 장돌뱅이처럼 장을 쫓아다녔던 정영신의 ‘장날’사진전이 오는 24일부터 30일까지 인사동 ‘아라아트’‘(02-733-1981)에서 열린다.(오프닝 24일 오후6시)


정영신의 ‘장날’전은 80년대 찍은 사진들만 모았는데, 세월의 두께에 의해 된장처럼 구수한 냄새도 베어나고, 잘 익은 막걸리 맛도 난다.


정영신의 장터 사진은 아무런 기교도 멋도 부리지 않는다. 다만 따스한 인정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만 차곡차곡 쌓여 있다. 시골 할아버지의 등짐에, 아줌마들의 봇짐에 감춘 사연 사연들을 장마당에 풀어 낸 것이다.


솔직히, 아내나 자식 자랑하는 자를 팔불출로 치지만, 팔불출이 되어도 할 수 없다. 그 긴 세월동안 작업해 온 과정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80년대 사진들은 나와 결혼하기 이전인 사진동아리에 함께 할 때 찍은 사진들이다. 같은 다큐사진을 하지만, 장터에 대해서는 선배고 스승이다. 사진뿐만 아니라 사람을 중시하는 인문학적 접근도 따를 수가 없다.


전국 오일장 600여개를 다 돈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해내 준 것이 고맙기 그지없다. 그것도 경제적 뒷받침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한 집안에 다큐사진가가 한 사람만 있어도 망한다는데, 두 사람이 모두 다큐사진을 하니, 사는 꼴이란 보나마나다. 신용불량자 주제에 기름 값만 생기면 떠나기를 반복했으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짓이다.



▲정영신,1986담양장


어쩌면 내가 끼어들어,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아내의 사진철학을 그르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전국 오일장을 다 돌도록 재촉해, 그만의 방식에 재제를 가했기 때문이다. 버스타고 장에가 하루 종일 할머니들과 놀며 삶의 철학을 카메라에 담아왔는데, 난 사라져가는 현장을 빨리 기록해야 한다는 안타까움에 발발거린 것이다.



▲정영신,1987구례장


장마당에 펼쳐진 사물이나 장에 나오는 사람들도  나처럼 바쁘게 서둘지 않았다. 행여 친구나 사돈이 나타나지 않을까 사방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이 것 저 것 구경하며 느리게 느리게 장날을 즐긴다. 정 나누는데, 바삐 서둘 일이 아닌 것이다.



▲정영신, 1988남원장


그렇지만 장터에서 마음조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렵사리 나왔으면 한 군데라도 더 돌아야하는데, 그저 할머니들과 이야기 나누느라 일어날 생각을 않기 때문이다. 없는 돈에 할머니 물건까지 바리바리 사들고 일어나는 데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만큼 사람 사는 정을 중요시하는 그의 접근법을 이해 하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영신, 1989순창장


다큐멘터리사진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그의 사진에서는 현장성에 의한 휴머니티가 짙게 깔려있다. 그래서 그의 장터 사진을 보면 따뜻한 인간애가 모닥불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다.



▲정영신, 1988담양장


정영신은 처음 카메라를 잡았을 때부터 장터의 사람을 겨냥했다. 장터를 기록해야겠다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고 사진을 선택하는 것과, 사진을 하다 장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다르다. 대개 사진가들이 작업을 하다보면 시류에 따라 주제가 바뀌기도 하고, 살기 위해 새로운 주제를 찾기도 해, 평생 작업으로 끌고 가는 경우는 드물다. 오래 동안 장터를 찍었다는 사진가들도 대개 2-3년이면 끝내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외는 취미나 공모전용 사진소재를 찾아다니는 넝마주이식이 전부였다.



▲정영신, 1988순창장


정영신의 장터사진은 다소 산만한 느낌은 들지만,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장터의 난장스러움이 잘 묘사되어 오히려 정감이 간다. 대개가 화면을 단순화시키기 위해 장애물을 치우는 등, 주변을 정리해 기록적 가치를 망가트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짓은 절대 안 한다. 세월이 지나면 그런 하잘 것 없는 장애물도 역사적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정영신, 1990무주장


그럴듯한 배경을 택해 장꾼들을 연출시키는 기존의 사진들에 비해, 이 처럼 소통하며 찾아 낸 상대방의 감정묘사나, 장마당의 어지러운 분위기가 주는 잔잔한 울림이 훨씬 오래간다.



▲정영신, 1989남원장


대개 사진인들이 습관적으로 찍을 대상을 만나면 화면부터 구성하게 된다. 특히 장터 특성상 하이앵글, 즉 위에서 내려 보고 찍는 경우가 많은데, 정영신이 구사하는 카메라앵글은 대개 수평이다. 찍히는 사람과 찍는 사람의 자세가 평행이거나 아니면 더 낮은, 즉 동격을 의미하고 있다.



▲정영신, 1988청양장


사진을 찍기 전에 물건을 사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간의 벽을 허무는 것 또한 그만의 어프로치다. 재미는 좀 덜하지만, 그보다 몇 배로 값진 장꾼과 사진쟁이의 소통된 마음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영신식 색깔의 장터세계고 작품세계인 것이다.



▲정영신, 1989고창장


정영신의 장터 사진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동안 다섯 차례의 장터개인전을 가졌고, 14년 전에 펴낸 정영신의 "시골장터 이야기"는 이미 13쇄에 이르도록 많이 팔렸다.


그 이후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장터사진아카이브 “한국의 장터‘도 재판이 나왔다. 눈빛 포토에세이 ’전국5일장 순례기‘에 이어 전시와 함께 출간되는 ’눈빛사진가선‘ ’장날‘사진집(12,000원)은 전시되는 작품이 모두 실려 있다.



정영신,  1990 순창장



정영신의 장터 사진을 보면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각박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을 반성케 할 단초를 제공한다.

”사람 사는 게 이런 것이라고...“


*전시문의:아라아트(02-733-1981)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사진가]








장터는 선조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곳이며, 이웃과 인정을 나눈 만남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각박한 현실은 인터넷쇼핑이나 마켓에 서서히 밀려 나고 있어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장마당의 정서나 인정은 물론 장옥이나 저울같은 옛날 집기들마저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 장터박물관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인류사나 문화사에 중요한 몫이기에, 여러 지자체에 제안해 보았으나 감감소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국민들이 직접 만드는 박물관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서

‘장날’ 전시를 기획하며 함께 할 발기인을 모집하려 합니다.

장터박물관을 위해, 제일먼저 30년 동안 기록해온 정영신의 장터사진 원고 35,000컷과

조문호의 장터사진 15,000컷 등 오만 컷 모두를 조건 없이 기부하고,

정영신의 ‘장날’ 사진전에서 판매되는 작품 값(제작비 제외)도

전부 장터박물관 건립을 위한 기부금으로 내놓을 작정입니다.


오일장을 사랑하는 국민들이 기왓장 한 장 올리는 심정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금전적 기부도 좋지만, 자신의 재능을 보태거나 오래된 장터 집기 하나라도 내놓으며,

모두 함께하자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운영방안은 마련되어야 겠지만...

그 지역 농민들의 유기농 농산물을 장터박물관 시장에서 팔기도하고,

다양한 장터 축제를 열어가며 함께 나누기 위해 관심있는 분들의 의견을 모우려 합니다.

국민들의 손으로 세우는 우리나나 최초의 장터박물관을 탄생시키기 위해, 

전시기간 내내 ‘장터사랑모임’에 함께할 분을 찾으니, 많은 관심 바랍니다.



'장날' 사진전 : 2016년8월24일부터 30일까지 / 인사동 '아라아트'5층

개막식 : 24일 오후6시


정영신 올림

장 날
정영신展 / JUNGYOUNGSHIN / 鄭永信 / Photography
20160824-20160830



정영신-장날-1990 순창장-잉크젯 프린트 160X110cm



초대일시 / 2016_082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아라아트센터

ARAart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26

Tel. +82.2.733.1981

www.araart.co.kr




장날은 느림의 미학이다. / 30여 년 동안 장에 미쳐 장돌뱅이처럼 쫓아다닌 정영신의 장날세월의 두께에 의해 된장처럼 구수한 냄새도 베어나고, 잘 익은 막걸리 맛도 난다그는 아무런 기교도 멋도 부리지 않는다. 다만 따스한 인정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만 차곡차곡 쌓여 있다. 시골 할아버지의 등짐에, 아줌마들의 봇짐에 감춘 사연 사연들을 장마당에 풀어 낸 것이다.



정영신-장날-1988 남원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솔직히, 마누라 자랑 자식 자랑하는 자를 팔불출이라 하지만, 난 팔불출이란 소리들어도 할 수 없다. 그 긴 세월동안 작업해 온 과정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에 전시되는 80년대 사진들은 나와 결혼하기 이전인 사진동아리에 함께 할 때 찍은 사진들이다. 같은 다큐사진을 하지만, 장터에 대해서는 선배고 스승이다. 비단 사진뿐만 아니라 사람을 중시하는 인문학적 접근도 따를 수가 없다.


전국 오일장 600여개를 다 돈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이겨낸 것이 고맙기 그지없다. 그것도 경제적 뒷받침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한 집안에 다큐사진가가 한 사람만 있어도 망한다는데, 두 사람이 모두 다큐사진을 하니 사는 꼴이란 보나마나다. 신용불량자 주제에 기름 값만 생기면 떠나기를 반복했으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짓이다. .



정영신-장날-1990 순창장-잉크젯 프린트 160X110cm




어쩌면 내가 끼어들어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아내의 사진철학을 그르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전국 오일장을 다 돌도록 재촉해, 그만의 방식에 제제를 가했기 때문이다. 버스타고 장에가 하루 종일 할머니들과 놀며 삶의 철학을 카메라에 담았는데, 난 사라져가는 현장을 빨리 기록해야 된다는 안타까움에 발발거린 것이다


장마당에 펼쳐진 사물이나 장에 나오는 사람들도  나처럼 바쁘게 서둘지 않았다. 행여 친구나 사돈이 나타나지 않을까 사방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이 것 저 것 구경하며 느리게 느리게 장날을 즐긴다. 정 나누는데, 바삐 서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장터에서 마음조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렵사리 나왔으면 한 군데라도 더 돌아야하는데, 그저 할머니들과 이야기 나누느라 일어 날 생각을 않기 때문이다. 없는 돈에 할머니 물건까지 바리바리 사들고 일어나는 데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만큼 사람들의 정을 중요시하는 그의 접근법을 이해는 하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영신-장날-1987  구례장-잉크젯 프린트 160X110cm



다큐멘터리사진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그의 사진에서는 현장성과 인간에 대한 정이 짙게 깔려있다. 그래서 그의 장터 사진을 보면 따뜻한 인간애가 모닥불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다. 정영신은 처음 카메라를 잡았을 때부터 장터의 사람을 겨냥했다. 장터를 기록해야겠다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고 사진을 선택하는 것과, 사진을 하다 장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다르다. 대개 사진가들이 작업을 하다보면 시류에 따라 주제가 바뀌기도 하고, 살기 위해 새로운 주제를 찾기도 해, 평생 작업으로 끌고 가는 경우는 드물다. 오래 동안 장터를 찍었다는 사진가들도 대개 2-3년이면 끝내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외는 취미나 공모전용 사진소재를 찾아다니는 넝마주이식이 전부였다.




정영신-장날-1990 무주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정영신의 장터사진은 다소 산만한 느낌은 들지만,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장터의 난장스러움이 잘 묘사되어 오히려 정감이 간다. 대개가 화면을 단순화시키기 위해 장애물을 치우거나 지워 기록적 가치를 망가트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짓은 절대 안 한다. 세월이 지나면 그런 하잘 것 없는 장애물도 역사적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배경을 택해 장꾼들을 연출시키는 기존의 사진들에 비해, 이 처럼 소통하며 찾아 낸 상대방 감정묘사나, 장마당의 어지러운 분위기가 주는 잔잔한 울림이 훨씬 오래간다.



정영신-장날-1986 담양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대개 사진인들이 습관적으로 찍을 대상을 만나면 화면부터 구성하게 된다. 특히 장터 특성상 위에서 내려 보고 찍을 경우가 많은데 정영신이 구사하는 카메라앵글은 대개 수평이다. 찍히는 사람과 찍는 사람의 자세가 평행이거나 아니면 더 낮은, 즉 동격을 의미하고 있다. 사진을 찍기 전에 물건을 사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간의 벽을 허무는 것 또한 그만의 어프로치다. 재미는 좀 덜하지만, 그보다 몇 배로 값진 장꾼과 사진쟁이의 소통된 마음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영신식 색깔의 장터세계고 작품세계인 것이다


정영신의 장터 사진을 보면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각박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을 반성케 할 단초를 제공한다. "사람 사는 게 이런 것이라고..."  / 조문호(사진가)




정영신-장날-1988  청양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추억으로 가는 문 / 정영신의장날은 추억으로 가는 문이다. 이미 사라졌고, 잊힌 풍경이라 여겼는데, 벽돌 벽이 문으로 변하는 마법처럼, 사진은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다. 정지된 것 같은 평면 안에서 이야기가 솔솔 새어 나온다. 사진을 보고 있자면, 나도 어느새 20년여 전, 혹은 30년여 전으로 들어가 있다.


내가 처음 장을 보러 간 것은 1981년의 일이다. 우리 집에서는 현금이 워낙 귀해서 계란으로 돈을 사서 차비를 써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가 손에 쥐어 준 계란 몇 개를 가지고 가면 며칠간 차비를 쓸 수있었다. 그런데 계란을 팔 수 있는 곳은 한 군데가 아니었다. 그중 가장 편하게 팔 수 있는 곳은 학교 앞 점방이었고, 가장 먼 곳은 장터였. 처음 가져 간 계란을 팔았던 곳은 학교 앞 점방이었다. 느그들 차비 해사 씅께, 이 닭알 가지가서 폴아갖고 오니라.”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계란 한 꾸러미를 내밀며 말했다. 이런 것은 엄니가 폴아사제. 학생이 어띃게 계란을 다 폴로 간다? 그라다 깨져불기라도 하먼, 우짤라고.” 장에 갈 시간이 없응께, 안 그라냐, .”

아무리 버텨 보아도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농사에 정신이 없었고, 무거운 가방을 든 형의 눈빛은 완강한 거부의 뜻을 담고 있었다. 결국 나는 계란 개수를 줄이는 협상을 하였고, 짚으로 싼꾸러미 대신 계란 세 알을 주머니에 담았다. 하지만 문제는 버스 안이었다. 그 당시의 통학 시간대의 버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손님을 실었다. 사람을 태운 것이 아니라, 람을 쟁여 실었다. 더구나 장날은 더 심했다. 짐이고 사람이고 실을 대로 실은 버스가 차장의오라이!” 소리에 출발을 하면, 기사는 직선의 길도 갈지자를 급하게 그으며 차를 몰았다. 차의 오른쪽에 타고 내리는 문이 있었으니, 차의 왼쪽으로 사람이며 짐을 쏠리게 하였던 것이. 때로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여 실제로 넘어진 버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버스 한 번 타고 나면, 책가방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고, 사람이나 다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용케 의자에 앉았다고 해도 편할리가 없었다. 함부로 열린 창문으로 책가방이며, 짐이 날아들었고, 이 질질 흐르는 짐도 유리창을 통해 닥쳐오는 판이었으니, 아무리 멋쟁이 여학생이라도 장날 통학버스를 타고 나면 거지꼴이 되었다. 거기다가 새끼줄에 묶여 있던 닭이라도 풀리는 날이면, 옷이며 머리며 가릴 것없이 닭똥이뿌려지며, 물크덩하고 따뜻한 닭똥세례에 오리까지꽥꽥 소리로 음악을 연주해대면,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가 아니라 고통과 아우성과 악취가 진동하는 오물통 같았다. 계란 세개를 주머니에 담고 있었던 나는 버스를 타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계란이 깨지지 않게 해야 했다. 그 당시에는 계란 하나 값이 차비보다 비쌌다. 계란 하나를 팔면, 왕복 차비가 되었으니, 요즘 시세로 한다면, 계란 하나에 2천 원 내지는 3천 원은 하였던 것이다. 나는 호주머니보다 가방이 더 안전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계란을 가방에 넣었다.



정영신-장날-1989 순창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버스는 역시 만원이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으나, 우리 마을의 아이들과 장꾼들 20여 명이 더 탈 수 있었다. 그때의 시골버스는 고무로 만든 버스 같았다. 그 후로도 적잖은 손님을 더 태웠으니, 고무중에서도 신축성이 대단히 좋은 고무로 만든 버스였음에 틀림없다. 주머니에 있던 계란을 책가방에 옮기고 나는 초긴장을 하며 버스에 올랐다. 읍내까지 갈 동안 가방을 사람들 머리 위로 들고 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버스에 타는 것도 쉽지 않아서 두 손으로 가방을 들어올린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버스를 타는 순간부터 가방에 충격이 가해졌다. 그것은 인력으로는 막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버스에 탄 후 가방을 두 손으로 치켜들고 있자, 것이 안쓰러워 보였던지, 형이 대신 가방을 들어 준 것이었다. 그렇게 내 책가방은 읍내까지 배달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 가방을 열어 보니, 그렇게 고이 간직해 온 계란 중 하나가 깨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변의 풀잎을 뜯어 책과 공책과 가방 안을 닦아냈. 하도 귀한 계란이라 어지간하면 먹었을 것이지만, 으깨어진 계란은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그 계란이 갑자기 미워져서 장터에 가서 팔라던 어머니의 말을 무시하고 학교 앞 점방에 주고 말았. 그 점방에서는 계란 한 개당 70원을 쳐주었다. 계란 판 돈을 받아 든 어머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땅히 300원 정도를 받아와야 하는데, 내가 내민 돈은 140원이었다. 나는 버스 안에서 계란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일도 상세히 이야기하였다. 란 하나가 깨졌다는 말에 어머니는 안타까워했지만, 나무라지는 않았. 어머니가 알고 싶은 것은 어디에다 계란을 팔았냐는 것이었다. 학교 앞에서도 계란 받어요.” 그렇게 말했다. 똑같은 계란이 학교 앞에서는 70원 쳐주고, 장터에서는 100원 쳐준다는 것을 어머니의 말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가격 차이였다. 조금만 걸어가면 훨씬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물건이 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다음부터 계란을 팔 때면, 꼭 장터에 갔다. 그것도 어머니의 단골집으로 갔다. 단골집 아주머니는 같은 물건이라도 더 낫게 값을 쳐주었으며, 하다못해 사탕 하나라도 내입에 물려 주었다.




정영신-장날-1989 남원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장터는 세상의 모든 것을 모아 놓은 집합소였다. 닭이며 오리 같은 가축은 물론이고, 온갖 생선과 과일에, 보지도 못했던 신기한 물건들까지 거기에 가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그릇을 모아 놓은 것 같은 그릇가게, 세상의 모든 진기한 것들이 모여 있는 잡화상, 수백 가지의 옷들이 걸려 있는 옷가게 등. 나는 서울이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장터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많은 것들 중 내 발목을 잡았던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짜장면 집에서 풍겨 나오던 음식 냄새였다. 중학교 입학식 날 먹어 보고는 다시는 먹어 보지 못했던 짜장면. 그것은 지상 최고의 음식이었고, 후루룩 빨아먹다가 혀까지 빨려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음식이었다하지만

그 무엇보다 장터에 많았던 것은 물건이나 다른 짐승들이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벙거지 모자를 쓰고 막걸리집에서 환하게 웃는 할아버지도 있었고, 마을 사람들의 짐을 다 싣고 장터로 들어서는 구루마도 있었다. 그렇게 구루마를 끌고 온 소에게 막걸리를 먹이고, 지를 먹이는 장면을 볼 수 있는 곳도 장터였다. 장을 보러 온 사람 중에는 남녀가 따로 없었지만, 물건을 사거나 파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특히 노점에 앉아 물건을 파는 이들은 거의 전부가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의 손은 새카맸고, 주름이 많았으며, 갈라진 데가 많았. 즉 장터는 어머니들의 삶의 터였고, 그녀들의 생활력이 살아있는곳이었다.



정영신-장날-1989 고창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내 어머니도 몇 번 좌판에 앉은 적이 있었다. 산에서 채취한 버섯이나 나물 같은 것은 물론이고, 깻잎이나 오이나 고추를 따서 장에 내다 팔았다. 특히 버섯은 상당히 비싼 값을 받기도 하였는데, 어머니는 며칠간 따온 버섯 중, 비싼 것과 싼 것을 나누어, 싼 것은 집에서 먹고, 싼 것은 죄다 장에 내다 팔았다.

친구 중 하나는 병영이라는 곳에서 유학 온 아이였는데, 자취생이었, 공부를 잘했다. 나는 그 친구의 어머니가 장터에서 멸치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던 그 친구는 홀어머니의 뒷바라지에 힘입어 훌륭하게 성장하였고,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삶을 잘살고 있다. 그 친구가 그렇게 성공하고 바르게 살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 나아가 장터의 힘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러 몇몇 집에서는 눈속임을 하기도 하였다. 쌀집의 되는 일반 가정집의 되와 달라서 쌀집에서 쌀 한 되를 팔아와 집에 있는 되에 담아보면, 9홉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장꾼들 저울은 눈금도 다르다고 하였지만, 모든 장사꾼들이 그러지는 않은 것 같다. 더러 눈속임으로 속여 파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그런 눈속임 뒤에 덤이 있었기에 웃고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장사꾼들은 단골 장사를 했기 때문에 뜨내기 장사꾼이 아니고는 사람을 속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양 좋은 물건을 눈에 보이는 데에 얹고, 물짠 물건을 그 아래에 깔아 놓는 것이야, 눈속임이 아니라, 포장의 기술이라 해야 할 것이다.


장터에서는 지명도 생생히 살아있었다. 지금은 그냥토요시장이라 불리는 장흥의 옛 장터만 보아도, 십여 가지의 지명이 따로 있었다. 전머리, 비석거리, 쇠전머리, 지전거리, 주막거리, 진골목, 온뚝길, 겟똥 등 지명마다 골목마다 장소마다 그 나름의 풍광이 살아있던 곳이 옛 장터였다. / 이대흠(시인)



정영신-장날-1988 담양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작업노트 / 난 전라도 땅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촌사람이다. 어렸을 적, 장날은 잔치 날처럼 온 동네가 들썩거렸다. 삼식이 아버지 소달구지가 동구 밖에 다다르면, 여인네들이 이고나온, 보따리가 하나둘 실렸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안동아재가 사방이 초록색으로 뒤덮인 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는 풍경은 고향에 남겨 둔 내 흑백사진이다.


남도 땅에서 처음만난 최씨할머니는 장에만 나오면 뱃속이 다 시원하다며 장바닥에 퍼질러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5일후, 다시 찾은 장마당에서 하얀 고무신에 꽃분홍치마를 입은 최씨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남도 땅의 색과 향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따스한 햇살아래 포근한 인정을 나누기도 했다.

이렇게 아련한 추억을 그리며 장날을 찾아다닌 게, 30년째다.



정영신-장날-1988 순창장-잉크젯 프린트  35X24cm




오늘도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내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장에서 일하는 우리 어머니들은 손을 놀리면 아깝다고 한다. 그 손의 숭고함을 느끼기 위해 나도 모르게 손을 덥석 맞잡곤 한다.이 날 팽상 흙만 몬지고 산께, 손이 짜잔하지라. 이손으로 새끼 덜 맥이고, 갈쳤제.” 오롯이 장에 앉아, 오고가는 계절을 헤아리며 살았던 사람들이다.

또한 이들이 보자기를 풀면, 밭과 산과 들판이 한쪽씩 따라 나온다.



정영신-장날-1989 장수장-잉크젯 프린트 160X110cm  35X24cm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1986년에서 1989년까지의 기록이다. 옛날 필름 속에 지역의 문화와 생활상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좀 더 열심히 작업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지만, 지금도 장을 지키며, 오롯이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어 희망은 있다.아직도 장날이면 삼대가 한 공간 안에서 문화를 향유하고, 세대 간의 정을 나누는데, 꾸밈없는 사람들도 있다.

  

'눈빛출판사' 발행 / 정영신 '장날' 사진집 



장날은 여전히 인정이 오가는 문화의 텃밭이고, 선조들이 살아온 삶의 거울이다.그러나 장마당 풍경도 인심도 서서히 변하고 있다.돈의 논리에 그 훈훈한 인정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유령처럼 떠도는 그 때 그 사람을 만나러 오늘도 배낭을 챙긴다. 우리 모두, 인정 한 사발 마시러, 장에 가자. / 정영신



 정영신展 / JUNGYOUNGSHIN / 鄭永信 / Photography



전시와 함께 출간된 정영신 '장날'사진집



30여 년 동안 장에 미쳐 장돌뱅이처럼 쫓아다녔던 정영신의 ‘장날’사진전이 오는 24일부터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열린다.

이번 장날전은 80년대에 찍은 사진들만 모았는데, 세월의 두께에 의해 된장처럼 구수한 냄새도 베어나고, 잘 익은 막걸리 맛도 난다.



1988 청양장



정영신의 장터 사진은 아무런 기교도 멋도 부리지 않는다. 다만 따스한 인정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만 차곡차곡 쌓여 있다.

시골 할아버지의 등짐에, 아줌마들의 봇짐에 감춘 사연 사연들을 장마당에 풀어 낸 것이다.




1988 남원장



솔직히, 아내나 자식 자랑하는 자를 팔불출로 치지만, 팔불출이 되어도 할 수 없다.

그 긴 세월동안 작업해 온 과정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80년대 사진들은 나와 결혼하기 이전인 사진동아리에 함께 할 때 찍은 사진들이다.

같은 다큐사진을 하지만, 장터에 대해서는 선배고 스승이다. 사진뿐만 아니라 사람을 중시하는 인문학적 접근도 따를 수가 없다.




1987 구례장



전국 오일장 600여개를 다 돈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해내 준 것이 고맙기 그지없다.

그것도 경제적 뒷받침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한 집안에 다큐사진가가 한 사람만 있어도 망한다는데, 두 사람이 모두 다큐사진을 하니 사는 꼴이란 보나마나다.

신용불량자 주제에 기름 값만 생기면 떠나기를 반복했으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짓이다.


어쩌면 내가 끼어들어,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아내의 사진철학을 그르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전국 오일장을 다 돌도록 재촉해, 그만의 방식에 재제를 가했기 때문이다.

버스타고 장에가 하루 종일 할머니들과 놀며 삶의 철학을 카메라에 담아왔는데,

난 사라져가는 현장을 빨리 기록해야 된다는 안타까움에 발발거린 것이다.



1990 무주장



장마당에 펼쳐진 사물이나 장에 나오는 사람들도  나처럼 바쁘게 서둘지 않았다.

행여 친구나 사돈이 나타나지 않을까 사방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이 것 저 것 구경하며 느리게 느리게 장날을 즐긴다. 정 나누는데, 바삐 서둘 일이 아닌 것이다.



1986 담양장



그렇지만, 장터에서 마음조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렵사리 나왔으면 한 군데라도 더 돌아야하는데,

그저 할머니들과 이야기 나누느라 일어 날 생각을 않기 때문이다.

없는 돈에 할머니 물건까지 바리바리 사들고 일어나는 데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만큼 사람사는 정을 중요시하는 그의 접근법은 이해 하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1988 순창장



다큐멘터리사진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그의 사진에서는 현장성에 의한 휴머니티가 짙게 깔려있다.

그래서 그의 장터 사진을 보면 따뜻한 인간애가 모닥불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다.



1988 담양장



정영신은 처음 카메라를 잡았을 때부터 장터의 사람을 겨냥했다.

장터를 기록해야겠다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고 사진을 선택하는 것과, 사진을 하다 장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다르다.

대개 사진가들이 작업을 하다보면 시류에 따라 주제가 바뀌기도 하고, 살기 위해 새로운 주제를 찾기도 해,

평생 작업으로 끌고 가는 경우는 드물다.

오래 동안 장터를 찍었다는 사진가들도 대개 2-3년이면 끝내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외는 취미나 공모전용 사진소재를 찾아다니는 넝마주이식이 전부였다.



1989 순창장



정영신의 장터사진은 다소 산만한 느낌은 들지만,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장터의 난장스러움이 잘 묘사되어 오히려 정감이 간다.

대개가 화면을 단순화시키기 위해 장애물을 치우거나 지워 기록적 가치를 망가트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짓은 절대 안 한다. 세월이 지나면 그런 하잘 것 없는 장애물도 역사적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배경을 택해 장꾼들을 연출시키는 기존의 사진들에 비해,

이 처럼 소통하며 찾아 낸 상대방의 감정묘사나 장마당의 어지러운 분위기가 주는 잔잔한 울림이 훨씬 오래간다.




1989 남원장



대개 사진인들이 습관적으로 찍을 대상을 만나면 화면부터 구성하게 된다.

특히 장터 특성상 위에서 내려 보고 찍을 경우가 많은데 정영신이 구사하는 카메라앵글은 대개 수평이다.

찍히는 사람과 찍는 사람의 자세가 평행이거나 아니면 더 낮은, 즉 동격을 의미하고 있다.

사진을 찍기 전에 물건을 사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간의 벽을 허무는 것 또한 그만의 어프로치다.

재미는 좀 덜하지만, 그보다 몇 배로 값진 장꾼과 사진쟁이의 소통된 마음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영신식 색깔의 장터세계고 작품세계인 것이다



1989 장수장



정영신의 장터 사진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동안 다섯 차례의 장터개인전을 가졌고,

14년 전에 펴낸 정영신의 "시골장터 이야기"는 이미 13쇄에 이르도록 많이 팔렸다.

그 이후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장터사진아카이브 한국의 장터도 재판이 나왔다

눈빛 포토에세이 전국5일장 순례기에 이어 전시와 함께 출간되는

 눈빛사진가선 장날사진집(12,000) 전시되는 작품이 모두 실려 있다.




1989 고창장



정영신의 장터 사진을 보면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각박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을 반성케 할 단초를 제공한다.

"사람 사는 게 이런 것이라고..."

이 전시는 인사동 아라아트‘(02-733-1981)에서 8월30일까지 이어진다. 개막식은 8월 24일 오후6시


글/ 조문호



1990 순창장






헌 옷가게 주인에서 세계적인 스트리트 아티스트로 변신한 미스터 브레인워시가 인사동에 나타났다.

6월21일부터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개최되는 그의 ‘라이프 이즈 뷰티풀(Life is Beautiful)’전을 위해서다.


지난 20일 오후5시부터 열린 '아라아트' 기자간담회에 들렸더니, 전시장은 기자들로 꽉 찼다. 

우리나라에 기자들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지만, 한 전시에 이렇게 집중되는 것을 보고 놀란 것이다.  

딴 전시 오프닝에는 좀처럼 기자들을 만나기가 어려운데, 200여명이나 몰려 든 까닭이 도대체 뭘까?

"똥파리 근성을 가진 기자들"이라며 투덜댔으나, 나 역시 똥파리가 된 기분이었다.


'아라아트'김명성씨를 만나려 어렵사리 들어갔는데, 박인식, 오세필, 전인미씨도 만났다.

작가는 전시장 바닥에다 물감을 칠하기도 하고, 심지어 기자들의 신발에도 물감을 칠했다.

사인하랴 기념사진 찍느라 정신없었으나, 그는 신나는 일이었다.  


미스터 브레인워시는 스트리트 아트의 거장 뱅크시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영화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의 주연을 맡아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10여 년 동안 예술 활동으로

길거리부터 스크린, 갤러리까지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2006년 부터 페인트, 붓, 스프레이 등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가

수많은 아이콘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표현하며 거리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가수 마이클잭슨과 마돈나의 앨범 디자인을 하고, 벤츠와 코카콜라, 레이밴, 앱솔루트 보드카 등의

기업과 콜래보레이션을 진행하는 등 ‘스트리트 아트'의 선봉에 서있다.

일명 '낙서 그림'인 '스트리트 아트'는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겨났다.

러시아 혁명 후 시인인 마야코프스키가 '거리를 우리의 붓으로 만들자.

광장이 우리의 팔레트가 되게 하자'고 부르짖으며 시작해 급속도로 퍼져 나간 장르다.

브레인워시는 "예술은 바로 우리 심장과 같은 것이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며

자유분방한 그의 그림처럼 익살스런 포즈를 취하기도 했는데,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살아가는 기쁨과 재미를 보여 주겠다"고도 말했다.


그동안 LA, 뉴욕, 마이애미, 런던 등지에서 순회전을 했으나, 아시아에서는 처음 열린 전시다. 
'스트리트 아트'를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 '아라아트'전시장도 파격적으로 연출되어 있었다.

국내 전시를 위해 작업된 새로운 작품을 합해 총 300여점이나 된다고 했다.

특히 스트리트아트라는 장르를 미술관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선보이려는 기획에 따라

다양한 디스플레이 방식이 시도되었으며, 대형 조형물과 그래피티 작품들, 미디어 아트가 어우러져

미술관이 하나의 거대한 작품으로 변신되었다.

전시장 벽과 천장, 바닥 곳곳에 페인트와 스프레이를 뿌려 공간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최요한 예술 총감독은 "미술관이라기 보다는 미스터 브레인워시의

스튜디오를 보는 것처럼 꾸몄다"고 설명했다.


KBS 미디어, 인터파크, 아트 투 하트(ART TO HEART)가 주최하는 ‘미스터 브레인워시 전’은 

9월 25일까지 열리며 입장료는 성인 1만원, 청소년 7천원, 초등학생 이하는 5천원이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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