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오후 무렵 ‘아라아트’ 김명성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형! 이성 구청장이 오셨는데, 이제하선생 모시고 저녁이나 같이 먹어요.”
그 전화 한 통에 밀린 일을 정리하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30여 년 동안 형제처럼 지냈기에, 마음 한 쪽에 그에 대한 걱정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인사동에 ‘아라아트’를 세우며 시작된, 그의 십년 세월은 지옥 그 자체였다.
무리한 투자로 매달 돈을 빌려 이자를 메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아슬아슬한 곡예에서 금방 추락할 것 같았으나 십년이나 버텨 낸 끈기는,
인사동 르네상스를 이루겠다는 꺾을 수 없는 그의 고집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가까웠던 사람에 의해 감옥 까지 가야했던 지난한 세월을 책으로 엮는다면 몇 권은 될 게다.

그런 와중에도 돈과는 무관한 좋은 전시를 기획하지 못해 안달했고,

가난한 인사동 예술가들의 술값과 용돈에 거리낌 없이 주머니를 털어온 것이다.

내가 볼 때, 그는 사업가로서의 자질은 없는 것 같다.

사업가는 세상의 가치나 사람보다 돈이 우선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자본주의 세상에 돈 벌려는 자체가 인간성을 버리는 이 아이러니한 현실을 어떻게 말해야 될까?

가끔은 인연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할 때가 있다.
호연이던 악연이던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거나 헤어지며 인연을 맺어왔다.
함께 사는 아내를 비롯하여 가까운 벗들의 만남은 필연적인 숙명일 거라는 생각을 해 온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좋은 일이나 싫은 일이나 이토록 가슴 조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제발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길 바랄 뿐이다.

먼저, 아라아트’에서 열리는 이제하선생 그림부터 보고 싶었으나 ‘안동국시’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그 곳에는 이제하선생 내외를 비롯하여 청백리 이 성 구청장도 계셨다.

이제하 선생은 20여 년 전 대학로에서 한 번 뵙고 처음이었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으나, 내가 생각해 온 모습과는 달랐다.

이제하선생 얘기가 숱한 술자리에 회자되었으나, 추정한 모습은 아니었다.

선생 역시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계셨다.

전시오프닝 때는 지방에 있어 찾아뵙지 못한데다, 전시장에도 잘 나오시지 않는다고 했다.

어렵사리 만나뵈었으나, 그 날은 마무리 할 원고가 있다고 하셨다.

술을 드시지 않는 선생께서는 식사가 끝나자 곧 바로 차를 몰고 떠나버려,

선생의 문학과 미술세계에 대한 인터뷰를 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좌우지간 이제하선생과는 연이 맞지 않았다.










김명성, 이 성씨와 함께 안국동 ‘로마네 꽁티’로 자리를 옮겼다.
박인식씨가 꾸려 온 ‘농심마니’가 올해로 30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30주년 기념행사를 추진하기 위한 준비 모임이라는데, 20여명이 모여 축배를 들고 있었다.

그동안 봄가을 매년 두 차례씩 전국에 산삼을 심어 왔으니, 이젠 곳곳에 산삼이 뿌리 내렸을 게다.

삼십년 전에 심은 산삼은 내 거시기만큼이나 컸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다.

뜻밖에도 그 자리에 ‘한겨레’ 노형석 기자가 나타났다.

박인식씨는 올해의 사업계획을 알려 주었고, 음유시인 송상욱 선생의 노래도 들었으나,

흥이 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자정이 가까워 송상욱, 김명성, 노형석, 서길헌, 황예숙, 송미향씨 등 여러 명이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때부터 신바람 난 송상욱선생의 가요 반세기 메들리가 이어졌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지나치던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씨도 합류하였다.

세시까지 소주를 퍼 마셨으니, 그 다음 날은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

그 흥겹던 자리가 진주기생 산홍이의 애환이 담긴 ‘세세연연’이 나오자 돌변했다.
처량한 구절구절들은 산홍이에서 자신의 생으로 오버랩 되었는지, 다들 슬퍼보였다.
김명성의 눈망울에 맺힌 눈물이, 말로만 전해들은 산홍이의 비극보다 훨씬 진하더라.

사진, 글 / 조문호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복원모사전’

17세기 최고 불화로 꼽히는
화엄사 괘불 새롭게 복원
오는 23일까지 전시회 개최

구도와 형태, 선, 색채까지
원본에 최대한 가깝게 재현
수익금 전액 종단불사 보시



제19교구본사 화엄사 주최, 사단법인 사찰문화재보존연구소 주관으로 오는 23일까지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국보 제301호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복원모사전-화엄’이 열린다. 사진은 전시회에 앞서 화엄사 경내에 첫 선을 보인 복원모사탱.

 

우리나라 17세기 최고의 불교미술로 꼽히며 국보 제301호로 지정된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높이 11.95m, 폭 7.7m나 되는 초대형 괘불을 실제크기 그대로 완벽하게 복원한 전시회가 열려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제19교구본사 화엄사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사찰문화재보존연구소가 주관한 가운데 11일부터 오는 23일까지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국보 제301호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복원모사전-화엄’을 연다.

이번 전시에서는 짜임새 있는 구도와 균형 잡힌 형태, 치밀한 선과 다채로운 색채 등을 완벽하게 복원한 화엄사 괘불탱의 복원모사탱을 선보인다. 이는 해남 미황사 괘불을 복원해 화제를 모았던 이수예 사찰문화재보존연구소장이 도감을 맡아 이뤄낸 대작이다.

화엄사 괘불은 1653년(조선 효종 4년) 지영, 탄계, 도우, 사순, 행철, 나협스님 등 화승 6명이 조성했다. 중앙의 부처님은 백호에서 방광을 오방으로 뿜어내고 그 양쪽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를 이룬 3존도 형식이다. 10대 제자와 타방불 등 법화경의 등장인물들이 부처님의 뒤에서 합장한 채 설법을 경청하고 있다. 부처님의 영취산 설법을 그린 것으로 완성도면에서도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화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으로 활약한 벽암당 각성스님을 비롯한 수많은 고승과 당시 불사에 참여했던 후원자, 시주물품 등이 기록돼 있다. 전란에 희생된 수많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다시는 이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초대형 부처님을 조성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화엄사 야단법석의 주존으로 모셔진 괘불이지만, 색이 퇴락, 박락되고 바탕감과 배접지도 산화, 부식되는 등 최근에는 야외에 세우기 어려울 정도로 노후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때문에 화엄사는 이 괘불을 더 이상 일반에 공개하기 어렵다고 판단, 이수예 소장을 책임연구원으로 정했다. 이어 문화재청, 전남도청, 구례군청 등의 지원 아래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복원작업에 나섰다. 화엄사 주지 영관스님은 “화엄사에는 360년 동안 변함없이 절을 지켜온 큰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면서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 탓에 색이 바래고 바탕감이 손상돼 더 이상 야외에서 모시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이어 “이에 본래의 큰부처님을 다시 재현하기 위해 복원불사를 진행했고, 그 감동의 순간을 함께 하고자 이번 전시회를 마련했다”면서 “더불어 관련 수익금은 종단이 추진하고 있는 아프리카 보리가람농업기술학교 건립 후원기금으로 보시하는 의미있는 전시회인 만큼 사부대중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연구소는 완벽한 복원을 위해 보존과학 전문가들의 안료, 섬유분석은 물론 적외선 촬영, 디지털 현미경 촬영, 3D 스캐닝 등 국내에서 시행되는 기술을 총동원했다. 전통방식으로 총 7회에 걸쳐 진행한 배접에 사용된 천연한지만 1100장에 이른다. 이 소장은 남편이자 불교미술의 평생 도반인 박진명 영산문화재연구소 대표와 연구원들과 함께 수행하는 마음으로 불사에 매진한지 8개월 만에 괘불을 완성했다. 이수예 소장은 “처음 큰 부처님을 친견했을 때 놀랍도록 웅장하고 장엄한 형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힘찬 필선과 화사한 색채에 녹아 있는 선조들의 지극정성과 힘을 느낄 수 있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어 “본래 그림에 녹아있는 선조들의 광대한 원력에는 못 미치지만 그 깊은 감동을 깊이 새기며 그림으로 표현하려 노력했다”면서 “화엄사 주지 스님의 아낌없는 후원과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대작 불사가 원만하게 마무리 됐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불교신문/ 허정철기자]

[3201호/2016년5월11일자]





왼쪽부터 마렉 코즈니에프스키, 강찬모씨. 사진 김경애 기자

[짬] 그림으로 ‘사제’ 인연 맺은 강찬모 마렉 코즈니에프스키

  인생은 ‘찰나’라 하듯, 때로는 순간의 인연이 삶의 방향을 결정짓기도 한다. 그림 한 점으로 국경을 넘어 사제가 된 그들의 인연도 ‘찰나’에 시작됐다.
영국인 마렉 코즈니에프스키(66)는 2006년 9월 한국에 처음 도착한 날, 서울 인사동의 한 갤러리 앞을 지나다 순간 발을 멈췄다. 전시 준비를 하느라 벽에 세워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의 강렬한 경험을 잊지 못한 그는 얼마 뒤 다시 한국을 방문해 화가의 작업실로 찾아가 스스로 제자가 됐다. 2012년 은퇴한 그는 한국인 부인과 천안에 정착해 용인의 작업실로 출퇴근하다시피 하며 한국화가로 변신했다.
지난달 25일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자신보다 겨우 한 살 많은 한국 채색화가 강찬모(67)씨를 “사부”로 깍듯이 모셨다.


영국 출신 유엔 행정관이었던 마렉
한국인 ‘부인’ 만나러 한국 첫 여행


‘별이 가득하니 사랑이 끝이 없어라’



강 화백 ‘히말라야’ 그림 보고 ‘전율’
2012년 은퇴뒤 정착…10년째 ‘사부’로
 

서양화 전공하고 유화 그리던 강씨
2004년 히말라야 5천 고지서 ‘깨달음’
한지 채색화로 변신 “영적 교감” 체험



낯선 서양인의 운명을 바꾼 ‘그 작품’이 궁금했다. ‘별이 가득하니 사랑이 끝이 없어라’, 히말라야 설산 위로 새하얀 달과 무수한 별빛이 색색으로 반짝이는 강씨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그가 그린 것들과 그 색채의 고요함에 마치 홀린 듯 빠져들었습니다. … 그의 그림에서 내게 너무나도 꼭 맞는 세상을 보았고, 그의 창조물 안에 담긴 생각들은 나를 전율시켰습니다.”


마렉은 강씨의 작품집에 쓴 글에서 “당신은 그의 손과 붓으로써 그림에 투영된 그의 이념들을 통해 예술가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애초 마렉과 한국의 인연은 2004년 아프리카에서 시작됐다. 1993년부터 유엔에서 일한 그는 수단 담당 행정사무관을 맡고 있었다. 마침 그즈음 결혼보다는 독립적인 삶을 꿈꾸던 부인은 멘토로 따르던 ‘수녀님’의 권유로 케냐 빈민촌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수녀님의 소개로 알게 됐고, 2006년 마렉이 서울에 온 것도 휴가를 내 부인을 만나러 온 참이었다. 이듬해 결혼한 두 사람은 2012년 마렉이 은퇴한 뒤 영국으로 돌아가 살 계획이었다. 그런 부부를 눌러앉힌 것도 ‘사부와의 인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남편이 한국화의 기초부터 새로 배우고 싶어 했어요. 그림만이 아니에요. 사부를 따라 기천문과 명상도 하고요, 한때는 머리카락도 다 깎았을 정도예요.”


폴란드계인 마렉은 영국에서 나고 자라 유엔에서 일하기 전까지 멕시코에서 영어 교사로 일했다. 부친과 고모할머니 역시 화가여서 재능을 물려받은 그는 ‘화가의 꿈’도 계속 키워왔다고 했다. 멕시코에서도 그는 2명의 스승에게 유화를 배웠다. 하지만 강씨를 만나면서 한국화, 특히 한지에 그리는 강씨의 채색화를 배우면서 필법만이 아니라 그 바탕이 되는 한국 문화까지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강씨 역시 히말라야에서 특별한 영적 체험을 한 뒤 작품 세계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했다. 2004년 10월 그는 “만신창이로 지친 심신을 달래고자” 히말라야로 갔다. “젊은 시절 읽었던 <우파니샤드> <리그베다> 등 인도 고전에 나오는 설산의 은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해발 5000m의 고지에서 한밤중 문득 잠이 깬 그는 “한순간, 절대 공간과 시간 앞에 마주쳐 일체가 되는” 경험을 했다. “호롱불만한 별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사랑을 나누고 있다. 눈물겹다. 따뜻하다. 행복하다. 신비롭다.” 그의 작품 주제가 됐다.


일찍이 70년대 초반 중앙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강씨는 78년 대만 작가 장다첸의 영향을 받아 동양화로 선회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81년부터 7년간 일본미술대와 쓰쿠바대에서 채색화를 연구하고 귀국한 그는 마흔살 때인 89년 뒤늦게 첫 개인전을 열었다. 93~94년엔 대구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다시 전공하기도 했다. 80년대 한국 채색화의 새 경지를 개척한 작가로 꼽히는 박생광과 천경자의 계보를 잇고 있는 셈이다. 그는 90년대 말까지 다소 괴기스러운 느낌까지 풍기는 어두운 색감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 ‘현대의 고독한 실존적 인간’이 주인공이던 그의 작풍은 2000년대 이후 ‘자연과 우주, 영원으로의 회귀’를 불러일으키는 명상화로 국내에서보다 유럽에서 더 공감을 얻고 있다.


“히말라야 체험 이후 제 작품을 보고 ‘영적 에너지’를 느낀다는 반응이 부쩍 많아졌어요. 마렉처럼 저를 전혀 모르는 서양인들이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공감하는 모습을 보면 새삼 시공간을 초월하는 ‘예술의 힘’을 실감하죠.”


강씨는 마렉의 작품이 웬만큼 모아지는 대로 ‘사제 공동 전시회’를 열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이날 마렉과 함께 전시장에 동행한 부인은 이 특별한 인연을 “영혼의 교감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강씨의 전시 ‘무엇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는가’는 오는 15일까지 1주일 연장됐다. (02)733-1981.


한겨레신문 /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강찬모화백



강찬모씨의 “무엇이 우리를 사랑하게하는가”전 개막식이 지난 20일 오후5시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3층에서 열렸다.

이날 개막식에서 작가를 비롯하여 원로시인 민영선생님과 소설가 박인식씨,

‘아라아트’ 김명성대표가 차례로 인사말과 축사를 했는데, 김명성씨는 “아라아트”개관전에

강찬모화백을 모셨으면 ‘아라아트’가 잘 풀렸을 것“이라고 말해 좌중을 웃음판으로 만들기도 했다.

기도의 방법으로 작업하는 강찬모화백의 작품성향을 말했지만,

사실 그가 세운 ‘아라아트’가 개관한 지 5년이 되었으나, 여지 것 고전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기도 빨 센 강화백의 작품을 먼저 걸었다면, 행운이 따랐을 것이라는 말이다.

마치 성경구절 같기도 하고, 스님의 법문 같기도 한, “무엇을 우리를 사랑하게하는가”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작업에 임한다.

강화백을 만난 지가 수십 년 되었으나, 나는 그를 전생에 화가가 아니라, 절집에서 열심히 기도할 중이라고 생각한다.

80년대 박인식씨와 김홍성씨등 ‘농심마니’와 함께하며 자연예찬론 자가 되었지만, 당시 그는 술을 엄청 마셨다.

몇 안 되는 인사동 술구신 중에 한 사람이었으니까...

2004년, 설산의 은자를 만나기 위해 희말라야에 오르며, 그의 작품들이 경이로워지기 시작했다.

해발500미터의 고지의 짙푸른 청색의 하늘에 펼쳐진, 설산의 자태는 따뜻하고, 신비롭고, 눈물겹기까지 했단다.

그 꽃밭을 만든 하늘의 별들이 침묵의 공포를 따뜻한 사랑으로 이끌었는데,

우주에너지에 대한 그의 명상이, 곧바로 물감을 통해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이번 전시는 한지에 전통 채색으로 그린 3m~4m가 넘는 대작들이 주를 이룬다. 

짙푸른 설산에 펼쳐진 휘황한 별들의 향연은, 바로 감동자체였다.

제 작년의 ‘공평아트’전과 작년의 ‘뫼비우스’ 초대전에서 본, "웅장  장엄 화려"함에 더해 또 다른 변화를 만났다.

수많은 별들의 향연 속에 마치 상형문자 같은 아이콘이 그려져 있었는데, 바로 자연의 암시였다.

인간의 탐욕으로 갈수록 피폐해지는 자연환경에 대한, 일종의 경종적 표식이었다.

새해 들어 ‘아라아트’에서 설악산을 비롯한 산에 관한 전시가 연달아 열리고 있다.

끝없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자연의 경종을 알리는 기획전은 강찬모씨의 그림 전이, 그 절정을 이룬 것이다.
인사동 ‘아라아트’ 2층, 3층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3월8일까지 이어진다.

개막식에는 민 영, 박인식, 김명성, 한옥희, 이두엽, 조해인, 전활철, 이상철, 홍경식, 김곤선, 이명희,

정영신, 공윤희, 조준영, 임경숙, 신승준, 이종승, 전강호, 송일봉, 이지정, 신용철, 고 헌, 박성식씨 등

100여명의 지인들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사진,글 / 조문호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대규모 설악산사진으로, 케이블카를 반대하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아라아트’ 1층부터 지하4층까지 열리는 임채욱씨의 “인터뷰 설악산”에 이어
사진가 조명환씨의 NO! 케이블카 “설악산 사진전과 ”가리왕산의 나무들“이 ‘아라아트’ 3층에서는 열린다.
그리고 ‘인사아트센터’ 전관에서는 민중미술의 거목 신학철, 권순철, 민정기, 임옥상, 황재형, 고영훈, 이종구,
오치균씨가 참여하는 “리얼리즘의 복권”전도 열린다.

민중미술의 진수도 보고, 설악산 절규 들으러 인사동 나들이 하자.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임채욱씨의 “인터뷰설악산”은 1월6일부터 3월22일까지 열리고,
조명환씨의 NO! 케이블카 “설악산 사진전은 1월27일부터 2월10일까지 열린다.
그리고 인사아트센터의 “리얼리즘의 복권”전은 1월28일부터 2월28일까지 열린다.




아래는 조명환씨의 “설악산 사진전에 붙인 박인식씨의 글이다.

“철팔백만 산 사람들이여 분노하라!”

여기에 케이블카는 없다.
이 그림에 케이블카가 등장하는 순간, 산의 시공간과 동화하려던 우리 영혼의 혼불은 꺼지고 만다.
설악산 정상에 케이블카를 올려 놓는다는 것은 관광수익 증대라는 경제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인의 정체성과 영혼의 측면에서 바라볼 때 그 본질이 드러난다.

도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한국인의 가장 고매한 영혼의 영역을 제 영혼마저 정치적 타산에 팔아넘긴
정치모리배들의 ‘관광개발경제가치창출’이라는 속임수에 현혹된 관광객 난장판으로 바꿔치려 하려는가.

설악의 정수리에 케이블카를 놓을 철탑을 박는 일은 자신들의 핏줄에서 산악민족의 유전자를 일찌감치 찾아 낸
이 땅의 천칠백만 산사람들 부모의 영혼에 철탑을 박는 일에 다름없다.

진정 산사람이라면 이 엄청난 음모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으랴.

분노하라! 분노의 힘으로 뭉쳐라! 분노의 힘으로 떨쳐 일어나라!
천팔백만으로 뭉친 분노의 힘으로 케이블카 음모에 당당히 맞설 때, 이미, 케이블카는 없다.
조명환의 작품이 설악의 절규를 전한다.

설악의 파멸은 한국인 영혼의 파멸이다.














사진가 임채욱씨의 “인터뷰 설악산”전이 인사동에서 열리고 있다.
임채욱씨는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공부해서인지, 산 사진들이 한 폭의 수묵화 같다.
재작년 이 자리에서 열었던 'inside mountains'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번에는 설악산 사진만 들고 나왔다.
한지를 사용한 것도 일조했겠지만, 프린트 질감을 잘 끌어내어,
사진의 계조가 마치 산속으로 파고들 만큼 깊었다.




마치 동양화의 필선처럼 설악산의 뼈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봉정암 부처바위의 대형 사진을 입체적으로 설치한 작품도 내놓았다.




봉정암을 내려다 보는 부처바위에서 부터 울창한 숲과 운무에 뒤덮인 설악의 능선까지,
자연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그 무한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 하는 목적도, 이 아름다운 설악에 어떻게 케이블카를 설치할 수 있냐는 것이다.
케이블카는 설악산을 관광단지로 만들어 훼손하겠다는 것이라며 울분을 터트렸다.




지난 6일 오후5시, 아라아트1층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임채욱씨를 비롯하여 박인식, 박성식, 김준기,

박종우, 유시건, 황예숙, 김정남, 조명환, 이길헌, 강선화, 박기성, 이지하, 홍성식씨 등 많은 분들이 자리했다.




작가는 인사말에서 ‘인터뷰 설악산’이라는 전시이름을 박인식씨가 지었다고 했다.
처음엔 왠 인터뷰냐는 생각을 했는데, 전시 준비를 하다 보니 너무 적합한 제목이었다며,

바로 설악산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1층부터 지하4층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3월22일까지 이어진다.
전시와 함께 '설악산: 아름다움에서 무한으로'사진집도 도서출판 다빈치에서 출간됐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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