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마렉 코즈니에프스키, 강찬모씨. 사진 김경애 기자

[짬] 그림으로 ‘사제’ 인연 맺은 강찬모 마렉 코즈니에프스키

  인생은 ‘찰나’라 하듯, 때로는 순간의 인연이 삶의 방향을 결정짓기도 한다. 그림 한 점으로 국경을 넘어 사제가 된 그들의 인연도 ‘찰나’에 시작됐다.
영국인 마렉 코즈니에프스키(66)는 2006년 9월 한국에 처음 도착한 날, 서울 인사동의 한 갤러리 앞을 지나다 순간 발을 멈췄다. 전시 준비를 하느라 벽에 세워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의 강렬한 경험을 잊지 못한 그는 얼마 뒤 다시 한국을 방문해 화가의 작업실로 찾아가 스스로 제자가 됐다. 2012년 은퇴한 그는 한국인 부인과 천안에 정착해 용인의 작업실로 출퇴근하다시피 하며 한국화가로 변신했다.
지난달 25일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자신보다 겨우 한 살 많은 한국 채색화가 강찬모(67)씨를 “사부”로 깍듯이 모셨다.


영국 출신 유엔 행정관이었던 마렉
한국인 ‘부인’ 만나러 한국 첫 여행


‘별이 가득하니 사랑이 끝이 없어라’



강 화백 ‘히말라야’ 그림 보고 ‘전율’
2012년 은퇴뒤 정착…10년째 ‘사부’로
 

서양화 전공하고 유화 그리던 강씨
2004년 히말라야 5천 고지서 ‘깨달음’
한지 채색화로 변신 “영적 교감” 체험



낯선 서양인의 운명을 바꾼 ‘그 작품’이 궁금했다. ‘별이 가득하니 사랑이 끝이 없어라’, 히말라야 설산 위로 새하얀 달과 무수한 별빛이 색색으로 반짝이는 강씨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그가 그린 것들과 그 색채의 고요함에 마치 홀린 듯 빠져들었습니다. … 그의 그림에서 내게 너무나도 꼭 맞는 세상을 보았고, 그의 창조물 안에 담긴 생각들은 나를 전율시켰습니다.”


마렉은 강씨의 작품집에 쓴 글에서 “당신은 그의 손과 붓으로써 그림에 투영된 그의 이념들을 통해 예술가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애초 마렉과 한국의 인연은 2004년 아프리카에서 시작됐다. 1993년부터 유엔에서 일한 그는 수단 담당 행정사무관을 맡고 있었다. 마침 그즈음 결혼보다는 독립적인 삶을 꿈꾸던 부인은 멘토로 따르던 ‘수녀님’의 권유로 케냐 빈민촌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수녀님의 소개로 알게 됐고, 2006년 마렉이 서울에 온 것도 휴가를 내 부인을 만나러 온 참이었다. 이듬해 결혼한 두 사람은 2012년 마렉이 은퇴한 뒤 영국으로 돌아가 살 계획이었다. 그런 부부를 눌러앉힌 것도 ‘사부와의 인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남편이 한국화의 기초부터 새로 배우고 싶어 했어요. 그림만이 아니에요. 사부를 따라 기천문과 명상도 하고요, 한때는 머리카락도 다 깎았을 정도예요.”


폴란드계인 마렉은 영국에서 나고 자라 유엔에서 일하기 전까지 멕시코에서 영어 교사로 일했다. 부친과 고모할머니 역시 화가여서 재능을 물려받은 그는 ‘화가의 꿈’도 계속 키워왔다고 했다. 멕시코에서도 그는 2명의 스승에게 유화를 배웠다. 하지만 강씨를 만나면서 한국화, 특히 한지에 그리는 강씨의 채색화를 배우면서 필법만이 아니라 그 바탕이 되는 한국 문화까지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강씨 역시 히말라야에서 특별한 영적 체험을 한 뒤 작품 세계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했다. 2004년 10월 그는 “만신창이로 지친 심신을 달래고자” 히말라야로 갔다. “젊은 시절 읽었던 <우파니샤드> <리그베다> 등 인도 고전에 나오는 설산의 은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해발 5000m의 고지에서 한밤중 문득 잠이 깬 그는 “한순간, 절대 공간과 시간 앞에 마주쳐 일체가 되는” 경험을 했다. “호롱불만한 별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사랑을 나누고 있다. 눈물겹다. 따뜻하다. 행복하다. 신비롭다.” 그의 작품 주제가 됐다.


일찍이 70년대 초반 중앙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강씨는 78년 대만 작가 장다첸의 영향을 받아 동양화로 선회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81년부터 7년간 일본미술대와 쓰쿠바대에서 채색화를 연구하고 귀국한 그는 마흔살 때인 89년 뒤늦게 첫 개인전을 열었다. 93~94년엔 대구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다시 전공하기도 했다. 80년대 한국 채색화의 새 경지를 개척한 작가로 꼽히는 박생광과 천경자의 계보를 잇고 있는 셈이다. 그는 90년대 말까지 다소 괴기스러운 느낌까지 풍기는 어두운 색감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 ‘현대의 고독한 실존적 인간’이 주인공이던 그의 작풍은 2000년대 이후 ‘자연과 우주, 영원으로의 회귀’를 불러일으키는 명상화로 국내에서보다 유럽에서 더 공감을 얻고 있다.


“히말라야 체험 이후 제 작품을 보고 ‘영적 에너지’를 느낀다는 반응이 부쩍 많아졌어요. 마렉처럼 저를 전혀 모르는 서양인들이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공감하는 모습을 보면 새삼 시공간을 초월하는 ‘예술의 힘’을 실감하죠.”


강씨는 마렉의 작품이 웬만큼 모아지는 대로 ‘사제 공동 전시회’를 열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이날 마렉과 함께 전시장에 동행한 부인은 이 특별한 인연을 “영혼의 교감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강씨의 전시 ‘무엇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는가’는 오는 15일까지 1주일 연장됐다. (02)733-1981.


한겨레신문 /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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