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막은 정지선, 어디서 많이 본 놈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에서 전혀 다르게 접근한 두 가지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전쟁지역이나 소외지역을 기록한 성남훈의 “부유하는 슬픔의 시”와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알리는 한희준의 “플라스틱2”가

인사동 ‘KOTE’ 3층과 '갤러리 라메르' 1층에서 각각 열리고 있다.

 

둘 다 사진전이지만, 전자는 발로 뛴 다큐멘터리사진이고

후자는 머리로 만든 파인아트 사진이라는 것이다.

 

사진적으로 접근한 성남훈의 사진과는 달리 한희준은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았다.

사진과 회화, 설치미술을 넘나드는 혼종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사진 개념이 확장되어 구분하는 자체가 고리타분한 생각이겠지만,

엄밀히 말해 한희준의 사진은 사진이 아니라 미술의 영역이다.

 

어떤 접근법이 더 바람직한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볼 때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다.

 

다큐사진가 성남훈의 ‘부유하는 슬픔의 시’는

지난 10일부터 오는 29일까지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KOTE 3층에서 열린다.

 

이 전시에는 성남훈의 대표적 사진으로 꼽히는 집시소녀 사진도 있었다.

프랑스 사진에이전시 ‘라포’ 소속 사진가로 일할 당시에 촬영한 사진들로,

20여년에 걸쳐 세계의 수많은 분쟁지역과 소외지역을 찾아다니며 유민들의 부유하는 삶을 기록해 왔다.

 

코소보, 보스니아, 르완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레바논, 우즈베기스탄,

인도네시아, 에티오피아, 우간다, 페루, 발칸반도 등을 찍은 사진에서 일부를 보여준다.

난민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을 살펴보면 한숨과 탄성이 절로 나온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난민들의 고통을 온 몸으로 껴안으며 찍었다.

따뜻한 인간애에 휩싸여 더러는 서정적이고 시적인 느낌까지 든다.

 

세계 여러 나라의 전쟁지역이나 소외지역을 찍은 사진 외에도

제주 4.3사건을 주제로 한 “붉은 섬”도 새로이 선보였다.

제주의 아름다움에 감춰진 4.3사건이라는 역사적 아픔을 찾아 나선 것이다.

1948년 4.3사건 후, 7년 7개월 동안 3만 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지만,

유가족과 희생자들이 겪었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못한 채 남아있기 때문이다.

 

성남훈의 사진은 온몸으로 부딪히며 찍은 사진이라

작품이 주는 울림이나 여운이 만든 사진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 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한 한희준은 심각한 환경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가 만든 사진 아닌 이미지는 카메라 없이 만든 ‘플라스틱2’다.

7월19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 1층 전시실에서 열린다.

 

초창기 인화방식인 검 프린트, 시아노타입 프린트에서부터

플라스틱 병에 흙과 에폭시를 혼합하는 등 표현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리고 인화지에 인화하는 기존 틀에서 벗어나 헝겁, 유리, 한지 등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다양한 재료와 방법을 활용해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알리는 사회적 접근이라는 점에서는 다큐의 골격을 유지하나

표현방법에서는 기록사진의 객관화를 버리고 주관적 방법을 택한 것이다.

플라스틱은 잘 분해되지 않아 지구의 재앙이 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지난 번 보여 준 ‘플라스틱1’에서는 세계 명소에서 나오는 생수병을 찍어,

좋은 생명수를 오염의 근원인 프라스틱 병에 담아 마시는 모순을 풍자하기도 했다.

이젠 한걸음 더 나아가 플라스틱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형상화하거나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차용하였다.

 

프라스틱 물병의 뒤틀린 형상으로 인체가 허물어지는 경각심을 깨우거나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아노타입의 푸른 빛깔은 마치 영혼이 떠도는 것 같다.

죽음을 상기시키며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 이미지는 영상이 아니라 완전한 추상화다.

인지의 영역에서 벗어나 사유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면에서는 높이 평가되지만,

그 대신 사진의 기록성과는 결별한 것이다.

 

그렇지만 방법론에 고민하며 표현 방법을 확장해 간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대중에게 오염의 심각성을 인지시키는 데는 직설적인 사진에 미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온몸으로 부딪히며 찍은 성남훈의 사진에 따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사진에 바친 세월이 성남훈씨에 미치지 못해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노력에 따라서는 한 장의 이미지로 더 큰 울림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진정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누구처럼 시대적 유행 따라 가느라 오랜 세월 일구어 온 자신의 색깔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한희준의 '플라스틱2'를 보고 나오니, 이층에서 또 다른 단체전이 열린다는 정보를 주었다.

'흑백사진 연구회'라는 동아리의 사진전인데,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떤 이가 지도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같이 사진이 아니라 미술로서의 접근이었다.

자칫 겉 멋에 취해 허송세월할까 걱정되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예술이란 유행도 아니고 재미도 아니라는 점이다.

지도하는 자의 지시에 따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 우선되어야 하고,

초지일관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성에 있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며 밀려오는 슬픔은 사진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작업도 돈 따라 가는 것 같았다. 예술 작업을 돈 벌려고 하는 것이던가?

제일 경계하야 하는 것이 모든 것을 망치는 돈인데...

 

사진, 글 / 조문호

 

허승범의 몽마(夢魔)는 현대인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불안과 욕망을 무서운 꿈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누구나 악몽에 시달려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무서운 뭔가에 쫓기다 깨어 나 잠 못 이룬 밤이 있었다.

그건 인간의 정신적 불안과 삶의 통증, 그리고 억눌린 욕구가 뒤엉켜 꿈에 나타났을 것이다.

작가는 그 악몽의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인간성 상실로 치닫는 도시문명의 현실을 풍자, 비판하고 있다.

전시는 오는 17일까지 후암동 KP갤러리에서 열린다.

 

 

몽마(夢魔) / The Unconscious Mind

 

허승범展 / HURSEUNGBEOM / 許丞範 / photography.installation 

2021_0708 ▶ 2021_0717 / 일,공휴일 휴관

 

허승범_The Unconscious Mind Series, 생명의 즙_100×100cm_2021

 

초대일시 / 2021_0708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KP 갤러리

Korea Photographers Gallery

서울 용산구 소월로2나길 12(후암동 435-1번지) B1

Tel. +82.(0)2.706.6751

www.kpgallery.co.kr

 

 

Korea Photographers Gallery(이하 K.P 갤러리)는 허승범 작가의 사진전 『몽마(夢魔) / The Unconscious Mind』 전을 7월 8일부터 7월 17일까지 개최한다.'몽마(夢魔)' 는 밤중에 자고 있는 사람을 습격하여 악몽을 꾸게 한다는 악마를 뜻하는 한자어이다. 이번 전시에서 허승범 작가는 본인과 주변인들이 꾸었던 악몽들에 착안하여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집단적 무의식 속에 내재된 어두운 상념의 그림자이자 억눌린 욕망과 욕구들을 사진, 영상작업을 통해 소개한다. 그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거듭된 우리 사회가 급속히 이룩한 산업화와 문명화 이면에는 해소되지 못한 개인의 억눌린 욕구와 욕망들이 존재하며 이는 무의식에 침잠하여 꿈을 통해 발현된다고 이야기한다. K.P 갤러리는 『몽마(夢魔) / The Unconscious Mind』 전시를 통해 정신적 불안과 압박, 스트레스를 억누르며 쉼 없이 달려가는 우리들이 삶을 돌아보고 무의식에 침잠하여 꿈을 통해 발현되는 현대인의 삶과 모습을 돌아보고자 한다. ■ KP 갤러리

 

허승범_The Unconscious Mind Series, 사람들_120×80cm_2021
허승범_The Unconscious Mind Series, 낮잠_60×90cm_2021

거듭된 과학기술의 발전을 토대로 급속히 이룩한 산업화와 문명화는 분명 우리들에게 편리한 삶을 제공한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인류의 발전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미래를 앞당기려는 우리들의 노력은 가시적인 측면에서 충분히 성공했다고 할만하며, 더 큰 성공을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은 세상을 발전시키는 동력이다. 하지만 급속한 변화에 따른 현대 문명의 빠른 속도감은 우리들의 삶에 적잖은 부작용을 이야기한다.

 

허승범_The Unconscious Mind Series, 사람들_120×80cm_2021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만남보다는 온라인상으로 건조한 안부를 주고받는 데 익숙해졌다. 한 개인이 도시라는 거대한 조직의 요소로 작동하게 함은 개인의 존재적 결핍을 야기하며 우리들의 가치를 군중 속의 익명으로 제한한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무한 경쟁시대에 낙오되지 않기 위해 우리들은 정신적 불안과 압박, 스트레스를 억누르며 쉼 없이 달려가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바쁘고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다 보니'쉼'이란 단어는 사치이자 낙오자들의 넋두리로 전락해버렸다.

 

허승범_The Unconscious Mind Series, 친구_80×120cm_2021

강퍅해진 현대사회의 해소되지 못한 개인의 억눌린 욕구와 욕망들은 무의식에 침잠하여 꿈을 통해 발현된다. 학자들의 꿈 해석에는 이견이 있지만 명백한 공통점은 꿈을 통해 우리들의 무의식의 상태를 성찰한다는 것이다. 깨고 나면 희미해지는 대부분의 꿈과는 달리 악몽은 우리들 기억 속에 트라우마가 되어 현실의 스트레스를 매개로 언제든 다시 찾아온다.

 

허승범_The Unconscious Mind Series, 날고기_120×80cm_2021

나는 나와 주변인들의 꾸었던 악몽들을 소재로 사진을 찍었다. 우리들은 현대인의 악몽이 던지는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악몽은 현대의 집단적 무의식이 보내는 어두운 상념의 그림자이자 억눌린 욕망과 욕구들의 분출구이다. 환부에 느껴지는 통증처럼 악몽이 우리들에게 보내는 신호는 경고에 가깝다. 화려한 도시의 페르소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몽마는 어쩌면 멈출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바이러스이지 않을까? 현대사회에 증가하는 자살률과 정신질환 발병률은 몽마의 강한 전염력을 증명하고 있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사이코 패스적 범죄가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들의 내면은 안전한가?

 

허승범_The Unconscious Mind Series, 친구_80×120cm_2021

큰 배에 타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하차 방송이 나오고 사람들은 하나 둘 출입구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간 들고 있던 유리로 된 물병을 떨어트렸다. 물병은 데굴데굴 굴러서 여기저기 부딪혔지만 깨지기 전에 잡을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무슨 일이 있는지 배 안의 상황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배 밖에선 어떤 무리의 시위소리와 총성이 들렸고 배 안의 사람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총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시위대는 출구 쪽 문 앞에서 배 안으로 진입하려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나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들고 있던 물병을 주시했다.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분명 공포에 떨고 있었지만 차분히 물병을 열어 물을 마시려 했지만 손이 떨려 병을 열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여기저기 도망치는데 나는 꼼짝없이 그곳에서 물병을 여는 시도를 반복할 뿐이었다. (악몽노트 중에서) ■ 허승범

 

 

Vol.20210709d | 허승범展 / HURSEUNGBEOM / 許丞範 / photography.installation

며칠 전 한정식선생과의 오찬 약속이 잡혔다는 정 동지의 연락을 받았다.

찾아뵌 적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삼개월이 훌쩍 지났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세월이 빨라진다더니, 정말 총알처럼 빠르다.

 

선생께서는 부엌일 돕는 분의 요리솜씨가 형편없어 하루에 한 끼는 꼭 외식을 하신다.

혼자 식사하러 가시기가 편치 않으신지 가까운 지인들에게 가끔 연락하신다.

복요리를 좋아해 그 날도 ‘초원복집’에 갔는데, 종업원 서비스가 여간 아니다.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다 돌아가신 사진계 선배 M씨의 유작전이

인사동에서 열린다는 정보를 전해 드렸더니, 의외의 반응을 보이셨다.

웬만하면 돌아가신 분 욕은 하지 않을 텐데, 대뜸 사기꾼이란 말씀부터 하셨다.

 

잔 재주를 잘 부려 평소 상종을 하지 않았는데,

82년 무렵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을 제작한다며 작품 두 점을 보내달라기에

사진사용에 따른 원고료를 요구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당사자 반응에 더 화가 치밀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선집을 제작하여 큰 돈을 벌었는데,

"우리나라의 내로라는 화가들도 돈 싸들고 와 작품 넣어주길 부탁했는데,

그냥 실어주면 고맙게 생각해야지 원고료는 무슨 원고료냐?"는 말을 하더란다. 

어이가 없어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는데, 세 번이나 구구절절 장문의 편지를 보내 와

거절하지 못한 게 지금도 후회 된다는 말씀이셨다.

 

하기야! 우리나라 대표적인 작가인 한정식선생 작품이 들어가지 않고

어찌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나 역시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사진원고를 부탁하면서 필름원판을 보내 달라는 것이다.

이유인즉, 전체 인쇄 농도를 맞추기 위해 필요하다는데, 문제는 필름을 다루는 사진가의 자세였다.

비슷한 사진 세 컷이 담긴 120필름 한 줄을 보내주었는데,

필요한 한 컷만 분리하기 위해 토막을 내어버렸다.

그 것도 가위로 정교하게 잘라낸 것이 아니라 손으로 찢은 것이다.

나중에 필름을 돌려 받아보니, 찢어진 선이 아슬아슬하게 이미지를 스쳐갔더라.

 

그리고 책을 발간한 후 전국으로 끌고 다니며 순회전을 한 것도 차기 ‘사협’ 이사장을 노린 포석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간에 전시가 끝났으면 사진은 돌려주어야 할 것 아닌가?

충무로에 건물도 가진 재력가인데, 돈이란 결코 좋게 벌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그 분과의 인연은 끝나야 했는데, 좁은 사진판에서 끝낼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85년 ‘사협’ 이사장에 당선되어 ‘사협’ 편집장 자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월간사진’에서 그만두고 ‘청량리588’ 사진 작업을 하고 있을 땐데,

돈이 아쉬워 거절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당시에는 ‘사협’에서 나오는 회보가 사진 잡지라기보다 소식지에 가까웠다.

'사협' 총무가 소식들을 주워 모아 인쇄소로 보내 만드는 책인데,

편집장이란 직책까지 둔다기에 생각 자체가 가상한 일이었다.

좋은 책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야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거기에도 개인적인 욕심이 깔려 있었다.

매달 권두언을 쓰려니 대필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문제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일자리를 받아들인 게 탓이었다.

한 이년 정도 일하는 동안 ‘사협’에서 벌어지는

더럽고 추잡한 일들을 목격할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그만 둘 수 있는 핑계거리가 생겼다.

‘87 민주항쟁’ 개인전을 하려는데, 이사장이 못하게 제지한 것이다.

‘사협’에 근무하면서 어떻게 그런 전시를 할 생각을 하느냐는 것이다. 정말 귀가 막혔다.

사진하는 선배로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미련 없이 사표내고 전시를 강행했는데, 그 뒤부터 그 이를 사진가로 보지 않았다.

그의 죽음도 갑작스런 비명횡사였는데, 이상한 소문까지 떠돌았다.

 

십여 년 동안 기억에서 사라진 그가 갑작스러운 유고 전으로 그 때 일을 일깨웠다.

돈과 권력이란 자칫하면 죽어서도 욕 먹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한다.

그 와중에도 이중 인격자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접했다.

죽고 나면 다 부질없는 짓인데, 다들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최치권의 ‘구미호-불리지 않은 신화'사진집이 ‘눈빛사진가선67’호로 발행되었다.

출판을 기념하는 사진전이 지난1월 15일부터 24일까지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렸으나 차일피일하다 포스팅이 늦어버렸다.

 

다들 사회적 거리두기로 전시장 출입을 꺼리는 시절이라

사진집을 구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늦게나마 소개하게 되었다.

 

그동안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눈빛사진가선’은 책자가 적어 소장이나 휴대하기도 좋지만,

책값도 12,000원 정도의 부담 없는 금액이라 아무리 돈이 없는 나도 빠짐없이 구해보았다.

여지 것 다섯권의 사진집을 냈으나 ‘눈빛사진가선’으로 출판한 ‘청량리588’만

유일하게 재판을 찍었다는 것만으로 ‘눈빛사진가선’의 인기도를 알 수 있다.

 

그 사진집은 출판사에서 엄선하여 발행하는 책이라

신진 사진가들의 다양한 작업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데다,

'눈빛사진가선'이 우리나라 사진의 흐름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난, 페친인 최치권씨가 사진가인지는 몰랐다.

그 날 전시장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하여

서일대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 교수로 일한다는 것과

‘대한민국 전도’, ‘민주주의, 안녕하십니까?’등 여러 차례 비슷한 주제의

사진전을 가졌다는 것도 사진집에 적힌 이력을 보고서야 알았다.

 

사진들은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인간 본성에 관한

문제의식을 최치권만의 어법으로 형상화한 전시였다.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예리하게 채집하여 그만의 내러티브를 담아냈는데,

욕망과 탐욕이 이글거리는 인간 내면의 암울한 해학도였다.

 

구미호란 전설에 나오는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린 여우를 말하나,

인간성을 잃어 사악해진 인간을 빗댄 말이다.

물질문명의 탐욕에 휩싸여 영악하기 이를 데 없으니,

늙은 여우에 다름 아닐 것이다.

 

작가는 거리에 흩어진 이미지를 채집하는 사냥꾼에 다름 아니었다.

지나치는 거리 모퉁이에 놓인 사물이나 간판 등 하잘 것 없는 오브제를 언어로 끌어들였다.

조간신문의 한 문구나 이미지마저 자신의 메시지로 활용했다.

다들 숨은 그림처럼 못 알아채고 지나쳤던 것들을 찾아 낸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포착한 도시의 풍경이나 피사체가 낯설지 않았다.

 

거리를 지나치다 부딪친 대상을 적절히 잘라내어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적 센스가 날카로웠고,

피사체를 관조적으로 보는 시선도 남달랐다.

 

 80년대 초반 내가 서울 올라 온 후, 한동안 외도한 적이 있었다.

물질문명에 의한 인간성 상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은유적인 소재로 기계 이미지를 택한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최민식선생의 영향으로 줄 곳 인간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당시는 대상과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찍히는 문제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기계를 통해 물질문명을 비판하며 인간성 회복의 기치를 세우는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청계천 주물상가나 마장동 폐차장 같은 곳을 찾아다니며 차겁고 육중하거나 날카롭게 보이는

형상들을 채집하여 사진잡지에 연재하기도 했으나, 그 역시 성에 차지 않았다.

다시 돌아선 것은 반대어법의 소구력이 약해서였다.

스스로 아무리 강한 느낌을 받아도 상대가 느끼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작가의 주관적 작업보다 사료로 남을 수 있는 객관성에 무게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주변이 정리된 단편적인 오브제는 그 울림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한계도 느꼈다.

 

아무튼, 다시 사람을 찍으며 적극적인 방법으로 접근했으나,

상대와의 소통을 위해 함께 어울리다 보니 많은 세월이 흘러버렸다.

이야기가 길어진 것은 그런 경험이, 최치권씨의 ‘구미호’가 남달리 다가 와서다.

 

작가가 던지는 전체적인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되었고,

몇 몇 사진에서는 발길을 멈추게 하며 다시 한 번 사람 생각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작가의 의도가 적중했다는 말이다.

 

‘최치권 스타일 다큐’라는 제목의 해설을 쓴 오혜련씨의 마지막 글로 마무리한다.

 

“‘구미호-불리지 않은 신화’시리즈는 작가의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는 작업을 통해 우리에게 인간다움, 인간 가치에 대해 묻는다.

작가는 그의 작업노트에 ‘구미호’에는 그것을 보고 있는 구미호가 있고,

사진을 보고 있는 우리가 있다.“라고 얘기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반은 인간이고 반은 여우인 구미호는 인간인가? 여우인가?

사진을 보고 있는 우리는 인간인가? 여우인가?

가치혼돈의 요지경 시대에 우리의 구미호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우리도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3일 오후6시, ‘리얼 포토’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준비모임이

인사동 ‘푸른별 이야기‘에서 있었다.

전시도 전시지만 옛 사우들이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라 일찍부터 마음이 들떴다.

더구나 대전에 은둔하는 이석필씨를 만날 수 있어서다.

 

그 날은 쪽방 관리인 정씨가 같이 갈 때가 있다며 저녁식사를 하지 말라고 했으나,

모처럼 오랜 친구들을 만나는 약속이 있어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되어 방문을 열어보니 파리똥이 미끄러질 정도로 내 구두를 빤짝 빤짝 닦아 놓았다.

정씨가 빙그레 웃으며 ‘옛 친구 만나는데 구두가 더러워서야 되겠냐“는 것이다.

난, 빤짝거리는 구두를 좋아하지 않아 여지 것 아무리 더러워도 구두 닦는 일은 없었는데,

닦아놓으니 그리 싫지는 않았다. 아마 정씨는 군대 내무반시절 선임들 구두깨나 닦아준 것 같았다.

 

초라한 행색에 구두만 반짝거렸으나, 서둘러 나갔다.

 인사동에서 약속 있을 때마다 늦었기 때문이다.

가까운 거리라 늦장부리다 매번 시간을 지키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10분이나 빨랐다.

그런데, 그때까지 아무도 없어 약속장소가 바뀐 줄 알고 술집에서 나와버렸다.

김문호씨에게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아 뭔가 잘 못된 것 같아 돌아서려는데,

좁은 벽치기 골목에서 김문호씨와 이석필씨가 등장했다.

 

김문호씨야 전시장에서 가끔 만나지만, 이석필씨는 만난 지가 몇 년은 된 것 같았다.

술집에 먼저 자리 잡았는데, 이석필씨는 비슷한 연배지만 아들처럼 젊어보였다.

이 친구의 건강비결은 술을 마시지 않고 밥을 잘 먹는데 있지만, 본래 야생의 체질이다.

야생화 찍으려 산을 숱하게 돌아다녔는데, 겨울에도 양말을 신지 않으며

물을 더럽힌다고 비누는 물론 세수도 잘하지 않는 특이한 체질을 가졌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각질이 생겨 그런지 비누를 사용한다고 했다.

 

막걸리와 소주에다 김치찌게를 시켜 한 잔하고 있으니 안해룡씨가 나타났다.

김봉규씨를 비롯한 다른 분들은 일이 있는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네 사람이 만나 한 잔하는 자리가 오붓하기는 했으나, 왠지 씁쓸했다.

 

30년 전으로 돌아가는 추억의 시간이 되었는데,

기념전을 어떤 식으로 치룰 건지 의논하는 자리였으나, 별다른 결과를 얻지 못했다.

당시의 작업을 소환하느냐 아니면 지금 작업을 보여주는 것으로만 압축되었는데,

그야 당연히 지금의 작업이었다.

 

그 자리에서는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지만,

어떤 공동주제를 내세워 짧은 시일이지만 집중적으로 작업해보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왜 중요한 모임에 다들 참석하지 않았을까?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면 모를까 별로 관심 없는 것은 아닐까?

확실한 결론도 얻지 못한 체 케케묵은 이야기나 근간의 사진계 이야기를 안주로 술만 마시다

대전까지 가야 할 이석필씨가 먼저 일어났다.

 

술값 품앗이로 돈을 냈더니, 안해룡씨가 슬쩍 돌려주었다. 고맙긴 하나 마음은 편치 않더라.

소주 한 병이면 주량보다 좀 과하게 마셨으나, 그냥 집에 가기는 싫었다.

지척에 있는 ‘유목민’에 들렸더니, 전활철씨가 반겨주더라.

술보다는 시원한 콜라 한 잔 얻어 마시고 녹번동 가는 3호선을 탔다.

언제나 술이 취하면 동자동으로 가지 않고 녹번동 가는 이유는 계단 오르기가 힘들어서다.

다만 마스크 쓰고 지하철 타는 시간이 길어 곤욕스럽기는 하나 정영신씨 만나는 기쁨도 크다.

 

난, 술이 취하면 간이 커지고, 쪽팔리는 것도 잘 모른다.

술 값 돌려받은 돈으로 꽃집에서 국화 한 다발을 산 것이다.

정영신씨에게 알랑방귀 뀌는 것이 아니라 보라색의 작은 꽃송이가 너무 섹시해서다.

초라한 늙은이가 꽃을 들고 지하철을 타는 꼴이 얼마나 우습겠는가?

문을 들어서니 세수하던 정영신씨 표정에 미소가 감도는 걸 보니, 쪽팔렸지만 잘 했다싶다.

 

오늘의 결론은 안 하고 입 닦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낫고,

하려면 의미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1971년 8월29일 경북 경산군 반야월에서 대구시 저탄창운수노조의

경북노조원들이 작업장에 삽을 세워두고 벌인 최초의 파업 장면이다.

먹고 살기 위해 파업을 결행한다는 플랜카드 글귀가 인상적이다.


대구 권정호씨 사진으로 ‘광복60년, 사진60년, 시대와 사람들’(눈빛)사진집에서 옮겼다.




서울역 고가공원에서 박옥수 선생을 만났다.

지난 26일 박사모 집회를 찍기 위해 고가에 올라갔더니,
뒤에서 옆구리를 쿡 찔렀다.
돌아보니 사진가 박옥수 선생이었다.

2년 전에도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홈리스 추모식‘에서 만난 적이 있으나,
그 땐 사진 찍느라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

박옥수선생은 나보다 두 살 적은 49년생이지만, 20대부터 찍어 사진으로는 한참 선배다.
일찍부터 이형록선생의 ‘신선회’와 ‘싸롱 아루스’에 이어져 결성되었던,
‘현대사진연구회’의 회원으로 활동한 원로 사진가다.

차 한잔하기 위해 서울역사에 있는 커피체인점을 찾아갔다.
한 끼 밥값에 버금가는 찻값이지만, 자릿세로 생각하고 들어간 것이다.
요즘 박선생께서 페이스 북에 자주 올리는 70년대 사진이 궁금해서다.

박선생은 오랫동안 충무로에서 ‘토탈스튜디오’를 운영한 상업사진가다.
탈에 관한 사진이나 풍경사진은 더러 보았지만,
사회기록에 관한 사진은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페북에 올린 사진 밖에 보지 못했지만, 뚜렷한 주제 없는 포괄적인 기록이었다.
더러는 세월에 숙성된 귀중한 사진들도 있었는데,
그토록 열심히 찍은 사진을 왜 묻어두었는지 궁금했다.

차 마시며, 지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모르는 사실도 많았다.
젊은 시절에는 ‘현대자동차’에서 일했다는 것이다.
차정환씨가 근무한 것은 알았지만, 박선생이 근무한 것은 전혀 몰랐다.

제일 먼저 미국 이민 간 이창진씨가 했고, 그 후임으로 박선생께서 맡았다는데,
차정환씨는 박선생 후임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파리를 비롯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포니’ 자동차 광고사진을 찍던 추억담도 들려주었다.

요즘 페북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사진이 현대자동차에 근무했던 시기였다.
추측컨대, 상업사진을 하다 보니 순수사진에 대한 갈증으로
틈틈이 기록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충무로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던 시절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일거리가 없어 집세를 내지 못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추석이나 설날 전에 몰려오는 상품 사진을 찍어, 밀린 집세를 내기도 했단다.

나도 한 때 박선생 스튜디오에서 신세 진 적이 있다.
‘동아일보사진동우회’ 일을 할 때인데,
‘동아국제사진살롱’ 도록에 들어갈 입상작을 급히 찍을 일이 생겨,
박선생이 운영한 ‘토탈스튜디오’로 가져가 도움을 받은 것이다.

갑자기 잊혀 진 시절의 오래된 사진들을 내놓은 것은
스튜디오를 정리하고 나서야 짬을 낼 수 있었던 것 같았다.
후배의 도움으로 많은 필름을 스캔 받았다는 데,
그 사진 원고를 몽땅 출판사에 넘긴지도 한참 되었다고 한다.

아직 어떻게 하겠다는 확답을 듣지 못해 초조해 했으나,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기가 간단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아무쪼록 좋은 결실 맺길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