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중순 전기 작가 이충렬씨가 펴낸 '아, 김수환 추기경'책을 받았다.

김 추기경의 7주기를 맞아 출간된 전기였는데, 훑어보니 작가의 공력이 대단했다.
추기경의 일기와 강론은 물론, 각종 신문, 잡지에서 찾아 낸 수많은 자료와 360여장의 사진들이

촘촘히 정리되어 있었다. 김 추기경 주변에 계셨던 신부들은 물론 지인들의 증언까지 생생했다.

마치 탐정같은 치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인물의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까지 샅샅이 찾아낸 것이다.

그 많은 일을 미국 사시는 분이 어떻게 했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성실하고 치열한 그의 작가정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사실, 책 읽기보다 인터넷을 즐겨, 두터운 두 권을 보려면 시간이 좀 걸릴거라 여겼는데,

읽어보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료를 바탕으로 한 성직자의 전기라 다소 지루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싹 날려버린 것이다.

그의 스토리텔링에 힘입어, 소설 이상의 재미를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 출생에서 박정희 정권 때까지를 담은 ‘신을 향하여’와 그 이후를 담은 ‘인간을 향하여’는

1100여 쪽에 걸쳐서, 87년동안의 김수환추기경 일대기를 샅샅이 풀어내었다.

이제까지 몇 편의 김 추기경 평전과 어록이 간행된 적은 있으나,

객관적 자료들을 토대로 그의 삶 전체를 이처럼 종합적으로 재구성한 전기물은 처음이었다.

청빈한 삶을 살다 가신 김수환추기경의 위업이야 잘 알지만,

작가는 김 추기경을 영웅으로 격상시키지 않고,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낮은 자세로 사시며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한 추기경의 따뜻한 인간애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때는 불쑥 성매매 여성 쉼터에 찾아가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는 그녀들과 함께 밥도 먹으며,

막 살아 온 그녀들의 술주정도 다 받아 주었단다.

어떤 여인이 추기경의 무릎에 드러누워도 그냥 웃기만 하셨다는 것이다.

뒷이야기지만, 윷놀이를 하다 추기경께서 일부러 판을 좀 속였더니 “믿을 놈, 한 놈도 없다”는

막말까지 나와 추기경께서 ”나도 좀 따야지“라며 맞받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인간적인가?

힘 있는 자에게는 목소리를 높이고, 약자에겐 한없이 자세를 낮췄다.
어두운 시대와 함께했던, 정치, 사회면의 보도사진들과 뒷이야기까지 상세히 풀어,

한 개인의 전기에 앞서, 한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역사였다.

전기작가 이충렬씨를 직접 만나 뵌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샘이 깊은 물”, “한겨레”, “국민일보”, “경향신문” 등에 쓴 단편이나 르포, 칼럼에서

그 분의 유려한 글들을 읽어 성함은 일찍 알았지만, 직접 만난 건 지난 해 ‘6인의 사무또라이’전 뒤풀이었다.

인사동 ‘유목민’에서 신학철, 장경호, 박불똥화백과 함께한 술자리였는데, 너무 점잖으셨다.

그 이후 페친이 되어, 그 분의 출판 소식과 근황을 알게 된 것이다.

“아 김수환 추기경”은 전기문학가 이충렬씨의 네 번째 전기다.

그는 ‘실천문학’에서 소설가로 등단했지만 전기 장르에 꾸준히 작업 해왔다.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등 여러 권을 썼다.

이번에 펴낸 ”아! 김수환추기경“은 전기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연 큰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전기가 출판되자 전 언론이 일제히 대서특필하였고, 심지어는 교보문고 입구 한 벽을 광고판으로

도배할 정도로 국민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생각보다 책은 많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적 풍토가 그 원인이겠지만, 두 권으로 나뉜 두툼한 책에 쉽게 손이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추기경께서 말년에 스스로를 바보라며 그림까지 그렸다지만,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정말 바보인 것 같다.


이틀 전, 작가 이충렬씨가 마련한 안국동 .묵호회집‘의 만찬에 초대 받았다.
박재동화백과 박불똥화백, 중앙일보 정재숙기자 등 반가운 분들을 만났으나, 처음 보는 분도 더러 있었다.

작가의 친구이며 광주국립박물관장을 지낸 이원복씨, 영화사를 운영하는 조원장씨,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에 있는 이희연씨도 오셨다.
















그 자리에서 새로운 소식도 들었다.
이세돌 알파고 바둑대결을 지켜보느라 좀 늦게 나타난 정재숙기자는 사뭇 흥분되어 있었다.

앞으로 통계자료에 의해 모든 걸 로봇이 해결하는 시대가 되면 기자는 물론 대개의 직종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예술 부분은 어려울 것이라며 한 가닥 희망을 주었는데,

그럴수록 인간적인 삶이 대세로 자리 잡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요즘, 웹툰에 만화 연재할 준비를 하는 박재동화백께서 그 내용을 살짝 귀띔했는데, 너무 재미있겠더라.

연재가 시작되면 대박 날 것 같았다. 그리고 경기도에서 추진하고 있는 ‘꿈의 학교’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틀에 박힌 기존의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들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멋진 학교라는 것이다.

일례로 수학에 천재적인 재질을 가진 학생이 외국 유학을 갔는데, 수학에 대한 교육은 하지 않고

예술에 대한 강의만 했다고 한다. 실망해 그만두려는데, 수학을 아름답게 푸는 방법을 아느냐고 물었단다.

아무튼 시대가 요구하는 좋은 학교가 될 것 같았다.


이충렬씨는 역작을 펴내기가 무섭게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 평생 교회 종만 치며 살아 온 종지기의 일생을 다룬 전기를 집필할 것이라고 했다.

유명인에 국한된 전기에서 나아가, 평범하게 살아 온 서민의 삶에 초점에 맞춘 것 자체가 획기적이었다.

이 또한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애 아니겠는가?























그 날 함께 하기로 한 서지학자 김영복씨와 판화가 류연복씨가 사정으로 참석 못해 아쉬웠지만, 즐거운 자리였다.

환담이 오가는 와중에도 박재동화백은 참석한 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캐리커쳐해 선물로 주셨는데,

내 몰골 하나는 웹툰에 액스트라로 사용하려는지 챙겨 두셨다. 괜히 기분 좋아지데...



사진,글 / 조문호



정재숙씨


조원장씨


이희연씨


박불똥씨


거지왕 김춘삼씨가 생각납디다.


지명수배자 / 혹 웹툰에서 이런 몰골 만나면 신고하세요.


 



원로 언론인 임재경 선생의 팔순을 기념하는 “펜으로 길을 찾다” 회고록 출판기념회가

지난 2일 오후6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많은 축하객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그 자리에는 백기완, 백낙청, 신경림, 채현국, 황명걸씨 등, 장 안에 내 노라 하는 문객들이 다 모였다.

임재경선생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책벌레’라며 신경림시인과 백낙청선생이 입을 모았다.

함세웅 신부는 가족들의 말을 빌려 고집불통이라고도 하셨다. 절대 불의에 양보하지 않는다 했고,

이부영 전 의원은 "임 선배는 어느 자리에 가도 자기가 있다는 것을 내보이지 않는다"며

"많은 일들의 아교 같은 노릇을 한다"라고 말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박재동화백은 선생의 선물로 초상화를 그려왔는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혼쭐났다며,

왜 그리 개성 없이 못 생겼냐며 농담까지 하셨다.

많은 분들이 나와 축하의 말씀을 주셨지만, 중요한 것은 아직도 선생은 청춘의 피가 끓고 있다는 것이다.

단상에 올라 짱짱한 목소리로 “이 목 타는 세상, 회갑잔치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면서

지금의 남북 상태를 끝장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셨다.

사진,글 / 조문호




-창비-






















 

따뜻한 햇살에서 따가운 햇살로 바뀌었던 지난 5월 21일은
오찬약속에다 만찬약속까지 겹쳐 온종일 인사동을 맴돌아야 했다.

이 곳 저 곳  돌아다니며 사진 찍고 아는 곳을 방문했으나

낯술에 취해 실수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강 민선생님과 이행자시인을 만나 오찬을 함께 하였고,

인사동 거리에서는 만화가 박재동선생을 만났다.

 

도화가 오만철씨를 비롯하여 김 민씨, 김비아씨, 송정순씨의

전람회장에 들렸고, ‘갤러리 나우’와 ‘공아트’, ‘아라아트’ 사무실에

들려 이순심관장과 공창호씨, 전인미 감독을 각 각 만났다.

‘허리우드’에서는 김명성, 이상훈, 공윤희씨를 만나기도 했다.

인사동거리는 유랑 악사들과 초상화 그리는 이의 모습도 보였지만,

그렇게 바쁘지 않은 나들이객들의 발길을 잡지는 못했다.
파리만 날리는 인사동 전시장과는 대조적으로, 그 많은 관광객들은

기념사진이나 찍으며 관광상품가게들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이게 일상적인 인사동의 풍경이니 머지않아 관광객도 줄어들게다.

그 관광객들이 물러나야 인사동이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진,글 / 조문호

 

 

 

 

 

 

 

 

 

 

 

 

 

 

 

 

 

 

 

 

 

 

 

 

 

 

 

 

 

 

 

 

 

 

 

 

 

 

 

 

 



‘한겨레신문’에 연재되었던 ‘용태형과 문화운동시대“가 마무리되어, 그 연재에 도움 준 분 들을 모시는 책거리가

지난 11월 24일 오후7시부터 ‘낭만’에서 있었다.

'한겨레신문' 편집부에서 마련한 이 자리에는 원로 언론인 임재경선생을 비롯하여 이부영, 황석영, 김정헌, 이애주, 박재동,

윤범모, 임진택, 조성우, 이태호, 문영태, 이종률, 박 건, 최석태, 곽대원, 김명성, 김경애씨 등 20여명이 참석하였는데,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분들과 술잔을 들며 저승 떠난 ‘용태형’을 추억했다.

그리고 앞서 출간된 “산포도사랑, 용태형”과  연재된 "용태형과 문화운동시대“를 재구성해

다시 출간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한겨레‘ 김경애 부장은 출판부와 협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낭만’에서 ‘소담’으로 이어진 긴 술자리는 자정을 넘긴 3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사진,글 / 조문호

 

 

 

 

 

 

 

 

 

 

 

 

 

 

 

 

 

 

 

 

 

 

 

 

 

 

 

 

 

 

 

 

 

 

 

 

 

 

 

 

 

 

 

 

 

 

 



김용태씨를 돕기 위한 “산포도 사랑, 용태 형” 출판기념회 및 “함께 가는 길” 전시회 개막식이

지난 26일 오후5시부터 '가나아트센트'에서 열렸다.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은 민중미술의 핵심 인사 45명이 '용태 형'에 대한 경험담을 털어 놓았고,

“함께 가는 길”은 지난 시절 '용태 형'에게 빚 진 민중미술가 43명의 작품을 추렴해 갖는 자선전이다.
‘김용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해 살아있는 이를 위한 회고집을 내고 전시회를 갖게 된 것은

병상에 누운 ‘용태 형’을 돕기 위한 자리였지만, 뿔뿔이 흩어진 옛 전사들의 결집이었다.

투병 중이라 개막식에 나오지 못할 줄 알았던 ‘용태 형’의 멀쩡한 등장에 깜짝 놀랐다.

모처럼 때 빼고 광냈겠지만, 전혀 간암 말기의 환자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개막식장에는 80년대 민중예술을 이끌었던 역전의 용사들이 총집결했다.
김정헌, 민정기, 박진화, 성완경, 신경림, 임옥상, 신학철, 박재동, 박불똥, 정동석, 주재환, 강요배, 김준권, 문영태, 신학철,

심정수, 이애주, 임진택, 장경호, 최석태씨 등의 내노라하는 작가들과 백기완, 문재인, 이부영, 이재오씨 등의 정치인,

시인 신경림, 소설가 황석영, 언론인 임재경, 이도윤, 가수 최백호, 환경운동가 최 열, 연극배우 이명희, 사진가 정인숙, 곽명우, 무도인 하태웅, 김태서, 임계재, 편근희, 유재만, 노광래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용태 형'의 쾌유를 바라며 전의를 다졌다.

임진택씨의 사회로 진행된 개막식 첫머리에 최백호씨가 나와 “보고 싶은 얼굴”을 불렀다.

그 노랫말들이 새록 새록 지난 시절을 떠올리게 했는데, 나에게는 보고 싶은 얼굴이 몇 명이나 될까 하는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이왕이면 “산포도 익어 가는 고향 산길에, 산포도 따다 주던 산포도 처녀”로 시작되는 ‘용태 형’의 십팔번 “산포도 처녀”를 들었

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어 문재인, 황석영, 이부영, 백기완씨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백기완씨는 “술도 마셔야 하고, 할 일이 많은데, 빨리 일어나라”며 꾸짖듯 말해 자리를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애주씨의 살풀이 춤으로 행사는 마무리되었으나, 오랜만에 반가운 분들 만나고 사진찍느라 정작 보아야 할

전시작품들을 놓쳤다. 

뒤풀이 집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나도 막걸리 한 잔 도오!”라며 “용태 형”이 술잔을 들었다.

하기야 전투를 지휘할 사령관이 자기 몸 생각으로 꽁무니 뺄 위인은 아니지만, 좀 걱정되었다.

‘괜찮다’를 연발하는 ‘용태 형’의 밝은 모습에서 다시 살아 난 맹장의 모습을 보는듯 했다.

민중미술로 민주화 운동에 불을 지핀 옛 전사들의 결집 자체가 '용태 형'의 부활을 의미했다.

 

손님들이 너무 많아 뒤풀이 집을 두 군데나 잡았으나 여전히 자리가 부족했다.
신학철, 문영태, 장경호, 이명희씨를 비롯한 몇 명은 인사동 ‘노마드’로 자리를 옮겨,

신학철씨의 작품 '물레방아 도는 내력'을 들었다.

 

사진,글 / 조문호

 

 

 

 

 

 

 

 

 

 

 

 

 

 

 

 

 

 

 

 

 

 

 

 

 

 

 

 

 

 

 

 

 

 

 

 

 

 

 

 

 

 

 

 

 

 

 

 

 

 

 



80년대 대표 민중미술작가로, 제주 4.3항쟁의 아픈 역사를 드러내기도 한

서양화가 강요배씨의 소묘전이 2월19일부터 3월30일까지 소격동 학고재에서 전시된다. 

8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30여년 동안 목탄으로 그린 돌하르방 드로잉 등 50여점을 선보인다.
지난 2월19일 오후5시부터 개막된 오프닝파티에는 박제동, 신학철, 박불똥, 장경호, 김정헌, 김석종씨 등

여러 지인들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만화 탄생과정 한눈에… 부천 꼭 가봐야할 곳으로 만들어야죠"

한국 시사만평 한 획 그은 만화가로 2008년부터 국제축제 운영 이끌어
설국열차·미생 작가와의 만남 등 올해는 더욱 풍성해진 이벤트 마련
애니 100개 중 1개만 성공하더라도 정부 좀 더 여유갖고 적극 지원해야

"올해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는 인기영화 '설국열차'와 웹툰 '미생' 등의 만화작가를 만날 수 있고 그 만화들의 탄생부터 영화로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행사장 외에 부천 일대에서도 행사가 진행돼 부천을 '정말 가볼 만한 곳, 가봐야 할 곳'으로 만들 겁니다. 올해는 정말 기대해도 좋습니다.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입니다."

한국 시사만화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 만화가 박재동 화백을 지난 12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지난 2008년부터 이미 6년째 축제운영위원장을 맡아온 그는 14일부터 5일간 부천에서 진행되는 제16회 부천국제만화축제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그는 "그간 국제페스티벌임에도 지역축제 규모에 그쳤지만 올해는 다르다"며 "16년째 행사를 치르면서 쌓인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올해 행사에는 지난해보다 10%가량 늘어난 10만명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만화방=박 화백의 아버지는 교사였다. 6ㆍ25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했지만 군번이 없어 다시 복무한 아버지는 고향 울산에서 교편을 잡았다. 하지만 폐결핵으로 학교를 그만뒀고 곧 간경화까지 생겼다. 생계가 막막해진 가족들은 부산에 내려갔다. 그리고 연탄배달부터 풀빵ㆍ팥빙수 장사까지 전전하다 조금 모인 돈으로 만화가게를 인수한다. 박 화백이 만화와 인연을 맺은 지점이다.

"부모님께는 고생스러운 일이었겠지만 만화방을 하면서 천혜의 조건에서 행복하게 컸습니다. 친구들은 돈이 없어 못 보는 만화를 하루 20권씩, 1년이면 7,000권도 넘게 봤죠. 또 만화방을 대신 보면서 조금씩 모은 돈으로 당시 개봉한 영화는 죄다 보고 다녔어요."

이미 초등학교 4학년쯤 57쪽 분량의 만화도 그렸다. 그저 만화가 좋고 영화가 좋았다. 하지만 너무 놀았다. 지금과 달리 지역 명문고에 시험을 봐서 진학하던 당시 부산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졌다. 크게 좌절했지만 그는 남는 시간에 만화를 그렸다. 그렇게 정체된 열여섯살 '내 가슴에도 봄이 왔습니다'라는 114쪽짜리 첫 장편만화를 완성한다. '만화는 노가다'라는 깨달음(?)도 있었지만 그의 자존감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작품을 완성해본 사람만 아는 자신감이랄까, 하여간 이걸로 진학에 실패한 상처가 아물었죠.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는 우리 집 최고의 보물입니다. 펼쳐보면 첫 그림과 마지막 그림이 확 차이가 날 정도로 이걸 그리면서 성장하는 게 보입니다. 아마 내 또래 기성작가들 중에 중학교 때 그린 장편만화를 갖고 있는 사람은 나뿐일 겁니다."

그런 그가 만화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당장 무조건 그려라. 그리고 나서 생각해라." 많은 사람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도 이건 이래서 유치하다 저래서 별로다 하며 망설이다 제풀에 주저앉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려놓으면 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를 저절로 알게 된다는 얘기다.

당시 만화가가 되는 방법은 유명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없었다. 출판사들은 신인작가를 상대도 해주지 않았고 유명작가 밑에서 도제식으로 심부름부터 시작하는 게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그게 싫었던 그는 서울대 미대 회화학과에 진학했다. 명문이라지만 고교시험에도 떨어졌던 그가 그렇게 놀면서 어떻게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비결은 '벼락치기'. 그는 "초등학교 때는 전교 1등도 해봤고 고등학교 때는 전교 꼴등까지 했다"고 덧붙인다. 하여간 만화방 아들은 그렇게 서울대를 갔다.

◇'촌철살인' 일간지 시사만화가로=졸업 이후 고등학교 교사로 6년여를 보낸 후 '미치도록' 그림이 그리고 싶어 애니메이션 회사에 들어간다. "내 유전자에는 선생과 예술가가 함께 들어 있나 봅니다. 특별히 교직에 대한 동경은 없었지만 6년여의 교사생활이 너무 행복했어요. 그러다 보니 이런 식이면 영영 그림을 못 그리겠다 싶어 그만뒀습니다."

그렇게 2년 신나게 그림을 그리다 한겨레신문에서 공고가 났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는 시사만화가로 입사한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만화가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보다는 이 일을 '민주화운동'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한겨레에서 일한 8년은 그에게 가장 힘들면서도 만족스러웠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물론 스스로의 성과에 대해 가장 불만족스럽기도 했지만 가끔은 제가 정말 이 그림을 그렸나 할 정도로 스스로 놀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워커홀릭(일중독)이 됐어요. 만평이 그날의 이슈들을 모아 압축하고 재미있게 그려야 하는 일인데다 마감까지 있으니. 그 생활 8년을 하니 회사를 나와서도 여유가 생기면 오히려 불안할 정도가 됐죠. 비교하자면 평화로운 시기에 오히려 불안한 군인 같은 느낌이랄까" 라며 웃었다.

당시 박 화백의 만평은 '촌철살인'으로 유명했다. 정치에 대한 풍자는 물론 교육ㆍ환경ㆍ경제 등 당대의 여러 사회문제를 날카롭게 꼬집으며 이름을 날렸다. 일부에서 "우리나라의 시사만화는 박재동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였다. 그간의 점잖은 만평 분위기와 달리 말풍선에 효과음까지 말 그대로 만화적 요소가 들어갔다.

최고의 웹툰작가로 대접받는 강풀도 박 화백의 그림을 모작하며 만화가의 꿈을 키웠다. 강풀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으로 박 화백의 시사만화 모음집 '목이 긴 사나이'를 꼽을 정도다. 강풀은 한 인터뷰에서 "선생님의 만평은 날카로우면서도 재미가 있었다. 만평은 보통 날카롭거나 비판적이라는 생각이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했다.

◇"저예산ㆍ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 모두 지원해야"=박 화백은 만화가로서, 그리고 애니메이션 감독, 만화축제 운영위원장으로서도 정부 정책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무엇보다 한해에 애니메이션이 몇편 제작되지 않는 열악한 상황을 먼저 지적했다.

"무엇보다 많은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좋은 시나리오와 완벽한 기획이 맞물린 블록버스터급 애니메이션도 필요하고 작가 몇몇이 모여 만드는 저예산 작품도 많이 시도돼야 합니다. 2000년대 들어 국내 영화가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저질ㆍ고급 할 것 없이 계속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박 화백은 좋은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탁월한 시나리오를 골라 대기업의 투자를 받아 높은 수준의 대작을 내놓는 것과 '돼지의 왕'처럼 초저예산으로 제작되는 애니메이션이다.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은 1억원 남짓 투입된 저예산 영화임에도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 최초로 3관왕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고 같은 해 극장에서도 개봉됐다.

아울러 정부에서 좀 더 여유를 갖고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제조업이 아닌 콘텐츠 사업에서, 더구나 국내에서 성공 가능성이 낮은 애니메이션 분야의 지원은 개념 자체가 달라야 한다는 얘기다. 박 화백은 "정부는 시나리오 100개 중 1개만 성공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지원에 나서야 한다. 어차피 되는 기획은 기업이 지원한다. 하지만 다소 미숙한 기획은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소액이라도 정부가 지원하자는 이야기"라며 "국가는 기업이 못하는 것을 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반문했다.

이어 "초중고교 할 것 없이 젊고 어린 학생들에게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한 뒤 "비용도 크게 들지 않으므로 진지한 열정을 가졌다면 충분히 실패할 기회를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면서 "실패도 자산이다. 나중에 이 학생들이 컸을 때를 생각해봐야 한다.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고 덧붙였다.

또 웹툰의 경우 일정 수준의 유료화를 통해 작가들에게 전업 작품활동이 가능한 최소한의 구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웹툰은 대부분 무료다. 그리고 학습만화로 편중된 아동만화 시장을 명랑ㆍ모험만화 등으로 다양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독자와의 접촉빈도로 보면 국내 만화시장은 일본 다음인 세계 2위다. 특히 스크롤 연출이 필요한 웹툰 분야는 한국이 압도적으로 앞서 있다"며 "인터넷시장을 잘 활용해야 한다. 물론 유통 채널과 번역의 문제가 남아 있지만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세계 웹만화의 정거장이 돼 시장을 키우면 세계 최고의 만화왕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1952년 울산
▲1976년 서울대학교 회화학과
▲1979년 휘문고등학교 교사
▲1981년 중경고등학교 교사
▲1988년 한겨레신문 입사
▲1996년 애니메이션회사 오돌또기 대표
▲200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
▲2008년~ 부천국제만화축제 운영위원장
▲2009년 제10회 대한민국 국회대상 올해의 만화상 수상
▲2010년 제10회 고바우만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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