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탄생과정 한눈에… 부천 꼭 가봐야할 곳으로 만들어야죠"

한국 시사만평 한 획 그은 만화가로 2008년부터 국제축제 운영 이끌어
설국열차·미생 작가와의 만남 등 올해는 더욱 풍성해진 이벤트 마련
애니 100개 중 1개만 성공하더라도 정부 좀 더 여유갖고 적극 지원해야

"올해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는 인기영화 '설국열차'와 웹툰 '미생' 등의 만화작가를 만날 수 있고 그 만화들의 탄생부터 영화로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행사장 외에 부천 일대에서도 행사가 진행돼 부천을 '정말 가볼 만한 곳, 가봐야 할 곳'으로 만들 겁니다. 올해는 정말 기대해도 좋습니다.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입니다."

한국 시사만화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 만화가 박재동 화백을 지난 12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지난 2008년부터 이미 6년째 축제운영위원장을 맡아온 그는 14일부터 5일간 부천에서 진행되는 제16회 부천국제만화축제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그는 "그간 국제페스티벌임에도 지역축제 규모에 그쳤지만 올해는 다르다"며 "16년째 행사를 치르면서 쌓인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올해 행사에는 지난해보다 10%가량 늘어난 10만명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만화방=박 화백의 아버지는 교사였다. 6ㆍ25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했지만 군번이 없어 다시 복무한 아버지는 고향 울산에서 교편을 잡았다. 하지만 폐결핵으로 학교를 그만뒀고 곧 간경화까지 생겼다. 생계가 막막해진 가족들은 부산에 내려갔다. 그리고 연탄배달부터 풀빵ㆍ팥빙수 장사까지 전전하다 조금 모인 돈으로 만화가게를 인수한다. 박 화백이 만화와 인연을 맺은 지점이다.

"부모님께는 고생스러운 일이었겠지만 만화방을 하면서 천혜의 조건에서 행복하게 컸습니다. 친구들은 돈이 없어 못 보는 만화를 하루 20권씩, 1년이면 7,000권도 넘게 봤죠. 또 만화방을 대신 보면서 조금씩 모은 돈으로 당시 개봉한 영화는 죄다 보고 다녔어요."

이미 초등학교 4학년쯤 57쪽 분량의 만화도 그렸다. 그저 만화가 좋고 영화가 좋았다. 하지만 너무 놀았다. 지금과 달리 지역 명문고에 시험을 봐서 진학하던 당시 부산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졌다. 크게 좌절했지만 그는 남는 시간에 만화를 그렸다. 그렇게 정체된 열여섯살 '내 가슴에도 봄이 왔습니다'라는 114쪽짜리 첫 장편만화를 완성한다. '만화는 노가다'라는 깨달음(?)도 있었지만 그의 자존감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작품을 완성해본 사람만 아는 자신감이랄까, 하여간 이걸로 진학에 실패한 상처가 아물었죠.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는 우리 집 최고의 보물입니다. 펼쳐보면 첫 그림과 마지막 그림이 확 차이가 날 정도로 이걸 그리면서 성장하는 게 보입니다. 아마 내 또래 기성작가들 중에 중학교 때 그린 장편만화를 갖고 있는 사람은 나뿐일 겁니다."

그런 그가 만화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당장 무조건 그려라. 그리고 나서 생각해라." 많은 사람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도 이건 이래서 유치하다 저래서 별로다 하며 망설이다 제풀에 주저앉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려놓으면 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를 저절로 알게 된다는 얘기다.

당시 만화가가 되는 방법은 유명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없었다. 출판사들은 신인작가를 상대도 해주지 않았고 유명작가 밑에서 도제식으로 심부름부터 시작하는 게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그게 싫었던 그는 서울대 미대 회화학과에 진학했다. 명문이라지만 고교시험에도 떨어졌던 그가 그렇게 놀면서 어떻게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비결은 '벼락치기'. 그는 "초등학교 때는 전교 1등도 해봤고 고등학교 때는 전교 꼴등까지 했다"고 덧붙인다. 하여간 만화방 아들은 그렇게 서울대를 갔다.

◇'촌철살인' 일간지 시사만화가로=졸업 이후 고등학교 교사로 6년여를 보낸 후 '미치도록' 그림이 그리고 싶어 애니메이션 회사에 들어간다. "내 유전자에는 선생과 예술가가 함께 들어 있나 봅니다. 특별히 교직에 대한 동경은 없었지만 6년여의 교사생활이 너무 행복했어요. 그러다 보니 이런 식이면 영영 그림을 못 그리겠다 싶어 그만뒀습니다."

그렇게 2년 신나게 그림을 그리다 한겨레신문에서 공고가 났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는 시사만화가로 입사한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만화가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보다는 이 일을 '민주화운동'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한겨레에서 일한 8년은 그에게 가장 힘들면서도 만족스러웠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물론 스스로의 성과에 대해 가장 불만족스럽기도 했지만 가끔은 제가 정말 이 그림을 그렸나 할 정도로 스스로 놀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워커홀릭(일중독)이 됐어요. 만평이 그날의 이슈들을 모아 압축하고 재미있게 그려야 하는 일인데다 마감까지 있으니. 그 생활 8년을 하니 회사를 나와서도 여유가 생기면 오히려 불안할 정도가 됐죠. 비교하자면 평화로운 시기에 오히려 불안한 군인 같은 느낌이랄까" 라며 웃었다.

당시 박 화백의 만평은 '촌철살인'으로 유명했다. 정치에 대한 풍자는 물론 교육ㆍ환경ㆍ경제 등 당대의 여러 사회문제를 날카롭게 꼬집으며 이름을 날렸다. 일부에서 "우리나라의 시사만화는 박재동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였다. 그간의 점잖은 만평 분위기와 달리 말풍선에 효과음까지 말 그대로 만화적 요소가 들어갔다.

최고의 웹툰작가로 대접받는 강풀도 박 화백의 그림을 모작하며 만화가의 꿈을 키웠다. 강풀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으로 박 화백의 시사만화 모음집 '목이 긴 사나이'를 꼽을 정도다. 강풀은 한 인터뷰에서 "선생님의 만평은 날카로우면서도 재미가 있었다. 만평은 보통 날카롭거나 비판적이라는 생각이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했다.

◇"저예산ㆍ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 모두 지원해야"=박 화백은 만화가로서, 그리고 애니메이션 감독, 만화축제 운영위원장으로서도 정부 정책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무엇보다 한해에 애니메이션이 몇편 제작되지 않는 열악한 상황을 먼저 지적했다.

"무엇보다 많은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좋은 시나리오와 완벽한 기획이 맞물린 블록버스터급 애니메이션도 필요하고 작가 몇몇이 모여 만드는 저예산 작품도 많이 시도돼야 합니다. 2000년대 들어 국내 영화가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저질ㆍ고급 할 것 없이 계속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박 화백은 좋은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탁월한 시나리오를 골라 대기업의 투자를 받아 높은 수준의 대작을 내놓는 것과 '돼지의 왕'처럼 초저예산으로 제작되는 애니메이션이다.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은 1억원 남짓 투입된 저예산 영화임에도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 최초로 3관왕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고 같은 해 극장에서도 개봉됐다.

아울러 정부에서 좀 더 여유를 갖고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제조업이 아닌 콘텐츠 사업에서, 더구나 국내에서 성공 가능성이 낮은 애니메이션 분야의 지원은 개념 자체가 달라야 한다는 얘기다. 박 화백은 "정부는 시나리오 100개 중 1개만 성공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지원에 나서야 한다. 어차피 되는 기획은 기업이 지원한다. 하지만 다소 미숙한 기획은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소액이라도 정부가 지원하자는 이야기"라며 "국가는 기업이 못하는 것을 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반문했다.

이어 "초중고교 할 것 없이 젊고 어린 학생들에게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한 뒤 "비용도 크게 들지 않으므로 진지한 열정을 가졌다면 충분히 실패할 기회를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면서 "실패도 자산이다. 나중에 이 학생들이 컸을 때를 생각해봐야 한다.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고 덧붙였다.

또 웹툰의 경우 일정 수준의 유료화를 통해 작가들에게 전업 작품활동이 가능한 최소한의 구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웹툰은 대부분 무료다. 그리고 학습만화로 편중된 아동만화 시장을 명랑ㆍ모험만화 등으로 다양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독자와의 접촉빈도로 보면 국내 만화시장은 일본 다음인 세계 2위다. 특히 스크롤 연출이 필요한 웹툰 분야는 한국이 압도적으로 앞서 있다"며 "인터넷시장을 잘 활용해야 한다. 물론 유통 채널과 번역의 문제가 남아 있지만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세계 웹만화의 정거장이 돼 시장을 키우면 세계 최고의 만화왕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1952년 울산
▲1976년 서울대학교 회화학과
▲1979년 휘문고등학교 교사
▲1981년 중경고등학교 교사
▲1988년 한겨레신문 입사
▲1996년 애니메이션회사 오돌또기 대표
▲200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
▲2008년~ 부천국제만화축제 운영위원장
▲2009년 제10회 대한민국 국회대상 올해의 만화상 수상
▲2010년 제10회 고바우만화상 수상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