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창원의 김의권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친한 친구이기에 앞서, 그의 죽음은 무심했던 내 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떠난 사람이야 세상 시름 모두 내려놓고,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가는 축복받을 일이지만,

단지 살아남은 자들의 아쉬움이고 슬픔일 뿐이다.

 

운명을 달리한 김의권은 불의에 분노할 줄 알고, 남의 슬픔에 가슴 아파하는 그런 평범한 예술가였다.

음악과 그림, 그라픽디자인, 실내장식 등 다양한 재능을 가졌으나

특정 예술을 간판으로 내세워 포장하는 짓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을 내세우는 일에는 더더욱 질색이다.

그냥 예술과 사람이 좋아 인사동을 고향처럼 드나들던, 우리 시대의 한 저항아였고 풍류객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지도 어언 반세기가 흘렀다.

고향 친구는 아니지만, 긴 청춘을 함께 누렸기에 고향 친구보다 정분은 더 깊다.

 

그를 알게 된 것은 1970, 부산 에덴공원의 난향 음악실에서 처음 만났다.

리퀘스트 용지에 빵모자를 쓴 자화상의 케리커쳐를 그려놓았는데,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퀸시 존스'의 음악이었다.

누가 신청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말없이 음악에 빠져있다 눈길이라도 마주치면 배시시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히피라는 듯...

음악과 이념이 같다는 이유로 정남규, 황성건, 신윤택 등과 어울려 어지간히 놀았다.

미망인이 된 최갑순여사도 그가 경영한 마산 수림음악실에서 만나게 되었다니,

어쩌면 음악이 맺어 준 것은 공통의 인연이 아닌가? 생각된다.

 

미망인의 회고에 의하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생 때 였다고 한다.

방송실에서 신문 사설을 읽어가며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용기에, 마음을 빼앗긴 것 같더라.

대중이 모인 장소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망인 역시 부마민주항쟁에 앞장섰던 학생이라 어쩌면 동지애 같은 것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좋은 사람에 대한 이상은 현실과 너무 멀었다.

고인 역시, 돈이 판치는 세상에 히피의 삶을 산다는 것이 간단치 않았을 것이다.

낙천적으로 사는 대개의 예술가들이 겪는 운명의 장난인지 모른다.

예술로 밥 먹고 산다는 것이 힘든 것은 어제 오늘만의 일도 아니다.

 

거기다 심성까지 모질지 못해, 일 해주고도 실내장식비도 못 받는 일이 비일비재한데다

그것도 모자라 툭하면 남의 빚보증까지 서, 집을 날릴 뻔 한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이 어질어 밖에서 좋은 말 듣게 되면, 죽어나는 건 가족뿐이다.

 

그런데도 남에게 싫은 소리는 죽어도 못한다.

부탁은 물론 아들딸 결혼식이나 몸 아프다는 연락까지 안 하는 고집불통이었다.

천성이 그러니 어찌하겠냐마는, 아내 최여사가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다행히 아내가 팔 걷고 나서서 자식들을 잘 키웠으나,

경상도 사내의 고약한 성질머리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했을 것이다.

 

아내 최갑순씨는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장으로 있고,

변호사로 일하는 아들 형일은 일남일녀를 두어 화목하게 살고,

교사로 일하는 딸 엄지까지 결혼하여 만삭이라니, 무슨 부족함이 있으랴!

말년에 손자 재롱이나 즐길 형편에 그리도 갈 길이 바쁘던가?

 

지난 15일 정동지와 창원 파티마병원 장례식장을 찾아갔더니,

공윤희씨는 기다리다 지쳐 가버렸고, 이종호씨만 장례식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빈소에는 스스로를 그린 자화상이 영정사진을 대신했는데,

거리를 방황하는 풍류객의 삶을 대변하듯 쓸쓸했다.

 

고인의 영전에 향을 사르며 영원한 안식을 빌었다.

죽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나는 죽지 않고 친구가 가는 걸 보니,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사더라.

인사동 친구들이 그리워 일만 있으면 지팡이 짚고 인사동을 들락거렸으나, 세상인심은 그와 달랐다.

병석에 있는 김상현씨만 조의금을 대신 전달해 달라는 연락을 해왔을 뿐이다.

 

하기야! 먼 길까지 문상가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그렇지만, 가깝게 지내던 마산의 후배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 보기 어렵다는 말은 오래된 말이지만,

요즘은 가족을 모르면 친구도 문상가지 않는다는 말로 바꾸어야 할 판이다.

 

그러나 돗대기 시장 장삿꾼도 아니고 예술가들이 아니던가? 

평소에 가족을 동반하지 못한 원죄는 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

어느 풍류객이 마누라 끌고 다니며 풍류를 즐긴 자가 몇이나 되던가?

 

오래전 찍어 둔 알몸 영정사진은 정선 화재 때 불타 미처 프린트할 여유도 없었지만,

대개 너무 늦게 알거나 상주의 이해를 구하지 못해 번번이 불발되었다.

사람 크기로 프린트한 알몸사진을 내세워 초상집을 잔칫집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나

가족들의 오래된 고정관념을 바꿀 수도 없지만, 인터넷에 올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미투란 요상한 바람이 불어 이성을 사랑으로 보지 않고 적으로 여기는 삭막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얼마 전, 알몸 영정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삭제해 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알리는 영정사진은 아랫도리를 잘라 상체만 올린 것이다.

내가 죽는 날은 먼저 간 친구들의 초상까지 함께 내거는 축제를 열기로 했다.

 

오랜만에 이종호씨를 만나 술 한잔 나누고 있으니, 친구 황성근이도 찾아왔고,

40여 년 동안 의권이 따까리 노릇만 했다는 변형주씨도 나타났다.

어제는 신윤택, 최정순, 신병섭씨도 다녀갔다고 한다.

눈물을 글썽이던 미망인은 미운 정만 꽤 씹으며 고인을 원망했으나,

긴 세월의 고운 정 미운 정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고인이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했다는 미안하다! 너한테 미안하고,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가정보다 밖으로 떠도는 풍류객들이 되새겨야 할 대목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요즘은 상갓집 풍경도 많이 변했더라.

밤새도록 빈소를 지키며 술 마시는 풍습은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손님이 뜸하니 도우미까지 퇴근하고, 젊은 상주만 빈소를 지켰다.

황성건과 변형주씨만 상가에서 마련해 준 가까운 여관에서 자고,

나와 정동지는 이종호씨가 마련해 준 '엠배스더호텔'에 자는 호강도 했다.

 

호텔 인근 찻집에서 사진하는 조성제씨를 만나기도 했는데,

오랜만에 사진판 돌아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 이튿날 발인시간에 맞추어 서둘러 장례식장에 갔더니,

그때까지 황성건과 변형주씨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상가에서 챙겨 간 술로 밤새도록 퍼마신 것 같았다.

 

추모 미사에서 편히 승천하라는 축원도 올렸다.

할아버지 영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손녀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세단에 실려 하늘나라로 떠나는 친구의 뒷모습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조문객이야 많았지만, 정작 마음 주었던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욕심부리지 않고 초연하게 살다 간 그 그림자가...

 

의권아~ 잘 가거라! 그곳에는 먼저 간 홍수진과 정남규를 비롯하여 적음도 있고,

삐뚤 웃음으로 반기는 창동허새비 이선관 시인이나 현재호 화백도 계신다.

그리고 만나기만 하면 노잣돈 달라던 천상병시인도 반길거다.

부디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

 

자유인을 꿈꾸어 온 김의권은 이 시대 마지막 희피였다.

돈이 지배하는 야멸찬 세상에,  그 자리를 지켜 온 것만도 용타!

머지않아 전설이 된 빨치산처럼, 모두 사라질 것이다.

 

 

선관 형의 ! 함성을 조시로 올린다.

 

당신들은 아는가

십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십구년이 된 지금까지도

점점점 더 진하게 들려오는

저 함성 함성

구암동 애기봉 중턱에

눈감지 못하고 누워 있는

죽어도 살아 있는 열사들이여

살아 있음이 죽어 있는

우리들은 오늘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부끄럽게

묵념을 올립니다

 

사진, / 조문호

 

김의권(74)씨가 지난 14일 새벽 4시 무렵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인은 실내장식 및그래픽디자이너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습니다.

그리고 인사동 사람들의 모임인 창예헌초창기 맴버로

인사동을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오랜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갑작스런 부고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고난의 삶을 마무리하고 하늘로 승천한 고인에게는 축복이겠으나,

단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일 뿐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빈소 : 창원 파티마병원 장례식장 VIP, (창원시 의창구 창이대로45)

발인 : 20221116/ 오전 730

장지 : 창원 상복공원

상주 : 처 최갑순, 자 김형일, 자부 배주연

녀 김엄지, 사위 이문규

 

상주 연락처 : 010 5049 0824 김형일

 

아래 사진은 인사동에서 찍은 고인의 살아 생전 모습입니다.

지난 날을 추억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서울역에서 29 오전 열시에 출발하는 창원행 열차를 탔다.

은평역사한옥박물관학예연구사 이 랑씨를 비롯하여 정영신, 김명성씨와 함께한 자리였다.

 

조선말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까지 근현대사 백 년을 서예와 그림에 녹여낸

'자화상II 나를 보다' 전시 보러 경남도립미술관에 들리기 위해서다.

 

이 전시에 김명성씨가 소장한 항일우국지사 작품이 다수 걸리기도 했지만,

은평역사한옥박물관독립자료전 준비를 염두에 둔 관람인 것 같았다.

 

코로나19로 열차 좌석 배정이 띄엄띄엄 배치된 격리신세라 좀 그랬지만,

오랜만의 기차여행인데다 마산은 청춘 시절을 보낸 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라 감회가 남달랐다.

그 곳은 그리운 벗들이 많이 사는 곳이기도 하지만,

39사에서 신병훈련도 받았고, 아들 햇님이가 태어난 곳이었다.

 

결핵성복막염 수술을 잘못받아 죽을 뻔 했던 일,

교사들이 대마초 피웠다는 헤드라인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아닌 사건에 엮여 잡혀가는 등 수난의 일도 많았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일은 부산에서 운영하던 음악실을

마산 오동동으로 옮겨 바람개비를 돌렸는데, 문을 열자말자 손님이 미어터졌다.

취미로 시작된 음악실도 돈이 될 수 있었는데, 돈 버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루를 마다하고 싸움판이 벌어 지는가하면,

깡패들이 난입해 음악실 통유리를 깨는 등, 폭력이 난무했다.

지방 텃새인지, 시샘인지는 모르겠으나, 부산과 마산의 수준 차이였다.

아마 내 얼굴을 장식한 수많은 주름살도 다 그 때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제목과는 달리 쓴 고배를 마시게 한 감격시대

마산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사진에 전념하게 만들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차창으로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세 시간 남짓 달려서야 창원역에 도착했는데, 창원의 김의권씨가 나와 주었다.

낙지비빔밥으로 식사를 해결한 후 경남도립미술관으로 향했다.

 

작년 3월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릴 때 보지 못한 전시를 창원까지 와서 보게 될 줄이야...

경남도립미술관은 코로나에 지친 도민을 위해 입장료도 받지 않았다.

 

자화상II-나를 보다전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글씨와 그림, 사진 등 독립운동을 위해 남긴 각계 기록을 예술적, 역사적 관점으로 풀며,

100년의 우리 역사를 서화로 돌아보는 전시였다.

 

예술로서의 독립 문제를 화두로 근현대 변혁기의 예술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예술의전당 전시와는 달리 영남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여

문 신, 하인두씨 등 지역 작가도 다수 포함시켰는데,

독립운동의 흐름과 맥을 끊는 잘 못된 시도라는 평가도 따랐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 앞에 치열하게 때로는 처연하게 살아 낸 인간의 의지가 작품으로 승화되고 있었다.

 

전시작품 중에 시선을 끄는 것은 구한말 초상화거장 석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였다.

 

고종 어진을 비롯하여 의병장 최치원 등 항일우국지사들의 초상이

동일 규격의 극세필기법으로 그려졌는데,  초상화 제작 자체가 독립운동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시를 관람한 후, 김종원 관장실에 안내되어서는 물고문을 받아야 했다.

녹차만 따라주었는데, 자판기커피 맛에 길든 나로서는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었다.

 

어디를 가나 지방 미술관장의 어려움은 지역작가와의 마찰이었다.

대개 지역 작가들 전시를 원하거나 지역화단의 단체전을 요구한단다.

기획 의도나 작품수준이 중요하다는 것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들인가?

 

관장실에서 나오니, 화가 전인경씨와 동생 전인미씨가 뒤늦게 도착했다.

다들 마산 창동으로 자리를 옮겨 화가 이강용씨 작업실에 들렸다.

 

화가가 그림 그릴 일 밖에 없겠지만, 오랜만에 가보니 많은 작품을 그려 놓았더라.

고인돌 형상의 오래된 작품들은 보았지만, 새로 그려진 작품도 많았다.

 

무채색의 산 능선 같은 미완의 작품도 눈에 띄었지만,

결정적인 작품은 84년도에 그린 오래된 작품이었다.

유령이 코로나로 환생했다면, 눈 어두운 자의 착각으로 여길까?

 

 나를 친형처럼 보살펴주는 이종호씨가 준비해 둔 선창가 어느 횟집에 갔더니,

이종호, 이종재, 이성배씨 등 이씨 문중의 세 사람이 나타났다.

 

너무 반가워 정신 없었는데, 준비된 음식도 여간 아니었다.

아이구야! 이걸 어찌 다 먹는단 말인가?

자연산 밖에 없다는 줄 돔이 줄줄이 자빠졌고, 갖가지 해산물은 맛보기였다.

 

특히 잊을 수 없는 맛은 마산 특산물 미더덕이었다.

다른 미더덕과 달리 조그마한데, 된장국의 미더덕을 터트려 먹던 어린 시절이 떠 올랐다.

 

그 날 처음 먹어 본 고추장양념에 무쳐놓은 미더덕 맛도 일품이었지만,

줄돔 구이는 둘이 먹다 한 놈 죽어도 모르겠더라.

 

딱딱하게 굽힌 줄돔 껍질이 얼마나 맛있는지, 혓바닥이 생 지랄을 떨었.

천한 입맛 수준을 한껏 높여놓아,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그 뿐 아니라 여인숙이나 찾는 촌놈을 호텔에 집어넣어, 날 샐까 두려웠다.

이튿날 복국으로 해장까지 했으니, 원도 한도 없이 먹은 셈이다

 

 종호씨! 고마워요.

이 원수를 살아생전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 조문호

 

 

 

 

 

마산의 이종호씨 자당 안복희씨가 지난 6월24일 노환으로 소천 하셨다.
효성이 지극한 이종호씨가 치매로 고생하시는 어머님 보살피느라 외출도 못하며 애 태웠는데,
애석하게도 운명하신 것이다. 그러나 구순을 훌쩍 넘긴 연세라 호상인 듯 여겨진다.

 

 

 



 

지난 25일 뜻밖의 부고를 받았는데, 먼 거리지만 마산으로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종호씨가 누구던가?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의리의 사나이가 아니던가.
생전에 자당을 한 번도 뵙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차례 들어왔다.

 

 

 



 

정영신씨와 함께 오후 여섯시경 마산의료원 장례식장에 도착했는데,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는지, 장대같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장례식장을 들어서니 문상객이 너무 많았다.

 

 

 

 

 
문상객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고, 식당에도 앉을 자리가 없었다.
조문객들이 보낸 조화는 입구에서 승강기까지 물결을 이루었다.
이종호씨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가족관계를 잘 몰랐으나 아들은 이종호씨 뿐이고 누님과 여동생이 다섯 분이나 계셨다.
많은 사위와 손주들이 문상객을 받고 있었는데, 문상객 중에 아는 사람은 김의권씨 뿐이었다. 

 

 

 

 



 

김의권씨는 삼년 만에 만났는데, 없는 살마저 빠져 마치 해골을 보는 것 같았다.
그동안 다리가 아파 꼼짝을 못하다 얼마 전 관절 수술을 받고 나 다닌다는 것이다.
정말, 안보면 보고 싶고, 보면 징그러운 친구다.

 

 

 



 

장례식장이 너무 붐비는데다,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성동 ‘이프’로 자리를 옮겨, 진토닉으로 피로를 풀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상주-
아들 : 이종호
딸 : 이정희, 이은숙, 이은정, 이진주, 이미선
사위 : 하판갑, 노태권, 한판열, 강기철, 김덕훈
손자 : 하진환, 노영한, 노규한, 강정한, 강정훈, 김 건, 김 범
손녀 : 하성림, 한정연, 노민주, 이지언, 강승현, 이정언

 

 

 

 

 

 

 

 

 

 

 

 

 

 

 

 

 

 

 

 

 

 

 

 

 

 

 

 

 

 

 

 

 

 

 

 

 

 

 

 

 

 

 

 








한꺼번에 반가운 연락이 왔다.
고향친구인 박영국씨와 청춘시절을 함께 보낸 창원의 김의권씨가 상경했단다.
약속 장소인 낙원동 ‘먹고 갈래 지고갈래’로 가보니, 무슨 술집이 낮 시간인데도, 북적거렸다.
대부분 노인 손님들이었는데, 노인들은 '새나라의 어린이'라 일찍 놀고 일찍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대낮부터 노래방에 가잖다.
귀가 막혔으나,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젊은 시절 사진에 미쳐 다 털어먹고 오 갈 때 없을 때, 친구 박영국씨가 운영하는

수도관 설비업체 일을 잠시 도운 적이 있었다.

인부들 관리하는 역할이었지만, 내가 더 열심히 해야 그들도 따라하는 것이었다.

요즘이야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지만, 그 당시는 곡갱이로 땅을 파야했다.

삼 개월 정도 일하다 그만 두었지만, 생전 처음 노동의 힘겨움을 맛 본 시절이었다.

그렇게 도움을 준 친구였지만, 오랜 세월 서로의 길을 걷다보니, 삶의 방식이 달랐다.

‘유목민’에서 김의권씨가 기다리고 있어, 먼저 일어나야 했다.

‘유목민’에 들렸더니 김의권씨 만나러 ‘디자인클럽’을 운영하는 최영문씨도 와 있었다.

이 친구도 수 십 년 만에 만났는데, 길에서 만나면 모르고 지나칠 만큼 변해버렸다.

흐르는 세월에 바뀌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

그 곳에서 공윤희, 김명성, 오세필, 장경호씨도  만날 수 있었다.

술 마시다 한 사람 두 사람 사라져  장경호씨와 ‘무다헌’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술이 취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다 결국 자정을 넘겨버렸다.
장경호씨가 차 잡아 준다며 따라 나와 택시비까지 챙겨 주었으나,

나 보다 갈 길이 더 먼 그는 어쩔지 걱정되었다.

남들처럼 적당히 마시고 일찍 일어나야 했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의 음유시인 송상욱선생께서 마련한 “반야월선생 추모가요제”가
지난 13일 오후4시부터 인사동 ‘무다헌’에서 열렸습니다.

이 날 행사장에는 반야월선생 유족을 비롯해 원로시인 김남조선생, 김영복, 김의권씨 등
30여명이 참석하여 ‘무다헌’의 좌석을 메웠습니다.
뒤늦게 온 김명성씨는 앉을 좌석마저 없었습니다.

‘무다헌’ 주모 강고운 시인의 사회와 징 울림으로 시작된 가요제에서
송상욱선생은 ‘반야월선생님’이란 제목의 헌정시를 낭송하였고, 추모 춤판도 벌어졌습니다.
송상욱선생께서는 ‘세세년년’을 비롯한 반야월선생의
주옥같은 노래 10여곡이 불러 참석한 분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답니다.

 

 

 

 

 

 

 

 

 

 

 

 

 

 

 



오랜만의 인사동 외출입니다.

지난 13일은 반야월선생 추모가요제와 최백호 ‘효교’ 모임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제법 가을분위기가 감도는 인사동의 오후는 몰려 온 관광객들로 붐볐고요.

이 날 부산시절에 만난 옛 친구들이 일찍부터 올라 와

‘아라아트’김명성씨, 무용가 안재은씨 내외와 어울렸습니다.

‘아라아트’에서 전시 작품들을 둘러보는 등 여기 저기 인사동을 돌아다녔습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제일 좋아하는 자식의 몸에 영혼이 옮겨 간다는 ‘효교’를 주장하는 가수 최백호씨의

두 번째 모임이 지난 13일 오후6시 인사동 '흑돈가'에서 있었습니다.

창원에서 올라 온 그라픽 디자이너 김의권씨를 비롯하여 건축가 임태종씨, 시인 김명성씨, 정치인 김철기씨, 은행원 정현석씨, 구로구청장 이성씨 내외와 진성학원 차동춘이사장, 사업가 이태규씨, 사진가 정영신씨, 화가 조경석씨, 정규순씨, 전인경씨, 큐레이트 전인미씨, 가수 김희진씨, 무용가 안재은, 강철봉씨 내외 등 한 스무명 쯤 모였어요.
나중에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미술평론가 유근오씨를 비롯하여 덕원당 스님, 김대웅씨 등 몇명이 더 합류하였습니다.

이날의 논지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이름을 버리고, 둘째 나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유로워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교주님께 여쭈었습니다.
“교주님 그러면 거시기도 버려야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교주님께서 갑자기 혼란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에 얼마나 웃었는지...
장장 다섯 시간 동안을 웃고 나니 나중에는 입이 아팠습니다.

“笑門萬福來”란 옛말처럼 많이 웃어야 건강하고 복이 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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