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7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나를 울린 한국전쟁 한 장면” 사진전이

지난 21일부터 26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된 한국전쟁 특별전은 20여 년 전 소설가 박도 선생께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을 여러 차례 방문해 발굴해 낸 사진이다.

 

어둠 속에서 잠자던 사진을 찾아와 여러 권의 사진집을 펴내

우리가 몰랐거나 잊었던 6.25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그 사진은 한국전쟁에 참여한 미국 종군사진가에 의해 기록된 사진이지만,

소설가 박도씨가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사료들이다.

 

우리는 긴 세월 동안 몇 되지 않는 국내 종군 기자들의 사진이나

정부에서 공개한 사진으로 전쟁을 바라보며 기억해야 했다.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아픔에 앞서, 정부에서 내 세운건 오로지 승전과 반공이었다.

 

6.25를 이념의 편향에서 벗어나 사실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빨갱이란 말을 노골적으로 내뱉는 현실에서 어쩌면 두려운 일일 수 밖에 없었다.

정전 70주년을 맞이했건만, 아직도 국민의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 마련된 6.25 특별전은 그동안 펴낸 사진집에서 골라낸 사진들이다.

나이 어린 북한 소년병이 미군에게 조사받는 장면에서부터

부역자로 몰려 죽임을 당한 비참한 장면 등 그날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는 장면들이다.

 

소설가 박도 선생은 발굴한 사진으로 사진집만 펴낸 것이 아니라, 소설 ‘전쟁과 사랑’도 펴낸 바 있다.

그 소설은 “사랑의 정동이 감동적으로 그려진 차원 높은 전쟁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쟁과 사랑 / 박도 장편소설 / 387면 / 눈빛출판사

지난 6월 21일 오후 5시에 개막된 한국전쟁 특별전에 박도 선생의 개막기념 강연이 있었다.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를 비롯하여 안미숙관장, 미술평론가 최석태, 사진가 정영신, 곽명우,

장병국, 박기서, 김성식, 이성호, 박정호씨 등 20여 명이 자리했다.

 

사진을 발굴해 온 과정에서부터 한 장의 사진에 영감받아 쓰게 된 소설

‘전쟁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 귀중한 사진전 개막식에 사진가가 세 사람밖에 참석치 않았다.

사진 만드는 사진작가는 차고 넘쳐도, 기록하는 사진가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다.

사진가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의 기억에서도 ‘한국전쟁’이 서서히 잊혀져 가는 현실이 더 슬펐다.

 

전쟁을 겪은 그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가셨다 치더라도,

그 후손이 동족상잔의 아픔을 잊거나 관심에서 멀어져 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사실, 그 자리에 참석한 분도 박도 선생이나 몇몇만 한국전쟁 직전 세대지, 대부분 전후세대였다.

 

나 역시 네 살 적 일이라 그 기억은 미미하지만,

육이오를 떠올리면 희미하지만 잊을 수 없는 가슴 떨리는 일이 있다.

 

북한군들이 고향인 경상남도 영산까지 밀고 내려왔을 때의 일이다.

낙동강 전투의 최후 보루인 내 고향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남산에는 유엔군이 진을 치고 북쪽 영축산에는 북한군들이 포진하여 혈전을 벌였다.

마을 사람들은 전장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한국전쟁2 / 768면 / 박도 엮음 / 가격29,000원 /눈빛출판사

전쟁 포화가 잠잠해질 즈음 나를 들쳐업은 어머니가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남산 아래 미나리꽝 뚝 길로 지나갈 무렵이었다.

피를 흘리고 쓰러진 군인이 물을 달라며 갑자기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잡았고,

옆에 있던 군인은 그냥 가라며 총부리로 위협했다.

 

한국전쟁1 / 768면 / 미해외참전용사협회 엮음 / 가격 29.000원 / 눈빛출판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두려움에 떨던 어머니의 받쳐 업은 두 손이 내 몸을 꽉 조였다.

간신히 군인의 손을 뿌리치긴 했지만, 혹시 뒤에서 총을 쏠까 등에 업힌 나를 가슴에 안고 뛰었는데,

어머니의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글: 김원일외 3명, 사진편집: 박도 / 가격18,000원 / 눈빛출판사

그때 느낀 어머니의 거친 숨결과 전율감은 숱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한데,

이것이 내 기억에 남은 유일한 한국전쟁의 잔상이다.

 

정전 70주년 육이오 맞아, 인사동에 사진전 보러가자.

여의치 않다면 책이라도 구해보자.

누가 말했는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페이스북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DESIGNERSPARTY’에서 올리는 우리나라의 오래된 기록사진 때문이다.

 

난생처음 보는 희귀 사진을 어떤 통로로 구하는지는 모르나,

대개 외국 종군기자나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이었다.

더러 찍은 자가 밝혀지지 않은 사진도 많았다.

 

어제 올라온 일련의 사진들은 전쟁을 겪는 고단한 삶의 장면이 많았다.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모습에서는 차마 눈을 떼지 못하겠더라.

 

그래서 어린이 사진 몇 장과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는 전쟁 사진 몇 장을

‘DESIGNERSPARTY’에서 스크랩하여 색 농도와 크기만 조절했다.

공교롭게도 골라낸 사진 모두가 찍은 사진가가 밝혀지지 않았다.

 

기록된 바로는 50년에서 53년 사이의 한국전쟁 때 사진으로

부산의 부암동이나 감만동에서 찍은 것으로 적혀있었다.

 

여태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넝마주이 사진은 본 적 있으나,

미군들이 버린 음식쓰레기를 줍는 어린이들 모습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땟국물이 베여 새까만 옷을 입은 순박한 모습에 코끝이 찡했다.

 

당시 국내에선 컬러필름이 보급되지 않아 흑백필름만 사용하던 시절인데,

외국인들이 찍은 컬러사진은 생생한 현장감을 더했다.

두 소년이 꺾어 든 진달래꽃이나 소녀들이 입은 치마저고리 색깔이 너무 예뻤다.

 

그 어린이들이 지금은 70대 후반이나 80대 초반쯤 되었을 텐데,

내게는 몇 살 많은 형님이나 누나뻘 되는 연배다.

더러 돌아가신 분도 계시겠지만, 노인이 된 당사자가 본다면 그 감회가 어떻겠나?

 

비정한 야만의 시대라 그때를 잊고 사는지 모르지만,

한국전쟁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비극이고,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악몽이다.

더 슬픈 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데 있다.

 

다시 전쟁이 터진다면 죽음과 멸망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들이 겪어야 할 비참함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이 순간에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다.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구호의 손길을 보내자.

 

/ 조문호

 

 

한국전쟁 때 연합군이 북한군에게 뿌린 삐라 원본을 처음으로 구경했다.

삐라는 영어 bill(광고지, 전단)의 일본식 발음을 삐라라 말했다는데,

듣기 싫은 일본식 발음이 마음에 걸려도 이보다 직감적인 말은 없겠다싶다.

전단, 찌라시 등 여러 가지 말들이 있지만, 우리말의 ‘뿌린다’는 느낌과

쌍비읍의 쌍스러운 어감이 전쟁 통의 심리전과 잘 맞아 떨어진 것 같았다.

 

오래전 김명성씨 사무실에서 독립운동과 관련된 오래된 서책들을 촬영할 때,

‘안전보장 증명서’라는 생전 처음 보는 삐라를 보게 된 것이다.

그것은 한국전쟁 통에 유엔군을 이끈 미군이 인민군에게 살포한 삐라였다.

붉은 글로 ‘안전보장 증명서’라 쓴 전단에는 ‘살랴면 지금 넘어오시오“라는

유치찬란한 협박에 가까운 문구가 적혀있었다.

 

또 다른 삐라에는 붉은 마수에 속아 숨진 두 인민군장교의 죽음을 알리며

‘살아서 돌아오라’는 긴 편지 형식의 내용을 담은 삐라 였다.

 

이게 탈북단체 박상익이가 북한에 보내 말썽을 일으킨 삐라 원조가 아니던가?

7월27일자 ‘뉴스타파’에 “끝나지 않은 전쟁-삐라 심리전”이란 기사가 실렸다.

“적을 삐라로 파묻어라!” 한국전쟁 때 미 육군부장관 프랭크 페이스가 한 말이라고 한다.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한국전쟁 3년 동안 최소 25억 장에서 최대 40억 장의 삐라를 뿌렸다고 한다.

 

북한 공산당 지도부를 괴물로 그려 체제 불신을 유도한 미군 삐라 [사진 스크랩/ 뉴스타파]

 

 

당시 미군들은 B-29 등 대형 폭격기로 전단을 담은 포탄을 투하하는 방식과

소형 항공기를 이용하여 손으로 뿌리는 방식, 그리고 105밀리 곡사포와 박격포 포탄에

삐라를 채워 지상 포격을 하는 방식 등으로 뿌렸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일본 도쿄 인근 비행장에서 극동사령부 심리전 부대원들이 B-29 폭격기에 탑재할 포탄 안에 전단지를 넣고 있다.

500파운드 폭탄 탄피 하나에 22500장의 삐라가 들어갔다. 미군이 뿌린 삐라 유형은 투항권고, 안전보장, 향수자극,

전의상실 유도, 공산당 및 체제 비판, 북한지도부 비판 등으로 분류된다. [사진 스크랩/ 뉴스타파]

 

 

전협정 67년이 지난 지금까지 끝나지 않은 전쟁이 바로 ‘삐라 심리전’이란다.

지난 6월 4일 북한 김여정 부부장이 “반공화국 삐라를 우리 측 지역으로 날려 보내는 악의에 찬

행위들이 방치된다면 남조선 당국은 머지않아 최악의 국면까지 내다보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말한 지 보름 남짓 만에 개성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빌미도 결국 삐라 때문이 아니던가?

 

탈북자 단체가 접경지역에서 대북 전단 풍선을 날리고 있다. [사진 스크랩/ 뉴스타파]

 

 

2000년대 들어서면서 탈북자단체들이 주도하는 대북 전단 살포 행위가 시작되었는데,

10년 동안 날려 보낸 대북 전단이 무려 2천만 장에 이른다고 한다.

여기에도 미국의 지원이 따랐다니, 삐라의 주범은 바로 미국이 아닌가 싶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살포한 삐라. 8.15 전 일제강점기 일제 장교로 복무한 리종찬, 백선엽, 김석원이

해방 후엔 미국 앞잡이가 됐다고 풍자하고 있다. 이들의 창씨개명도 적어놓았다. [사진 스크랩/ 뉴스타파]

 

 

‘종이폭탄’이라 불리던 삐라 살포 심리전은 이제 한 물 갔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그만 끝내라.

 

글 / 조문호

6.25 전쟁 70년에 펼친 사진집 "끝나지 않은 전쟁 6.25"

 

[스크랩] 오마이뉴스 / 박 도 / 20. 6. 24

 

남진하는 인민군 (1950.6)

 

6,25전쟁 70년

 

낙동강변의 시신(1950년 9월).

 

2020년 올해는 6.25전쟁이 일어난 지 꼭 70년 되는 해다.

그 전쟁을 체험한 세대는 이미 대부분 세상을 떠났거나, 아니면 고령이다.

그때를 생생히 증언할 분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나는 6.25전쟁을 체험한 마지막 세대다.

또한 나는 6.25전쟁 사진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과 맥아더기념관 등지에서

수천 장의 사진을 수집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때의 이야기를 이 기사에 남기고자 한다.

1950년 내가 여섯 살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내 고향 구미는 6.25전쟁 초기 최대 격전지였던 낙동강 다부동전투의 배후지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전황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시민들은 인민군 진주 직전

혹은 주둔 이후에야 피란을 떠났다.

우리 가족은 구미 북녘 김천 쪽에서 '쿵쿵' 대포소리와 '뚜뚜뚜' 따발총소리

그리고 고약한 화약 냄새를 맡으면서 피란봇짐을 쌌다.

남자들은 가재도구를 담은 피란봇짐을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인 채 종종걸음으로 무작정 남쪽으로 떠났다.

뙤약볕 속에 애써 낙동강 나루까지 갔지만 그곳에 이미 진주한 인민군들이 호통을 쳤다.

"남조선 인민들, 미제 쌕쌕이(폭격기)한테 불벼락을 만나기 전에 날래 살던 곳으로 돌아 가라우."

 

기총소사로 들길에 나딩굴고 있는 피난민 시신들 (1950.8.25)

 

우리 가족은 하는 수 없이 낙동강을 코앞에 두고 발길을 돌렸다.

우리 가족이 살던 마을로 돌아오다가 구미 광평동 사과밭을 지날 무렵,

미 공군 F-84 세이브제트기(일명 '쌕쌕이') 공습(기총소사)을 정면으로 받았다.

그러자 우리 가족들은 가재도구를 모두 팽개친 채 과수원으로 달려갔다.

남자어른들은 사과나무에 올라 매미처럼 나무둥치를 껴안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사과나무 그루터기 사이의 땅콩밭에 납작 엎드렸다.

그때 나는 여섯 살 어린이로 미군 전투기의 무서움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그 전투기가 떨어뜨리는 폭탄과 내뿜는 기총소사 순간을 보려고

땅콩밭에서 일어났다가 할머니께 뒤통수를 된통 쥐어 박혔다.

한 30분 정도의 쌕쌕이 공습이 끝나자 여기저기 피란민 시신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과수원에 숨어 다행히 무사했다.

 

광복4주년 기념식을 준비중인 한국군최고지휘관들 신성모 국방장관, 손원일 해군제독,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리우 자유중국 사절단장, 신태영 장군 등이 보인다. (1949.8,15)

 

지천으로 흩어져 있던 시신 더미들

 

그해 가을 피란에서 돌아오자 동네사람들 상당수가 보이지 않았다. 전쟁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사람 중에는 팔이나 다리를 잃은 사람도 있었다.

그때 숱한 젊은이들이 입대했지만 상자 속 하얀 유골로 돌아왔다.

그때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씀했다.

"네가 군대에 갈 때는 38선은 없어지고 통일이 될 거다."

하지만 그 손자가 군에서 전역한 지 벌써 50년이 지났다.

이즈음에는 내 손자뻘 젊은이들이 38선 대신에 6.25전쟁 이후 새로 생겨난 휴전선을 사이 둔 채

동족끼리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아직도.

마침 6.25전쟁 70돌을 맞아 사진전문 눈빛출판사에서 <끝나지 않은 전쟁 6.25>이라는

사진집을 펴냈다. 이 사진집을 펼치자 70년 전 6.25전쟁의 참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표지

이규상 (엮은이) / 눈빛아카이브 / 432면 / 칼러 양장 / 3만8000원

 

미군과 소련군이 서울과 평양에 진주하는 모습, 탱크를 앞세우고 거침없이 남하하는 인민군 모습,

산길 들길 아무데나 지천으로 흩어져 있던 시체더미들,

쌕쌕이(전투기)들이 염소 똥처럼 마구 쏟아 떨어뜨리는 장면,

포화에 쫓겨 가재도구를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피란민 행렬,

흥남부두에서 후퇴 수송선에 오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

굶주린 채 죽음의 행렬을 하는 국민방위군 모습, 학살된 양민을 젓갈 담듯 매장하는 장면...


나는 눈물어린 눈으로 이 사진집을 봤다.

그때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하늘에서는 전투기의 굉음과 폭격소리로,

산과 들에서는 멀리서 가까이서 들려오는 대포소리와 기관총소리,

논이나 밭 그리고 들길 도처에 누에처럼 널브러진 시신들,

전투기들의 융단 폭격으로 온전한 건물 하나 없이 온통 폭삭 주저앉은 도시와 마을...

그리고 탱크 캐더필러(바퀴)가 돌진해 오는 소리들이 쟁쟁하게 들려왔다.

사진 한 장은 백 마디 웅변보다도 더 강하게 진실을 말해준다.

아무리 기억력이 비상해도 사진 이미지를 뛰어넘을 수 없다.

 

57미리 무반동총, M1소총으로 전투하는 유엔군

 

새삼 돌이켜보는 인간의 무지함

 

불나방은 제 무리가 불에 타죽는 것을 빤히 보고도 자신은 예외라고 여기고

불에 뛰어들다 끝내 타죽고 만다.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떤가? 전임 대통령이 무리한 장기 집권 끝에 비극적인 최후를 당한 것을 보고도

자기만은 예외라고 같은 길을 거듭하다가 똑같은 최후를 맞았다.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건 역사에 대한 각성과 배움이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일수록 역사를 아끼고, 사랑하며, 올곧게 기록해 쌓아가고 있다.

한 역사학자(김성식)는 <내가 본 서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국 사람은 역사를 아끼며, 프랑스 사람은 역사를 감상하고, 미국 사람은 역사를 쌓아간다."


서구인들은 사소한 것이라도 역사가 있으면 이를 아끼고 그대로 보존하며

원형을 손상치 않고자 심지어 건물의 먼지를 닦는 것도 주저한다.

그들은 조상의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있는 바른 역사를 일깨워주고자 그대로 보존한다.

이는 역사를 모르는 이들은 하등동물처럼 거듭 시행착오를 거듭 하거나

역사의 시계 침을 되돌려 놓기 때문이다.

 

흥남부두에서 유엔군 수송선을 기다리는 젊은 부부(1950년 12월)

 

분단의 서막 그리고 죽음의 행렬

 

그럼, 6.25 70주년을 맞아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끝나지 않은 전쟁 6.25> 사진집 일부를 소개한다.

①미군 소련군 서울 평양 진주 : 이 장면은 우리나라 분단의 시작이요, 6.25전쟁의 출발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소련은 서로 손을 잡은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세계대전에서 승전 이후 두 나라는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그 최전선이 한반도 38선이었다.

그래서 38선은 화약고로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었다.

 

평양에 진주하는 소련군 (1945.8)

 

서울에 진주하는 미군 (1945.9)

 

②죽음의 행진 국민방위군 행렬 : 6.25전쟁 중,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현역군인과 경찰, 학생을 제외한 17세부터 40세까지 청장년 50만 명으로 국민방위군을 조직했다.

이들을 남으로 후퇴시키면서 그들에게 돌아갈 피복 값과 급식비를 군 고위층이 착복했다.

그래서 징집된 국민방위군 상당수는 얼어죽거나 굶어죽었다. 그들의 죽음 행렬이다.

 

후퇴하는 국민방위군 행렬

 

③장진호 작전 중 동사한 미 해병대 : 1950년 미 해병대의 장진호 전투는 적을 형편없이 깔보고

기후도 산악 지형도, 곧 전쟁의 기본인 천문과 지리도 무시한 무모한 졸전이었다.

적진 깊숙이 진출했던 미 해병대는 중국군과 추위를 맞닥뜨리자 속수무책으로 후퇴했다.

그 과정에서 숱한 동사자가 발생했다. 그들은 '추위가 적군보다 무섭다'는 말을 남긴 채

총 한 발 쏘지 못하고 그대로 동사했다. 그래서 미군은 아직도 그런 트라우마가 남아 있을 것이다.

 

장진호 전투중 동사한 미해병대 시신들

 

④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 1953년 정전이 됐지만 아직도 휴전상태로

한반도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판문점 정전 회담장 (1965)

 

사진집 <끝나지 않은 전쟁 6.25>은 모두 432쪽, 300여 장의 사진으로 

6.25전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6.25전쟁 당시 종군기자들이 남긴 사진이 많다. 

하지만 그 사진들을 '어떤 맥락에서 보여주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이 사진들을 정리 편찬한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의 안목에 경의를 표한다.

 

전선 시찰 중 유엔군 소속 기자와 인터뷰하는 이승만 대통령(1950년 9월 9일)

 

나는 감히 이 사진집을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들에게 물려줘야 할 

'6.25전쟁 비망록 및 징비록'이라고 감히 말씀 드린다. 

이 사진집은 우리 겨레가 길이 보존해야 할 사료가 되리라 믿는다. 

전쟁을 예방하고 대비하는 자만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남한 주민들이 인민군 탱크를 환영하고 있다(1950년 7월)

 

끝나지 않은 전쟁 6.25

이규상 (엮은이) / 눈빛아카이브 / 432면 / 칼러 양장 / 3만8000원

 

 

 

퓰리처상은 미국의 신문 저널리즘, 문학적 업적과 음악적 구성에서 가장 높은 기여자에게 주는 상으로

매년 언론분야의 8개 부문에서 최상의 수상자를 선정하여 상금을 지급한다.
신문왕 조지프 퓰리처가 기증한 50만 달러의 기금으로 제정된 이 상은 높은 권위로 1917년 이래 매년 시상되었다.




권위와 신뢰도가 높아 '기자들의 노벨상' 이라 불리는 이 퓰리처상은 언론인들에게는 최고의 영광과도 같다.

그 중 특종사진 부문에 수상한 우리 기억에 생생하게 남은 문제작 몇 점을 골라 사진의 의미를 되세겨 본다.












































[퓰리처상 사진대전 작품집에서 스크랩]

100세 맞은 美 종군사진작가의 한국전쟁 현장


 라이카 카메라를 멘 데이비드 던컨


부상한 미 해병을 총대 들것으로 옮기는 한국 농부들


 올해 100세가 된 20세기 대표 전쟁사진작가 데이비드 던컨이 포착한 한국전쟁 중 미국 해병의 악전고투 장면들이 재조명 됐다. 그가 한국전에서 미국 해병들과 함께 전쟁 모습을 담아 1951년 출간한 'This is war!(이것은 전쟁이다!)' 사진집에서는 아군 탄약이 거의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후 공포를 느끼고 숙고하는 해병 중대장의 모습, 머리가 사라진 적군 시체와 처음 마주친 병사가 두려움 없는 듯 시체를 건너 뛰는 모습 등이 생생하다.



부산방어전에서 적군 시신을 뛰어넘는 미국 해병들


부산방어전에서 동료 사망 소식에 슬퍼하는 미 해병


서울수복작전 때 피신하는 민간인들


장진호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트럭에 싣고가는 미 해병


장진호 전투에서 후퇴하며 '악몽의 계곡'을 건너는 미 해병


스크랩 / 연합뉴스

 

 

 

이 사진은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사진집 ‘한국전쟁2’ 에 수록된 사진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1951년 3월1일 미국 종군기자에 의해 전주에서 포착된 사진이다.
손자와 함께 피난길에 나선 노부부의 모습을 촬영하였는데, 할아버지는 양식이 든 가마니와 이불을 짊어진 채, 발길을 멈춘 손자를 추스르고 있고, 할머니는 실의에 빠진 모습으로 양동이와 바가지 등의 부엌살림을 갖고 뒤따르고 있다. 아마 군대에 징용되었을 것 같은 자식의 안위도 걱정스럽지만, 어디까지 언제까지 이 고난의 피난살이를 해야 할지 모르는 암울했던 시기의 상흔이 강하게 전달된다.




이 가족들은 달구지라도 있어 장작에다 귀여운 손녀까지 태웠다.

아래사진은 서울 수복 후의 장면인데, 서대문으로 보이는 곳에서 임시 시장이 열리고 있다.

두 사진 모두 임응식선생의 사진으로 1950년과 1951년에 촬영한 사진이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발행한 '한국현대사진 60년'에 수록된 사진이다.







[2013년 12월 28일 작성]

차라리 한 폭의 그림이었더라면...

 

죽을 구덩이를 파기 전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옆에 서서 웃고 있는 군인의 가증스런 모습에 더 분노를 느낀다.

 

자신이 판 구덩이에 들어가 억울하게 죽어가는 부역자들

 

 

얼마 전  부역자들의 참혹한 학살 장면들이 담긴 눈빛출판사의 ‘한국전쟁’을 보며 그 끔찍함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물며 짐승이라도 그렇게 죽일 수는 없을텐데, 어쩌면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수 있었는지 전쟁의 잔혹성에 온 몸을 떨어야 했다. 부역자들을 일렬로 기둥에 묶어 총살하는 장면은 더러 접한 적이 있으나 쉽게 사체들을 처리하기 위해 나란히 눕혀 총살하거나 그도 못해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한 다음, 한 곳에 몰아넣어 총살하는 것은 상상도 못한 장면이었다. 더욱이 부역자란 죄목으로 억울하게 죽어 간 양민들에 대한 어떤 보상이나 명예회복도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고 슬펐다. 그리고 더 부끄러운 것은 이 책들이 세상에 빛을 본지가 어언 10여년이 되었는데도 여지껏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소설가 박 도씨가 미국립문서기록보관청을  드나들며 발굴한 사진으로 “지울 수 없는 이미지”3권을 출판하였고, 2010년에는 ‘한국전쟁’이란 제호로 개정판을 냈는데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이 숨어있는 전쟁사진들을 세상에 끌어 낸 박 도선생의 끈질긴 집념이나 눈빛출판사의 노력에 새삼 고마움과 경의를 표한다.

 

 나에게도 한국전쟁하면 희미하지만 잊을 수 없는 가슴 떨리는 일이 있었다. 북한군이 나의 고향인 영산까지 밀고 내려왔을 때의 일이다. 낙동강전투의 최후 보루인 내 고향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한 복판이 되어 버렸다. 남산에는 유엔군들이 진을 치고 북쪽에 있는 영축산에는 북한군들이 포진하여 서로 포격을 해대니 온 마을이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며칠후 전쟁 포화가 잠잠해 질 즈음 어머니는 나를 업고 총총걸음으로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유엔군들이 진을 친 남산아래 미나리꽝 뚝 길로 지나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피를 흘리고 쓰러진 군인이 “물, 물, 물!”이라 부르짖으며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잡았고, 옆에 선 군인은 그냥 가라며 총부리로 위협하였다. 곳 곳에 널려있는 시체들과 부상병들의 참혹한 모습은 숱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한데, 혹시 '한국전쟁'사진집에 그 때의 기록도 있을까 하여 살펴보기도 했다. 

 

오랜기간 신문과 TV는 물론, 사진하는 사람으로서 사진잡지 한 권 사 보지 않으며 살아왔다. 그러니 세상물정도 어둡고, 사진판 돌아가는 것도 잘 모른다. 얼마 전에는 핸드폰마저 내버려 가까운 사람들의 연락마저 불편하게 만들었는데, 아날로그로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달 전 불의의 사고를 당해 가족에게조차 연락할 수 없었던 일이 생긴 후로 아내의 강압으로 다시 휴대폰을 개통하게 되었고, ‘눈빛서원전’의 충격으로 사진잡지도 한 권 쯤은 구독할 작정이다.

 

‘사진위주 갤러리 류가헌’에서 있었던 ‘눈빛서원전’은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임을 확인시켜 준 전시였다. ‘한국전쟁’을 위시하여 청계천변 판자촌들을 기록한 ‘노무라 리포트’, ‘일제강점기’, ‘신동삼 컬렉션’, 등 보석 같이 귀중한 사진집들이 수두룩하건만 전혀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전시를 시작한 첫 날은 지방촬영으로 너무 늦게 참석하여 책들을 볼 시간이 없었고, 두 번째 초대한 날은 오랜만에 만난 사우들과 이야기 나누느라 볼 기회를 놓쳤다. 그래서 전시가 끝나기 전 날 다시 들려 전시된 책들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좋은 사진집들이 너무 많아 무슨 책부터 살지 망설이기도 했으나, 일단은 눈빛의 엄청난 업적에 놀랐다.

 

 전시된 사진집들을 고르고 고르다 눈빛 아카이브에서 몇 권 골라왔는데, 그 사진들을 반복해서 보느라 주말을 온전히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데 소진해야 했다. 하지만 나에게 교훈과 채찍이 되어 준 보람된 시간이었다.

 



-눈빛 도서전에서 구입했던 사진집들-

다음 기회에 구입하고 싶은 책은 '일제강점기', '개화기의 대한제국', '신동삼 컬렉션'등이다.




-미 해외참전용사협회에서 엮은 맥아더.클라크.리지웨이 보고서-

[총768면 / 가격 29.000원]

 

-'한국전쟁1'에 실린 수 많은 사진 중의 한 장-

 

진주 주민들이 북한군이 학살한 가족의 시신을 찾고 있다.

당시 무고한 사람 수 백명이 퇴각하던 공산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 당했다.

 

 

 

 박도씨가 '미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서 찾아 내 출판한 '지울 수 없는 이미지'1-3권을 모은 사진집이다.

[총768면 / 가격 29.000원]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억울하게 죽어 간 양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이 사진들을 발굴한 소설가 박 도씨는 이 책 외에도 '지울 수 없는 이미지','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개화기 대한제국','일제강점기',

등을 눈빛출판사에서 출판하였고, 지금은 '미군정기'를 집필 중이며 앞으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계속해서 펴 낼 것이라고 한다.

 

부역자들의 시신을 일일이 점검하면서 확인사살하는 헌병들

 

 

-목사이자 사회운동가인 '노무라 모토유키가 68년부터 3년동안 청계천변 움막집들을 기록한 사진집-

[총528면 / 가격 29,000원]

 

이 사진집을 보며 놀란 것은 움막집에서 살아가는 빈민들의 생활상을 한국인도 아닌 일본인이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 무렵의 청계천사진으로 구와바라 시세이, 홍순태 선생께서 기록한 청계3가에서 6가 사이의 판자집들은 보았으나,

답십리 마장동, 사근동, 용답동에 걸쳐 널려 있었던 움막집들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사진가도 아닌 일본인 목사 노무라 모토유키가 73년부터 76년까지 기록해 두어 그 실상을 알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사진가들은 그 당시 무엇을 찍고 있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사진가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울 뿐이다.

 

청계천변 개미촌 움막집 소녀가 카메라를 쳐다보며 웃고 있다.

 

개미촌 움막집의 사람들 / 청계천변 제방을 파고 판재를 얼기설기 엮어 지어진

이 움막촌은 판자촌보다 주거환경이 더 열악해 일명 '개미촌'으로 불렀다.

1976년 판자촌 철거와 함께 정비되어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서울 변두리나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

 

 

1967년부터 79년까지, 제3공화국의 유신시절의 보도사진들을 집대성한 사진집이다.

[총500면 / 가격 29,000원]

 

한국사진기자협회에서 매년 발행해 온 보도사진년감이 정선의 우리집 서재에 모두 꽂혀 있지만,  

그 많은 책들을 뒤져 필요한 자료 찾기도 쉽지 않고, 분량이 너무 많아 쉽게 손이 가지 않기에 구입했다. .

13년 동안의 중요한 기록들만 집대성하여 한 권으로 묶은 이 책은 살아가는데 반면교사가 될만한 중요한 사진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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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파동의 소용돌이가 학원으로 번져 동국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쳐 나왔다.

500여명이 교문 밖으로 나오다 기동경찰대의 제지와 헬리곱터의 권유로 일단 해산됐으나

일부는 장충단공원 쪽으로 빠져 투석전을 벌이다 완전포위되어 포로아닌 포로가 되었다. [이창성기자]

 

겨울마다 찾아오는 연탄전쟁은 서민들의 생활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눈이 오는 추운 날 서민들이 리어카로 연탄을 실어 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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