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천상병예술제 4월25일~5월3일 의정부예술의전당에서

 

 

우리시대 대표적 순수 시인이자 ‘문단의 마지막 기인’으로 불리던 고 천상병 시인(1930~1993)의 작가정신을 계승하고 예술세계를 공유하는 <천상병예술제>가 4월25일부터 5월3일까지 시인의 예술혼이 깃든 의정부에서 개최된다.

 

올해로 12회를 맞는 천상병예술제는 의정부예술의전당(사장 박형식)이 주최하고 사단법인 천상병시인기념사업회(이사장 김명성)가 주관한다.

 

이번 예술제는 <천상으로 보내는 소망 편지> <책 놀이터> <제3회 천상문학산책> <제4회 천상병시낭송대회> <추모22주기 천상묘제 ‘봄 소풍’> <제12회 천상백일장> <제17회 천상병 詩상 시상식> <시가 흐르는 천상음악회> <시사랑 동요콘서트> <문학콘서트>를 비롯하여 지난해 첫 선을 보인 <천상음악살롱(문학다방)>과 <모과나무심기>를 정례화했다.

 

또한 <시화전 및 유품전>(4.25~5.3)을 통해 의정부지역 예술단체들의 참여를 도모하여 시민들에게 친숙한 문학예술제로 한 단계 더 발돋움하고 있다.(참여단체: 천목문화사랑방, 의정부문인협회, 문화살롱 공, 촉각나누미, 극단즐거운사람들, 화소회, 도예공방 ‘흙사랑’ 인사동사람들, 창예헌 등)

 

특히 문학다방<천상음악살롱>(4.25~5.3 11시~18시)은 천상병 시인의 유품인 클래식 레코드를 소재로 문학과 음악을 통해 시민들과 함께 시인의 일상과 문화를 분위기 있는 음악살롱 형식으로 진행한다.

 

<모과나무심기>에서는 시민들이 시인과 목순옥 여사를 상징하는 모과나무를 심으며 추억을 함께 만들고 천상병소풍길 천상쉼터 ‘소호’에서 도시락을 나누며 서로 돈독해지는 시간을 갖는다.(오전 11시 천상문학산책→12시 도시락나누기, 오후 1시 모과나무심기→2시 천상병소풍길(의정부세무서 뒤), 출발지는 의정부예술의전당 전시장-문학다방)

 

 

25일(토) 오후1시, 의정부예술의전당 야외광장에서는 천상병 시인의 작가 정신을 기리고 문학의 진흥과 저변확대를 도모하고자 <제12회 천상백일장>을 개최하며, 사전접수를 통해 산문과 운문부문을 학생부와 일반부로 나누어 진행한다.

대상 수상자에게는 작년에 이어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이 주어져 백일장의 권위와 명성을 한층 격상시킨 가운데 문학에 관심 있는 전국단위 참가자들의 참여와 작품에 대한 기대를 높이고 있다.

오후 4시에는 17년째 천상병 시 정신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천상병 詩상 시상식>이 의정부예술의전당 국제회의장에서 진행되며, 올해의 수상자로는 시집 『비의 목록』(창비 2014)의 김희업 시인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시상자 : 정호승(시인/천상병시상운영위원회위원장), 심사평 : 고영직(문학평론가), 사회 : 김해연 아나운서(시낭송))

천상병예술제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이자 매회 새로운 아티스트들의 참여로 감동을 선사하는 <詩가 흐르는 천상음악회>는 올해 "시가 흐르는 부드러운 선율들로 이루어진 하모니"란 내용으로 천상병 시인의 생전모습과 그의 시세계를 담은 영상과 함께 담앗다.

국악인 박애리와 “별이 진다네”의 여행스케치, 의정부시립합창단, 뮤지컬 배우 홍금단과 이정철 등이 출연하는 뮤지컬 “귀천 갈라쇼” 등 아나운서이자 시인이기도한 이상협과 김해연 아나운서의 사회로 시와 음악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무대를 선사한다.

특히 올해는 정호승 시인과 정옥희 시인이 시를 낭송해 도시생활에 지친 이들에게 위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 할 예정이다.

무욕(無慾)과 순진무구(純眞無垢)함을 시에 담아낸 우리 시대 대표적 문화예술인 故천상병 시인의 삶과 예술세계를 기리며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 문학제로 발돋움하고 있는 천상병예술제!

오는 25일 기념콘서트를 시작으로 의정부예술의 전당 일대에서 다양하고 특색 있는 프로그램으로 문학과 예술의 만남을 시작한다.


 

▲ 2006년 인사동 카페 귀천에서 만난 목순옥 여사 / 사진=최상진 기자

 

[미디어펜=최상진 기자]

벌써 10년 전 이야기다. 대학시절 한 언론사에서 인턴기자로 갓 언론사에 발을 디딜 때 ‘현장에서 기사를 만들어 오라’는 데스크 지시로 생전 한번 가본적 없는 인사동에 혼자 떨어졌다. 모바일 인터넷도 변변치 않던 시절이라 PC방에서 인터넷으로 ‘인사동’을 검색하던 중 흥미로운 곳을 찾았다. 천상병 시인의 아내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던 카페 귀천이었다.

귀천은 인사동 중심가에서 흔치 않았던 신식건물, 밖이 잘 보이지 않는 1층 한 구석에 있었다. 테이블은 고작 4~5개에 불과했다. 손님은 고작 한 팀이었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손님들은 ‘천상병 시인 사모님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차를 내오던 목순옥 여사와 눈이 마주쳤다. “기자입니다”라는 얼떨떨한 소개에 특유의 포근한 미소를 건넸다.

 

천상병의 시와 목여사의 사랑과 동백림 사건의 뒷 이야기 등 물어볼 것은 많았다. 그러나 고작해봐야 ‘귀천’과 인터넷에서 급히 검색한 수박 겉핥기식 지식만 가진 갓 스무살이 넘은 청년은 쉽사리 이야기에 접근하지 못했다. 인터뷰를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바뀌는건 순식간이었다. 결국 물 흐르듯 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카페에 전화 한 통이 왔다. 5분쯤 흘렀을 때 목여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10분쯤 흘렀을 때 그녀는 “감사하다. 다음에 꼭 한번 찾아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서해교전에 전사한 병사 아버지네요. 아들이 수양록 앞장에 ‘귀천’을 적어놨는데 다시 돌려보다 생각이 나 전화하셨대요”라며 “귀천이라는 시가 아직도 참 많은 사람들한테 힘이 되고 있나봐요”라고 웃어보였다. 눈앞에 있는 그녀가 수녀로 보였다.

 

회사로 돌아오는길 문득 ‘교과서에 실린 귀천을 본적 있느냐’는 질문에 “출판사 연락은 받았는데 본 적은 없다”는 목여사의 대답이 떠올랐다. 퇴근길 광화문 교보문고를 뒤져 교과서를 사다가 앞장에 “제대로 된 기자가 되면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퇴근길 다시 카페를 찾아 교과서를 선물했다. 그녀는 뛸 듯이 좋아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났을까, 동백림사건의 피해자인 ‘이응노·윤이상·천상병 추모 문화제’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목여사는 두 손을 잡으며 “금방 이렇게 다시 만났네요”라고 말했다. 손님이 많아 길게 인사는 하지 못했다. 그저 “다음엔 공부를 많이 해서 찾아갈게요”라고 말하고 헤어졌다. 그게 마지막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2010년 군대에서 한창 더위와 씨름하던 시절, 인터넷을 통해 목여사가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슬프기보다는 서운했다. 아직 그녀와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많았다. 직업기자가 되면 반드시 찾아가겠다고 다짐했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는 없었는지 서운했다.


 

 

▲ 2006년 인사동 카페 귀천 / 사진=최상진 기자

 

 

 

그래서였을까 직업기자가 된 이후 인사동을 한번도 찾지 않았다. 인사동 부근으로 회사를 옮긴 올해서야 그때 귀천이 있던 자리를 찾았다. 이미 카페는 사라진지 오래된 것으로 보였다. 날씨는 추운데 그녀가 직접 담갔다는 모과차가 그리운데 정작 그녀는 없었다.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회사로 돌아오던 길 우연치 않게 수운회관에서 천상병 시인의 시화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죄인이 된 것 같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았다. 몇 시간을 고민한 끝에서야 무거워진 발걸음을 한발 한발 옮길 수 있었다.

 

경운동 수운회관 13층, 조심스럽게 찾은 유카리 화랑은 조그마했다. 과거 목여사의 찻집과 비교해도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창문으로 스미는 햇살이 천상병 시인의 웃음에 미치자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 했다다. 10년 전 목 여사가 건넸던 모과차의 향기처럼.

 

전시 관계자는 “‘천상병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하며 23명의 미술작가 5명의 사진작가가 힘을 모아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며 “전시회 기간도 당초 6일까지에서 17일까지 연장할 예정이다. 많이 찾아주셨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돌아오는 길, 시인 천상병과 평생 그를 보듬은 목순옥이 걸었을 인사동 거리를 오랜만에 다시 걸었다. 코끝 찡한 추위 사이 어딘가에서 전설로 남은 시인과 그의 아내가 소탈하게 웃으며 반겨줄 것만 같았다. 천상병의 해맑은 미소와 목순옥의 따뜻한 차 한잔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 시인이자 기인(奇人)으로 불렸으며 간결하고 압축적인 단어들로 시를 쓴

천상병 시인(1930 ~ 1993)의 시화전 “새”가 종로구 경운동 유카리화랑에서 오는 2월 17일까지 열린다.

이번 시화전은 천상병 시인과 그의 부인 목순옥 여사를 추억하는 예술인들이 모여 만든 특별 기획전이다.
이번 시화전을 위해 화가 정강자, 주재환, 유필근, 황명걸, 이만주, 조문호, 전강호, 황외성, 안영상, 조명환,

백영웅씨 등 25명의 작가가 출품하였다.

유카리화랑 노광래씨는 "천상병 시인을 사랑하는 모임, 천시사(다음카페)를 결성하였다고 말했다.

지난 1월 21일 열린 개막식에는 출품작가를 비롯하여 사진가 육명심, 연극배우 이명희씨, 불화작가 장춘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느낌이 있는 "신 풍물 기행"

작가 박인식이 본 인사동

 


인사동과 나 사이는 오래 묵은 된장이다.

그가 내 속에 들어와, 아니 내가 그 속으로 파고들어 정 주고받은 지 벌써 서른 몇 해를 넘겼다. 그동안 많은 인사동 사람을 만났다. 더러 꽃 시샘 바람으로 구차하고, 더러는 꼭두서니 빛으로 반짝였고, 또 더러는 평생 마실 술을 젊은 시절에 몰아 마셔 일찌감치 세상을 떴고, 또 다른 몇몇은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갔다가 하산하여 도로 머리 기르고 장가들었다.

그들의 삶이 인사동 풍류 세상에서 빛나고, 또 예술세계에서 깊이 묻히거나 아주 저물다가 소식이 가물거릴 때마다 그들을 그리워하는 내 추억의 마음 한 자리에는 이야기가 되고 시가 된 사연들이 장독대에 내려앉은 함박눈(이 글을 쓰다 창밖을 보니 마침 함박눈이 퍼붓고 있네)처럼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 눈을 맨손으로 ‘쓰윽’ 쓸어본다. 아주 잠깐 손끝이 시려올 뿐, 차가운 듯하면서도 따사한 기운이 손바닥을 부드럽게 감싸온다. 인사동과 내가 정분이 난 게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랑이 이런 걸까. 만질 수 없는 그리움까지, 눈썹 밑에 살풋 밟혀온다.

인사동으로 나서면 언제나 그 그리움과 정분에 (60대 중반에 이른 할배 주제에) 철없이 온몸 들썩이게 된다. 그래서 나의 인사동 나들이는 낭만에 한목숨 건 ‘낭만파’이자 ‘인생파’인 인사동파 문화예술인의 삶 속을 걷는 오디세이가 된다.

‘기억의 방/기역자 모서리/추억의 기역자 방에서/기역으로 꺾어져/그리움의 지느러미 흔들며/헤엄쳐 나오는 기억의 물고기들/살가워 그리워라/하마, 서른 해나 정들었지.’ <박인식의 시 ‘아원의 추억2’>

쌈지길 들목에 있는 아원 공방의 그 기역자 방에서 나는 ‘인사동 3전설’의 한 분인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선생을 처음 그리고 자주 뵈었다. 뵐 때마다 선생은 기침을 콜록였고, 말이 없었다.

인사동이 한국전통문화예술의 갯벌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을 파고들면 끝내 민병산이라는 ‘사람의 산’과 마주하게 된다.

바둑을 즐긴 선생은 원래 ‘한국기원’이 있던 관철동이 놀이터였다. 1980년대 들어서 관철동이 장사치들로 번잡스러워지자 선생은 늘 책이 한두 권씩 들어있는 헌 가죽가방을 메고 종로 큰길 건너편인 인사동으로 슬며시 발길을 옮겼다. 선생이 옮겨가자 선생을 따르는 숱한 문인과 화가와 언론인들도 아지트를 인사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출애굽기처럼 출관철동기 또는 입인사동기는 선생으로 인해 이토록 은밀하면서도 장엄했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선생의 회갑이 돌아왔다. 선생을 따라온 인사동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한복도 한 벌 지어드리고 생일엔 모두 주머니 털어 자주 가던 ‘누님국수’집에서 회갑연을 열기로 했다. 그런데 생일 당일 모든 인사동 사람들은 자신이 소속된 인사동 계파의 연락책으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게 된다. “음, 난데, …… 누님국수집으로 올 때 말이야. 부조금 봉투를 다시 써와! 민 선생이 아침에 돌아가셨대.”

‘…몸을 저승에 보내고도 인사동에서만 맴돈다/… 그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인사도 인사동에 앉아서 받는다//세상을 떠나서도/가진 것이 없을수록 좋더라면서/움직임이 적을수록 좋더라면서’<신경림의 시 ‘민병산 선생을 애도하며’의 부분>

출관철동기에 선생을 따라 인사동으로 들어온 시인으로 이 추모시를 쓴 신경림 시인 곁에 천상병 시인이 있었다.

‘내 나이 마흔다섯/노인으로 자처한다’ 했던 천상병 시인은 ‘인사동’이라는 음식을 세상 사람들이 맛있게 들 수 있도록 간을 제대로 맞춰준 사람이다. 그 역할로 천 시인 또한 ‘인사동 3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아원공방의 기역자 방에서 두 번째로 헤엄쳐 나온 기억의 물고기는 그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떨어진 학고재 골목길로 쫄랑쫄랑 지느러미 흔들며 앞서 갔다. 그곳에 천 시인의 아내 목순옥 여사가 꾸려가던 찻집 ‘귀천’이 있다. 목 여사도 몇 해 전 세상을 떴다. 지금은 목 여사의 질녀가 ‘귀천’의 팽주(烹主·차 따르는 사람)다.

천 시인에게 세상살이는 소풍이었다. 어린 시절 소풍날 김밥을 챙기듯, 천 시인은 막걸리값을 챙겨 허구한 날 인사동으로 소풍 갔다. 인사동 쪽에서 보면 소풍 왔다. 소풍 오는 사람이 워낙 열심이어서 인사동은 천 시인으로 인해 날마다 소풍날이었다. 소풍 온 사람은 소풍날을 만들어 준 사람답게 막걸리값을 뜯어냈다. 1980년대 초에 1000원이던 막걸리값은 그 뒤로 이어진 경제성장에 힘입어 1990년대 초에는 3000원으로 인상되었다. 하지만 3000원이 상한가였다. 1994년에 천 시인이 소풍을 끝내고 ‘귀천’해버린 까닭이다.

천 시인에게 시 한 수는 막걸리를 다섯 번 즐길 수 있는 술값이었다. 시를 얻게 되면 냅다 관훈미술관 3층에 있던 ‘한국문학’사로 달려간다. 이근배 시인이 오랫동안 편집주간을 맡았던 그 문예지 사무실로 시 한 편 들고 소풍 나온 날의 천 시인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주간! 이 주간! 내 시 한 편 써왔다. 원고료 5000원만 도! 5000원만 도!”

이근배 주간이 1만 원짜리를 건넨다. “아이다, 아이다. 원고료는 5000원이다. 5000원만 도. 5000원만 도.”

그 얼마 뒤에 지금 ‘툇마루’라는 음식점이 있는 골목 끝에 있었던 ‘실비집’으로 가면 5000원을 꼬불쳐 쥐고 막걸리 소풍 즐기는 순진무구한 영혼을 만날 수 있었다. 인사동 소풍놀이에 익숙해진 인사동 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1000원짜리 지폐가 지갑에 있는지 미리 확인해야 되었다. 아, 우리에게도 1000원이면 막걸리가 대폿잔에 한가득 따라지는 영혼의 시대가 있었구나.

 

 

 

▲ 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는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추억을 찾아 나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세 번째로 헤엄쳐 나온 기억의 물고기는 인사동에서 가장 오랜 고서점인 ‘통문각’ 쪽으로 나아갔다. 인사동 큰길 곁이라 인파가 북적인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물고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가보다. 세 번째 물고기를 따라 들어간 곳은 ‘수희재’라는 전통찻집이다. 수희재의 다모(茶母) 장순정 씨가 정성껏 내린 녹차를 내놓자 물고기는 어느새 수천 마리 새끼를 부화시켜 내 콧속으로 들어오며 속삭인다.

“날 기억해? 여기서 차를 즐기던 박이엽 선생의 체취가 어린 차 향기 말이야.” 몇 년 선배인 민 선생을 닮아 박이엽 선생도 말이 없었다. 해소천식 환자였다는 점에서도 두 분은 닮았다. 그 지병으로 두 분 모두 일찍 귀천했다.

박 선생은 출중한 번역가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방송작가다. 1970년대 최고의 라디오드라마인 ‘아차부인 재치부인’의 작가다. 1970년대 말 군사정권에 의해 불순하다는 이유로 방송사 일은 끊어졌다. 기독교방송국만이 일거리를 줬지만 그걸로 생계 꾸리기는 어려워 막노동이나 다름없는 번역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번역하고 창비에서 출판한 ‘나의 서양미술 순례기’는 내가 가장 아끼는 귀중본이다. 미술에 별로 관심 갖지 않는 친구들에게도 선물해보면 그를 인사동에 보다 가까이 다가오게 만들 수 있었다.

이제 인사동이 인사동이 아니라는 장탄식이 무성하다. 다분히 그렇다. 주말이면 정나미 떨어진다. 관광지도 이런 관광지가 없다. 휴일에는 인사동에 인사동 사람들이 없다. 인사동의 정체성을 빛낸 여러 가게가 북쪽으로 서쪽으로 떠났다. ‘수희재’마저 2년 전에 문을 닫았다. 떠난 자리마다 ‘국적불명’의 관광상품가게가 들어섰다. 불난 호떡집에 사이비 엿장수가 설쳐댄다. 그게 인사동의 참맛인 줄 알고 꼬여드는 관광객들이 밀물 쳐 ‘인사동’이라는 이름의 짝퉁 한국전통 문화예술 기념품을 한 푼이라도 더 값싸게 사려고 이리 밀치고 저리 뛰는 장돌뱅이 판이 되고 말았다.

이런 날에는 인사동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살아 있을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가야 한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만이 아니라 인사동 골목에서 만나도 서로 피하기 어렵다. 그러니 원수 될 일 저지르지 말며 살라고 좁디좁은 인사동 골목은 가르친다. 그 골목 끝자락에 지금은 사라진 ‘실비집’이 있었다.

누군가 실비집을 실비대학이라 불렀다. 그와 동시에 이 선술집의 여주인은 총장으로 출세했다.

그 총장 전용 서랍 속에서 시큼한 막걸리 냄새 풍기며 잠자던 외상장부는 참 두툼했다. 인사동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올라가 있었다.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외상으로 마셔대던 막걸리는 유난히도 하?다. 하늘로 올라가서 다 함께 노상방뇨 하면 지금 내리는 저 눈발보다 더 함박스러운 함박눈이 되어 인사동 뒷골목에 납작하게 고개 숙인 한옥들의 낮은 어깨를 다독이며 ‘힘내라’ 격려해줄 수 있었을 테지.

 

 

인사동에 낭만과 풍류가 사라진지 오래다.

고서화점들이 몰려있던 70년대 쯤, 지금은 하늘나라로 가신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과

친구인 강 민, 민 영, 채현국, 황명걸, 신경림씨 같은 문인들이 관철동에서 옮겨오며 인사동문화가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80년대 들어서는 술 때문에 먼저 간 사진기자 김종구, 서양화가 강용대, 이존수, 김용태, 시인 최영해씨와,

미국으로 이민간 최정자시인, 늙은 총각 구중관, 공윤희, 시인 김신용, 박종수, 조해인, 박중식, 김명성, 소설가 배평모, 

서양화가 이청운, 박광호, 최울가, 이목일, 전강호, 김언경, 도예가 김용문, 신동여, 사진가 이수영을 비롯해 

노광래, 김민경, 장익화, 장 춘, 이해림씨 등 많은 예술인들이 모여들었으나,

유명세로 몰려드는 인파와 그에 편승한 장삿꾼들의 얄팍한 상혼에 인사동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게 된 것이다.

 

고풍스럽던 예전의 가게들이 화장품점이나 싸구려 중국산 민예품에 밀려나기 시작하더니,

이젠 아예 잡동사니거리가 되고 만 것이다. 돈에 의해 변하는 인심과 흐르는 세월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인사동 골목골목을 돌다보면 가뭄에 콩 나듯 옛 기억을 소주잔에 부어 마시는

사라지기 직전에 있는 예술가들 몇몇은 남아 떠돈다.


하루라도 인사동에 나오지 않으면 온 몸이 쑤신다는 ‘인사동아리랑’을 노래하는 시인 강 민선생,

인사동에 사무실 얻어놓고 팔리지 않는 시집 만들며 노래나 부르는 음유시인 송상욱씨,

제주에서 무작정 상경한 후 대폿집 문간방 빌려 사무실로 쓰는 민속학자 심우성씨,

불편한 몸이지만 빠지지 않고 인사동 작업실을  지키는 사진가 한정식선생을 비롯해

극작가 신봉승, 임재경, 김동수, 이계익선생 등이 계신다.

 

그 외에도 사업장을 인사동에 둔 '아라아트' 김명성,'통인가게' 김완규, '옥션단'의 김영복, '유카리화랑' 노광래,

그리고 인사동에서 대폿집하는 '푸른별이야기' 최일순, '유목민' 전활철씨 처럼 생계와 연관되어 터 잡고 사는 분들도 있다.

 

예술로 빌어먹는 술꾼들이 외상술에 개똥철학 풀던 그런 대폿집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으나

그 시절의 낭만과 풍류를 못 잊어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인사동을 배회하거나,

그 때 그 사람들이 그리워 만날 날만 기다리는 유목민들은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행위예술가 무세중선생, 시인 조준영, 화가 장경호, 이청운, 연극배우 이명희,

뮤지션 김상현씨 같은 인사동파 예술가들이 있기에 모두들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편하게 죽치고 앉아 회포를 풀 장소도 마땅찮거니와, 모두들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것 같다.

가끔 지인들이 전시회를 열거나 출판기념회라도 하면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호사는 누리지만,

술자리 분위기가 예전 같잖다. 이 것 저 것 눈치보여 마음이 편치 않은데다, 신나게 놀 수가 없다.

기록이라도 남기고 싶어 부지런히 사진은 찍어왔지만, 이젠 기력마저 떨어진데다, 

그 동안 찍어 모아 둔 사진 정리할 일이 더 급하게 되었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요즘 젊은이들은 잘 이해될지 모르지만,

낭만과 풍류가 있었던 당시의 인사동 문화는 질퍽하면서도 따뜻한 정으로 이어져 있었다.

모두들 주머니는 비었으나 밤새 외상술 마셔가며 예술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노래했던 것이다.

이제 모두들 가버리거나, 떠나고 싶어도 마땅히 갈 곳마저 없어,

그 흐릿해 가는 추억만 까먹는 사람들이 인사동을 떠돌 뿐이다.

그래! 이런 케케묵은 감상들을 널어놓는다는 것 자체가 늙었다는 것 일게다.
결국 늙으면 죽는 것이겠지만, 저승에서 만나게 될 선생님들 뵐 면목이 없다.

 

지난 사진첩을 뒤적이며, 그 때 그 시절의 추억들을 꺼내본다.

 

사진 : 조문호, 정영신 / 글 : 조문호

 

 

 

 

 

 

 

 

 

 

 

 

 

 

 

 

 

 

 

 

 

 

 

 

 

 

 

 

 

 

 

 

 

 

 

 

 

 

 

 

 

 

 

 


 

 

 

 

 

 

 

 

 

 

 

 

 

 

 

 

 

 

 

 

 

 

 

 

 

 

 

 

열흘넘게 집에서만 지내다 지난 8일부터 이틀동안 인사동에 나왔다.

하루만 인사동에 들리고 9일 새벽 정선으로 떠날 예정이었지만, 김명성씨의 비지니스와 관련된 일로 하루 늦출 수 밖에 없었다. 김명성씨와는 오후6시경 만나기로 했으나, 강 민선생님의 연락으로 좀 일찍 나갔다. '노마드'에는  강민선생님을 비롯하여 이행자, 이도연, 정규종씨가 함께 계셨지만 시인 천상병 추모제에 대한 결산 보고를 드렸다.

강민선생님의 도움에 의한 후원금 100만원으로 행사를 치루었는데, 그 중 30만원이 남았다.  남은 돈은 알아서 유용하게 사용하라기에 개인적인 일에 먼저 사용하고,  올 가을 선생님의 '인사동 아리랑' 시집 출판 기념회 때 보태기로 했다.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사진집은 100권을 구입했는데, 그냥 드릴 분에 비해 사는 사람은 적어 손해보는 장사를 했다.

 

강민선생님 일행과 일찍부터 흘러간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술을 마시던 중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류재근, 박의식, 김의현, 공윤희씨가 등장하였고, 뒤 이어 조준영, 김명지, 이경희, 노광래, 류 근씨도 오셨다. 골목길에 앉아 보슬비 맞으며 술 마시는 분위기도 제법 괜찮았다.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라는 '열두냥인생'노래가 절로 나오는 그런 밤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서울교육감으로 출마했던 이수호씨가 오셨는데, 강민선생님과는 친분이 두터운 분이셨다.  여기 저기 왔다 갔다하며 사진찍고, 술마신 건 좋으나 담배사러가다 어지러워 잠시 쉰다는게, 길거리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객사하기 전에 술을 끊어야 할텐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술과 담배다.

 

 

 

 


천상 생활 20년, 천상병이 보고 싶다  (동아일보, 4월25일)

 

사진작가 조문호, 추모사진집 펴내

 

 

28일로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뜬 지 20주기를 맞는다. 시인은 모질었던 삶을 ‘소풍’이라 부르며 ‘아름다웠다’고 노래했다. 1982년 7월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자택에서. 조문호 사진작가 제공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1930∼1993)의 시 ‘귀천(歸天)’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28일은 천 시인이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간 지 20년 되는 날. 시인이 생전 ‘문디 가시나’라고 살갑게 불렀던 부인 목순옥 씨가 세상을 뜬 지도, 이들이 운영하던 서울 인사동 찻집 ‘귀천’이 문을 닫은 지도 3년 가까이 돼 간다.

시인을 추억할 수 있는 반가운 책이 나왔다. 조문호 사진작가(66)가 생전 천 시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모아 펴낸 추모사진집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눈빛). 조 작가의 사진에 고 김종구 사진작가의 사진, 그리고 천 시인의 앨범 속 사진을 곁들였다. 흑백 사진 속에서 때론 무표정하게, 때론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시인이 반가우면서도 가슴 아리다.

조 작가는 1980년 봄에 처음 천 시인을 만났고, 10여 년 동안 그를 앵글에 담았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쓰러질 듯 기우뚱거리며 주막을 찾아, 한 잔만 마시고 맡기기를 하루에 몇 차례씩 반복했으나 내게 술 한 잔 권한 적이 없는 깍쟁이셨다. 그러나 카메라만 들이대면 나의 마음을 헤아리듯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동작을 보여 나를 놀라게 했다.”

1949년 잡지 ‘갈매기’를 통해 등단한 천 시인은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6개월여간 옥고를 치렀고, 고문 후유증과 과도한 음주,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져 행려병자로 분류돼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행방이 묘연해지자 그는 사망으로 추정됐고, 그의 첫 시집인 ‘새’는 유고시집으로 나오기도 했다. 이에 ‘기인’이란 별명도 붙었다. 하지만 시인은 월간조선 1990년 5월호에서 이렇게 밝혔다. “내 멋대로 버릇없이 살아온 탓으로 흔히들 나를 ‘기인, 기인’ 하는데 나는 도무지 내가 왜 기인인지조차 모른다. 다만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나는 가난하고 슬퍼도 행복하다. 그 나의 행복의 결과가 시로 태어났다”고 말한 천 시인. 그를 기리는 제10회 천상병예술제가 28일까지 경기 의정부시 일원에서 열린다. 27일 오전 11시 의정부시립공원묘지에서 20주기 천상노제 ‘봄 소풍’, 오후 7시 의정부 예술의전당 대극장에서 ‘시가 흐르는 천상음악회’가 열린다. 28일까지 의정부 예술의전당 전시장과 로비에서 특별미술전과 책읽기 행사 등이 이어진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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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순수한 천재시인이었다"..천상병 추모사진집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1987년 인사동 칼국숫집에서 시인의 생일잔치가 열렸다. 이단 케이크 앞에 앉은 시인은 카메라를 보며 천진난만하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시인에게 가지 않겠다고 떼쓰며 우는 어린 처조카 딸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천상의 시인' 천상병(1930-1993) 시인의 20주기를 맞아 추모사진집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눈빛출판사)가 나왔다.

 

사진집 제목인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는 시인의 대표작인 '귀천'(歸天)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사동에서 주로 활동해온 사진가 조문호 씨는 시인의 일상을 촬영한 사진을 정리해 사진집을 펴냈다.

 

1980년 어느 봄날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한 인사동 전통찻집 '귀천'에서 시인과 처음 만났다는 조 씨는 그때부터 10여 년 동안 시인 곁에서 시인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귀천'에서 동료 문인들과 어울리는 모습, 의정부 장암동 자택에서 내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 인사동 실비집에서 술잔을 앞에 두고 앉은 모습 등 소탈하고 순진무구한 시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선생의 시와 함께 수록했다.

전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 씨가 찍은 사진, 선생이 남긴 앨범 사진도 실려 있다.

 

"선생님께서 귀천하신지 올해로 20년이 되었지만 선생님의 영혼만은 인사동 어느 주막을 떠돌고 있을 거라고 늘 생각해왔다"는 조 씨는 "순수한 천재시인"인 고인이 자신의 최고 모델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카메라만 들이대면 나의 마음을 헤아리듯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동작을 보여 나를 놀라게 했다. 그동안 숱한 초상 사진을 찍어왔지만 천 선생님보다 좋은 모델은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다"며 그리워했다.

132쪽. 2만원.

 

 

yunzhen@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4/22 17:5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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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업] 막걸리 한 잔이면 천국 … 천상병, 그 웃음 다시 본다 (중앙일보)

 

 

 

 

술을 좋아했던 천상병 시인은 사진작가에게 술 한 잔 권한 적 없는 깍쟁이였다.

 

1986년 2월 인사동의 주막 ‘실비집’에서. [사진 눈빛출판사]

 


 

그의 소풍이 끝난 지 벌써 20년이다. 아직도 눈에 선한 그의 순진무구한 표정이 다시, 우리를 찾아왔다.

 

시인 천상병(1930~93)의 20주기를 기념한 추모사진집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눈빛출판사)에서다.

 

사진작가 조문호(66)씨와 한국일보 사진기자였던 고(故) 김종구씨의 카메라에 담긴 천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의 모습 그대로다.

 따뜻한 시와 달리 천상병의 삶은 지난했다. 1952년 ‘갈매기’로 등단한 그는 67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전기고문을 당하는 등 옥고를 치렀다.

 

71년 고문 후유증과 음주로 인한 영양실조로 쓰러진 뒤 행려병자로 정신병원에 보내졌고, 행방 불명된 그를 기리는 유고시집 『새』도 출간됐다.

 그럼에도 그는 늘 행복했다. 사진집 속에는 막걸리 한 통이면 더 행복했던 그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가득하다.

 

2010년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 목순옥 여사가 운영했던 인사동의 찻집 ‘귀천’과 그가 즐겨 찾았던 주막 ‘실비집’에서는 지금도 그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수락산 자락 의정부 자택에서 내복 차림으로 앉아 막걸리를 즐기는 모습과 병실에 누워 책을 읽거나 잠든 모습도 친근하게 느껴진다. 조문호씨는 “(선생님은) 카메라만 들이대면 나의 마음을 헤아리듯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동작을 보여 나를 놀라게 했다”고 기억했다.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낸 그는 이제 가벼운 새 한 마리가 돼 이렇게 울고 있을 듯하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내 영혼의 빈 터에/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내가 죽는 날/그 다음날/…

 

(중략)…살아서/좋은 일도 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새’ 중)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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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소풍'은 어떤가요 (조선일보)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추모 사진집|조문호 지음|눈빛출판사|131쪽|2만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귀천)

 

 

시 '귀천(歸天)'에서 이승에서의 삶을 아름다운 소풍이라 했던 시인 천상병(1930~1993). 고문 후유증으로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그였지만 생의 마지막 20년은 아내 목순옥(1935~2010)과 함께 행복했다. 서울 인사동에 차린 카페 '귀천'에서 사장 목순옥은 여섯 살 '얼라'가 되어버린 남편이 팔짱을 끼자 행복한 듯 웃는다〈사진〉. 어떤 사랑이 한 사람을 이런 표정으로 웃을 수 있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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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스런 표정과 동작

‘천재 순수시인’ 천상병

 

                           소탈하고 순진무구한 모습 담은 사진집 나와

 

 

천상병시인 (사진=연합뉴스)

 

▲ CNB뉴스, CNBNEWS, 씨앤비뉴스

'천상의 시인’이라 불리는 천상병 시인의 20주기를 맞아 다시금 그를 조명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고인의 20주기를 맞았지만 지금까지 추모 문학관은커녕 변변한 유품 보관 장소도 없다. 오히려 의정부지역 예술인들이 문학관 건립에 나서기도 했다. 이들은 시인이 생을 마감한 의정부지역에 기반을 둔 예술인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이유가 된다고 한다.

그 가운데 추모사진집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눈빛출판사)가 나왔다. 사진집 제목인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는 시인의 대표작인 '귀천’(歸天)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사동에서 주로 활동해온 사진가 조문호 씨는 시인의 일상을 촬영한 사진을 정리해 사진집을 펴냈다.

1980년 어느 봄날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한 인사동 전통찻집 '귀천’에서 시인과 처음 만났다는 조 씨는 그때부터 10여 년 동안 시인 곁에서 시인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특히 '귀천’에서 동료 문인들과 어울리는 모습, 의정부 장암동 자택에서 내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 인사동 실비집에서 술잔을 앞에 두고 앉은 모습 등 소탈하고 순진무구한 시인의 모습을 시와 함께 담았다. 여기에 전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 씨가 찍은 사진, 선생이 남긴 앨범 사진도 실려 있다.

조 씨는 오랜 시간 수많은 초상 사진을 찍어왔지만 시인보다 좋은 모델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아쉬움과 그리움을 표현했다.

김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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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조문호, 천상병 추모사진집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펴내 (문학in)


[문학사냥 책사냥]

저승여비 4백만 원 재로 들고 간 시인

이소리 글꾼(lsr21@naver.com)


< rimgcaption>ⓒ 조문호 </rimgcaption>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천상병,

 

 

 

‘소릉조-70년 추일’ 모두


<rimgcaption>ⓒ 조문호 </rimgcaption>

이름 그대로 ‘천상’ 타고난 시인이었던 고 천상병(1930~1월 29일 일본~1993년 4월 28일) 시인. “저승 가는 데도 / 여비가 든다면 / 나는 영영 / 가지도 못하나?”라는 시를 남긴,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그가 저승으로 은근슬쩍 들어간 걸 보면 저승 가는 데는 여비가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다. 어쩌면 장례식을 찾아온 조문객들이 낸 부의금으로 저승 가는 여비를 보탠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는 4월 26일(금)은 ‘이 시대 마지막 기인’이라 불렸던 고 천상병 시인이 이 세상을 떠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날을 맞아 그가 살았던 의정부에서 ‘제10회 천상병 예술제’(19일~28일, 의정부예술의전당, 문학iN 4월 16일자 보도)가 열리는가 하면 서울 종로구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그를 기리는 문학행사가 잇따라 열린다.

그뿐이 아니다. 사진작가 조문호가 천상병 추모사진집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눈빛)을 펴냈는가 하면 의정부에서 살고 있는 문학예술인들이 지금까지 문학관 하나 없는 천상병 문학관을 번듯하게 세우기 위해 소매를 걷었다. 지금 저승에 있는 천상병 시인이 “가서 아름다웠더라”라고 말할 만 한 세상이다.

‘인사동 소풍, 천상’… 26일, 시와 노래의 밤+추모사진집 출판기념회

내 친구 천상병 시인은
저승 가는 여비를
4백만 원이나 가지고 갔다네
이승의 찬 기운 떨쳐 버리려
그것을 태워, 재로 갔다네
쭈그러진 얼굴로 헤실피 웃으며
내밀던 손
검은 손 착한 손
그 손에 쥐어 주던 쥐꼬리 같던
우리들의 우정
쌍과부집 독한 막소주로
허허로운 뱃속 바람과
이승의 공허 메우던 친구 -강민, ‘시인의 귀천’ 몇 토막


<rimgcaption>ⓒ 눈빛 </rimgcaption>

시인 천상병 선생 20주기가 되는 4월 26일(금) 서울 종로구 인사동 아라아트 2층 전시실에서 ‘인사동 소풍, 천상’이라는 제목을 내건 시와 노래가 어우러지는 추모행사가 열린다. 이날 낮 4시부터 저녁 6시까지 2시간 동안 열리는 이번 행사는 천상병 시인과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가 남긴 시와 노래, 회고담 등으로 이어진다.

천상병 추모사진집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출판기념회는 Mu/Art에서 밤 9시까지 이어진다. 이번에 추모사진집을 낸 사진작가 조문호는 “선생님께서 귀천하신지 올해로 20년이 되었지만 선생님의 영혼만은 인사동 어느 주막을 떠돌고 있을 거라고 늘 생각해왔다”며 “순수한 천재시인인 고인이 자신의 최고 모델이었다”고 되짚었다.

천상병 시인은 순수한 천재시인이었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나의 마음을 헤아리듯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동작을 보여 나를 놀라게 했다. 그동안 숱한 초상 사진을 찍어왔지만 천 선생님보다 좋은 모델은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다.”

사진작가 조문호가 천상병 시인 20주기를 맞아 추모사진집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눈빛출판사)를 펴냈다. 이번 사진집 제목이 된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는 시인이 남긴 대표작 ‘귀천’(歸天)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번 추모사진집에는 ‘어머니 생각’, ‘아내’, ‘나의 가난함’ 등 천상병 시인이 지녔던 여러 가지 모습을 사진작품으로 느낄 수 있다. 시인이 지닌 숨김없이 솔직한 모습과 삶에서 다가오는 모진 풍파 속에서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킨 시인이 지닌 참 모습이 사진에 그대로 담겨 있다.

1987년 인사동 칼국수집에서 열린 천상병 시인 생일잔치 사진도 눈에 띤다. 이 사진은 2단 케이크 앞에 앉은 시인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천진난만하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시인에게 가지 않겠다고 떼쓰며 우는 어린 처조카 딸이 지닌 모습도 웃음을 절로 자아내게 만든다.

1980년 어느 봄날 시인 부인 목순옥 여사가 꾸리고 있었던 인사동 전통찻집 ‘귀천’에서 시인과 처음 만났다는 사진작가 조문호. 그는 그때부터 10여 년 동안 시인 곁에서 시인이 하루 하루 살아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았다.


<rimgcaption>ⓒ 조문호 </rimgcaption>

‘귀천’에서 동료 문인들과 어울리는 모습, 의정부 장암동 자택에서 내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 인사동 실비집에서 술잔을 앞에 두고 앉은 모습 등… 이 사진집에는 소탈하고 순진무구한 시인 모습을 담은 사진을 선생 시와 함께 실었다. <한국일보> 사진기자였던 김종구가 찍은 사진과 선생이 남긴 앨범 사진도 함께 실려 있다.

제1부 ‘귀천’에서, 아름다운 이 세상, 제2부 나의 노래는 하늘의 것, 제3부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제4부 천상병 앨범에서, 제5부 천상시인 천상병-배평모에 이어 실려 있는 작가 후기, 천상병 연보 등이 그것.

사진작가 조문호는 1947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개인전으로 아시안게임 기록전(1986), 동아미술제 초대전(1987), 민주항쟁 기록사진전(1987), 전농동 588번지 기록사진전(1990), 불교상징전(1994), 전통문양 초대전(1995), 동강 백성들 기록사진전(2001), 태풍 루사가 남긴 상처전(2002),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전(2004),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2007), 신명 설치사진전(2008), 산을 지우다 사진전(2008) 등을 열었다.

단체전으로는 낙동강 환경사진전(2001), 우리 사는 이 땅 환경전(2003), 한국다큐멘터리 사진의 조망(2004), 함께 사는 땅 환경전(2004), 광복 60년, 시대와 사람들(2005), 강원다큐멘터리사진사업 특별전(2005), 현대사진 60년전(2008), 흑백사진페스티벌(2008) 등에 참가한 바 있다.

개인 사진집으로 <두메산골 사람들> <불교상징>이 있으며, 포토 에세이집 <동강 백성들>을 펴냈다. 공저로는 <우포늪> <동강> <낙동강> <한국불교미술대전>(전 7권) 등이 있다. ‘동아미술제’에서 연작 ‘홍등가’로 대상 수상(1985), 아시안게임 기록사진공모전 대상(1986), 강원다큐멘터리 사진가(2002)고 뽑혔다. 그동안 <월간사진> 편집장, <한국사협> 회보 편집장, <삼성포토패밀리> 편집장, 한국환경사진가회 회장을 맡았다. 1999년부터 강원도 정선에서 농민들 삶을 기록하며 인사동을 드나들고 있다. 한국사진굿당 대표.


<rimgcaption>ⓒ 조문호 </rimgcaption>

의정부에서 살고 있는 예술인들이 시인 천상병 문학관 세우기에 소매를 걷었다. 지난 3월 이 지역 예술가 박이창식(49)을 주춧돌로 열 명 남짓 뭉쳐 ‘천목 문화사랑방’을 만든 것이 그것이다. 천(天)과 목(木)은 각각 시인과 시인 아내였던 목순옥 여사 성에서 따온 글자다. 이 글자에는 ‘천상의 나무’라는 뜻도 함께 담겨 있다.

작가, 비누 공예가, 젬베 연주가 등으로 짜인 이들은 천상병 시인 제자도 아니고, 천상병기념사업회 소속도 아니다. 이들은 천상병 시인이 생을 마친 의정부에 뿌리를 둔 예술인이라는 점만 유일한 공통점이다.

박이창은 “이 모임이 우연한 과정에서 탄생한 것은 아니다”라며 “올해로 10회째를 맞는 천상병예술제에 각자 참여하면서 문단과 지자체가 시인을 홀대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됐다. 우선 의정부시민을 대상으로 천목 문화사랑방을 홍보하고 회원 수를 늘리는 게 1차 목표”라고 귀띔했다.

이들은 오는 10월 12일 시인이 지녔던 작품세계를 주제로 ‘소풍길 예술제’를 연다. 이때 문학관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계획이다. 이들은 이와 함께 천상병 세미나를 열어 모금활동도 벌인다.

박이창은 “시인의 육필원고와 미발표된 메모들은 언제라도 유실의 위험이 있다”며 “문학과 건립이 절실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목 여사마저 이 세상을 떠나고, 시인이 살았던 집마저 경매로 개인에게 넘어가면서 유품들이 갈 곳이 없게 됐다는 것.

고 천상병 시인 유품은 천상병기념사업회 김병호(50) 부이사장이 꾸리고 있는 한 극단 소품 보관창고에 3년째 임시 보관하고 있다. 이 보관창고는 시인 부부가

 

살았던삶터를 벗어난 구리시 갈매동에 자리 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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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사진집 -부산일보-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조문호)=천상병 시인 추모 사진집. 20년 전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나기 전, 그의 곁을 지켰던 사진가 조문호가 렌즈에 담았던 시인의 일상과 추억을 추렸다. 60여 점으로 압축된 사진과 짧은 글이 그를 추모한다. 눈빛출판사/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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