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만한 전시가 있어 모처럼 인사동 나왔다.




옛 민정당사 자리 호텔공사는 이제 마무리를 했다. 머지않아 인사동이 더 낯설 것이다.




거리에는 임금님이 나와 광고판을 들고 있고, 지난날이 그리운 유랑 악사는 멀쩡한 날 ‘봄비’를 불렀다.




요즘 인사동에 나와도 갈만한 술집이 별로 없다.
돈에 밀리고 젊은이에 밀려, 길 잃은 기러기 신세다.
아지트로 죽치던 ‘유목민’도 젊은이 아닌 돈에 밀려났다.




사실상, 인사동을 못 잊어 배회하는 것은 공간의 추억이 아니라, 그 곳에서 놀던 사람들의 추억이다.




그것도 살아남은 자 보다 죽었거나 볼 수 없는 자들의 추억이 짙다.
제일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천상병시인이고,
뒤이어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 방송작가 박이엽선생, 인사동 풍류객 이계익선생,
넋을 부르는 민속작가 심우성선생 같은 많은 분들이 생각난다. 



땡초시인 적음과 최루탄 냄새 풀풀 풍기던 사진기자 김종구, 별만 그렸던 강용대,
콧수염 사진가 김영수, ‘민예총’의 대부 김용태, 밤안개로 불리는 목탄화가 여운,
강단 있는 민중화가 문영태, 그리고 살아있어도 볼 수 없는 화가 박광호와 이청운도 있고,
미국으로 떠난 최정자시인도 그립다.




그들과 어울리던 ‘실비집’이나 ‘누님칼국수’, ‘시인통신’, '하가', '레떼'

‘수희제’는 모두 사라졌지만, ‘부산식당’이나 ‘사동집’, ‘귀천’ 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잘 가지 않는 것은, 집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만났던 사람이 그리운 거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만나려면 만날 곳이 있어야해 ‘다리 밑’에 자리 잡기로 했다.
‘다리 밑’은 낙원상가 계단 밑에 있는 코 구멍만한 술집인데, 간판이 없어 계단집으로 불렸다.
통인의 관우선생이 ‘다리 밑 집’으로 고쳐 불렀으나, 더 줄여 ‘다리 밑’으로 부른다.
옛날엔 거지들이 다리 밑에서 살았으나, 대개 태어날 때의 고향인 다리 밑을 좋아한다.
공사판의 함바집처럼 서민적이라 더 정겹다.




주종은 불문이나 관우선생이 개발한 시원한 생맥주에 막걸리를 타 먹는 막맥이 맛있다지만
통풍 때문에 맥주를 못 마시니 그 맛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안주가 싸다. 쫀득쫀득한 감자전 같은 대부분의 안주가 오천원이다.




이 날은 건축가 김동주씨와 통인의 관우선생을 만나기로 했는데, 처음보는 여인도 나타났다.
미끄러질 것 같은 입술도 매력적이지만 생글 생글한 눈웃음이 죽이더라.




그런데, 옆 자리에 아는 분이 있었다.
막사발 장인 김용문씨처럼 상투를 틀어 올린 권도경씨인데,
사진가 하형우씨께 전화 걸어 바꾸어 준 것이다. 세상에 사람은 많지만 좁았다.




그들의 건배사가 더 재미있더라.
술잔을 치켜들며 “이것이 무엇이요?”하니, 다같이 “정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정’이란 노래를 처절하게 합창했다.




“정이란 무엇일까? 받는 걸까 주는 걸까, 받을 땐 꿈 속 같고 줄 때는 안타까워...“




그렇다. 다들 그 놈의 정 때문에 좋아했다 미워하는 것이다.




다음부터 그리운 사람 만날 때는 다리 밑에서 만나자.
받을 때나 줄 때나 한 결 같이 꿈속 같도록...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7일은 인사동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나는 셋째 수요일이었다.
이날 ‘유목민’에서 화가 김재홍, 나종희, 강행복, 홍 창, 이인철, 손기환. 김진하, 성기준씨를 만났다.

옆 자리에는 신현수, 이용우, 이인섭씨가 있었고, ‘유담’에는 김명성, 김용국씨도 만날 수 있었다.

뒤늦게 문영태씨의 아들 문지함씨와 사위 기선호씨도 합류했다.






그 날 술자리에서 강행복씨로 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돌아가신 천상병선생 이야기를 꺼내며, 전활철씨로 부터 천상병시인 사진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 사진은 ‘유목민’ 실내장식에 사용할 이미지로 보내 준 것인데,

마음대로 출력하여 허락도 없이 나누어 준 이야기를 들으니 할 말을 잃었다.






동생처럼 가까운 사이라 믿고 원본을 맡겼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작가의 허락없이 마음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도적질이나 마찬가지다.
영문을 모르는 강행복씨야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따져 보고 싶은 전활철씨가 자리에 없었다.






여지 것  사진가를 밝히지 않거나 무단으로 사용하는 등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냥 두지 않았다.





2년 전에는 ‘광화문미술행동’에서 추진한 ‘촛불광장 기록전’에서 전시 작가를 밝히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 당시 전시 작품을 철거해 소각하는 소동을 벌였는데, 전시 책임자인 김준권씨와는 아직까지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사진매체의 설움을 수 십년 동안 당하며, 한 평생 가난하게 살지 않았던가.

그 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사진인 모두의 일이라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사진가를 무시하기에 앞 서, 사진가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1. 사진 원본을 넘겨준 인사동 거리풍경 사진



이번 사건의 발단은 두 달 전, 실내장식에 사용할 사진 두 장을 부탁받았는데, 원본을 전해준 것이 화근이었다.
몇 일 후 가보니, 인사동 거리 풍경은 어둡게 프린트해 작가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입구 벽에 붙여 놓았다.
잘못된 사진이라 나머지 사진 만들 때 바꿀 것으로 생각했으나, 계속 그대로 붙어 있었다.



2, 사진 원본을 넘겨준 고) 천상병시인 사진



그 날에서야 나머지 사진인 천상병시인의 사진도 벽에 나 붙었다.

그런데, 유리에다 인쇄하기로 한 사진을 출처도 밝히지 않은 채, 장난스런 글까지 삽입시켜 놓았다.

기분이 언짢은 상태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 사진을 주었다는 소리를 들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꼭 주어야 할 사정이 있었다면 전화 한 통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데 말이다.






전활철씨는 30여년을 친동생처럼 지낸 가까운 사이로

몇 일전에는 동자동 쪽방까지 찾아와 집안 걱정거리를 털어 놓은 적도 있었다.

뜻밖의 일에 고민이 많은 것 같아 홧병에 좋은 약초까지 챙겨갔는데,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는가?
당장 벽에 붙은 프린트를 모두 찢어버리고 싶었으나, 손님들 때문에 참았다.






요즘 술도 많이 못 마시지만, 마음이 편치 않아 히히닥거릴 기분이 아니었다.

전활철씨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도 싫었지만, 그를 위해 챙겨온 약초도 전해주기 싫었다.

많은 사람이 앉은 술상에 약초를 꺼내놓으며, 필요한 사람 있으면 가져가라고 와 버렸다. 



 


그 이튿날 이미지 원본을 파기하라는 전화를 했더니, 사과는 커녕 엉뚱한 변명을 했다.

화가 치밀었으나, 돌이켜 생각하니 필요한 규격의 사진을 뽑아 주지 않은 본인의 잘못도 있었다.

사실, 여유만 있었다면 사진을 만들어 주었겠지만, 사진 만들 돈도 없었다.






허물없이 가까운 사이라 없던 일로 덮고 싶었으나, 그건 아니었다.

잘못에 대해서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엄하게 다루어야하기 때문이다.





다시 이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되겠지만, 더 이상의 유출방지를 위해 다시 한 번 경고한다.

이후로 내 서명 없는 위의 사진 두 장을 만나게되면 법적 조치도 불사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은 원본을 그냥 넘겨 준 스스로에게 벌을 내린다.

일 년 동안 ‘유목민’ 출입 금족령과 함께 그를 만나지 않기로...



사진, 글 / 조문호






















사람이 태어나, 언젠가는 꽃잎처럼 떨어져 사라진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서러운 것은 쉽게 잊혀진다는 것이다.





힘든 세상사, 어쩌면 죽음 자체가 축복일 수도 있겠다.

난, 초상집이 잔치마당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문상객의 슬픈 모습보다 웃는 모습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웃을 수 있는 영정사진까지 만들어 두었다.





죽음이란 떠나가는 망자보다,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다.
슬픔도 잠시 뿐, 쉽게 잊어버리고 좀처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게 더 슬프다.





흐르는 세월에 잊혀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으나,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
아무리 좋아했던 사람도 조금만 지나면 까마득하게 잊혀진다.

요즘 사람들은 모두 건망증 환자다.






얼마 전, 인사동을 사랑한, 한 여인이 꽃잎처럼 떨어졌다.
그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지만,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다.
다 가난이 원죄다. 절망의 벽이 너무 높았던 모양이다.






삶을 끝낸 것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모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무관심한 것은 쪽방촌에 사는 빈민들도 마찬가지다. 강아지가 죽어도 그러지는 않는다.

가족들이 방관하는 시신은 냉동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태워진다.






돈과 명예를 가진 자의 죽음은 온 세상이 떠들썩하도록 시끄럽지만,

그 여인의 자살은 많은 신문의 어느 한 구석에도 실리지 않았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말만 무성하지, 가진 것 없는 낮은 사람은 죽어서도 외면 당한다.


더러운 세상, 저주의 굿판이나 벌일까 보다.






꽃잎처럼 떨어져 세상을 등진 정성애씨는 참 착한 여자였다.
지난 여름, 우연히 인사동 ‘유목민’에서 찍은 사진이 그녀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하필이면,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을 배경으로 찍었는데,
80년 5월, 광주에서 죽어가는 엄마를 뿌리친 소녀의 한에 버금가는가?
담배 연기속의 애잔한 웃음에 가슴이 아린다.


우연히 그녀 사진을 만나, 그리운 분의 모습을 찾아 보았다.







“문디 자슥아~ 문디 자슥아~”를 연발하던 천상병 선생은 윙크하고 계셨다.

노자돈 받아 막걸리 사 드시며 흐뭇해 하시던 모습이 그립다.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께서 인사동 고서점을 기웃거리는 사진도 있었다.

말씀 없이 웃으시며, 허름한 봇짐에서 붓글씨를 꺼내 나누어 주시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자유분방한 선생만의 필체는 오래된 인사동 가게라면 부적처럼 붙어있다.






선배들은 챙겨주고, 후배들은 다독거리던 ‘민예총’의 거목 김용태씨도 반겼다.

거나하게 술이 취해, 바지춤을 추켜 세우며 부르던 청포도사랑이 듣고 싶어진다.

저승에서라도 재기의 깃발 올리는 '민예총'에 힘을 실어주길 부탁한다. 





민속박물관장을 지낸 김동수선생은 점심 먹자는 전화를 가끔 하셨다.

인사동에 작업실이 있을 때인데, 선생께서도 사무실을 인사동에 두었다.

만나기만 하면 인사처럼 하시는 말씀이 조군 사진 값을 줘야 할텐데...”였다.

인사동 사람들전시 후, 선생사진을 전해 드렸더니 그게 마음에 걸렸나보다.





‘인사동, 봄날은 간다’ 사진전에 오셨던 이계익 장관도 보고 싶어진다. 
노 풍류객의 아코디온 소리가 아직까지 귓전에 생생하다.

그 와중에 민영시인과 연극배우 이명희씨가 나누는 밀담은 무엇이었을까?





혼 술로 속세를 마감한 적음선사도 내 눈에 밟힌다.

땡초처럼 살았지만, 마음은 깊다. 그가 기거한 '일소암'에서만 볼 수 있는 속내다.

정선 '만지산축제'에서 불렀던 '긴머리 소녀'도 잊을 수 없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중이 부른 노래라 다들 배꼽 잡았지만, 나는 슬펐다.






별을 그리다, 별 따라 간 강용대 화백,

인사동에서 일원짜리 동전 가진 사람에게 십원짜리로 바꾸어주는 퍼포먼스도 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인사동 거지 까딱이를 반기며, 대작해준 유일한 술 친구였다.

김용문씨의 '옹관장전' 퍼포먼스에서는, 왜 온 몸을 칭칭 감은 시신 역활을 자처했을가?

일찍부터, 더러운 세상 살고 싶지 않았나보다.





인사동 콧수염으로 통하는 김영수는 성질 한번 고약하다.

그는 마음이 상하면 두 번 다시 보지 않는 성격이다.

괴팍한 그의 박치기에 나가떨어진 사람도 여럿 보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장례식장 가다 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도 당했다.

장례식장에 구급차 타고 갔던 귀 막힌 사연이다.





 

문영태는 다리가 불편하지만, 지인들 전시에는 빠지지 않는 의리파다.

그가 그린 심상석을 보여 달래도 끝까지 보여주지 않더니,

결국 죽고 나서 모든 작품을 보여주었다.

저승에서 빙그레 웃고 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천상병 선생 뒷바라지로 고생하셨던 '귀천'의 목순옥 여사 모습도 안스러웠다.

천상병 선생 기리는 사업을 그렇게 악착스레 밀어 붙이더니, 결국 빚더미에 오르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돈을 못 구해 전전긍긍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신을 위한 삶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가련한 분인데...





온갖 기행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중광스님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났다.

만나뵈러 댁에 갔더니, 조기를 갈비처럼 뜯어 드시며 어린애처럼 식탁을 어지럽혔다.

사진처럼, 허접한 것들을 보여주며 이게 바로 작품이라는 것이다.

작업실에선 들통에 가득 담긴 먹물을 샤워하듯 온 몸에 부어 쑥대밭을 만들기도 했다.

자우지간 괴짜였다. 저승에서는 어떻게 사시는지 궁금하다.





'인사동 밤안개'로 불리는 목탄화가 여운도 그립다.

인사동 카페 '산타페'에다 양주를 맡겨두고, 술 값 없으면 그 술 마시라는 멋쟁이다.

자신을 위해선 남에게 부탁 한 번 않지만, 어려운 친구를 위해선 손발 걷어 부친다. 

자칭 '전푼련"(전국푼수연합회) 회장이시다. 






온 몸을 비틀며 시를 토해낸 이선관시인,

공단 폐수에 썩어가는 바다를 절규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썩어가는 인간들 정신에 통곡했을 것이다.





기타 하나 둘러메고 인사동을 떠돌던 유랑객 이종문씨는

대마초 한 모금에 세상 시름 다 녹이며, 아름답게 살다 떠났다.





정남규와 홍수진은 둘 다 병들어 떠났지만, 죽는 방식은 달랐다.

정남규는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 목 매달아 죽었지만, 홍수진은 병원에서 끌려갔다.

다들 정남규를 나무라지만, 누가 더 현명했는지는 생각에 따라 달라진다. 



 


홍수진의 시 처럼,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잠들지 않았다.





마지막 사진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심우성 선생이다.
민속극과 인사동을 온 몸으로 껴안고 사셨지만, 허허롭게 떠난 것이다.

넋전춤으로 선생의 넋을 기리는 제자 양혜경씨가 있어 그나마 위안된다.






그러나 죽는 것만 죽은 것이 아니다.

아무 일도 못한 채, 병석에서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이 더 불쌍하다.
어눌한 말로 낄낄 거리던 이청운화백 모습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이 원망스럽더라.






우리 모두, 그리운 사람들 추억이나 씹자.
죽는 것 보다 더 서러운 것은 잊혀진다는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이 사진이 찍힌 70년대에는 연탄이 추운 겨울을 나게 하는 유일한 월동대책이었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연탄 수레를 끌고 미는 장면에서
고달픈 서민들의 삶이 한 장의 그림처럼 묘사되어, 아련한 추억을 끌어들인다.

예전에는 한겨울을 나려면 연탄을 들이고, 김장하는 게 집안의 큰 일이었다.
때로는 연탄이 부족하여, 마을에 연탄 차 들어오기를 기다릴 때도 있었다.
시간 맞추어 연탄가는 일도 보통일이 아니지만, 잘 못 꺼트렸다간 연기깨나 뒤집어썼다.
요즘에야 번개탄이라도 있지만, 그 때는 장작이나 숯불에 붙였다.

유독 나에게 연탄은 가슴 아픈 기억이 더 많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였다. 창녕 영산의 고향집은 연탄아궁이가 길 쪽에 나 있었는데,
얼굴이 연탄불에 새까맣게 타 죽은 여자걸인을 새벽에 발견한 것이다.
추운 겨울밤에 불 쬐며 졸다 연탄가스에 질식해 화덕에 얼굴을 묻은 것 같았다.

그 끔직한 기억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부산에 가 계셨던 형님 두 분이 하숙방에서 연탄까스에 질식해 돌아가신 것이다.
연탄에 대한 두려움이 컸지만, 그러나 결코 멀리할 수 없는 존재였다.
호시탐탐 목숨을 노리는 무서운 불덩이와 다들 동거동락하며 살았다.
그리고 채탄하는 과정에서는 얼마나 많은 광부들의 목숨을 앗아갔던가.

서울로 상경해서는 웃지 못 할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천상병선생께서 돌아가시어 조의금 받은 돈뭉치를 할머니께서 연탄아궁이에 숨겨놓았는데,
밤 늦게 돌아오신 목여사님이 방 데우려 불을 붙이다, 고스란히 재가 되어버린 적도 있었다.
뒤늦게 알게 되어, 그 재를 고스란히 한국은행에 가져가 일부 되돌려 받았다지만,
연탄과 관련된 별의 별일들이 많았다.

오늘따라 발갛게 타오르는 연탄불이 그리워진다.

70년대 ‘월동전쟁’이란 제목으로 나경택 기자가 발표한 사진을 보도사진 연감에서 옮겼다.

사진, 글 / 조문호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사진가

싱그러운 봄은 찾아왔건만, 정작 인사동의 봄은 기약이 없다. 

그토록 인사동에 대한 문제점과 개선책을 떠들어도 다들 ‘마이동풍’이다.

“조 통수는 불어도 세월은 간다”며 예전 군인들이 비아냥거리듯, 관련부서는 코 방귀조차 안 뀐다.

작은 이득에 눈이 어두워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인사동 상인들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말 빨 없는 예술가들의 넋두리만 술집으로 흘러 다닐 뿐이다.

한 때, “포도대장과 순라꾼들이 사용한 ‘인사문화마당’을 포장마차 장사꾼들로부터 되찾아 예술공간으로 활용하자” /

“인사동에서 열리는 전시의 주단위 리플렛을 거리에 내 놓아 관광객들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이자” /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테르트르 광장처럼, 거리에서 작업도 하고 작품도 팔 수 있는 무명작가 거리를 조성하자“ /

인사동을 우리나라 미술시장의 메카로 만들기 위해 인사동과 북촌지역을 연계하는 국제적인 아트페어를 개최하자“는 등

예술가들의 제안을 나팔 불어댔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다. 
 
지금 전통문화거리를 표방하는 인사동에 ‘한국은 없다’는 볼멘소리가 거세다.

치솟는 임대료를 못 견뎌 문화관련 업소들은 외각이나 다른 지역으로 밀려나고 있다.

거리의 상품 90%가 중국산으로, 마치 인사동이 차이나타운 같다.

특색 없는 유락지로 전락한 중국 베이징의 ‘유리창(琉璃廠)’을 꼭 닮아간다.

인사동 한복판에 대형 관광호텔과 곳곳에 상가건물이 지어져, 국적불명의 관광지화는 가속화될 것이다.

이제 문화특구로 내세울만한 예스러움이나 인사동 풍류는 오간데 없다.

인사동은 조선 말기부터 100여 년간 고미술의 메카였다.

양반들은 북촌에 살았고 화공이나 도공 같은 중인들이 살던 곳이 인사동이다.

1924년 ‘통인가게’가 생기면서 이 일대에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섰다고 한다.

인사동이 현대적인 화랑거리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현대화랑에 이어 동산방, 선화랑, 경인미술관, 학고재, 국제화랑, 미화랑, 진화랑 등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을 이끄는 메이저급 화랑들이 빠짐없이 인사동에 문을 열었었다.

이들 따라 크고 작은 화랑뿐 아니라 골동품점, 표구점, 필방, 공방 등 미술 관련 가게들이 들어서며,

인사동이 명실 공히 ‘한국 미술의 메카’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인사동 거리에 관광객들은 넘쳐나지만, 백 개가 넘는 인사동 전시장들이 텅텅 비어있다.

외국 관광객들이 왜 인사동을 찾겠는가? 인사동 고유의 색깔이 없는데, 다시 올 리 없다.

그들에게 인사동만의 문화와 풍류를 느끼게 하려면, 군것질거리나 잡동사니를 파는 거리환경을 정비하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텔링을 해야 한다.

인사동은 조선시대 궁중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가 있던 곳이다.

그 도화서를 복원해 작가들을 선발하는 방법은 없는가?

그 곳에서 전통적인 민화나 서예, 도예 등을 제작해 외국관광객들에게 직접 판매할 수 있도록 하자.

그리고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었다.


민영환 선생의 자결 터와 민병옥대감의 저택인 ‘민가다헌’도 잘 보존돼 있다.

이를 알리는 표지판들도 너무 작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한 역사적 자취를 바탕으로 이야기 옷을 입히자.

가깝게는 80년대 인사동 낭만을 풍미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중광스님도 있다.

어쩌면 먼 조선시대 이야기보다 더 가깝게 와 닿을지도 모른다,

어깨에 늘 봇짐을 메고 다녔던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귀천’에 죽치며 막걸리 집을 드나들었던 천상병시인과

영국산 장미뿌리 파이프를 문채, 술보다는 커피 향을 더 즐기던 박이엽 방송작가,

그리고 거지행색으로 인사동을 누비던 중광스님의 자유분방한 행색들 말이다.

그 분들의 동상을 만들어 앉혀, 인사동 거리분위기부터 한 번 바꾸어보자.

아기자기한 인사동만의 골목 문화를 가꾸어, 인사동을 드나드는 예술가들의 사람냄새도 담자.

다 같이 힘 모아, 인사동을 낭만1번지로 되돌리는 봄바람 한번 일으키자.
 



지난 18일 오전 무렵, 별 볼일 없이 인사동에 나갔다.
주말은 봄나들이 나온 관광객들로 붐빌 것 같아 금요일을 택했는데,

포근한 봄 볕 탓인지 거리가 유난히 정겨웠다.

유치원 어린이들의 재잘거림도 여기저기 들리고,
장대만한 흑인이 피에로처럼 머뭇거리는 모습도 만났다.
‘이즈갤러리’ 건물은 한국화가 김현정의 전시 광고로 뒤 덥혀 있었다.
4개 층 전관을 한 달 가까이 빌려 ‘내숭놀이공원’이란 전시이벤트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인사동에 대한 향수를 달랠 수 있는 예스러움은 만날 수 없었다.


한 때, 80년대 인사동 낭만을 풍미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의
동상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가 추진된 적이 있었다.

‘아라아트’를 운영하는 김명성씨가 사재를 들여, 벤취에 앉히거나
골목 어귀에 세우기 위해 조각가 최옥영씨에게 맡겨 시안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그 뒤 김명성씨가 빚더미로 벼랑에 내몰리며 보류되고 만 것이다.

그 프로젝트를 서울시에서 물려받아 재추진하는 방법은 없을까?
지금 국적불명의 관광지가 된 인사동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물꼬를 터야한다.
인사동만의 문화와 풍류를 위한 다양한 사실적 스토리텔링이 절실한 것이다.
그 분들의 동상을 만들어 앉혀, 인사동 거리분위기부터 바꾸어보자.

사진,글 / 조문호

























세상에서 제일 가식 없이 살고, 가식 없이 노래한 시인이 천상병시인이다.
그 천진난만한 위인께서 하늘나라로 떠난지도 어언 20여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다.


오늘 따라 선생님이 그토록 간절히 생각나는 건, 또 한해를 보내야하는 인생의 무상함 같은 게 아니라,

선생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결심을 뒤늦게 접어야 하는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이다.


평생을 아내에게 짐 지우며 살아 왔으나, 이제 한계에 달했다.
온 종일 내년부터 벌일 일거리에 몰두하다보니, 불현 듯 선생님이 그리워졌던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60이 넘어 철이 든 것 같다지만, 나는 70을 앞두고 철이 들려니,
더 미련하다. 올해처럼 돈에 대해 분노를 일으킨 적도 별로 없었다.
오죽하면 자칭 사회불만자라고 떠벌리며, 정치와 섞은 사회구조에 악을 쓰며
욕설을 퍼 부었겠는가?


돌이켜 생각하니 꼴리는 데로 잘 살아왔고, 돈으로 얻을 수 없는 잔잔한 행복들도 가득했다.

30여년 전에는 천상병선생님이 사시던 의정부 댁에 가끔 들린 적이 있었다.
인사동에서 만나면 세금 내라지만, 댁에서는 절대 세금을 받지 않는데다
가족처럼 격식을 가리지 않아 좋았다.


한 여름을 빼고는 내복차림으로 사셨다.
오줌 누는 모습을 보고 뒤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니,
“그서 비나~ 비나~ 앞에서 찍어야지~ 앞에서 찍어야지~”라며 능청도 잘 떠셨다.


그런데 선생님은 너무 땡보셨다.
아무도 선생님에게 술 한 잔 얻어 마신 분이 없을 것 같다.
매번 인사동대폿집에 술을 맡겨두고 드시지만, 한 잔 마시라는 소리 들어 본 적 없다.


"저승에서 만나 뵈면, 그 때는 꼭 얻어 마셔야지..."



86년(인사동 대폿집)과 87년(의정부자택)에 찍은 조문호사진으로,
‘눈빛출판사’의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추모 사진집에서 옮겼다.


 

오랜만에 시인 강 민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지난 21일 오후1시경 ’하누소‘에서 만나 이행자시인과 함께 식사를 하였고,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 한 잔 더했다.
강민 선생께서는 한동안 허리가 아파 고생했으나, 이젠 한결 나아졌다고 하셨다.
그날은 가난한 이행자 시인께서 밥값 술값을 계산했는데, 신발마저 예뻤다.

오후6시에는 조준영시인과의 만찬약속이 있었다.
정영신과 함께 한 ‘유목민’ 옆자리에는 노현덕, 정기영씨의 모습도 보였다.
나중에는 뜻밖에도 조해인시인 내외가 나타나 함께 어울렸다.

조해인씨는 명상에 관한 글을 탈고해 ‘해냄출판사’대표를 만나고 왔다고 했다.
그리고 천상병시인의 근거지를 빨리 인사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제안도 했다.
'천상병문학상'의 선정기준도 작품의 우월성에만 한정하지 말고,
천선생의 시 색깔에 맞는 작가를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고인의 친구 분들은 물론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등 돌린 의정부행사보다는
생전 선생의 삶과 창작의 근거지였던 인사동에서 주관할 것을 모두들 바라고 있다.
천상병시인을 내세워서라도 인사동문화와 풍류를 되살렸으면 좋겠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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