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3월20일자에 실린 "건달 할배, 채현국이 말한다 “꼰대들에 속지 말라”는 기사다. 

인사 구술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해방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다 나온 말인데,

소 선친께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야기와는 배치되는 내용이다.

해방될 무렵의 채현국씨 나이는 10살로 그 정도면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알만한 나이인데,

학교친일교육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이건 일제 황국신민으로 생활화된 가정교육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저작권 한국일보]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이 지난 15일 서울 필운동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가진 근현대사 구술채록 대담에서 어릴 적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문제되는 인터뷰 내용-

"선생이 태어난 1935년의 세상은 이미 일제 시대였다. 채 선생은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생각했다. ‘조선총독부’라는 게 있다고 했지만 조선과는 무관하다 여겼다. ‘대한’이란 말도 해방 이후에 대한민국 정부라는 게 들어서고 나서야 그런 단어가 있다는 걸 알았다. 채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나라가 해방됐다고 온 동네 사람들이 미친 듯 좋아하며 난리가 벌어졌는데, 스스로를 ‘황국신민’이라 생각해온 나로선 ‘나라가 망했다는데 왜 저리 좋아하나’ 의아해했다”고 말했다.


-아래는 인터뷰 기사 전문이다-


"건달 할배, 채현국이 말한다 “꼰대들에 속지 말라”
개인사 구술 작업하는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2019.03.20 / 한국일보 / 스크랩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과 대칭되는 말을 꼽으라면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가 있다. 하지만 앞의 말과 달리, 뒤의 말은 그다지 인기가 없다. 사회 변화가 급격해 노인의 가치가 떨어지기도 했거니와, 그나마 영향력 좀 있다는 노인들이 한다는 얘기는 ‘이만큼 먹고살게 된 게 다 누구 덕이냐’는 것이 대부분이어서다.

조선시대 행장(죽은 이의 언행을 기록한 문장)의 전통까지 겹쳐져서일까. 번듯하게 한자리 차지했으면 무조건 훌륭한 사람이고, 혹 잘못이 있다 해도 그저 어쩔 수 없었을 뿐이며, 그런 자리 하나 못 차지해본 사람은 바보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런 방식으로 내면적 깊이를 제거해버리고 나니, 우리 사회엔 제대로 된 자서전, 평전, 구술 문화가 없다.


[저작권 한국일보] 장신(왼쪽부터) 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위원과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가 채원국 효암학원 이사장과 대담을 나누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노인에게 속지 말라

그래서 ‘채현국’의 존재는 소중하다. 1935년생인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이하 ‘선생’)은 1945년 8ㆍ15 해방, 1950년 6ㆍ25 전쟁, 1960년 4ㆍ19혁명 같은 굵직한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고, 민주화 운동을 후원했고, 학교를 운영 중이다. 그럼에도 ‘내 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건달 할배’라는 별명답게 오히려 젊은이들더러 “늙으면 뻔뻔해지는 비열한 꼰대들에게 절대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한다.

요즘도 여전하다. 심각한 사회문제로 거론되곤 하는 ‘세대갈등’이란 말 자체도 거부했다. 채 선생은 “세대갈등이란 말 자체가 사람을 속이는 말”이라 본다. 그는 “돼먹지 않은 이들이나 세대갈등이라 부르며 수작을 붙이려는 것”이라더니 “그런 사람들은 원래 젊어서도 형편없었는데, 젊은 시절엔 드러내놓질 못하다가 늙으니까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자신이 서울대 출신임에도 서울 광화문광장, 서울역 일대에 자주 나타나는 ‘태극기 부대’를 두고서도 “서울대 나와 의사하거나 법대 나온 내 주변 사람들도 앞에 안 나서고 뒤에서 100만원, 200만원씩 후원한다”며 “일제시대 때 공부 잘하는 게 수지 맞는다는 걸 알고 그저 공부만 한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한다”고 매섭게 쏘아댔다.


◇8ㆍ15 해방이라는 ‘충격’

그런 채 선생은 요즘 구술 작업에 재미를 들였다. 일제시대 황국신민으로 자라난 기억, 한국전쟁이 끝난 뒤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해 연극단원으로 활동했던 추억, 아버지 채기엽씨와 연탄공장과 탄광사업을 일으킨 경험 등을 바탕으로 끝없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낸다. 주로 문헌자료를 뒤적이던 현대사 연구자들도 그의 생생한 기억에 호기심을 내보였다. 실제 몇몇 학자들은 올해 초부터 채 선생의 이야기를 채록하고 있다. 지난 15일 서울 필운동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채 선생은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 장신 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위원과 마주했다. 두 번째 자리였다.

채 선생이 파격적 언행을 거듭하는 건 1945년 8ㆍ15 해방이 안긴 충격 때문이다. ‘해방의 기쁨’이 아니라 ‘해방의 충격’이라 표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채 선생이 태어난 1935년의 세상은 이미 일제 시대였다. 채 선생은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생각했다. ‘조선총독부’라는 게 있다고 했지만 조선과는 무관하다 여겼다. ‘대한’이란 말도 해방 이후에 대한민국 정부라는 게 들어서고 나서야 그런 단어가 있다는 걸 알았다. 채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나라가 해방됐다고 온 동네 사람들이 미친 듯 좋아하며 난리가 벌어졌는데, 스스로를 ‘황국신민’이라 생각해온 나로선 ‘나라가 망했다는데 왜 저리 좋아하나’ 의아해했다”고 말했다.


◇ “생각하며 살자”

세상이 한번에 뒤바뀐 뒤 이제껏 자기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세뇌된 친일파’에 불과했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은 그 이후 채 선생에게 세상을 달리 보는 눈, 달리 사는 법을 일러줬다.

그걸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생각하며 살자’다. 해방은 “지금까지의 내 모습이 권력자가 훈련시킨 데 따른 ‘반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일제시대 국민학교에 들어가면 배운 적도 없는 일본말을 해야 했고, 말하지 못하면 얻어맞았다. 뜻도 희미한 일본어 군가(軍歌)를 수없이 불러야 했다. 하지만 “지금도 술 한잔 들어가면 그 노래가 잘도 나온다”고 했다. 생각 없이, 주어진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다가는 어떤 엉터리 같은 짓을 할지 모를 일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채 선생은 “해방 이후, 어른들을 믿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서울대? 가정 학대의 정점

해방 뒤 상황은 처참했다. 그 전까지 일본어만 썼으니 중ㆍ고등학교 가서는 우리말을 제대로 하는 선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릴 적 우리말 소설을 즐겨 읽었던 채 선생은 “이만저만 실망한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1956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지금도 “서울대가 최악의 학교”라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우리말이 낯선 이들은 한문으로 된 시만 읊었다. 전공 수업도 교수가 우리말을 겨우 외워서 가르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해방됐으나 그들은 일본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 땐 연극반에 심취했다. 배우 이순재와 같은 극단 단원으로 함께 활동했다.

채 선생에게 서울대란 그저 시험 잘 치는 학생을 뽑는 곳일 뿐이다. 그는 그런 시험 중심 체제를 가학, 그러니까 ‘가학(家學)’이 아니라 ‘가학(家虐)’이라 부른다. 집안의 공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집안의, 가정의 학대다. 자기만의 독서, 탐구를 통해 스스로 생각을 정립해 나가는 게 아니라 그저 집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대학 가고 직장을 구한다. 채 선생은 이걸 “통치에 방해되는 생각은 아예 싹을 잘라 버리는 방식”이라 부른다. 이런 방식이 지금까지 쭉 이어졌다.


◇탄광 부자 … 과감히 접다

채 선생의 이런 사고방식은 자신을 엄청난 부자로 만들어준 1960년대 광산 경영에까지 이어졌다. 광산은 원래 아버지 사업이었다. 1952년 연탄공장을 시작한 아버지는 광산주와 계약을 맺고 채굴한 광물 가운데 일부를 수수료로 내는 독립 경영인 ‘덕대’였다. 광산 사업이 잘 풀리지 않자 연극반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배우가 되려고 당시 서울중앙방송국(현 KBS)에 들어갔던 채 선생이 뛰어들었다. 공격적 경영으로 그야말로 떼부자가 됐다. 당시 소득세 납부 순위로 열 손가락 안에 들었다. 개발 독재시대였지만 광부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무료 진료를 제공했다. 또 흥국탄광은 그 시절 민주화 운동가들이 숨던 도피처이자, 해직기자들의 궁한 살림을 돕는 융통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원래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아버지 사업 잠깐 거들어 드리는 게 목적이었지 돈을 크게 벌 생각도 없었고 부자가 되는 게 창피했다”는 이유로 채 사장은 1973년 그간 잘 운영하던 흥국탄광을 10년치 퇴직금을 광부들에게 쥐여주는 방식 등으로 모두 정리했다. 채 선생이 그나마 아버지에게 이어받았던 것은 효암학원 이사장(경남 양산 효암고, 개운중)직이다. 이건 아이들을 키우는 거니 할 만하다 생각했다.


◇제대로 된 기억 전승, 그게 어른의 임무

채 선생의 거침없는 입담으로 오전 10시에 시작된 구술 채록은 점심 시간을 훌쩍 넘긴 뒤에야 끝났다. 3시간 가량 이어진 이야기 행군 뒤에도 고령의 선생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채 선생이 구술에 열정적인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처럼 ‘기억 전승’에 나서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었던 ‘해방의 충격’ 같은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직접 역사를 써야 한다. 채 선생은 도서관 분류법을 펼쳐 보였다. 철학, 종교, 사회ㆍ자연과학, 예술, 언어, 문학, 역사 등. 그는 “각 분야에 정통한 사람들이 시대 경험을 구술하면 광범위한 정보들이 쌓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용비어천가식 구술은 안 된다. 돌직구처럼 묻고 정직하게 대답해야 한다. 채 선생은 “묻는 사람이 혹시 노인의 체면을 구길까 봐, 질문의 내용이 가혹할까 봐 망설여서는 안 된다”며 “더 엄격한 기록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 선생은 노인들에게 기록을 하라고 외쳤다. 대신 이런 조건을 붙였다. “결코 자신의 과거 잘못을 외면하는 합리화는 하지 말 것.”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이지녀 맞이’전이 지난 29일 ‘창성동 실험실’갤러리에서 개막되었다.






황해도 굿을 하는 이지녀 만신은 김금화선생 신딸로 예능에 다재다능하다.
옛날에는 무당도 기생처럼 소리와 춤은 물론 무속화나 지화를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재능이 있어야 했다.

요즘은 무속화나 지화 등 대부분을 전문가에게 맡기지만, 이지녀 만신은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한다.
본래부터 무당은 끼를 타고 나야 할 수 있으나,
그 끼에 부단한 노력이 합쳐져 이지녀 만의 꽃을 피워낸 것이다.






서도소리를 배우기 위해 서도소리 이수자인 오복녀 선생을 따라 다녔고,
무신도를 그리기 위해 단청장 만봉스님과 판화가 김봉준 화백으로 부터 지도를 받았다.
굿문화연구소나 흙손 공방, 우리 옷 만드는 모임에서 활동하는 등
모든 기능을 온 몸으로 습득했다.






다양한 재주야 진즉 알았으나, 무신도 전시회를 한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무신도가 신당을 장식하는 수준을 넘어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 아닌가?






요즘 전시장에 잘 다니지 않지만, ‘이지녀 맞이’ 전시는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이지녀씨는 인사동 사람들 모임이었던 ‘창예헌’ 맴버이기도 했다.






29일 일찍부터 서둔 것은 꼭 보아야 할 영화 ‘김군’이 끝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관람 시간에 차질이 생겨 좀 늦었는데, 초행길이라 한 참을 헤매었다.
시골영감이 서울 김서방 집 찾아 가는 격이었다.
자하문로를 돌고 돌다 찾게 된 것은 조그만 한옥 전시장 앞에 세워놓은 무당집 같은 오방색 깃발 때문이다.






전시장은 발 디딜 틈 없었다.
이지녀 만신과 박수 등 굿판을 벌일 주인공은 말할 것도 없고
채현국선생을 비롯하여 박현수, 홍석화, 임계재, 김신명숙, 권오중, 김용선, 이한구씨 외에 
모르는 분이 더 많았는데, 안쪽에 정영신 동지의 모습도 보였다.
전시장에 올 줄 알았더라면 바쁜 걸음 칠 필요 없이, 시간 날 때 천천히 와도 될 텐데...






비집고 다니며 작품부터 보았는데, 무신도를 비롯하여 흙으로 빚은 신전, 지화, 장신구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마치 신당에 들어선 느낌인데, 이지녀 만신의 신 끼가 돋보이는 자리였다.





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무신도’ 또는 ‘맞이’라는 그림에는
일월성신, 옥황상제, 삼신, 칠성, 제석, 산신, 서낭, 장군, 동자, 대사 등 많은 신들이 등장한다.






무신도는 본래 민화처럼 과장되거나 익살적인 표현이 있어 흥미롭다.






이지녀 만신의 무신도는 무시무시한 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 난 모던한 창작이라 친근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많은 만신을 만나면서 들었던 이야기와
자신이 무당의 길을 걸으며 느꼈던 소중한 경험이 더해져 잔잔한 울림이 있다.






그런데, 전시준비에 힘들었던지 이지녀씨 표정이 편치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팠단다.

그녀의 표현으로 ‘시집가는 날 등창 난다“는 속담처럼 간신히 추슬러 나왔다는 것이다.






또 하나 놀란 것은 이지녀씨의 인기도였다.
펜클럽이 생길 정도인데, ‘이지녀 맞이’도 펜클럽에서 주선했다는 것이다.






축사를 해주신 채현국선생께서는 돌아가신 자당께서도 신 끼가 있어

그걸 억누르고 사시느라 힘들었을 것이라는 옛날 이야기도 하셨다.

당시야 양반가문에서 있을 수 없는 천한 직업으로 여겼으니까...





난, 무속을 종교이기 전에 종합예술로 본다.

춤, 소리, 그림, 조각 등 모든 예술이 어우러진 자리인데,

진득한 삶의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니 이보다 더한 예술이 어디 있겠나?






이지녀 만신은 30여 년 동안 황해도 굿을 해왔으나, 서도 소리꾼으로 더 유명하다.
황해도 굿은 두 차례 밖에 보지 못했지만, 전국민요경창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서도소리는 여러 차례 들었다.
몇 년 전에는 국립국악원에서 열린 서도소리 창극에 출연했는데,
오랫동안 다져진 이지녀 만신의 소리가 압권이었다.





잔잔한 농음의 애잔한 소리는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살살 녹였는데,
그 때 이지녀씨 대감놀이가 창극의 하이라이트 였다.
이 날도 인사와 축사가 있은 후 맞이굿과 대감놀이를 했는데,
신명난 굿판에 복이 슬슬 들어오는 것 같더라.






그런데, 좀 섭섭하더라.
복을 축원하며 시루떡을 잘라 주는데, 다른 사람은 입에 넣어주면서 나는 손에 집어주더라.
이거 사람 차별하는 거 아닌가? 그냥 웃으려고 해 본 소리다.


무신도의 진수도 맛보고 복까지 받았으니, 도랑치고 게 잡는 일이 아닌가.






이 전시는 자하문로 12길 11-5 ‘창성동 실험실’갤러리(010-5413-6552)에서
6월4일까지 이어지니, 놓치지 마시길...


사진, 글 / 조문호
































































가난한 작가를 돕는다는 쓴 맛이 사는 맛이란 전시가 아직까지 완결되지 않고 있다. 

그 문제점과 분명한 결산을 요구했다가, 별의 별 이야기를 다 듣고 있다.


전시를 추진했던 자가 나더러 무고죄로 고소한다지만, 법으로 따지자면 무고죄가 아니라 사기죄나 횡령죄에 속한다.

내용중 신학철선생의 작품 값 전달 유무는 내가 파악할 때는 지급되지 않았지만, 그 후 지급되었다기에 그 부분은 삭제했다.

그리고 채현국선생의 실명은 대표하는 분이라 밝혔지만, 진행자의 실명은 거명하지 않았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스스로 댓글 달며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사방에 얼마나 쑤셔대며 내 욕을해댔는지, 주변 분들의 전화도 받지 못할 정도였다. 

나더러 사과하라는데, 뭘 사과하라는지 모르겠다. 결산을 밝히라는 것이 어디 사과할 문제냐?

개인적인 일로서, 자기 먹고 사는 밥그릇 걷어 찬 문제라면 백 번 사과한다.


간접적으로 들리는 이야기로는, 90년대 공덕동 채현국선생의 풍림오피스텔에서 신세져 놓고,

어떻게 감히 선생의 일에 딴지를 거냐는 이야기에서부터,

대마초를 문제 삼아 잡아넣으라는 등 별 치졸한 이야기가 다 나오고 있다.

아무리 채선생에게 신세졌다 해도 잘 못을 말씀드리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더 나쁘다.

 

그 풍림오피스텔건은 내가 부탁한 것이 아니라 채선생님께서 비어 있으니 사용하라 해서 들어 간 것이다.

그렇지만, 임대료와 관리비까지 다 부담해야 했으니, 가난한 사진가로서 힘들었다.

옥탑방이긴 하지만, 일과 관련 있는 인사동과 충무로의 사무실이 더 편했고,

관리비까지 내야하는 임대료에 허덕이다, 결국 빚만 지고 나온 셈이다.


솔직히, 인사동에서 공 술 얻어 마신 죄는 숱하다.

그리고 가끔 술집에서 지폐 한 장씩 나누어 주기도 했으나, 난 그 것도 좋지 않게 생각한다.

기분 좋아 선심 쓰는 것은 좋지만, 사람을 길들이는 나쁜 방법이기 때문이다.

지금, 난리 치는 친구도 그렇게 망가진 사람아니던가? 도와주려면 보이지 않게 확실히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대마초문제는 인터넷이나 언론에 공개적으로 합법화를 요구하는 일이라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잘 못된 일은 바로 잡아야 할 문제이니, 문제삼아 주면 오히려 고맙게 생각한다.

그 내용을 알고 싶은 분은 인터넷에 사진가 조문호의 대마초흡연에 대한 진술과 소견이란 글을 찾아보면 알 수 있고,

신문에 대마초 합법화 과연 남의 일인가?’란 칼럼까지 쓰가며 법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 친구 정말 사람 잘 못보았네. 두리뭉실 웃고 넘어가는 옛날의 조문호가 아니라, 무서운 것이 없는 막가파다.

이제 모든 걸 버렸으니, 죽기 밖에 더 하겠는가?

옛 날에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란 생각에 잘 못된 일을 눈감은 적이 많았으나, 나이가 들어가며 엄청 후회하고 있다.

그런 사고방식이 누적되어 온 나라가 더럽게 되지 않았는가?

누구나 정의롭게 살고 싶은 생각은 다 있겠지만, 가족이 걸려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난, 남에게 까칠하게 보이더라도 할 말은 하고 잘 못된 것은 바로 잡는 싸움꾼을 자처했다.

착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에 더 분개하지만, 갑질 하는 사람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행여 마누라에 불똥 튈까 염려되어 이혼까지 해가며, 작정하고 빈민촌에 들어 간 사람이다.

잘 못된 일을 알게 되면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그냥 두지 않았으니, 그동안 적도 많이 만들었다.

내가 사는 동자동은 물론 인사동의 예술판이나 사진판에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잘 안다.

그렇지만 잘 못된 관행이나 위선적 이기주의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문화예술계의 한 병페이기도 한, 자선을 간판으로 내 건 이런 형태의 일들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관행처럼 대충 넘어가는 일도 막아야 한다.

더구나 나는 이 전시의 참여 작가로서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밝힐 것을 요구할 권리도 있다.

나 뿐만 아니다. 이 전시에 함께 한 작가가 70명이고, 뜻을 같이 하거나 후원하신 분은 헤아릴 수가 없다.

최소한 관련된 분들께는 투명한 결과를 보여 주어야한다.

현재까지의 정산 결과를 전시와 관계된 모든 분들께 통보해라.

 

이 전시를 집행한 당사자도 채현국선생을 더 이상 난처하게 해서는 안 된다.

결국 돈이 걸리는 문제지만,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먼저, 도록 제작비와 대관료, 뒤풀이 비용 등 제반 경비가 얼마인지부터 밝히고,

그 다음에 팔렸다는 12점의 판매가와 기부한 차액을 밝혀내라.

그리고 전시를 후원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가져온 돈 봉투도 낱낱이 기록하라.

채선생을 위해 내 놓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가난한 작가들을 위한 자선전이라

개인 주머니에 들어가서는 않되고, 조그만 금액이라도 근거를 남겨야 한다.

 

그리고 작품이 팔리지 않은 8명의 작가에게 1,450만원을 나누어 주었다고 하지만, 납득이 안 간다,

많게는 430만원에서부터 적게는 50만원을 주었다는데, 무슨 기준인지도 모르지만,

대통령도 할 수 없는 이런 권한을 어떻게 심부름꾼이 휘두를 수 있는가?

추측컨대, 오래전 작품 값을 갚지 않아, 그 빚을 갚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니 돈을 돌려 달라 할 수도 없는데다, 남은 돈은 쓰 버리고 없을테니 막막할 것이다.


그 친구의 어려운 사정을 잘 알고 있는데다, 나쁜 친구가 아니니 더 이상 어쩌랴!

차라리 그동안 고생한 수고비를 요구하라.

수입과 지출만 분명하게 밝혀놓으면, 그 다음은 채선생께서 결정할 일이다. 혼을 내던, 용서해 주던...

그리고 가난한 작가를 돕는 이 전시 결과에 대해 채선생님의 분명한 말씀도 있어야 한다.


글 . 조문호


 

 





셋째 수요일이면 인사동 사람들이 만나 술 한 잔 마시는 날이 아니던가?


지난 17일은 힘들어도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날 따라 카메라가 없어 사진조차 찍을 수 없었으니,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그러나  ‘한국미술관’에서 열리는 6남매 초대전에는 들려야 했다.

미국 사는 최정자 시인께서 가보라는 전시라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종로3가역에서 내려 찾아 간 시간은 오후5시 무렵이었다.
도착 직전 정영신씨 한테 전화가 걸려왔는데,
오후4시에 오프닝 행사를 끝냈으니, ‘툇마루’로 오라는 것이다.






오랜만에 맛보는 '툇마루' 된장비빔밥 생각에 허겁지겁 달려갔더니,
뒤풀이 장소가 아니라, 정영신과 공윤희씨만 있었다.
그 전시는 뒤풀이가 없어 일찍 끝 났다는 것이다.
전시작품은 물론 이씨 6남매의 얼굴도 보지 못했으나, 어쩌랴!

된장비빔밥 한 그릇 맛있게 먹고 나오니, ‘민주화기념사업회’ 이종률씨가 들어왔다.
반가웠으나, 사진을 못 찍으니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무장해제되어 버리니, 몸도 마음도 편치않았다.


‘유목민’으로 가다 길거리에서 임영주선생과 화가 최대식 내외도 만났으나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우연히 '쓴 맛이 사는 맛' 참여작가를 만났는데, 전시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았다.
‘유목민’에서는 유진오, 김대웅, 전활철, 박혜영, 임태종, 최종선, 이인섭, 이희종씨 등

반가운 분들을 많이 만났다.






그 날 술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도 두 달 전에 치룬 ‘쓴 맛이 사는 맛’ 전시 이야기였다.
난, 일찍부터 들은 게 많아 걱정만 하고 있었는데, 그게 현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사실상 이 전시는 채현국선생께서 평생 쌓아 온 덕에 똥칠하는 전시였다.
그 밑에서 꼬봉 노릇하는 이들의 알랑방구로 선생님의 눈을 어둡게 만든 것이다.

최근 채선생님 답지 않은 모습에 가끔 실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연세가 드시면 판단이 흐릴 수도 있다.

그럴 땐, 모시는 사람들이 바로잡아 드려야 하는데, 비위나 살살 마추며 부추긴다.


원인은 언론 병폐에 휘말린 것이지만, 요즘 채 선생님께서 힘든신 것 같다.






이번 전시 자체가 채선생님 얼굴 팔아 개인적 욕심을 채우려는 나쁜 발상의 기획이었다.
채현국선생께서 복막염수술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잘 아는 작가들을 끌어 모아 인사동에서 전시 한 번 열자며 부추긴 것이다.
그래서 급조된 전시가 ‘쓴맛이 사는 맛’이란 전시인데, 오로지 개인적 장사 셈으로 진행된 것이다.


신학철, 황재형, 이우환, 방혜자, 이제하, 임창열, 구중서, 주재환, 김정헌, 민정기씨 등

화단의 내노라 하는 70여명의 작품을 끌어 모아 우스꽝스러운 전시를 마련한 것이다.
전시를 추진하는 사람의 말만 믿고 채선생님께서 전시를 밀어 부쳤는데,

가난한 작가들을 돕는다는 처음의 취지와는 딴 판이었다.





한 예로, 신학철선생의 작품은 팔았으나, 벌써 모 옥션 경매에 배값으로 작품이 나왔단다.
낌새 챈 화가들이, 전시자체의 불만을 뒤늦게 쏟아 놓으며, 작품을 돌려받기 위해 안달이다.
오죽하면 황재형씨는 자기의 작품은 아예 팔지 않을 것이라며 작품을 돌려달라고 했겠는가?


뒤늦게 채현국선생께서 사태의 심각성을 느껴 결산 할 것을 요구했다지만, 이미 늦었다.

잘 아는 박인식, 김명성씨께도 마무리를 도와달라 부탁했으나, 모두들 손을 내저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공윤희씨가 이 문제를 떠 맡았는데, 누구의 작품이 얼마에 팔렸으며

그 돈의 사용처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목록을 요구했으나, 엉뚱한 소리만 한단다.


그동안 받은 돈으로 중형 승용차 랜트하여, 온갖 똥 폼 다잡으며 흥청망청 쓰고 다닌 소문도 자자하다.

더 웃기는 것은 사진을 우습게 여겨 그림 한 점 사면 보너스로 끼어 준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에게 당한 적이 한 번 있다.

내 사진 다섯 점을 가져갔으나, 10년이 되도록 30만원 밖에 받지 못했다.

당시 인사동 통인옥션갤러리의 초대전으로 산을 지우다란 전시를 했는데,

전시가 끝난 후 팔아 주겠다며 가져간 작품이 다섯 점이다.

그 때 통인에서 판매한 가격은 한 점에 평균200만원이었다.


그런데, 인사동 식당이나 술집 벽에 걸린 내 사진을 두 점이나 보았으나,

그 사진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가 사는 방식을 일찍부터 알기에,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40여년지기의 동생처럼 지내 온 사이다.

젊은 시절부터 인사동에 나와 천상병시인을 비롯하여 채현국, 이계익선생 등

어르신들을 보살피며 받는 작은 용돈으로 어렵게 살아왔다,

돈이 없어 물질적으로 도와주질 못할망정, 마음은 늘 형편이 좀 풀리기를 바랬기에,

주위에서 그를 탓하면 먹고 살아야 하니 어쩌겠냐?’며 인간적인 이해를 설득했다.

사실 장난을 쳐도 큰 장난도 못 친다. 소소한 돈거래로 욕을 먹기에 안스러운 측면이 많았다.



 


그렇지만, 이번 일은 절대 그냥 둘 수 없다.

존경 받는 채현국선생께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

더구나 평생을 가난하게 살며 소신 것 작업하는 인사동의 가난한 예술가들을 힘들게 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친분으로 덮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일을 그냥 두면 바로 사기꾼 된다.

    

우선 ‘쓴 맛이 사는 맛의 전시결산부터 빠른 시일내에 밝혀내라.

한 사람이라도 피해를 입혔거나 횡령을 덮으려 한다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

빠른 해결과 원만한 수습을 바란다.

 


[사진은 '쓴 맛이 사는 맛' 전시가 열린 11월 15일에 찍은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스크랩] 서울문화투데이 / 정영신기자


▲ ‘쓴 맛이 사는 맛'으로 인사동 작가전을 연 채현국 선생 Ⓒ정영신


인사동을 사랑하는 작가 60여명 참가,. 수익금은 생활 어려운 작가들에게 

‘쓴맛이 사는 맛’이라는 이름을 내 건 이색적인 전시가 지난 15일 오후5시 ‘인사아트프라자’ 3층에서 개막됐다.

'쓴맛에 생각도 하고, 쓴맛에 괴로웠고 아팠지만, 그 쓴맛에 사람이 깊어진다'는 '건달'할배' 채현국'선생의 말씀에 따라, 회화, 사진, 조각, 서예, 도예, 새김아트, 금속공예, 섬유공예 등 인사동을 사랑하는 작가 60여명이 뭉친 것이다.


 

개막식에는 참여작가 외에도 이부영, 임재경, 이애주, 유홍준씨 등 2백여명의 문화계 인사들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이 모인 전시가 쉽지 않은데, 바로 이것이 채현국 선생의 저력이 아닌가 생각한다.



 



  

▲ 전시 축하를 위해 참석해주신 이애주,이부영,임재경,채현국선생(왼쪽부터) Ⓒ정영신


건달할배 채현국 선생은 인사말에서 같이 어울리고 함께 살자는 의미로 이번 전시를 열게 되었는데, 전시회 수익으로 생활이 어려운 문화예술인들을 돕는다고 했다. 욕심을 부린다면 참여 작가들과 함께 남북을 걸어서 가보고 싶다는 말도 전했다.


  

▲ 방혜자선생의 '생명의 숨결' 15호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는 질타로 이시대의 어른으로 추앙받는 채현국 선생은 현재 경남 양산에 있는 효암학원 이사장이다. ‘쓴맛이 사는 맛’으로 세상에 쓴 소리를 거침없이 하는 선생의 시원시원한 입담에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어른이기도 하다.


  

▲ 주재환선생의 '이곳과 저곳' 캔버스에 유화 90.5x90.5cm,2008


시인 신경림 선생은 ‘쓴맛이 사는 맛’ 전시에 부쳐 “그는 거인이다. 키는 작지만 생각이 크고 시원시원하다/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고 큰 것을 향해 성큼성큼 발도 빠르다/ 그는 젊다/ 나이를 먹으면서도 전혀 늙지 않는다/ 그래서 늘 거침이 없고 늘 싱싱하다/ 게다가 그는 부자다. 돈은 없으면서도 늘 남을 도울 것을 생각하고/ 남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방법을 찾느라 분주하다/ 이웃과 친구들이 다 잘 살길을 찾느라 늘 바쁘다/ 가장 크고 가장 젊고 가장 부자인 그는/ 그래서 이 나라에서 가장 바쁜 늙은이다.”라고 썼다.

이 헌시(獻詩)에 채현국 선생의 삶이 오롯이 담겨있다.


  

▲ 김정헌작가의 '이승과 저승-시원소주' 캔버스에 아크릴과 종이꼴라쥬,91x91cm


채현국 선생의 부름에 놓았던 붓을 다시 들어 그림을 완성했다는 화가도 있었다. 박재동 화백은 개구쟁이 같은 채현국 선생의 초상화를 선보였고, 단색화의 대표작가인 이우환 선생의 작품 등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이 출품한 작품으로 전시장은 가득 메워졌다.



  
▲ 민정기작가의 '우리섬 독도 삼형제 굴바위' 105x107cm oil on canvas,2015

이번 전시에 참여한 많은 작가 중 1980년대 이후 민중미술을 대표해온 작가 신학철 선생은 캔버스 위에 포토몽타주, 포토리얼리즘 기법으로 시대정신에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함으로써 역사를 관념이 아닌 구체적 실체로서 형상화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특히 그의 작품 ‘모내기’ 그림은 1989년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당국에 압수되었고, 3개월 동안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판문점 풍경으로 분단의 아픔을 형상화했다.


  

▲ 신학철 선생의 '가야할 길' 116x81cm,2017


조절된 에너지와 침묵의 힘을 빛의 순간으로 보여주는 방혜자 선생은 ‘생명의 숨결’을 내놓았고, 시계가 멈춘 탄광촌의 삶을 그로테스크한 질감으로 그려내는 황재형 작가는 ‘Bus’를 출품했다.


  

▲ 황재형화가의 'Bus'53ㅌ72.7cm, 캔버스에 유채,1993


비닐과 골판지, 폐품과 종이 등을 재활용해 발랄하고 통통 튀는 작품으로 블랙유머를 시대정신으로 재현하는 주재환 선생의 ‘이곳과 저곳', ‘현실과 발언’의 창립동인으로 비판적 리얼리즘 작가이자 문화운동가인 김정헌 선생의 ‘이승과 저승-시원소주’, 인사동 그림판의 마당발 화가 장경호의 ‘묵시’는 삶에 지친 인간의 초상으로 오늘의 시대정신을 말하고 있다.


  

▲ 장경화화가의 '묵시' 72.7x90.9cm Oil on canvas,2011


조각가 박상희씨는 예수를 안고 있는 부처를 통해 세상의 다툼과 분리에 저항하는 ‘삐에타’를 선보였다. 우주의 근원적 생명과 사랑을 표현하는 화가강찬모는 ‘빛의사랑’을, 키치화풍의 전형성을 재창출하여 미학적 엄숙주의에 빠져있는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던 민정기화백은 우리시대 삶의 풍경인 ‘우리섬 독도 삼형제 굴바위’작품을 내놓았다.


  

▲ 박상희조각가의 '삐에타' 67x53x94cm, mixed media,2012


이번에 작품을 내놓은 대부분의 작가들은 채현국선생과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다. 채현국 선생은 인사동 허름한 술집을 찾아다니며 가난한 작가들의 술값을 말없이 내주고, 힘들어하는 작가에게는 슬그머니 지폐를 호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했다. 호탕한 웃음을 날리며 이 술집 저 술집을 떠돌며 주머니가 텅텅 빌 때 까지 사람 만나기를 계속해 온 구세주 같은 분이었다.


  

▲ 박재동 화백의 '채현국선생' 종이에먹,2017


작가들은 오랫동안 채현국 선생에게 빚진 술값을 갚기라도 하듯, 전시 소식에 망설이지 않고 흔쾌히 작품을 내놓았다. 어려운 예술가들을 돕기 위한 자선바자회지만, 잘 알고 지낸 작가들이 함께 어울리는 이러한 전시는 단발성으로 끝내는 것보다 해마다 했으면 하는 작가들이 의외로 많았다.


  

▲ 강찬모화백의 '빛의사랑' 53x72cm, 한지에 한국전통채색기법및안료,2017


참여 작가인 조문호 사진가는 오래전 인사동을 사랑하는 작가들의 모임인 ‘창예헌’ 사람들이 다시 뭉친 것 같다는 말도 했다. 2008년 창립되어 몇 년 전부터 흐지부지된 ‘창예헌’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 200여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기능을 상실한 오늘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다시 부활시키자는 예술가들의 목소리가 더 높았다.

채현국 선생은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것도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기 때문에 빈털터리가 되어야 인생이 행복하고 풍요로워진다고 말씀하셨다. 선생이야 말로 염치를 아는 이시대의 진정한 어른이 아닌가 싶다.


  

▲ ‘쓴 맛이 사는 맛'전을 위해 모인 문화예술인들 Ⓒ정영신


건달 할배 채현국과 함께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전 ‘쓴 맛이 사는 맛’ 전시는 오는 21일까지 ‘인사아트프라자’ 3층에서 열리고, 다음달 12일부터 25일까지는 유카리화랑에서 이어진다. 전시작품을 판매한 수익금은 생활이 어려운 작가들을 위해 쓰인다.


박제동 그림



지난 15일, 가난한 작가들을 돕는 취지의 색다른 전시가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렸다.
‘쓴 맛이 사는 맛’이란 전시로, 채현국선생께서 주변 작가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를 내세워 마련한 단체전이다.






처음엔 전시 성격이나 명분이 모호해 망설여졌으나, 평소 존경하는 분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인기작가 몇을 뺀 참여 작가 모두가 가난한 작가들이라 결국은 우리를 위한 전시가 아니던가?

다들 그런 생각으로 작품을 내 놓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불경기에 작품이 팔린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고,

팔린다고 해도 잘 나가는 작가 몇 명에 한정될 것이라 전시 명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관료와 팜프렛 제작비, 뒤풀이 비용만 고스란히 선생께서 안게 될 것이 걱정스러웠으나,

오랜만에 인사동이 들썩이겠다는 기대감은 있었다.






어쨌든, 인사동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작가 60여명을 규합한데다, 백낙청씨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인사 90여명이 뜻을 같이 하여, 마치 창당 대회 같은 대규모 전시였다.

한편으론 우려 섞인 주변 분들의 지적도 있었지만,

서로 잘 만나지 못하는 인사동 사람들을 모아, 한데 어우러지게 한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가히 이산가족전이라 할 만큼 많은 지인들이 모였는데, 근간에 우리가 이렇게 많이 모여 본 적 있었는가?






작품보다 사람을 더 기다린 전시였지만, 개막시간을 오후6시로 잘 못 알아 한 시간이나 늦어 버렸다.

도착하니 뒤풀이 장소로 옮기고 있었는데, 그 때까지 축하공연은 이어지고 있었다.

전시장에는 반가운 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인사 나눌 겨를도 없이 닥치는 대로 카메라부터 들이댔다,

그게 내 인사법으로 여겨,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전시장은 작품 반, 사람 반이었다. 그 많은 작품을 어떻게 다 걸지 걱정했는데, 용케도 다 걸려 있었다.

한정된 공간이라 유치원생 사생대회처럼 다닥다닥 걸 수밖에 없었으나, 좋은 작품이 산만한 주변에 묻혀 아쉬웠다.

분단풍경을 보여 준 신학철선생의 ‘가야할 길’을 비롯하여 발길 잡는 작품들도 여럿 있었다.






사진 찍기 바빠 작품 감상도 제대로 못하고 뒤풀이 장소로 옮겼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낭만’과 ‘아리랑’으로 갈라져야 했다.

술 마시고 사진 찍기도 바쁜데, 이 곳 저 곳 돌아다니느라 불알에 요령소리 날 지경이었다.

시간이 지나니 하나 둘 빠져나갔고, 잔당들만 유목민으로 몰려들었다.





매월 셋째 수요일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 술 마신지가 몇 개월 되었지만,

이 날은 채현국선생 덕에 완전 대박 난 것이다. 뒤늦게 나타난 손연칠씨는 전시도 모르고 있었다,

오늘이 인사동사람들 만나는 셋째 수요일이라 나왔다고 했다.

‘부어라 마시어라’ 얼마나 흔들며 온 몸으로 놀았던지, 그 이튿날 죽어났다.

죽어도 좋았던 그 많은 이야기가 절절하나,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하얗더라.






그 날 만난 분들을 떠올려야 하는, 이 부분에서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고 머리 아프다.

사람은 생각 나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를 뒤적일 때도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사진이 너무 많다.

그 날 카메라 총알이 떨어져, 김재규가 박흥주 권총 빼앗아 박정희 쏘듯,

정영신이 카메라까지 빼앗아 갈겼으니 오죽하겠나? 더러는 정영신이가 찍은 사진도 있다.





낮 시간에는 강민, 방동규, 구중서, 이행자, 김승환, 장봉숙선생 등 연세 많은 분들이 다녀가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겠다.


먼저 채현국선생 내외분을 비롯하여 주재환, 임재경, 유홍준, 신학철, 이애주, 서정춘, 장경호, 박불똥, 이인철, 이인섭,

김 구, 김명성, 노형석, 전강호, 이명희, 구중관, 김상현, 임계재, 조준영, 박상희, 황외성, 서길헌, 노광래, 정영신, 이은영,

안영상, 김수길, 하형우, 정명수, 고선례, 신미라, 백남이, 배평모, 강고운, 박구경, 이희종, 최혁배, 전종덕, 김영복, 이두엽,

임경일, 전활철, 이만주, 이지녀, 김종근, 김태서, 박 건, 덕원스님, 박 철, 김봉준, 김효성, 정영철, 최명철, 김이하, 장순향,

김대희, 공윤희, 강선화, 홍석화, 임경숙, 편근희, 유진오, 김형구, 박수영씨 등이다.

이 전시는 21일까지 열리고, 유카리화랑에서 12월12일부터 25일까지 열리는 2차전도 있는데,

벌써부터 전시에 대한 구설수가 많아 걱정이다.

가난한 작가 돕는다는 핑게대고 재미는 엉뚱한 곳에서 본다는...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터줏대감 채현국 선생께서 복막염으로 서울대병원에서 가료중이다.

병문안 드리려 지난 25일, '유목민' 전활철씨와 병원에 들렸더니,

사모님 혼자 병실을 지키고 계셨다.
대학로 내려가는 길목의 커피숍으로 오라신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가 선생님의 손을 잡았는데,
손아귀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힘이 펄펄하셨다.






병원에 입원하신지가 오늘로 십팔일 째이지만,
금식중이라 커피도 입만 축였는데,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실까?

좌우지간 별난 선생님이시다.
오척단구의 거한, 인사동 낭인들의 활빈당주 등 선생님을 대신하는 이름들도 숱한데,
반세기가 가깝도록 인사동에 나타나시어 가난한 예술가들 술값 대주고
차비까지 붙여주는 그런 구세주였다.






몇 년 전 부터 세상에 너무 알려져, 이젠 간첩도 다 아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채현국선생님이 세상에 알려지며, 인사동에서 자주 만나 뵐 수 없었다.
초청 강의가 전국에서 물밀 듯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두 세시간의 강의를 꼿꼿하게 서서 하시는 등 체력을 과시했으나,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듯이 이제 선생님 연세가 팔순을 훌쩍 넘기셨으니...





섞은 사회의 오래된 통념을 가감하게 깨부수는 선생님 말씀에 짜릿한 희열도 맛 볼 수 있었다.


사실 선생님 덕분으로 우유부단하고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두루뭉술 넘어가는 나의 나쁜 성격을 완전히 뜯어 고치게 했으니, 나에게는 큰 스승이셨다.

등달아 입바른 소리해댔다가 이젠 친구까지 잃어버린 외톨이 신세가 되었지만,
많지 않은 남은 인생 쪽팔리게 살지 않는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선생님께서 처음엔 부산대학병원에 맹장염으로 입원하셨다가
오진에 의해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복막염 수술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경과가 좋아 곧 퇴원하실 계획이셨다.


사모님까지 고생시키는 힘든 일을 치러고 계시지만,
오히려 건강을 보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찻집에서 “이제, 식구들을 위해 살거다”란 말씀도 하셨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리느라, 가족에게 소홀했던 점을 뒤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의사선생님이 찾는다는 사모님의 전화로 선생님을 모시고 병실로 돌아왔다.
다행히 방귀는 물론 대변까지 시원하게 보아, 모처럼 식사를 맛있게 드셨다.


“선생님의 쾌유를 축하합니다. 부디 건강하고 행복한 여생을 기원합니다.”






다음 주 화요일 쯤 퇴원하실 계획이니 병문안 하실 분은 서두르기 바랍니다.
병실은 대학로 서울대병원 6509호입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사진-

 

 

박근혜가 끝장 난 지난 10일 오후에는 ‘광화문미술행동‘의 뒤풀이가 예정되어 있었다.

탄액이 인용될 것으로 알고, 미리부터 날자를 잡아 둔 것이다. 

그 날 헌재 앞에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진가 전민조씨도 보였고, 안해룡, 성남훈씨도 만났다.

 

 

 

 

 

 

 

예견했던 것처럼 만장일치로 가결되는 걸 보고, 모두들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박근혜 구속을 외치며 헌재 앞에서 청와대까지 행진하다 정영신, 장경호씨를 만나,

시원한 생대구탕으로 점심 식사도 했다.

 

 

 

 

 

오후 여섯시 무렵 약속장소인 인사동 ‘풍류사랑’에 갔더니다들 싱글벙글 모여들었다.

 

병신 년 하나 때문에 몇 달 간을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그 날은 '광화문미술행동'의 결산을 겸한 자리였는데, 팔백만원이나 빚졌더라.
광화문 현장에서 김준권, 류연복, 윤여걸, 유대수씨 등 여러 명이 판화도 찍어 팔고 독지가들의 후원도 받았으나,
그 돈으론 한 참 모자랐다. 결국 총대 맨 김준권씨가 끌어안게 되었는데, 결과라도 좋았으니 다행이다 싶다.
가난한 동지들 술 한 잔 크게 대접한 걸로 여기시길... 그 날은 개털인 나도 기분 좋아 술 한 잔 사고 싶더라니까.
그 날 ‘풍류사랑’ 술 값도 꽤 나왔을 텐데, 마침 신학철 선생께서 맡아 주셨다.

 

 


-정영신사진-

 

 

‘광화문미술행동’은 김준권, 류연복, 김진하씨가 지난 12월 초순에 깃발을 든 모임이다,
모두들 박근혜에 열 받아 뭉쳤는데, 시민혁명에 동참하려는 많은 작가들이 모여 판을 키운 것이다.
그동안 열 네 차례에 걸쳐 다양한 퍼포먼스와 전시를 벌이며 촛불시민들과 함께 어울렸는데,
예술이 대중 속으로 녹아든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다.
가난한 작가들이 고생은 했지만, 현장 미술운동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것은 틀림없다.



 



 

이제 마지막 ‘촛불역사’사진전만 남았다.
오늘부터 21일까지 광화문광장의 ‘궁핍현대미술광장’에서 열린다.
곽명우, 권 홍, 김문호, 김이하, 노숙택, 박영환, 부은정, 양시영, 엄상빈, 이재민, 정영신,

조문호, 채원희, 최연택, 하형우, 홍윤하, 정덕수, 강민, 김명지, 양혜경씨등

사진가, 시인, 화가, 촛불시민들이 함께 한 전시로, 난 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열림식은 오후4시로 시간나면 한 번 들려 구경하세요.

 

 



 

그 날 뒤풀이에 함께한 분은 김준권씨를 비롯하여 신학철, 류연복, 김남선, 김진하, 장경호, 정덕수, 송용민, 여태명,
김영배, 이인철, 장순향, 이원석, 유대수, 정영신, 정고암, 이도윤, 하형우, 하태웅, 김이하, 김천일, 이철재, 이재민,
윤병권, 강성봉, 이광군, 김보영씨 등 많은 분들이 모처럼 한 자리에 모여 뒷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느닷없이 서예가 여태명씨가 '난 빨갱이'라고 자랑했다. 하기야 박사모라면 모인 사람 모두를 빨갱이로 보이겠지만,

그는 확실히 빨갱이 였다. 상의에서 모자, 양말까지 모두 빨간색인데, 팬티까지 빨간색이었다. 

 

 

 



 

이 날은 서촌에 안가까지 준비해 두어 지방 분 들도 집에 갈 걱정 없이 혁대 풀고 마실 수 있었다.
‘풍류사랑’ 안방에는 채현국, 임재경선생과 임진택씨 등 여러 명이 자리하고 계셨는데, 와인 한 병을 선물 받았다.


난, 혼자서는 술 마시지 않아, 류연복씨에게 주었는데, 그 술이 돌고 돌아 정영신씨 손에 들어갔더라.
‘촛불 역사전’ 사진 프린트 도와주러 녹번동에 갔다가, 덕분에 잘 마셨다.

 




술 취해 여럿이 ‘광화문광장’으로 다시 나갔는데, 늦은 밤이라 기쁨의 열기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뒤늦게 광장에 나온 최석태씨를 만났으나, 곧 바로 헤어져야 했다.

그 이틀 날의 마지막 축제를 즐기려면 좀 쉬어야 하니까...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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