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건너편 길가에 자리 잡은 노숙인 김지은씨 자리에서 김정귀씨를 만났다.
따스한 봄볕 쬐며, 길가에 비스듬히 누워 술을 마시고 있었다.
구걸한 돈으로 소주 한 병 사와 세상 부러운 것 없는 듯 했다.

그는 경주 감포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서울로 올라왔단다.
인쇄소나 제판소 등에서 일하며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왔지만,
월급모아 장사를 시작한 아내 때문에 가산이 거들 났다.
빚더미에 시달리다, 결국 아내와 헤어져 노숙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처음엔 억장이 무너졌으나, 하루 이틀 지나다보니 편해지더라고 했다.
돈에 시달렸던 모든 걱정을 내려놓았으니, 홀가분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무소유가 이렇게 편할 수 없다며,
배고프면 밥 얻어먹고, 술 고프면 구걸하면 된다고 했다.
도둑질하여 소유하는 것 보다 낮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렇다! 몇 일전 “소유한다는 자체가 도적질이다.”고 한
시대의 협객 방배추선생의 말씀이 생각났다.
물론,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소유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욕심에 의해 많이 가지려하니 도적질이 되는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김지은씨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이재용이가 교도소 갔구나,
큰 도둑만 잡아가지 말고 작은 도둑도 모조리 잡아가라”며 낄낄거렸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술잔도 없이 병 채로 나발불고 있었다.
나더러 마시라고 술병을 건네주었으나, 잠시 망설여졌다.
비위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 또한 선입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옛날엔 사람중심으로 살았는데, 언제부터 얄팍한 지식가지고 계산하며 살았을까?






김정귀씨는 김해 김가 김수로왕 72대 장차자라며 자신의 출신을 종이에 적었다.
한자로 쓰 내려가는 필체에서 나름의 자부심이 엿보였다.
아무리 구걸하며 살아도 조상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은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권력 잡으려 발버둥치는 정치꾼들이여!
노숙인 김정귀의 말을 귀담아 들어라.
제발 조상과 후손들에게 욕 먹이는 짓을 하지마라.


사진, 글 / 조문호










요즘 부쩍 기억이 분명하지 않거나 약속을 잊을 때가 많다.
지난 17일엔 동자동 주민 자치회의가 있었으나, 시간을 잘 못 알아 허탕 쳤다.
지하철에서도 내릴 역을 놓칠 때가 더러 있는데다,
아는 분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헤맬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늙으면 죽어야지’를 되 뇌이며 돌아오는데, 뒤에서 누가 ‘형님’하며 불렀다.
돌아보니 의리의 사나이 이준기였다.

술 한 잔 하자는 그의 권유에 끌려 구멍가게에 들어갔다.
비좁은 가게 안에서 못 마시게 되어 있으나, 눈을 껌뻑거렸다.
날씨는 춥지 않으나 사람들이 몰려와 오붓하게 마실 수 없다는 것이다.
바닥에 소주 한 병과 골뱅이 통조림 하나를 펼쳐 놓으니 술상이 되었다.





좀 있으니, 김진호씨가 들어와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어저께 돈이 없어 손가락에 낀 금반지를 맡기고 소주 한 병을 샀는데,
어느 가게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걱정이 태산이다.
자주 들리는 집에 찾아가, “무조건 반지 달라”하라며 준기가 재촉했다.

지금 갚을 돈이 없다기에, 주머니에서 만원을 꺼내 주었다.
좀 있으니 반지는 찾지 못하고, 외상값만 주었다며 빈손으로 돌아왔다.
반지는 맡긴 적이 없다는데,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기초생활수급자들이 대부분의 돈을 담배와 술값으로 탕진하는데,
아픈 기억을 잊으려 술을 마셔대니, 술이 기억력을 앗아가는 것 같았다.
내가 사는 옆방에도 술만 취하면 세상에 무슨 불만이 그리 많은지
악을 쓰며 소리 지르는 이도 있다. 다들 치매 증세인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오니 주민센터에서 보낸 치매예방 검진 안내서가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나이 들면 어쩔 수 없는 현상이겠지만, ‘필수검진대상’이라 적힌 글귀가 마음에 걸렸다.





지난 24일 오전 무렵, 검진장소인 주민센터 복지관으로 나갔더니,
검진 받으러 나오 신 분들이 제법 많았다.
문제는 실제 치매증세가 있는 분들은 자신은 절대 아니라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뺄셈을 반복시키며, 먼저 말해 놓은 사물 몇 가지를 다시 물어보는 등
여러가지 기억력을 테스트했는데, 딱 한 가지 답을 못한 게 있었다.
오늘 날짜가 몇 일 이냐는 질문에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의 말에 안도했으나,
더러운 세상! 기억 못하는 것도 좋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나쁜 기억들만 잊어버리는 치매는 없을까?


사진, 글 / 조문호

















인생의 막장이라 여기며 들어왔던 동자동은 막장이 아니었다.

매음굴 양동에 대한 오랜 기억과 빈민들의 슬픔으로 비친 쪽방 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이곳에 들어오며 희망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그 희망이 현실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욕망으로 뒤덮인 세상,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이기에 가능했으리라.

물론,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사회운동가들의 땀이 고여 있지만,

연대의 힘이 무섭다는 것도 인생 말년에 다시 절감한다.

 

쪽방 촌 동자동에 있는 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7차 정기총회가

지난 18일 오후2시부터 동자동 성민교회에서 열렸다.

예측대로 회의장에는 160여명의 주민들이 가득 메웠는데,

몸이 아프거나 사정 있는 분들의 위임장도 많았을 것이다.


다들 멋 부린 차림으로 마치 잔치 집 나들이 하듯 모여들었다.

마치 손 꼽아 기다린 듯, 나온 분들의 표정이 밝고 친숙했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뀌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뀐 그런 표정이었다.

 

2011년 창립된 이 '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은 412명의 동자동 주민이 협력해,

그들의 쌈지 돈에서 출자한 돈이 2억이 넘었다.

중요한 것은 참여수와 출자액이 해를 거듭할수록 급진전한다는 것이다.

 

우건일이사장을 비롯하여 강동근, 유영기, 조두선, 박정아, 차재설이사,

김호태 이충현 감사 등 임원 모두가 그대로 유임되었다.

우건일 이사장의 리더 쉽, 박정아 교육이사의 끈기, 선동수 간사장의 치밀함을

바탕으로 전 조합원들이 협력하여 이루어 낸 결과였다.


여지 것 많은 정기총회에 참석해 보았지만, 불화의 모습도 많이 보아왔다.

그런 불화들은 대개 개인적 욕심 때문이다. 여긴 다들 싱글벙글 정 나누고 있었다.

이 날 오전 새꿈어린이공원에서 있었던 빵 나눔 행렬의 침울한 표정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물론 그 행렬에는 주민들보다 노숙인이나 외지인이 더 많았지만...

 

정부는 물론 가족마저 방임하는 장례를 치러 주며 어려울 때 대출 해주는 공식적인 일 보단,

절망으로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에게 이웃과 소통하며 정 나누는 통로를 만들었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불신이 만들어낸 폐쇄적 삶에서 탈출하여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아직까지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주민들을 설득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 같다.

다 같이 힘을 모아 협력하면 모든 걸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보지 않았던가.

광화문광장을 메워 이룬 촛불의 기적을 말이다.

 

이 날 총회장에는 축하하러 온 인사들도 있었으나, 성공사례를 배우러 온 다른 조합 종사자들도 보였다

하나의 놀이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된 총회는 동자동 주민들 잔치마당 같았다.

총회장을 나오며 받은 두루마리 화장지 선물은 화장지 풀리듯 이어질 행복 인 냥 즐거웠다.

쪽방 촌 동자동이 봄바람으로 들썩인 하루였다.

   

사진, 글 / 조문호































































몇일 전 ‘동자동사랑방’에서 세월호 리본을 만든다는 연락이 왔다.
조그만 도움이라도 될까해서 방문을 나서니, 옆방의 전씨가 ‘어디 가시냐?“고 물었다.
세월호 리본 만들러 간다니까, “삼년이 지난 세월호 리본을 왜 만드냐?”고 재차 물었다.
그러면서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삼년씩 가기도 했지만, 요즘은 대개 49제로 끝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전씨는 세월호 리본을 상주들을 상징하는 그런 표식으로만 알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노란리본은 돌아오길 바라는 상징으로 사용했다며,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라 말했다. 침몰하는 세월호에 갇혀 울부짖었을

그 아이들을 어찌 잊을 수 가 있겠냐고 했더니. ‘안 잊으면 어쩌겠다는 것이냐?’며 쏘아 붙였다.

누구도 구하려 하지 않았던 사실을 비롯하여 수많은 의혹을 풀어야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더니, 말없이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순간적으로, 전씨는 세월호 리본을 정치적 색깔로만 판단하는 거 같았다.

대개 보수성향의 사람들이 세월호 리본에 과민하게 대응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지난달에는 지하철에서 박사모 노인이 세월호 리본을 단 여대생에게 빰을 때린 적도 있었다.
요즘 보수단체의 시위장에 세월호 리본을 달고 가서 봉변당하는 일이 허다하다.
사진 찍는 입장에서 시비에 휘말리면 아무 일도 되지 않아 가방에 달린 리본을 호주머니에 감출 때도 있다.

애도하며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 정치적 색깔로 이용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임시 공작소로 사용했던 동자동 ‘식도락’에 갔더니,

용산416연대 이미진씨의 도움으로 여러 명의 주민들이 모여 세월호 리본을 만들고 있었다.

김정오씨는 제단을 했고, 강병국씨 등 여러 명은 그걸 접어 접착제로 붙여 고리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다들 처음 만들어 보았지만, 간단한 일인지라 잘 만들었다.

그 자리에서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는 엽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세월호 리본을 많이 만들어 동자동 주민뿐 아니라 온 국민이 다 달았으면 좋겠다.


“박근혜를 구속시켜, 세월호의 진실을 밝혀내자.”

사진, 글 / 조문호

















요즘 동자동엔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분들이 늘고 있다.
지난 9일과 14일, 20일 등, 2월 들어서만 세분이 돌아가셨다.
다들 창살 없는 감옥같은 단절된 쪽방에서 살다보니,
정확하게 숨진 날자와 사인마저 분명치 않다.






지난 14일 시신을 발견한 김영훈씨는 이제 육순을 맞은 장년에 불과했다.
무슨 가슴 아픈 사연이 그리 많은지 술로 지세다 비명에 가신 것이다.
그가 떠난 빈방에는 술병들만 즐비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어차피 한 번은 가야할 길이라지만,
떠남을 슬퍼해 주는 가족이 없다는 것이 더 서럽더라.






정대섭, 박수태씨는 수배한 가족이 장례를 치루었지만,
김영훈씨 가족은 시신포기 각서를 쓰고 그냥 갔단다.


‘동자동사랑방’에서 대신 장례를 치러 주긴 하지만,
그들이 떠나는 북망산천 길이 어찌 편하겠는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남의 일이 아니었다.
다음에는 또 누가 떠날까? 내 차례는 언제일까? 온갖 생각이 다 든다.

네팔 카트만두의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내세에 대한 희망이라도 있다지만,
신판 고려장 같은 쪽방촌 사람들은 절망만하다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나처럼, 쪽방 사는 사람들을 식물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의 생계비로 살아야 가지만, 정부에서 안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주는 만큼 먹고, 먹은 만큼 똥 싸니, 그게 식물인간이 아니고 뭐겠는가?


하기야! 지난 19일, 관악구 쪽방 살던 김씨는 그 혜택마저 받을 수 없어 목메 자살했다.
그런 분에 비한다면, 호강에 받쳐 요강에 똥 싸는 소리라 할지 모르겠으나,
인간답게 살지 못 할 바엔 깨끗하게 떠나는 방법이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좌절해 힘들게 살지 않은 쪽방촌 사람들도 있다.
바로 ‘동자동사랑방’ 식구들이다. 서로 사랑방을 오가며 소통하기 때문이다.
밥 나누고 정 나누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을 원망하며, 먼저 떠난 이들이여!
부디, 저승에서나마 사람답게 사시길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사랑방 ‘식도락’은 알콩 달콩, 콩 볶는 사랑 솥이다.

밥 때만 되면 반가운 분들이 웃음 물고 나오신다. 말 없는 표정 속엔 따뜻한 정으로 진득하다.


다들 콩 볶는 재주가 없어 밥만 드시지만, 재주도 없으며 손 발 걷어 부치는 사람이 있다.

달마승 처럼 눈꼬리가 휘어진 김정호님이다. 썰렁한 우스게지만, 정감이 잔득 묻어난다.

난순 주모께 감놔라 콩놔라 하는 것도, 그가 할 수 있는 콩 볶는 재주라면 재주다.

‘식도락’ 구석에 큼직한 화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직 덜 된 그림이지만, 한 번 봐달란다.

스케치에 그친 미완성이지만 자랑할 만 한데, 그려보지 않은 초짜 그림치고는 괜찮아 보였다.

말하려는 내용이나 화면 구도가 꽉 짜여있었다. 한 그루의 고목은 동자동 사랑방 가족을 의미했다.

그는 부지런하기도 하다. 이웃 선반 짜주는 일에서 부터 못하는 게 없다.

그 날도 버려진 고물 핸드폰을 장사치에게 팔아넘겨, 사랑방조합에 건네주었다.

사무실 폐품 정리하는 박정아님을 도와주다 우건일님이 호두과자 한 상자를 내놓으니,

몇 알 챙겨들고는 쏜살같이 ‘식도락’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 계신 분들을 먹이기 위해서다.

몇 일전 퇴원하신 김원호님이 뒤늦게 ‘식도락’에 나오셨다.

아직 몸이 불편해 애기 밥처럼 조그만 공기에 담아 드시어, 다들 걱정스레 지켜보았다.

약 챙겨 드리는 허미라님의 손길이 따스하게 전해졌다.

그러다 이웃에 짐 내려야 한다는 우건일님 전갈에 우루루 몰려갔다. 이게 동자동사랑방의 사랑법이다.

콩 볶는 구수한 냄새가 동자동 골목에 진동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설날이 가까워오니, 쪽방촌 사람들도 좀 쌔게 나가더라.
평소 소주 마시던 사람들이 그 날은 위스키를 마셨다.
나도 만원 보탰지만, 쓸데없는 허풍이었다.

‘동자동사랑방’으로 갔더니, ‘식도락’ 돼지를 잡았다.
밥 먹을 때 마다 천 원씩 넣은 돼지 저금통을 깬 것이다.
허미라씨가 열심히 세더니, 사십 만원이 넘는다고 했다.
한 달간의 식자재비도 안 되는 돈이지만, 많은 편이란다.
하기야! 천원도 없어 넣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다.

식자재비야 그 돈으로 대략 메울 수 있다지만,
점포 월세 50만원은 고스란히 ‘동자동사랑방’에서 나간다.
공동체 주민을 위한 봉사라지만,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경비는 보조해 줘야 한다.
이보다 더 확실한 빈민 지원이 어디 있겠는가?

엉뚱한 곳으로 세는 세금 단속해, 이런 봉사단체에 지원하라.
올해는 빈민의 삶 깊숙이 살펴 주었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0일은 밤새 눈이 내려 미끄러웠다.

동자동을 한 바퀴 돌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다.
인사동서 챙겨 온 술과 안주가 있건만,
혼자 마시지 않기로 했으니 어쩌랴!
함께 할 이가 없으니, 무용지물이었다.

춥고, 길이 미끄러우니 다들 나오지 않았다.
그 날은 노숙하는 이들도 안 보였다,
갈 곳 없는 그들마저 어디로 갔을까?
빈자리엔 술병 같은 흔적만 나 딩굴었다.

두더지는 땅 속에서 추위를 견뎌낼 수 있지만,
두더지보다 못한 팔자를 타고 난 그들이다.
어디로 구걸하러 갔을까?
또 반기문이 나타나 쫓겨나진 않았을까?

결국, ‘사랑방’에 가서야 이웃을 만났다.
그곳은 분위기도 아니지만, 마실 분이 없다.
사랑방커피 한 잔으로 대신했다.
지질이도 술 복 없는 하루였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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