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방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
보증금이 없어 한 달만 못내도 쫓겨난다.
많지도 않은 짐, 버리고 버려도 남았네.

지하철 서울역11번 출구,
가랑이 쩍 벌린 사진 밑에 자리 잡아,
가져 온 짐을 성처럼 쌓고 잔다.

내일이면 하나하나 버리겠지만,
정들었던 마지막 밤을 같이 보낸다.
오늘 밤, 무소유의 진리를 꿈꾸리라.


사진, 글 / 조문호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는데, 죽을 날이 다가 온 걸까?
친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 날 정도로, 식구보다 더 챙긴 내가 요즘 마음의 문을 서서히 닫으며,
그 오래된 인연을 하나하나 끊고 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변화다.

없는 자보다 가진 자가, 못 배운 사람보단 배운 자가,
못난 사람보단 잘난 사람들의 가식과 비인간적인 실체에 서서히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동자동 사람 외는 아무도 만나기 싫어 고장 난 핸드폰마저 일부러 고치지 않고 버틴다.

문제는 동자동에 정착하며 그 증세가 더 심해졌다는 점이다.
정 많은 동자동 사람들과 비교되어서 일까? 아니면 일종의 패배의식의 발로일까?
항상 마음의 문을 열라 나발 불었지만, 정작 나는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것이다.






열흘 전, 동자동 공원과 용성이네 집에서 술 마시다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왔는데,
주머니에 넣어 둔 열쇠가 사라져 버렸다. 동내 나들이라 호주머니가 얕은 옷을 입고 나간 게 화근이었다.
쪽방의 자물쇠 고리는 방 안에서 고리가 나와 밖에서는 못을 뽑을 수가 없도록 되어 있었다.
쪽방에 별 중요한 물건도 없을 텐데, 다들 문 걸어 잠그는 건 철저하다.

망치도 없지만, 잠든 야밤에 퉁탕거릴 수 없어 고민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염치불구하고 건물 관리자 정선덕씨를 깨워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더니,
가끔 있는 일이라며 쇠 자르는 공구로 단숨에 자물통 고리를 잘라 주었다.
감사~ 감사~를 연발하며 들어 왔으면 잘 것이지, 술 취해 컴퓨터를 열어놓고 페북 질 하느라 날밤을 깠다.
눈을 떠보니 점심때가 지났더라. ‘식도락’도 끝난 시간이라 컵라면으로 속을 풀어야 했다.






그러나 외출을 하려니 자물통이 필요했다.
후암시장 철물점으로 급히 갔는데, ‘서울역쪽방상담소’ 앞에서 김만귀, 문규도씨가 밑반찬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냉장고가 텅텅 비어 밑반찬이라도 챙겨가야 하지만, 미처 신청하지 못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던 얻어먹으려면 부지런을 떨어야 하지만, 쪽방상담소에는 왠지 걸음이 가지질 않는다.

열어 놓은 방이 걱정되어 자물 통 하나 사서 바삐 걸어오니, 멀리서 이재화씨가 반갑다며 손을 흔들지만,
손 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쳐야 했다. 방문을 걸어 잠거야 맘 편히 다닐 수 있는 것도 잠재적인 피해의식이리라.





쪽방은 겨울보다 여름 지내기가 더 힘들다.
방이 좁아 통풍이 잘 안되니, 방문을 열어놓으면 훨씬 나을 텐데, 다들 문을 닫고 산다.
아무런 비밀도 없지만, 독거들의 공통된 심리다.

그런 폐쇄되고 고립된 습관에 의한 것인지, 인간성 상실에 대한 불신인지 모르겠으나,
방문 닫는 것보다 마음의 문을 닫고 있어 그것이 더 걱정이다.
깊어가는 불신의 고리를 끊고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평생을 사람 사람하며 인본주의를 노래불렀는데,

더 이상 그런 말 할 자격도 사진 찍을 자격도 없다.
불신의 병이라면 빨리 치료 받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기초생활수급비가 나온 지난 19일의 동자동 새꿈 공원은, 공원 자체가 술상이었다.
평소에는 수급비가 20일 나오지만, 당일이 공휴일이라 하루 앞당겨 나온 것이다.

수급비래야 노령년금 제하고, 쪽방 달세내고 나면 40만원 가량 남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수급비를 못타는 빈민들의 입장에서는 부럽지 않을 수 없다.
먹고 싶은 것 참아가며 알뜰하게 모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대개 얼마가지 않아 바닥 나 또 다시 수급 날을 기다리게 된다.


수급비가 나와도 이웃에 빌린 돈이나 외상값 갚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으니 
쪼달리는 생활이 반복되는 것이다.






대개 술 담배를 즐기는 사람과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인데,
희망도 없는 빡빡한 살림에 술 한 잔 하는 낙마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동자동 사람들은 예사로 이웃과  술 담배를 나눈다.

어디를 가나 없는 사람의 인심이 더 후한 것은 기정사실이다.


구두쇠처럼 야멸차게 사는 사람과 인심 좋은 사람을 두고,
대개의 사람들이 후자를 더 안 좋게 보는 세상이다.
사람보다 돈의 논리를 더 앞세우기 때문이다.






다들 술이 취해 별 것 아닌 일에 언성을 높이기도 하고, 싸울 듯 맛 서기도 했다.
김씨가 이씨에게 나라 망친 역적의 후손이라니, 듣는 이씨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러나 아무도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 뒤의 결과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끌벅적 소란스럽지만, 이내 다시 술잔이 오간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이진수씨가 내 팔을 당기며 따라 오란다.
비닐봉지에는 마시다 남은 소주병과 따지 않은 소주병이 있었지만, 기어이 새 병을 땄다.
먹던 술을 두고 왜 새 병을 따냐고 물었더니, 대접하는 술은 새 술이라야 된다나...


몇 발자국 옆의 정옥상씨를 부르니, 저 놈은 술 취하면 잔소리가 많으니 그냥 두란다.
그러면서 지갑 속에 들어 있는 신사임당 지페 몇 장을 꺼내 보이며 자랑 해댄다.
허구한 날 허덕이다 모처럼 돈이 생겼으니, 기분 좋은 모양이다.






공원 한 쪽 구석에서는 잔돈 섰다판이 벌어지기도 하고,
한 쪽에서는 빌린 돈을 갚는지 돈을 주고 받기도 했다.

구멍가게 옆의 공원 입구 자리는 일찍부터 정재헌씨가 판을 벌여 놓았다.
배용식, 이준기, 이원식, 강완우씨 등 여러 명이 주위를 배회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김장수씨는 문대통령이 5,18유가족을 포옹했던 이야기를 꺼내며,
좋은 대통령이 되었다며 칭찬에 침이 말랐다.






공원에 어둠이 몰려오자 하나 둘 둥지로 돌아갔다.

정재헌씨는 엊그제 계단에서 넘어져 얼굴을 다쳤는데, 이 날도 술이 취해 몸을 가누지 못했다.
5층 사는 정재헌씨 방까지 부축하느라 얼마나 용을 썼던지, 마셨던 술이 깰 지경이었다.
간신히 방에 앉혀 놓았더니, 말없이 쳐다보는 눈길에 고마움이 묻어난다.





다행스럽게도 정씨는 혼자 술을 마시지는 않는다.
술 취해 오르기가 힘든 줄 알면서도 매일같이 공원으로 내려오는 것은
사람 사는 정이 그리워서다.


정 때문에 울고, 정 때문에 사는 사람들이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 사는 황춘화씨 쪽방에 볼 일이 있어 올라갔다.
몇 일 전 내 방의 쌀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지방가기 전에 줘야 편할 것 같았다.
쌀 포대를 안고 좁은 계단의 오층 건물 옥상까지 올라가려니 숨이 찼다.
쌀 포대를 계단에 내려놓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5층 정재헌씨 쪽마루에 정재헌씨와 정용성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용성이 녀석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그 꼴로 술을 마신 듯 해, 꼬라지가 거기 뭐꼬? 술 좀 거마 무라했더니,
계단 내려오다 넘어졌다는 것이다.

열악한 환경을 비켜 가지 못하는 팔자인지 모르지만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요했다.
가파른 계단이라 손잡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건물 주인에겐 통하지 않는단다.

 





가진 자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대개 빈민들의 고충이긴 했으나,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중재를 해 주던지,
아니면 상담소에서 직접 손잡이를 좀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자칫하면 목숨도 잃을 수 있는 일이다.
매일같이 술이 취해 오르내리는데, 여지 것 큰 사고가 없었던 것이 신기하다.
날카로운 시멘트에 부딪혀 그 정도 다친 게 천만다행이었다

용성이 더러 쌀 가져왔다고 했더니, 냅다 달려가 옥탑 방까지 들어 올려주었다.
다친 용성이 때문에 속이 상했는지, 술 취한 황춘화씨는 방에 쓰러져 자고 있었다.
이 대책 없는 두 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억장이 무너졌으나, 방법은 없었다.
술을 끊으려면 병원생활을 해야 하지만, 당사자의 의지도 병원비도 없다.






걱정만 남긴 채 돌아오려니, 용성이가 손을 내민다.

돈 좀 달라”는데, 냉정해져야 했다.
그 간절한 눈빛을 거절하지 못해 주어 온 것을 후회했다.
그 돈으로 소주 사 마시니 내가 알콜 중독을 도운 격이다.
이제 돈은 줄 수 없다고 잘랐더니,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였다.
돌아서는 마음이 아팠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절대 신은 없다. 있다면 그건 사기일 뿐이다.

착한 놈은 고생하고, 나쁜 놈이 잘 사는 더러운 세상 아니던가?

일층으로 내려오니 구멍가게 앞에 이준기씨와 강완우씨가 있었다.
술이 한 잔 된 이준기씨가 반갑다며 하소연을 풀어놓더라.
어떻게 배붙이고 살던 서방을 교도소에 집어 넣냐?는 것이다.
사연인즉, 친구가 아내에게 손 지검을 했는데, 경찰을 불러 구속시켰다는 것이다.
좁은 방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다보니 화가 났겠지만, 참아야 했다.
다 돈 없는 이들의 서러움이다.






동자동엔 한 가닥 희망을 가지며 참 사람과, 절망을 술로 잊는 사람만 산다
알콜에 중독되거나, 몸과 마음을 심하게 다친 저승 대기자들이다.
하기야! 난 담배 중독자니, 남의 말만도 아니다.
오래 사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수치라며 스스로 위안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요즘 동자동 쪽방 촌 빈민들이 연이어 세상을 등지고 있다.
혼자 어렵게 연명하던 독거들이 스스로 목숨을 재촉한 듯하다.

술로 위안하다 더러는 병원으로 옮겨져 운명하기도 하지만,

외부와의 왕래를 끊은 채 혼자 쓸쓸히 생명줄을 놓는 사람도 있다.

말로만 듣던 독거사가 빈민촌에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5일 오후 무렵, 동자동 ‘식도락’에 합동분향소가 차려진다는 메시지가 떴다.
급히 지방 갈 일이 있어, 성산동자동차검사장에 있을 때였다.

고물차 불합격 판정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을 즈음이라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철상할 시간까지 도착하기 어려울 것 같았으나, 서둘렀다.

다행히 김정호씨에게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허급지급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이 날의 상주로 나선 김호태씨를 비롯하여

우건일, 김정호, 조두선, 이원식, 선동수씨가 기다리고 있었고,

이난순, 박정아씨는 주방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날은 윤정수(82)씨와 은진기(67)씨, 두 분의 장례식을 치루었고,

김동휘(72)씨는 내일 장례를 치룬다고 하였다.


다들 무연고자라 '동자동사랑방'에서 어렵게 장레를 치루는데,
내일은 정선군청에 약속이 있어 조문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적은 조의금이나마 맡겨두었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구나 김동휘씨는 쪽방에서 쓸쓸이 세상을 떠난 분이라,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 드리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부디 세상에서 받은 설음과 고통 다 잊으시고, 편히 영면하시기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매년 오월 이맘때만 되면 광주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 간,

피 비린내 나는 '광주민중항쟁'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않다.

바쁘게 살다보니, 희생자 묘역에 좀처럼 참배할 기회가 없었는데,

지난 13일 ‘동자동 사랑방“식구들이 망월동으로 떠난다는 전갈을 받았다.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기회다 싶어 만사를 제쳐두고 따라 나선 것이다.

김호태회장을 비롯하여 우건일, 박정아, 선동수, 허미라, 김종호, 양정애, 김영애

김원호, 강동근, 구도원, 전도영, 한갑석, 김재호, 이태헌씨 등 여러 명이 함께했다.
‘한국주민운동교육원’에서 실시하는 ‘5,18 광주 민중항쟁 역사기행’ 나들이였으나,

열사들이 잠든 성지를 두 번째로 참배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5,18광주 민중항쟁이 일어 난 그 당시엔 부산 남포동에서 음악주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취미로 시작한 사진에 빠져 장사는 뒷전이었을 때다.

사진가 최민식선생께서 찾아오시어 광주에서 무장군인들이 시민들을 무차별 사살한다는 말씀을 주셨다.

선생과 함께 광주에 가고 싶어, 사진기자로 일하는 친구들에게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나,

곽을 철통같이 막아 기자들도 마음대로 들어 갈 수 없다고 했다.






그 당시는 언론에 자갈을 물려 광주에 관한 소식은 입으로만 전해지는 믿기지 않는 소식뿐이었다.

몇 일후 어렵게 ‘타임’지 한 권을 구해 보았는데, 표지는 뜯겨졌고, 기사 부분 부분이 검은 매직으로 지워졌지만,

광주항쟁의 윤곽과 끔직한 현장사진을 여러 장 접할 수 있었다.


그 천인공노할 학살사건을 엉거주춤 덮었지만, 결국 비밀은 오래갈 수 없었다.

아직까지 다 풀리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같은 국민을 그토록 무참하게 살해할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았다.

길거리에 쓰러진 수많은 주검들과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 장면을 뒤늦게 대하며 치를 떨어야 했다.





먼저 5,18 묘역 입구에 도착하여 다들 추모글을 써서 메달았다.

'민주의 문'을 거쳐 '민주광장'과 '추념문','참배광장'에 다 달아 열사들의 영전에 묵념을 올렸다.

광주빈민운동의 선구자이며 광주민중항쟁의 투사였던 김영철씨,

‘오월광대’로 알려 진 예술가 박효선씨 묘역을 차례로 찾았다.

들불야학에 함께하며 지역주민운동에 앞장 섰던, 그들을 기억해야 했다.






참배와 성지 순례가 끝난 후, 5.18 자유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광주민중항쟁 기록영화도 보았고, 당시 형무소 주위에 걸린 사진들을 둘러보았다.

이미 세상을 떠난 전남일보 사진기자 신복진씨와 동아일보 기자였던 황종건씨의 사진이 많았다.

다들 당시에는 신문에 사진 한 장 내보내지 못하고 숨겨두었으나, 뒤늦게 공개한 사진이었다.

사진집에서 본 사진이지만, 다시 한 번 울분이 치솟았다.


문제는 그토록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전두환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점이다.

무기징역을 받아 사면되었는데, 어떻게 그런 흉악범을 사면시켰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 땅에 정의가 서게 하려면 당연히 사형시켰어야 했다.

망월동에 묻힌 열사들을 편히 잠들게 하려면, 늦었지만 다시 단죄해야 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 사람들’ 빨래집게 사진 나눔전도 열려...


[서울문화투데이] 정영신기자



서울역과 건너편의 높은 빌딩들 사이에 외딴섬처럼 둥지를 튼 동자동 쪽방촌은 검은 커튼으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바로 코앞에 두고도 ‘동자동 쪽방촌’을 물어야 할 만큼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 가려 있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잔치가 지난 5월8일 어버이날을 맞아 동자동 ‘새꿈 어린이공원’에서 열렸다.



▲ 다큐사진가 조문호씨의 '동자동사람들' 빨래줄 전시풍경


‘동자동 사랑방’(대표 김호태) 가족들의 힘으로 마련한 어버이날 잔치는 올해로 여덟 번째라고 한다.

가족들과 떨어져 외롭게 사는 쪽방촌 빈민들에게 이날만큼은 한 가족이 되어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고, 약주를 곁들인 음식을 대접했다.



▲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있다.


동자동 쪽방주민들 외에도 노숙자들까지 모여 모처럼 정담을 나누는 즐거운 자리였다. 평소엔 공원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되지만,

이날은 행사장에서 준비한 주류에 한해 마실 수 있도록 배려 해 잔치 분위기를 돋구었다.



▲ 어버이날 잔치마당이 펼쳐진 '새꿈 어린이공원'


이날 잔치는 관이나 민간단체에서 후원을 전혀 받지 않고,

동자동사람들의 조그만 성금으로 만든 소박한 자리였지만 300여명이 모여드는 성황을 이루었다.

김호태 회장은 “이날의 잔치비용으로 250만원이 들었는데,

한 푼 두 푼 229명이 낸 모금액이 공교롭게도 지출과 맞먹는 2,513,230원이었다”며 "욕심 없는 사람들의 행복한 잔치마당"이라고 말했다.



▲ 잔치가 끝난후 '동자동 사람들'이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또한 주민들이 정성들여 음식을 장만하고 다함께 협력해 잔치를 진행했는데,

쪽방 주민들보다 더 어려운 노숙인들을 대접하게 되어 보람이 있었다고 했다.


특히, 이날 어버이날 잔치의 색다른 이벤트로, 주민들의 모습을 담은 ‘동자동 사람들’ 빨래줄사진 나눔전이 함께 열렸다.

공원 주변 나무 사이로 쳐진 빨래 줄에는 A4 규격의 사진 135점이 만국기처럼 걸려 전시됐다.


쪽방사람들의 초상사진, 결혼사진, 시위나 단체사진, 살아가는 모습 등, 다양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 '동자동사람들'을 기록하기 위해 이주한 다큐사진가 조문호씨와 7년째 동자동을 기록해온 사진가 김원씨



이 사진은 지난해 10월, 동자동으로 이주한, 다큐멘터리사진가 조문호씨가 찍은 사진으로 주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마련한 전시라고 했다.

서로 보기 싶게 빨래 줄에 걸어 전시를 하고, 잔치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본인 사진은 스스로 가져가도록 진행했는데,

쪽방주민들의 반응도 좋았다.



▲ 동자동사람들이 전시된 사진을 관람하고 있는 모습


37년째 동자동에서 살고 있다는 이재화(81)어르신은 사진을 품에 안으면서 “내 영정사진으로 간직하고 있겠다”며

연신 고맙다는 인사말을 전했다. 이에 조문호 사진가는 “경제적 여건으로 다 만들지 못해 아쉬웠다”며,

“빠진 분들은 오는 추석잔치에 다시 빨래줄 전시를 열어 나누어 주겠다”고 말했다.



▲ 이재화(81세)어르신이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


또한 ‘동자동사람들’을 7년째 기록하고 있는 사진가 김원(53)씨는 “이곳 사람들을 촬영하면서 오히려 내가 도움을 받는다.

일주일만 건너뛰면 기다리고 전화하는 이들 때문에 매주 오게 된다.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사회에서 나누어주는 물품이 아니라, 자기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의 따뜻한 온기”라고 말했다.



▲ 주민자치회 김만귀(48) 위원장이 자신의 합동결혼식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날 잔치에는 ‘동자동사랑방’ 김호태 회장과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 우건일 이사장,

남영동 동장 마필승씨가 나와 주민들에게 인사를 드리며 어르신들의 건강을 기원했다.



▲ 어버이날 잔치마당을 열고 있는 동자동사람들





동자동 사랑방’은 주민이 주인인 아주 민주적인 협력체다. 여기는 갑 질하는 이도 없고, 완장부대도 없다.

서로 돕는 자치단체로 주민들과 소통하며 정 나누는 행복한 보금자리다.
이 야박한 세상에 정 나누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한 끼 천원으로 식사 할 수 있는 ‘식도락’과 책을 나누어보는 도서실을 운영하며,

어려운 분들의 선반을 만들어 주는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때로는 잘 못 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연대투쟁도 빠지지 않는다.

특히 연고자 없는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 사랑방 식구들이 상주가 되어 장례까지 치러 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주민들을 길들이는 무차별한 지원을 거부하며, 스스로의 자립을 돕는데 있다.

그리고 ‘동자동 사랑방‘에서는 매년 어버이날과 추석을 맞아 주민들을 위한 행사를 마련한다.

지난 5월8일의 어버이날에도 어르신들에게 꽃을 달아드리며,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잔치를 열었다.

오전10시부터 새꿈어린이공원’에서 열린 이 날 잔치에는 주민 300여명이 참여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잔치 비용도 관이나 단체에서 후원 받은 것이 아니라 주민들로부터 한 푼 두 푼 모아 마련하였다.

필요한 예산이 250만원이었는데, 229명의 주민들이 낸 모금액이 2,513,230원에 달해, 신통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로 협력한 애착의 결과였지만, 사랑방 식구들이 하나같이 손발을 걷어 부쳤다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쪽방주민은 물론 더 배고픈 노숙인까지 대접하는 고마운 자리가 되었다.

이 날 잔치에 곁들여 그동안 찍은 사진을 돌려드리기 위한 ‘동자동 사람들’ 빨래줄 사진 나눔 전도 가졌다.

다 뽑지는 못했으나, 그 중에서 135장을 골라 빨래 줄에 걸어 서로 돌려 본 후 잔치가 끝난 후 가져가게 했다,

누락된 사진과 다시 찍는 사진들은 올 추석잔치에서 돌려드리기로 하였으나, 장수사진 촬영에 주력할 생각이다.

이번 어버이 날 잔치에는 사랑방 식구들이 아침8시부터 몰려 나와 각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아침식사를 드시지 못한 분도 많았지만, 점심마저도 주민들 챙기느라 못 먹은 채 다들 정성을 다했다.

음식이 소진되어 주민들이 떠나갈 무렵에는 쓰레기 치우고 주변 정리하느라 또 한 차례 전쟁을 치루었다.

다들 집기들을 옮겨가고 나니, 그 때 사 시장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취재하러 왔던 정영신씨 따라가 비빔밥 한 그릇 얻어 먹었는데, ‘식도락’ 골목에 사랑방식구들이 몰려 있었다.

“식사하지 않고 어디 갔다 왔냐?”며 중국집 ‘태향’으로 안내했다.

김호태회장을 비롯한 여러 주민들이 식사를 끝내고 소주 한 잔 나누며 뒷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동자동사랑방’ 사무실 앞에서는 강동근, 김정길, 김정호, 강병국, 임수만씨 등 여러 명이 설거지하느라 분주했다.

이날 뒷마무리하며 끝까지 남은 분으로는 우건일조합장을 비롯하여 박정아, 선동수, 허미라, 김창헌, 차재설, 박희봉,

박용서, 조두선, 전인중, 한정민, 최순규씨 등 많은 분들이 수고해 주셨다.


'동자동 사랑방' 화이팅!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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