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의 사진가 영철수씨가 보내 준 옷을 전주 가느라 전달받지 못해 걱정스러웠다.

사람이 없으면 물건도 분실되기 쉬운데다, 문 앞에 두면 통로가 좁아져 지나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일요일 늦은 시간에 도착해 보니, 다들 불편하면서도 잘 밀쳐두었다.

그 이튿날 옷을 전해주려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옷 크기와 취향을 잘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뻔뻔하게도 정영신씨에게 부탁했다.






노숙하는 친구들이 있는 서울역부터 가려 했으나, 오가는 쪽방 주민들이 눈에 밟혔다.

옷 보따리 두 개 중 하나만 풀었는데, 순식간에 다 나가버렸다.

그 와중에서도 외투 하나를 들고 정영신씨가 어디론가 달려갔다.

“아~ 이 여자가 동자동에 애인 뒀냐?”며 살펴보니, 윤용주씨 방을 찾았다.

아마 먼저 만났을 때, 마음이 아렸던 것 같았다. 
저리 마음이 야리니, 이 날 강도 같은 놈조차 못 버리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동내가 어수선했다.

벽에 공지 안내가 붙었는데, 동자동 재개발 추진조합 사무실 현판식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동네 주민들의 관심이 온 통 그곳에 쏠려, 다들 쫒겨 날까 걱정하고 있었다.

전세도 없이 달세내고 사는 쪽방주민으로서는 그냥 쫓겨 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재개발이 시작될 것으로 짐작은 했으나, 낭패스러웠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으나, 이주대책이 보장되지 않는 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더 지켜봐야겠지만, 마음이 바빠졌다.



 


외투 몇 개를 챙겨 서울역으로 자리를 옮겨 옷이 허술한 친구에게 주었더니, 의외의 반응이 왔다.

대개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아마 자기 입은 옷이 더 익숙한 듯 했다.

하기야! 족방 사는 분들은 벽에 걸어두었다가, 바꾸어 입을 수도 있으나,

그 친구들은 모든 게 짐이  될 뿐이니 욕심 부릴 필요가 없었다.

다시서기휴게실에 모여 있는 노숙인 중에 몇 사람 골라 맞는 옷으로 갈아 입혔다.

 

없으면 없을수록 욕심을 버리고, 가지면 가질수록 욕심이 많아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사진,: 정영신 / 글 :조문호









 

 

 

 

 








사진가 양철수씨



지난11일, 창원에서 활동하는 사진가 양철수씨가 동자동 빈민들에게 겨울용 외투를 보내왔다.

난, 그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필리피노의 삶과 희망’과 ‘거리에서’란 그가 펴낸 두 권의 사진집을 보았고,
폐북에 올라오는 동향으로 그가 어떤 사람이란 것을 알았을 뿐이다.

그는 사진이 좋아 사진만 찍는 것이 아니라, 빈민운동을 했다.
가만히 보아하니, 제대로 미친 사람이었다.
난 당면한 권익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그는 달랐다.
보나 마나인 살림살이에 필린핀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병들어 죽어가는
빈민들을 도와주는 모습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작업에서 항상 사진가들이 당면하는 문제가 ‘사진이 우선이냐? 사람이 우선이냐?’다.
사람이 우선이 아니라면 찍을 자격도 없고, 찍어도 그 사진은 위선일 뿐이다.
예술 지상주의로 사람보다 카메라 앵글에나 신경 쓰는 사람은 다큐멘터리사진가가 아니다.
나 역시 사진에 욕심이 없을 수는 없지만, 어차피 둘 다 이룰 수는 없다.
사진이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에
겉치레는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다.

더 울화통이 치미는 일은 대개의 사진가들이 양철수씨 같은 분의 사진을 폄하하거나
소재주의라는 올가미에 씌워 터부시한다는데 있다.
그러는 그들은 한번이라도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 가보았는가?
양철수씨 역시 한 평생 인간을 주제로 찍었던 최민식선생의 영향을 받았다지만,
돌아가신 최민식 선생도 그 위업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양철수씨의 작업을 높이 사는 것은 사진보다 사람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있다.
말로는 누구나 생색낼 수 있고, 관심 가질 수 있지만,
막상 닥치면 피하거나 모른 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양철수씨는 자신이 애정 쏟고 있는 필리핀 빈민만도 바쁠 텐데, 동자동까지 걱정한다는 것이다.
하기야! 사람에 대한 애정에 국적이 어디 있겠는가?






요즘 정초에 걸린 감기로 열흘이 넘도록 빌빌거리며,
외출도 하지 못하고 갇혀 지내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하루에 한 건씩 일기처럼 올려 온 블로그조차 사진을 찍지 않으니 올릴 게 없었다.
오래된 사진자료나 들추어 엉뚱한 이야기나 올리는 판에
느닷없는 그의 메시지가 온 것이다.


추위에 떨 동자동 빈민들을 걱정해 외투를 구입해 보내겠다는 것이다.
그의 사정을 뻔히 아는지라 망설였는데,
진짜 두 박스나 되는 외투를 동자동 4층까지 보낸 것이다.
그러나 비좁은 쪽방에 옷 보따리가 들어차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당장 전해주지 않고는 운신조차 할 수 없어,
제일 좋은 옷 하나를 골라 옆방 사는 정선덕씨께 전해주며 부탁했다.






요즘은 날씨가 추워 공원에도 사람이 잘 나오지 않아,
옷 사이즈가 맞는 사람들에게 전해 달라 했더니, 흔쾌히 들어주었다.
몸만 불편하지 않았다면, 노숙하는 친구들부터 나눠줘야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추가로 외투17벌을 보냈다는 연락이 왔기에,
그 옷은 노숙하는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면 되겠다 싶었다.

어쨌든, 양철수씨 덕에 복 받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9일 서울역 지하보도에서 만난 김지은씨



김지은씨는 서울역 사는 노숙자다.
한 푼 없는 거지지만,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

작년 이맘때는 동자동에 움막 짖고 살았으나,
지난 봄 강제 철거되었다.

여행가방 하나로 살림을 줄였으나, 그마저 짐이다.
어차피 버릴 거지만, 폼 나게 떠나고 싶다.

오늘도 서울역 주변을 서성이며 기다린다.
오라는 곳도 갈 곳도 없지만, 떠날 준비 되었다.



사진,글/조문호



동자동 길가에 있던 김지은씨 움막은 지난봄에 철거되었다.






한 해를 보내는 지난 31일은 왠지 일찍부터 마음이 들떴다.
몇 날을 송년회 핑계대고 퍼 마셨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종각 타종행사 같은 곳에 갈 수는 없잖아.

마침 ‘통인’의 관우선생께서 연락이 왔다.
낙원상가 밑의 ‘다리 밑 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관우선생 단골집이지만, 좁아도 술집 분위기가 꽤 괜찮다.
마치 어린 시절 짚동 사이에 들어가 놀던 틈바구니 생각도 나지만,
집 이름이 너무 야하지 않은가?

인사동에 나가보니 낙원상가 가는 길이 꽁꽁 얼어붙어 몇 사람이나 넘어졌다.
연탄재라도 좀 뿌려야 했으나 요즘은 연탄재도 흔치 않다.
그런데, ‘다리밑 집’에 문이 잠겨 있었다.
연락했더니, ‘낙원아구찜’으로 옮겼다고 했다.

그 자리에는 관우선생을 비롯하여 송재엽씨 등 여러 명이 있었는데,
처음 보는 미녀가 두분이나 있었다.
관우선생이 도예가와 큐레이터라고 소개했는데, 큐레이터라는 여인의 얼굴을 보니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사슴 눈처럼 큰 눈에 금방 눈물이 고일 것 같은 애잔함이 가득한데,
약간 도툼한 입술은 모든 기를 다 빨아들일 것 같은 강한 마력을 갖고 있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걸 눈치 챈 송재엽씨가 얼른 자리를 바꾸었다.
이런 저런 씨잘데 없는 이야기 나누며, 소주로 한 해의 여독을 씻었다.

이차로 다른 곳에 간다지만, 난 서울역으로 가야 했다.
한 해를 보내는 즈음이라 노숙하는 친구들과 한 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사동 최고의 부자나 인생의 벼랑에 선 사람이나 술마시고 노는 건 별 다를 바 없다.
쪽방 촌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가 기초생활수급자라 사는데 별 걱정은 없지만,
노숙자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가지면 가질수록 욕심을 부리는 것이 인간이지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욕심 부릴 게 없다.
내일은 생각하지 않고, 있는 대로 나누어 먹는 그들이 진정 비운 자라는 생각도 한다.

패트 소주 두병과 육포하나를 사들고 서울역으로 같다.
개찰구를 나오니 지하도 한 쪽 구석에 낯 익은 자들이 보였다.
이종민, 김종학, 김상훈씨등 여러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낄낄거리고 놀았다.
총무를 맡고 있다는 김종학은 ‘종학이를 아느냐?’며 계속 천원만 달랬다.
서울역에서 종학, 종철, 종민, ‘쓰리 종’을 모르면 간첩이라며 유세했다.

마침 세밑이라 그런지 온정을 나누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외국인 가족이 각기 봉투를 들고 왔는데, 그 안에는 빵 하나 우유 하나, 양말 한 컬레, 핫펙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난 고맙다며 사진까지 찍었으나, 다들 시큰둥했다.
술이 취해 했던 소리를 되풀이하거나 가끔은 금지된 노랫가락이 튀어 나오기도 했는데,
지나가는 역무원들이 제지시키며 나가라고 종용했다.
몸에 상처를 입은 동자동 최씨는 ‘다시서기’직원들이 휠체어로 실어갔다.

이종민이가 카메라를 달래서 주었더니, 이런 저런 모습을 찍어댔다.
마침 경찰의 강제 해산에 직면해 어지러운 술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다들 선물이 담긴 봉지는 챙기지도 않은 채 그냥 두고 갔다.
그런데, 정리를 하고 나니, 종민이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가져간 카메라는 5년 전에 삼십만원에 구입한 NIKON Coolpix P310으로 지금은 단종 된 카메라다.
술자리에서 마구 사용한 고물이라 돈은 되지 않지만, 오늘 찍은 사진파일이 걱정되었다.
그 심장이 멎을 것 같았던 미인도 미인이지만, 같이 마신 친구들의 초상사진도 많았다.

다른 역으로 옮긴다면 모르겠으나, 서울역에 있다면 언젠가는 만날 것이다.
한편으로 배신감도 일었으나, 아무래도 물욕은 아닌 것 같았다.
나에겐 소중할지 모르지만, 그들에겐 쓰레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분명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더 가까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라는 듯...
그들 무리에 합류하고 싶으나, 추위가 두려워 탐색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카메라를 빼앗긴 무장해제 상태가 되니 지갑에 돈 떨어지듯. 온 몸에 힘이 쫙 빠졌다.
기관총 급인 라이카를 챙기러 동자동 방으로 올라갔다.
이 카메라는 고향후배인 사진가 하재은씨가 선물한 카메라인데, 

좋기는 하지만 술자리나 현장에서 막 쓰기는 불편하다.
찍히는 사람들도 피해의식부터 느끼니, 큰 행사나 많은 사진을 찍을 때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다.




다시 카메라를 챙겨 서울역지하도로 내려갔으나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새로 나타난 어느 노숙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 깔고 누워 있었다.


하는 수 없어, 해 바뀌는 시점에 함께 축배 들기로 약속한 녹번동 정영신씨를 찾아갔다.
오늘 일기장에 올릴 사진을 모두 잃어버렸다며, 내 얼굴 한 장 찍어달라며 카메라를 내 밀었다.
신년 인사를 겸한, 강한 의지가 담긴 그런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새해에는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되기를 기원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7일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마련한 동자동 주민들을 위한 송년잔치가
동자동 나눔의 집에서 열렸다.
실내에서 한다기에, 좁은 장소에 다 수용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정해진 오후5시쯤 나가려니, 벽을 가린 무스탕 외투가 눈에 들어왔다.
몇일 전 친구가 날 입으라고 전주에서 가져온 옷이지만,
진즉 다른 사람 주기로 생각하고 있었다.






난, 부티 나는 옷 자체를 싫어하는데다,
아무리 거지로 살아도 내 스타일의 색깔이 있는데,
얼어 죽으면 죽었지 아무 옷이나 입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하여 친구에게 전화했다.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전해주겠다고 했더니, 양해했다.






송년잔치에서 전해 주기위해 옷을 두툼하게 챙겨 입고 나갔다.
누가 부티 나는 옷을 좋아하며, 제일 춥게 입었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요즘은 가볍고 따뜻한 옷들이 많아 다들 잘 챙겨 입고 나왔더라.
그 중, 걸어오는 김용만씨가 예비군복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저자가 임자다 싶었다.






이 옷을 입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주 좋아했다.
벗어 주었더니, 그 옷을 걸쳐 입은 채 쏜살같이 달려갔다.
어딜 갈까? 궁금했으나, 사람들 만나느라 잠시 잊어 버렸다.






그런데 그 친구가 다시 돌아 왔는데, 그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옷을 다른 사람 주었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올 구정에 고향 갈 때 입으려고 방에 모셔두고 왔다는 것이다.
아낄 필요 없이 입다 구정에 입으면 될텐데 하는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예비군복도 그 친구 패션 스타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동자동 나눔의 집’은 이층과 지하까지 동네사람들로 꽉 찼다.
비좁은 틈사이로 정수현소장을 비롯한 상담소 직원들이 잔치 준비하느라 분주했는데,
평소와는 달리 뷔페 음식을 1층 주변에 잔뜩 차려놓았다.
음식을 담아가기 위해 긴 행렬이 이어졌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카메라를 들이 댈 수 없을 정도였다.






사진을 찍기 위해 음식 가까이 가려했으나,
새치기 하는 줄 알고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사정을 이야기하여 간신히 음식 너머까지 진입했는데,
평소에 만나지 못하는 음식들이 즐비했다.






음식을 담던 한 사람이 이건 뭐냐고 물어 보기에 육회라고 했더니,
맛을 보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마 냉동된 육회를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았는데,
하기야! 부폐 음식을 먹을 기회가 어디 있었겠는가?






다들 질서를 지켜가며 좋아하는 음식을 담아가 맛있게 먹었다.
모처럼, 복에 없는 음식으로 목에 때 벗기는 거룩한 송년잔치가 되었다.






식사를 끝낸 분들은 선물을 주었는데, 받는 사람이 선택하는 괜찮은 방법이었다.
후원 물품이 들어왔으나, 량이 적어 나누어 주지 못한 것들을 가게처럼 펼쳐놓고,
필요한 물건을 한 가지씩 골라가게 한 것이다.
샴푸, 치약, 문풍지 등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난 비닐 랩을 챙겨왔다.






식구처럼 다 함께 식사하며,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마무리했는데,
새해에는 다들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 되길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성탄절에는 동자동 주민들을 위한 행사가 두 곳에서 연이어 열렸다.
낮 시간에는 ‘소망을 찾는 이’의 김용삼목사가 긴 세월동안 이끌어 온

‘성탄 나눔 홀리몹‘이 새꿈공원에서 열렸고,

오후에는 '성민교회'에서 마련한 주민을 위한 크리스마스 콘서트가 열렸다.





공원에서 열린 ‘성탄 나눔 홀리몹’은 SNS에서 모인 많은 분들이 동자동 쪽방촌으로 몰려 와 

공연과 함께 각기 준비해 온 선물을 전해주는 행사였다.





'성민교회'의 성탄공연에서는 ‘시냇가 푸른나무교회’ 신용백 목사의 좋은 말씀도 들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며 보석 같은 사람이 되라고도 하였고.

마디 마디마다 어둠에 쌓여 있지만, 푸르름을 잃지 않으며 꺾이지 않는 대나무처럼 살라고도 하셨다.






'성민교회'에서도 콘서트가 끝난 후 도시락을 비롯하여 김과 스팸이 든 선물을 나누어주었지만,  

'성탄나눔 홀리몹'에서 전해 받은 선물은 또 다른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 날따라 날씨가 너무 추워 공원에 나온 주민이라고는 칠 팔십명 정도 밖에 되지않았으나,

제각기 선물을 들고 몰려 온 사람은 200여명이 넘었다.





공연을 지켜보기도 곤욕스러웠지만, 공연하는 가수나 함께하는 이들의 고생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사회보는 여성은 추워 칭얼대는 아이를 들쳐업고 사회 볼 정도였다.


다행스럽게, 따뜻한 실내에서 열린 '성민교회'의 성탄 콘서트는 찾아 온 주민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





'새꿈공원'에서 어렵사리 공연을 끝낸 후 사랑의 선물을 전해주는 시간이 되었다.

공원에 나온 주민들이 적어, 선물을 전해 주지 못한 분들은 쪽방을 찾아 다니기도 했다.

주는 사람마다 선물이 다 다르니 마음에 들던 안 들던 복지복대로지만, 받은 선물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으나, 받은 선물로 다시 선물하는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풀어보니 털실로 짠 무릎덮게와 팔 장갑인데, 여성용이라 다행이다 싶었다.

그 이튿 날 정영신씨께 전해 주려 녹번동으로 달려갔다.
대뜸, 선물이라며 내밀었더니 뭔지도 보지 않은 채 입이 쩍 벌어졌다.






술 취하면 별 알랑방귀를 다 뀌지만,

평소에는 사랑한다는 말 조차 쪽팔린다고 여길 정도로 애정표현을 못하는 인간이다.

더 웃기는 것은 이 나이가 되도록 선물 한 번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처음엔 선물타령을 하기도 했으나, 가족은 한 몸이나 마찬가진데,

자기 자신에게 선물하는 게 어디 있냐고 둘러대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다닌 것이다.

도통 씨알이 먹히지 않으니 포기한 것 같았는데, 느닷없는 선물공세에 놀라 자빠진 것이다.

정영신씨가 그토록 선물을 좋아하는지 미처 몰랐다.





선물을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진, 글 / 조문호














































홈리스들이 왜 역을 안방처럼 생각하고, 서울역을 큰집처럼 생각할까?
역이니까 어디로던 쉽게 떠 날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구걸하기 좋기 때문일 것이다.
기나 긴 역전의 세월이 쌓아 놓은 빈자들의 울타리다.
맞은편에 둥지 튼 양동과 동자동은 한 가닥 희망 촌 역할을 한다.






지난 22일은 충무로에서 열리는 사진전에 들려 낮부터 술을 마셨다.
돌아오다 보니, 서울 역 주변이 마치 전쟁터 같았다. 
총 맞은 듯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는데, 다들 술에 취해 있었다.
그래서, 홈리스를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멀쩡한 놈이 일은 안하고 빈둥거린다'거나
'술만 마시고, 행패나 부리는 놈'이라는 등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들여다보면 다 사정이 있다. 더러는 게으름뱅이거나 알콜 중독자도 있으나, 일부일 뿐이다.
오히려 요즘은 그들이 대포폰, 대포통장, 대포차, 바지사장 등 범죄에 악용되기도 한다.






무슨 천형이나 받은 듯 특별한 계층으로 보지만, 노숙자 되기는 아주 쉽다.
정해진 주거가 없는데다 돈 떨어지고,
일용직을 구하고 싶어도 경쟁에서 계속 밀려나면 그냥 노숙자가 되는 거다.





4~50대에 실직한 뒤 고시원 쪽방 다 거치고 찜질방 전전하다
그마저 갈 돈이 없으면 그때부터 노숙한다.
청년층은 대학 졸업하고 취직이 안 되어 좌절하거나,
또는 계약직 전전하다 막히면 30대 중반부터 노숙자 신세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사연이 절절하다.
대개 노숙인이 되는 과정은 질병이나 사고로 노동력을 잃은 사람이 많지만,
사업이 망하거나 실직, 빚보증을 잘 못서거나 가정불화로 나온 사람도 있고,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직업을 택한 경우도 많다.
주로 주먹쟁이나 운동선수, 군인, 예술가등이 그런 직종인데,
그 중 많은 게 운동선수와 주먹쟁이다.






지하도 계단을 지나다 노숙하는 김용규씨와 눈이 마주쳤는데, 술 한 잔 하고 가라는 듯 종이컵을 들어보였다.

상원이와 소령이를 거느리고 술판을 벌여놓았는데,
그는 구미가 고향인 씨름선수 출신이다.





김용규씨는 젊은 친구들을 잘 보살펴주어 동생들이 지극히 모신다.
술이 부족하여 오천 원을 꺼냈더니, 상원이가 냅다 달려가 소주 두병을 사왔다.
다들 폭주 하지 않고 서서히 즐기며 마셨는데, 나만 쭉쭉 들이켰다.





씨름꾼 시절의 삿바 이야기에서 부터 몇일 전에 일어났던 싸움이야기도 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시비를 걸어 노숙인과 싸움이 붙었는데,
경찰이 노숙인만 나쁜 놈으로 취급했다며 열변을 토했다.
같이 주먹다짐을 해도 일반인보다 노숙자가 불리한 것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에게 인권이란 없다.







너무 답답하여 “술~ 술~ 술이 원수다‘란 케케묵은 노래를 불렀더니, 다들 질급을 한다.
역무원에게 당장 쫓겨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쫓겨나지 않으려 공중질서를 지키지만, 내가 더 못난 놈이었다.
상원이가 노래 말에 시비를 걸며 ”형! 술이 원수가 아니라 돈이 원수지요“라고 말했다.
조그만 소리로 다시 불렀다. “맞다 맞다 맞았다! 돈이 원수다”






자리에서 일어나 서울역 쪽으로 나가니, 노숙하는 김지은씨가 빨리 가자며 재촉했다.

동자동 성민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알고 있었지만,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났다고 했더니, 괜찮단다.






따라갔더니, 진짜 그때사 선물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지은씨 덕에 도시락과 화장지 선물을 받았는데, 타이밍이 귀가 막혔다.

예배와 공연으로 보내야 하는 지루한 시간을 생략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 인생을 배우지만, 가끔은 약삭빠른 요령도 배운다.


이러다 사기꾼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2일 동지 날은 해마다 서울역에서 홈리스 추모제가 열리는 날이다.

‘홈리스 행동’을 비롯하여 ‘동자동 사랑방’등 40개 반빈곤인권사회단체가 연대한 ‘홈리스추모제공동기획단’에서 추진한 행사로,

무연고 홈리스 사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문화제다.






무연고 사망자를 위한 분향소가 마련되어 서울역광장을 오가는 시민들이 헌화하기도 했다.

인간의 권리를 박탈당한 채 가난과 병에 시달리다 죽음에 이른 무연고 사망자들의 죽음을 사회에 알려 추모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야하는 홈리스의 복지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거리나 쪽방에서 외롭게 죽은자를 추모하는 자리지만, 무관심한 사람이 더 많았다.

국민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살펴야 한다는 말들은 하나, 말 뿐이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지하도에서 연명하는 홈리스 이야기를 꺼냈더니, 한 친구가 핀잔을 주었다.

게으르고 술만 마시는 그들은 어쩔 수 없다며,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다. 너무 열 받아 한 마디했다.

“눈에 비는 거로 판단하지마라. 니가 그 사람들 사정이나 한 번 들어 봤나?

돈이 사람을 망치는 세상의, 한 희생자일 뿐이다. 어쩌면 돈에 길던 니가 더 잘 못 산긴지 모른다.“






세상이 정해놓은 논리에 순응하지 못해 비참하게 죽었는데, 누가 그들의 죽음에 돌을 던질 수 있겠나?

추모제가 열린 날은 다른 날에 비해 덜 추웠지만, 홈리스의 삶은 일 년 내내 혹한의 겨울이다.






매년, 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자나 쪽방 촌 빈민들이 300여명이나 된다,

그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더 절실하지만,

편안히 눈감을 수 있는 장례라도 제대로 치루어 주어야 한다.






그 날 서울역광장에서 한 해 동안 세상을 떠난 빈민들을 추모하며, 살아남은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들에게 안정적인 주거와 의료혜택을 제공하고, 죽어서나마 영혼이 구천을 떠돌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 많은 무연고 사망자 중에 영정사진이라고는 세 사람 밖에 없었고, 다들 이름만 적혀 있었다.

무슨 놈의 팔자가 그토록 기구하여, 죽어가면서도 자기 얼굴 한 장 남기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추모제에서는 각종 범죄에 노출되어 있는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법률상담, 홈리스 사진관 등 여러 가지 행사가 열렸다.

그리고 소리 없는 이들의 삶을 기록한 ‘홈리스 생애기록’이란 책도 출판해 나누어 주었다.

홈리스들은 책 자체도 짐일 뿐인지라, 책보다는 ‘동자동 사랑방’에서 끓여 준 동지팥죽을 더 찾았다.






오후7시부터 시작된 추모제 본 행사에는 다들 촛불을 들고 무연고 사망자들을 넋을 기렸는데,

'동자동 사랑방' 차재설씨가 나와 안타까운 추모사를 낭독했다.

쟁가수 박준씨와 ‘노들장애인야학’의 박경석씨의 노래도 있었지만, 마음에 불을 지핀 건 김가영씨의 추모노래였다.

‘새로운 선택’이란 노래도 마음 아팠지만, ‘오! 자유여, 오! 기쁨이여, 오! 평등이여, 오 평화여’ 라고 열창한 노래에 피가 끓었다.






추모공연이 끝난 후 죽은 홈리스의 은신처이기도 했던 서울역 구내를 비롯한 일대를 한 바퀴 도는 추모행진을 하며 구호를 외쳤다.

홈리스 차별을 철폐하라”, “홈리스 인권을 보장하라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81세라지만, 홈리스의 평균수명은 48세라는 걸 잊지 말자.

홈리스의 죽음은 스스로 택한 죽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방치한 죽음이다.

그들도 인간답게 죽을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어 빈소도 빌리지 못한 채 냉동 보관되다 화장터로 직행한다. 

더 이상 홈리스의 죽음을 방치하면 천벌 받는다.






이 날 추모제에는 '동자동사랑방'의 선동수간사를 비롯하여  김장수, 조두선, 김정호, 차재설, 김호태, 이난순, 유한수,

윤용주,, 박희봉, 홍홍임, 조인형, 유영기씨 등 많은 동자동주민들이 나와 팥죽을 나누어 주는 등 일 손을 도왔다.


우연히 행사장에서 옛 사우 박옥수씨를 만났는데, 요즘은 충무로에서 철수하고 집에서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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