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사진가 정범태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너무 늦게 페북에서 접했습니다.
그것도 장례를 다 치루고 나서야 연락이 왔답니다.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 조용히 치루라는 유언을 유족이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정범태선생이 누구십니까?
한국 사진계의 마지막 남은 전설 아닙니까?
투철한 기자정신에 잠시도 카메라에서 손을 놓지 않았던 분입니다.
선생님이 기록한 4,19 발포 사진을 비롯한 많은 기록들이 한국사진사의 중요한 자리를 메웠습니다.




스스로를 내 세우기 싫어하는 선생님의 강직한 성품은 잘 알지만,
인간성이 메말라 가는 현실에 선생님을 추억하며 명복을 빌 수 있는 마지막 자리는 만들어 주셔야지요.




하기야! 몇 년 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도, ‘한미사진미술관’의 회고전도 다 거절하셨지요.
사진인이라면 못해 안달하는 전시들도 사양하셨는데, 어찌 선생님의 고집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한 번도 사진권력에 기웃거리지 않으며 평생을 욕심 없이 사셨는데, 그렇게 훌쩍 떠나셨네요.




사람이 태어 나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지만, 꽃 한 송이, 술 한 잔 올리지 못한 게 더 가슴 아픕니다.




내년 일주기에는 사진인들이 힘을 모아 제대로 된 유작전과 함께 추모제라도 올려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모든 것 잊으시고 편안하게 잠드십시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조문호 합장




선생님을 추억하기 위해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있는 사진과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들을 한데 모았습니다.































[스크랩 / 조선일보 2019,9,18 / 정상혁기자]


[발자취] 4·19, 5·16… 격동의 현장에 그의 카메라가 있었다


보도사진가 정범태씨 별세… 1956년 조선일보 입사, 기자 활동
고대생 피습, 귀성객 압사 사고… 현대史 숱한 특종 사진들 남겨


보도사진가 고(故) 정범태.
보도사진가 고(故) 정범태.


1960년 4월 18일 서울 종로 천일백화점 앞에서 3·15 부정선거를 비판하며 가두 시위 중이던 고려대 학생들은 훗날 정치 깡패로 밝혀진 괴한들에게 무참히 두들겨 맞았다. 현장에 조선일보 사진기자 정범태가 있었다. 위압적인 깡패들 탓에 다른 내외신 기자들은 쉽사리 카메라를 들지 못했다. '이런 현실을 찍지 않으면 살아갈 의미가 없다. 맞아 죽더라도 찍어야 한다.' 셔터를 누르고 냅다 회사로 달렸다. 다음 날 조선일보 사회면에 실린 이 사진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결정적 한 방으로 평가받는다.

보도사진가 정범태(91)씨가 지난 15일 별세했다. 유족 측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3일장을 마친 후 지인 몇 명에게만 소식을 알렸다. 시신은 가톨릭대 의과대학에 기증했고, 추후 4·19 민주묘지에 안치할 예정이다.

평북 선천에서 태어나 외삼촌이 살고 있던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상선에서 일하며 유학했고, 광복 직후 귀국했다. 당시 외삼촌이 일제 카메라 한 대를 선물로 건넸다. 이것이 인생을 바꿨다. 사진기를 목에 둘러매고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촬영했다. 전쟁통에 피란 가면서 보따리에 제일 먼저 챙긴 것 역시 카메라였다.

6·25전쟁 당시 육군 공병대 사진기록 문관으로 일했고, 1956년 조선일보 사진기자로 입사한 그는 이후 40여년간 한국일보·세계일보 등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하며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렌즈에 담아냈다. 1960년 서울역 설 귀성객 압사 사고 등 특종 기자로 유명했으나 1962년 강화도 전등사에서 깡패들이 행패를 부려 관광객이 쫓겨나는 내용의 사진을 보도했다가 국가 위신 손상 등의 이유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1년 복역하는 등의 고초도 겪었다.

①1960년 4월 18일 고려대생 피습 현장 특종 사진. ②1960년 1월 26일 서울역 압사 사고 특종 사진. ③1961년 경기고등군법재판소에서 촬영한 ‘결정적 순간’.
①1960년 4월 18일 고려대생 피습 현장 특종 사진. ②1960년 1월 26일 서울역 압사 사고 특종 사진. ③1961년 경기고등군법재판소에서 촬영한 ‘결정적 순간’.


죽은 닭과 산 닭을 나란히 찍어 1959년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한 '생사(生死)'가 국내 작가로는 처음 입상하는 등 예술성도 인정받았다. 한 장면으로 긴 여운을 곱씹게 하는 대표적인 사진으로 1961년 5·16 직후 경기고등군법재판소 공판에서 촬영한 '결정적 순간'이 자주 거론된다. 고개 숙인 죄수복 차림의 젊은 여자, 그 앞에 선 두세 살짜리 꼬마가 여자의 손을 잡고 있다. 판사는 여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 이 강렬한 흑백사진은 일본 아사히신문 주최 국제사진살롱 '10걸작' 중 하나로 선정됐다.

1993·1995년 두 차례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은퇴 후에는 한국 전통 춤꾼의 사진과 행적을 정리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2006년엔 '사진인생 50년'을 주제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생전에 "잔머리 굴리지 말고 사진을 찍어야 역사와 사회가 바뀐다"는 말을 남겼다.






경주 신라문화제 구경 나온 사람들이 산더미 를 이루고 있다.
무슨 볼거리인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이다.

이 구릉은 산이 아니라 경주왕릉이라고 한다.
어느 왕인지 모르겠으나, 국민들에게 밟혀 고생께나 하셨겠다.

1966년 경주에서 찍은 정범태선생의 사진으로,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정범태사진집/카메라와 함께 한 반세기”에서 옮겼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는 마지막 순간이다.
부정부패로 얼룩진 자유당정권의 마지막 발악이다.
경무대진입을 막으려 총을 쏘았지만, 피는 피를 불렀다.
국민을 우습게 보는 정권의 말로는 모두 비참했다.

1960년 4월19일, 서울해무청 앞에서 찍은 정범태선생의 사진으로,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정범태사진집/카메라와 함께 한 반세기”에서 옮겼다.


1955년 만리동


우유 배급이라도 주는지 냄비를 든 어린이들이 몰려나왔고,

일거리를 기다리다 지쳐 수레 위에서 낮잠을 자기도 한다. 
물지게로 아슬아슬하게 물을 나르는 소녀 모습 등,
5-60년대 서민 생활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모두들 힘들게는 살았지만, 인정이 넘쳤던 시절이다.


1959년 중림동

1960년 마포 현석동

한평생 사진기자로 사신 원로사진가 정범태선생께서 찍은 사진으로,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정범태사진집/카메라와 함께 한 반세기”에서 옮겼다.



이 사진은 정범태선생께서 1956년도에 인천소래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요즘 우시장은 통장으로 바로 이체되지만, 옛날에는 이렇게 돈뭉치를 싸들고 다녔답니다.

자기앞수표는 수수료가 들어 기피하는데다, 수표보다는 현찰을 더 신뢰했던 시절입니다.


소 팔아 술 한 잔 하고는, 늦은 산길가다 강도에게 털리는 등 소판 돈에 얽힌 이야기는 참 많습니다.
좀 불편했지만, 두둑한 돈뭉치 만지는 기분도 괜찮을 듯합니다.

소 판돈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 사진계 전설이 있습니다.
원로이신 이명동 선생께서 집에서 소 판돈 훔쳐 나와
카메라 사서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된 사건 말입니다.

그러나 사진 우측에 고개 숙인 소의 슬픈 눈망울을 보니 가슴이 찡합니다.
단지 말을 못할 뿐이지만 모든 걸 알고 있으니까요...

정범태사진집-카메라와 함께한 반세기-(눈빛출판사)에서 옮겼습니다.




옛날에도 다방이나 빵집 같은 손님 받는 가게들이
나름대로 멋지게 보이려고 생활 용품으로 장식들을 하였답니다.


정범태 선생께서 1958년 북창동에서 찍은 빵집 앞에는 달구지 바퀴가 놓여 있고,
1956년 이해문 선생께서 찍은 '종점다방' 문에는 물지게가 걸려 있습니다.
물 길러 가다 잠시 걸어놓았는지는 모르나 하나의 장식이 되었습니다.

잠시 들려 찐빵도 사먹고 싶고, 다방에 들어가 도라지 위스키에
다방마담과 농담 따먹기도 하고픈 그런 사진입니다.

위의 사진은 '정범태사진집'-카메라와 함께 한 반세기-(눈빛출판사)에서 옮겼고,
아래 사진은 '한국사진의 재발견'(눈빛출판사)에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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