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늦은 오후, 모처럼 인사동을 사랑한 한량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조준영 시인이 비용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며 두 달에 한 번씩 자리를 만들어 왔는데,

지난번 모임에는 인사동에 정나미가 떨어져 가지 않았다.

 

변해버린 인사동도 인사동이지만 싫은 사람이 생겨서다

그렇지만 재차 연락해 온 조준영씨의 전화를 깔아뭉갤 수는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적대다 끝날 시간이 되어서야 약속 장소인 ‘바다슈퍼’로 갔는데,

양산에서 온 공윤희씨와 화가 장경호씨는 가버리고 없었다.

 

술자리엔 조준영씨를 비롯하여 전활철, 최석태, 전강호, 노광래,

정영신, 김이하, 김 구, 김수길씨 등 아홉 명이 남았는데, 고정 맴버에서 선수교체도 있었다.

 

‘바다수퍼’라는 술집은 처음 가보았는데, 손님이 제법 북적였다.

조개에 물려 조개탕은 싫어하지만, 우동사리를 안주로 소주 한잔했다.

전활철, 최석태씨 까지 일어 선 파장의 술자리라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최석태씨가 간다는 ‘흐린 세상 건너기’로 건너갔더니,

최석태씨는 물론 장경호씨와 김영진씨도 그곳에 있었다.

김영진씨는 ‘나무화랑’에서 전시 중이었으나, 가보지 못해 죄송스러웠다.

 

요즘은 인사동에 거리를 두기 시작하며 전시장 출입도 가급적 삼가한다.

‘ 인덱스’에서 열리는 중요 사진전 외에는 일체 가지 않았다.

 

전시만 보면 될 텐데, 메주 알 고주 알 올린 전시리뷰가 거슬린 모양인데,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욕까지 먹어, 뭐 대주고 뺨 맞는 격이었다.

 

이젠 나잇값도 해야 할 때라, 전시장 출입을 자제하니 일이 줄어 너무 편했다.

 밀쳐 둔 내 일에 전념하기 위한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긴 세월 찍어 둔 인사동 사진들을 정리해 책도 마무리해야 하고, 오래된 필름 정리에서부터

동자동 작업 등 죽기 전에 마무리할 일이 태산 같아, 남의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귀천’이 있는 인사동14길은 젊은 사람이 몰리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곳곳에 반가운 분들이 콩깍지처럼 끼어 있었다.

 

담배 피우러 나갔다가 옆집 ‘삼화령’ 안을 들여다보니 소리꾼 김민경씨와 배성일씨가 앉아 있었다.

너무 반가워 합류했는데, 이런 게 인사동의 매력 아니겠는가?

 

벽치기 골목 ‘유목민’을 아지트로 삼으며, 이 골목은 한동안 발길이 뜸해졌는데,

‘흐린 세상 건너기’나 ‘삼화령’은 수십 년 된 오래된 가게다.

 

정희성 시인을 비롯한 원로작가들이 가끔 들리는 곳으로, 그중 인사동의 풍류가 남은 곳이다.

 

소주를 마신데다 ‘흐린 세상 건너기’에서 내놓은 약주를 마셨더니, 속이 거북했다.

이젠 술도 아무 술이나 마시지 말라는 신호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참새방앗간 ‘유목민’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유목민’에서 운명철학가 신단수씨를 만나는 행운도 누렸다.

 

술을 깰 겸 콜라를 한 병 시켰는데, 콜라 값도 계산하지 않고 병 채로 들고 와 버렸네.

치매도 이런 치매는 곤란하다. 이 나이에 무전취식으로 종로경찰서 갈 수야 없잖은가?

 

사진, 글 / 조문호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마지막 송년회라 여긴지가 한 두 번이 아니건만 어김없이 봄은 돌아왔다.

 

올 해 따라 가까운 친구가 여럿 세상을 떠나, 더욱 슬픈 한 해를 보낸다.

모든 게 없을 땐 소중함을 깨닫지만, 있을 때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살아있을 때 자주 만나지 못했음이 가슴을 후벼 파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지금부터라도 주변 분들과 자주 소통하며 작은 것에도 감사하기로 했다.

 

유래 없는 코로나 광풍은 아직도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로 인한 국가적 피해도 막대하지만, 개인의 삶 또한 만신창이가 되었다.

경제적 어려움은 차지하고, 행동이 자유롭지 않아 우울증 환자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소소한 일에 짜증을 내거나 싸울 일이 아닌데도 다투는 등, 다들 신경이 날카롭다.

 

이런 와중에도 스스로의 이권에만 전전 긍긍하는 정치인들 보면 울화가 치민다.

정당보다 정책과 인물을 보고 뽑는 그런 세상은 정말 요원한 것이던가?

이태원참사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49제 날,

크리스미스 트리 불을 밝히며 술잔을 치켜드는 대통령 모습에 분노를 느꼈다.

 

다들 책임 회피에 급급하며, 두 번 죽이는 망 말을 쏟아내는 정치인도 여럿 보았다.

이런 비인간적인 정치인들은 걸러내야 하지 않겠는가?

 

부자 표를 노려 부자감세를 추진하거나,

노인 표를 의식해 선심형 노인복지예산을 올리는 모순도 없어야 한다.

이것이 유권자에게 고무신 돌리던 자유당 시절이나 다를 게 무엇인가?

 

시급한 것은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인과 쪽방에서 죽어가는 고독사 부터 없애야한다.

 

그리고 지금은 청년이 더 살기 어려운 시대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시대를 맞은 청년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젊은이들이 살아 갈 수 있는 정책과 행정력에 집중해야 한다.

 

지난 16일 오후5시 무렵, 인사동 사람들의 송년회가 ‘유목민’에서 있었다.

두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지만, 참석하는 분이 그리 많지 않다.

 

조준영시인이 비용일부를 부담해가며 어렵사리 주선하지만, 매번 그 얼굴에 그 얼굴이다.

 

이번 모임은 날씨가 추워 그런지 송년회 모임치고 저조했으나,

백남이 시인은 정읍에서 상경하는 열성도 보였다.

 

그러나 평소에 앉던 ‘유목민’ 좌석이 예약되어 떨어져 앉아야하는 이산가족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바깥 좌석에는 바람막이까지 설치해 두었으나, 날씨가 추워 앉는 사람이 없었다.

 

담배 피우러 나가는 골목이 대화의 자리고, 사진 찍는 장소였다.

불화가 이인섭씨와 연극배우 이명희씨가 야외의자에 정답게 앉기에

두 분 결혼사진 찍는다고 떠벌렸더니, 화들짝 놀라면서도 좋아한다.

결혼은 겁나지만 연애는 좋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화가 정복수씨는 지역문학총서인 ‘장소시학’ 2호 한권을 선물했다.

이번호의 특집 장소는 경남 의령인데, 의령은 정복수씨 고향이 아니던가.

문인들의 글만 아니라 화가와 미술평론가 글도 실려 있었다.

정복수씨의 회향기인 ‘내 존재의 비망록과 그림', 미술평론가 황인의  ‘병막의 주인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시네갤러리'를 운영하는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떴다.

‘한겨레신문’ 짬에 ‘즐겁게 놀며 배우는 인사동 대학 다시 살리고 싶다’는

인터뷰기사가 실렸는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까지 다 털어 놓았다.

그 자리에서 인사동 풍류학교 교장선생으로 추천한다는 허풍도 떨어댔다.

 

이 날 ‘유목민’ 특선 안주로 사골건더기와 시루떡이 나왔다.

술만 홀짝이던 예전과 달리 푸짐한 안주 덕에 술이 덜 취했다.

 

이날 참석한 분으로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연극연출가 최유진, 이명희, 전강호, 조해인,

정복수, 이인섭, 김발렌티노, 노현덕, 안원규, 노광래, 백남이, 정영신, 임경일,씨가 참석했고,

끝날 무렵에는 김수길, 최석태씨도 나타났다.

 

엊저녁에는 장경호, 최석태, 김수길씨가 녹번동까지 쳐들어 와 술을 마셨는데,

술병 났는지 장경호씨는 나타나지 않고, 그 패잔병 둘이 뒤늦게 온 것이다.

 

요즘은 몸이 편치 않아 그런지, 모든 일에 소극적이다.

 

문제는 사람이 좋아 사람만 찍어 왔는데, 사람이 두려워진다.

 

그래서 전시장 돌아다니며 써 온 전시리뷰는 물론, 남의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남의 작품에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우습지만, 적 만들기 싫어서다.

 

사람을 피해가며, 사람을 찍어야 하는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하물며 가족이나 친구까지 싫은 소리에 등 돌리는 판에 남이야 오죽할까.

심지어 내가 있는 쪽방 주민들 까지 깊이 들여다보면 다 허물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어찌 사람을 포기할 수야 있겠는가?

 

새해에는 좋은 사람 많이 만나, 살 맛 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한가한 주말을 보내던 지난 25일,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처들어 왔다.

냉면이나 한 그릇 하자는 전화에 나갔다가 송추 전강호씨 화실까지 실려 간 것이다.

 

가는 길에 냉면 사리와 술 안주까지 사들고 갔다.

여러 지인들도 호출한 모양인데, 다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요즘 같은 코로나 비상시국에 많이 모여 좋을 것 없다.

 

전강호씨 송추 작업실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끼고 있어, 가는 길이 피서객 차량으로 아수라장이었다.

나들이를 제한하는 거리두기도 푹푹 찌는 무더위에는 공염불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만난 전강호, 이종순 내외가 반갑게 맞았는데, 이 얼마만이던가?

코로나가 시작된 후 첫 만남이고, 송추 작업실에 들린 적은 3년이 더 되었다.

 

연못이 조성된 정원에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자연 속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이제 연꽃이 피기 시작한 연못에는 팔뚝만한 술 안주가 우글거렸다.

 

노광래씨가 술자리를 만든 것은 오는 9월경 민병산선생 33주기를 맞아

인사동에 관한 책을 출판할 생각인데, 사진을 좀 제공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 역시 인사동 책 낼 출판사 약속으로 코가 석자지만,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인사동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많은 정보와 자료를 수집해 알찬 책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날 술자리에서 오래된 인사동 추억담이 숱하게 쏟아져 나왔는데,

미리 녹음기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좋은 추억담도 많았지만 한 때 인사동에 사무실을 둔 모 시인의 추잡한 비행까지 나왔다.

그 자가 요즘 뜨거운 감자로 떠 오른 ‘예술원’ 회장을 하지 않았던가?

미성년자를 건드린 그 일이 다시 불거지면 사회매장은 물론 바로 구속감이다.

 

사실 예술원은 전면적인 개혁을 하거나 아니면 없애야 할 조직이었다.

철옹성 같은 벽으로 쉽게 들어갈 수도 없지만, 의식 있는 작가는 오라 해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낸바 있는 이시영시인이다.

 

1954년 "반공 문예 조직의 국가적 공적에 대한 물질적 보상이자 권리 주장”이라는 설립 성격도 웃기지만,

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회원들에게 매달 180만원의 정액 수당과 각종 회의 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그런데 예술원 문학 분과 회원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회원이 대학교수 출신이라 연금을 받는데,

이중으로 국고를 낭비할 필요가 있는가?. 차라리 그 예산으로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해야 한다.

 

프랑스와 미국, 독일 예술원의 경우는 회원들에게 지급되는 정액 수당이 없으며, 미국은 오히려 회원들이 연회비를 낸다고 한다.

다들 예술원 회원 자신들보다는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는 데 사업 방향이 맞춰져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예술원’은 하는 일도 없지만, 국민들도 뭐 하는 곳인지 잘 모르는 분이 더 많다.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알고 있으나, 다들 마음 상할 필요 없어 입 다물고 묵인해 왔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문학, 미술, 음악분과와

연극·영화·무용을 합친 4개 분과로 구성되어있는데, 사진 분과만 빠졌다는 점이다.

사진 뿐 아니라 아동문학이나 희곡 분야 회원도 없고, 남성 회원이 압도적으로 많다.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은 작고하신 원로사진가 임응식선생 생활이 어려워

이명동선생을 비롯한 원로작가 몇몇 분이 나서서 선생을 입회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다.

지금 생각하면 세금이나 축내는 경노단체에 안 들어 가신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얼마나 패거리 의식이 심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며칠 전 소설가 이기호 교수가 예술원을 비판하는 단편 소설을 발표하며

'대한민국예술원'의 전면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을 올려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문제는 당사자들이 스스로 탈퇴하는 것이 덜 쪽 팔릴 문제다.

 예술가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결단을 부탁드린다.

 

사진: 전강호,조문호 / 글: 조문호

 

 

'대한민국 예술원을 폐지하라'

 

한겨레 [시론]

이순원 [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이기호 작가가 대한민국예술원을 비판하는 소설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발표했다. 대한민국예술원은 예술의 창작·진흥에 공로가 큰 원로 예술가를 문학·미술·음악·연극 분야별로 선정해 우대하고 예술창작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긍정적인 역할보다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는 집단 이기주의적인 모습으로 오히려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 의욕을 꺾는 일들이나 하기에 뜻있는 사람들은 일찍이 폐지를 말해왔다.

 

문학회원의 경우 원로 문인으로 귀감이 되기는커녕 부끄럽고 추하게 자신의 ‘생사당’을 짓듯 살아서 자기 이름의 문학관을 짓는 모습들과 후배 예술인을 위한 창작 지원 활동보다는 자신들만의 특권 확보에 더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여왔다.

 

우리는 춘천에 있는 김유정문학촌이나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이나 문학관은 작가 사후에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과 문학정신을 선양하고 기리어 짓는 것으로 알아왔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어 자기 문학관을 국가 예산까지 끌어들여 짓는 모습을 보고, 또 어떤 이는 문학관을 짓는 것에 더해 지역 시민의 재산인 공적 재산 수백점을 탈취해 가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자들이 예술원의 회원이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한민국예술원의 한해 예산은 32억6500만원으로 예술원의 문학 분과 회원 26명이 받는 수당만도 4억6800만원이다. 여기에 비해 2021년 아르코청년예술가지원 사업으로 문학 부문 청년예술가에게 지원된 예산은 7명 선발 4000만원에 불과했다. 예술원 회원이 되면 자신들이 받는 연금 외에 월 180만원, 연간 2160만원의 수당을 받는다. 대부분 다른 고액의 연금을 받는 이들이 감액 없이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이런 특권적 지원이야말로 창작 지원이 절실한 청년예술가에게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죽하면 이기호 작가가 “나라 예산으로 명예를 세우지 마십시오. 제 또래의 부장급 과장급 작가들도 밥벌이가 따로 있으면 지원금 같은 거 신청 안 합니다”라고 말하겠는가. 누구보다 지원이 절실한 전업작가들도 남보다 조금 더 알려지면 자기보다 어려운 동료 후배 작가들을 생각해 지원 신청을 자제한다. 그러나 예술원은 이제까지 오히려 자신들의 이득과 탐욕을 키워왔다.

 

과거 2005~2006년 ‘우수예술인발굴지원’ 하던 것을 폐지하고, 2006년부터 2021년까지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 예술원 회원만의 예술활동 지원을 시행해왔다. 그나마 외부 작가에게 주는 ‘대한민국예술원상’도 올해 문학 부문은 예술원 회원의 동생에게 1억원을 주었다. 이쯤 되면 특권이 아니라 나라 세금에 대한 범죄 수준이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기호 작가가 공개한 글에 이시영 시인이 댓글로 이들이 ‘수당 180만원을 200만원으로 인상하고, 행사 시 국가 의전서열 제일 앞에 예술원 회원을 배치하고, 해외여행 시 공항 귀빈실 이용 및 1등석 등을 요구하고 있다. 후진 예술가들의 가난과 고투 등은 눈 밖이며 오로지 예술 원로로서의 자기 보신이 제일 사업이며 청와대가 예술가들을 초청해 밥을 안 먹는 것도 항의하고 있다’고 했다. 정말 어느 정도까지 추해질지 끝이 없다.

 

회원은 예술원 회원이거나 예술원이 지정한 예술단체가 후보를 추천하는데, 예술원 회원 중 출석위원의 3분의 2가 동의하면 회원이 된다. 자격도 임기제에서 종신제로 저희끼리 바꾸었다. 이러다 보니 예술원 회원이 되기 위해 누가 어떤 로비를 펼쳤는지 온갖 추문이 흘러나온다. 존경받는 회원이 왜 없겠는가마는 명단을 보면 어떻게 저런 사람이 예술원 회원이 되었나 싶은 이름이 왜 저렇게 많은지 절로 이해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개선을 말하지만, 조직 자체가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운영되어 개선해봐야 마찬가지다. 무보수 명예직이라 하더라도 그 허울을 차지하기 위해 다시 추한 몰골을 보일 것이 뻔하다. 문학으로 예술을 하는 우리 자신을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저런 단체는 해체와 폐지가 답이다. 그 전에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들 물러나길 바라나 이제까지의 특권적 모습을 보면 이 또한 무망한 일이다. 정녕 문학을 하는 우리가 부끄럽다.

 


좌로부터 쥐띠부인과 박광호



불운의 화가 박광호가 불쌍하다.

한 평생 가난하게 살다 희귀병에 걸렸는데, 쥐띠부인을 만나며 마음 고생이 너무 심했다.

그 불 같은 성격에 다 참고 견디며, 아들 둘 데리고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가?

그런데, 박광호가 요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었다.



박광호작 [지구촌 영상문학 카페에서 스크랩]



그는 앙상한 생선뼈를 그려 온 화가로, 만난 지 40년이 된 동생 같은 후배다.

생명이 도려내 진 물고기 뼈를 통해 인간의 가학성과 소외문제로 절규했으나,

때로는 꽃이나 새 같은 서정적인 내면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박광호작 [꽈꼴다원 카페에서 스크랩]



물고기 뼈로 그 만의 조형언어를 그려 낸 그림들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은 작업이다.

물고기 뼈를 통해 소외된 자들의 고통을 담아왔는데, 그의 초창기 그림들은 너무 처절했다.



박광호작 [유카리화랑 카페에서 스크랩]



지금은 없어진 인사동 ‘실내악’에 걸린 그림 한 점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외상 술값으로 그려 준 그 그림은 빈 접시에 앙상한 생선뼈만 그렸는데, 마치 불행한 박광호 자화상 같았다.

그런데, 그 이후 그림부터 상형문자처럼 조형화, 도식화되어 아쉬운 감도 들었다,



박광호작 [숲속의 음악세상 카페에서 스크랩]




그와의 인연은 70년대 부산 남포동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꾸려가던 ‘한마당’이란 국악주점 단골로 드나들 때, 얽힌 사연이 만만찮다.

허구한 날 돈 없이 마시고는, 그 자리에 엎드려 잤다.

그는 술만 마시면 끝장을 보는 체질이라 같이 자기도 여러차례 잤다,

사진에 미쳐 다 말아 먹고, 서울 올라오며 한 동안 박광호를 잊고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인사동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는데,

시국사범으로 광주교도소에서 일 년 넘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다.



박광호작 [꽈꼴다원 카페에서 스크랩]




그 때부터 그와의 인연이 다시 이어졌다. 그를 볼 때마다 고난받는 예수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쥐띠부인을 만난 후로는 개봉동과 강메, 행신동으로 옮겨 다녔는데, 사는 게 순탄치 않았다.

개봉동 집 부근에 카페를 운영할 때는 가게에 불을 지러기도 했다. 

강메에서는 철거될 빈집에 들어가 2년가량 살았는데, 억새풀이 어우러져 분위기는 좋았다.

그런데, 거기서도 불을 질러, 사는 꼴을 가까이서 안보니 속은 편했다.

뒤늦게 찾아가 타다 남은 작품을 찍기도 했는데, 그의 강직한 성격은 아무도 못 말린다.




박광호작 [유카리화랑 카페에서 스크랩]




그 이후 다행히 행신동 임대주택에 살게되어 잘 됐다고 좋아했는데,

그 때부터 근이양증이란 희귀병이 찾아와 앉은뱅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쥐띠부인 정신병까지 생겨 불운이 겹친 것이다.

술만 마시면 넘치는 쥐띠부인의 극성스러운 성격에 너무 힘들어 했다.



1993년 의정부, 천상병선생  장례식장에서, 좌로부터 세번째가 박광호다



그래도 가끔 술을 사들고 행신동 아파트로 찾아 갔으나,  쥐띠부인 못 마시게 하려고 박광호가 술을 끊어버렸다.

때로는 쥐띠부인의 정신병 증세가 심해져 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했는데,

일어서지도 못하는 장애인이  밥 해먹는다는 것을 한 번 생각해보라.




오른쪽이 박광호며 안 쪽에 김용문씨도 보인다. 1990년 인사동 여관방에서,..



어느 날 그의 집에 가 보니, 작품 중에 별난 작품이 한 점 눈에 띄었다.

전면에 까마귀 한 마리가 버둥대는 형상을 크로즈 업 하였는데, 왠지 불길했다.

평소 그림과는 달라 유심히 쳐다보았더니, “형! 그 그림 맘에 들면 가져가”라며 싸 주었다.



2011년 천상병선생 의정부 묘지에서, 좌측 전강호씨와 차안은 박광호씨



남의 작품을 탐내거나 손 벌린 적이 한 번도 없으나, 그의 성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오래 전 신세진 게 마음이 걸려 작품이라도 한 점 주고 싶은 것 같아 그냥 받아왔다.

그 그림을 정선에 가져다 놓은 지가 벌써 20여 년이 되었는데,

그림만 보면 불길한 예감이 들어 한 번도 벽에 걸지 못하고 모퉁이에 세워 두었다.

불길한 예감에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버릴 수도 없었다.

좌우지간, 그 그림을 갖다놓은 뒤 부터 풀리는 일이 없었다.



정선 만지산 작업실 모서리에 세워 둔 박광호작품



2013년 10월,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남극과 북극을 오가다’란 글을 올리며

만지산 작업실 일부분을 찍은 위의 사진을 올렸는데, 아마 그 그림을 알아 본 듯했다.

마치 악의 그림 같은 걸 뒤늦게 보았으니, 신들린 여자 눈에는 꽂혔는지 모르겠다.

작품이 탐나면 그냥 필요하다며 달라하지, 왜 병문안 핑계로 미친 척 쇼를 하냐?



2014, 박광호



한 동안은 박광호가 안부 전화를 걸어 왔으나, 일 년 전부터 소식이 끊겨 버렸다.

‘쥐띠부인’이란 별명으로 인터넷에 들락거리며 신이 내린 무당이라는 등

여기 저기 휘젓고 다녀 아예 소통 자체를 끊어버렸다.

안부를 묻고 싶어도, 극성스러운 그녀와 말 섞기조차 싫었다.



병원에 입원 중에 참석했던, 일산에서 열린 단체전에서 찍은 사진으로 뒤에는 아들이다.



뒤늦게 요양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화가 전강호씨로 부터 전해 들었다.

인사동 ‘유목민’ 모임에서 함께 병문안 가자는 이야기도 했으나,

환자가 목에 호스를 꽂아 통화를 할 수 없는데다, 아무도 요양원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쥐띠부인의 극성스럽고 악랄한 처세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멀어져 버린 것이다.

다들 쥐띠부인을 만나는 것은 물론, 통화조차 꺼려해 미루어 왔다.



2003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광호전 개막식에서, 그 때만 해도 많은 벗들이 모였다,



늘 마음의 짐이 되어 기회만 기다렸는데,

느닷없이 ‘쥐뛰부인‘으로 부터 놀라 자빠 질 문자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조문호, 박광호가 1년간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데 전화도 없고 병문안도 오지 않는 게 도리냐?

박광호가 그린 세발까마귀 그림 아래 주소로 보내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1동 샘터마을 222동 404호, 바로 부쳐라”



2013, 인사동 ;아라아트'개관 전에서



그 불길한 그림을 돌려달라니 반갑기도 하지만,

평소에 '오라버니~'라고 아양 떨며 꼬리 치던 여자가, 손 위 사람에게 보낸 막말 메시지에 속이 뒤집혔다.

전화가 계속 울렸으나 받게되면 쌍욕부터 튀어 나올 것 같아 참고 있는데, 두 번째 메시지가 왔다.

‘너 내 전화 좋은 말로 할 때 받어!’

결국 연결 되지 않으니, 정영신씨께 전화해, 나더러 개 새끼라고 욕을 해대며,

그 그림은 짓게 될 박광호박물관에 들어 갈 작품이라는 등 헛소리를 해대며, 빨리 보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막말할 군번도 아니지만, 너무 돌변스러운 행동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막막했다.



녹번동 '풍년식당'에서 정영신, 조준영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마침 ‘인사동 사람들’ 맴버인 조준영시인이 녹번동으로 온다기에 함께 자리했다.

정영신씨 집을 방문해 인근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갔는데, 또 다시 메시지가 온 것이다.

“너 내가 어물 적 넘어갈 줄 알면 큰코다쳐! 좋은 말 할 때 박광호 세발 까마귀그림 택배로 부쳐!“





조준영시인은 쥐띠부인을 본 적이 있어, 사연을 설명하며 전화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메시지를 본 조준영씨가 “그 그림 보내 줘 버려요”라고 잘라 말했지만, 그렇게 간단히 처리할 문제는 아니었다.

이젠 행동을 제지하는 남편마져 병석에 누워 꼼짝할 수 없으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하다. 

지리산으로 내려 간 박한웅씨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도 여럿 곤욕을 치루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더나들며 인사동 소식은 물론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훤히 꿰고 있었는데,

병문안 못 간 것에 화가 났다면, 내가 입원하거나 길흉사가 있을 땐,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나?

그리고 메시지를 잘도 보내면서 박광호가 입원했다는 메시지는 보낼 수 없었나?

순리대로 정중히 메시지를 보냈다면, 당장 정선 갈 수야 없지만, '동강할미꽃 축제' 때 까지만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2014 '아람누리미술관'에서 열린 '일산미술회' 단체전에서....



이제 박광호와의 인연을 끊던지, 이번 기회에 불운의 씨앗을 불태우던지, 결정해야 겠다.



“‘쥐띠부인에게 전하니, 단단히 새겨들어라.

오는 3월 하순 정선 귤암리에서 열리는 동강할미꽃 축제가 끝나는 날,

그 불길한 까마귀 그림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태울 것이다,

그 그림이 필요하다면, 태우기 전에 찾아와 정중히 사과하면 주겠다.

그렇지만 액운을 다시 끌고 가니, 박광호와의 인연은 끝이다.

그 대신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 전시가 끝난 2007년도에 갖다 준, 사진작품을 가져오라.

액운의 까마귀 그림대신, 그 사진액자를 태우며, 살아서의 인연을 끝내겠다.“



박광호, 2014 '아람누리미술관'에서 열린 '일산미술회' 단체전에서



“광호야! 미안하다.

그동안 참고 산다고 욕 봤다. 쥐띠부인 없는 저승에서 만나자.”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사람들이 모처럼 서울 도심을 벗어나, 송추에서 뭉쳤다.

무슨 미련에 못 떠나는지, 인사동 주변을 기웃거리는 예술가들이다.
매월 셋째 수요일마다 인사동에서 만나 대포 한잔하기로 한 것도,
위안거리를 만들기 위한 방편이나 몇 나오지도 않는다.






지난 셋째 수요일 만남에서 송추로 소풍 한 번 오라는 화가 전강호씨의 초대가 있었다.
개천절인 3일 정오 무렵, 송추에서 만나자는 조준영시인의 연락으로 찾아 나선 것이다.
송추유원지 부근에 있는 전강호씨 자택에서 모처럼 자연과 벗이 어울린 호젓한 시간을 보냈다.






전강호씨는 산을 눈앞에 두고 있어 천혜의 자연경관을 누리고 산다.
가 본지가 10년도 넘어 좀 헤맸는데, 주변이 많이 바뀌었더라.
처음 보는 건물들이 많아 낮 설었지만, 집에 들어가니 산을 정원처럼 끼고 앉은 옛날 그대로였다.






그 날은 날씨마저 받혀주어. 따스한 햇살에 온몸이 노글노글 했다.
전강호, 이종순 내외는 물론 조준영, 박윤호, 김민경, 유진오씨가 먼저 와 있었고,
민영기씨 승용차에는 김수길, 공윤희씨가 도착해 내리고 있었다.






인삿말에 동네가 많이 달라졌다고 했더니, 땅값도 몇 배나 올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사는 집값이 오르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그 집에서 살아야 할 사람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지천에 늘린 밤도 줍고, 연못에서 노니는 물고기 모이를 주는 등, 술만 마신 게 아니었다.
뒤늦게 화가 정순겸씨 자매와 사진가 하형우씨도 왔고, 한 때 인사동의 ‘풍류사랑’을 운영했던 최동락씨도 오셨다.






이 반가운 술자리에 노래 한 자락 없어서야 되겠는가?
소리꾼 김민경씨 노래야 여러 차례 들어 잘 알지만, 유진오씨 노래는 처음들었다.
마치 “여자의 일생”을 살아 본 것처럼 처절하게 웃겼다.






그러나 안타까운 소식도 전해졌다.
다들 무세중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넘어져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것이다.
병문안이라도 가야 했지만, 다들 술 마신 상태라 들리기가 좀 그랬다.
요즘은 기초생활수급자 혜택으로 간신히 사신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었는데,
한 분야 획을 그은 예술가의 여생이 이러하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화가 전강호씨는 인사동과 연을 맺은 지가 어언 30여년이 넘었다.
작가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목발로 어지간히도 인사동 주막을 누비고 다녔다.
그동안 강용대, 김종구, 적음스님, 신원섭씨 등 술로 이승을 떠난 친구도 여러 명이다. 



 


유신시절에는 사마귀 작가로 불릴 만큼, 사마귀 그림에 집착하기도 했다.
곤충의 군림자 같은 사마귀 형상에서, 작가의 시대적 저항을 읽을 수 있다.
그 이후에는 버려진 폐자재를 활용하여 다양한 작업들을 했으나, 돈과는 연이 닿지 않았다. 
그렇지만 돈에 연연하지 않고 힘겹게 주워 모은 폐자재들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여름과 겨울 일 년에 두 번씩 술과 외출을 자제하고 수행하는 모습은 스님을 닮았다.





그는 한쪽 다리가 없지만, 건강한 사람보다 더 부지런하다.
그림은 물론 집 주변의 조경이나 모든 것들이 그의 손길 안 닿은 곳이 없다.
텃밭을 가꾸며 직장에 다니는 아내 뒷바라지까지 다 한다.
부지런한 생활에서 예술을 찾아내는, 삶 자체가 예술이다.






푸짐한 안주 덕인지, 아니면 가을 날씨 때문인지,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를 가져 온 민영기씨 일행이 일어나, 나도 일어나야 했다.
버스타기 번거로워 끼어 탔으나, 많이 아쉬웠다.

술과 안주도 남았지만, 남아 있는 벗들이 더 눈에 밟혀서다.





아무튼, 전강호씨 내외 덕에 가을 소풍 잘 다녀왔다.
손님 맞느라 애쓴 두 내외분께 거듭 고마움을 전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올 추석은 유달리 추석선물로 고민을 많이 했다.

동자동 쪽방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추석선물을 지켜보며,
이제는 쪽방촌 선물은 셀프로 해야 할 것 같았다.





올해도 각종 기업이나 단체에서 보내 온 선물을 예년처럼 줄 세워 나누어주었는데,
하나같이 주민들을 거지 구호물품 나누어 주듯 생색냈다.
대개 양념이나 라면, 부식 등 먹거리와 관련된 선물로 중복된 것이 많은데다,
네 차례나 줄 세워, 줄때마다 동네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구정이나 추석마다 온정이란 이름표를 달고 행해지는 관행은
불편과 낭비도 따르지만, 주민들을 쪽팔리게 만든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생색내기로 거지 동냥주는 기분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시에서 하청 준 ‘쪽방상담소’의 업무는 이제 동사무소로 통합시키고,
쪽방 촌을 빈민구호의 홍보장소로 활용하는 짓을 이제 그만하라.
한마디로 쪽방 촌을 정치인들 언론프레이 하는 무대처럼 여긴다.
동자동을 빈민구호지역처럼 만들어 놓았으며, 주민들을 타자화시켜 자립심을 잃게한다.

주는대로 얻어 먹고 시키는대로 살라며 서서히 길들여 가는 것이다.






이제부터 기업이나 단체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선물은 전국 동사무소로 보내라. 
상품으로 보내지 말고 현금으로 전달하여 동 사무소에서 통합하여 빈민들에게 배분하라. 
빈민들에게 일정한 상품권을 나누어 주어, 필요한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자율권을 주라.




 


상품권도 동사무소 직원이 직접 전해 주던지,
아니면 본인이 동사무소에서 직접 찾아가게 하라.
상품권을 줄 때, 어디에서 보내 온 선물이라는 내용도 알려주고...






이번에도 줄서서 한 시간을 기다리다 받은 선물들을 살펴보니,
중복된 것과 필요 없는 것이 많은데다, 비좁은 쪽방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정선에 가져가 필요한 분들에게 나누어 줄 작정으로, 그냥 묶어두고 나왔다.





셋째 수요일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날이라 지하철을 탔는데,
대개의 직장인들이 추석 선물꾸러미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나 역시 오래 전에는 명절마다 선물을 받거나, 선물 전해주는 일에 골머리를 앓았다.






사실 명절마다 선물을 받는 것이나 주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풍습이라 나름으로 주고 받아 왔는데,
동자동에 들어 온 후로는 선물은 포기하고, 일방적으로 주는 쪽방상담소 선물만 받아 왔다.






그런데, 뜻밖에 울산에 있는 오세필씨가 황금배 한 박스를 선물로 보내온 것이다.
그 배를 나누어 먹다보니, 나도 누군가 한 사람에게 선물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돈도 돈이지만, 그 한사람을 누구로 택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인사동 ‘유목민’에 갔더니, 전활철씨를 비롯하여 정복수, 전강호, 이종순,
최종선, 이인섭, 유진오, 이도윤씨 등 반가운 분들을 여럿 만났다.






셋째 수요일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술 한 잔 나누기로 한 적이
일 년 가까이 되었으나, 특정한 장소를 정하지 않아서 그런지,
나와도 만나지 못하는 분이 더 많은데다, 잘 나오지도 않는다.






다리가 불편한데도 송추에서 나와 준 전강호씨가 그날따라 고마웠는데, 반가운 제안을 해 왔다.
가까운 분들끼리 자기가 사는 송추에서 가을소풍을 한 번 갖자는 것이다.
조촐한 술상을 차릴 테니, 시월 하순경의 주말을 택하자고 했다.
날짜를 잡아 연락한다고 일어나며, 술값으로 신사임당 한 장을 내놓았다.






그 돈을 보니, 누군가에게 선물하기로 했던, 진즉의 고민이 다시 떠올랐다.
그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신세진 사람이 너무 많아, 내가 감동스러워했던 일을 떠 올렸다.
오래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묘지를 걱정한 적이 있었는데,
이웃의 최연규씨가 묘지로 쓸 명당이 있다며, 자기 땅을 그냥 사용하라고 한 것이다.






그 오래전의 일이 떠올라 최연규씨 에게 선물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어렵사리 선물 살 돈과 함께 보낼 곳도 정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크고 작고가 아니라, 마음이 담긴 선물은 참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 외에 도움 준 많은 분들께는 저의 마음만 보냅니다.
부디 즐거운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을 사랑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다들 자기 집에서 지내다, 큰 맘 먹어야 나오는데 나와도 잘 만나지지 않는다.
가끔 주변 전시오프닝에서 만나기도 하지만, 요즘은 그런 기회마저 많지 않다.

일 때문에 인사동에 나가도 미리 약속 하지 않으면 아무도 만날 수 없다.
술꾼들이 방앗간처럼 들리는 ‘유목민’에서 가끔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나들이가 잦지 않으니, 대개 해가 바뀌어도 얼굴 한 번 못 보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고, 만나면 몇 번이나 더 만나겠는가?
예전에는 ‘인사동 사람들’이라는 ‘창예헌“ 모임에서 정기적으로 판을 벌여 왔으나
그마저 물주 김명성씨의 사업이 쇠락하여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를 애석하게 생각해 온 조준영시인이 가끔 연락해 만나기야 하지만 10여명에 불과하다.
이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회비를 조금씩 걷어 그런지 모르지만, 많이 나오지 않는다.

아마 한 사람이 맡아 여기 저기 사발통문을 보내지 않아 그럴거다.






그 날, 내가 제안을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날짜를 정해두고, 일 없는 분들은 인사동으로 나오자고 했다.
시간은 정 할 필요가 없지만, 장소는 인사동 낭만의 마지막 보루인

벽치기 샛길에 있는 ‘유목민’도 좋고,  인사동 11길에 있는 '부산식당',  

인사동 8길의 '사동집'이나 '낭만', 아니면 6길의 '툇마루'던, 어디던 들려보자.

특정한 분들끼리 만나려면 장소를 페북이나 카톡에 알려, 함께 놀자는 것이다.


어느 한 집을 지정하여 약속하는 것도 좋지만, 약속 없이 만나는 즐거움이 더 좋다.

매월 몇일로 날자를 정하던지, 아니면 전시들이 열리는 몇째주 수요일로 택해도 좋다.

어느 특정한 날은 인사동에서 친구들과 술 마시는 날로 정하자는 것이다.

지방에서 오는 분들도 약속을 그 날로 잡아두면 님도 보고 뽕도 따지 않겠는가.

인사동에 애착을 가진 많은 예술가들의 의견들을 한 번 듣고 싶다.






몇 일 전 조준영 시인의 연락을 받았다. 27일 오후6시30분경 ‘유목민’에서 얼굴 한 번 보자는것이다.

요즘에는 가야할 전시나 일이 몰려 시간내기가 어렵지만, 다행히 그 날은 약속이 없었다.
시간 맞추어 나갔더니,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화가 장경호, 전강호씨가 판을 벌여 놓았다.
뒤이어 음악인 김상현씨와 연극배우 이명희씨가 등장하였고,

김명성, 공윤희씨가 차례로 나타나 술자리가 두 패로 갈라졌다.






음악인 김상현씨가 나를 위해 부른다며 ‘봄이 오면“이란 신곡을 열창했는데,
이 노래 역시 짠한 슬픔을 남겼다. 왜, 봄은 와도 슬프고 가도 슬픈가?


전복안주가 나오니, 전강호씨가 몸 보신하라며 전복을 권했다.
농담으로 ‘몸 좋아져 거시기 발동하면, 책임 질거냐?’니까 조준영시인 말한다.
"남자는 밥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정력 타령이고,
여자는 밥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화장을 한단다."
꽃은 나비를 불러 들여야 하고, 나비는 씨를 뿌려야 하는 엄정한 자연의 이치를 어찌 할거나...






자리에 앉기 전에는 이승철, 김이하 시인이 마시다 갔고,

뒤늦게는 화가 김정헌씨와 최유진, 이상훈씨도 등장했다.

그리고 카메라를 뒤져보니, 전 날 찍힌 장경호, 성기준, 강기숙, 홍인호씨의 모습도 들어있네.

좌우지간,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인사동에서 만나, 못 다한 시름 풀어보자.

사는 게 별거냐?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 좌로부터 전시기획자 최형순씨와 참여작가 길종갑, 김대영, 서숙희, 조문호, 권용택, 신대엽, 황효창, 김용철, 황재형씨



‘춘천시문화재단’에서 기획한 “강렬하게, 리얼하게” -바이칼에서 강원 춘천까지-전시가

지난 13일 ‘춘천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개막되었다.

이 전시가 기획되며, 오월 중순경 바이칼 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불만을 토로하며 망설이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바이칼 답사를 떠나는 취지는 이해되었으나 기간이 너무 임박해 자칫 중구난방의 전시가 될 확률이 높은데다,

결국 참여 작가들의 작업비를 여행경비로 소진하는 것이 가난한 작가 입장에서는 열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 웃기는 것은 내가 내놓은 남자 알몸 사진을 두고 말이 많았다는 것이다.
집행부를 향한 길종갑씨의 투덜거림으로 대충은 짐작했지만, 뒤늦게 황화백이 귀띔해 준 것이다.

‘춘천문화재단’ 관계자들의 생각인지, 미리 겁먹은 기획자 최형순씨의 생각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의 보수적인 안목으로 어떻게 전시를 추진하는지 걱정스러웠다.

전시장에 도착하니, 역사학자 주재혁씨의 ‘바이칼과 아리랑’에 대한 강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끝날 시간이 다 되어 사진만 찍고 강연은 듣지도 못했다. 그마저 멀리서 온 분들이 기다리고 있어 입구로 나와 버렸다.

화가 장경호씨를 비롯하여, 오래 전 모델에 되어주었던 도예가 신동여씨와, 화가 전강호씨가 와 준 것이다.

당사자들을 자신의 사진 앞에 세워 기념사진을 남기려는데, 갑자기 ‘우두둑 꽝’하는 굉음이 전시장을 메웠다.

돌아보니 강의 듣던 황재형화백이 뒤로 나 자빠지고 있었다.

황소 같은 황형의 무게를 프라스틱 의자가 감당하지 못해 의자 다리가 부러진 것이다.

몸은 커지만 예민한 양반이라 살아남았지, 나같이 멍청한 사람이라면 뇌진탕으로 갈 뻔한 사고였다.

정말 황화백은 대단한 분이었다. 바이칼 답사 때도 사진과 동영상으로 세세히 기록하는 열성을 보이더니,

출품작 여덟 점 중 전부가 바이칼을 소재로 한 신작이었다.

불과 한 달 보름동안 그 대작들을 다 그렸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분들은 한 두 점도 힘들게 마무리했다는데, 이건 꼼짝 않고 그림에만 메 달렸다는 이야기다.

그의 투철한 작가정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막시간이 가까워오자 한 사람 두 사람 몰려들기 시작했다.
'춘천문화재단' 이치호 상임이사, 화가 함 섭, 노용춘, 사진가 정영신과 하재은씨, 목공예가 류정호씨,

시나리오 작가 최근모씨, ‘아트인라이프’상임이사 최용주씨가 있었으나, 대개 모르는 분이 많았다.

미술평론가 최형순씨의 간단한 작가소개가 있은 후, 황재형, 이재삼씨가 나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작품들을 둘러보다, 참여 작가들의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모두 불러 모았다.

아내더러 사진을 찍으라고 카메라를 넘겨주었는데, 나중에 사진을 보니 이재삼씨가 빠져있었다.

찍기 직전에 분명히 전시장에 있었는데, 어디로 빠졌을까? 귀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쨌든 이차까지 넘어 간 뒤풀이에서 꼴리는 대로 놀았고, 술도 어지간히 마셨다.
두 번 째 납치되어 간 곳은 어느 전망 좋은 호수 가였는데, ‘갤러리 파코도노’라 적혀 있었다.
놀란 토끼처럼 전시장을 비롯해 여기 저기 돌아다녔는데, 한 쪽에는 노래방기계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막걸리와 소주는 없을 것 같았는데, 대신 위스키가 나왔다. 누구 주머니를 터는지는 몰라도 신나 부렀다.

오랜만에 촌놈 목구멍에 때 벗기느라 바빴다, 술 마시랴! 사진 박으랴! 춤추랴! 노래 부르랴! 정신없었다.

아! 그런데 밤 열시가 되니 슬슬 불안해 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지막 전철이라도 탈 요량으로 살그머니 빠져 나와 버렸다. 재미있게 노는데, 간다면 판 깨기 십상이잖아.

그런데 그곳이 어딘지 한참을 걸어 나왔는데도, 택시는 물론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가게하나 찾아 콜택시 전화번호를 얻긴 했지만, 상봉역이 종점인 전철만 남아 있었다.

살았다 싶어 퍼져 앉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들여다 보니 장경호 전화였다.

“아이쿠! 장경호를 남겨두었구나”, 뒤늦게 사태파악을 했으나, 아니나 다를까 전화통에다 지랄 같은 욕을 퍼부어 댔다.

 미안한 마음도 잠시 뿐, 너무 열 받아 전화를 끊어 버렸다.

술이 취해 잠에 빠져들었는데, 얼마나 잤는지 승무원이 깨웠다.

택시비 적게 내려고 상봉역에서 돌고 돌아 독립문이 종착지인 3호선을 간신히 탈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한시가 넘었는데 , 일찍 온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별일 없느냐고 묻기에 장경호를 흘리고 왔다 했더니, 당신 치매아니냐며 나무랐다.

“야! 고마 자빠져 자자. 알아서 하 것지. 지가 한 두 살 묵은 아가? ”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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