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가객 최백호의 산문집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마음의 숲에서 출간되어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다.

출판된지 한 달도 되지않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최백호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마음의 숲/ 240면 / 가격17,000원

지난 달 초에 발간된 산문집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는 그가 써온 노래가사처럼 깊은 우수와 사유,

삶에 대한 통찰이 오롯이 담겨있다.

 

산문집에는 최백호가 가수가 된 우여곡절과 가수로서 진정성을 잃지 않고 살아 온 진득한 이야기,

노래에 얽힌 사연, 그리고 깊은 울림을 주는 삶의 잠언들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60세가 넘어 그리기 시작하여 여러 차례 개인전을 가졌던 그림 30점도 수록되어

산문집의 볼거리를 더해주는데, 그림에 이어 글 솜씨도 보통은 아니었다.

하기야! 그가 쓴 시 같은 노래가사들을 보면 일찍부터 노래하는 시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수이며 시인이고, 시인이며 화가인 최백호는 이 시대의 진정한 풍류객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난 4일 오후 4시에는 광화문 교보빌딩 대산홀에서 최백호의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북 콘서트가 열렸다.

 

교보빌딩 23층 대산홀은 350석 규모지만 코로나 방역으로175명만 입장할 수 있는데다,

책은 이미 구해 읽은 터라 북 콘서트는 가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뜻밖의 이변이 생겨버렸다.

 

필자가 포스팅한 북 리뷰를 본 울산의 오세필씨가 사발통문을 돌려버렸다.

그 덕에 김명성씨가 좌석을 확보하여 인사동 지인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이십여 명이나 추가로 참석할 수 있었던 것도 객석의 반만 예약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 날 오후 3시 무렵, 정영신씨와 인사동부터 들려 갤러리인덱스에서 열리는

) 김기찬선생의 어게인 골목안 풍경 속으로사진전을 관람했는데,

사진전 역시 모처럼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좋은 사진이었다.

 

전시를 보고 나오는 길에 역술인 신단수씨를 만나 그날 일진이 어떨지 궁금했는데,

북콘서트가 열리는 대산홀 입구에는 신단수씨의 친형인 김명성씨가 구입한 책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객석에는 오세필, 임태종, 정기범, 이정숙씨등 반가운 분도 여럿 보였다.

 

오후4시부터 시작된 북 콘서트는 최백호의 주옥같은 노래와 함께

가을 낙엽처럼 구수한 이야기들이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께서 태어난 지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은 자신을 보러오다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누님으로부터 너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원망과 더불어

공부가 하기싫어 방황했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가슴에 맺힌 상처까지 다 털어놓아

그의 진정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별도의 사회 없이 혼자서 1시간 30분 동안 끌어가는 북 콘서트 진행 솜씨도 보통은 아니었다.

 SBS 라디오에서 '최백호의 낭만시대'14년 동안 끌어 온 경험이 뒷받침 되지 않았나 싶다.

 

그 날 부른 노래는 부산에 가면을 비롯한 애창곡을 일곱 곡이나 불렀는데,

우수에 젖은 그의 노래는 흩어지는 낙엽처럼 아련한 향수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특히 지금은 별이 되어버린 친구 홍수진 시인을 생각하며 가사를 쓴

영일만 친구에서는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왈칵 밀려왔다.

마지막 구절인 친구를 부르는 대목은 절규처럼 가슴에 내려 꽂혔다.

 

3월 말에는 부산에서 최백호의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북 콘서트가 열린다니,

부산에 계신 분들은 잊지 말고 좋은 시간 만들길 바란다.

 

'인사동 사람들'은 북 콘서트가 끝난 후 미리 예약해 둔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 유쾌한 만찬의 시간도 가졌다.

그러나 김명성씨가 마지막 기념사진 찍으며 뱉은 농담 한마디는 영원히 잊지 못할 마음의 상처가 되고 말았다.

 

사진, / 조문호

 

정영신 사진
정영신사진
정영신사진

  

지난 15일 정영신씨와 함께 세상을 떠난 창원 김의권씨의 장례식장에서 황성건, 변형주씨를 만나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눈 후 인근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발인을 지켜본 후 양산장에 가기 위해서다.

 

울산에서 온 황성건씨와 동행했는데, 양산장에는 공윤희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동지는 장터 촬영을 왔는지, 장보러 왔는지 모를 정도로 농산물을 바리바리 사들고 왔다. 온 김에 오세필씨도 만나보기 위해 남창에 있는 동광기와를 찾아간 것이다.

 

남창에 있는 기와 골 사무실은 열려 있으나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무실에는 나무로 만든 다양한 모골(기와모형 틀)이 진열되어 있었다. 작업장에는 귀면기와와 용두 같은 미완의 기와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는데, 마치 귀신 나올 듯 으스스 했다.

 

문 닫힌 기와공장에는 반구대 암각화를 형상화한 전돌이 전면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두꺼비굴이라 불리는 재래식 기왓굴과 달랐다. 노장들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 전래의 기왓 가마는 쌍굴이었고 원주에서 발견된 경우는 산언덕을 깎고 굴을 뚫었다. 부여근교에서 발굴된 백제 와요는 강둑에 굴을 파고 바닥에 구들장까지 놓았다고 한다.

 

담장처럼 쌓아 둔 기와더미를 보니, 사양길에 접어든 기와의 암울한 현실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각 지방마다 특색 있는 기와를 만들어 왔으나 콘크리트로 지은 슬라브집이 대세를 이루는데다 양기와와 슬레이트 등 새로운 지붕재료의 보급으로, 명맥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가상한 일이다. 지금은 전통기와의 수요가 점차 줄어 둘어 이곳 울산 남창과 전라도 장흥군 안양면에서만 만들어진다고 한다.

 

오세필씨가 운영하는 동광기와는 선조인 오호영옹이 1900년대부터 시작하여 4대째 이어지는 긴 역사를 가졌다. 3대째인 부친 오성환씨가 동광기와라는 이름으로 확장시켰고, 4대째인 오세필씨가 이어받으며 문화재관리국 등록1호가 되었다고 한다.

 

오세필씨는 황금기와를 개발하여 구인사 '대조사전'에 올리기도 했다. 구인사가 돈도 많으면서 콘크리트 절만 만든다는 비판을 받자 제대로 된 대조사전을 건립한 것이다. 신흥수대목장이 도편수가 되고 오세필 제와장이 기와를 맡는 등 전통건축의 장인들을 불러 모아 지어졌는데, 안쪽은 한 층이지만 겉으로는 3층이라 법주사 팔상전의 구조와 비슷하다. 그 '대조사전'은 199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0년에 완공되었는데, 오세필씨의 금빛 기와는 도금이나 단청이 아니라 유약을 발라 구운 기와라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고 한다.

 


기와는 암기와와 숫기와로 구분되는데, 아래에서 받쳐주는 넓적한 기와가 암기와고, 위에서 덮어 지붕의 골을 만드는 둥근 기와가 숫기와다. 또한 암막새와 수막새, 귀면기와(도깨비 얼굴을 새긴 기와), 치미(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기와), 용두(용머리를 표현한 기와), 망와(지붕의 마루 끝에 세우는 기와) 등 부속장식 기와도 다채롭게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전통 기와는 흙과 물로 만들기 때문에 습기가 많은 우기와 한랭한 계절을 피해 봄과 가을에 제작된다. 첫 작업은 질 좋은 원토를 채취하는 것이다. 검은 흙, 누런 흙, 붉은 흙 등 세 종류의 흙이 고루 배합돼야 좋은 기와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기와를 만드는 공정은 찰진 진흙으로 된 점토를 물과 반죽하여 흙 사이에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밟고 짓이기는 작업을 반복하며 나무로 만든 모골(模骨)이란 틀에 넣는다. 모골의 외부에 마포나 무명천을 깔고 반죽한 진흙을 다져 점토판 위에다 씌워 방망이 같은 판으로 두들긴다.

 

그런 다음 와도(瓦刀)2등분하거나 또는 3, 4등분하여 자른 다음 장방형으로 재단한 진흙을 한 조각씩 떼어 와통 둘레에 붙인다. 와통은 진흙을 성형하는 데 쓰이는 원통형의 나무통이다. 성형 작업 중에도 진흙 판을 계속 두드리는데, 이는 흙 사이에 기공이 생기면 나중에 굽는 과정에서 기와가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양이 잡힌 뒤에는 대나무칼 등으로 선을 긋고 건조 과정을 거친 뒤 각각의 낱 기와로 분리해 다시 말린다.

 


최종 단계는 가마 작업이다. 말린 기와를 화기가 고루 통하도록 가마에 차곡차곡 쌓은 뒤 사흘간 불길을 조절하며 섭씨 1000도가 넘는 고온에서 구워낸다. 은은한 검은색이나 은회색이 되면 제대로 구워진 것이다. 이렇게 한 장의 기와가 탄생하기까지 40일 가까이 흙과 물, 그리고 불 속에서 서른 가지가 넘는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 한다.

 

전통 기와는 기계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연스러운 곡선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수분 흡수율과 통기성도 이른바 공장 기와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옛 기와를 두고 흔히 살아 숨쉰다고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전에는 시골 여행하다 보면 곧잘 눈에 띄던 것이 흙으로 두둑하게 쌓은 두꺼비굴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워낙 영세한 시골의 기와공장 인데다 인력 의존도가 높은데 비해 값이 싼 제품이라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곳저곳 살펴보며 전통기와의 우월성과 창의성에 감복하고 있으니, 제와장 오세필씨가 나타났다. 손님 접대를 위해 횟집에 회 사러 간 것 같았다. 오세필, 정영신, 황성건, 공윤희씨 등 다섯 명이 회를 싸들고 오세필씨 형님이 운영하는 고깃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식당은 여러 차례 가보았지만, 소고기 육질이 좋아 입에 찰싹 달라붙었다. 소고기에다 생선회가 어울리지 않는 궁합이지만, 회를 좋아하는 정동지를 위한 특별한 배려였다.

 

그리고 식당 벽에도 오세필씨의 기와 골에서 구워낸 전돌이 장식하고 있었다. 장식적 효용성만 아니라 전돌이 고기냄새를 흡수하는 이점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오세필씨 덕에 맛있게 잘 먹었다.

 

식당에서 나와 보지 못했던 와당 전시장을 둘러보았는데, 마치 기와 박물관에 온 것 같았다. 백제기와에서부터 신라기와에 이르기까지 연대별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입이 쩍 벌어졌다. 심지어는 오래된 기왓장 조각까지 바리바리 모아 두었다. 나라마다 기와의 특징이 뚜렷했다. 고구려의 기와는 힘차고 날카로운 모습을 보였고, 백제의 기와는 간소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백제기와의 보드라운 촉감에서 특유의 조형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통일신라 때의 섬세한 문양은 무르익은 미의식의 화음이 느껴졌다. 신라의 기와는 처음에는 소박했으나 차츰 화려해지고 무늬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제와장 오세필씨의 설명으로는 우리 기와가 삼국시대에 꽃을 피웠다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가 각기 수준 높은 조와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통일신라에는 독자적인 기와를 구워내어 완성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심지어 녹유 기와와 전돌이 그러하려니와 무늬에 있어서도 다양하고 정교하다. 그런데 고려이후의 무늬와 종류는 한계점에 달했음을 보게 된다. 청자로 구운 기와까지 나왔음에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12세기로 한 고비를 그었다. 얼굴 무늬 수막새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간직한, 신라의 대표적 기와 유물로 꼽힌다. 그리고 강진에서 구워진 모란당초 무늬의 청자기와는 얼마나 기발한 착상인가.

 

옛 유물에 나타난 기와의 종류는 무려 20여종에 달했다. 평와로서 암기와와 숫기와는 물론, 숫기와로서 미구기와와 토수기와가 더 있었다. 막새는 평기와에 낙수의 드림새를 붙인 것이고 망새 (망와)는 용마루나 내림마루 끝에 다는 바래기를 말한다. 옛것에는 귓기와, 곱새기와, 기왓골수새 등 갖가지 기와가 있었다고 한다. 치미, 용두, 잡상, 토수 같은 것은 궁궐이나 큰 사찰용이라 흔치 않았다.

 

정영신씨는 이곳에서 구웠다는 달항아리 한 점과 오래된 숫기와 한 점을 선물 받았다. 숫기와에 핀 세월의 꽃은 어느 조각품도 따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나저나, 문화재청에서 전통기와를 전승하고 보존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 같다.

전통기와를 배우려는 사람도 없거니와 타산이 맞지 않아 더 이상 만들 수가 없다는 말에 귀가 막혔다

역사를 중시 않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사진, / 조문호

 

선물받은 달항아리와 숫기와를 집이 좁아 어디 둘까 걱정했는데, 다 제자리가 있네.

 

울산에서 오세필씨가 올라와 점심이나 같이 먹자는 연락을 했다.

서둘러 나갔는데, 인사동이 난리 쳐들어 온 것처럼 시끄러웠다.

조계사에서부터 안국역까지 버스가 줄지어 섰고,

확성기 소리가 쩌렁쩌렁 인사동을 울렸다.

 

‘조계사'에서 정청래의원 ’봉이 김선달‘ 발언에 반발하는

승려대회가 열리는데, 오천명여 명이나 몰렸다고 했다.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에 방역규칙을 어겨가며,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광화문광장에서 규탄대회하다 교도소까지 전전한 전광훈 목사 패거리와 다를 게 뭐 있겠는가?

돈과 권력을 위해 정치에 까지 개입하려는 못된 짓거리다.

‘공수래 공수거’라며 무소유를 설법한 부처의 말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행여 아는 중 만날까 두려워, 얼른 약속장소로 옮겼다.

벽치기 골목의 ‘유목민’은 그 때까지 문이 잠겨있었다.

‘유담‘에서 기다리는 오세필씨를 불러내어 밥집부터 갔다.

어디가 좋겠냐고 물어왔지만, 당신이 정하라며 한 발 물러났다.

나야 끼니를 때우는 식이지만, 그는 맛을 즐기는 미식가가 아니던가?

 

속으로는 ‘툇마루’ 된장비빔밥이나 ‘부산식당’의 생태탕,

아니면 ‘나주곰탕’이나 ‘여자만‘ 정식 등 여러가지를 떠 올렸지만,

생각지도 못한 북인사마당 코너에 있는 ’조금‘으로 들어갔다.

오래전 한정식선생 따라 한 번 간적이 있는데, 일식 풍의 분위기도 별로지만,

돌솥 밥 하나에 만 칠천 원이라 다른 밥집에 비해 비샀다.

 

그리고 실내조명도 조도를 낮추어 어두침침했다.

밥을 비볐으나, 무슨 맛인지 아무 맛도 모르겠더라.

입맛이 간 것인지 음식 맛이 없는 건지, 분간 못한 채 먹어 치웠는데,

다 먹고 보니 양념장도 넣지 않고 비벼 먹은 것이다.

이제 치매환자나 다름없어 실수를 밥 먹듯 한다.

 

식당에서 나와 커피 마시러 ‘유담’에 다시 들렸다.

그때사 주인 마담이 타주는 달달한 커피 맛을 즐겼는데,

오세필씨가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냈다.

"형도 잘 나갈 때가 있었다는데, 그 때가 어디 있을 때요?“

아마 돈 벌 때를 말하는 것 같은데, 돈이 많으면 잘 나가는 걸까?

40여 년 전 ‘한마당’ 시절을 떠 올리며 케케묵은 추억을 들먹였는데,

아마 그 운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나 역시 돈벌레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때 마침 장보러 갔던 전활철씨가 등짐을 지고 ‘유목민’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 이런 저런 안부만 전하고 헤어져야 했다.

나도 하는 일 없이 바쁘지만, 전활철씨는 장사 준비를 해야 하고

오세필씨는 또 다른 약속이 있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습관처럼 인사동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건물 벽을 임대한 노점상은 늘어났고, 아직 빈 점포가 많이 남아 있었다.

 

건물주와 임대자가 분쟁 중에 있는 인사동 문화공간 ‘코트’ 건물 전면에는

함민복의 시 ‘모든 경계에 꽃이 핀다’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전시장 안에는 전시를 방해하는 자동차 두 대가 버티고 있었는데.

천으로 덮어 놓았다. 돈 밖에 모르는 이런 악덕 지주를 정말 단죄할 수 없을까?

​문화예술을 짓밟는 '코트' 폭력사건만은 절대 승복하선 안 된다.

예술과 돈의 한 판 싸움이다.

 

​사진, 글 / 조문호

 

 

 

 
 

 

 

 

 
 

 

..

지난 주말은 정영신 동지의 생일이었다.

인사동 전시를 마무리한터라 어디든 여행이나 가자고 했더니, 작심한 듯 포항 장기장에 가잔다.

 

포항 장기장은 전국장터 목록에 빠져있어 유일하게 가보지 않은 오일장이란다.

문화유적이 많은 장기면의 장터가 빠졌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 곳에는 장기읍성과 뇌성산성을 비롯하여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원이 많은 곳이다. 

죽림서원, 삼명서원, 덕림서원, 서산서원이 있고, 

향교와 척화비, 석남사지, 고석사 석불좌상 등 문화재가 많다.

 

모처럼의 장거리 여행이기도 하지만, 일에서 해방되어 날아갈 것 같았다.

새벽 일찍 출발해 정오 무렵에서야 현장에 도착했는데, 텅 빈 장터가 반겼다.

마치 피난 간 마을처럼 사람이라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장터였다.

 

어렵사리 만난 노인에게 “장이 왜 안서냐?”고 물었더니, 

아침에 몇 사람 나왔으나 이내 끝났다는 것이다. 

노인들만 남은 면소재지 장이라 장터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된 것 같았다.

 

새로 지은 장터 앞에는 장의사가 버티고 있어 을씨년스러웠다. 

한 세기나 지난 것 같은 오래된 고물차가 장터 곳곳에 있었고, 

점포들도 외부는 깔끔하게 정리되었으나,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유령의 마을 같았다. 

아마 문화유적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외관정비와 시설 보수는 했으나 

늙은이만 남아 장터 기능은 물론 살기조차 힘들 것 같았다.

 

옛날에는 유배지이기도 했으니, 외딴 곳에 젊은이들이 살고 싶겠는가?

장기장은 찍을 것이 없었으나, 지척에 있는 유적이라도 돌아보기로 했다.

 

장기면 읍내리에 있는 장기읍성은 둘레가 1,440미터고, 

옹성과 치성을 비롯하여 네 개의 우물과 두 개의 연못인 음마지가 있고, 

성 안쪽에는 향교와 동헌터가 남아 있었다.

 

여진족의 해안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토성으로 현종 2년에 축성되었는데, 

세종 21년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돌 성으로 개축된 후 군사기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교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 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송시열을 기리는 죽림서원이 세워져 글 읽는 마을이 되었으나 

오로지 군사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한 고장이라 할 수 있다.

 

장기향교도 가까이 있었으나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담장을 돌며 내부를 살펴볼 수밖에 없었는데,

맞배지붕 겹처마 5칸으로 된 대성전에는 18현의 위패를 봉안해 두었다고 한다.

당우로는 팔작지붕 홑처마에 7칸으로 된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주사 등이 있었다.

 

모두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고 한다.

뇌성산성이나 고석사 석불좌상도 찾아 보고 싶었으나,

울산의 기와장인 오세필씨를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이 다가와 갈 시간이 없었다.

 

지방 촬영 때는 일체 지인을 만나지 않지만, 오래 전부터 한 번 오라는 연락에 정동지가 약속해 두었단다.

그래서 일박이일의 촬영일정을 잡은 것이다.

 

약속 장소인 울산 남창까지는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다.

남창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오세필씨를 비롯하여 한양현씨와 양산에 있는 공윤희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세필씨 따라 그가 운영하는 기와공장을 거쳐 ‘송화정’으로 갔는데, 그날따라 정기휴일이라고 했다.

형님이 운영하는 곳이라 일할 분을 불러낸 모양인데,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더욱 송구스러운 것은 정동지가 좋아하는 감성돔까지 횟집에서 장만해 왔는데,

너무 과분한 대접이라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 날이 정영신씨의 생일이란 말은 하지 않았으나, 최고의 생일만찬이 아닐 수 없었다.

 

바닷가에서 커피를 마신 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L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공윤희씨가 숙소에 공수해 온 술과 안주로 밤늦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들 반가웠고 고마웠어요.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일요일 정오무렵, 춘천 ‘미래컨벤션웨딩홀’에서 오세필, 이종난씨의 장남 원석군과

황석규, 이정순씨의 장녀 임정양이 화촉을 밝혔다.

 

원석이 장가가는 걸 보러 모처럼 춘천에 갔는데, 웨딩홀이 마치 이산가족 만나는 장소같았다.

친지들 만나는 혼주야 말할 것도 없지만, 하객들도 반가운 분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정영신, 김명성씨와 함께 출발한 예식장은 혼주인 오세필씨 가족을 비롯하여

최백호, 정기범, 이정숙씨 내외와 공윤희, 임태종, 손연칠씨 등 많은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울산 신랑이 신부 댁이 있는 춘천에서 가진 혼례였으나,

코로나 시국에도 불구하고 많은 하객들이 축하하러 왔었다.

 

여태 늙어가는 스스로의 처지를 잊고 지냈는데,

모처럼 만난 지인들의 늙어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정기범씨와 손연칠씨도 이전보다 늙어 보였고,

최백호씨는 나보다 세 살이나 아래인데도 이전 같지 않았다.

 

그동안 희귀병에 걸려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인데,

돈벌이에 급급한 큰 병원들의 문제점에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다행이 그 병을 잘 아는 분을 만나 완쾌했으나 체중이 10킬로나 빠졌단다.

 

어제께는 가수 이동원씨의 부고에 가슴이 아팠다.

이제 벗들이 하나 둘 떠나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만,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지인들과 어울려 3층 연회장으로 올라갔더니, 김상현씨가 뒤늦게 찾아왔다.

다들 차를 끌고 와 술 한 잔 마시지 못했으나, 춘천까지 와서 어찌 그냥 갈수 있겠나?

 

김명성, 김상현, 정영신씨와 소양강을 찾아가 늦가을의 정취에 빠지기도 했다.

 

휴일이라 차 밀릴 것을 염려해 춘천까지 와서 닭갈비 맛도 보지 못하고 출발했는데,

어이쿠! 다들 이심전심인지 차가 엄청 밀리기 시작했다.

김상현씨가 들려주는 남인수씨의 낭낭한 노래 소리에 위안해야 했다.

 

다시 한 번 오세필씨의 장남 원석군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사람들이 한 달에 한번 만나는 지난 셋째 수요일은 봄비가 부슬부슬 내려 술 맛 나게 만들었다.

그 전날은 이청운 화백 문병 온 울산의 오세필씨를 만나 한 잔했는데,

사람 핑계에다 날씨 핑계까지 대며 매일같이 술 마실 핑계를 찾는다.




먼저 이명희씨가 출연하는 ‘기타리스트’ 리허설 사진 찍으러 갔으나,

인사동에서 죽치고 있을 오세필씨 생각에 리허설이 끝나자 바로 달려갔다.

서울 온 김에 셋째 수요일의 만남에 함께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인사동 ‘시골밥상’으로 갔더니 무용가 이재은씨 내외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재은씨 내외는 너무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한 때는 정선 만지산 작업실까지 온 적이 있었다.

근황을 물었더니, 토종씨앗 지키는 일에 몸 바치고 있단다.

토종 씨앗을 파종한 마을을 찾아다니며 잘 자라도록 춤도 춘다는데, 기회가 되면 한 번 보고 싶어졌다.




좀 있으니 정영신, 공윤희씨가 나타나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손님을 젊은 층으로 바꾼다는 전활철씨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지만, 다들 아는 장소라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나는 장소를 어디로 정해야 할지 걱정스러웠다.




생태탕이 맛있는 ‘부산식당’이 좋겠지만, 수요일엔 전시뒤풀이가 많아 앉을 자리가 없다.

그리고 ‘풍류사랑’은 골목 깊숙이 있어 오가며 들리기가 까다로워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사동집’과 ‘풍류사랑’ 두 곳을 연계하면 어떨까 생각되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집약해 보기로 했는데, ‘유목민’에는 윤강욱, 김기영씨 일행이 자리잡고 있었다.




좀 있으니, ‘나무화랑’에서 열린 강행복씨 오프닝에 참석한 분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강행복씨를 비롯하여 김진하, 손기환, 홍성미, 이태호, 김 구, 한상진씨가 나타났고,

나중에는 장경호, 안완규, 김윤기, 박세라씨도 왔다.
그런데 좀처럼 빠지지 않는 김명성씨와 이인섭선생이 보이지 않았다.




그 날의 술상 안주는 화가 손연칠씨였다.

얼마 전 ‘서울문화투데이’에 인터뷰기사가 실렸는데, 문화대상을 수상했다는 것이다.

축배라도 들어야 할 것 같아, 오세필씨가 전화로 왜 나오지 않았냐고 추궁을 했다.

그 또한 나처럼 미투의 언저리를 들락거리지만, 별 탈 없는 요시찰 인물이다.




술이 취하니 피로가 몰려와 먼저 일어났는데. 정영신씨 했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일은 오늘 못 가본 강행복씨 전시와 사진전 오프닝 두 군데 가려면 바쁘게 되었다는 걱정에 돌아 온 말이다.

“누구를 위해 사냐? 제발 스스로를 위해 살아라”

사진, 글 / 조문호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옛날 유행가 자락이다.
술꾼들은 예수님 말씀을 너무 잘 듣는다.
원수라는 술을 그토록 사랑하니까...






술 때문에 먼저 간 인간들이 한 둘이 아닌데다,
더 마시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뿌리치질 못한다.
사랑이 아무리 진하다지만, 목숨 바치는 사람 그리 많지 않다.





요즘은 술자리를 피해 인사동도 한 낮에 가지만, 며칠 가질 못한다.
저녁 먹자는 김명성씨의 뻔한 전화를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봐야 할 전시도 있어, 서둘러 인사동으로 달려갔다.






인사동 벽치기 골목 깊숙이 박혀있는 유담 커피집에는
김명성, 김용국씨와 함께, 제주에 사는 이용철씨도 와 있었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술시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요즘 김명성씨 패거리는 술도 인사동에서 마시지 않고, 연신내에서 마신다.
그 곳은 불러 낼 술꾼도 많은데다, 음식이 맛있고 싸기 때문이다.
연서시장 안에 있는 ‘똑순내’집이 단골인데, 주모의 넉살도 죽인다.
여럿이 간장게장에 병어 찜을 안주로 실 컨 마셔도, 오만원이면 떡을 친다.





삼청동 '이노갤러리'에 들려, 전시장 지키던 강찬모화백 까지 데리고 갔다.
데모대 막는 경찰에 막혀, 택시 안에서 돈만 버리다, 결국 지하철을 타야 했다.
먼저 간 김병국씨가 술상 차려놓고 기다렸는데, 술꾼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해인, 이만주. 서길헌씨가 왔고, 늦게는 최벽호씨 영화 찍는데 갔던 오세필씨도 등장했다.






그 날의 화제는, 오래전 인사동 ‘실비집’이나 '시인통신'에서 퍼 마시던 이야기였다.
추접 떨기로는 사진기자 김종구를 당할 자가 없었는데, 

막걸리 주전자에다 여름철 꼬랑내 나는 양말을 휘휘저어 짤아 마시지를 않나,
어떤 놈은 한 술 더 떠, 똥딱지 묻은 빤스까지 벗어, 술에 짤아 쳐 마셨다.
벌주로나, 기 싸움으로 마시는 호기도 천태만상이었다.






그 지긋 지긋하던 일들도, 이제 아련한 전설이 되었는데,
강찬모씨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 주었다.
지금에야 술을 멀리하여 부처같이 살지만, 그도 예전엔 꼴통이었다.





어느 놈이 커다란 막걸리 주전자에다, 남자변기에 붙은 누런 찌꺼기를 끌어 넣었다고 한다.
한 참을 마시다 주전자에 덜거덕 덜거덕 소리가 나서 열어보니,
변기 찌꺼기를 걸러주는 마게였다고 한다.






아무리 더러워도 모르고 마시면 약이겠으나, 알고 나면 속이 뒤집힐 것 아닌가?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린다.
위생을 따지는 요즘 잣대라면, 다들 병 걸려 죽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람 목숨이 생각보다 질긴 것이다.






서울역에 사는 노숙자들을 보면 알 수있다.
그들은 물을 겁내는 족속이라, 목욕은 커녕 손도 씻는 일이 없다.
항상 더러운 손으로 상한 음식을 먹어도 배탈도 나지 않는다.
몸은 길들이기 따라 내성이 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술자리의 객기는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옛날 꼬맹이 시절에 아버지 친구들이 어울려 벌이는 기행을 엿 본적도 있다.
소리꾼 정상수씨가 운영하는 기방에, 울 엄마 정탐꾼으로 아버지를 찾아 갔는데,
기녀 고무신에다 술을 따라 마시고 계셨다.
다들 알만한 점잖은 분들이라, 기가 막혔다.






그 후 어른이 되어, 그 때의 기행이 풍류로 느껴지며 나도 서서히 물든 것 같다.
술이 취하면 객기를 부리는 것이 다 그 때 영향이 아닐까?
아니면 부전자전이던지...






그 다음에는 죽은 술꾼들 이야기로 이어졌다.
쪽방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나가는 사람은 다 술꾼이다.

진짜 술이 원수다.



인사동에서 갤러리하던 김용철씨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그 날 처음 들었고,
배불둑이 박진관씨도 몇일 전 혼자 객사했다.

그저께는, 술 취해 가던 김수길씨가 쓰러져 119에 실려 갔다는 소식도 들었다.





조해인씨가 ‘인사동 유목민’이란 소설을 쓰며, 그동안 죽은 술꾼을 헤아려보니, 40명이 넘었다고 했다.
그런데, 술 마시던 김명성씨가 갑자기 몸이 아프다며, 먼저 일어나야겠다는 것이다.

놀란 오세필씨가 데려다 주었는데, 지금은 괜찮은지 모르겠다.






수 십 년을 같이 마셨지만, 그런 꼴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술자리를 지켰던, 그마저 간다면 이제 끝나는 것인가?

다들 술 때문에 죽을 판이지만, 그래도 악을 쓰며 마신다.


“그래 죽자.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올 추석은 유달리 추석선물로 고민을 많이 했다.

동자동 쪽방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추석선물을 지켜보며,
이제는 쪽방촌 선물은 셀프로 해야 할 것 같았다.





올해도 각종 기업이나 단체에서 보내 온 선물을 예년처럼 줄 세워 나누어주었는데,
하나같이 주민들을 거지 구호물품 나누어 주듯 생색냈다.
대개 양념이나 라면, 부식 등 먹거리와 관련된 선물로 중복된 것이 많은데다,
네 차례나 줄 세워, 줄때마다 동네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구정이나 추석마다 온정이란 이름표를 달고 행해지는 관행은
불편과 낭비도 따르지만, 주민들을 쪽팔리게 만든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생색내기로 거지 동냥주는 기분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시에서 하청 준 ‘쪽방상담소’의 업무는 이제 동사무소로 통합시키고,
쪽방 촌을 빈민구호의 홍보장소로 활용하는 짓을 이제 그만하라.
한마디로 쪽방 촌을 정치인들 언론프레이 하는 무대처럼 여긴다.
동자동을 빈민구호지역처럼 만들어 놓았으며, 주민들을 타자화시켜 자립심을 잃게한다.

주는대로 얻어 먹고 시키는대로 살라며 서서히 길들여 가는 것이다.






이제부터 기업이나 단체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선물은 전국 동사무소로 보내라. 
상품으로 보내지 말고 현금으로 전달하여 동 사무소에서 통합하여 빈민들에게 배분하라. 
빈민들에게 일정한 상품권을 나누어 주어, 필요한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자율권을 주라.




 


상품권도 동사무소 직원이 직접 전해 주던지,
아니면 본인이 동사무소에서 직접 찾아가게 하라.
상품권을 줄 때, 어디에서 보내 온 선물이라는 내용도 알려주고...






이번에도 줄서서 한 시간을 기다리다 받은 선물들을 살펴보니,
중복된 것과 필요 없는 것이 많은데다, 비좁은 쪽방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정선에 가져가 필요한 분들에게 나누어 줄 작정으로, 그냥 묶어두고 나왔다.





셋째 수요일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날이라 지하철을 탔는데,
대개의 직장인들이 추석 선물꾸러미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나 역시 오래 전에는 명절마다 선물을 받거나, 선물 전해주는 일에 골머리를 앓았다.






사실 명절마다 선물을 받는 것이나 주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풍습이라 나름으로 주고 받아 왔는데,
동자동에 들어 온 후로는 선물은 포기하고, 일방적으로 주는 쪽방상담소 선물만 받아 왔다.






그런데, 뜻밖에 울산에 있는 오세필씨가 황금배 한 박스를 선물로 보내온 것이다.
그 배를 나누어 먹다보니, 나도 누군가 한 사람에게 선물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돈도 돈이지만, 그 한사람을 누구로 택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인사동 ‘유목민’에 갔더니, 전활철씨를 비롯하여 정복수, 전강호, 이종순,
최종선, 이인섭, 유진오, 이도윤씨 등 반가운 분들을 여럿 만났다.






셋째 수요일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술 한 잔 나누기로 한 적이
일 년 가까이 되었으나, 특정한 장소를 정하지 않아서 그런지,
나와도 만나지 못하는 분이 더 많은데다, 잘 나오지도 않는다.






다리가 불편한데도 송추에서 나와 준 전강호씨가 그날따라 고마웠는데, 반가운 제안을 해 왔다.
가까운 분들끼리 자기가 사는 송추에서 가을소풍을 한 번 갖자는 것이다.
조촐한 술상을 차릴 테니, 시월 하순경의 주말을 택하자고 했다.
날짜를 잡아 연락한다고 일어나며, 술값으로 신사임당 한 장을 내놓았다.






그 돈을 보니, 누군가에게 선물하기로 했던, 진즉의 고민이 다시 떠올랐다.
그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신세진 사람이 너무 많아, 내가 감동스러워했던 일을 떠 올렸다.
오래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묘지를 걱정한 적이 있었는데,
이웃의 최연규씨가 묘지로 쓸 명당이 있다며, 자기 땅을 그냥 사용하라고 한 것이다.






그 오래전의 일이 떠올라 최연규씨 에게 선물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어렵사리 선물 살 돈과 함께 보낼 곳도 정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크고 작고가 아니라, 마음이 담긴 선물은 참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 외에 도움 준 많은 분들께는 저의 마음만 보냅니다.
부디 즐거운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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