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군 강상면 자택에서 만난 황명걸 시인. 숨이 차 소리가 잘 나지 않았다. 걸음도 불편했다. 그래도 시와 그림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다. 그의 시엔 유난히 세상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많이 담겨있다. “4·19때 철학과 후배 어머니가 하는 중학동 다방에 있었어요. 2층에서 내려다보니 의대생이 피묻은 흰 가운을 입고 쓰러진 학생들을 들것으로 나르고 있더군요. 그게 눈에 선합니다. 옆에서 주먹만 쥐고 끼어들지는 않았어요.” 시선집이 나온 데는 절친 신경림 시인의 도움이 있었다. “신경림 시인이 ‘죽을 때도 됐는데, 시선집 하나 없으면 되겠느냐’고 하더군요.”


평양 출신 부친 해방뒤 치안대장
‘완장’ 싫어 미대 원했지만 ‘반대’
시쓰고 그림 그리다 서울대 ‘중퇴’

1962년 시로 등단…첫시집 ‘판금’
‘동아투위’ 거리시위 격문시 맡아
90년대 양평서 카페 운영하기도



시선집 낸 해직언론인 출신 황명걸 시인(82·사진)은 자신의 인생을 ‘자유혼’ 한 글자로 요약했다. 대학 졸업장에 얽매이지 않았고, 시를 썼고 그림을 그렸다. 언론자유를 외치다 직장을 잃었고, 남한강과 북한강변에서 갤러리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 최근 시선집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창비, 구중서 신경림 엮음)를 펴낸 시인을 10일 경기 양평군 강상면 자택에서 만났다.


“아버지에 대한 역심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언젠가 아버지와 나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어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자유혼과 불가분의 관계처럼 엮이는 듯했다. “아버진 쁘띠(소) 브루주아 근성이 농후하셨죠.” 의대나 법대를 고집하며 아들의 미대 진학을 끝내 반대했다. 시인은 타협책으로 서울대 불문학과에 들어갔다. “미술사학을 하겠다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대학에서 공부도 제대로 안하고 유학도 좌절되면서 결국 졸업을 못했죠.”


시인의 고향은 평양 대동강변이다. “아버지가 완장을 좋아하셨어요. 일제 때 사업을 하셨어요. 자동차도 있었죠. 당시 집엔 일본도가 몇개 걸려 있었어요. (해방 때) 아버지 무릎에서 일왕의 항복 방송을 들었는데, 아버지는 유카타(일본식 가벼운 겉옷) 차림에 일장기가 그려진 머리띠를 이마에 두르고 계셨어요. 해방 뒤에는 권총을 차고 치안대장을 하셨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겹쳤다. “외삼촌은 소련군 장교였고, (한국전쟁 때 납북당한) 친삼촌 둘은 서북청년단 간부였어요.”

아버지의 ‘쁘띠 브루주아 근성’이 너무 싫었던 아들은 화가를 꿈꿨다. 한국전쟁 때 부모는 제주로 피난을 가 냉면집을 했다. 고교생이었던 시인은 제주의 유일한 화방을 드나들며 그림을 그렸다. 물방울 화가인 김창렬도 같이 배웠다. 

 

전쟁이 끝난 뒤 부모는 서울 중구 초동에 냉면집을 냈다. 군 복무를 마친 시인은 대학에 복학하지 않았다. “대학을 하찮게 생각했어요. 시를 썼어요. 소설도 쓰려고 했죠.” 대학 다닐 때 이화여고 다니던 동갑내기 아내 서상실씨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강하게 반대했다. “이대 작곡과나 피아노과를 나온 며느리를 원했어요. (아내가) 고교생이었으니 반대가 심했죠. 집에서 쫓겨났어요.”


‘고졸 가장’은 잡지 편집자 생활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1962년 <자유문학> 편집자로 일하던 시절 ‘이 봄의 미아’란 시로 등단했다. 여성지 <주부생활> 등에서 편집기자로 인정받은 그는 67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했다. 8년 뒤 자유언론운동으로 해직당할 때까지 <신동아> 등 잡지 쪽에서 일했다. 해직 기자들의 거리 투쟁 때 ‘격문시’는 등단 13년차인 그가 도맡았다. 해직 뒤 <미술과 생활> 편집장을 거쳐 엘지의 전신인 럭키금성사의 사보 편집자로 취직했다. “격문시를 써서 그런지 형사들이 럭키금성사 시절에도 한동안 따라다녔어요.” 88년 <한겨레> 창간 때 주주로도 참여했지만, 동아일보에서 해직 당한 뒤엔 돈 주고 신문을 사서 보지는 않는다고 했다. 강제로 쫓겨난 상처가 그만큼 컸다.


시인은 등단 이래 50여년동안 시집 3권을 냈다. 유신 때 펴낸 첫 시집 <한국의 아이>(76)는 판매금지 처분을 당했다. 20년 뒤 <내 마음의 솔밭>(96)을, 2004년엔 <흰 저고리 검정 치마>를 펴냈다. 이번 선집에는 세 시집에서 각 25편을 골랐고, 신작시 25편도 보탰다.


구중서 평론가는 발문에서 “시 ‘한국의 아이’ 한편만으로 황명걸은 불멸의 시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썼다. 이 시엔 “숙부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정교한 조각을 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올리도록 하여라”란 표현이 있다. 기성 체제와 권위에 대한 강렬한 저항 의식을 담았다. “65년에 통혁당 사람들이 만든 <청맥>이란 잡지에 이 시를 발표했어요. 내가 객원필자였죠.” 3년 뒤 통혁당 사건이 터졌다. ‘통혁당 핵심’ 김질락은 사형을 당했다. “나도 잡혀갈까 봐 조금 떨었어요.”


시인은 정년 퇴임 뒤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북한강변에 터를 잡았다. 91년이었다. “퇴임 뒤 노름에 빠져 퇴직금과 모아놓은 그림도 팔아먹었죠. 아내의 마음 고생이 심했어요.” 건축가인 아들이 지은 예쁜 집도 화재로 불탔다. 화마를 당한 집을 손봐서 갤러리 카페(무너미)를 냈는데, 대박이 났다고 했다. 예술인의 사랑방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번엔 ‘무허가 영업’으로 고발돼 경찰서 유치장에 한달간 구금되기도 했다. 그뒤 남한강가인 옥천면 아신리로 옮겨 카페 ‘어린왕자’를 열었다. 역시 아들 작품이었다. 3년 전 사진작가에게 카페를 남겼다. 요즘은 동네 노인정에서 서예 공부를 하는 일 외엔 집 밖 출입을 하지 않는다. 서재 밖으로 남한강 물결이 넘실거리지만 장애가 있어 운동이나 산책은 못한다.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 최근 <양평문학>에 ‘노 시인의 아내’란 시를 발표했다. “집사람에 대한 속죄를 담은 헌시죠.” 서재엔 그의 그림 200여점이 보관돼있다. “2008년에 시화집을 내고 전람회도 한번 했죠. 그뒤에 그린 그림도 전시하고 싶지만 쉽지 않아요. 전시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스크랩 / 한겨레]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지난 18일, 김신용시인과 양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서울역 주변에서 쪽방사람들을 찍는 나를 도우려, 시흥에서 나온 것이다.
양동은 그가 지게꾼으로 일하며 시를 쓰 왔던 시작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는 매혈은 물론,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시행된 정관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다.

끼니해결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았는데, 그러한 부랑의 시절에 양동골방

(그 때는 쪽방이 아니라 골방이라 했단다)에 엎드려 양동시편을 쓰내어,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창녀촌이자 빈민굴인 양동의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된 시편들은 '문학적 승화'가 어떤 것인지 보여줄 만큼 아름답다.





양동시편에 나오는 김신용의 '뼉다귀집'시 한 편을 읽어보라.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양동 골목에 있었지요
구정물이 뚝뚝 듣는 주인 할머니는
새벽이면 남대문 시장바닥에서 줏어온
돼지뼈를 고아서 술국밥으로 파는 술집이었지요
뉘 입에선지 모르지만 그냥 뼉다귀집으로 불리우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어쩌다 살점이라도 뜯고 싶은 사람이 들렀다가는
찌그러진 그릇과 곰팡내 나는 술청 안을
파리와 바퀴벌레들이 거미줄의 현을 고르며 유유롭고
훔친 자리를 도리어 더럽힐 것 같은
걸레 한 움큼 할머니의 꼴을 보고는 질겁을 하고
뒤돌아서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첫새벽 할머니는 뼉다귀를 뿌연 뼛물이 우러나오도록
고아서 종일토록 뿌연 뼛물이 희게 맑아질 때까지
맑아진 뼛물이 다시 투명해질 때까지
밤새도록 푹 고아서 아침이 오면
어쩌다 붙은 살점까지도 국물이 되어버린
그 뼉다귀를 핥기 위해
뼈만 앙상한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들지요
날품팔이지게꾼부랑자쪼록꾼뚜쟁이시라이꾼날라리똥치꼬지꾼
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에게
몸 보하는 디는 요 궁물이 제일이랑께 하며
언제나 반겨 맞아주는 할머니를 보면요
양동이 이 땅의 조그만 종기일 때부터
곪아 난치의 환부가 되어버린 오늘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뼉다귀를 고으며 늙어온 할머니의
뼛국물을 할짝이며
우리는 얼마나 그 국물이 되고 싶었던지
뼉다귀 하나로 펄펄 끓는 국물 속에 얼마나
분신하고 싶었던지, 지금은 힐튼 호텔의 휘황한 불빛이
머큐롬처럼 쏟아져 내리고, 포크레인이 환부를 긁어내고
거기 균처럼 꿈틀거리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어둠 속, 이 땅
어디엔가 반드시 살아있을 양동의
그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김신용시인은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뼈를 깍는 괴로움 속에서도 좌절않고 시를 쓴, 투지의 작가다.

그리고 그의 맑은 사랑의 정신과 예민한 감성은 눈 부시도록 아름답다.

 소외층의 삶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동질성을 바탕에 두었기에 다른 구호적인 사랑의 시편과는 다르다.

어떤이는 한국의 장 주네(프랑스 부랑아출신 작가)나, 제2의 천상병이라고도 하지만. 그만의 감성은 비교할 상대가 아니다.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억”,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바자울에 기대다"를 비롯하여

소설 “고백”, “기계 앵무새”, “새를 아세요”등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고, 여기 저기 문학상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동의 시인일 뿐이다.






그와 함께, 지게꾼으로 살던 30여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현장을 돌아 다녔다.
'힐튼호텔' 아래 벼랑길에 자리 잡은 그가 살던 3층 건물은 여지 것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마침, 그 당시 문학잡지 기자가 찍은 사진 몇 장을 챙겨왔는데, 외벽 타일까지 그대로였다.


 






-김신용시인이 가져 나온, 30여 년전 찍은 양동사진-






 

지금은 사라진 ‘뼉다귀집’ 터를 비롯해, 일 나가던 길목이나 주변 골목을 돌아보며, 회한에 빠져들었다.

지게꾼 최고의 자리인 '코스모스백화점' 전속지게꾼 자리를 자기보다 더 어려운 박인수씨에게 물려주고,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나선 일, 자신을 좋아했던 창녀의 "같이 살자"는 제안을 거절했던 일 등,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창녀가 살던 집을 돌아보고, 서울역이 내려다 보이는 구름다리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김신용시인은 옛 ‘대우’그룹에서 주변 땅을 접수하기 시작하며 쫓겨났다고 했다.

폭력배까지 동원해  골방촌 사람들을 내쫒았는데, 자신은 독신이라 이주비 2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가족이 있으면 이주딱지를 주었으나, 그 딱지도 대부분 130여만원에 되팔았다고 했다.

딱지도 끝까지 버틴 사람은 훨씬 많이 받고 팔았지만, 버틴 독신자는 이주비를 30만원까지 주었단다.





양동은 '힐튼호텔'을 비롯한 거대한 빌딩들이 점령했지만, 아직도 퇴락한 골방촌의 면면을 간직한 곳이 많았다.

잘 난 사람들이 북적이는 그 빌딩 틈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이 끼어 진드기처럼 연명하는 것이다.

언제 철거될지 모르니, 집들은 낡을 대로 낡았고, 주변 환경조차 지저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입주한 쪽방 건물이다. 4층 3호실인데, 전세없이 월세23만원














아직까지 여인숙이란 간판이 그렇게 많은 곳도 처음 보았다. 

더 놀라운 것은, 몸을 파는 양동사창가의 잔재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이다.


쪽방촌 사람들의 고난과 마음의 상처를 다독여 줄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없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여행작가에서 사진가, 그리고 무용평론가에서 시인으로 끊임없이 보폭을 넓혀 가는
이만주씨가 첫 시집을 냈다. 시집제목은 “다시 맺어야 할 사회계약”이었다.
그가 펴낸 기행시는 시집 제목처럼 자유로웠다.


몇 편 읽어보았더니, 사회 구조의 문제점을 나무라고 있었다.
어렵게 말하지 않고, 돌려 말하지 않는, 직설적인 문체였다.
그의 시처럼 ‘인생 별거 아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그는 돈 안 되는 일만 골라한다는 것이다.
사진가가 그렇고 평론가가 그렇지만, 그 중 제일 돈 안 되는 것이 시인이기 때문이다.
이 무식한 세상에 그의 말처럼 시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지난 4일 오후6시, 인사동 ‘유카리’화랑에서 열린 출판기념회는 많은 지인들이 모였다.
채현국선생을 비롯하여 심우성, 서정춘, 구중관, 이은영, 이명희, 노광래, 김구, 전강호, 이인섭, 이희종,

이만냥, 이지녀, 이창준, 김낙영, 조명환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시집출판을 기념했다.

이명희 씨 등 여러 사람의 시 낭송도 있었고, 이지녀씨의 축가도 이어졌다.


그런데 출판사를 운영하는 이창준씨가 서정춘 시인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건냈다.
오늘 KBS FM방송에서 서정춘선생 시에 대한 20분짜리 특집방송을 들었다는 것이다.
서정춘시인은 느닷없는 소식에 어린애처럼 좋아했으나, 이건 말도 안 된다.
본인 한데는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저희들 끼리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한 모양이다.


가뭄에 콩 나듯 한 이런 일마저 시인에 대한 예우가 없다면
가난한 시인들은 어떻게 살란 말인가?
이만주씨의 말처럼 섞어 문드러진 이런 구조부터 사회계약을 다시 맺어야한다.
‘작가회의’나 ‘문협’같은 단체는 도대체 뭐 하는 곳인지 모르겠다.


“다시 맺어야 할 사회계약”/ 이만주시집 / 출판사:다미르 / 가격: 10,000원


사진, 글 / 조문호














































                                                                                                          이승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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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는 터줏대감들 만나러 가는 날이다.
그 분이 바로 시인 강 민선생과 민속학자 심우성선생이시다.
강민 선생께서는 시로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고, 심우성선생은 몸으로 인사동 아리랑을 추신다.

두 분 다 인사동을 너무 짝사랑해, 인사동 아리랑고개로 넘어 가시겠단다.

지난 17일 오후3시 무렵, 두 분을 만나러 인사동 ‘예당’으로 갔다.
그 곳에는 강 민 선생을 비롯하여 소설가 김승환, 유금호선생, 그리고 시인 이애정씨가 계셨다.
좀 있으니 옷상자를 챙겨든 심우성선생께서 싱글 벙글 들어오신다.
대학로에 공연이 있어 상복 한벌 지어 오셨는데, 삼일동안의 출연료 대신 옷 한 벌 지어 달랬단다.

‘유목민’으로 술 마시러 가자는 강민선생의 말씀에 심우성선생께서 손사래를 치신다.
'오늘은 여자관계가 너무 복잡하다"며 서둘러 일어나신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 복분자에다 민어회를 시켰는데,
그 술값을 유금호선생께서 다 내 주시어, 한시름 놓게 했다.

 

뒤 늦게 심우성선생께서 재 등장하시어, 복분자 한 병 추가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3일 중복 날, 김명성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형 어디 있어? 신용이 형이 인사동에 나왔어, 별 일 없으면 나와”

오후8시경 ‘유목민’에 도착했더니 김신용, 김명성, 박인식씨가 앉아 있었는데,

테이블에 빈병들이 그득한 걸 보아, 제법 마신 모양이었다.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기에 무슨 바람이 불었냐고 했더니 초창기 시집 ‘버려진 사람들’과

‘개같은 날들의 기록’ 두 권이 동시에 복간되었다는 것이다.

88년에 나온 ‘버려진 사람들’은 ‘도서출판 포엠포엠’의 포엠포엠 시인선9집으로 복간되었고,

90년에 나온 ‘개 같은 날들의 기록’은 ‘문학의 전당’의 시인동네 시인선31집으로 복간 되었다며 시집 두 권을 내 놓았다.

 

처음 나왔던 시집이 우리 집 책장에 아직 꽂혀 있으나 이미 사인을 해 두어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지갑이 비어 난감했다.

사진집 출판 경험에 비추어 저자의 심정을 헤아리기에 그냥 받기가 이젠 부담스러운 것이다.

자비 출판으로 주위에 나누어 보는 책이 아니라면 가난한 저자의 주머니를 터는 일이기 때문이다.

 

박인식씨가 내일 파리로 떠나야 한다며 먼저일어나자 김신용씨 마저 술이 취한다며 따라 일어섰다.

김명성씨와 단 둘이 마셨으나, 그날따라 왠지 술맛이 나지 않아 소주 한 병을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그의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을 펼쳐 보았다.

황량한 삶 속에서는 모든 버려진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생존방법이며 시의 명제이자 출발점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요즘 정선에다 사진전시를 벌여놓고, 영월의 동강사진제에다 여기저기 다니느라 혼자 바쁘다.

문제는 정선 집에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는데다 스마트 폰마저 없어 찍은 사진이나 전할 소식이 있어도 올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게 서울에 가야만 가능하니 소식들이 늦을 수밖에 없다. 늘 뒷북치는 이바구지만 오늘 있는 일인 냥 보아주기 바란다.

 

 

육이구 선언한 날, 속 시원한 선언이라도 없을까 기대하는 중에 술 마시러 오라는 기별이 왔다.

 

인사동 ‘무다헌’에는 몸이 불편한 이계익 전 장관을 비롯하여 서양화가 신학철, 장경호, 시인 정희성,

김명지, 강고운씨가 모여앉아 술판을 벌여놓았다.

 

신학철선생은 두 달 전 아내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 술자리를 자제해 오다 오랜만에 인사동에 나온 것이다.

물론 장경호씨의 전화에 비롯되었지만, 작업이 풀리지 않아 붓을 내던지고 왔단다.

 

시위현장의 야전사령관격인 신학철선생께서 술잔을 기울이며 오래 전 이야기를 꺼냈다.

격렬한 시위현장에서 돌멩이를 잡았으나 차마 던지지 못하겠더란다.

그 돌멩이에 누군가 맞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 연약한 양반이 아직까지 시위현장을 맴돌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장경호씨는 '무다헌'에서 팔지도 않는 막걸리를 공수해 마시며, 통풍 때문에 맥주 못 먹는 날 위해 시바스리갈을 시켜주었다. 

너무 감격스러워 박통처럼 총 맞아 죽어도 좋다싶었다.

 

모처럼 다들 즐거워하는 모습에 기분 좋아, 어린애로 돌변하는 주벽까지 슬며시 도졌다.

모든 걸 내려놓고 놀았으나 다행히 총 맞지 않고 살아남았다.

 

 

사진,글 / 조문호

 

 

 

 

 

 

 

 

 

 

 

 

 

 

 

 

 

 

 

 

 

 

프랑스의 니엡스가 처음 사진 인화에 성공한 때는 1826년. 니엡스를 만나 다게르는 이후 은판 감광제를 발명하여 빠르고 실용적인 사진 제작법을 보급했다. 당시 사진은 조물가 만들어낸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평을 들었다. 화가들은 더 이상 회회가 발붙일 곳이 없다고 괴로워했다. 이스트먼에 의해 롤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가 나오면서 빠른 속도로 사진기가 보급되기도 했다. 그 뒤 사진은 기록이 됐다. 개인의 기록은 최근 들어 놀라운 위력을 발휘한다. 에레즈 에이디든과 장바티스트 미셸이 지은 <빅데이터 인문학 진격의 서막>에는 2013년 4월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 결승점에서 벌어진 테러의 범인을 검거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연히 찍힌 고해상도의 용의자들 사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미 우리의 삶이 의도치 않게 기록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기록은 사생활 침해라는 어두운 그늘도 지니게 했다. 특히 요즘 아이들은 사진에 생활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다. 교실에서 필기 대신 칠판을 그대로 찍고, 친구들과의 일상생활도 사진으로 남겨둔다. 심지어 전혀 모르는 사람의 우스은 모습도 아무렇지도 않게 찍어둔다. 친구에게 삭제를 부탁하고 싶지만 그러는 친구가 주변에 없기 때문에 자신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진의 양면성을 보지 못한 결과다. 기록으로 남는 사진 한 장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생각하지 않는다.

봄과 겨울 사이 새봄의 출발을 알리는 봄비가 시나브로 내리고 있다. 내리는 빗물 사이사이로 그리운 얼굴들이 스며들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하고 싶다. 해피 클래식. 알함브라 궁전의 회상을 클래식 기타로 연주해 본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클래식 기타리스트 고 배영식 선생님으로부터 6년 동안 기타를 배웠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너무너무 행복하고 평화스런 시절이었다. 낮에는 구두닦이와 연탄배달, 아이스케키 장사 등으로 바쁘기만 했다. 밤에는 야간중학교를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다시 그렇게 살아라고 해도 아찔하다.

조문호 사진작가는 2015년 1월 부인 정영신(57)씨와 전국 장터 사람들을 찍은 사진전을 차렸다. 지금도 서울 인사동과 전국 장터들을 오가며 군상들을 담는다. 젊을 적부터 음악다방, 주점 등을 하며 자유인으로 살았고 대가 최민식의 작품에 이끌려 다큐사진에만 탐닉했다. 가산을 거덜 내는 대가도 치렀지만,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며 낮은 자들의 삶을 투시하는 도리를 배웠다. 항상 바닥을 생각하는 그 겸손한 시선 덕분에 80년대 풍속생활사의 가장 인상적인 기록이라 할 <청량리 588>이 나올 수 있었다. 작가는 사진 사진들을 추려 올해 2월 25일부터 3월 10일까지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전시판도 벌인다.

80년대 중반 서울 전농동 588번지. 청량리역 사창가 여성들과 동고동락했던 조문호 사진가(68)는 자신이 지켜본 30여년 전 청량리 풍경을 하나하나 렌즈에 새겨넣었다. 588의 공간 풍경을 작가가 최근 사진집 <청량리 588>(눈빛)을 출간하며 되살려냈다. 85년 동아미술제에 선보였지만, 대부분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1984-1988년 청량리 사창가를 세밀화처럼 그려낸 기록이고, 겉과 속이 달랐던 5공화국의 사회적 풍경이기도 하다. 작가의 시선은 줄곧 그곳 인간 군상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쫓는다. 강퍅한 2층 벽돌 슬래브 쪽방 건물들 속에서 과로와 슬픔에 찌든 사창가 여성들의 고단한 얼굴과 주름진 알몸, 앳된 초보 성노동자의 단아한 얼굴 등이 휙 문 앞을 스쳐가는 남자들의 실루엣과 얽힌다.

조문호 사진작가는 지난 1978년부터 부산시 중구 남포동에서 우연적인 필연, 필연적인 우연으로 만났다. 그야말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슬프고도 기쁜, 불행에서 행복한 사진여행으로 만났다. 접객실에서 여인들은 다 해진 의자에 앉아 남자들의 주문을 기다린다. 그들의 앞 벽면에 있는 밀대걸레와 연탄보일러 탱크 등은 구질구질하지만 엄숙한 소품과도 같다. 조 작가는 재개발의 광풍이 몰아친 2012년 이후, 대형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선 청량리에 30여년 전 이런 풍경이 있었다는 사실을 날 서지 않은 사람살이 장면들로 보여준다. 평론가 이광수씨는 사진집에 실은 글에서 작가는 윤락녀들이 아니라, 그들이 사는 시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을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라져가는 작은 이들의 세상을 기록하는 조문호 사진작가. 소외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를 말하려 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우리와 같은 사람을 말하려 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우리와 같은 사람을 말하려 하는 사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눌변, 그것이 조문호 사진의 완성도를 높이는 힘이다. 사진은 우리 시대의 증언이며 동시에 기록이다. 역사의 현실 앞에서 카메라로 영혼의 시를 나는 쓰고 있다. 슬픔의 힘으로 눈물의 힘으로 기록하고 증언하고 싶다. 나는 사진이다. 나는 그림이다. 나는 노래다. 조문호의 청량리,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권태원 / 시인.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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