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경 선생(79)께서 지난 3월 18일 새벽 5시17분 코로나 합병증으로 운명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장례식장 : 화순 전남대학교병원 장례식장 제1분향실

 

발인 : 3월21일(월) 정오

 

전염병으로 방문하는 문상은 가급적 피해 주시길 원합니다.

배우자 공선옥 연락처 : 010-3389-7563

[국민은행 535501-04-079978 공선옥]

 

성완경선생은 민중미술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우리시대의 대표적 평론가다.

서울대학교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수료하고,

파리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파리제8대학 조형예술학부를 수학했다.

 

1979년 최민, 윤범모, 오윤 등과 함께 미술그룹 '현실과 발언'을 창립해 민중미술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1982년부터 인하대학교 미술교육과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광주비엔날레국제전 커미셔너(1995년),

부천만화정보센터 이사장(1999~2001년).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2001년)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레제와 기계시대의 미학' '민중미술을 향하여-현실과 발언 10년사'

'민중미술 모더니즘 시각문화-새로운 현대를 위한 성찰' '성완경의 세계만화탐험' 등을 남겼다.

 

미술과 관련있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사진가들도 대부분 기억할 것이다.

1989년 지젤 프로인트의 ‘사진과 사회’라는 책을 번역하여 일찍부터 사진가들에게도 친숙한 분이다.

 

모든 직책에서 물러 나 담양에 정착한 후에도 지인들의 전람회나 모임만 있으면 빠짐 없이 나타났다.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은 선생의 느닷없는 비보에 몸 둘바를 모르겠다,

 

사진으로나마 지난날을 추억하며 선생의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추석 무렵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하기로 했던 ‘말하고 싶다’전이

적페들의 농간과 코로나에 밀려 해를 넘긴 지난 13일에서야 ‘나무아트’에서 선보이게 되었다.

 

이윤엽

 

당시 응모했던 ‘예술의 전당’ 전시 기획안이 확정되자 아트만두가 전시 홍보를 위해

자신의 연재 시사 캐리커처를 활용한 웹 포스터를 만들어 페이스북에 내 걸었는데,

조국 전 법무장관이 이 웹 포스터를 자신의 페북에 연결하여 붙인 것이다.

조국의 페북을 주시하던 좆선일보는 웹 포스터에 실린 만평이미지 해설기사를 내 보낸 것이다.

 

이태호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이 날 국회 문예위의 '국민의 짐' 김승수의원이

‘예술의전당’에 전시의 부당함을 전하며 소명하라는 질의를 보낸 것이다.

 

하일지

 

전시계약 할 때 '예술의 전당'은 감염병 방역조치로 무산될 수도 있다는 전제조건을 붙여놓았기에,

전시계약자인 박재동씨에게 협의를 요청해 왔다.

 

아트만두

 

적법한 절차에 따라 승인된 전시를 ‘정치적 중립’을 근거로 전시를 못하게 압박한 꼴이 된 것이다.

이어 ‘경향신문’과 ‘여성신문’에서 박재동씨의 가짜 미투를 빌미로

‘2차가해’로 몰아붙이는 기사를 내보낸 것이다.

 

고경일

 

그런 와중에 '예술의전당'에서 코로나를 빌미로 3일만 전시할 수 있다는 변경 지침을 보낸 것이다.

전시 설치와 철수하는 날을 빼면 하루만 하라는 이야기 인데 하지 말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지침이 국개위원의 압박에 의한 조치인지, 정부 방역지침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인지 헷갈렸다.

 

이하

 

적폐들의 협잡에 굴할 수 없어 하루 전시라도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인철, 박불똥씨가 포기한데다, 하루마저 못 쓰게 될 경우가 생길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라 온라인 전시로 대체한 것이다.

 

레오다브

 

그런데, 다시 뒤 짚는 방역지침이 9월25일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추석 전후 공공미술관의 전시가 가능하다는 지침에 따라

‘처음 전시 승인한 열흘을 모두 쓸 수 있다는 통보를 예술의전당’에서 해온 것이다.

그러나 전시를 불과 4일 앞두고 나온 통보라 실행에 옮기기는 역부족이었다.

 

김우성

 

국개위원의 압력에다 기레기 언론까지 가세한 전시방해로 난항을 격은 것이다.

그 이후 ‘말하고 싶다’ 카페를 개설해 온라인 동영상과 아카이브 전을 열고 있다.

 

박재동

 

그런데 지난 년 말 박건씨로 부터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오프라인 전시도 동시에 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사회적 거리가 멀어질수록 예술로써 그 거리를 좁힐 의무감도 있다는 말이었다.

 

홍성담

 

전시를 열면 새해의 좋은 메시지가 될 수 있는데다 신년 인사를 겸한 만남도 될 수 있었다.

비록 전시장은 좁지만 오밀조밀 재미있게 꾸밀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존 작가들이 추천한 이태호, 김우성, 박순철, 이현정, 정보경씨가 합류하게 되었고,

출품수를 줄여 소품 위주로 구성하게 된 것이다.

 

박순철

 

‘나무아트’ 오프라인 전시를 통해 정치 풍자와 더불어

역사에 대한 이야기. 새로운 발견. 현실에 대한 아픔과 분노 등

작가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당당하게 들려 주기 위해 일을 벌인 것이다.

 

정보경

 

참여 작가는 야전 작가 위주로 회화, 사진, 만화, 판화, 벽화 등 분야도 다채롭다.

고경일, 김우성, 레오다브, 박건, 박순철, 박재동, 성완경, 아트만두, 이윤엽, 이하, 이태호,

이현정, 조문호, 주 홍, 정보경, 하일지, 홍성담씨 등 열 일곱 명이 참가했다.

 

성완경

 

특히, 이번 전시에 열정을 보인 작가로는 비평가 성완경씨의 기습사진,

가짜 미투로 곤욕을 치룬 박재동씨의 손바닥아트,

공산품아트로 새로운 면모를 보여 준 박 건씨.

 

주홍

 

교보빌딩 외벽 전면에 독립운동가 초상을 펼친 레오다브,

독보적이고 강력한 시사캐리커처를 보여주고 있는 아트만두 등

저 마다 삶의 현장에서 거침없이 표출 해 온 작가들의 게릴라 전시다.

 

박건

 

그리고 이번 ‘말하고 싶다’전은 소통만이 아이라 유통에 초점을 맞춘 전시로

반출 없는 완판 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좋은 작품을 거품 뺀 싼 가격으로 소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조문호

 

지난 13일 오후4시 무렵 정영신씨와 전시장에 들렸는데,

김진하관장을 비롯하여 전시에 앞장 선 박건씨, 출품작가 이현정씨

그리고 장경호, 박윤호씨 등 여러 명이 전시를 관람하고 있었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자주 만나는 분 외는 누군지 알아 볼 수 없었다.

 

이현정

 

 거리두기로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다섯 시 무렵이면 더 많은 작가들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라져 주는 것이 도움 될 것 같아 간다는 말도 없이 빠져 나왔는데,

거리에서 사진가 양재문씨와 곽명우씨를 만났다.

 

이 전시는 26일까지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열린다.

많은 분들의 참관과 성원을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이윤엽

 

이태호

 

하일지

 

아트만두

 

고경일

 

이하

 

레오다브

 

김우성

 

박재동

 

박순철

 

정보경

 

성완경

 

주홍

 

박건

 

조문호

 

'나무아트'에서 발행한 2021년 달력 (가격5,000원)을

전시장에서 판매합니다.

 

'말하고 싶다' 온라인 전시 동영상 버전입니다.

 

'말하고 싶다' 온라인 전시 동영상 버전입니다.

아래 유튜브 주소를 클릭하면 됩니다

 

youtu.be/d88MiuZ3hoY

 

 

말하고싶다 2020 온라인 전시회를 오픈합니다.

 

-전시 서문-

 

모든 그림은 말을 한다. 나 예쁘죠? 나 아름답죠? 나 새롭죠? 나 놀랍죠? 같이 생각해 보지 않을 래요?......

그러나 다른 말도 있다. 세상에 대한 이야기, 역사에 대한 이야기. 새로운 발견. 현실에 대한 아픔과 분노....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한 편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세상도 아니다.

 

예술의 전당 개관전 때 일이다 당시 안기부가 이러 이러한 작품을 빼라고 검열을 한데 대항해

당시 윤범모 관장이 사표를 던진 적이 있다.

지금은 안기부가 하던 검열을 일부 언론이 하고 있고 야당이 거들고 있다.

 

사회의 적폐에 대한 지적과 비판을 정치적이라고 몰아가는 자체가 지극히 정치적인 태도이다.

우리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불합리한 검열로 포기할 수 없다.

비록 하루지만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박재동-

 

참여작가

고경일, 박건, 박영균, 박재동, 성완경, 아트만두, 이윤엽,

이인철, 이하, 조문호, 주홍, 하일지, 홍성담, 레오다브

 

<말하고싶다> 온라인전을 하기까지

 

예술의전당 대관지원사업에 응모하면 어떨까?
성완경, 박재동, 박불똥이 이를 수락하고 함께할 작가를 찾았다. 대체로 들판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모였다. 사진, 만화, 판화, 벽화, 회화, 입체.. 분야도 다채롭다. 예술의전당과 같은 온실과 잘 어울리지 않지만 각자 명분을 찾아 감과 촉각을 세웠다. 말은 안해도 추석선물 같은 만남으로, 빈 집 '스쾃'하자는 심보로, 성완경에 대한 오마주..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여건이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열흘 전시기간에 설치, 철수일 빼고, 개천절, 휴관일 빼면 실제 전시할 수 있는 날은 고작 엿 새? 게다가 공간만 무료일 뿐 그 밖에 비용은 모두 작가 부담 아닌가.
특히, 이번 전시에 애정과 열정을 보인 성완경 비평가가 자신의 노트북 속 사진 수십만장을 정비하여 기습사진을 선 보인다. 가짜 미투로 전 인생을 부정 당하는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나 손바닥아트를 부활시키는 박재동도 말하고 싶다. 교보빌딩 외벽 전면에 독립운동가 초상을 보여준 레오다브가 젊은 작가로 합류하고, 독보적이고 강력한 시사캐리커처를 보여주고 있는 아트만두, 저 마다 삶의 현장에서 거침없이 표출 해 온 작가들의 게릴라 전시인 셈이다.

장마 끝에 불은 저수지에서 '번개' 치고, 각자 무지개를 펼치고 싶었을거다. 8월25일 단톡방이 생기고 논의가 활발히 펼쳐졌다. 8월29일 인사동 '낭만'에서 첫모임을 갖고 전시 제목을 논의했다. 참석못한 작가는 카톡으로 참여했다. 여러 제안이 쏟아졌다.

박재동의 <말하고싶다>가 다수의견 전시명으로 뽑혔다.

그런데 난관은 그 전부터 부딪히고 우여곡절과 청룡열차를 탓다. 첫 난관은 신청서류 접수였다. 십 여명의 작가 정보와 포토폴리오를 모아 기획서를 작성하고 예술의전당에 접수하는 문제였다. 다행이 오미진 기획이 합류하면서 가까스로 마감전에 넣고, 다행이 8월25일 전시 지원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전제조건이 따라 붙었다. 감염병방역조치로 미술관운영중단이 계속되는 상황이었고 무산될 수도 있었다.

변수도 터졌다. 전시가 확정되자 아트만두는 전시 홍보를 위해 자신의 연재 시사캐리커처를 활용한 웹포스터를 만들어 페이스북에 내 걸었다. 이어 조국 전 법무장관이 이 웹포스터를 자신의 페북에 연결하여 붙였다. 조국의 페북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조선일보는 웹포스터에 실린 만평이미지 해설기사를 내 보냈다. 짠 일처럼 이 날 국회 문예위에서 김승수 국민의힘 소속의원은 예술의전당을 대상으로 전시의 부당함을 소명하라는 질의를 한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승인된 전시를 ‘정치적 중립’을 근거로 전시를 못하게 압박하는 꼴이 되었다. 이어 경향신문(박재동 작가에 대한 가짜미투를 강진구 소속기자의 심층기사를 언론사와 다른 관점에서 보도 했다는 이유로 운영진에 의해 징계조치를 당한 바 있다)과 여성신문(박원순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위한 표현물-시사캐리커처에 대해서)도 <말하고싶다>전시를 ‘2차가해’로 몰아붙이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런 이유로 예술의전당측은 전시계약자인 박재동 작가에게 협의를 요청해 왔다.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는 와중에 예술의전당에서 코로나로 인한 방역지침이 훅 들어왔다. 10월6,7,8일3일만 전시할 수 있다는 지침이 내려왔다. 이를 할 것인지 말 것인 지를 알려줄 것을 요청해 온 것이다. 이것은 하지말라는 말 아닌가. 우리는 이 지침이 국회 문예위의 압박으로 인한 예술의전당 측의 일방적 조치인 지, 정부 방역지침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인지 헷갈렸다.

전례가 떠 올랐다 ‘초창기 예술의 전당 전시에 관해 당시 안기부가 검열을 한데 대항해 관장이 사표를 던진 적이 있다. 지금은 안기부가 하던 검열을 일부 언론과 야당이 거들고 있다. 사회의 적폐에 대한 지적과 비판을 정치적이라고 몰아가는 자체가 지극히 정치적인 태도다. 우리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불합리한 검열로 포기할 수 없다’ 비록 하루지만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박재동 작가가 서문 초안을 통해 우리의 입장을 밝혔다.

<말하고싶다>10.7하루전을 하기로 했다. 이 결정이 무모하고 섣불렀는 지 이인철, 박불똥 작가가 하차했다. 감염병 예방조치로 전시 기간이 하루로 납작해졌다. 이 마저 같은 조치로 못쓰게 될지 모르고, 그 결정도 하루 앞을 알 수 없는 갑갑한 상황이 이어졌다. 여러 논의 끝에 성완경 작가의 입장이 나왔다.

“<말하고싶다>전의 타이틀과 그 사이 있었던 사태진행의 추이와 이에 대한 항의성, 반박성 테제에 너무 고착되어 우리가 너무 좁은 골목 속으로 우리 자신들을 몰고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많이 우려스럽습니다. 하루라는 악조건하입니다만 그것을 반대로 풀어내는 역발상 또한 긴급해 보입니다. 쉽게 풀어 얘기하면 기존의 자신의 통상적 본격작품을 풀어 내는 일이 긴요하게 요구된다고 봅니다. 물론 하루 전시라는 시공간적 제약과 비용(작품 제작비와 운송, 설치, 철거 등 비용)도 문제입니다. 예술엔 나이가 없다지만 여기 거론된 작가들이 존중받는 이름들이라면 그건 청장년과 노년, 각자의 인생과 예술, 시대의 경험을 자신의 예술 속에 녹여왔기 때문일 겁니다. 한마디로 그것이 예술이고 그래서 주목받고 재미도 있는거죠. 이것부터가 좀 더 진지하게 고려되고 또 우선되어야할 문제라고 봅니다. 하루 전시라도 그 각오가 없으면 전시를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저 개인의 답은 이미 전시 참여하는 쪽으로 일찍부터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같습니다“

또한 기획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의 현실적인 애로도 있었다.

”현재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로 국가기관에서 운영하는 공공 전시장은 모두 휴관 중입니다. 전시장이 재개관하려면 1단계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1일 확진자 수가 50명 이하로 1주일 이상 지속되어야 하는 전제조건에서 입니다. 주변에 국공립미술관에 근무하는 친구나 전 직장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추석 이후에도 전시장이 재개관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명절이 있기 때문에 예술의전당에 9/29(화)까지 모든 자료를 드려야합니다. 예술의전당 홈페이지 내용업로드, ARS 전화안내문 작성, 주차권 신청, 현수막 제작, 리플릿 디자인 및 제작, 웹포스터 사이즈별 디자인, 그 외 각종 서류 제출 등 현수막(1개 필수)의 경우 명절 전 9/29(화)까지 인쇄해서 걸어야 하고, 명절이 있기 때문에 리플릿 디자인 후 차주 월요일에 인쇄가 들어가야 전시 전에 나올 수 있습니다. 전시를 준비하며 예산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명절 전에 이러한 비용을 다 지불하고 전시를 못하게 될까 우려가 되어 여기에 적어 봅니다”

그러나 이 마저 뒤엎는 방역지침이 9월25일 언론보도로 알려졌다. 예측과는 달리 추석 전후 공공미술관의 전시가 가능하다는 지침이었다. 예술의전당도 3일 사용일정을 바꿔 당초 전시 승인 열흘을 모두 쓸 수 있다는 통보를 해 왔다. 전시 사용일인 9월29일로부터 4일 앞두고 나온 방역지침이었다. 언론 폭격, 국회문예위원의 압력, 예술의전당과 정부방역지침의 차이..들이 뒤섞여 누구를 탓하기 어려운 황당한 상황이 되고 만것이다. 이 전시는 안하거나 못하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대안으로 온라인 전으로 재빨리 갈아 타기로 했다.

처음에 사정상 함께 하지 못한 노순택, 이윤엽 작가와 도중 하차한 작가도 온라인전에 함께 하게 되었다. 접근성은 다소 떨어질 지 모르지만 격리 시대의 소통, 작가주도로 지속가능한 업데이트,
연대, 계승, 다목적 아카이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성비 좋은 발견이 되길 바란다.



지난 5일 재불화가 강명희씨 전시가 열리는 '인디프레스'에 프랑스 전 총리였던 도미니크 드 빌팽씨와 그의 일행들이 방문했다,

특별 손님을 위해 기존 전시외에도 보안여관 신관과 3갤러리 등 세 곳으로 전시를 확대했는데,

대작을 보여주기 위해 갑작스럽게 마련된 별도의 전시는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준비했다고 한다.




정영신씨와 함께 인사동에서 열리는 류연복씨 전시 뒤풀이를 마다하고 '인디프레스'로 달려갔다.

전시장에는 김정대관장을 비롯하여 최석태, 김정헌, 신학철, 민정기씨 내외 등 반가운 분들이 여럿 와 있었다.

뒤 이어 성완경씨와 담양의 박문종씨가 나타났고, 윤범모, 김정업, 오경환, 장경호, 박불똥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강명희씨는 1972년부터 프랑스에서 활동한 작가로 프랑스 '퐁피두센터'와 '코르틀리에 시립미술관', '갤러리 드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대전 액스포' 등지에서 자연을 주제로 한, 시적 작품 세계를 펼쳐 온 열혈작가다.


 

그는 80년대 서울미술관을 운영했던 화가 임세택씨 부인으로, 영화배우 신성일씨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지금은 파리와 제주에 화실을 두고 바람처럼 떠다니는 여류작가다.



전시된 강명희씨 작품은 세계 여행 중에 접한 사막이나 오지에서 만난 자연의 형상을 추상적으로 재현했다.

이번에 방문한 도미니크 드 빌팽씨와는 자연과 인간현상에 대한 단상을 담은 시화전을 중국과 한국에서 같이 열기도 했




그의 작품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눈 밭에서 사물들이 스물 스물 기어 나오는 것 같다.

아니, 안개 속에서 시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떤 작품에서는 슬픔이 왈칵 밀려왔다.

화폭 위에 번진 색들의 날숨에서 강렬한 생명력을 느끼기도 했다.


 

북녘 정원이란 뜻의 대형 작품 북원앞에 서 있으니, 그 황홀함에 가슴이 벅찼다.

대자연을 노래한 시어들이 물안개처럼 아롱거리는 장관은, 감동 그 자체였다.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겨 신학철, 민정기씨와 술 한 잔하며 환담을 나누고 있으니,

작가 강명희, 임세택 부부와 도미니크 드 발팽씨 일행들이 밀어 닥쳤다.



도미니크 드 빌팽씨는 주미 프랑스대사, 외무부장관, 대통령비서실장, 내무부장관을 거쳐

총리에 오른 인물로 문학평론과 정치수상록 등 많은 책을 펴냈다.

세계 평화와 인류애를 주제로 시를 쓰는 시인이기도 한데,

강명희 작가와는 절친한 친구이자 그림과 시로 소통하는 오랜 동료이기도 하다.


 

그날 도미니크 드 빌팽씨의 축하인사에 이어 강명희씨와 서울대 미대 동문이었던 화가 김정헌씨,

'국립현대미술관' 윤범모관장, 미술평론가 성완경씨가 차례대로 나와 작가와 작품 이야기를 나누며 전시를 축하했다.


 

노벨상 단골후보 시인 아도니스가 강명희씨 작품에 바친 시다. 

"이 신기한 색채 속을 여행하면서/ 두 눈은 파리의 가을에 취하고/ 두 손은 몽골의 얼굴을 만지는 듯하네/

본래 대자연을 읽어온 나지만/ 화가의 그림은 만물을 꿈속으로부터 불러내네."



강명희 작품전은 216일까지 통의동 인디프레스에서 열린다.

 

사진, / 조문호






























































































 



[김포에서 2016]                                                                   [대곡들에서 2016]


세상에서 밀려 난 초라한 사람들만 그려 온 화가 박은태의 ‘늙은 기계 두 개의 시선’전이 지하철 광화문역의 ‘광화랑’에서 오는 17일까지 열린다.




'[미적분' 작품 앞에 앉은 작가 박은태씨]


소외된 자를 조명한 박은태의 작품세계 전모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한 달 전 작가로부터 사람들이란 제목의 화집을 한 권 선물 받았는데, 그 작품집에는 대학시절 습작에서부터 어머니의 발자취를 그린 작품과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에 이르기 까지 전 작품이 실려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구체적인 이력도 알게 되었는데, 그가 작업해 온 '사람'이란 바로 필자가 40여년 메 달려 온 대상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번에 시도한 기계 또한 서로 의도한 바는 달랐지만, 사람을 찍기전인 초창기에 잠간 찍은 적도 있었다. 기계화 되어가는 현대인의 상징으로 시작했으나 결국은 객관적인 사람을 택하여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예사롭지 않은 인연이었다.


[대곡들에서 2016]

[시민청에서 2016]

 

몇 일전 작가 박은태의 늙은 기계 두 개의 시선전시를 알리는 글이 SNS에 올라왔다. 전시 첫날 가려고 메모해 두었으나, 갑자기 장흥에 갈 일이 생겨버렸다, 일을 마무리하려면 하루 정도 더 머물러야 했으나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상경을 서둔 것도 그렇지만, 서울로 오다 마지막 들린 장터도 작가가 태어 난 고향인 강진의 성전장인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닌 것 같았다.


[원흥리에서 2016]

[과천 대공원에서 2015]

 

작가는 고향인 성전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성남 어느 공장의 프레스 판금 노동자로 일하며 7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그림에 대한 관심으로 틈틈이 그림공부에 매달리다 결국은 홍익대학교 미대에 입학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미대를 들어 간 시기도 민주화의 열기가 뜨거웠던 87년도였다고 한다.


[홍성시장에서 2017]

   

작품에 등장하는 노숙자는 작가 박은태가 세상을 바라보는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새마을운동을 소재로 한 가라뫼 사람들도 인상 깊었다. 새마을 운동의 깃발에 가려진 어두운 면을 읽어낸 작품으로, 농촌근대화란 이름아래 진행된 농촌의 파괴와 농어민의 도시유출로 인한 도시빈민화를 꼬집는 작가의 비판적 시선이 날카로웠다. 특히 수몰민의 기념사진을 그린 수물-깃발에 등장하는 농민들의 표정은 압권이었다. 하나같이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우는 것 같은 이질적 표정 묘사가 긴 여운을 남긴다.


   [아빠 2016] 

 


우리 근현대사의 주역이면서도 소외되어 온 인간상에 초점을 맞추어 온 그의 작업은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 것이다. 노동자적 의식이 깔린 무게로 도시 변두리 빈민들의 삶을 바라 본 그의 작업은 사회적 변혁을 위한 운동으로서의 의미도 컸다. 고향을 떠나 집안의 생계를 잇기 위한 노동자로 생활하며 체득한 사회의 문제의식이 비판과 저항으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상사천 다리 위에서 2016]


전시된 작품들은 근대화로 치닫는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어두운 회억의 표정과 모든 걸 체념한 듯 웅크린 노숙자의 모습이 주를 이루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밀려난 초라한 사람들의 삶의 흔적에서 애잔한 비애가 느껴졌다. 다소 생뚱맞은 전개이기는 하지만, 쇠잔해진 노인이나 노숙자 옆에 고물이 되어버린 기계 사진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늙은 기계와 대비된 소외된 사람들은 더욱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기계처럼 살아 온 인간의 퇴화된 모습과 동격으로 본다는 것만은 결코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과 사물 사이의 의미나 시간의 유대를 찾아 연결하는 은유가 깔린 것으로, 그만의 또 한 가지 표현 방법이다.


 

[광화문에서 2017]

 

그리고 그림 배경이 사라지거나 억제된 채, 주인공인 사람만 떠 있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삶의 터전이나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은, 즉 배경을 빼앗긴 사람이란 말이다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사진과 회화가 한 화면에서 어우러지는 아빠라는 작품도 있었고노인의 모습과 함께 도형화된 그림자를 그려넣은  아빠의 그림자’도 눈길을 끌었다. 그 그림자가 기계와 사람, 사진과 회화의 벽을 허무는 단초가 되고 있었다.


  [홍성시장에서 2017]

   


고물기계처럼 방치된 노인을 그린 그림과 기계를 찍은 사진은 상호 충돌하면서도 결합하였다. 그는 화가이지만 늘 카메라를 작업도구로 활용한다. 암담한 현실을 리얼하게 드러내야 하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회화가 사진의 리얼리티를 따를 수 없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순간적인 출현이나 우연한 배치를 결코 놓치지 않는 사진가로서의 안목도 만만치않다. 사람의 모습도 유추하여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난 대상을 찍어 그림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늙은 기계 두 개의 시선전은 회화와 사진을 대비시킨 다소 낯선 접근이기는 하지만, 헐벗은 존재와 방치된 사물을 만나게 함으로서 생겨나는 또 다른 울림도 있다.



 

작품집 서문에 쓴 미술평론가 성완경씨의 아래 글이 작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박은태가 오늘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이 시대를 위기와 불안의 시대로 파악하는 시각이 일관되게 관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부조리한 풍경, 불안한 풍경, 재앙과 위기, 희망 없음의 풍경이다. 생각하기 나름으로는 지옥도가 따로 없을 그런 풍경이다.

박은태의 작업은, 단지 설자리를 잃은 사람들, 용도 폐기된 사람들, 초라한 사람들을 그렸다는 소재적 차원보다도 훨씬 더 깊은 의미에서 한국사회의 먼지가루 같은 불안과 위기의 징후들을 겉보기보다 훨씬 더 깊이 드러내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사진, / 조문호













 

 


땅에 연애걸다

박문종展 / PARKMUNJONG / 朴文鐘 / painting
2015_0513 ▶ 2015_0527

 

 

박문종_인물_종이, 골판지에 아크릴채색, 흙_105×85cm_2014

 

퍼포먼스넋-건지기2 / 2015_0513_수요일_07:00pm_갤러리 그림손  

참깨·들깨 / 2015_0522_금요일_07:00pm_목포문화예술회관

 

 

 

2015_0513 ▶ 2015_0519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 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

www.grimson.co.kr

 

 

 

2015_0522 ▶ 2015_0527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목포문화예술회관

전라남도 목포시 남농로 102(용해동 924-1번지)

특별전시실,1전시실

Tel. +82.61.270.8484

art.mokpo.go.kr

 

 

화가농부 박문종의 일과 놀이 ● 박문종은 왜 얼굴에 무수한 점찍기 혹은 점 찌르기를 반복하는 것일까. 당신과 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그건 수많은 점이 수많은 방식으로 찍힐 수 있는 것처럼 고정되지 않은 것이고 막연한 것이다. 박문종이 점을 찍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을 그려내려는 것도 아니고 특정인의 특정한 표정을 표현하려는 것도 아니다. 박문종의 얼굴들은 작품을 보는 관객이 표정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어느 순간 표정이 만들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곧 작품이 읽혀지는 순간이고 바로 그 때 작업을 멈추는 것이다. 관객에게도 그렇고 작가에게도 그렇다. 그 때까지는 불특정하고 우연적인 점들의 집적인데 어느 순간 크고 작고 불균등한 형태의 점들 혹은 얼룩과 틈들의 집적과 중첩 사이에서 얼굴이 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작가가 읽어내고 관객도 읽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작업의 묘미이다.

 

박문종_땅_종이에 흙_146×146cm_2014
 
 

"찌르기를 하다보면 수많은 망점이 생기게 되는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하던 수화선생의 점 같기도 하고 미처 피어보지도 못하고 수장되고만 원혼 같기도 하고 이러한 물음은 살면서 누군가와 교감하는 수없는 증표와도 같은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점찍기가 두려우면서도 흥미로운 것은 많은 점들 속에서 우리 눈은 그 와중에 눈, 코. 입 특정 부위 몇 군데를 정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얼굴 특징이 잡히기도 하는데 아는 얼굴일수도 모르는 얼굴일수도 있다. 보는 이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또한 찌르기 행위 속에는 주술적인 면도 있어(민간신앙에서 두통환자를 위해 사람형상을 땅에 그리고 머리에 낫을 꼽아 두는 행위) 자연스레 수반되는 감정이입이 발생한다. 텔레비전 사극에서와 같이 저주의 수단으로 초상이나 제웅을 만들어 놓고 바늘 찌르기를 한다할지 섬뜩한 장면이 연출되는데 한밤중의 점찍기를 (날카로운 꼬챙이를 이용, 임팩트 있는 흔적이 필요하다) 할 때는 무섬증이 들기도 한다." (박문종) ● 박문종 자신의 말이다. 무섬증이나 섬뜩함 혹은 이미지의 주술성의 문제는 박문종의「얼굴」연작의 특징과 그 의미를 얘기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측면이라고 본다. 또한 그것은 그의 이「얼굴」연작이 바로 이런 측면이 맞닿아 있는 미술의 계(界) 이를테면 아르 브뤼(Art Brut/ 원생미술)나, '대지의 마술사'계열의 비서구권 원생예술, (로잘린드 크라우스와 이브-알랭 부와의 『비정형:사용자 안내서』에 표명된) '비정형 미학'의 세계 그리고 세월호 사건과 연관해서 팽목항이나 해남에서 이미 많이 하고 있는 '혼 건지기 굿'과의 연결 등 여러 흥미로운 방향의 조망과 탐색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기 나름으로는 바로 이 경계의 탐색이야말로 그의 예술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박문종_흙장난_종이판에 아크릴채색, 흙_215×147cm_2014
 
 

전반적으로 박문종 작품은 구체성이 없고 비정형이고 비형상이고 모호하다. 형태 이전의 미학에 더 가깝다. 반죽 덩어리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비정형의 반죽. 따스하지만 않다. 서늘함이 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기억 속에서 웃음소리까지가 선명한 옛 마을 사람들을 호명해낸 것 같은 느낌. 수북사람만이 아니라 구례랄지, 해남이랄지, 아니 꼭 전라도만이 아닌 함경도 무산이랄지, 경상도 청도 사람, 조선팔도 사람 중에 흙에서 살다 흙에 묻힌 토종 조선 사람들이 살아서 돌아온 느낌이다. 노동 육체 생산 죽음 곧 삶과 죽음이 다 있다. 인생이 있다. ● 박문종의 작업은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 아니다. 그의 그림은 소비로서의 그림이 아니다. 소비로서의 행위도 아니다. 농사가 생산이라고 하듯이 나락 알곡 같은 것이고, 생산 행위로서의 힘을 불어넣어주는 미술이다. 자연은 사람을 소비하지 않는다. 사람을 북돋아 준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고 또 그 힘이다.

 

박문종_땅-대지_종이판에 아크릴채색, 흙_210×290cm_2015

 

 

 

박문종의 세계에게는 일과 놀이가 쌍두마차처럼 그의 몸속에서 함께 간다. 마치 풍물이 농사와 함께 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제작과정 자체가 일이자 놀이이고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그 제작과정에 참여하고 싶은 충동, 생산하고자 하는 충동을 불러일으키고 그리고 그 결과물은 감상자의 감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그의 작업의 이런 특성은 그의 성정과 아주 자연스럽게 합치된다. 그것이 박문종의 작업이고 삶의 태도이고 또한 그의 성정이다. ● 박문종을 2000년대 버전의 민중화가라 할 수 있을까. 몸을 낮추면서 자연과 민중과 장터 속으로 스며드는 새로운 버전의 민중화가 말이다. 자연과 민초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것. 이물감 없이. 가없이 부드럽게. 더없이 지극하게. 땅에 연애 걸듯이. 박문종의 작품들은 작가가 땅에서 일하듯이, 놀이하듯이 한 오롯한 사랑의 결과물들이다. (한국현대미술선027 박문종에서 발췌) ■ 성완경

 

 

Vol.20150512h | 박문종展 / PARKMUNJONG / 朴文鐘 / painting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③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세번째로 미술평론가 윤범모 교수가 1970년대 후반 함께 일했던 미술전문지 <미술과 생활> 시절을 회고한다. 이어 고영직, 김정헌,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이애주, 이태호, 이종률, 임옥상,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매일같이 돼지껍데기집 출근도장
용태형·주재환 등 의기투합
술 마시면서 미술과 사회 논하며
민중미술 요람인 ‘미술과 생활’ 창간
백기완 선생도 마포 들러 ‘특강’
술자리서 만난 초짜 예술 이론가들
1979년 ‘현실과 발언’ 창립하며
인연 이어가 진보 예술운동 싹 터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질풍노도의 시절, 바로 1977년 무렵이었다. 세상은 수상했고, 즉 군홧발만 빛나던 암담한 시절이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우리는 무제한 암울했고, 무제한 마셨다. 아니, 무제한 마실 수밖에 없었다. 주름진 얼굴로 지금 과거를 추억해보니, 내게도 기가 막힌 기록 하나가 있음을 확인한다. 365일의 음주, 그러니까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신 해, 그런 특기사항이 개인사적 연보에 남아 있다. 77년은 ‘음주운동’의 절정 시기였다. 우리들의 ‘운동’은 그렇게 술판에서 시작되었다. 술자리의 단골, 많고도 많은 인사들이 있었지만, 주요 멤버의 하나로 ‘김용태’라는 이름을 들 수 있다. 우리가 <미술과 생활>이라는 월간 미술잡지를 만들던 그때였다. 주된 무대는 마포 가든호텔 언저리였고, 때때로 종로통으로, 그리고 무시로 바뀌었다.


나는 ‘용태 형’을 어떻게 만났던가. 20대의 중반을 어렵게 통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최더벅’이라는 괴물이 있었다. 일간지 기자 출신이라는데, 후배 하숙집에서 얹혀살면서 세월만 한탄하고 있던 괴짜 형이었다. 효창동, 숙대 앞 하숙촌에서 나는 문제의 더벅머리를 만났다. 그는 나의 ‘끼’를 알아보고 악수를 청했다. 낭인 시절의 어느 날 인사동을 걷다가 또 하나의 괴물을 만났다. 꼭 알고 지내야 할 사람이라면서 최더벅이 소개한 사람은 또 하나의 유유상종, 즉 김용태라고 했다. 시골스런 인상이었는데, 의외로 그는 월간 잡지를 발행한다고 했다. 이름하여 <프로그램>. 뭐, 프로그램? 매월 각종 전시와 공연 등을 소개하는 문화예술계의 안내서라 했다. 비록 작은 판형에 얇은 페이지, 게다가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는 편집, 하지만 잡지를 보고 나는 감동했다.


<미술과 생활>

월간 <미술과 생활>, 우리 미술출판 역사에 특이한 잡지가 출현했다. 국어 참고서로 돈을 번 세운문화사라는 출판사가 김용태의 그 ‘프로그램’ 판권을 인수하여 만든 미술 월간지였다. 당시만 해도 정기간행물은 허가제여서 보통 사람들은 잡지 발행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새 잡지를 창간할 때도 기왕의 판권을 인수해 제호만 바꿔 발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용태 형은 월간지 발행권을 양도하고, 아예 그 잡지의 기자로 취직했다. 자금난이 ‘사장님’을 평사원으로 하락시킨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지고 있었다. 아니, 달라질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77년 4월, ‘미술과 생활’ 창간호가 나왔다. 특집은 ‘미술과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온실 속의 살롱 미술로 세뇌되었던 미술인들에게 ‘사회’ 특집은 신선한 충격, 바로 그 자체였다. 창간호가 나오던 그 무렵 나는 ‘특채’로 기자가 됐다. 대학신문 학생기자 출신에, 그러니까 편집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 미술이론을 전공했다는 점이 돋보였던가 보다. 물론 용태 형의 소개가 힘을 받았다. 아, 이런, 뭣도 모르면서 술도가니에 온몸을 빠뜨리러 가다니!


마포 시절, 의기투합으로 뭉쳤던 잡지 편집실, 그곳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정말 가족 이상의 동지의식으로 넘쳤던 편집실 분위기였다.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보자는 의욕도 대단했다.


우선 임영방 주간의 ‘존재’를 회고하게 한다. 프랑스 박사 출신이어서 ‘임박’(林博)으로 통했다. 저녁나절 그는 대학 연구실에서 마포로 퇴근해 오는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 물론 그때 이미 이름난 마포 돼지껍데기구이 전문, 최대포집은 당연한 순례 코스였다. 어쩌다 발동이 걸리면, 우리들은 ‘임박’의 동네인 홍은동 방석집으로 직행하기도 했다. 아, 그 시절이 그립구나. 편집장 황명걸, 그는 해직기자 출신이면서 무엇보다 판매금지로 묶인 창비시선 <한국의 아이들>의 시인이었다. 암흑기 ‘판금 도서’의 저자는 대학가에서 무조건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인품이 돋보였던 그를 찾아 어스름 날이 저물면 마포로 출근하는 ‘투사’들이 많았다.


마포 돼지갈비집에서 수시로 ‘특강’을 베푼 인사로 백기완 선생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87년 양김 분열 시대에 용태 형이 백기완 대통령 후보의 비서실장을 맡은 것은, 마포 시절부터 싹튼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인들 중에서는, 신경림, 민영, 염무웅, 정희성, 강민 등 기라성을 비롯해 마포경찰서 건너편에 둥지를 틀고 있던 해직 언론인들의 발걸음도 잦았다.


‘미술과 생활’의 동지들을 살펴본다. 77년 봄 입사 이후 한 계절도 넘지 않아 황 편집장은 내게 편집차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뭐, 선배들도 많은데, 어떻게? 9월호인가, 아무튼 나는 황 편집장에 이어 차장으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기자는 김용태 이외 주재환 같은 선배 그리고 김학민, 여기자 몇명이 있었다. 김학민은 민청학련 출신으로 감옥 갔다 나온 뒤 낭인생활을 하다 미술기자가 된 사례였다. 나는 ‘학민 형’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판금도서였던 <노동자의 길잡이>(가톨릭출판사 발행)를 어렵게 구해준 것도 그였다. 노동법을 강렬한 그림과 함께 편집한 그야말로 노동자의 교과서였다. 편집위원 성완경, 그는 파리에서 귀국한 직후여서 그런지 항상 의욕과 발랄함으로 넘쳤다. 단골 필자 원동석과 최민도 신예 비평가로서 역시 마포 출입을 즐겼다.


돌이켜보니, 원동석·성완경·최민 그리고 나, 이들 이론가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79년 유신독재의 최암흑기,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현발)의 창립 주동자들 아닌가. 이론가들이 앞장서서 조직한 미술그룹, 여기에 작가로서 주재환과 김용태까지 합세하니 미술판의 지형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대의 미술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민중미술 운동, 그 모체라고 볼 수 있는 ‘현발’, 그 ‘현발’의 모체가 마포 시절 ‘미술과 생활’이 아닌가.


다시 한번 강조한다면, ‘미술과 생활’은 우리 민중미술 운동의 요람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임영방 관장 시절 ‘제도권’의 관행을 깨고 <민중미술 15년> 특별전을 개최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나는 마포 시절의 인연이 깔려 있다고 본다. 마포 시절, 우리들은 민주화 운동에 눈을 떴고, 사실 특급 선생님들로부터 특수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교실은 물론 술자리였다. 공부하기, 그것을 어찌 하루라도 건너뛸 수 있겠는가. 맨정신으로 귀가하는 날은 동네 포장마차에서라도 나 혼자 복습(?)을 했다. 365일 음주운동, 그것의 저력은 80년대로 화려하게 이어졌다.


민족미술협의회와 민예총 같은 단체 활동, 혹은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용태 형과 함께하는 시간이 내내 많았다. 나는 중앙일보사의 <계간미술>을 거쳐, 호암갤러리(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의 전신) 개관 팀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업무 이외 재벌 회사라는 하중은 나의 어깨를 항상 무겁게 눌렀다. 마침 미국 정부 초청으로 북미 미술계 일주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길로 내친김에 나는 뉴욕에 눌러앉았다. 장학금도 풍부해 뉴욕의 문화예술계를 만끽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국제적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생인 가나화랑의 이호재 대표가 찾아왔다. 미술잡지를 만들고 싶은데, 도와 달라는 얘기였다. 당분간 뉴욕에 더 머물고 싶었던 나는 창간 작업의 주역으로 용태 형을 추천했다. 80년대 민중미술의 듬직한 후원자와 만나는 순간이었다.


격월간 <가나아트>는 상업화랑의 홍보기관지가 아니라 민중미술단체의 기관지 같다는 투정을 들을 정도로 색깔이 분명했다. 88년 여름 일시 귀국한 나는 3개월간 ‘중공’ 대륙을 취재여행 할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신문 연재는 나의 뉴욕행 발목을 잡았고, 결국 용태 형에게 ‘가나아트’ 편집주간 자리를 물려받았다. 지금은 폐간되었지만 ‘가나아트’는 지금도 미술공부 하는 후학들에 의해 영향력 있는 미술잡지로 평가받고 있다.


용태 형, 그의 널널한 인품은 주위를 항상 환하게 만들었다. 특별히 나서는 것도 없는데 그가 있으면 분위기가 안정되었다. 아니, 안정이 아니라, 어쩌면 들뜨게 했는지도 모른다. 마포 시절의 추억, 사회생활 ‘초짜’ 시절 나는 훌륭한 개인교사들 덕분에 사회에 대한 눈을 뜰 수 있었다. 어쩌면 용태 형도 마포 시절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롭게 했을 것이다. 현발 창립과 그에 따른 주동자들과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이를 입증한다. 현발 이래 진보적 예술운동 단체 혹은 민주화운동 단체 등에서 조직가로서 빛나던 용태 형의 활약은 마포 시절부터 싹이 텄다고 믿는다. 그 시절, 용태 형과 함께한 것을 내 인생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다. ‘미술과 생활’이 우리 민중미술 운동의 요람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배경과도 맞물린다. 미술운동과 음주운동, 그 운동의 토대를 구축했던 시절, 어찌 마포 시절을 잊을 수 있겠는가. 365일 술 마시기 운동, 지금 생각해 보아도 훈장과 같은 세월이었다. 후회, 무슨 후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마포 시절의 노도, 그 세월이 그립다. “용태 형~! 한잔 나누고 싶구려.”

 

[윤범모 미술평론가 가천대 교수]




1977년 김용태 선생이 잠깐 일했던 <미술과 생활>의 편집실은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서 79년 말 출범하는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의 둥지 노릇을 했다. 사진은 83년 1월 충북 대청호 야유회에서 함께한 ‘현발’ 동인들. 왼쪽부터 고 김용태, 김건희, 노원희, 윤범모, 이태호, 성완경씨. 사진 박현수씨 제공


“편집실을 사랑방으로 만든 것 자체가 일”


‘유쾌한 씨’들 모여 인간미 나누며
수다 떨다가 기획하고 작가 선정


“편집실은 김용태의 사랑방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내기 바둑을 두고 그러다 밖으로 나가 술 먹는 게 일이었다. 그는 도무지 일을 한 적이 없었다. (…)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사랑방으로 만들어놓은 거 자체가 일이었다. (…) 이야기 중에 기획이 튀어나오고 필자가 정해지고 작가가 자연스럽게 선정되는 방식은 미술잡지로서 더할 나위 없는 시스템이었다.”(<산포도 사랑, 용태 형>)


1988년 봄 창간된 미술전문지 <가나아트>의 초대 편집장으로, 편집주간 김용태와 함께 일했던 김진송의 ‘증언’이다. “네 마음껏 해봐. 다른 건 걱정하지 말고.” 2년차 기자인 그에게 편집장 일을 맡기면서 ‘바람막이’를 자처했던 ‘용태 형’은 자신의 장담을 지켰다.


사실 김용태 선생은 미술작가이자 탁월한 편집자였다. 19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예술 관련 각종 잡지의 기자 또는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지난해 연말 투병 중에 진행된 큐레이터 전승보와의 구술 대담에서 그 자신이 밝힌 계기는 단순했다. “잡지사 기자는 말 그대로 먹고살려고 한 일이고, 그때 그나마 월급을 받을 수 있으니, 하지만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인연을 만들었다.”


70년대 초 제대한 그는 72~73년 무렵 뉴욕에서 살다 온 선배의 제안으로 각종 문화계 안내서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지막 1년 동안 혼자서 유지하다가 결국 문을 닫은 뒤 대입 수험생들의 필독지였던 <진학>으로 옮겼다. “그때 ‘진학사’ 편집실은 학생운동권 출신 서중석 덕분에 운동권 수배자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76~77년 전후 새로 생긴 월간 <디자인>의 편집차장으로도 일한 그는 “재정난 때문에 막내 기자로 갓 입사한 이영혜에게 ‘약수동 시장골목 음식점에서 떠넘기듯 맡겼던’ 그 잡지가 오늘날 디자인하우스가 됐다”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그 뒤에도 <조경> <대학> 등 잡지를 만들던 그는 마침내 77년 봄 <미술과 생활> 창간 기자로 참여한다. “특히 번역물이 좋았다. 우리는 그때 너무 목말라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정말 가뭄에 단비였다. (본사인) 세운문화사의 사장은 잡지에 상당히 관대해 참견도 안 하고… 그런데 그게 책이 좋았던 이유이기도 하면서 문을 닫게 되는 이유가 됐다. 꼭 출판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거든.”


제목 탓에 공예잡지로 오해받기도 했던 ‘미술과 생활’은 불과 반년 남짓 만에 문을 닫았지만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현발)을 태동시킨 보금자리로 큰 몫을 했다. 그 뒤 78년부터 그는 ‘동아투위’ 황명걸 시인의 출판사 사무실 한구석을 빌린 ‘관철동 편집실’에서 주재환 선생과 함께 일했다. “먹고사느라 <이대학보> 편집 대행도 하고, 말하자면 편집기획사였다.”


그 시절 인연으로 ‘현발’에 참여한 작가 노원희는 “사무실 간판도 기억나지 않지만 인간미 넘치는 주재환·김용태, 독특하고 ‘유쾌한 씨’들이 나이차를 내던지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언사가 정말 훈훈하고 재미있었다”고 기억했다.

 

한겨레신문/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용태형’ 추모식이 열렸던 장례식장은 전국각지의 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밤늦도록 문상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자리를 옮겨가며 술상을 지키는 술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새벽 무렵에는 대부분 곯아떨어지거나 사라졌는데, 신학철사단을 비롯한 최종원, 김명성, 성완경, 정인숙씨 등 10여명만 남아 콩팔칠팔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미 소주와 막걸리는 떨어졌고, 조금 남은 캔 맥주로 간신히 연료를 공급하고 있었다.

나도 의자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났는데, 아마 한 시간 쯤 지난 것 같았다.
주변을 살펴보니 함께 마시던 최종원, 김명성, 성완경씨는 보이지 않았고, 호상 김태서씨와 신학철, 박불똥, 장경호씨만 남아 장례식장을 사수하고 있었다.
신학철사단의 용맹은 진작 인사동에서 보아왔던 터지만, 술이면 술, 작품이면 작품, 논쟁이면 논쟁, 그들을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다음날 일이지만 노제, 화장터, 유골을 안치한 봉원사에 이르기까지 잠시도 이탈하지 않고, 술로 자리를 지킨 그들이다.
늦게는 그들과 헤어져, 김명성씨 일행따라 봉원사 이인섭선생 댁에 술 한 잔 더 하러 갔다. 그런데 돌아오던 길목의 어느 주막에서 술 마시며 논쟁하는 신학철씨와 류연복씨를 다시 발견한 것이다. 정말 대단한 깡다구였다.

이제 민중미술 판의 야전사령관이었던 ‘용태형’이 세상을 떠나, 그 역할을 대신할 인물이 절실하다. 시대적 상황이나 여건이 예전과는 다르지만 정신적 지주가 될 만한 인물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맡을 분이 바로 신학철선생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학철선생을 제2대 민중미술의 야전사령관으로 모시는 취임 축하연을 인사동에서 한번 열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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