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③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세번째로 미술평론가 윤범모 교수가 1970년대 후반 함께 일했던 미술전문지 <미술과 생활> 시절을 회고한다. 이어 고영직, 김정헌,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이애주, 이태호, 이종률, 임옥상,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매일같이 돼지껍데기집 출근도장
용태형·주재환 등 의기투합
술 마시면서 미술과 사회 논하며
민중미술 요람인 ‘미술과 생활’ 창간
백기완 선생도 마포 들러 ‘특강’
술자리서 만난 초짜 예술 이론가들
1979년 ‘현실과 발언’ 창립하며
인연 이어가 진보 예술운동 싹 터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질풍노도의 시절, 바로 1977년 무렵이었다. 세상은 수상했고, 즉 군홧발만 빛나던 암담한 시절이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우리는 무제한 암울했고, 무제한 마셨다. 아니, 무제한 마실 수밖에 없었다. 주름진 얼굴로 지금 과거를 추억해보니, 내게도 기가 막힌 기록 하나가 있음을 확인한다. 365일의 음주, 그러니까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신 해, 그런 특기사항이 개인사적 연보에 남아 있다. 77년은 ‘음주운동’의 절정 시기였다. 우리들의 ‘운동’은 그렇게 술판에서 시작되었다. 술자리의 단골, 많고도 많은 인사들이 있었지만, 주요 멤버의 하나로 ‘김용태’라는 이름을 들 수 있다. 우리가 <미술과 생활>이라는 월간 미술잡지를 만들던 그때였다. 주된 무대는 마포 가든호텔 언저리였고, 때때로 종로통으로, 그리고 무시로 바뀌었다.


나는 ‘용태 형’을 어떻게 만났던가. 20대의 중반을 어렵게 통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최더벅’이라는 괴물이 있었다. 일간지 기자 출신이라는데, 후배 하숙집에서 얹혀살면서 세월만 한탄하고 있던 괴짜 형이었다. 효창동, 숙대 앞 하숙촌에서 나는 문제의 더벅머리를 만났다. 그는 나의 ‘끼’를 알아보고 악수를 청했다. 낭인 시절의 어느 날 인사동을 걷다가 또 하나의 괴물을 만났다. 꼭 알고 지내야 할 사람이라면서 최더벅이 소개한 사람은 또 하나의 유유상종, 즉 김용태라고 했다. 시골스런 인상이었는데, 의외로 그는 월간 잡지를 발행한다고 했다. 이름하여 <프로그램>. 뭐, 프로그램? 매월 각종 전시와 공연 등을 소개하는 문화예술계의 안내서라 했다. 비록 작은 판형에 얇은 페이지, 게다가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는 편집, 하지만 잡지를 보고 나는 감동했다.


<미술과 생활>

월간 <미술과 생활>, 우리 미술출판 역사에 특이한 잡지가 출현했다. 국어 참고서로 돈을 번 세운문화사라는 출판사가 김용태의 그 ‘프로그램’ 판권을 인수하여 만든 미술 월간지였다. 당시만 해도 정기간행물은 허가제여서 보통 사람들은 잡지 발행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새 잡지를 창간할 때도 기왕의 판권을 인수해 제호만 바꿔 발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용태 형은 월간지 발행권을 양도하고, 아예 그 잡지의 기자로 취직했다. 자금난이 ‘사장님’을 평사원으로 하락시킨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지고 있었다. 아니, 달라질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77년 4월, ‘미술과 생활’ 창간호가 나왔다. 특집은 ‘미술과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온실 속의 살롱 미술로 세뇌되었던 미술인들에게 ‘사회’ 특집은 신선한 충격, 바로 그 자체였다. 창간호가 나오던 그 무렵 나는 ‘특채’로 기자가 됐다. 대학신문 학생기자 출신에, 그러니까 편집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 미술이론을 전공했다는 점이 돋보였던가 보다. 물론 용태 형의 소개가 힘을 받았다. 아, 이런, 뭣도 모르면서 술도가니에 온몸을 빠뜨리러 가다니!


마포 시절, 의기투합으로 뭉쳤던 잡지 편집실, 그곳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정말 가족 이상의 동지의식으로 넘쳤던 편집실 분위기였다.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보자는 의욕도 대단했다.


우선 임영방 주간의 ‘존재’를 회고하게 한다. 프랑스 박사 출신이어서 ‘임박’(林博)으로 통했다. 저녁나절 그는 대학 연구실에서 마포로 퇴근해 오는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 물론 그때 이미 이름난 마포 돼지껍데기구이 전문, 최대포집은 당연한 순례 코스였다. 어쩌다 발동이 걸리면, 우리들은 ‘임박’의 동네인 홍은동 방석집으로 직행하기도 했다. 아, 그 시절이 그립구나. 편집장 황명걸, 그는 해직기자 출신이면서 무엇보다 판매금지로 묶인 창비시선 <한국의 아이들>의 시인이었다. 암흑기 ‘판금 도서’의 저자는 대학가에서 무조건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인품이 돋보였던 그를 찾아 어스름 날이 저물면 마포로 출근하는 ‘투사’들이 많았다.


마포 돼지갈비집에서 수시로 ‘특강’을 베푼 인사로 백기완 선생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87년 양김 분열 시대에 용태 형이 백기완 대통령 후보의 비서실장을 맡은 것은, 마포 시절부터 싹튼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인들 중에서는, 신경림, 민영, 염무웅, 정희성, 강민 등 기라성을 비롯해 마포경찰서 건너편에 둥지를 틀고 있던 해직 언론인들의 발걸음도 잦았다.


‘미술과 생활’의 동지들을 살펴본다. 77년 봄 입사 이후 한 계절도 넘지 않아 황 편집장은 내게 편집차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뭐, 선배들도 많은데, 어떻게? 9월호인가, 아무튼 나는 황 편집장에 이어 차장으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기자는 김용태 이외 주재환 같은 선배 그리고 김학민, 여기자 몇명이 있었다. 김학민은 민청학련 출신으로 감옥 갔다 나온 뒤 낭인생활을 하다 미술기자가 된 사례였다. 나는 ‘학민 형’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판금도서였던 <노동자의 길잡이>(가톨릭출판사 발행)를 어렵게 구해준 것도 그였다. 노동법을 강렬한 그림과 함께 편집한 그야말로 노동자의 교과서였다. 편집위원 성완경, 그는 파리에서 귀국한 직후여서 그런지 항상 의욕과 발랄함으로 넘쳤다. 단골 필자 원동석과 최민도 신예 비평가로서 역시 마포 출입을 즐겼다.


돌이켜보니, 원동석·성완경·최민 그리고 나, 이들 이론가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79년 유신독재의 최암흑기,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현발)의 창립 주동자들 아닌가. 이론가들이 앞장서서 조직한 미술그룹, 여기에 작가로서 주재환과 김용태까지 합세하니 미술판의 지형이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대의 미술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민중미술 운동, 그 모체라고 볼 수 있는 ‘현발’, 그 ‘현발’의 모체가 마포 시절 ‘미술과 생활’이 아닌가.


다시 한번 강조한다면, ‘미술과 생활’은 우리 민중미술 운동의 요람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임영방 관장 시절 ‘제도권’의 관행을 깨고 <민중미술 15년> 특별전을 개최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나는 마포 시절의 인연이 깔려 있다고 본다. 마포 시절, 우리들은 민주화 운동에 눈을 떴고, 사실 특급 선생님들로부터 특수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교실은 물론 술자리였다. 공부하기, 그것을 어찌 하루라도 건너뛸 수 있겠는가. 맨정신으로 귀가하는 날은 동네 포장마차에서라도 나 혼자 복습(?)을 했다. 365일 음주운동, 그것의 저력은 80년대로 화려하게 이어졌다.


민족미술협의회와 민예총 같은 단체 활동, 혹은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용태 형과 함께하는 시간이 내내 많았다. 나는 중앙일보사의 <계간미술>을 거쳐, 호암갤러리(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의 전신) 개관 팀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업무 이외 재벌 회사라는 하중은 나의 어깨를 항상 무겁게 눌렀다. 마침 미국 정부 초청으로 북미 미술계 일주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길로 내친김에 나는 뉴욕에 눌러앉았다. 장학금도 풍부해 뉴욕의 문화예술계를 만끽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국제적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생인 가나화랑의 이호재 대표가 찾아왔다. 미술잡지를 만들고 싶은데, 도와 달라는 얘기였다. 당분간 뉴욕에 더 머물고 싶었던 나는 창간 작업의 주역으로 용태 형을 추천했다. 80년대 민중미술의 듬직한 후원자와 만나는 순간이었다.


격월간 <가나아트>는 상업화랑의 홍보기관지가 아니라 민중미술단체의 기관지 같다는 투정을 들을 정도로 색깔이 분명했다. 88년 여름 일시 귀국한 나는 3개월간 ‘중공’ 대륙을 취재여행 할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신문 연재는 나의 뉴욕행 발목을 잡았고, 결국 용태 형에게 ‘가나아트’ 편집주간 자리를 물려받았다. 지금은 폐간되었지만 ‘가나아트’는 지금도 미술공부 하는 후학들에 의해 영향력 있는 미술잡지로 평가받고 있다.


용태 형, 그의 널널한 인품은 주위를 항상 환하게 만들었다. 특별히 나서는 것도 없는데 그가 있으면 분위기가 안정되었다. 아니, 안정이 아니라, 어쩌면 들뜨게 했는지도 모른다. 마포 시절의 추억, 사회생활 ‘초짜’ 시절 나는 훌륭한 개인교사들 덕분에 사회에 대한 눈을 뜰 수 있었다. 어쩌면 용태 형도 마포 시절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롭게 했을 것이다. 현발 창립과 그에 따른 주동자들과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이를 입증한다. 현발 이래 진보적 예술운동 단체 혹은 민주화운동 단체 등에서 조직가로서 빛나던 용태 형의 활약은 마포 시절부터 싹이 텄다고 믿는다. 그 시절, 용태 형과 함께한 것을 내 인생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다. ‘미술과 생활’이 우리 민중미술 운동의 요람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배경과도 맞물린다. 미술운동과 음주운동, 그 운동의 토대를 구축했던 시절, 어찌 마포 시절을 잊을 수 있겠는가. 365일 술 마시기 운동, 지금 생각해 보아도 훈장과 같은 세월이었다. 후회, 무슨 후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마포 시절의 노도, 그 세월이 그립다. “용태 형~! 한잔 나누고 싶구려.”

 

[윤범모 미술평론가 가천대 교수]




1977년 김용태 선생이 잠깐 일했던 <미술과 생활>의 편집실은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서 79년 말 출범하는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의 둥지 노릇을 했다. 사진은 83년 1월 충북 대청호 야유회에서 함께한 ‘현발’ 동인들. 왼쪽부터 고 김용태, 김건희, 노원희, 윤범모, 이태호, 성완경씨. 사진 박현수씨 제공


“편집실을 사랑방으로 만든 것 자체가 일”


‘유쾌한 씨’들 모여 인간미 나누며
수다 떨다가 기획하고 작가 선정


“편집실은 김용태의 사랑방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내기 바둑을 두고 그러다 밖으로 나가 술 먹는 게 일이었다. 그는 도무지 일을 한 적이 없었다. (…)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사랑방으로 만들어놓은 거 자체가 일이었다. (…) 이야기 중에 기획이 튀어나오고 필자가 정해지고 작가가 자연스럽게 선정되는 방식은 미술잡지로서 더할 나위 없는 시스템이었다.”(<산포도 사랑, 용태 형>)


1988년 봄 창간된 미술전문지 <가나아트>의 초대 편집장으로, 편집주간 김용태와 함께 일했던 김진송의 ‘증언’이다. “네 마음껏 해봐. 다른 건 걱정하지 말고.” 2년차 기자인 그에게 편집장 일을 맡기면서 ‘바람막이’를 자처했던 ‘용태 형’은 자신의 장담을 지켰다.


사실 김용태 선생은 미술작가이자 탁월한 편집자였다. 19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예술 관련 각종 잡지의 기자 또는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지난해 연말 투병 중에 진행된 큐레이터 전승보와의 구술 대담에서 그 자신이 밝힌 계기는 단순했다. “잡지사 기자는 말 그대로 먹고살려고 한 일이고, 그때 그나마 월급을 받을 수 있으니, 하지만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인연을 만들었다.”


70년대 초 제대한 그는 72~73년 무렵 뉴욕에서 살다 온 선배의 제안으로 각종 문화계 안내서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지막 1년 동안 혼자서 유지하다가 결국 문을 닫은 뒤 대입 수험생들의 필독지였던 <진학>으로 옮겼다. “그때 ‘진학사’ 편집실은 학생운동권 출신 서중석 덕분에 운동권 수배자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76~77년 전후 새로 생긴 월간 <디자인>의 편집차장으로도 일한 그는 “재정난 때문에 막내 기자로 갓 입사한 이영혜에게 ‘약수동 시장골목 음식점에서 떠넘기듯 맡겼던’ 그 잡지가 오늘날 디자인하우스가 됐다”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그 뒤에도 <조경> <대학> 등 잡지를 만들던 그는 마침내 77년 봄 <미술과 생활> 창간 기자로 참여한다. “특히 번역물이 좋았다. 우리는 그때 너무 목말라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정말 가뭄에 단비였다. (본사인) 세운문화사의 사장은 잡지에 상당히 관대해 참견도 안 하고… 그런데 그게 책이 좋았던 이유이기도 하면서 문을 닫게 되는 이유가 됐다. 꼭 출판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거든.”


제목 탓에 공예잡지로 오해받기도 했던 ‘미술과 생활’은 불과 반년 남짓 만에 문을 닫았지만 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현발)을 태동시킨 보금자리로 큰 몫을 했다. 그 뒤 78년부터 그는 ‘동아투위’ 황명걸 시인의 출판사 사무실 한구석을 빌린 ‘관철동 편집실’에서 주재환 선생과 함께 일했다. “먹고사느라 <이대학보> 편집 대행도 하고, 말하자면 편집기획사였다.”


그 시절 인연으로 ‘현발’에 참여한 작가 노원희는 “사무실 간판도 기억나지 않지만 인간미 넘치는 주재환·김용태, 독특하고 ‘유쾌한 씨’들이 나이차를 내던지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언사가 정말 훈훈하고 재미있었다”고 기억했다.

 

한겨레신문/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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