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저께 인사동 터줏대감 강민 선생의 운명이 임박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 없었다.

선생께서 자주 들리시며 친구들을 불러 모았던 인사동 '나주곰탕' 앞에서 한 참을 서성이며 선생을 생각했다.



사실, 인사동 인사동 노래를 부르며 들락거리지만, 공간의 추억보다는 사람의 추억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은 오래전에 전설이 되었지만, 김동수, 이계익, 신봉승, 심우성선생께서 차례로 떠나가셨고,

마지막 터줏대감으로 여겼던 강민시인 조차 오늘 내일하고 있으니, 이제 인사동도 막 내려야 하는 것인가?

아직 구중서, 김승환, 민 영, 방동규. 신경림, 황명걸선생 등 인사동을 사랑하는 원로들이 계시지만,

강민선생이 계시지 않으면 뵐 수는 있을까?


 

80년대 중반 '나주곰탕'집 자리는 망각 강이라는 술집 ‘레테’가 있던 자리다.

소설가 배평모씨를 그 곳에서 처음 만나 이틀 동안 쉬지않고 마셨던 곳이기도 하다.

그 술집은 이점숙씨가 운영했는데, 펑퍼짐한 엉덩이를 가진 미색도 죽이지만,

숨이 끊어질듯 애절하게 부르는 춘향가의  ‘갈까보다’라는 소리에 숨이 턱턱 막힌다. 



"갈까보다, 갈까보다. 님 따라서 갈까보다.

천 리라도 따라가고, 만 리라도 갈까보다.

바람도 쉬여 넘고, 구름도 쉬여 넘는..." 

강민 선생님 앞에서 이 소리 한 자락 불러 드렸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실, 배평모씨는 친구 좋아 날밤 까며 이틀 동안 술을 마셨다지만, 그 여인이 없었다면 어림없었다.

가끔 임춘원 여사가 출몰하여 불러주는 뚝뚝 떨어지는 ‘목련’도 기가 막혔다.

그 때부터 인사동 예술가들 술값 뒷바라지 한 김명성씨는 다 털어먹은 지금까지 술값 대느라 바쁘다.



'레테'가 있던 윗층에는 박중식시인이 운영한 '툇마루'가 생겼지만, 

옆 건물 옥탑방에 내가 사용한 '카메라워크'가 있어 자주 들락거릴 수 밖에 없는 골목이었다. 

강민선생을 '나주곰탕'에서 그리워하며, 망각의 강에서 '갈까보다'를 듣고 싶었다.





그외 인사동을 추억할 만한 장소는 찻집'귀천'과 실비대학으로 불리던 '실비집'이었다.

'귀천'에서 천상병시인에게 저승가는 노자돈을 바치거나, 민병산선생의 서예글씨를 만날 기회가 많았다.

운이 좋은 날에는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를 만나 진토닉까지 얻어 마실 수 있었지만...




그리고 '실비집'은 가난한 인사동 예술가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인심이 후해 술값이 싸니, 누구든 막걸리 한 병 값만 있으면 갈 수 있고, 외상까지 통한다.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김치나 콩나물을 내주지만, 버스가 끊겨 자는척하는 날에는 이튿날 해장국까지 얻어 먹을수 있었다. 
이북이 고향인 주모 아닌 실비대학 총장님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다. 



또 한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실비집'에서 가진 결혼식 뒤풀이였다.

대학로에서 혼례식을 끝냈으면 신혼여행이나 갈것이지, 실비집에 자리를 왜 잡았는지 모르겠다. 
그 당시 '87민주항쟁' 개인전을 말리는 이사장이 싫어, '사진협회를 그만두고 박한웅씨를 밀어넣었는데.

그 날 뒤풀이에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삥땅 뜯는 땡초 적음을 대머리로 들이 받아 앞니를 부러트린 것이다.
뒤 이어 술 취한 내가 옷을 벗고 난리를 피웠으니, 신부를 비롯한 신부 우인들까지 질겁해 도망갔다.




잔치는 완전 개판 되었으나, 그 이튿 날이 더 문제였다.

적음의 치료비를 걱정한 화가 강용대가 부추겨, 출근하는 박한웅을 잡아가게 한 것이다.

새 직장에 나간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잘 못하면 목 잘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배평모씨와 둘이서 적음을 찾아가 고소를 취하하라고 얼마나 사정했는지, 입에서 화근내가 났다.



한참 뒤인 15년 전에 생긴 '작은 뜨락'이란 대폿집도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작은 뜨락'은 '한지추억'이란 점포로 바뀌었고, '시인통신'자리는 '古 ART'로 바뀌었더라. 

인사동 풍류객의 ‘참새 방앗간’으로 통한 이 곳은, 장사라고는 처음한 노인자씨가 운영한 곳이다.

원래 건물 옆에 버려진 골목을 차양으로 가리고, 건물 벽에 의지해 폭 1미터에 길이 5미터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다.

폭이 좁아 일반 탁자를 놓을 수가 없어 벽에 긴 나무판대기를 붙이고, 바닥에는 엉덩이를 걸칠 만한 간이의자를 놓았다.



이 집에서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본의 아니게 면벽을 해야 한다.

그런 술집이 인사동풍류객들의 아지트가 되었는데, 술값은 자율적으로 먹은만큼 바구니에 담고 나갔다.

자리가 없으면 그 옆 건물 이층으로 이사 온 한귀남씨의 '시인통신'에서 죽치기도 했는데,

긴 세월은 아니지만, 한 동안 인사동을 풍미했던 대폿집이 틀림 없었다.

그림쟁이들을 자주 만나는 장소는 전시장보다 뒤풀이 장소인 '부산식당'과 '사동집'이었다.



그 날 만난 아는 분으로는 30여년 동안 인사동을 오가며 기름 행상한 권경선씨와 미술판의 방랑자 성기준씨 뿐이었다.

'갤러리 가이아'에서는 사보 클라라 페트라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고,

주인이 바뀌어 수리하는 점포나, 전시가 바뀌어 디스플레이 하는 전시장들이 많았다.



고서 파는 '통문관'은 셔터 내린 날이 더 많고, 그 옆에는 거대한 흉물 하나가 꿈틀대고 있었다.
옛 민정당사 터에 긴 세월동안 눈치 보며 터를 잡아 온 호텔공사가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인사동 거리 쪽에 지어놓은 건물 벽에는 장사할 사람 찾는 임대광고가 붙어 있었다.



이러다 한 세기는 커녕 반세기 전의 인사동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인사동의 오랜 정체성은 오간데 없고, 이름만 있는 껍데기만 남아버렸다.




10년 전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에도 소개된바 있지만,
현재의 인사동 명칭은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에 생겼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의 가운데 자인 인(仁)과 사(寺)를 따서 불러졌다.

인사동 거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삼청동 개천에서 시작해 청계천을 따라 형성되었다고 한다.

국가에 공훈이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고 공적을 보존하는 일을 맡아보던 조선시대 관아인 충훈부도 이곳에 있었다.

특히 도화원이 이곳에 있어 미술활동의 중심지가 되어 중인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1910년대의 인사동은 소위 양반들이 몰려사는 북촌의 노른자위였다.

일제말기에서 해방직후까지 4-5개의 점포가 있었는데, 6,25후 혼란했던 사회가 안정돼 가자

일부 벼락부자와 정치인들 사이에서 골동품 붐이 일면서 골동품거리가 번창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먹고 살기위해 집안에 가보처럼 모셔두었던 것을 인사동에 내다 팔기 시작했는데,

골동품을 똥값으로 후려 쳐, 비싸게 되팔아 부자가 된 골동품상도 많았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수집된 상당부문의 고미술이나 골동품들이 쪽바리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 1930년대부터 인사동 길 주변에는 서적이나 고미술 관련 상가가 들어서면서 골동품 거리가 점차 형성됐다.

50년대 한국전쟁 이후에는 낙원상가 아파트 자리에 낙원 시장도 생겼다.

1970년대에는 최초의 상업 화랑인 현대 화랑이 생긴 것을 계기로 화랑들이 모여들면서 미술문화의 거리로 변신했다.

그러나 인사동엔 문화적 특성을 이용한 부동산 투자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도 속출했다.

난, 80년도 초에 인사동에 입성하여 그 이전 이야기는 노인들에게 주워 듣거나 사료에서 확인한 것이다.




1987년 인사동을 문화지구로 지정한 것은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었으나.

부동산 개발이라는 돈이 개입되며 개판이 된 것이다.

문화보다는 관광객들이 몰려들게 하여 주목받는 상권은 되었지만, 우리 전통문화는 흐지부지된 것이다.




지금의 인사동 문화지구는 인사동을 비롯하여 낙원동, 관훈동, 견지동, 경운동, 공평동을 아우르는 말인데,

동쪽으로는 운현궁 앞 삼일로, 서쪽으로 조계사 앞 우정국로, 북쪽으로 종로경찰서 앞 율곡로,

남쪽으로는 남인사마당과 종로가 붙어있다.




인사동이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어, 한국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외국인이 즐겨 찾는 명소는 되었으나, 속빙 강정일 따름이다.

문중을 지키는 종갓집 며느리처럼 명맥을 잇던 골동품 가게들이 치솟는 건물임대료에 쫒겨 대부분 장안동으로 밀려났다.

대신 커피체인점이나 옷가게 등으로 바뀌었고, 남은 것도 국적 없는 잡화상으로 변해 싸구려 관광거리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2013년 지정된 ‘인사동문화지구 관리 변경 안’의 권장업체였던 공예품 가게는 인형이나 탈 몇 가지 진열해 둔 잡화상으로 변신한 것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수 많은 갤러리들이 인사동에 몰려 있으나, 작품 관람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이제 오래된 인사동 공간의 추억은 물론, 인사동의 풍류를 주도해 온 예술가들도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살아 있어도 만나 보기 힘들어 인사동 기록을 접을 때가 된 것 같다.



10년 전 '인사동 이야기'사진집을 출판했으나, 오래전 절판되어 지금은 구할 수가 없다.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3년전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청량리588'사진전을 열 때 보관하고 있던 '인사동이야기' 한 권을

관객들을 위해 입구에 비치해 두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책이 사라진 것이다.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책이라 아깝기도 했지만, 어떻게 사라졌는지가 궁금해 못견디겠더라.

전시가 끝난 후 갤러리를 관리하던 공윤희씨와 CCTV를 확인해 보았는데, 깜짝 놀랄 지인이 슬쩍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그 책이 갖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확인한 둘다 안 본 것으로 하고 영원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도 한 권은 있어야 할 것 같아 청계천 중고서적상을 뒤져 책 구하느라 한 나절을 뺑뺑이 돈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책이 남아 있더라도 보완할 내용이 더 많았다.

인사동 사람들이라고 내세운 115명의 예술가들도 덜 인사동 다운 사람이 많은데다, 꼭 들어가야 할 사람이 많이 빠졌다.

사진가 한정식선생의 발문에다 시인 강 민, 민 영, 신경림, 황명걸, 서정춘, 김신용, 소설가 배평모, 박인식, 민속학자 심우성씨등

37명의 문인들이 쓴 인사동 추억담에다 필자가 쓴 인사동 에피소드 열 토막까지 게재했으나,

대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씨 세분 이야기거나 '귀천'이나 '실비집'에서 있었던 중복되는 내용이 많은데다,

정작 사료로 필요한 골동품 거래 이야기나 인사동의 중요한 증언들이 빠져 있었다.



1부는 흑백으로, 2부는 컬러로 나누어 편집할 계획이다.

천상병, 박재삼, 심우성, 이계익, 목순옥, 이호철, 김동수, 최영해, 강용대, 김종구, 김용태, 여 운, 김영수씨 등

그동안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과 오래된 인사동 사진만 흑백으로 게재하고,

10년동안 기록한 사람들과 인사동 거리풍경은 컬러로 바꾸어 제대로 된 인사동 자료집을 올해 중에 마무리할 작정이다.

관련있는 분들의 많은 자문과 도움을 바랍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인사동은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의 성지로 남게 되었다.


사진, 글 / 조문호































한겨레

[짬] '시력 50년' 기념문집 헌정받는 서정춘 시인


선후배 동료 문인들이 지은 ‘서정춘 시’만 40편에 이르는 서정춘 시인은

그 자신 누구보다 이유가 궁금하다고 말한다. 사진은 지난 봄 인사동에서

소산 박대성 화백 전시회 때 모습. 김경애 기자


                                   

“그라이 그거시 참 황당한 현상이라…, (내가) 말실수를 많이 하니께 동물원 원숭이 보듯 재미있는지, (나를) 내려놓으니 밀가루 반죽하듯 맘대로 편하게 자기들 식으로 빚는 것도 같고… 이유가 나도 궁금하다니께요.”


그는 내내 부끄럽다면서도,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자의 반 타의 반’ 동의를 했다고 덧붙였다. 바로 ‘시력 50년’ 기념으로 특별한 자료집을 헌정받는 <시인 서정춘>(가제)의 주인공 서정춘(77) 시인이다.


일찍이 문단에서 그는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그의 대표작인 ‘죽편1―여행’은 가객 장사익이 노래로 부를 정도로 예술인들의 애송시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 ‘그를 주제나 소재로 삼은 작품’을 모은 것이다. 동시대를 사는 선후배 문인들을 비롯해 예술인들이 ‘한 시인’에게 영감을 얻어 창작을 한 것을 두고, 30일 전화로 만난 서 시인은 ‘왜냐’고 되물었다.


1968년 서정주 심사한 신춘문예 당선
정년퇴직때 등단 28년만에야 첫 시집
지금껏 시집 5편…과작으로도 유명


등단 50돌 맞아 자료집 ‘시인 서정춘’
문인들이 노래한 ‘서정춘 시’ 38편 모아
엮은이들 “시적 엄격함에 대한 존경”


‘시 공부 10여년에 쌓인 책 이희승 국어사전 빼고 나머지 한 도라꾸 판 돈으로
한 여자 꼬셔와 서울 청계천 판자촌에 세 들어 살면서 나는 모과 할게 너는 능금 해라
언약하며 니뇨 나뇨 살아온 지 오늘로 50년 오메 징한 사랑아!!’ 서정춘 시인은 2017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발표한 ‘기념일’에서 일본 사진작가 구와바라 시세이의
‘서울 청계천변’(1965년작)에서 시작했던 결혼 생활을 털어놓았다.


“수년 전부터 책으로 남겨두면 좋겠다고, 권유를 했는데 그때마다 한사코 마다하셨어요. 올해는 마침 등단 50돌이시니 더는 미룰 수 없어, 밀어붙였지요.”


<시인 서정춘>의 공동 엮은이이자 역시 시인인 도서출판 비(B)의 조기조 대표는 “현재까지 나온 ‘서정춘’을 노래한 시 40편을 찾아냈고, 이 가운데 38편을 1부에 실었다”고 소개했다. 책의 2부에는 ‘서정춘 시인의 시에 대한 짧은 단평’을 정리하고 수많은 평론들은 목록만 넣었다. 3부에는 서 시인의 가족을 포함한 사진과 연보를 담았다. 지난 2015년 <봄, 파르티잔> 시집 출간 기념으로 열린 시화전 ‘시와 그림, 결혼하다’ 때 이제하, 마광수, 박불똥, 마광수 등 29명의 예술인들이 그려준 작품도 일부 곁들일 예정이다.


‘서정춘 시’를 가장 먼저 쓴 이는 고 박정만 시인이다. 서 시인과 같은 1968년 ‘등단 동기’인 그는 81년 ‘한수산 필화사건’ 때 고문 후유증을 술로 달래다 88년 40대 초반에 세상을 떴다. 작고 직전 3개월 사이 무려 300편의 시를 쏟아낸 그는 서 시인에게 보내는 ‘그리운 형에게’ 등 2편을 유작처럼 남겼다. 서 시인 역시 술중독에 빠진 동기를 일으켜 세우고자 ‘명태―박정만에게’로 화답했다.


서 시인의 글은 비교적 최근에야 공개된 ‘등단 뒷얘기’ 딱 한편이 들어갔다. <신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잠자리 날다'를 뽑아준 심사위원 서정주를 서울 공덕동 자택으로 찾아간 자리에서, 집에서 담근 포도주를 권하며 칭찬하는 대선배 미당에게 “전날 밤 황룡 꿈 꾸고 당선됐습니다”라고 일갈했다는 일화다.


2012년 사진작가 육명심의 <예술가의 초상> 출간기념 사진전 때
위아래로 나란히 내걸린 서정춘(위)·서정주(아래) 시인의 모습.
미당은 서정춘 시인의 신춘문예 당선작 ‘잠자리 날다’를 뽑은 심사위원이다.
           


‘서정춘 시’는 위로는 60년 등단한 선배인 고 정진규 시인부터 아래로는 2000년 등단한 후배 장이지 시인까지 ‘서정춘’을 지었다. 69년 등단한 동년배인 이시영 시인(한국작가회의 상임고문)은 3편이나 썼다.


가장 최근작으로는 맹문제 시인의 ‘그해 봄 서정춘 만세가 있었네’가 나왔다. ‘대통령 탄핵 다음날 우리는 광화문광장에 모여 한바탕 만세를 부른 뒤 골목 식당에 들어갔네/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한국작가회의 만세! 자유실천위원회 만세!/ 함께한 얼굴들도 서로 부르며 만세! 만세!/ 우리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고 한바탕 더 부른 뒤 서정춘 시인에게 〈부용산〉을 청했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노랫말은 슬펐지만 시인의 목소리는 광장을 울릴 만큼 크고 당당해 우리는 노래가 끝나자마자 또다시 불렀네/ 서정춘 만세!’(<시인동네> 2018년 9월호)


책 출간을 가장 먼저 제안하고 공동 엮은이로 나선 하종오 시인은 “김수영 시인을 비롯해 작고 문인에게 바치는 추모나 헌정시는 적지 않지만, 당대에 이처럼 많은 작품의 주인공이 된 인물은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두 엮은이를 비롯해 시적 성향이 전혀 다른 시인들이 모두 ‘서정춘’을 좋아하는 현상도 이채롭다. “서 시인은 ‘구두쇠’라 부를 만큼 과작이고, 단문이면서, 서정적이죠. 다작에 장문이고 참여적인 저와는 정반대라 할 수 있죠.”(하종오) “우리 둘 다 개인적으로 서 시인과 사적으로 인연이 없는 ‘의외의 후배’라는 점에서 더 뜻깊은 작업이죠.”(조기조)


서 시인이 등단 28년 만에야 첫 시집을 펴낸 연유도 지금과 비슷하다. 그는 동향 문인 김승옥 작가의 소개로 입사한 동화출판공사에서 고졸 학력의 한계를 딛고 28년 봉직하고 정년퇴직한 날에 맞춰 <죽편>(1996년·동학사)을 펴냈다. “퇴직하고 나면 쓸쓸해질 것 같아, 한번 묶어 본 것이다. 20년 전부터 시집을 내자고 보채온 유재영(동학사 대표) 시인이 아니었으면 그나마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지금껏 그는 5편의 시집을 냈을 뿐이다.


그처럼 스스로를 드러내기를 꺼리는 서 시인에게 수많은 예술인들이 끌리는 이유는 정말 무엇일까? 하 시인은 “아마도 작품의 엄격성에 대한 공감과 존경이 아니겠느냐”고 답했다.


정작 서 시인은 “이달 말께 책이 나오면 조촐한 자리를 만들어,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보고 싶다”며 웃었다.


한겨레 : 김경애 기자ccandori@hani.co.kr


      






















서정춘시인의 시가 죽이듯이, 주벽 또한 죽인다.
그러나 한 동안 술을 끊어, 더 이상의 술 꼬장은 볼 수 없었다.
술자리에서 잘 만날 수도 없지만, 만나도 재미가 없다.

예전엔 술만 취하면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져 슬슬 피해 다녔는데,
한 번은 꼬장부리다 기국서씨의 헤딩 한 방에 나가떨어진 적도 있다.
서정춘씨가 말로 하는 꼬장이라면, 기국서씨는 행동으로 하는 꼬장이다.

그러나 막상 술을 끊고 보니, 인사동 낭만 한 자락 잃은 듯 섭섭했다.
가끔은 그의 주벽이 그리웠다.






그런데, 다시 인사동 주당으로 돌아 온 것이다.
지난 2일, 인사동 ‘시가연’의 채현국선생 만찬장에 나타났다.
난, 초장부터 열 받아 퍼 마셨지만, 서정춘씨도 많이 마신 것 같았다.
마이크 잡고 노래도 뽑았으나, 난 나와 버렸다.

참새들의 방앗간 ‘유목민’에 들렸더니, 공윤희씨가 있었다,
좀 있으니 장경호씨가 나타났고, 잇따라 하홍만씨가 서정춘시인을 부축해 왔다.
얼마나 시달렸던지, ‘유목민’에 데려다 놓고 가버렸다.






그 뒤는 너무 취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밤 세시 무렵, 장경호씨와 택시를 같이 타고 온 기억이 전부다.
그런데, 이튿날 ‘유목민’ 전활철씨의 뒷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전활철씨는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라 술주정을 고스란히 지켜봤단다.

후배 장경호씨에게 존댓말을 꼬박꼬박 써가며 비위를 슬슬 건드렸다고 한다.

술 취하면 장경호씨 꼬장도 보통은 아닌데, 한 판 떠보자는 거 아닌가?
결국은 실구한 ‘호로자슥’이란 한마디에 장경호씨 성질이 폭발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쩌랴! 죽일 수도 살릴 수도...
그래서 날 데리고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전활철씨가 붙들려, 새벽 여섯시까지 시달렸다고 한다.
나중엔 억지로 택시 태워 사당동까지 보냈다지만,
그 과정에서 넘어져 두 사람이 머리를 찧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우야! 머리 아프다’고 했다는데, 아무쪼록 별 탈 없기를 바란다.

인사동 주당으로 컴백한 서정춘 시인의 화려한 입성식이다.
반갑기도, 징그럽기도, 표정관리 안 된다.





서정춘 ‘봄, 파르티쟌’


“꽃 그려 새 올려 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사진, 글 / 조문호














오늘은 인사동에서 할 일이 많아 바쁘다.
그 많은 사람들을 제켜 놓고, 오랜 인사동 흔적 찾아보는 일이 제일 먼저고,

그 다음에는 ‘유카리화랑’의 서정춘시화전과 ‘민예사랑’의 최선호전시에 들려야하기 때문이다.



맨 먼저 내가 붙들고 있는 인사동의 오랜 흔적을 찾으러 돌아 다녔다.
매번 보던 풍경이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꼼꼼히 살펴보니 살아남은 아스라한 이야기도 있더라.  

시멘트가 벗겨져 배가 터져 나온 담장의 흙과 돌에서 오랜 인사동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고,

어렵게 버티고 있는 오래된 전신주는 물론 여러군데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고 문영태 화백 미망인 장재순여사의 골동가게 ‘민예사랑’에서 최선호씨의 그림과

도예전을 연다기에 좀 의아했다. 그 좁은 공간에 있던 골동들은 다 어쩌고, 두 가지 전시를 하는지?

입구들 들어서니 200호 남짓한 꽃그림이 마음을 움켜잡더니, 주변의 소품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골동가게에서 갤러리로 왔다 갔다 하는 ‘민예사랑’의 변신술도 기막히더라.




세 번째는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유카리’에서 서정춘시인의 시화전을 열고 있었다.
서정춘시인이 누구인가? 노벨문학상에 목맨 주책시인보다 더 훌륭한 시인이다.

그 분의 시를 다시 한 번 새길 수 있어 좋았는데, 억지춘향 격의 작품도 있어 시를 모독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30여명의 화가와 사진가들이 참여했는데, 화가가 시에 빠져 그림으로 승화시킨 작품도 있더라.

 





네 번째는 '유카리화랑'에서 김진열씨를 만나 ‘시가연’에 갔더니, 신나는 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가연’은 시인은 물론 음악인과 예술가들이 어울리는 장소로, 인사동의 풍류를 만들어 가는 곳이다.

임방울선생의 판소리 '추억'을 우지용씨가 들려주었고, 그림 그리는 김진열씨의 창도, 명창 빰 치더라.

시와 소리와 춤이 함께 하는 곳, 그것이 인사동의 풍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직은 괜찮은 인사동이더라.

갑자기 할 일이 생기니, 힘이 절로 솟는 하루였다.


사진,글 / 조문호






























인사동이 노랗게 물들었다.


금빛인가? 똥빛인가?

돈이나 똥이나 초록은 동색이다

금덩이 같은 인사동이
똥덩이 될까 걱정된다.

인사동에서 서정춘 시인을 만났다.
오늘 떠 오른, 그의 시어가 궁금하다.


11월 17일 / 사진,글 : 조문호





















 

수요일만 되면 별 볼일 없어도 인사동에 나가고 싶어진다.

전시장들은 새로운 작품들로 교체되고, 거리에선 반가운 인사동 사람들을 쉬 만날 수 있어

모처럼 인사동 기운이 충천하기 때문이다.

지난 27일엔 사진가 변홍섭씨와의 오찬약속을 수요일로 잡아두어, 일찍부터 작정하고 나올 수 있었다.
변홍섭씨는 정선같이 한적한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며 자문을 구해왔으나

내가 사는 곳은 이미 관광지화 되어 추천할 수가 없었다.

‘툇마루’에 식사하러 가서는 음유시인 송상욱선생을 만났고,

‘귀천’에 차 마시러 가서는 민속학자 심우성선생을 만났는데, '귀천'엔 빈 자리가 없었다

인사동거리에서는 사진가 이갑철, 육명심씨, 시인 강 민, 이행자, 서정춘씨, 소설가 구중관씨,

서양화가 안창홍, 이종송씨, 미술평론가 윤범모씨, 사진평론가 최건수씨, 무이도 예술촌장 정중근씨,

예당국악원 조수빈원장 등 많은 분들을 만났다.

평소 인사동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기란 고작 한 두 사람에 불과한데,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분들을 만난다는 것은 그의 대박수준이다.

그러나 대개 술을 마시고 집에 가는 길이거나, 금주령이 내려 진 분들이 많아 술 한 잔 하자는사람이 없었다.

무더운 날씨의 낮 술에 취하면 힘들 것 같아 점심식사 때부터 사양했지만,
막상 그냥 지나치려니 맹숭하고 허전했다.
그래도 반가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니 여한은 없었다.

사진,글 / 조문호

 

 

 

 

 

 

 

 

 

 

 

 

 

 

 

 

 

 

 

 

 

 

 

 

 

 

 

 

 

 

 

 

 

 

 

 


김용문 막사발전이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지난 개막식에는 많은 분들이 참석했으나 꼭 보여야 할 분들이 여럿 빠져 아쉬웠다.

그러나 봄바람 살랑거리는 이 꽃 시절에, 한꺼번에 만나 뵙기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민 영선생은 김명성씨를 위한 성금을 내놓으며 "큰 보탬이 되지 못해 어쩌냐"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셨고,

무세중선생은 모두가 쉽게 동참하도록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며, 스스로 만원을 내기도 하셨다.

만나는 분마다 김명성씨 걱정뿐이었는데, 하기야 김명성씨만 있었더라면 막사발 잔치도 더 풍성했을 것이다.

 

물고기가 물 만나듯, 반가운 분만 만나면 인사도 하기 전에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못된 버릇이 있어 

내심 싸가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좀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란다.

그래도 파파라치는 아니잖아...

 

오프닝에 차린 음식들은 맛깔스럽기는 한데 전시된 사발 개수에 비해 푸짐하지 않았다.

'노마드'에 50인분의 음식을 예약해 두었으나, 미처 알지 못한 분들은 먼저 자리를 떠 버렸다.

대신 전시장에서 보지 못한 분들을 만나 늦은 시간까지 부어라 마시어라 즐길 수 있었는데,

결국 너무 많이 마셔 다음날 끙끙대야 했다. 

 

좌우지간 막사발 김두령 덕에 즐거웠수다.

 



 

 

 

 

 

 

 

 

 

 

 

 

 

 

 

 

 

 

 

 

 

 

 

 

 

 

 

 

 

 

 

 

 

 

 

 

봄바람 부는 인사동에 막사발 2014개가 전시되고 있다.

 

20여 년 동안 막사발만 고집해 세계에 퍼트려 온 도예가 김용문씨의 전시다.
이번 전시의 색다른 점은 터키제자들과 함께, 오늘을 의미하는 2014개를 구웠다는 점이다.
오는 18일까지 열리는 막사발전의 중요한 정보는 한 점당 5만원이라는 점과 개수가 많아

엄청 좋은 작품들이 많다는 점이다.

 
김용문씨는 5년 전 부터 터키 국립 하제테페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한국 도예를 가르쳐 왔다.

그래서 제자 도예가 (비르칸 악차, 투바 외즈칸, 에스라 아칙괴즈, 무하메트 테케신) 네 명을

데려왔고, 함께 전시도 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막사발 실크로드라는 이름으로 중국 산동성과 터키 앙카라 등지를 떠돌아 다녔으나

지난 해부터 전라북도 완주에 정착해 “세계 막사발 미술관”을 만들었다는데,

한 번 쯤 구경 갈 기회도 만들었으면 한다.

지난 12일 오후4시부터 ‘아라아트’3층에서 열린 개막식은 박인식씨 사회로 진행되었다.

무세중, 무나미선생의 행위예술과 국악연주가 이어졌으며, 윤여준, 민영 선생의 축사도 있었다.

개막식에 나오신 분으로는 참여 작가를 비롯하여 민 영, 심우성, 윤여준, 무세중, 서정춘, 송상욱,

김신용, 윤승길, 이청운, 박인식, 조준영, 이명희, 무나미, 편근희, 임경일, 노광래, 정영신, 전인경,

곽명우, 장경호, 강선화, 임헌갑, 황예숙, 박상하, 최일순, 명지혜, 유근오씨 등이다.

그런데 명단 적을 때마다 난감한 것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벌써 치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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