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식선생께서 인사동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서초동 자택으로 들어 가신지가 일 년이 훨씬 넘었다.

해마다 신년이면 가까운 분들 인사동에 불러 모아 오찬을 베풀었으나, 올 해는 그 모임도 갖지 못했다.

초여름에 한번 찾아뵌 후로 정영신씨를 통해 간간히 안부나 전해 들었는데, 병세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단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일 뿐인데, 소심한 성격이 병세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았다.

5-6년 전에는 우울증에 시달린 적도 있는데, 모두 생각의 병이고 마음의 병이다.

우울증에는 대마가 최고의 명약이라고 권했으나, 대마에 대한 선입견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해 바뀌기 전에 한 번 찾아 뵈어야 할 것 같아, 지난 19일 정영신씨와 서초동 자택을 방문했다.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자택에 들린 적이 있으나, 갈 때마다 내비에 의존해 잘 몰랐는데,

그 곳이 몇 달 동안 검찰개혁하자며 주말마다 쫒아 다녔던 검창청 옆이었다.

육개월 만에 뵌 선생의 모습은 더 수척하셨고, 사모님은 오히려 좋아진 것 같았다.
외출은 물론 책도 전혀 못 보시고, 사모님 귀가 어두워 대화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티브이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데, 잘 때마마 수면제에 의존해야하는 처지가 지겹다고 했다.

식탁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저 때가 가장 좋았던 꽃 시절이라고도 했다.

죽는 것도 어렵다며, 생에 대한 미련조차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정치적 견해는 여전하셨다.

“검찰청이 선생님 댁 지척에 있는 걸 미쳐 몰랐네요”라고 말했더니, 나더러 ‘집회에 왔냐?“고 물었다.

”당연히 와야지요“라는 나의 대답에 정치이야기는 하지 말자며 화제를 돌리셨다.

그런데, 또 하나 놀란 것은 선생님댁 거실과 연결된 정원이 연립 주택 공용이 아니고 전용 이었다.

연립주택에 그렇게 넓은 정원이 조성된 것도 믿기지 않았는데. 한 쪽의 큰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선생님께선 “얼마 전만해도 손자들이 저 곳에서 놀았는데,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다”며 세월의 빠름을 안타까워했다.




한정식 선생은 사진가 이전에 시인이었다, 그리고 교육자이고 이론가였다.

선생의 이름자에도 고요할 정“靜”자가 들어 있지만, 가히 스님 못지않게 불가와의 인연도 깊다.

시적 감수성과 불가의 초월적인 명상세계가 어우러져 선생만의 독창적인 사진세계를 이룩했지만,

이젠 아무 미련도 없어 보인다.




선생께서는 재력이나 명성은 죽고 나면 다 부질없는 것이라 즐겁게 사는 것이 최고라고 말씀하셨다. 

죽고 나서의 명성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명성 때문에 마지막까지 안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황혼기의 삶을 여유롭게 누릴 수 있는 여건은 되었건만, 건강이 받쳐주지 못하니 어쩌겠는가?

아들과 며느리가 의사건만, 마음의 병은 고칠 수 없는 모양이다.




파출부의 음식솜씨가 입맛에 맞지 않아 점심 한 끼는 늘 외식을 한다고 하셨다.
같이 밥 먹으러 가자며 생선구이 전문 식당으로 안내했는데, 잔 걸음이지만 걷는 데도 지장 없고 음식도 잘 드셨다.

그 정도면 외출이라도 가끔 하시면 저녁에 잠들기가 훨씬 쉬울 것 같건만, 소심한 성격이라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아프다.
내년 봄에는 인사동으로 가까운 지인들 불러 모아 생신 잔치라도 한 번 마련했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옛 삶의 원형을 간직한 이를 정직하게 담아 낸 육명심의 '백민'




사진가 육명심(陸明心)선생의 사진집 『백민』이 열화당에서 재출간됐다.

2011년 발행된『백민』사진집에서 사진이 일부 추가 되거나 교체되어, 새로운 판형의 디자인으로 나온 것이다.

윤세영씨의 글 "이 땅의 사람들, 백민으로의 귀환"을 영문으로도 수록했다.


사진가 육명심은 ‘예술가의 초상’ 연작을 마무리할 즈음인 1970년대말 ‘백민(白民)’ 연작을 시작했다.

예술가들과 밀착해 작업하며 그들 역시 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 보였고,

자연스레 이 땅의 사람들 중 가장 소박하고 진솔한 민초들을 제대로 기록해야겠다 다짐한 것이다.

이는 훗날 ‘백민’과 함께 삼부작으로 불리는 ‘장승’ ‘검은 모살뜸’ 연작으로 이어진다.


모두 낮은 곳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지탱하는 기층민들의 얼굴이 담겨 있지만,

‘백민’은 삼베나 모시옷 차림의 촌로, 박수와 무당ㆍ사찰에 기거하는 스님ㆍ아기를 업은 아낙네ㆍ

무뚝뚝하게 앉은 노부부 등  우리 옛 삶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1980년대의 한국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백민’ 시리즈는 수백 년간 이어온 전통적인 농경사회 마지막 모습의 증거가 되는 소중한 기록이다.

사진가 육명심선생의 사진 속 인물 특징은 정면성이다.

카메라에 무심한 듯 하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는 할머니와의 눈 맞춤은

그 후 사진가가 카메라 앞에 선 인물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라포(rapport)’를 형성하는 작업으로 전개된다.

여기에서 정면성은 단순한 눈 맞춤(eye contact)에 그치지 않는 내면과의 소통을 의미하고,

그 사진을 바라보는 관람객 또는 독자와의 눈 맞춤으로 확장된다.

다른 하나는, 인물을 존재케 하는 현실공간에 중점을 두고 시간과 함께 주위 환경과 동화된 인물을 보여준다.

자신의 집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것처럼 편안한 할머니와 고목의 조화는 마치 일체를 이룬 듯 자연스럽다.

또한 ‘백민’ 연작에서 자주 나타나는 영적이고 신비로운, 무속적이고 토착종교적인 분위기가 이 사진에도 감지된다.

그리고, 이번 책에 새로 추가된 사진들에는 정면성에서 벗어난 사진들이 꽤 많다.

정면성이 깨진 사진을 의도적으로 함께 섞어 놓아, 시선이 어긋난 인물들과도 다층적 교감을 시도한다.

'백민'을 재출간하는 육명심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농경사회의 마지막 세대다.

지난날 원시인들이 바위에 암각화를 남기는 심정으로 우리 시대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았다”

육명심 사진집 I 백민 I 열화당 I 2019년 10월 20일 I 180쪽 I 정가 90,000원




[스크랩 / 박재송사진]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성난 민심이 서초동 검찰청 앞을 가득 메웠다.
‘사법적폐청산 범국민 시민연대’에서 개최한 제7차 검찰개혁 촛불문화제'는 당초 십만명을 예상했으나
그 보다 열 배나 되는 백만 여명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고 한다.
정치검찰의 표적수사와 그들이 흘린 정보를 받아쓰는 언론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성공적인 촛불집회를 점치기는 했으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였다.


[스크랩 / 오마이뉴스, 권우성기자]

그동안 보름넘게 끌어온 감기몸살로 꼼짝 못해 이번엔 꼭 나가기로 다짐했으나,
몸 추스르기 위해 전 날 정영신씨 따라 봉화장에 간 것이 무리수였다,
촛불집회가 있는 날 자리에서 일어나다, 한쪽 다리가 힘을 쓰지 못해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스크랩 / 오마이뉴스, 권우성기자]

그 동안 전시나 문상을 가겠다는 약속조차 번번이 지키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구급차에 실려서라도 갈 것이라고 큰 소리쳤으나, 또 헛소리한 셈이다.
결국 이불 밑에서 만세 부른 꼴이 되고 말았다.
하기야! 그 많은 인파에 늙은이는 나오지 말라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스크랩 / 박재송사진]


박근혜 탄핵이 1차 촛불혁명이라면, 검찰 적폐를 척결하라는 이번은 2차 촛불혁명"이다.
이제 정치 권력화 된 검찰의 대 수술은 피할 수 없는 길이 되었다.
‘공수처’ 설치와 함께 검찰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물갈이해야 한다.



[스크랩 / 안창홍작]


지금 문제를 만드는 윤석렬 검찰총장만 해도 검찰조직이 얼마나 섞었는지 잘 보여주지 않는가?
윤석렬 검찰총장은 현 정권에서 검찰개혁을 위해 민정수석이었던 조국 장관이 내 세운 인물이었다.
그동안 정치권력에 얼마나 알랑방귀 뀌었으면, 그를 믿고 맡겼겠는가?
사실 검찰총장이 대통령을 배반하고 '검찰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나 마찬가지다. 


[스크랩 / 이정환 사진]
 
이제, 검찰이 제 자리에 서지 않고는 절대 촛불이 꺼지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칼 자루는 현 정권이 잡고 있으니, 국민들의 강렬한 요구를 거역할리 없다,
더 이상 국론을 분열시키는 사법적폐를 매듭 짖고, 산적한 국정에 전념하기 바란다.


[스크랩 / 성유나 사진]

그 날 밤늦게 SNS에 올라오는 사진으로 현장 분위기를 감지했는데, 짜릿한 감동이 일었다.
'서울중앙지검'을 가로지르는 8차선 대로를 가득 메운 인파에 놀란 것이다.
‘광화문미술행동’ 팀에서 판화를 찍어 주거나 서예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도 보였고,
그 날 현장을 지킨 반가운 분들의 사진도 여러 장 올라 와 있었다.


[스크랩 / 김진하 사진]
 
그러나 현장에서 사진을 찍지 못했으니, 올릴 사진이 없어 난감했다.

부득이 정영신씨가 찍은 사진을 여러 장 빌리기도 하고, 언론사나 지인들이 올린 사진들을 양해없이 스크랩했다.
도적질 소식이나마 검찰개혁을 위해 널리 양해해 주길 바란다.


[스크랩 / 이정환 사진]


이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국민의 명령이다,

“공수처를 설치하라. 검찰조직을 개편하고, 부패 검찰을 처단하라”




[스크랩 / 김진하 사진]


사진 / 오마이뉴스 권우성기자, 박재송, 정영신, 김진하, 이태호, 이정환, 성유나 /그림 안창홍작 / 글, 조문호 '




[스크랩 / 김진하 사진]

[스크랩 / 이정환 사진]

[스크랩 / 이태호사진]

[스크랩 / 이태호사진]

[스크랩 / 이태호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지난 15일 사진가 정범태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너무 늦게 페북에서 접했습니다.
그것도 장례를 다 치루고 나서야 연락이 왔답니다.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 조용히 치루라는 유언을 유족이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정범태선생이 누구십니까?
한국 사진계의 마지막 남은 전설 아닙니까?
투철한 기자정신에 잠시도 카메라에서 손을 놓지 않았던 분입니다.
선생님이 기록한 4,19 발포 사진을 비롯한 많은 기록들이 한국사진사의 중요한 자리를 메웠습니다.




스스로를 내 세우기 싫어하는 선생님의 강직한 성품은 잘 알지만,
인간성이 메말라 가는 현실에 선생님을 추억하며 명복을 빌 수 있는 마지막 자리는 만들어 주셔야지요.




하기야! 몇 년 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도, ‘한미사진미술관’의 회고전도 다 거절하셨지요.
사진인이라면 못해 안달하는 전시들도 사양하셨는데, 어찌 선생님의 고집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한 번도 사진권력에 기웃거리지 않으며 평생을 욕심 없이 사셨는데, 그렇게 훌쩍 떠나셨네요.




사람이 태어 나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지만, 꽃 한 송이, 술 한 잔 올리지 못한 게 더 가슴 아픕니다.




내년 일주기에는 사진인들이 힘을 모아 제대로 된 유작전과 함께 추모제라도 올려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모든 것 잊으시고 편안하게 잠드십시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조문호 합장




선생님을 추억하기 위해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있는 사진과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들을 한데 모았습니다.































[스크랩 / 조선일보 2019,9,18 / 정상혁기자]


[발자취] 4·19, 5·16… 격동의 현장에 그의 카메라가 있었다


보도사진가 정범태씨 별세… 1956년 조선일보 입사, 기자 활동
고대생 피습, 귀성객 압사 사고… 현대史 숱한 특종 사진들 남겨


보도사진가 고(故) 정범태.
보도사진가 고(故) 정범태.


1960년 4월 18일 서울 종로 천일백화점 앞에서 3·15 부정선거를 비판하며 가두 시위 중이던 고려대 학생들은 훗날 정치 깡패로 밝혀진 괴한들에게 무참히 두들겨 맞았다. 현장에 조선일보 사진기자 정범태가 있었다. 위압적인 깡패들 탓에 다른 내외신 기자들은 쉽사리 카메라를 들지 못했다. '이런 현실을 찍지 않으면 살아갈 의미가 없다. 맞아 죽더라도 찍어야 한다.' 셔터를 누르고 냅다 회사로 달렸다. 다음 날 조선일보 사회면에 실린 이 사진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결정적 한 방으로 평가받는다.

보도사진가 정범태(91)씨가 지난 15일 별세했다. 유족 측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3일장을 마친 후 지인 몇 명에게만 소식을 알렸다. 시신은 가톨릭대 의과대학에 기증했고, 추후 4·19 민주묘지에 안치할 예정이다.

평북 선천에서 태어나 외삼촌이 살고 있던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상선에서 일하며 유학했고, 광복 직후 귀국했다. 당시 외삼촌이 일제 카메라 한 대를 선물로 건넸다. 이것이 인생을 바꿨다. 사진기를 목에 둘러매고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촬영했다. 전쟁통에 피란 가면서 보따리에 제일 먼저 챙긴 것 역시 카메라였다.

6·25전쟁 당시 육군 공병대 사진기록 문관으로 일했고, 1956년 조선일보 사진기자로 입사한 그는 이후 40여년간 한국일보·세계일보 등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하며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렌즈에 담아냈다. 1960년 서울역 설 귀성객 압사 사고 등 특종 기자로 유명했으나 1962년 강화도 전등사에서 깡패들이 행패를 부려 관광객이 쫓겨나는 내용의 사진을 보도했다가 국가 위신 손상 등의 이유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1년 복역하는 등의 고초도 겪었다.

①1960년 4월 18일 고려대생 피습 현장 특종 사진. ②1960년 1월 26일 서울역 압사 사고 특종 사진. ③1961년 경기고등군법재판소에서 촬영한 ‘결정적 순간’.
①1960년 4월 18일 고려대생 피습 현장 특종 사진. ②1960년 1월 26일 서울역 압사 사고 특종 사진. ③1961년 경기고등군법재판소에서 촬영한 ‘결정적 순간’.


죽은 닭과 산 닭을 나란히 찍어 1959년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한 '생사(生死)'가 국내 작가로는 처음 입상하는 등 예술성도 인정받았다. 한 장면으로 긴 여운을 곱씹게 하는 대표적인 사진으로 1961년 5·16 직후 경기고등군법재판소 공판에서 촬영한 '결정적 순간'이 자주 거론된다. 고개 숙인 죄수복 차림의 젊은 여자, 그 앞에 선 두세 살짜리 꼬마가 여자의 손을 잡고 있다. 판사는 여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 이 강렬한 흑백사진은 일본 아사히신문 주최 국제사진살롱 '10걸작' 중 하나로 선정됐다.

1993·1995년 두 차례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은퇴 후에는 한국 전통 춤꾼의 사진과 행적을 정리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2006년엔 '사진인생 50년'을 주제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생전에 "잔머리 굴리지 말고 사진을 찍어야 역사와 사회가 바뀐다"는 말을 남겼다.





로버트 프랭크가 향년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현대 사진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진계의 거장 로버트 프랭크가 별세했다. 향년 94세.
1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로버트 프랭크는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인버네스의 한 병원에서 지난 9일 눈을 감았다.
1924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그는 18세부터 카메라를 들었다.

영화 스틸 사진가로 활동하던 그는 1947년 미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그가 본격적으로 일반 대중에게도 알려진 때는 1950년 중반 이후다.

로버트 프랭크는 구겐하임 재단 기금을 받아 미국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고

1958년 ‘아메리카인들’(The Americans) 사진집을 펴냈다.

로버트 프랭크가 펴낸 사진집은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당시 자본주의 사회 중심으로 최고조를 달리고 있던 미국의 가난과 인종차별,

어긋난 애국심 등을 가감 없이 프레임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사회를 오로지 여행자적 관점에서 미국 주류들이 무관심했던 것들을 박제했다.


로버트 프랭크, 호보큰에서의 거리 행진, 1955


당대 사진계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그의 사진집을 보고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충격”이라고 평했다.

미국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을 보고 반감을 가지는 미국인들 역시 적지 않았다.

로버트 프랭크는 ‘아메리카인들’ 출간 후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사진계로 복귀했다.

그는 1972년 자전적 성격의 사진집 ‘나의 손금’(The Lines of My Hand), 1976년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를 펴냈다.

로버트 프랭크에게는 딸과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먼저 사망했다.

딸 안드레아 프랭크(Andrea Frank)는 1974년 12월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고

로버트 프랭크는 딸을 기억하기 위해 콜라주 형식의 ‘라이프 댄시스 온’(Life Dances on)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 파블로 프랭크(Pablo Frank)는 림프종에 걸려 정신병원을 오가다 1994년 11월 사망했다.

이후 로버트 프랭크는 죽음과 관련한 작업을 이어갔다.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은 노출과 구도, 포커스를 제대로 맞추지 않고 사진 속 메시지를 강렬하고 상징적으로 담는 것으로 유명하다.

파격적인 형식은 담은 그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현대 사진의 새로운 방향성을 부여했다는 평을 받았다.
 
[스크랩] 스포츠경향 & 경향닷컴




Paul Massey

Marty Feldman filming Yellowbeard 1984

The London Evening Standard



외국 사진기자 보도연감을 뒤적이다 아주 행복해 보이는 사진 두 장을 만났다.
비록 연출에 의한 표정이지만, 표정과 자세가 자연스러워 마음이 따뜻해진다.
갑자기, 나도 이처럼 바보스러운 표정으로 낄낄거리고 싶어진다.

기계처럼 끌려 다니며 거룩한 표정으로 사는 사람들 보면 도대체 누구를 위해 사는지
불쌍해 보일 때가 많다. 그들이 볼 때는 오히려 내가 불쌍해 보이겠지만...
폴 메시의 사진처럼 혼자 비실거리며 지나가면 아마 미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그런데, 술이 한 잔 들어가면 그 무장이 해제되어 다들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것이다.
몸이 아파 보름동안 술 한 잔 마시지 못했는데, 오늘은 한 잔 빨며 혼자 낄낄거릴 란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열나게 하고 날씨까지 부채질하지만, 그냥 웃고 살자.


글 / 조문호


Nick Rogers

Lief Bruylant, mural artist. 1987

The Times



[사진 스크랩] ASSIGNMENTS 1 

THE PRESS PHOTOGRAPHERS’

ASSOCIATION YEARBOOK


리틀 포레스트 2

엄효용展 / UMHYOYONG / 嚴孝鎔 / photography
2019_0711 ▶︎ 2019_0723 / 일요일 휴관


엄효용_광나루 한강공원 미류나무 봄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120×90cm_201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90102a | 엄효용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9_0711_목요일_05:3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요일_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반도 카메라 갤러리

BANDO CAMERA Gallery

서울 중구 삼일대로4길 16 반도빌딩 2층

Tel. +82.(0)2.2263.0405

www.bandocamera.co.kr



중첩된 이미지 숲을 탐문하는 이유 ● 한 사람의 몸에는 몇 개의 자아가 존재할까? 공적인, 개인적인, 사적인 혹은 규정할 수 없는 또 다른 것일 수 있다. 여러 개의 자아는 중첩과 분할을 거듭하면서 마치 칼집의 칼을 꺼내들 듯 상황에 대처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 대해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모호함으로 궁색해질 때가 많다. 하지만 상대는 둔갑술로 우리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로만 설명이 안되는, 팍팍한 삶의 조건과 대처법이 몇 개의 자신으로 내밀어 보여줄 뿐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하나가 아닌 것에 하나로만 인식하려는 타자의 안이한 욕망과 편리함이 다양한 정체성, 자아를 구속하는 게 아닐까. ●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대전제는 동서고금의 화두다. 진짜를 밝히려는 인간의 부단함은 지칠 줄 모른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대신할 때 우리는 '실존(實存)'이라 말하기도 한다. 본질, 진짜, 실존을 정의하고자 하는 이 지속성은 결국 사진가 엄효용 에게까지 이르렀다. 무던히 차창 밖으로 흐르는 나무의 형상이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들이 닥 친 것이다. 작은 화분을 모으는 취미 생활에 그치지 못한 그는,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나무의 이면적 이미지네이션을 규명하게 된 것이다.


엄효용_노을해안로 가이즈향나무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80×142cm_2016

엄효용_담순로 메타세쿼이어 가을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80×142cm_2016

엄효용_소월로 은행나무 여름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120×90cm_2014

엄효용_잠실 한강공원 이팝나무 봄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120×90cm_2019

엄효용_잠원고수부지느릅나무 가을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120×90cm_2015


그의 사진은 의도했건 안 했건, 분명히 나무 그 이상의 나무 혹은 숲을 이뤘다. 100장에서부터 200장에 이르는 사진을 한 프레임에 중첩함으로써 나무의 생물학적 속성을 넘어 고도의 회화성으로 치환 시켰다. 도로 가장자리에서 단상으로 존재하던 나무는 너무 평범하고 익숙한 모습이어서 우리의 관심에서 쉬 멀어질 수밖에 없을 텐데 수십, 수백 그루를 한 그루에 묶어두니 '저건 뭐지'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 작가는 이 사진들을 작업하면서 논리적 의도보다는 정교한 촬영과 후속 컴퓨터 작업을 통해 자신의 작은 숲(리틀 포레스트)을 만들고자 했다. 그 숲은 도시를 중심축으로 자신만의 정원을만드는 과정이었다. 집 안의 작은 화분으로는 감정이입이 어려웠을 것이다. 진짜 숲보다 더 완고한 숲의 정원을 마음에 심고자 했다. 어쩌면 사진가로서 표현의 갈증을 넘어 삶의 중심을 다시 세우고자 한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예술이 자신을 깨우치는 결과물의 흔적인 것처럼, 다중의 자아가 아닌 궁극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의 안내판처럼 엄효용의 사진은 단단하게 서 있다.


엄효용_조정경기장 은행나무 가을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40×30cm_2015

엄효용_종합휴양지로 메타세쿼이어 여름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60×45cm_2015


현재 그를 찾아 온 도시의 숲 이미지는 불안한 실존의 종착지가 될 수 없다. 예술은 문제점 을 제시할 수는 있어도 영혼을 치유하지는 못한다. 사진가로 살아가는 엄효용에게 오늘의 사진은 완성한 자아도 실존도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다면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계속될 것이고 여러 개의 자아처럼 그만큼의 숲을 만드는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 언젠가 그의 손에서 카메라가 사라지고 자신의 눈과 마음이 하나 되어 그리는 숲이야말로 진정 그가 이루려는 숲이다. 그 숲에 가기 전에 그가 가꾼 형형색색의 숲을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 육상수


엄효용_죽향대로 메타세쿼이어가을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60×45cm_2015

엄효용_허만석로 벚나무 봄_코튼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60×45cm_2018


여러해 전 강남역 근처를 지나갈 때 부서지는 햇살 아래 찬란한 하얀 꽃을 품은 가로수들... 그 아름다움도 잠시... ● 나의 뒤통수는 무엇인가에 맞은 충격으로 묵직했다. 왜 그 동안 보지 못했을까? 그 동안 내가 이 길로 다니지 않은 걸까? 이 가로수들은 올해 심어진 걸까? 이렇게 크고 많은 나무들을 보지 못한 걸까? ● 그렇다. 생산적인 행동만이 내 지각의 중심부에 있었고 하얀 꽃이 피어나면 쌀밥을 담아 놓은 것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이팝나무는 배경으로 흘려보냈기에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 이전에도 여여하게 우리 곁에 존재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보려하지 않았을 뿐이다. ● 우리 곁에 항상 존재하는 자연... 나무, 하늘, 공기... 등을 내 지각의 중심부에 가져올 때 삶의 황홀경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 무한반복 되는 평범한 일상에조금 더 민감하게 깨어있을 수 있다면 ● 햇살아래 부서지는 찬란한 꽃을발견할 것이다. ■ 엄효용



Vol.20190711c | 엄효용展 / UMHYOYONG / 嚴孝鎔 / photography



사진가 김병태



사진가 김병태씨의 사진전 '더 페이스(The Face)'가 인사동 ‘갤러리 그림손’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15일 아무런 정보도 없이, 사진가 양재문씨를 만나려 김병태씨 전시가 열리는 인사동 ‘갤러리 그림손’을 찾았다.

마침 작가가 자리에 있어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나만 몰랐지 유명사진가였다.

25년 전 케냐에 들어가 사업을 벌인 동포로, 카메라를 잡은 지가 20여년이 된 베테랑이었다.

아프리카 생활에서 느낀 자연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그만의 시선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동안 전시한 여러 권의 사진집도 살펴볼 수 있었다. 

‘Wild Emotions’에는 아프리카의 때 묻지 않은 자연에 어우러진 동물의 세계가 절제된 방법으로 포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Black Mist’는 새로운 시각으로 형상화한 아프리카 풍경이었다.

지평선 너머로 점들이 꿈틀거리는 신비로운 초원풍경은 동이 트기 직전의 동물 행렬이라 했다.

희미할수록 자세히 들여다보는 심리는 점으로 이어진 동물의 행렬에 끌려들게 만들었다.

흐릿하고 엷은 한 줄기 빛으로 담아 낸 사진들이 사뭇 원초적이며 몽환적이었다.

첫 번 째의 사진집이 멀리 있는 동물의 세계를 끌어당긴 작업이라면, 두 번째의 사진집은 대상을 밀어 낸 작업이었다.






전시되고 있는 ‘더 페이스(The Face)'는 또 다른 형식의 사진으로 작가의 끈임 없는 창의력을 엿볼 수 있었다.

부조(浮彫)처럼 검은 배경에 사람들 얼굴만 박힌 강인한 인상들이 시선을 압도했다.

흑인들의 얼굴만 부각시켜 그들의 표정에 집중시킨 것이다.

포토샵으로 얼굴을 편집한 줄 알았으나, 검은 복장의 케냐 인들을 검은 배경에 세워 찍었다고 한다.

그 사람들의 표정에 집중시키기 위한 철두철미한 작업 방편이었다.

모델이 되어 준 사람들은 사진가 김병태씨와 함께 생활하는 이웃이거나 가까운 친구라 했다.

낯선 흑인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처럼 웃기도 하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는 평범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작가는 그 사람들의 감정을 절제하거나 끌어내어 때로는 기쁨을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사색에 빠져들게도 만들었다.






사진 뒤를 가린 검은 공간은 텅 비어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음이 아니라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 숨겨진 빈 공간이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고, 무한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묘한 심리적 변화를 일으켰다.

여지 것 아프리카를 주제로 한 대개의 사진들은 이방인의 시각에서 본 장면이었다.

아프리카가 이방인에게 신기하듯, 이방인의 모습과 문명 또한 현지인의 시각에서는 이색적이긴 마찬가지다.

대개의 사진인들이 현지인들의 시각은 철저히 무시하고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찍어 내 보인다.

김병태씨의 사진들은 그런 선입견을 배제한, 기존의 아프리카 사진에 대한 개념 자체를 파괴한다.

대상에 대한 깊은 애착은 그만의 진한 잔향으로 향기를 뿜어낸다.






작가는 인종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은 버려 달라고 한다.

이 작업을 통해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주변 사람들의 여러 감정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인물 작업은 빛을 배제한 어둠 속에서 그들의 기쁨과 고뇌를 끄집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인사동 ‘갤러리 그림손’(02-733-1045)에서 열리는 ‘더 페이스(The Face)'전은 24일까지 이어진다.



글 / 조문호



친구 지간인 양재문씨와 함께한 김병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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