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 샘터 2019년 7월호]


이 달에 만난 사람 : 조문호


                 가장 낮은 곳을 올려다보는 빈자(貧者)의 카메라




서울역 건너편 동자동 언덕배기엔 낮게 엎드린 빈자(貧者)들의 쉼터가 있다. 서울 도심에 몇 남지 않은 쪽방촌 골목. 오랜만에 다시 만난 다큐멘터리 사진가 조문호(73) 작가는 그 사이 쪽방촌 생활에 순조롭게 적응한 듯 전보다 더 밝고 편안해 보였다. “보기는 이래도 생활하는 덴 불편하지 않아요. 매달 70여만 원 씩 나오는 기초수급비에서 방값 23만 원을 내고도 돈이 남으니 걱정할 게 없지요. 월세 걱정하는 이웃들한테 어쩌다 만 원씩, 이만 원씩 집어줘도 나 혼자 사니까 충분히 지낼만합니다.”


동자동 일대엔 이처럼 보증금 없이 20만원 남짓한 월세만 내고 사는 쪽방이 천여 개나 밀집돼 있다. 작가가 세 들어 있는 다세대주택 또한 50여 개의 쪽방 이 벌집처럼 들어차 있는 4층짜리 건물이다. 층마다 복도 양편으로 나란히 도열해 있는 방들, 바가지로 물을 퍼 뒤처리를 해야 하는 공동 화장실, 한겨울에 도 온수가 나오지 않는 열악한 환경에 아랑곳 없이 작가는 만 3년째 쪽방촌 이웃들과 어울렁 더울렁 살 부비며 즐겁게 사는 중이다. 가진 건 비록 1인용 침대 와 컴퓨터 책상만으로 꽉 차는 1.25평짜리 작은 방 하나뿐이지만 작가에게선 여전히, 가진 게 없어 행복한 삶의 역설을 수긍하게 하는 진심이 느껴진다.

 

밖에서 볼 땐 초라하고 거칠어 보일지 몰라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정이 더 많습니다. 먹을 게 생기면 자기보다 없이 사는 사람부터 챙겨주려는 인정이 살아 있는 곳이지요.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정겹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아 가끔씩 나도 모르게 동네 풍경, 동네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들곤 합니다.”

 

작가의 동자동 생활은 서른 해 넘게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찾아다니며 진실의 순간을 탐닉해온 이력과 자연스레 겹쳐진다. 그는 오래 전 서울의 대표적인 윤락가인 전농동 588번지를 특유의 정감 어린 시선으로 담은 사진연작 홍등가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다. 청량리 홍등가의 일상을 기록한 작품들로 1985년 동아미술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력 때문에 어떤 이들은 그가 애초에 쪽방촌 사진 작업을 위해 이곳에 들어왔을 거라고 넘겨짚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형편에 맞춰 살 집을 구해온 것뿐이라는 말로 세간의 얄팍한 호기심을 일축해버린다. “이왕 여기 온 김에 쪽방촌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생각도 없진 않았지만 같이 생활하다보니 그것조차 다 내 욕심일 뿐이란 생각이 들어 계획을 접었습니다. 사진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상대가 꺼려하는 사진은 안 찍는 것만 못합니다.”

 

작가라면 구미가 당길 법한 소재 앞에서도 담담히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결의는 선험(先驗)에서 나온다. 윤락가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작품으로 상을 받았다는 후회가 밀려와 뒤늦게 그곳에 6개월간 머물며 다시 작업한 청량리588의 뒷얘기가 그리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월간 사진편집장을 거쳐 동아미술제, 86아시안게임 기록사진전 수상으로 사진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할 때도 그의 관심은 오직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현장 속으 로 뛰어들어 일체의 연출 없이 대상과의 유대감을 직관으로 포착하는 작업방식을 이해 못하는 동료들도 적진 않았다. 누군가는 소재주의라는 비난을 쏟아 냈고, 그에 편승한 언론에서는 매춘(賣春)이라는 자극적인 이야기만 부각시켜 애써 기록한 사진의 가치를 깎아내렸다. 그 소란통에서 급격한 산업화 시대의 민낯을 예리하게 포착한 작가의 노력도 얼마쯤 빛이 바랬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의 역사도 기록해야 하지 않느냐, 그 작업을 누가 할 거냐고 물으면 모두들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시대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럴수록 지금껏 눈여겨보지 않는 대상을 찾아내 연출하지 않고 대상의 마음이 전해지도록 찍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좋은 그림을 만들기 위해 장면을 연출하거나 화려한 촬영기법과 렌즈를 이용해 현실을 포장하려 한다면 다큐멘터리와는 안 맞습니다.”


 

한때 그에게도 농협 직원, 부산 광복동 학사주점 사장으로 세속의 화려함을 좇던 시절이 있었다. 30대 후반, 주점 단골손님이던 다큐멘터리 1세대 사진가 최민식 선생에게 선물 받은 사진집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도 가진 게 많아 불행한 삶에 허덕이고 있을지 모른다.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하며 부산 자갈 치시장의 인간 군상을 포착한 선생의 흑백사진들은 평범했던 삶을 뒤흔든 태풍이었다. “휴먼이란 제목의 사진집인데 머리가 멍해집디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힘이 강하다는 걸 알게 된 거지요. 그길로 나도 사진 한번 해볼 거라고 결심하고 부산을 떠나 서울 생활을 시작했어요. 뒤늦게 사진 공부 를 하게 됐지만 월간 사진에서 일하며 배운 게 도움이 많이 됐어요. 대상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던 시기였지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돌려놓은 선생의 영향은 그의 사진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선생은 내 특징은 스냅숏 기법이다. 상대가 의식하기 전에 찍을 수 있는 그 기법이 있어야 연출을 안 하고 찍을 수 있다. 사진을 찍는다면서 요란한 기법만 늘고 머리와 가슴은 텅 비어가는 게 끔찍이 싫다. 혼이 쑥 빠져 버린 사진은 의미도,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가르쳤다. 선생을 통해 연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진실에 눈뜨기 시작한 작가 또한 그 뒤론 발을 동동거리며 부지런히 삶의 현장을 쫓아다녔다. 사진작가로서의 명성을 높여준 <87민주화항쟁> <동강 백성들> <태풍 루사가 남긴 상처> <두메산골 사람들> <인사동 그 기억 풍경전> 등이 누구보다 뜨겁고 치열하게 살았던 그 시절의 산물이다.

 

작가의 사진은 사진은 무조건 아름다워야 한다는 기존의 사진관을 간단히 묵살할 만큼 반골기질이 넘친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이면에 눈길을 주고 누구라도 관심 둘만한 소재, 화려한 촬영기술이 필요한 주제엔 눈도 돌리지 않는 다큐멘터리 작가로서의 고집도 여전하다. “옳지 않은 일엔 쓴소리를 참지 못하니 인간관계가 좁아지는 게 걱정이지요. 얼마 전에도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제가 찍은 천상병 시인의 사진을 허락도 없이 남에게 인화해준 게 화가 나 일 년간 안 만나겠다고 선언해 버렸어요. 사과 한마디 했으면 풀어졌을 텐데 사진 한 장 가지고 뭐 그렇게까지하는 태도에 속이 상합디다. 사진도 엄연히 주인이 있는 물건인데 허락 없이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서글펐어요.”

 

그도 이젠 서서히 체력을 안배해가며 작업할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작가는 동자동에 들어온 뒤에도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찰나의 감동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손바닥만 한 콤팩트카메라를 종일 손에서 놓지 못한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찰칵 찰칵, 셔터부터 누르던 직업병 덕분에 작가의 카메라엔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시인 천상병,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극작가 겸 문필가 박이엽 선생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고 간 숱한 문화예술인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또한 수십 년 간 있는 그대로의 삶을 성실하게 수행해온 기록의 힘이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껏 무시로 드나드는 인사동과의 행복한 추억은 인사동 사람들이란 개인 블로그에 담겨 있다. “30여 년 넘게 쌓인 사진 자료들이 조금 더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동료 다큐멘터리 작가들과 함께할 수 있는 협동조합 같은 걸 만들어볼까 고민 중에요. 다큐멘터리 사진은 돈이 안 된다는 인식 때문에 작가가 죽고 나면 유족들이 그동안 모인 자료를 그냥 불태워 버리는 경우도 흔한데 이제라도 귀한 기록들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지요.”

 

비좁은 쪽방촌 골목을 빠져나오며 가난한 다큐멘터리 작가로 살아온 게 후회되지 않느냐고 객쩍은 소리를 건네자 작가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으니 후회는 없다며 웃는다. 해야 할 일들이 아직 많은 그에게 괜한 걸 물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글 이종원 편집장 / 사진 최순호





성북동에 있는 갤러리카페 ‘탭하우스 F64’에서 이재정씨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 7일 사진가 이정환씨의 문자메시지에 영문도 모르고 나갔는데, 이재정씨 사진전 오프닝이 열리고 있었다.






카페에는 이재정씨를 비롯하여 사진가 이정환, 임성호, 변성진, 권 홍, 이미리씨 등 여러 명이 모여 있었다.






임성호씨의 사회로 이재정씨 작가의 변과 이정환씨 건배사도 있었다.
작품들은 제주4,3에 관한 사진이었다.






탁자에는 맥주와 피자가 놓여 있었으나, 통풍 때문에 맥주를 마실 수가 없었다.
마침 이정환씨가 페트병에 담긴 소주를 준비해 마시고 있었다.
‘제사보다 제사떡에 관심이 많다’는 말처럼 소주만 축냈다.






그런데, 처음 가본 ‘탭하우스F64'는 사진가 변성진씨가 운영하는 갤러리카페로 소품전 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한성대 입구역 5번 출구에서 300미터정도이니 교통도 편리한 편이었다.






실내장식에 카메라나 확대기 등 사진을 상징하는 장식이 많았다.

사진가의 고충이 느껴지는 가게인데, 나 역시 오래전에 술집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

사진을 이용한 장식은 일반인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감격시대’에서는 해방되어 서대문교도소에서 만세 부르며 나오는 대형사진을 메인 사진으로 활용하였고,

‘이별의 부산정거장’에서는 판자 촌 같이 만들어 임응식선생의 피난 시절 사진으로 장식하였으나,

술집은 손님 자체가 장식이었다.





처음부터 손님이 많으면 계속 몰려오지만, 없는 집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그래서 매상에 도움 되지 않는 사람이라도 젊은 여인들을 불러 모아 술집에서 노닥거리게 만들었다.

실내장식 같은 사업수단이 손님을 끌어들이는데 반을 차지한다면 반은 운이 따라야 한다.






이차로 이정환씨를 따라 지척에 있는 ‘혜화 칼국수’로 갔다.
약 8년 만에 찾아 간 맛 집이지만, 육수 맛은 변함이 없었다.
임성호, 이미리씨 등 네 명이 갔으나 술을 과음한 것 같았다.





술이 취해 지하철역까지 무임승차 한다며 청소차 뒤에 메달렸는데,

청소부에게 들켜 내려와야 했다.
왜 이리 술만 취하면 나이 값을 못하고 어린애가 되는지 모르겠다.
철들자 노망한다는 소리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1일부터 '갤러리 브레송'에서 김동진의 ‘Another City 2’ 사진전이 열렸다.




김동진의 ‘또 다른 도시’는 인간성이 상실되고 개인주의로 치닫는 심각성을 비판하며 고발하고 있다.




정상보다 비정상이 판치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때로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마저 혼란스럽다.

삶의 구조가 비정상으로 치닫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비정상이 정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그 구분 자체가 인간이 규정해 길들어 온 것이겠지만, 그 기준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인간성일 것이다. 




소외와 박탈, 욕망, 갈등 등 현대인들의 심리적 불안상태와 비정한 도시의 단면을 형상화하여,

앞만 보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개막식에는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를 비롯하여 김남진관장, 사진가 김문호, 이수철, 이윤기,

김영호, 정영신, 함인선, 하춘근, 이세연씨 등 20여명이 참석했지만,

같은 시간대에 ‘한미사진미술관’에서 개막된 중국사진가 왕칭송 전시에는 200여명이 참석하였단다.

너무 대조적이다. 그 전시는 3개월이나 열린다는데...




이수철, 이광수, 김문호, 김남진씨가 차례대로 나와 사진에 대한 감상평과 격려의 말을 전해 주었고,

작가 김동진씨가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순서로 개막식이 진행되었다.




전시작이 작년에 전시된 사진보다 더 좋아진 것은 틀림없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사진 평을 해 주신 분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사진비평가 이광수씨의 표현으로는 사진이 더 독해졌다고 말했고, 김문호씨는 사진이 진득하게 찰지다고 표현했다.


 

난, 김동진씨가 주제를 잘 선택했다고 생각되었다.

비정상으로 돌아가는 세상인지라 모든 게 찍을 대상이 아니겠는가?

사진가 김문호씨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작업도 비틀어진 사회상의 기록이지만, 그 사진과는 사뭇 다르다.

주제는 비슷하나 김문호씨의 사진이 동적인 편이라면 김동진씨 사진은 정적이다.




개막식이 끝난 후, 다들 충무 해물탕 집에 몰려 가 뒤풀이를 했다.
전시작가 김동진씨도 부산사람이지만, 이광수씨도 부산서 올라 와 더 반가웠는데,

이광수교수의 시원시원한 입담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오기로 한 이규상씨가 빠져 다들 아쉬워했다.

바쁜 분이 후배들 사진전을 위해 마음 써주는 것이 고맙기 그지없는데, 다 사진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김남진관장이 이차로 안내한 곳은 후미진 골목 안쪽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들의 통행이 없는 골목인데, 분위기가 오붓해 좋았다.

더구나 술 마시며 담배까지 피울 수 있으니, 도랑치고 게 잡는 격이었다.




뒤늦게 사진가 고정남씨도 찾아 왔는데, 술 마시다 사진 촬영 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초상권 문제로 사람은 물론 거리스냅도 어려운 실정이 아니던가?

김문호씨는 카메라 파인더를 보지 않고 찍는 노 파인더 기법을 많이 활용한다고 했다.

이젠 숙련되어 대부분 의도한 화각을 얻어낼 수 있단다.




가로등이 조는 어두컴컴한 골목 풍경도 김문호씨가 놓칠 리 없었지만,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 사랑 놀음하는 남녀가 타깃이 되기도 했다.




그 날 김동진씨가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자리했었는데, 결혼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남편 될 김동진씨의 사진 작업에 매력을 느낀다니, 찰떡궁합인 것 같았다.

다들 축하하는 자리가 되었다.




그런데, 김남진관장과 김동진씨가 나란히 앉았는데, 찬찬이 살펴보니 너무 닮았더라.

이름까지 비슷한데, 혹시 숨겨 논 아들이나 동생은 아닐까?




다들 술이 취했으나 삼차로 호프집을 찾았다.
김남진 관장이 앞으로 추진할 사진기획을 말했는데, 이광수교수도 흔쾌히 돕겠다고 했다.



헤어지기 아쉬워 계속 마시다 보니, 자정이 가까워 전철이 끊어 질 시간이었다.

부산사람들은 여관을 잡아 놓았으나, 멀리 가야할 김문호씨가 걱정이었다.

택시비로 주머니 좀 털렸을 거다.




덕분에 기분 좋은 하루가 되었다




이 전시는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10일까지 열린다,
안 보면 손해다.

사진, 글 / 조문호




































































원로 사진가 한정식선생께서 건강에 빨간불이 켜진지 오래다.
인사동 오피스텔을 처분하고 자택에 들어 가신지가 일 년이 가까워 온다.
해마다 신년만 되면 가까운 분들을 인사동에 불러 모아 오찬회를 베풀었으나,
올해는 나오실 수가 없어 못한 것이다.
일체 바깥출입을 하지않아 문안드리고 싶었으나 그마저 사양하셨다.





지난 16일 모처럼 정영신씨의 주선으로 한정식선생 댁을 방문하게 됐다.

사모님과 함께 계셨는데, 한 때는 사모님이 더 위중하셨으나, 이젠 선생님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



 


선생님의 구체적인 병명은 알 수 없으나, 잠을 통 주무시지 못한다는 것이다.

술도 수면제도 통하지 않아, 용하다는 한의원마다 다녀보았으나 소용없었다고 하셨다.

소문난 대부분의 한의사나 침술사들이 엉터리라 믿을 수 없었단다.

의사의 치료나 처방을 받아보면 대개 그 속내가 들여다보인다는 것이다.

침을 맞고 약을 먹어도 술수를 훤히 알아 믿지를 못하니 나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설사, 밀가루로 만든 가짜 약이라도, 믿는 환자는 나은 사람도 있었다는데...



 


외출도 멀리는 못하지만 가까운 곳은 조금씩 움직여 외식 정도는 드시러 가셨다.

인근의 고기 집에서 함께 식사를 했는데, 드시는 데는 전혀 지장 없었다.

식사 도중, 댁으로 손님이 찾아온다는 전화가 왔는데 사전에 약속을 했다고 하셨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선생님의 북촌사진을 소장하기 위해 찾아 온 단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니, ‘예술종합상사 봄을 운영하는 문화기획가 이일우씨와

역사박물관학예사 한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준비해둔 견본 사진들을 보여주며, 모두 가져가 필요한 사진을 고르라고 하셨다.

그런데, 몇 장을 매입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머지 사진을 기증해 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평소에 선생님께서도 원고료 없이 주는 사진이나 사진 기증하는 문제는

어렵게 작업하는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절대 안 된다고 말씀하셨으나, 그 날은 묵묵부답이셨다.



 


추측컨대, 사진하는 제자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하기 힘드셨거나,

아니면 오래 사지지 못한다고 생각되니 확실한 곳에 넘겨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손님들이 자리를 떤 후 선생님께 간곡하게 부탁 말씀드렸다.

선생님! 절대 사진을 그냥 주지 마십시오. 힘들게 사는 후배들의 희망이 끊깁니다.”고 했다.





어느 분야의 예술이건 작가들의 삶이란 곤궁하기 짝이 없다.

예술계 전반의 문제지만, 그중에서도 가난한 작가는 사진가이고, 사진 중에서도 기록에 전념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사진 수집은 가난한 다큐사진가들이 국가에서 보상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바늘구멍 같은 곳인데,

기증하는 사례가 늘어나면 그 구멍마저 막힐까 걱정하는 것이다.



 


사실 국가 기록사업은 정부에서 해야 할 일이지만, 그동안 손을 놓고 있었다.

돈과는 무관한 기록 사진 찍느라 가정이 파탄되거나 온갖 어려움을 겪는 사진가들이 많으나 정부에서 도와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큐멘터리사진을 전공하고 사회에 나와도 대개 버텨내지 못하고 전업하는 실정이다.

아무리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지만, 모든 걸 희생하며 찍어 온 결과물을 털도 뽑지 않고 통째로 먹겠다는 게 말이 될 소리냐?

어떻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사는 사진인들에게 좌절을 안겨주려 하는가?



 


이미지 홍수시대에 살고 있으나, 오래된 사진이나 기록적가치가 높은 사진은 차원이 다르다.

예술 보다 소중한 기록의 역사성을 하잖게 여기니, 어찌 역사가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수 많은 사진가들의 소중한 사진자료들이 쓰레기더미에 쓸려나가도 누구하나 나서는 이가 없고, 정부도 사회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평생 찍어 온 필름들이 집안의 애물단지처럼 굴러다니다 본인이 세상을 떠나면 그냥 사라지고 만다

이제 정부도 대승적인 차원에서 대처해야 되겠지만, 담당 공무원들도 실적 위주로 그냥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진인들도 개인적인 이해득실보다 다른 사진가들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스스로의 권익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다.



 


하기야! 사진을 전공한 사람조차도 사진인을 등쳐먹는 사례가 한 둘이 아니다.

대개 사진라이브러리 운영하는 사람들인데, 정직하게 계약대로 주는 경우는 더물다.

맡긴 사진의 판매된 곳을 알 수 없으니, 도용이 발각되어야 변명하며 돌려주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 여지 것 사진라이브러리를 불신하여 한 번도 원고를 맡긴 적이 없으나, 8년 전 믿을 만한 사진후배의 부탁에 처음 주었다.

유로 크레온이란 라이브러리를 만들었다며. 외국 포토에이전시와 연결되어 잘 팔릴 거라는 막연한 말을 믿었다.

전통문양이나 불교문화에 관한 팔릴만한 많은 사진들을 주었는데, 여지 것 감감소식이다.

물론, 팔 년동안 한 컷도 팔리지 않아 돈을 보내지 않을 수도 있으나 전화는 물론 우편물 한 장 받은 적이 없다.

 

더구나, 처음 시작할 때는 전모씨와 동업했는데이해관계로 전씨가 먼저 물러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유로 크레온자체가 어떻게 되었는지 오리무중이고, 두 사람 모두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만약 사업을 접었다면, 최소한 사정에 의해 폐업했다고 통보하며 원고라도 돌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지 것 그의 체면을 보아 기다렸지만, 이젠 소송절차를 밟기로 했다.

나 혼자만의 피해가 아니라 많은 사진인들을 위해서라도 그냥두지 않을 것이다.

유로 크레온은 물론 다른 라이브러리에서도 피해를 본 사진가는 모두 나서자.

힘을 합쳐서 기어이 손해배상을 받아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퇴를 가해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사진인들의 원고를 사후에 한 곳에 기증하여 보관하는 협동조합을 만들자.

그 곳에서 다양한 원고를 관리 판매하여, 가난한 사진가들의 작업비나 사진인 복지에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

많은 사진가들이 참여하여 투명하게만 활용한다면 정부에서 활용하는 것 보다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고,

그 수익금으로 미래의 사진가들을 도울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물론, 장터사진가 정영신씨도 평생의 기록물을 흔쾌히 기증하겠다고 답했지만,

원로사진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진원고 기증을 권할 생각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혜를 모아, 사진가들의 삶이 나아지고, 우리나라 사진 발전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권익은 우리가 찾아야지, 아무도 대신 해 주지 않는다.

 

 

사진, / 조문호






線(The Lines): 선 건너 우리에게 안부를 묻다
노춘호展 / ROHCHOONHO / 盧春浩 / photography

2019_0514 ▶︎ 2019_0519 / 월요일 휴관



노춘호_평안북도 신의주시_종이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67×100cm_2018


초대일시 / 2019_0514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사진위주 류가헌

Mainly Photograph Ryugaheon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106(청운동 113-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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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춘호의 線 The Lines -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풍경 ● 통일과 북한에 대한 많은 사진을 보면서 항상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보는 사진이 얼마나 정확할까?'하는 의문이다. 분단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휴전선과 DMZ, 그리고 판문점에서 만날 수 있는 대치 상황, 국경지대에서 떠도는 꽃제비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우리가 보아왔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북한의 이미지는 매우 제한된 정보에 근거한 것이고, 이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우리의 판단 또한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다. 무엇이 진실일지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역사만이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 노춘호의 사진은 중국과 북한의 국경 너머로 바라본 북녘 땅의 모습이다. 이 또한 북한을 이해하고 파악하는데 필요한 완벽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가 사진을 찍는 목적 또한 북한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함에 있지는 않다. 사진으로 제공할 수 있는 북한의 정보는 우리가 지금 이해하고 있는 북한의 모습만큼이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작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진가는 자신이 볼 수 있는 상황에서 가장 사진적인 '시각적 해석'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하려고 한다. ● 그가 북한을 바라보는 곳의 경계는 휴전선이 아닌 국경이다. 하지만 분단 조국을 가진 작가에게 중국과 북한의 국경은, 더 이상 국경이 아닌 또 다른 분단의 경계선이다. 동시에 그곳에서 촬영을 하고 있는 작가 자신은 양쪽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주변인이 된다. 마치 서구 열강에 의해 만들어진 휴전선과 6.25 전쟁 이전의 38선에 대해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한계적 상황과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한국전쟁을 통해 둘로 나뉜 냉전 상태의 남북관계에서 북한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이런 식으로 그저 바라보는 방법뿐이라는 사실이 슬펐다"고 작가 자신이 술회한 것처럼, 그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정체성'을 상실한 존재로서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노춘호_함경북도 온성군_종이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67×100cm_2019


노춘호_양강도 혜산시_종이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67×100cm_2019


노춘호_양강도 김형직군_종이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67×100cm_2018

작가의 가족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온 실향민이다. 자신의 고향을 잃고 부산이라는 타향에 뿌리를 내리고 경계인으로 살아온 그의 가족사와 마찬가지로 그는 북한과 중국의 국경에 서 또 다른 경계인으로 만나는 낯선 풍경과 담담하게 마주하면서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실'을 사진으로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 작가가 사진 안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선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작가가 작품에서 가상적으로 상정한 선은 카메라 파인더 뒤쪽에 있는 작가와 사진을 마주하는 '우리'를 사진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그들'과 구분한다. 이런 이유에서 사진 속의 선은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경계를 넘나든다. 우리는 사진 속에 실재하는 북한의 모습을 마주하지만, 인민을 의식화 하고, 노동에 동원하기 위해 만든 수많은 붉은 구호와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자들의 사진과 동상과 같은 우상으로 대변되는 허구의 세계를 동시에 만난다. 동상의 머리를 잘라내고 살아 있는 인민의 모습을 강조하거나, 산길을 홀로 지나가는 사람과 왼쪽의 대형 동상을 병치하면서 상반되는 두 세계의 모순을 강조한다. ● 실재와 허구가 공존하는 공간, 그것이 작가가 바라보려고 했던 북한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사진을 보면서, 마치 광고 이미지가 넘쳐 나는 도심 안에서 무엇이 허구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한다고 프레드 리친(Fred Ritchin)이 말했던 시뮬라크르로 가득한 세계를 보는듯한 착각에 빠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노춘호_양강도 김정숙군_종이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33×50cm_2019


노춘호_자강도 중강군_종이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33×50cm_2018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을 촬영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작가가 사용한 망원렌즈는 사진 안에 몇 가지 특이한 효과를 만든다. 망원렌즈는 사진 속 대상들 간의 간격을 실제보다 훨씬 더 좁힌다. 근경, 중경, 원경의 공간적 층위들이 실제보다 훨씬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 압축된다. 마치 역사적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나의 평면 위에 압축 한 것처럼 사진 안에는 다양한 풍경이 병치된다. 그리고 그 안에 또 다른 경계선을 만든다. 통제하는 자와 통제를 받는 자, 동원하는 자와 동원 되는 자, 이데올로기를 만든 자와 의식화된 자, 현재의 삶을 살고 있는 자와 화석처럼 동상과 사진에 갇힌 지도자의 모습이 모두 사진이라는 하나의 평면 안에 압축된다. 일반 풍경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안내선을 제거하면서 그의 사진은, 무대 위에 있는 장면을 촬영한 것과 같은 '극장 효과'를 만들어내면서 그 시각적 효과가 극대화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작가의 사진 속 장면은 실제의 모습이지만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 자신이 에셔의 그림에 나오는 끊임없는 모순의 고리 속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진다.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그런 모순의 순환 고리 말이다. ● 원근감을 극단적으로 축소한 그의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회화 효과를 만들어낸다. 매그넘의 르네 베리(Rene Burry)가 브라질의 상파울로의 높은 건물에서 아래로 보이는 건물위의 사람들과 도로를 촬영한 사진이나 거리 사진가로 잘 알려진 사울 레이터(Saul Leiter)와 앙드레 케르테츠(Andre Kertesz)의 사진처럼 장면을 극도로 추상화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항상 정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으로 인해 사진에 담긴 풍경은 '활인화(tableaux vivant)'를 대하는 것과 같은 비현실성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이런 독특한 시각화를 통해 그의 사진 속에 담긴 '풍경'은 마치 무대 위의 공연처럼, 아니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비현실화되고, 추상화된다. 그의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안개와 연기처럼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은 머문 자리를 떠나면 이내 사라지고 말 것에 대한 작가의 안타까움을 담고 있는 듯하다. 작가는 풍경의 이런 속성을 통해서 사진의 본질에 한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서려고 한다. 하지만 다가설수록 멀어지는 역설의 풍경이다. ● 작가는 자신의 사진적 시선을 특정 이데올로기에 맡기지 않으려고 한다. 다른 분단 이미지가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이 보여주는 풍경이 분단의 모습 전부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전통 다큐멘터리 사진의 가치가 '통찰력'에 바탕을 둔 해석이듯이, 그 또한 자신이 서 있는 그 곳에서 정치적 색채에 치우침 없는 작가의 시선을 통해 진실에 최대한 접근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의 사진적 해석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의 분단 현실의 내면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리고 통일이 과거와 미래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바로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현실임을 직시할 수 있다. ■ 김성민



노춘호_양강도 혜산시_종이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47×70cm_2018


노춘호_자강도만포시_종이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33×50cm_2018

TV에서는 이산가족들이 30년이 넘는 세월을 아픈 간격을 눈물로 메우고 있다. 이를 하염없 이 바라보고 있는 아버님의 눈 속에는 소주잔이 아른거린다. 3개월 후 아버님은 통한의 세 월을 끝내시고 하늘에서나 고향을 볼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또 35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눈물은 지금도 계속 이어진다. 생(生)은 어쩌면 경계에서 한쪽을 선택하거나 선택되어진 결과다. 사람은 누구나 선(線)에 걸쳐 있다. 線 사이에서 단지 저 線으로 넘어가지 않았을 뿐이니 말이다.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 사는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線이 있다. 그 線을 넘어온 사람들, 월남 가족. 그래서 이 땅에 존재할 수 있었던 나에게 한반도에서의 선(線)은 무엇인가? 왜 지금까지도 단 하나의 선은 없어지지 않는가? 이런 물음에서 이번 작업이 시 작되었다. ● 線. 한반도에는 두 개의 線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첫 번째는, 강한 집단들이 어떤 대상에 대해 그 대상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들 간의 이해관계에 의해 그어 놓은 線과 그리고 그 線 에서 파생된 대상 내부에서 기득화 된 권력들에 의해 굳어지고 있는 線을 합친 線. 이 線에 의해 한국전쟁에서 3백만 명에 가까운 사망 실종 부상자, 극심한 경제난으로 인한 고난의 행군 시기 희생자, 중국에서 인권유린을 당하는 탈북인,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신음하는 북한 주민, 이산가족 등 수 많은 보통 사람들의 아픔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과거의 지나간 기억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다. 이 線은 항상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국경과 인권은 정 치적 산물이어야 하는가? 이 희생들도 큰 정치적 타협에 묻히고 線은 다시 그어지는 것인 가? ● 두 번째는 같은 언어, 역사, 문화 등을 가진 민족끼리 서로 이어져 더 행복해야 할 이음의 線. 그러나 이 이음의 線은 강한 첫 번째 線에 의해 가로막혀 있고,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 들의 무관심 외면 등으로 그 이음이 점점 느슨해지고 있다. ● 그래서 이 이음의 끈을 잡고 현재 시점에서 권력에 의해 제공된 특정 장소와 시점에서 촬영 된 단위적이고 의도된 모습이 아닌 '지금, 여기'의 보편적인 상태의 線 건너 우리에게 몸은 여기 있지만, 영상이라도 線을 넘어 다가서서 안부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로 막혀있어 할 수 없이 북·중 접경지역을 찾았다. 그나마 그곳에는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들 이 있었다. 비록 다가갈 수 없는 線에 막혀, 체제의 감시를 무릎서고 짝사랑처럼 들여다보 았지만, 이념의 간격과 허락 없이 언제든지 보고 싶을 때 서로 볼 수가 있는 보통사람의 본 성으로 보통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전하고 싶었다. 그 너머 많은 우리에게도. ■ 노춘호



노춘호_양강도 혜산시_종이에 피그먼트 잉크젯 프린트_67×100cm_2019

Asking After Us Beyond Boundary Lines ● on TV, separated families have filled the painful 30 years of time with tears and cries. A soju glass glimmered inside the eyes of my father who was blankly watching the screen. Three months later, he was finally able to see his hometown in heaven after an end to his life of bitter grief. 35 years have also passed since then, but the tears and cries still continue to date. Life is probably a result choosing one side or the other on a borderline. ● Every person stands at a line. He/she has not just crossed the line from the other. There is another line to us who live in the only divided nation in the world. People who have crossed the line are the families who have defected to South Korea from North Korea. From the questions "What is the line on the Korean Peninsula and why has this line never disappeared?" to me who has existed on this land, this work began. ● Line. I believe there are two lines on the Korean Peninsula. The first one is a line drawn by a strong group on a certain target regardless of its intention based on their interests, and a line that combined the lines hardening by the powers and authorities in the target group derived from the first line. As a result of this line, the Korean War has led to the pains and hardships of so many people including nearly 3 million deaths, injuries, and missing people, victims from the Arduous March due to severe economic difficulties, North Korean refugees whose human rights are being violated in China, North Korean people suffering in political prisoner camps in the North, and separated families. However, these are not past memories and are still present continuous. This line always throws a question at me: Do boundaries and human rights in the end have to be political outcomes? Are these sacrifices buried under major political compromises and is a line drawn again? ● The second one is the line of connection that must be happier by reuniting the people of the same language, history, and culture. However, this line of connection is blocked by the strong first line and over time, its connection has become loose due to people's disinterest and negligence. Thus, instead of a single, intended scene shot at a certain place and time provided by power at this point with this line of connection, I wanted to approach and ask after us across the line over the ordinary state of 'right now, here' while our body stays here, albeit in a video. ● Unfortunately, I had no choice but to visit the border area between North Korea and China since everything was blocked. At least there were 'ordinary' people like us. Blocked by the unapproachable line, I looked over them like a one-sided love by risking the regime's monitoring and surveillance. Still, I wanted to send warmth to ordinary with the innate human nature of ordinary people to see each other whenever they wanted without ideological gaps and permissions—even to many of us across the boundary line. ■ ROH CHOONHO



Vol.20190514b | 노춘호展 / ROHCHOONHO / 盧春浩 / photography


사진가 박찬호



사람이 죽게 되면 어떻게 될까? 과연 저승이란 신화의 세상이 있는 걸까?
한 가닥 위안일 뿐, 죽고 나면 바람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아는 분들의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어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박찬호. 2013, 제주도 남원, 동백나무가 있는 마을당,



그런데, 엊그제 뜻밖의 사진집을 전해 받았다.
박찬호씨의 ‘歸’사진집인데, 마치 귀신 사진집 같았다.
그 사진집을 볼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게 하였다.



ⓒ박찬호.2014. 제주도 표선면



난, 우물 안 개구리다.
사진가 박찬호씨는 알지만, 여지 것 어떤 사진을 찍는지 몰랐다.
그동안 인간의 죽음에 집착하여 오랫동안 그 현장을 찾아다닌 사진가였다.
오래전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며 비롯된 의문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십여 년 동안 작업해 왔다고 한다.


그동안 해외 전시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의 전시를 열었는데,
작년에는 '뉴욕타임스‘에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둘러싼 제의를 촬영하다’라는
제목으로 박찬호의 전시를 소개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박찬호. 2017 전라북도 부안



요즘은 가능하면 전시장에 나 다니지 않으나, 사진집을 보니 궁금증이 발동했다.
전시장에서 직접 죽음의 세계에 직면하고 싶었던 것이다.
더구나 곧 끝나게 될 크리스 조던의‘아름다움 너머’도 꼭 봐야 할 숙제였지만,
어제 문을 연 안창홍씨의 작품도 볼 겸, 한나절을 전시장에 돌아다닌 것이다.



ⓒ박찬호. 2017.경기도 구리.



박찬호씨의 ‘歸’가 열리는 전시장에 들어가니 작가가 반갑게 손을 잡았는데,
마치 저승사자가 반기는 느낌이었다.
전시장은 시커먼 흑백사진들이 분위기를 압도했다.
무당의 신 칼이 번쩍였고, 마치 혼령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실상과 허상을 넘나들며, 보이지 않는 영혼을 추적하고 있었다.
직설적인 시신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으나, 다양한 방법으로 죽음을 이야기했다.
제사, 굿당, 무당, 꽃상여, 스님 다비식 등의 흔적을 찾았더라.




ⓒ박찬호. 2013. 경북 안동시 서후면



현실 너머의 세계를 보여준 박찬호의 사진은 귀신 씌인 사진같았다.
느닷없이 화면에 빛이 새어들거나, 어떤 사진은 반사되어 뿌옇다.
비뚤어진 화면이 불안감을 일으켰다.
보이지 않는 혼령을 작위적으로 끌어 낸 것이다.



ⓒ박찬호.2013.제주도 남원읍


박찬호의 사진을 보니, 죽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기존의 생각에서 실오라기 같은 기대가 생겼다.
진짜 영혼이 떠돈다면, 나쁜 놈들은 어떻게 지낼까?
뉘우치고 있을까? 거기서도 나쁜 질하는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박찬호. 2014, 제주 제주시, 굿-영감놀이.


영혼이고 귀신이고, 죽고 나면 말짱 도루묵이다.
생과 사의 경계를 기록한 박찬호의 ‘귀’ 사진전을 돌아보며,
앞만 보고 살아온 스스로를 한 번 돌아보자.




ⓒ박찬호.2014, 제주도 구좌읍 월정리



이 전시는 청운동 ‘갤러리 류가헌’에서 5월 12일까지 열리고,
5월24일부터 대구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6월15일부터는 광주 ‘혜움 갤러리’에서 각각 순회전을 연다.




박찬호 ‘귀(歸)’사진집
양장본 143쪽, 6만원,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사진, 글 / 조문호




















아무도 못 말리는 사진가 김영수씨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는 80년대에의 암울한 현실을 사진으로 저항했고,

1994년부터 ‘민사협’을 창립해 이끌었다.

‘민사협’에서 치룬 많은 전람회 중 광복60주년에 맞춘 ‘시대와 사람들’전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한 ‘한국현대사진60년’전이 대표적 업적이다.

물론, 독주에 의한 사진인들의 반발이나 등 돌리기도 심했지만,
한국사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임은 틀림없다.

우연히 사진첩을 뒤적이다, 오래된 그의 사진이 눈에 밟혔다.
1986년도 무렵, 인사동 작업실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전형적인 양아치 차림이나, 사진에서는 다소 맥이 풀린 듯하다.

변변한 집 한채 없는 처지에 무슨 열쇠 꾸러미는 옆구리에 찼는지 모르겠다,


때로는 편한 모습으로 농담도 했다.

“인간아~ 인간아~ 왜 사니? ”

병마에 시달릴 2010년 무렵, 인사동 ‘북스’갤러리에서
'인사동, 봄날은 간다' 사진전을 한 적 있는데, 힘들게 찾아왔다.

정인숙씨가 부축해 왔으나 계단 오르기가 힘들어 길에서 만났다.

"사진집 보면 된다"며, 체념한 그의 표정이 안 서러웠다.

그 모진 성격에, 어찌 술 유혹은 뿌리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어찌보면, 지저분한 세상에서 고생하는 것 보다 현명한 처사 같았다.


절친이었던 정동석, 문순우씨와 끝까지 화해하지 않고 떠난 것도 마음에 걸린다.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마무리를 왜 그렇게 하고 갔냐는 것이다.

“나도 머지않아 따라 갈 테니, 꼬불쳐 둔 귀똥 찬 천국주나 한 잔 맛보여 주소”

사진, 글 / 조문호








대마씨 껍질 모아 한 모금 피웠다.
도무지 일손이 잡히지 않고, 마음이 어수선 해서다.
사진 동지가 물 밑으로 가라앉아 연락 두절이었다.
떨어져 있어도 소통은 되었는데,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햇님이로 부터 손녀 태어났다는 연락도 왔고,
사진가 이정환씨의 장인 돌아가셨다는 부고도 떴다.
어디부터 가야 할까? 
손녀야 볼 일이 많겠지만, 세상 떠난 망자부터 찾아 나섰다.







생전에 한 번도 뵌 적은 없으나, 편안한 저승길이 되길 빌었다.
문상객이 넘치는 장례식장에서 모처럼 이정환씨와 술 한 잔했다.
처가 가족 중 유일하게 자신을 아껴 준 장인이었다고 한다.
해외여행에서 오자마자 돌아가셨으니, 힘들어 보였다.






충무로 사진축제 부활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충무로 사진축제에 관여한 적이 있으니, 사정을 잘 아는 듯 했다.
우선 명동에서 충무로 넘어오는 건널목 만드는 게 시급하단다.





사진축제에 사진인들이 협조하지 않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사진으로 먹고사는 카메라점이나 각종 업주들의 무관심을 더 안타까워했다.
무엇보다 다양한 사진인을 포용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한 것 같았다.


소주 한 병으로 끝내고 일어나니, 알딸딸한 게 기분 좋았다.






'현대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잠실나루 역 가는 길은 호젓했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야경을 찍어려니, 세 다리가 없었다.
카메라가 흔들려 불빛이 미끄러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진이면 어떻고, 빛 그림이면 어떠랴?






유난히 밝은 보름달에 끌린 건, 술 때문만이 아니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손녀 같았다.


이 험난한 말세에 태어난 걸, 과연 좋아만 할 일인지...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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