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이태원의 ‘Mu/art’를 방문했다.

 

동자동에서 먼 거리가 아니지만, 잘 가지지 않았는데,

그날은 시간이 일러 그런지, 상현씨와 후배 한 명뿐이었다.

 

암 투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해 온 그가 다시 수술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들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수술은 잘 된 것 같았다.

 

음악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 같았다.

 

아직 입가 수술 상처가 남아 말조차 어눌했으나,

기타 치며 부르는 노래 솜씨는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아니, 구성지고 더 슬펐다.

음악에 살고 음악에 죽는 김상현을 응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2023,5,27작성]

마음이 급해 서둘다 방문에 걸어야 할 자물통을 주머니에 넣고 와버렸다.

그 날은 '서울역 쪽방상담소'에서 식권 타는 날로,

 김명성시인이 해 바뀌기 전에 술 한잔 하자는 시간과

한 시간 차이라 마음이 조급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서울시에서 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실시한

아름다운 동행식권 사업이 주민들의 호응으로 내년에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2023년 1월분 식권을 27일 오후 2시부터 준다는 벽보가 나 붙었는데,

세시까지 가려면 늦을 것 같아 30분 일찍 나섰.

 

한 시간이 넘어서야 차례가 돌아왔는데,

지켜 보고 있던 상담소 전실장이 소장이 찾는다며 날더러 가자는 것이다.

식권 받고 가겠다는데도, 일분도 안걸릴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소장부터 만났으나,

대개 주민들과의 마찰도 이런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다.

 

상담소 소장이 나를 찾는 이유는 대충 짐작되었다.

블로그에 올린 ‘쪽방상담소는 갑질 그만하고 자세를 낮추라는 글에

상담소 소장이 올린 장문의 해명 댓글을 보았기 때문이다.

 

유소장과는 첫 대면으로, 소장이 바뀐 것도 댓글을 보고서야 알았다.

줄을 세울 수밖에 없는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하며, 그 해결 방법을 물어왔다.

다소 불공평한 점은 있으나, 번호순으로 돌아가며 받도록 해야 한다.

소량 물품은 푸드마켓과 연계하여 나누어주는 등 자정의 노력이 요구된다.

 

특정인을 거명하는 것은 자제해 달라는 부탁은 수용했다.

그리고 식권사업은 사용한 식권을 매일 회수하는 일도 힘들지만,

싼 가격으로 뒷거래를 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단다.

 

그 문제는 매달 식권을 나누어 줄 것이 아니라 전 주민을 대상으로 전산화 해야 된다.

지금 쪽방상담소에서 주민등록증에 붙여 확인하는 바코드처럼

주민등록증 한쪽에 별도의 식권 바코드를 붙여 관리하면 될 것 아닌가?

해당 식당에 별도의 단말기를 비치하는 불편이야 따르지만..

 

식권은 모두에게 줄 수 있는 량인데, 왜 시간을 정하냐고 물었더니,

안 그러면 하루 종일 지키고 있어야 한단다.

이 말은 주민들 입장보다 업무의 편의성이 먼저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동사무소처럼 업무시간에 언제나 받을 수 있도록, 담당자 한 명만 있으면 될것이다.

 

뒤늦게 식권을 받아 나왔으나, 이미 세시가 가까웠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문도 잠그지 않고 왔겠나?

주머니에 자물통이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을 때는 응암역, 내릴 무렵이었다.

요즘들어 잊어버리는 일이 잦기는 하지만, 자물통을 가지고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나이들어 잦아지는 치매증상이야 어쩔 수 없어나, 습관이란 게 무서웠다.

아무것도 가져갈 것 없는 쪽방 문 열어두고 온 것에 왜 그리 신경 쓰였는지 모르겠다.

 

누구처럼 이불 밑에 감추어 둔 돈이 있나, 가져 갈 것이라고는 고물 컴퓨터 뿐인데 말이다.

혹시 배고픈 사람이 책상에 놓인 식권이라도 가져간다면, 그건 적선이 아니겠는가?

여태 신발 도둑 맞았다는 소리는 들어도 방에 도둑들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약속장소인 응암동 '풍천장어'집에 갔더니, 김명성, 조해인시인과 정동지도 왔더라.

과분한 술 상 앞에 모여앉아 한 해 못다한 아쉬움을 달랬다.

꾸물대는 장어처럼 등 달아 꾸물댈까 걱정되었다.

 

그런데, 김명성씨가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김신용 시인이 아파트를 샀다는 것이다.

한 달 전만해도 인사동 ‘유목민’에 나와 디카 시를 쓴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사이 홍제동 셋집에서 충주 아파트로 이사 간 것이다.

 

지난 달 인사동에서 만난 김신용시인

가난한 시인이 집을 샀다는 자체만도 뉴스가 아니겠는가?

시만 쓰는 시인이 아파트를 샀다는 거짓말같은 사실 말이다.

누구처럼 칠억짜리가 아니라, 칠천만원에 불과하지만...

 

내년에는 몸이 아픈 친구들도 찾아보기로 했다.

김명성씨가 며칠 후 이청운화백 문병 가자는 이야기를 꺼냈는데,

 '뮤아트' 김상현씨도 몸쓸 병으로 여러차례 수술받아,

그 통증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한다.

 

오래 전의 이청운화백, 입원했을 때다

새해에는 이청운화백도 만나고, ‘뮤아트’ 에서 김상현씨의 쉰 듯 절절한 노래도 들어보자.

모두의 건강한 한 해를 위해...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달 아픈 몸을 이끌고 양평 황명걸시인 추모제에 참석한 김상현씨가 아코디온을 연주하고 있다

 

2021.9.27

사진 찍는 일보다 사진을 떠벌리는 일이 더 힘들다.

두 번 다시 전시는 안 하겠다고 맹세를 했건만,

어렵사리 책 만들어 준 출판사를 어찌 나 몰라라 하겠는가?

전시를 해야 책이라도 한 권 팔 것 아니겠는가?

 

며칠동안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이 열리는 인사동 ‘나무아트’와

‘노숙인, 길에서 살다’ 현수막 전을 하는 ‘유목민’ 담벼락을 오가느라 곤죽이 되었다.

허리 협착증이 도져 4층까지 오르내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직 전시가 열흘이나 남았는데 벌써 빌빌거려 걱정이 태산 같다.

 

술 마시기 딱 좋은 술집 앞에 전을 펼쳐 놓았으니

어찌, 참새가 방앗간을 못 본 척하겠는가?

전시가 시작된 첫날부터 고주망태가 되었으니 그다음 날은 보나 마나다.

속이 쓰려 죽을 지경이었지만 어쩌랴!

 

골목 전시장엔 퍼져 앉기만 하면 술을 안 마실 수가 없었다.

난, 알콜 중독자는 아니라고 큰소리치지만

남이 마시는 술을 못 본채하지 못하니 장담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당장은 좋아도 그다음 날은 더 죽어나지만 어짜겠는가?

 

지난 24일도 서둘러 나갔으나 손님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모처럼 인사동 나들이 하신 신신자씨는 ‘나무 아트’에서 기다리고,

이강산씨는 ‘유목민’ 골목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다들 멀리서 오신 분들인데,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 날은 이강산씨를 비롯하여 신신자, 권 홍, 김이하,

장우원, 이영숙, 박옥수, 한공주, 안현수, 정성진, 오진향,

음현정, 이현정, 정재원, 임춘희씨가 찾아 주셨다.

양쪽을 오가느라 길이 엇갈려 이민씨와 김창주씨는 보지도 못했다.

 

다들 마스크를 써 알아보기도 힘들지만,

페이스북 친구들은 내가 누구라고 밝히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어떤 분은 적어 놓은 방명록을 보고 뒤늦게 결례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둘째 날은 첫 날 마신 후유증으로 아예 골목 전시장엔 앉지를 않았다.

김이하씨 일행은 일찍부터 ‘유목민’에 자리 잡은 걸 알았지만 갈 수가 없었다.

앉기만 하면 술잔에 손이 갈 것이고, 한 잔만 마셔도 발동이 걸리기 때문이다.

 

둘째 날은 술 한잔 마시지 않고 잘 참아냈으나, 다음 날은 온종일 마셔야 했다.

토요일은 ‘노숙인, 길에서 살다’ 사인회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이숲’출판사 김문영대표와 이나무씨가 책을 가져오셨다.

 

그날은 양산에서 올라 온 공윤희씨를 비롯하여 박찬원, 강경구, 김남진, 김영호,

양재문, 노광래, 김명성, 이 성, 오현경, 이한복, 나매례, 이재민, 유순영, 온새미,

정세학, 김상배, 이오연, 홍현구, 박상문, 홍유경씨 등 많은 분이 찾아 주셨고,

부산에서 상경한 정남준씨를 비롯하여 손은영, 최인기, 김수길, 이봉희씨는

유목민 골목에서 일찍부터 자리 잡았다.

 

전강호씨와 시작한 술자리는 사인회가 끝나는 시간까지 이어졌으니

어찌 취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찝쩍거려 실수라도 안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낼 수가 없었다.

저녁 늦게는 김상현씨 초대 파티가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일곱 시 무렵 정영신, 김명성씨와 함께 이태원 ‘뮤아트’로 찾아갔다.

재즈가 차분하게 분위기를 가라앉힌 ‘뮤아트’에는 김상현, 임성익, 하양수씨가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어회와 전어회를 준비해 두었더라.

너무 과분한 접대에 미안했으나 어쩌겠는가?

 

취기에 고마운 마음도 감추고 축하 음악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초빙한 연주팀은 처음 본 젊은이었다.

보컬에 유혜린, 드럼에 김소희, 콘트라베이스에 김민욱, 피아노에 박종현씨로,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잘하더라.

 

잘 모르는 곡이지만, 유혜린씨의 음색에 깜짝 놀란 것이다.

앳된 소녀의 목에서 어쩌면 저렇게 농익은 소리가 나는지...

마치 수십 년 동안 알콜과 담배에 절은 베테랑 재즈 가수의 목소리 같았다.

아무튼, 축하의 자리를 만들어 준 김상현씨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내일의 전쟁 준비를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천지신명님이시여~

제발 전시가 끝나는 날까지라도 목숨을 보존하여 주십시오.”

 

사진, 글 / 조문호

 

 

 

며칠 전 이태원에서 이전개업을 준비하는 김상현씨를 찾아갔다.

신사동 ‘뮤아트’ 가게를 비워주고 이태원에 다시 가게를 얻은 것이다.

 

이태원 공사 현장에는 혼자서 가게를 정리 하고 있었는데,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그러나 코로나가 4단계로 격상되며 개업도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처럼,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가게 임대료만 물어야 할 판이다.

 

실내장식을 살펴보니 너무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신사동 가게에 붙어있던 사진 한 장 버리지 않고 모두 그대로 옮겼더라.

 

긴 세월 벽에 붙여두었다 떼어내면 망가질 수도 있을 텐데, 하나도 망가진 게 없었다.

그 자료는 30여년을 끌어 온 ‘뮤아트’의 역사나 마찬가지다.

 

바닥 장식도 일품이었다. 마치 바다 위를 걷는 듯 신선감이 일었다.

보여 준 공사현장에서의 공연 동영상은 또 다른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김상현씨는 의지의 뮤지션이며 불굴의 사나이다.

이태원에서 신사동으로, 신사동에서 이태원으로 옮겨온

30여 년의 세월이 녹녹치 않았다.

 

영업 장소라기보다 뮤지션들의 공연장으로서 의미가 더 컸다.

손님도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좋아하는 메니아들로 한정된 회원제였으니까...

 

그동안 ‘뮤 아트’를 거쳐 간 가수나 연주자도 헤아릴 수 없지만,

매년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정기페스티벌을 가져왔다.

 

그런데, 비싼 가게 임대료와 운영비는 어떻게 마련하였을까?

말은 안 해도 그 사정은 보나마나다.

그동안 문 닫기 직전에 이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란다.

 

그럴 때마다 의인이 나타나 도움을 주었다니, 아마 천직인 것 같았다.

얼마 전에는 암에 걸려 투병까지 했으나 그마저 털고 일어났다.

 

음악에 미쳐 산 인생이 힘들기는 했으나 행복했을것 같다.

그가 즐겨 부르는 노래처럼, 봄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

 

하루속히 코로나가 꺾여 ‘뮤 아트’ 음악이

삶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길 축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만봉 스님 기일이라는 전활철씨 연락을 받았다.

 

만봉스님 자제분인 이인섭선생께서 생일과 기일이 되면 매번 지인들을 불러 모아 오찬을 베푸는 시간을 마련하는데,

직접 재워두었다가 구워주는 소갈비 맛 하나는 정말 일품이다.

 

가끔 기다려지는 이유도 그 맛을 잊지 못해서다. 솔직하게 말해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다.

 

코로나 사태이후 한 번도 가지 못해 이번엔 만사를 제쳐두고 봉원사로 달려간 것이다.

 

입구에 걸린 고색창연한 ‘만봉불화전시관’이란 현판이 반겼는데, 안쪽에는 이인섭선생을 비롯하여 전활철, 김명성, 안영희, 안완규씨등 뵌 지가 오래되어 성함도 기억나지 않는 몇몇 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손님들이 선물로 위스키나 와인을 가져왔는데, 스님 기일에 양주와 갈비 파티가 어울리지 않지만, 인사동 주객 이인섭선생의 오랜 전통이니 널리 양해하시길...

 

다른 분들이야 가끔 인사동에서 만나지만, 만봉스님 제자였던 안영희씨는 너무 오랜 만 이었다.

예쁜 모습은 여전하지만, 곱게 나이던 주름을 보니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차를 끌고 와 술은 마실 수 없었지만 다른 분들도 이른 낮이라 그런지 좋은 술이 남아돌았다.

 

이인섭선생 기력도 예전 같지 않아, 전활철, 김명성씨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 보러 간다는 전활철씨를 영천시장에 내려주고 ‘예술의 전당’에 갔다. 판화전시 보러 간다는 김명성씨 따라 나섰지만, 나 역시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지난 번 갔을 때는 일정에 쫓겨 꼼꼼히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시가 끝나는 날이라 철수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달리 관객이 제법 있었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좋은 전시였다. 판화의 진면목을 골고루 볼 수 있는 이만한 기획전을 어디서 보겠는가? 미술품 컬렉터이기도 한 김명성씨는 김억씨 작품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이태원에서 실내장식 중인 뮤지션 김상현씨를 만나러 갔다.

이제 ‘뮤아트’ 신사동 시대를 끝내고 다시 이태원으로 복귀한 셈이다.

 

공사 중인 현장을 둘러보았는데, 약50여 평 되는 공간에 공사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신사동 ‘뮤아트’보다 더 멋진 공연장이 될 것 같았다.

 

‘이태원 이모네' 집으로 자리를 옮겨 한 잔 했는데, 벽에 붙어 있는 글귀가 재미있었다.

 

생각에 따라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주 화제는 독립운동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요즘 김명성씨가 이승만에 의해 독립유공자 서훈도 받지 못한 독립 운동가들의 자료들을 추적하고 있다는데, 대표적인 항일단체였던 ‘조선의혈단’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들의 서찰을 많이 찾아냈다고 한다. 얼마나 독립운동사에 빠져 몰입하는지, 좋아했던 여자 잊은 지도 오래되었다고 한다.

 

정선 집에 불난 이야기도 나왔는데, 변호사를 선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했다. 시일이 오래 걸리지만,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소송을 위한 비용은 화가 박건씨가 페이스북에 올려 들어 온 후원금 천만 원으로 우선 추진한다는 말에 김명성씨와 김상현씨도 보태겠다며 주머니를 털어주었다.

 

옆집의 뻔뻔하고 얄팍한 속내도 얄밉지만, 나에게 제일 중요한 필름 원본이 보험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잘못된 손해배상 규정에 맞서기 위해서다. 내일은 변호사를 만나기로 했으나 마음은 편치않다.  

 

사진, 글 / 조문호

 

신사동에서 ‘뮤아트’를 운영하는 김상현씨가 청담동에 ‘Salon de Mu/art 청담’을 열었다.

지난 26일 오후 7시 무렵 청담동 '뮤아트'를 찾아갔는데,

거리두기로 많은 분을 초청할 수 없는 사정이라 가면서도 마음은 편치않았다.

 

지하철 분당선 압구정 로데오역에 내려 4번 출구 부근의 '옴므빌딩'6층이었다.

 

들어서니, 흥겨운 재즈음악이 살롱을 흥청였다.

띄엄띄엄 앉은 좌석에 반가운 분도 더러 보였다,

 

김상현씨를 비롯하여 김명성, 하양수, 이상원씨 등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났다.

 

메인공간을 장식한 신사동 '뮤아트' 실내사진에서 공통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난, 뮤지션 김상현씨를 볼 때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집념과 열정에 탄복한다.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삶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니, 음악 자체가 그에게 삶의 원천이다.

재능 있는 가수를 발굴하여 가르치고 아껴주는 후배사랑 또한 가슴 뭉클하다.

 

수십 년 동안 ‘뮤아트’를 끌어 온 아집과 자존심도 대단하지만,

오뚜기 처럼 버텨 온 삶의 여정에 절로 고개 숙여진다.

 

얼마 전에는 암 투병으로 생사의 기로에 선 적도 있었으나,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이 그는 다시 일어섰다.

 

주변 지인의 전시나 문화행사에는 어김없이 무거운 장비를 챙겨들고

축하 연주를 기꺼이 해 주는 그의 예술 사랑이 암담한 현실에 한 줄기 빛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날 연주회는 하양수씨가 부른 ‘달링’이 예전과 달리 마음 속 깊이 다가왔다.

그리고 일본 첼리스트 카마코양의 ‘아베마리아’ 연주에 가슴이 시리더라.

그토록 애절한 연주를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의 무릎 위에 놓인 첼로 아래 원피스에는 수많은 벚꽃이 수 놓여 있었다.

여지 것 반일정서에 일본을 싫어했으나, 예술의 힘은 모든 걸 녹일 수 있었다.

 

음악에 취하고 술에 취해 신사동 ‘뮤아트’로 자리를 옮겼으나, 도착하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눈을 떠보니, 새벽 두시였다.

 

옆에는 김상현씨를 비롯하여 김명성, 하양수, 카마코양 등 여러 명이 있었다.

김명성씨와 택시에 실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화두 하나가 있었다.

 

바로 “돈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정신을 망치는 돈이지만, 멀리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풀리지 않는 숙제다.

 

사진, 글 / 조문호

 

재즈의 메카 ‘Mu/art’ 28주년 가을페스티발이 지난 12일 열렸다.

 

청각에 문제가 생겨 '뮤아트에 간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충무로 브레송에서 열리는 정영신의 장에 가자사진전에서 만난

들과 어울린 술 자리에 있었으나, 안 갈수가 없었다.

 

빨리 오라는 김명성씨 전화에 서둘러 지하철을 탔는데,

오래간 만의 걸음이라 신사역 출구조차 헷갈려 한 참을 헤메었다.

 

어두컴컴한 '뮤아트' 공연장으로 들어가니, 음악을 사랑하는 분들이 모여 있었.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이상훈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보였다.

 

그런데, 그 날이 뮤 아트’를 운영하는 김상현씨 생일이라 했다.

오길 잘 했으나, 아무런 준비를 못해 축하인사 밖에 할 수 없었다.

 

고맙게도 후배 한 분이 발렌타인 21년산 한 병을 내 놓았다.

덕분에 좋은 술에 행복하게 취할 수 있었는데, 공연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째즈 보컬에 Ahreum Ash Hanyou, 피아노에 정태호,

바이얼린에 송정민씨 등 트리오 앙상블에 귀가 번쩍 뜨였다.

피아노와 바이얼린 연주도 훌륭했지만,

보컬의 음색이 늦가을처럼 처연하고 노란 은행잎처럼 영롱했다.

 

그 뿐 아니라 김상현씨와 하양수씨가 들려주는 노래 울림도 깊었다.

김상현씨의 노래는 들을 때마다 그의 삶처럼 애잔한 슬픔이 느껴진다.

 

오로지 음악에 빠져 삼십년 동안 한길을 걸어 온 그의 집념이 존경스럽다.

돈보다 음악에 목숨을 걸어 온 그의 일념이야 알지만,

긴 세월 뮤아트를 끌어 왔다는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리고 몸쓸 병마까지 닥쳐 죽을 고비까지 넘기지 않았던가?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는 흥겨운 시간이 되었는데,

김명성 시인은 술만 마시면 시를 쓰는 습관이 있다.

하기야! 술자리처럼 한가할 때도 없지만, 술 기운이 시상을 촉발하는 것 같았다.

술에 취해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주류시인이 아니겠는가? 

 

 '뮤 아트'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먼 훗 날 '뮤 아트'를 추억하는 이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실 것이고,,,

 

사진,  / 조문호

 

 

2020년 뮤아트 28주년 가을 festival

 

 



지난 20일 김상현씨의 음악홀 ‘뮤아트’에서 “인사동 사람들을 위한 공연"이 열렸다.

얼마 전 기국서씨 훈장수훈 기념만찬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축하공연을 하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다들 취중이라 제대로 기억 못했는지 몇 명 나오지 않았다.




평일 공연 외에도 봄, 가을로 페스티벌을 갖지만, 그동안 잘 가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가끔 다녔으나, 귀에 이상이 생기면서다
조명이 어두운 공연장이라 스트로보를 터트리는 무례도 마음에 걸렸고, 한 번도 내지 못한 술 값도 부담스러웠다.
이번은 꼭 가겠다고 약속했던 터라 정영신씨를 대동하여 저녁 여덟시 무렵 집을 나섰다.




옛날에는 고막이 덜덜 떨릴 정도의 볼륨으로 음악에 파 뭍혀 살았지만,
사진에 미쳐 음악에 등 돌 린지 숱한 세월이 흘렀다.
이번엔 스스로 즐기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모처럼 음악에 빠져 볼 작정을 했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려‘뮤아트‘ 입구에서 망설였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김상현씨가 문을 열어주며 반겼다.
’뮤아트'의 분위기는 언제보아도 적막한 멕시코 뒷골목이나 담배연기 자욱한 쿠바의 선술집 같은 분위기다.



자리에는 조준영 시인과 양평에 작업실을 둔 화가 최용대씨가 와 있었다.
이태원 시절 만난 최용대씨는 너무 오랜만이라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24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숲‘을 주제로 한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도 주었다.
인사동에서 가끔 만났던 최 형, 안준영, 곽미영, 박소진, 류수씨 등 여러 명이 차례로 나타났다.




그 날 처음 본 유혜린 째즈 밴드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감미로웠다.
물방울을 튕기는 듯한 영롱한 피아노 음율에 빠져들기도 했다.




선물로 샴페인을 한 병을 가져왔는데, 그 맛은 샴페인에 대한 기존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여지 것 삼페인 하면 40여년 전에 마셔 본 ‘오스카삼페인’이 떠올라 기피해 왔다.
그 당시는 생일이나 무슨 축하할 일만 생기면 “뻥‘ 터지는 소리 때문에 오스카 삼페인이 따라 붙었는데,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그 맛에 고개를 절절 흔들었기 때문이다.
이 샴페인은 가라 안는 기분을 살짝 받쳐주는 좋은 술이었다.




김상현씨의 ‘뮤 아트’는 93년도 이태원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회원제로 14년 동안 어렵게 끌어왔으나, 건물주 횡포에 신사동으로 옮겨오게 된다.
불특정 다수를 원치 않는다는 그의 고집은 사업이기를 포기한 듯했다.
그 긴 세월동안 임대료에 허덕이며 버텨온 것이 신기할 뿐이다.




그에게는 음악이 전부였다. 부도로 무너질 때도 음악이 일으켜 세웠고,
병마에 쓰러졌지만, 음악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음악에 살고 음악에 죽는 사나이가 김상현이다.




그 날은 나에게 불러주는 노래라며 현미의 ‘떠날 때는 말없이’를 불렀다.
전시 오프닝 공연이나 술자리에서 여러 차례 들었지만, ‘뮤 아트’ 본 무대에서 듣는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얼마나 처절하게 부르는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김상현씨가 아픈 후로 감정의 폭이 더 깊어진 것 같다.
그의 노래 소리에서 낙엽 떨어지는 가을 냄새가 난다.




“비 오는데 두고두고 못 다한 말 가슴에 새기면서
떠날 때는 말없이, 말없이 가오리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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