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봉스님 자제분인 이인섭선생께서 생일과 기일이 되면 매번 지인들을 불러 모아 오찬을 베푸는 시간을 마련하는데,
직접 재워두었다가 구워주는 소갈비 맛 하나는 정말 일품이다.
가끔 기다려지는 이유도 그 맛을 잊지 못해서다. 솔직하게 말해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다.
코로나 사태이후 한 번도 가지 못해 이번엔 만사를 제쳐두고 봉원사로 달려간 것이다.
입구에 걸린 고색창연한 ‘만봉불화전시관’이란 현판이 반겼는데, 안쪽에는 이인섭선생을 비롯하여 전활철, 김명성, 안영희, 안완규씨등 뵌 지가 오래되어 성함도 기억나지 않는 몇몇 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손님들이 선물로 위스키나 와인을 가져왔는데, 스님 기일에 양주와 갈비 파티가 어울리지 않지만, 인사동 주객 이인섭선생의 오랜 전통이니 널리 양해하시길...
다른 분들이야 가끔 인사동에서 만나지만, 만봉스님 제자였던 안영희씨는 너무 오랜 만 이었다.
예쁜 모습은 여전하지만, 곱게 나이던 주름을 보니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차를 끌고 와 술은 마실 수 없었지만 다른 분들도 이른 낮이라 그런지 좋은 술이 남아돌았다.
이인섭선생 기력도 예전 같지 않아, 전활철, 김명성씨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 보러 간다는 전활철씨를 영천시장에 내려주고 ‘예술의 전당’에 갔다. 판화전시 보러 간다는 김명성씨 따라 나섰지만, 나 역시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지난 번 갔을 때는 일정에 쫓겨 꼼꼼히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시가 끝나는 날이라 철수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달리 관객이 제법 있었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좋은 전시였다. 판화의 진면목을 골고루 볼 수 있는 이만한 기획전을 어디서 보겠는가? 미술품 컬렉터이기도 한 김명성씨는 김억씨 작품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이태원에서 실내장식 중인 뮤지션 김상현씨를 만나러 갔다.
이제 ‘뮤아트’ 신사동 시대를 끝내고 다시 이태원으로 복귀한 셈이다.
공사 중인 현장을 둘러보았는데, 약50여 평 되는 공간에 공사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신사동 ‘뮤아트’보다 더 멋진 공연장이 될 것 같았다.
‘이태원 이모네' 집으로 자리를 옮겨 한 잔 했는데, 벽에 붙어 있는 글귀가 재미있었다.
생각에 따라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주 화제는 독립운동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요즘 김명성씨가 이승만에 의해 독립유공자 서훈도 받지 못한 독립 운동가들의 자료들을 추적하고 있다는데, 대표적인 항일단체였던 ‘조선의혈단’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들의 서찰을 많이 찾아냈다고 한다. 얼마나 독립운동사에 빠져 몰입하는지, 좋아했던 여자 잊은 지도 오래되었다고 한다.
정선 집에 불난 이야기도 나왔는데, 변호사를 선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했다. 시일이 오래 걸리지만,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소송을 위한 비용은 화가 박건씨가 페이스북에 올려 들어 온 후원금 천만 원으로 우선 추진한다는 말에 김명성씨와 김상현씨도 보태겠다며 주머니를 털어주었다.
옆집의 뻔뻔하고 얄팍한 속내도 얄밉지만, 나에게 제일 중요한 필름 원본이 보험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잘못된 손해배상 규정에 맞서기 위해서다. 내일은 변호사를 만나기로 했으나 마음은 편치않다.
얼마 전 기국서씨 훈장수훈 기념만찬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축하공연을 하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다들 취중이라 제대로 기억 못했는지 몇 명 나오지 않았다.
평일 공연 외에도 봄, 가을로 페스티벌을 갖지만, 그동안 잘 가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가끔 다녔으나, 귀에 이상이 생기면서다 조명이 어두운 공연장이라 스트로보를 터트리는 무례도 마음에 걸렸고, 한 번도 내지 못한 술 값도 부담스러웠다. 이번은 꼭 가겠다고 약속했던 터라 정영신씨를 대동하여 저녁 여덟시 무렵 집을 나섰다.
옛날에는 고막이 덜덜 떨릴 정도의 볼륨으로 음악에 파 뭍혀 살았지만, 사진에 미쳐 음악에 등 돌 린지 숱한 세월이 흘렀다. 이번엔 스스로 즐기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모처럼 음악에 빠져 볼 작정을 했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려‘뮤아트‘ 입구에서 망설였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김상현씨가 문을 열어주며 반겼다. ’뮤아트'의 분위기는 언제보아도 적막한 멕시코 뒷골목이나 담배연기 자욱한 쿠바의 선술집 같은 분위기다.
자리에는 조준영 시인과 양평에 작업실을 둔 화가 최용대씨가 와 있었다. 이태원 시절 만난 최용대씨는 너무 오랜만이라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24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숲‘을 주제로 한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도 주었다. 인사동에서 가끔 만났던 최 형, 안준영, 곽미영, 박소진, 류수씨 등 여러 명이 차례로 나타났다.
그 날 처음 본 유혜린 째즈 밴드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감미로웠다. 물방울을 튕기는 듯한 영롱한 피아노 음율에 빠져들기도 했다.
선물로 샴페인을 한 병을 가져왔는데, 그 맛은 샴페인에 대한 기존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여지 것 삼페인 하면 40여년 전에 마셔 본 ‘오스카삼페인’이 떠올라 기피해 왔다. 그 당시는 생일이나 무슨 축하할 일만 생기면 “뻥‘ 터지는 소리 때문에 오스카 삼페인이 따라 붙었는데,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그 맛에 고개를 절절 흔들었기 때문이다. 이 샴페인은 가라 안는 기분을 살짝 받쳐주는 좋은 술이었다.
김상현씨의 ‘뮤 아트’는 93년도 이태원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회원제로 14년 동안 어렵게 끌어왔으나, 건물주 횡포에 신사동으로 옮겨오게 된다. 불특정 다수를 원치 않는다는 그의 고집은 사업이기를 포기한 듯했다. 그 긴 세월동안 임대료에 허덕이며 버텨온 것이 신기할 뿐이다.
그에게는 음악이 전부였다. 부도로 무너질 때도 음악이 일으켜 세웠고, 병마에 쓰러졌지만, 음악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음악에 살고 음악에 죽는 사나이가 김상현이다.
그 날은 나에게 불러주는 노래라며 현미의 ‘떠날 때는 말없이’를 불렀다. 전시 오프닝 공연이나 술자리에서 여러 차례 들었지만, ‘뮤 아트’ 본 무대에서 듣는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얼마나 처절하게 부르는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김상현씨가 아픈 후로 감정의 폭이 더 깊어진 것 같다. 그의 노래 소리에서 낙엽 떨어지는 가을 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