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은 서울 전역에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에 밤잠을 설쳤다.
눈이 오면 지저분한 것들을 모두 덮어버리는 순백의 세계도 장관이지만,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는 눈 밟는 소리가 정겨워서다.
눈 치울 일이나 길이 미끄러운 불편함이야 따르지만,
눈이 오면 어린애처럼 마음 들 떠는 것은 늙어도 어쩔 수 없다.
어제 밤엔 늦잠이 들어 오전 열시 무렵에야 일어났다.
쪽방에 창문은 있지만 옆 건물과 붙어있어 햇볕은커녕 바깥 날씨조차 알 수 없다.
오로지 담배연기 빠져 나가는 배출구 역할만 톡톡히 해 준다.
마음이 바빠 서둘러 나가보니, 솜털 같은 눈발이 휘날렸다.
골목엔 간간히 눈 치우는 주민이 보였으나, 공원은 텅 비어 있었다.
눈이 내려 나처럼 신이 난 사람도 있었다,
정재은씨를 골목에서 만났는데, 기념사진 한 장 찍어 달라며 포즈를 취했다.
다들 추운 날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티브이 삼매경에 빠진다.
그러나 티브이는커녕, 길거리에서 떨고 있는 노숙인이 걱정이다.
서울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도를 내려가니, 계단 구석에 웅크려 울고있는 여인이 있었다.
옆에 파지가 깔린 걸 보니 그 곳에서 밤을 지샌 것 같았다.
무슨 사연으로 가출했는지 모르지만, 추위보다 자신의 처지가 더 슬펐던 것 같다.
서울역광장에 머무는 노숙인들은 찬바람 피할 곳을 찾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선교단체에서 여러 동의 천막을 세워, 오가는 행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예배를 시작할 때는 몇 명 안 되던 인원이 40여명으로 불어났다.
한 아낙은 흡연구역에서 담배 피우는 젊은이들을 향해 목이 터져라 구원을 외쳐댔다.
예배를 마친 이들은 추위를 피해 '서울역희망지원센터'로 가거나, 지하 통로로 뿔뿔이 흩어졌다.
서울역 지하도에 앉은 노숙인은 “평소에는 저녁 6시가 지나야 내려오는데,
오늘은 너무 추워 어쩔 수 없이 일찍 내려왔다”고 한다.
일부는 광장에 설치된 텐트 안에서 추위를 버티기도 했다.
따뜻한 커피와 떡을 나누어 준다니까, 어디서 나왔는지 금방 긴 줄이 형성되었다.
잠잠하던 텐트 안에서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텐트 지프를 열려고 손이 슬그머니 나왔는데,
반지를 낀 고운 손을 보니 여성 노숙인 같았다.
요즘 들어 여성 노숙인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모든 생활이 남성에 비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여성 노숙인에 대한 특단의 대책이 요구된다.
노숙인의 삶을 개선할 수는 없을까?
별도의 보호시설은 있지만, 그 곳에 가지 않는 이유는 술과 담배를 피울 수 없기 때문이다.
추운 고통을 감수해 가며 자유를 원하는 노숙인의 삶은 살얼음판처럼 위태롭다.
서울역에서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먼 거리가 아닌데다, 인사동의 눈 내린 풍경을 기록하고 싶어서다.
인사동 거리는 눈 치우는 상인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골목에 자리 잡은 술집들은 대부분 문이 잠겼고, 내린 눈은 그대로 쌓여 있었다.
더러 한복을 입은 중국관광객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만, 다들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남인사마당 입구에는 눈을 뒤집어 쓴 노점상 리어카가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연출했다.
눈 덮인 설경을 찾아 가까운 탑골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곳 또한 서울역광장의 살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빵과 두유를 얻기 위해 선 줄이 탑골공원에서부터 담장을 끼고 길게 이어졌다.
그 곳은 노숙인보다 집에서 눈칫밥 먹는 노인들이 더 많다.
춥고 미끄러운 눈길을 헤쳐 나와 빵조각 하나 얻기 위해
긴 줄을 서야하는 노인들의 속울음이 귓전에 들리는 것 같았다.
곳곳에 오갈 곳 없는 가난한 자들의 서러움이 넘쳐 나는데,
아름다운 설경이나 찾아 나선 스스로의 작태가 부끄러웠다.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인가?
가난한 자의 눈물을 팔아먹는 장사꾼이 아니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문제였다.
가난의 서러움을 껴안아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만, 방법이 없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권력자들은 자신의 이권에 눈이 어두워 아무런 관심도 없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을 위한 투사라기보다, 싸우다 죽겠다.
새해는 가난한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눈이 아니라
내일을 꿈 꿀 수 있는 흰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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