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에 쫓겨, 밖으로 나가야 했다.
쪽방 컴퓨터 앞에 쪼그려 있으려니, 숨이 턱턱 막혔다.

골목에서 만난 유한수씨는 김원호씨에게 거수경례를 붙이며
군인을 길들여 왔던 ‘충성’이란 개소리를 외쳤는데, 그게 누굴 위한 충성이었던가?

국가에 헌신해야한다는 것이 몸에 베었지만, 그건 기득권자들을 위한 미친 짓이었다
단지, 무료한 일상에 웃기 위한 행위였지만, 뒷 맛이 개운치 않았다.






조인형씨는 고물 티브이 한 대를 해부하고 있었고,
조두선씨와 박성일씨 등 몇 명은 이야기 나누느라 정신없었다.
일하는 사람과 노는 사람의 차이만 있을 뿐,
사는 것은 다 마찬가지다.






새꿈 공원에는 정재헌, 이대영씨가 이미 취해 있었는데,
술이 약이던가? 술 취한 사람들은 다들 웃고 있었다.
절망에 익숙해지면 술과 담배를 끼고 사는 법이다.
세상이 중독자를 양산하고 있다.





사는 게 너무 공평하지 못하다.
가진 자들은 돈을 주체 못해 별 지랄을 떨지만,
더워도 물놀이 한 번 가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
동자동 사람들에게 신바람 일으킬 일은 과연 없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여름철 쪽방은 해수욕장을 방불케 한다.
더워서 다들 벗고 사니, 비쩍 마른 놈은 남사스럽다.
옷을 걸치면 금세 땀에 젖어버리니,
내색은 안 해도 누가 찾아오면 욕바가지다.
그래서 여름 쪽방 방문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내가 사는 쪽방은 옥상 밑이라 열기가 좀처럼 식지 않는다.
바깥 통행에 지장을 주어, 방문도 열어두지 못하고
창은 옆 건물과 붙어, 있으나 마나다.
더운 바람이 윙윙 도는 선풍기소리조차 짜증스럽다.

오죽하면 다른 곳으로 이사 갈까도 생각했으나 포기했다.
명분은 나대신 누군가는 이 방에서 곤욕을 치러야 한다지만,
솔직히 방 구하고 이사하는 절차가 귀찮아 못 간다.






어제는 쪽방 4층 복도가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408호에 사는 정씨 영감이 페인트를 복도에 쏟았는데,
그걸 지운다며 퐁퐁(세제)을 통째로 부어버린 것이다.
건물 관리하는 이가 발을 동동 그렸으나, 소용없었다.
물을 퍼부어 물난리가 났는데, 거품이 둥둥 떠다녔다.





그런데, 정씨 방은 방이 아니라 창고나 마찬가지다.
그 좁은 방에 온갖 물건들을 놓아 누울 틈도 없다.
고물 티비가 아슬아슬하게 짐 위에 놓여있는데,
무너진다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나이 들어 하나하나 버려야 하건만, 왜 저렇게 살까?





그 방만 보면, 더워 못 살겠다는 내 말이 엄살 같다.
사람이 참고 견디는 인내의 한계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강력한 마약 한 방으로 황홀하게 잠들 수 있는 안락사를 허하라.
의미 없는 고통의 삶은 죽는 것만 못하다.

사진, 글 / 조문호















무의도 촌장 정중근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동자동에서 술 한 잔 할 수 있냐고 물었지만, 인사동 ‘유목민’에서 만나자고 했다.
요즘같이 푹푹 찌는 쪽방에서 손님 맞으려면 힘들어서다. 다들 벗고 사는데...

퇴근시간대의 지하철은 만원이었으나, 객실은 시원하여 견딜만했다.
종로3가에서 내려 인사동 길로 들어서니, 거리에 유난히 한복 입은 젊은이들이 많았다.
전통의 멋을 내는 것이 대견스럽기는 하나, 이 더위에 어떻게 견딜까 걱정되었다.
젊으면 덥지도 않을까?





‘유목민’에 들어서니 약속한 정중근씨를 비롯하여 소리꾼 조수빈씨도 와 있었다.
술시가 일러 그런지 술집을 전세 내어 맥주에 사이다를 타 마시고 있었다.
갈증을 풀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겠으나, 통풍환자라 맥주를 못 마시니 어쩌랴.
시원한 실내라 더위를 말끔히 씻었는데, 술벗에다 명창의 소리까지 따라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뒤늦게는 언론인 정경호씨도 합류했다.


애절한 ‘진주난봉가’에 이어, 나를 위해 ‘정선아리랑’까지 불러주었는데,
무대에서 앵무새 소리처럼 들어 온 '정선아리랑'과는 감이 달랐다.
역시 우리 소리는 많은 관객을 두고 부르는 틀에 박힌 노래보다,
오붓한 술자리가 훨씬 좋았다.






박자에 끌려다니지 않는, 진득한 삶의 감정이 묻어나니 감동이 백배 천배다.
옛 선비들이 정자에 술상 차려놓고 듣는 그 풍류를 알 것 같았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로 시작되는 다소 짜증스러운 태평가도 완전히 다르게 불렀다.
다들 소리에 빠져 눈을 지그시 감고, 술 마시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안주로 나온 전복 데침이나 가지찜도 ‘유목민’에서 개발한 별미였는데,
모든 게 독창적인 것이 대세다.
오랜만에 맛보는 신선놀음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 하나 성화를 받치어 무엇 하나
속상한 일이 하도 많으니 놀기도 하면서 살아가세
니나노~ 닐리리야 늴리리야 니나노~”

사진, 글 / 조문호












































간 밤 꿈에 수안스님이 나타나셨다.

'통도사'에 계시는 전각가이자 화가, 시인 등 다재다능하신 분인데, 나에겐 “眞空‘이란 법명을 주신 분이다. 
너무 반가워 큰 절을 넙적 올렸더니, 빙그레 웃으시기만 하셨다.

소식 끊긴지가 십 오년도 더 되었는데, 갑자기 왜 나타나셨을까?
스님께 연락 드리지 못한 건, 잘못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내 주둥아리 때문이다.


오래 전, 통도사에서 올라와 인사동에서 전시를 열 때였다.
스님을 모시는 통 큰 방림보살이 호텔 방을 두 개나 잡아두고,
근사한 전시오프닝을 마련했는데. 주연에서 그만 방정을 떨고 말았다.
“스님! 서울역에 한 번 가보이소. 배고픈 놈들이 천진데, 스님이 이라마 됩니꺼?”
화가 난 스님께서 크게 나무라시어, 그 뒤부터 가지 못했는데, 
한 참후 방림보살과 동강에 레프팅하러 오셨다며 정선 집에 들리셨다.
‘夢菴’이란 현판 글씨를 써 주시며 거금 백만 원이나 놓고 가셨는데,
연이 닿지 않았는지, 그 뒤로도 스님이 계신 축서암에 들리지 못했다. 

가끔 스님의 근황이 궁금하거나 보고 싶기도 했지만, 연락처마저 바뀌어 버렸다.

수소문해 보니 축서암에서 문수암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이야기가 들렸는데,
그러던 중에 꿈에 나타나시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한편으론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도 되었으나, 나더러 조심하라는 경종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나도 늙었지만, 스님께서도 연로하시어 살아생전 만나 뵙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작정하여 한 번 찾아뵈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난, 주둥이 뿐 아니라 손가락으로도 상대를 씹어 가까이 있는 많은 사람을 잃어 버렸다.
상대에 대한 악의는 없으나, 잘 못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버릇 때문이다.
태생은 그렇지 않았으나, 평생을 기득권자에 당하기만 해 온 처지라
나도 모르게 입바른 악바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가까운 친구는 물론 예술계, 특히 사진판에서 더 그렇다.
그러니 ‘다된 밥에 코 빠트린다’는 말처럼 지원이나 도움이 확실했던 일도
뒤늦게 따돌리기 일 수였는데, 기득권자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것이다.
다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모 나는 일에 나서지 않고 살아 그런지,
정치판이나 사진판이나 곳곳이 썩어 문드러졌으니, 어찌 간이 뒤집어지지 않겠는가?

정영신씨가 시골장에서 점쟁이를 만나면, 가끔 내 사주를 물어보는데, 

만나는 점쟁이마다 입 때문에 팔자가 세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인지 말년에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가 된 것같다. 
어쩔 수 없는 사정도 있었지만, 상처 준 이들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쪽방 촌에 들어 왔다.

빈민들과 함께 마지막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비난 받을 말썽을 일으키고 말았다.

갑 질 하는 자를 나무라며 잘 못을 바로 잡으려했으나, 잘 못 전해진 내용이었다.
개인적 감정에 의한 이야기를 믿고 발발거렸으니, 내 꼴이 어떻겠는가?

그것도 친하게 지낸 믿었던 사람인데 말이다.
뒤늦게 사과는 했지만,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일로 스스로를 반성하는 시간도 가졌다. 글로 옮길 때는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된다는 것을...
비가 들쳐 창문도 열지 못하고, 방안 열기 때문에 컴퓨터도 켜지 못한 채,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이틀 동안 한증막에서 곤욕을 치루었으나, 비가 그친 어제 오후에서야 모처럼 공원에 나갔더니,
이준기, 방원길, 변성식씨가 모여 앉아 소주 한 잔 하고 있었다.

술병이 비어 소주 한 병을 더 사오려니 준기씨가 강력하게 말렸다.
이 친구는 어느정도 술이 취하면 더 이상 마시지 않지만, 성식씨와 원길씨 생각은 달랐다.
소주 한 병 사와 세 사람이 나누어 마시며 시름을 달랬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정신 바짝 차려, 주민들이 힘을 모아 권익 찾는데 집중해야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세상에~
이렇게 더위에 시달리기는 처음이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주룩 주룩 흐른다.
선풍기도 뜨거운 바람만 분다.
컴퓨터 식히는 날개 소리조차 덥다.

겨울 쪽방은 버텼으나, 여름은 못 견디겠다.
방마다 문 열고 벌거벗은 꼴도 가관이다.
다들 곰처럼 잘 버티는데, 난 못 참겠다.






계단을 내려오니 옆방의 전씨가 한마디 한다.
“아직 수양이 덜 된 것 같네요.”
지옥이 이러면 지옥에서도 도망칠 것이라고 답했다.

길거리에 큰 대자로 누워 자는 노숙인이 부럽다.
겨울은 쪽방, 여름은 노숙이라지만, 그게 안 된다.
길거리에 자리 깔 자신은 없기 때문이다.
거리의 도사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서울역에서 무작정 지하철을 탔다.
마땅히 갈 곳은 없었지만, 더위부터 식힐 요령이다.
그러나 지하철은 너무 추웠다. 죽 끓듯 하는 이 변덕을 우짤고?
다시 동자동으로 돌아와 공원에 퍼져버렸다.






동네 술꾼들과 어울렸으나, 걱정이 태산이다.
이제 시작일 뿐인데, 올 여름을 어떻게 견디지?
정선 만지산으로 튈까? 아니면 경주 가는 정영신씨 따라 붙을까?

에라~ 모르겠다. 내일 아침에 생각하자.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에 들어온 지 10년차인 조인형(74)씨는 아직까지 총각이다.
평양에서 난리 통에 내려와, 어린 시절을 마산에서 보냈다.
집도 절도 없이 대전으로 서울 가리봉동으로 떠돌았지만, 사는 게 만만치 않았다.
온갖 일을 안 해본 것이 없는 밑바닥 인생을 굴렀는데,
기초생활수급자 혜택을 받으며 그나마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이제 일흔 넷이나 아직 장가도 못 가고 혈혈단신으로 외롭게 지낸다.
어쩌면 외로움을 잊으려 부지런하게 사는지도 모르겠다.
잠시도 쉬지 않고,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며 고물을 주워 모았다,
그래서 조씨가 사는 동자동 쪽방은 고물 창고, 아니 보물 창고다.






그의 이름처럼 인형들이 가지런히 앙증맞음을 잃지 않았고,
상여 집 같은 조화나 온갖 잡동사니의 행색들이 어설프게 고개 내밀고 있다.
짐 때문에 누울 곳이 변변찮아도 물건을 처분하지 못한다.
구리나 동 파이브 등 비싼 고물만 한꺼번에 팔기위해 모을 뿐,
대개 자신의 손길이 묻은 애착어린 집기들이기 때문이다.






이젠 물건들이 오히려 주인을 내몰려고 할 정도다. 
더러 처분하면 좋겠지만, 그게 삶의 유일한 낙인데 어쩌겠는가?
버려진 사물을 주워 닦아 희망을 심어주고, 죽어가는 화초를 살려 생기를 돌게 한다.
마치 노인들이 모여 있는 요양소처럼, 잠시 소멸을 유예시켜 주는 것이다.






기초생활수급비에다, 고물 수집으로 한 달에 20-30여만 원을 더 버니,
이웃보다는 한결 여유로운 삶을 산다.
발발 떨며 안 쓰고, 돈을 숨겨두는 사람들에 비해
건강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현명한 처신이다.
자기 말처럼, 백수는 무난할 것으로 보였다.






방에 들일 침대크기를 재기 위해 줄자를 좀 빌려 달랬더니,
아예 가져다 쓰라며 보관하던 줄자를 내 주었다.
얼마나 만졌으면 케이스가 반질반질 그의 콧등을 닮았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제 기능만 할 수 있다면 살아남는 게 미덕이다.
부디 건강 지켜, 보물과 함께하는 백수잔치를 기대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사랑방’ 공제 조합장 행방불명사건은 근 한 달 가까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열흘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혼자 전전긍긍해야 했다.

무슨 일 일까? 그가 없다면 '동자동 사랑방' 운영에 지장이 없을까?


퇴원하여 정선 오일장 박람회에 다녀와서 동자동에 복귀한 것은 27일이었다.

사흘 동안 동자동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았으나 각기 추측에 의한 이야기들이 분분했다.

한 달 후 조합장이 돌아온다는 긍정적인 분도 있었으나, 부정적인 의견도 많았다.


같은 말도 어 다르고 아 다르듯이 상황에 따라 부풀리기도 하지만,

문제는 날개 없는 소문이 빠르게 번진다는 것이다.

빨리 조합장이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나타나야 모든 추측을 불식시킬 수 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7일 오후6시, 아트 디렉터 안애경씨를 만나기로 했다.
몇 일전부터 약속된 만남이었으나, 꾸물대다 30분이나 늦어버렸다.
약속장소인 정동의 영국대사관 앞에 도착해 전화를 걸었더니, 바로 옆자리에 서 있었다.
사과할 겨를도 없이, 반갑게 맞는 그를 따라 맞은편의 정동국밥집에 들어갔다.
그 국밥집은 신부님이 운영하는 식당인데, 그 수익금으로 동자동 빈민들께 매주 국밥 대접을 한다고 했다.

다섯 그릇 팔아 배고픈 한 사람의 배를 채운다니, 가능하면 여기서 식사를 한다고 했다.

나도 몰랐던 정보라 고맙기도 했지만, 그녀의 마음 씀이 너무 예뻤다.

안애경씨는 지난 5월 초순 '통인' 김완규씨가 마련한 오찬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차림새는 20대로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50대는 되어 보이는 완숙한 작가였다.
외국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국내 예술행정의 문제점도 훤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이 파격적이면서도 참신하여 배울 바가 많았다.

그런데 내가 사는 동자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버이날을 기해 그들에게 돌려주는 빨래줄 전시를 한다고 했더니, 꼭 들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날은 내 핸드폰에 이상이 생겨, 양동 방향에서 헤매었다고 했다.

대신 양동의 쪽방들을 돌아보며 빈민들의 생활환경을 편리하게 꾸밀 방안을 연구했다고 한다.

쪽방이 몰린 복도 한 켠에 조그만 탁자라도 하나 놓으면 방에만 박혀 사는 주민들이 나와

소통할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정말 좋은 생각이었다.

그 날 돼지국밥을 먹으며 재미있는 제안을 해왔다.
7월 말 신월동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조그만 축제를 마련하는데, 사진을 찍어 줄 생각이 없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동자동에서 딴 곳으로 마음 뺏길까 염려되었으나,

어린이들과 어울려 모처럼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빨 빠진 마귀 같은 꼬락서니로 낄낄거리면 얼마나 재미있어 하겠는가?

그 좋아하는 모습의 이미지가 벌써 그려진다.

어린이들과 마음대로 놀려면 빨리 허리부터 완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파주출판단지에서 개최할 북 페스티벌에 자신의 기획안을 프리젠테이션하여 결정되었다고 했다.

, 자연, 미래, 전통과 현대의 조화로운 만남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장터처럼 난장을 펼치고 싶다며 장터사진을 찍어 온 정영신씨도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예술분야만이 아니라 사회 다양한 분야에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영국대사관 옆의 성당 정원으로 안내했는데, 그 성당을 보고 또 한번 놀랐다.

여지 것 조선일보 미술관을 더나들며 여러 차례 그 골목을 다녔지만,

벽돌과 돌을 사용해 지은 로마네스크 식의 멋진 성당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검색해 보니, 1926년에 준공한 성공회의 서울교구 건물로 되어있었다.

얼마나 여유 없이 살았으면 옆으로 시선한 번 주지 못했을까?

가까운 곳에 이렇게 멋진 성당 건축물을 두고, 외국만 가면 성당건물을 찾아다닌다.


모르면 바보나 마찬가지다. "이 바보야 정신 차려라.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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