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마음이 바쁘다.
빨리 퇴원하여 동자동에도 가야하고, 정선에도 가야 해서다.
그래서 부지런히 물리치료실 들락거리며 몸을 추슬린다.

한 시간 가량 물리치료 받고 병실로 들어서니, 반가운 사람이 왔었다.
다리도 불편한 사진가 이정환씨가 막걸리를 세병이나 들고 서 있었다.
세상에~ 여지 것 병문안을 그렇게 많이 가고, 받았지만, 막걸리는 처음이었다.

몇일 전 사진가 강제욱씨가 병문안 오며 텃밭의 상추 뜯어 오듯이,
형편에 맞는 선물이 더 좋다. 먹지 않는 음료수 사들고 오는 것보다 백배 천배다.
그리고 퇴원 할 무렵에 동자동으로 막걸리 한 박스를 보내줄 테니,
동네사람들과 술판 한 번 벌이잖다. 그 것도 천하별미 다랭이 막걸리를...

요즘 새로 나가는 강남 사업장 일이나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21일부터 열리는 정선오일장 박람회 가는 교통수단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가 떠난 후, 저녁상 물리기가 바쁘게 녹번동 정영신씨 집으로 달려갔다.
아리미 막걸리를 비워줘야, 갖고 온 놈이나 빠는 놈이나 다 좋은 것 아니겠는가?
정영신씨와 막걸리 마시며 정선 사진전 작전회의도 하고, 나쁜 놈들 욕도 막 했다.
욕을 추임세로 빠니 막걸리 병에 구멍이 뚫렸는지 술술 다 세어버렸다.

병원 문 내리기 직전에 극적으로 입성했는데, 김문호선생 말처럼 난 영락없는 나이롱환자로 찍혀버렸다,
내 주제에 청문회 나갈 일도 없으니, 나이롱이면 어떻고, 카시미롱이면 어떻겠는가?
술김에 몇 자 두드렸으니, 말이 삐딱하더라도 널리 양지하시길,,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2일 저녁 무렵, ‘동자동 사랑방’ 손님들이 병문안을 왔다.
시나리오작가 최건모씨도 다녀 갔고, 동자동에선 선동수간사와 김정호, 김창현씨가 왔는데,
우건일조합장 잠적 의혹이 불거질 때 입원하여, 여러 가지 궁금했던 터라 더 반가웠다.






‘최원호병원’ 맞은편에 있는 ‘도야지 포차’로 안내하여 삼겹살을 안주로 소주 한 잔 대접했다.
이 집은 일인당 구천원이면 돼지고기를 무제한 먹을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다들 기분 좋게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헤어졌다. 



  


평소 늦게 자는 버릇으로 두시 무렵에야 간신히 잠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벌써 조반이 나와 있었다. 

점심 한 끼에 저녁은 빵 한개로 해결해 왔는데, 요즘은 하루에 세끼나 먹어 너무 포식하는 것 같다.
두 차례 물리치료 받는 일 외에는 간간히 병원 옥상에서 바람이나 씌며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병원비 정산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부지런히 치료받아 빨리 동자동으로 돌아가야겠다.   

오라는 곳은 없으나, 할 일이 널려있어 마음은 늘 바쁘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8일 1시 무렵, 허리가 아파 침 맞으러가는데, '동자동사랑방' 사무실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일단 병원이 급해 치료부터 받고 돌아오니 김원호, 유한수, 김정호, 조두선, 김창헌, 조인형, 허미라, 김정길,

강병국, 홍홍임씨 등 여러명이 계셨고, MBC에서 나와 부양의무제에 대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김정호씨와 소주 한 잔하러 중국집 ‘태향’에 가서 사정이야기를 들었는데,

우건일조합장이 연락되지 않아 조두선씨가 권한대행을 맞았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권한대행까지 선임했다면 간단히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이날 쪽방상담소 앞에서는 반찬을 나누어주었는데, 문규도, 송범섭, 이기영, 이상준씨 등 여러명을 만났다.

사진, 글 / 조문호

































매일 방바닥에 앉아 일하다보니 허리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어제 새벽세시까지 컴퓨터와 놀다 허리가 불편해 잠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점심때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일어나려니 허리를 펼 수 없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신경외과를 찾아 나섰으나 후암동 주변을 샅샅이 뒤져도 병원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힘들게 걸었으나, 좀 다니니 통증이 사라지고 허리도 펼 수 있었다.

일시적인 현상으로 알아 병원 찾는 것을 포기하고, 새꿈공원 술자리에 어울려 버렸다.





김용태, 이원식, 황규복, 안중균, 강원씨 등 다섯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이 날은 황규복씨가 돈이 생겼는지, 이원식씨에게 파랑새 한 장을 주기도하고, 술과 담배까지 샀다.

그러나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정치이야기로 술맛 가게 하더니, 어제 있었던 현충일 이야기로 옮겨갔다.






문대통령의 추모사에 감동 먹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군대에서 개 고생했던 이야기까지 구구절절했다.

김용태씨는 차라리 군대에서 고생하다 죽었으면, 이 모양으로 살지 않고 죽어 대접이나 받을 거라는 쓸데없는 소리도 했다.

그리고는 이순신장군 이야기가 나오니 끝이 없었다.

하늘의 별을 보고 날씨를 알아보는 기상관측에서부터 장군이 남긴 명언 등 마치 위인전을 다시 보는 것 같았는데,

안중균씨는 이순신장군 초상이 100원짜리 동전에 새겨진 것에 불만이 많았다. 어떻게 신사임당 보다 못하냐는 것이다.

액수로 위인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백 원짜리가 좋지 않으냐는 궤변도 펼쳤으나,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그 무렵, 저녁식사를 약속한 미디어작가 김도이씨가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일어나려는데, 또 다시 허리가 아파 일어날 수 없었다.

! 이 병은 누웠거나 서있으면 괜찮으나 앉았다 일어나면 통증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

내일 쯤 한방병원에서 침이라도 한 대 맞을 작정으로 구부정하게 도이씨가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집 앞에 있는 광주식당에서 된장찌게와 돼지고기로 저녁식사를 하며 반주 한 잔 걸쳤다.

한 병만 비우고 방에서 마시자며 일어났는데, 또 다시 허리가 아파 공원을 한 바퀴 돌아야했다.

방에 쪼그려 앉아 컴퓨터와 씨름할게 아니라 부지런히 다니며 사진 찍으라는 경고로 받아 들였지만,

근본적인 대책부터 마련해야 했다.






일단 의자에 앉아 일하는 방 구조로 바꾸어야 하는데, 방이 좁아 책상을 들일 수가 없었다.

도이씨와 궁리 끝에 방법을 찾아냈다. 의자높이의 좁은 침대를 만들어 의자와 겸용하고,

큰 책상을 들여 식탁을 겸하기로 한 것이다.

대신 앞자리를 차지한 책장을 침대 밑에 넣으면 안성마춤일 것 같았다.

돈 생기면 목공소에 부탁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할 일이 많으나 허리 때문에 일찍 드러누웠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드니 머리가 지끈 지끈했다. 차라리 미녀생각이라도 할 걸...
인생이 일장춘몽이라는데, 그 마지막 꿈이라도 꾸고 싶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오늘이 울 아부지 제삿날이다.
몇 일 전 정영신으로 부터 아버지 제사는 어떻게 할 거냐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물이라도 한 그릇 떠놓고 형편대로 하겠다는 생각으로 대꾸하지 않았다.
가족 물리치고 나온 놈이 무슨 염치로 제사까지 부탁 할 수 있겠는가?


여지 것 제사준비는 물론, 모든 걸 아내가 챙겨 제삿날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오후 다섯시에 개봉한 ‘내 친구 정일우’ 독립영화 시사회에 다녀왔다.

빈민운동의 대부였던 정일우신부님 생각에 빠져있다, 갑자기 제삿날이 떠오른 것이다.

그 것도 자정을 한 시간 정도 남긴 무렵이라 난감했다.

부랴부랴 제사 준비를 하였으나, 차릴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밥상이 없어 컴퓨터 올려놓은 상을 끄집어내고, 창호지가 없어 모조지에 지방을 썼다.
마침 손님이 사다놓은 소주가 있어, 평소 먹는 음식으로 차렸다.
일회용 오뚜기 밥 한 그릇, 물 한 그릇, 참치 캔 하나, 꿀 빵이 전부였다.

술을 올리며 절을 하였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상을 중히 여겨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놓고 치성을 드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평소 혼자서는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이 날은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술이 취해 제사상 앞에서 너스레를 떨어댔다.


아부지! 이 못난 자식 놈을 용서 하이소.

그래도 아부지가 자셔보지 못한 참치가 있습니더. 참치 안주로 한 잔 드이소

모든 죄 값은 치루는 중이니, 저승 가서 잘 모실게요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5일 정오 무렵, 동자동 쪽방으로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미디어 작가 김도이 군이 밑 반찬을 잔뜩 사들고 찾아 온 것이다.
어저께 페북에 올렸던 불신의 병에 시달린다는 글을 본 것 같았다.
그렇잖아도 몇 달 전 다녀 간 후로 만나지 못해 근황이 궁금했었다.
같이 점심 식사하며 소주 한 잔 하자는 제안에 쌍수로 환영했다.

건물 밑에 자리잡은 ‘광주식당’엔 좌석이 없어 도이씨 따라갔다.
‘서울역쪽방상담소’ 부근에 있는 ‘청국장’집으로 안내했다.
동자동 살고 있는 나도 못 가본 식당인데,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청국장에다 돼지볶음으로 소주 한 잔했다.






빈속에 소주가 들어가니 짜리한 기분이 죽였지만, 낮술이라 은근히 걱정되었다.
다행히 소주 두병을 도이씨가 많이 마셔 주었다.
페북에 올린 동자동소식을 틈틈이 보는지 이 쪽 사정을 좀 아는 것 같았다.
우연찮게 부모님 이야기가 나왔는데,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연인즉, 어머니께서 심한 당뇨로 고통 받고 계신다는 것이다.
누군들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그 지극한 효심에 감동 받았다.






발동 걸려 동자동 ‘새꿈공원’ 아지트로 갔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낮술에 젖어 있었다.
정재헌씨는 이미 맛이 갔고, 이준기, 김용태, 계남기, 이한보, 이원식, 강완우씨 등

많은 사람이 여러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도이씨가 동내 사람들을 위해 막걸리와 담배를 사왔다.

다들 고맙게 받아 마셨는데, 이번엔 고급커피와 캔 막걸리를 또 사온 것이다.

이준기씨가 부담스러운지, 집에 가져가라며 사양한다. 사실 지나치면 자존심 상할 수도 있다.

더구나 이준기씨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왕년의 주먹 아니던가.





이 날은 교도소 갔다 온 친구들이 많아 그런지 교도소 이야기가 주 화제였다.

다들 사연이야 기구하지만, 이구동성으로 쪽방생활보다는 교도소 생활이 편하다는 것이다,

갔다 오면 몸까지 좋아진다는 교도소 예찬론을 폈다.

하기야 얻어먹으러 다니지 않아도 삼시 세끼 밥 챙겨주겠다, 사람들과 늘 함께 어울리니,

쪽방처럼 외롭지도 않을 것이다. 단지 술 담배를 못하지만, 건강에는 그 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술 취해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이기영씨를 비롯하여 라흥주, 강동근, 이태헌, 연영철,

유한수씨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마침 정용성이가 지나갔는데, 그날따라 말짱했다.

궁금증이 발동해 옥탑 방까지 올라가보았는데, 끓여놓은 라면을 먹고 있었다.

황춘화씨는 흐뭇한 표정으로 자식 놈의 라면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그런데, 황춘화씨 얼굴이 묵사발이 되어 있었다.





그 가파른 '9-18’건물, 마의 계단 에서 또 넘어졌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넘어져 팔을 다치지 않았던가.

아들 용성이가 넘어져 다치더니, 정재헌씨가 넘어져 다쳤고, 어제는 황춘화씨가 넘어져 다친 것이다.

건물 계단 손잡이를 쪽방상담소에서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사람 다 잡고 설치할지 모르겠다.

좀 있으니 꼭대기까지 손님이 줄을 이었다. 정재헌씨야 5층에 사니 올라 올 수 있겠으나. 이원식씨도 올라왔다.






내가 술집 작부를 자청하며 노래 한 곡 뽑았다.

‘비나리는 호남선’을 청승맞게 불렀는데, 갑자기 정재헌씨가 서럽도록 울어대는 것이었다.

말 못할 사연이 있어 보였다. 눈치 빠른 황춘화씨가 자기가 춤 출테니, 신나는 노래로 불러 달란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로 돌렸는데,

애미는 신바람 나 흔들어 댔으나 용성이는 처음 듣는 노래라 흥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작은 노트처럼 생긴 노래방 책과 손바닥만한 앰프를 켜 놓고 한 번 찾아보란다.

나는 가수라 노래방 노래는 하지 않는다며 밀쳐냈더니, 이해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일 촬영이 있어 강릉까지 가야해 너무 오래 퍼질 수가 없어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동자동 사랑방’ 일행이 방문하겠다는 전갈이 왔다. 타이밍이 귀가 막혔다.

내가 사랑방으로 갔더니, 박정아, 김정호씨가 술과 안주까지 준비해놓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에 올라와 보니, 밑반찬까지 사온 것이다. 박정아씨도 내 하소연을 페북에서 본 듯했다.

후배가 와서 냉장고를 채워놓았다며 돌려보냈으나, 이게 사람 사는 맛이다.






‘동자동 사랑방’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박정아씨는 피가 뜨거운 빈민운동가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주민들이 소통하며 정 나누는 일이 불가능 했을지도 모른다.

말없이 온몸과 마음을 바치니, 그 열의에 보답하느라 김정호씨도 열심히 돕는다.

내가 오버 할 것 같아 술을 자제하니,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떠 난 후 컴퓨터를 열어보니, ‘광화문미술행동’에 대한 김진하씨의 댓글이 올라와 있었다.

핵심에서 비껴 간 글이긴 했으나, 이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재발을 막기 위해 누군가 책임지는 사람은 있어야 했다.

대표가 사임하고 부대표가 끌어간다면 협력할 용의가 있다며, 함께한 분들께 죄송함을 표했다.






더 이상 작가 없는 사진이 떠돌아서는 안 된다. 아무리 공익도 중요하지만, 작가에 대한 예의는 갖추어야 한다.

차후 어디에서라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저작권 침해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작정이다.

잘 못된 일은 바로 잡아야 하니, 다들 양해해주기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쪽방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
보증금이 없어 한 달만 못내도 쫓겨난다.
많지도 않은 짐, 버리고 버려도 남았네.

지하철 서울역11번 출구,
가랑이 쩍 벌린 사진 밑에 자리 잡아,
가져 온 짐을 성처럼 쌓고 잔다.

내일이면 하나하나 버리겠지만,
정들었던 마지막 밤을 같이 보낸다.
오늘 밤, 무소유의 진리를 꿈꾸리라.


사진, 글 / 조문호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는데, 죽을 날이 다가 온 걸까?
친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 날 정도로, 식구보다 더 챙긴 내가 요즘 마음의 문을 서서히 닫으며,
그 오래된 인연을 하나하나 끊고 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변화다.

없는 자보다 가진 자가, 못 배운 사람보단 배운 자가,
못난 사람보단 잘난 사람들의 가식과 비인간적인 실체에 서서히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동자동 사람 외는 아무도 만나기 싫어 고장 난 핸드폰마저 일부러 고치지 않고 버틴다.

문제는 동자동에 정착하며 그 증세가 더 심해졌다는 점이다.
정 많은 동자동 사람들과 비교되어서 일까? 아니면 일종의 패배의식의 발로일까?
항상 마음의 문을 열라 나발 불었지만, 정작 나는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것이다.






열흘 전, 동자동 공원과 용성이네 집에서 술 마시다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왔는데,
주머니에 넣어 둔 열쇠가 사라져 버렸다. 동내 나들이라 호주머니가 얕은 옷을 입고 나간 게 화근이었다.
쪽방의 자물쇠 고리는 방 안에서 고리가 나와 밖에서는 못을 뽑을 수가 없도록 되어 있었다.
쪽방에 별 중요한 물건도 없을 텐데, 다들 문 걸어 잠그는 건 철저하다.

망치도 없지만, 잠든 야밤에 퉁탕거릴 수 없어 고민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염치불구하고 건물 관리자 정선덕씨를 깨워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더니,
가끔 있는 일이라며 쇠 자르는 공구로 단숨에 자물통 고리를 잘라 주었다.
감사~ 감사~를 연발하며 들어 왔으면 잘 것이지, 술 취해 컴퓨터를 열어놓고 페북 질 하느라 날밤을 깠다.
눈을 떠보니 점심때가 지났더라. ‘식도락’도 끝난 시간이라 컵라면으로 속을 풀어야 했다.






그러나 외출을 하려니 자물통이 필요했다.
후암시장 철물점으로 급히 갔는데, ‘서울역쪽방상담소’ 앞에서 김만귀, 문규도씨가 밑반찬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냉장고가 텅텅 비어 밑반찬이라도 챙겨가야 하지만, 미처 신청하지 못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던 얻어먹으려면 부지런을 떨어야 하지만, 쪽방상담소에는 왠지 걸음이 가지질 않는다.

열어 놓은 방이 걱정되어 자물 통 하나 사서 바삐 걸어오니, 멀리서 이재화씨가 반갑다며 손을 흔들지만,
손 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쳐야 했다. 방문을 걸어 잠거야 맘 편히 다닐 수 있는 것도 잠재적인 피해의식이리라.





쪽방은 겨울보다 여름 지내기가 더 힘들다.
방이 좁아 통풍이 잘 안되니, 방문을 열어놓으면 훨씬 나을 텐데, 다들 문을 닫고 산다.
아무런 비밀도 없지만, 독거들의 공통된 심리다.

그런 폐쇄되고 고립된 습관에 의한 것인지, 인간성 상실에 대한 불신인지 모르겠으나,
방문 닫는 것보다 마음의 문을 닫고 있어 그것이 더 걱정이다.
깊어가는 불신의 고리를 끊고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평생을 사람 사람하며 인본주의를 노래불렀는데,

더 이상 그런 말 할 자격도 사진 찍을 자격도 없다.
불신의 병이라면 빨리 치료 받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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