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의 목판화, 南道風色
김억展 / KIMEOK / 金億 / printing
2016_0706 ▶ 2016_0719 / 일요일 휴관



김억_덕룡산 농산별업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5cm_2015

김억_덕룡산 용혈암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6cm_2015

김억_도암마을 소석문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7cm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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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30pm / 일요일 휴관


나무화랑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南道風色의 본향에서 ● 사람은 땅을 딛고 살며 몸과 정신, 그리고 감정과 기운은 그것에서 오는 영향을 받는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장소는 인간 실존이 외부와 맺는 유대를 드러내는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실재성의 깊이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위치시킨다"고 말한다. 나의 작품은 장소의 경험,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의 들과 산과 계곡, 수목, 그리고 휘돌고 감돌아 나가는 강의 체험과 불가분의 연관에서 나온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지리적 공간, 혹은 장소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은 의미를 머금고 있는 장소들이 드넓게 퍼져 있는 세상에서 사는 것을 뜻한다. ● 목판 위에서 산계(山系)와 수계(水系)들은 하나의 실감으로 명증한 형태를 드러내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의 발원지와 경유지, 산맥의 뻗어나가고 이어짐, 옛길과 도로들, 촌락들에 구체적 존재감을 불어넣는 일이다. 목판 위에서 풍부한 사실감과 존재감을 뿜어내는 자연 경관들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의 의미 있는 사건들이 이어지는 장소이며, 우리의 도덕적·지적·정신적 토대가 만들어지는 근원적 자리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地理를 보고, 生利를 얻으며 人心과 山水가 수려함을 살만한 곳의 으뜸이라 논하고 있다. 풍경은 마음속의 근원적인 형상과 상호 조응한다.


김억_해남 땅끝마을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9.5cm_2016



목판으로 풍경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면서 호남의 원림에 대한 답사를 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잘 알려진 명소 위주의 겉모습만 보고 다녀 작업을 하였고, 윤고산이 경영했던 원림이나 다산의 유배시절 거처들의 외형적인 모습을 화면에 담기에 바빠 미처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철학을 들여다 볼 여유가 없었다. 그들의 삶의 모습들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 그리며 그 풍광을 세세히 보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실행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언젠가 해남과 강진에 있는 이들의 장소들을 다녀보고자 하는 생각과, 이들이 거처했던 곳의 민초들의 삶도 함께 보고 그 자연 환경이 가지고 있는 따스함도 몸으로 느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마음속 깊이 벼르며 해남답사를 꿈꾸고 있던 참에, 마침 행촌문화재단과 행촌미술관이 문을 열며 '풍류남도 만화방창'이라는 기획이 있다. 기회다 싶어 모든 일 제처 두고 행장을 꾸려 집을 나섰다. 이번 기획은 예부터 문화예술을 즐기고 사랑했던 행촌 김제현박사님이 예술가들과 교유한 뜻을 기리고자 행촌문화재단을 설립하면서, 남도 예술의 자취를 재조명해보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현대미술가들의 풍류를 남도에서 되살려 보자는 의도인 듯했다. ● 이때쯤이면 남도 동백과 매화 절정기이고, 또 봄 마중 하는 것이니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리고 행촌문화재단에서 작가들의 창작공간을 제공하며 개막식을 겸하고 있으니, 여기에 동참한다는 것은 작가로선 반가운 일이다. '이마도' 창작공간은 원래 초등학교 분교가 폐교되면서 행촌문화재단에서 구입하여 작가들의 작업실로 활용되었다. 이마도는 주변 환경이 수려하고 우수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섬이다. 섬이라고는 하나 연륙교로 연결되어 육지화 되어있는, 인구가 40여 호가 채 안 되는 작은 섬으로 그 풍광이 이채롭다. 맞은편 바다 건너 진도가 한 눈에 들어오고 전복과 해산물의 양식장이 즐비하여 여느 어촌에 비할 바 없이 풍요롭다는 느낌이 든다. 그곳에 전국의 작가들이 초대되어 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도 뜻 깊은 일인데, 거기에 주민들과 어울리는 행사이니 그 분위기는 가히 넉넉하고 흥겹고 뜻 깊다. ● 가까이 '우수영'은 지금은 육로의 발달로 인해 '국도1호선'의 시작점이 목포로 옮겨졌으나, 과거에는 해상교통이 수월하여 국도 1호선에 해당되는 해남대로가 곧 국토의 시작점이자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던 셈이다. 그래서인가 일제 강점기에는 수탈의 창구로 기능했던, 역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행인 것은 곳곳에 충무공의 명량해전 전적지가 그대로 남아있고, 이를 해남군이 우수영관광지로 개발하여 그 뜻을 기리고 있다는 점이다.


김억_만덕산 다산초당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9cm_2016

김억_만덕산 백련사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9cm_2016



행사를 뒤로하고 매화 답사를 위해 농원을 찾았다. 선비들이 가까이하며 마음을 수양했던 사군자 중 하나인 매화는 그 매혹적인 자태뿐 아니라 한겨울 눈 속에서 가장 먼저 피어나는 봄의 전령사이기도 하다. 지금의 매화농원에서는 이런 관상용보다는 비록 매실을 얻기 위한 소득 작물이라 하더라도 매화의 그 기품과 향기가 어찌 사라지랴. 그곳에서 매화의 향취와 자태에 마음을 놓고 그만 아득해져 버렸다. 선암사의 '선암매'나 운림산방의 '일지매' 등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매화는 아니지만, 이곳 매실농원의 과수매화는 이와는 또 다른 풍요함을 준다. 멀리서 보면 마치 눈 쌓인 모습처럼 보이는 그 풍광은, 주변의 황토밭과 대조를 이루며 가히 장관이다. 참석한 작가들이 이곳저곳에서 매화에 취해 스케치 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화첩을 펼친다.


김억_월출산 백운동 별서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7cm_2016


백련사에 도착하니 일담 스님께서 우리 화가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 백련사는 고려시대 백련결사의 장소로 지금도 白蓮社의 사가 절 '寺'가 아니라 단체 '社'자를 쓰고 있다.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주신 일담스님께서 차를 내 놓으시며 백련결사와 백련사 사적기에 나오는 사찰의 유래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간가는 줄 모르게 들려 주신다. ● 산사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이 되어 일찍 동백숲을 산책한다. 청량한 아침기운이 온 몸에 와닿자 어제 저녁 숙취가 말끔이 가신다. 백련사 동백은 나무의 수령도 있어 동백꽃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 뿐만 아니라 그 기품이 예사롭지 않다. 이 동백나무는 다산과 아암 혜장선사와의 대담을 엿들었을 목격자가 아니었을까. 이들에게서 그런 옛 이야기를 들으며, 선인들의 기품과 풍모를 상상해 본다. 즐겁다. ● 아침공양을 마치고 아암과 다산이 거닐었던 다산초당에 이르는 오솔길을 스님과 함께 걸었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에 이르는 길은 동백과 차밭, 길섶 덤불을 헤치고 피어나기 시작하는 난초가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고 있다. 다산초당에 이르러 천일각에서 따사로운 봄기운을 느끼며 강진만의 풍광에 젖어 화흥을 펼치고 있는 화가들의 모습이 또 다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들의 스케치를 곁눈으로 즐기면서 스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다산이 흑산도로 유배간 형을 그리워하며 구강포를 내려다 보았을 심경을 유추하면서 말이다. ● 이어 해남의 녹우당과 두륜산 대흥사를 거쳐 달마산 미황사로 향한다. 미황사 주지스님인 금강스님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신다. 금강스님께서는 그림에 대한 남다른 식견과 화가들과도 각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으신 듯 일행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바쁜 일정임에도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달려오신 스님의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마치 달마산의 풍모를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달마산의 위용이 미황사를 감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멀리 진도까지 시야에 들러오니 이 장엄한 풍광이 답사객을 압도 한다. 사원내의 매화가 절정을 이루어 다투어 피고, 거기에 아름들이 동백나무 군락의 만개한 동백꽃도 화창하다. 이번 답사의 백미가 남도의 꽃을 향한 봄마중이니, 그것을 마음껏 누려본다. 호사다. 이 어찌 상춘객의 호사가 아니겠는가.


김억_보길도 부용동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9.5cm_2016


일행들은 서울로 향하고, 나는 해남 강진의 못다한 이야기를 더듬으며 며칠을 더 돌아다니기로 마음먹고 광주비엔날레에서 학예사를 거쳐 명발당의 주인인 윤정현선생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기꺼이 응해 주신다. 명발당은 해남윤씨 윤광택이(1732~1804)이 기거했던 가옥으로 다산과의 인연이 깊다.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과 두터운 친분을 가진 분으로 그분의 아들이 윤서유다. 윤서유는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다산의 외동딸과 윤서유의 아들인 윤영희가 혼인하여 사돈이 되니 양대 가문의 교류가 이 명발당에서 이루어졌다. 옛 건물들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고 지금은 본채와 입구쪽으로 누정이 자리하고 있다. 뒤로는 큰 소나무가 위용을 보이고 동백 매화도 그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마루에 앉으니 덕룡산과 주작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 장관을 넋을 놓고 바라본다. 남도는 온통 꽃잔치다. 황홀하다. ● 다음날 소석문을 거쳐 덕룡산에 올라 동쪽으로 펼쳐지는 강진만과 서쪽으로 해남을 조망한다. 남쪽으로는 두륜산 흑석산 등이 마치 공룡의 등 같은 험한 바위의 산세로 눈앞에 펼쳐진다. 명발당이 있는 도암면 소재지가 가까이 눈에 들어오고 윤개보가 운영했던 '농산별업'도 발아래 보인다. 백련사가 있는 만덕산으로부터 석문, 소석문, 덕룡산 주작산, 두륜산, 흑석산으로 이어지는 땅끝기맥은 백두대간의 호남정맥에서 갈라져 내려오는데 이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위용이 장엄하다.


김억_주작산 사초리마을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9.5cm_2016


다산이 기거했던 초당으로부터 윤개보의 별업인 농산까지의 다산의 행장을 다산은 '여유당전서 조석루기'에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니 이를 윤정현 선생의 글에서 발췌해 본다. "조석루(朝夕樓)는 윤개보(尹皆甫)의 서루(書樓)이다. 내가 다산(茶山)에 우거한 지 이제 4년이 되는데, 언제든지 꽃피는 때면 산보를 하였다. 산에서 오른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고 시내 하나를 건너 석문(石門)에서 바람을 쐬며, 용혈(龍穴)에서 쉬고 청라곡(靑蘿谷)에서 물마시며, 농산(農山)에 있는 농막에서 묵은 뒤에 말을 타고 다산으로 돌아오는 것이 예이다. 개보(皆甫)와 그의 사촌 아우 군보(群甫)가 술과 물고기를 가지고 와서 어떤 때에는 석문(石門)에서 기다리고, 어떤 때에는 용혈(龍穴)에서 기다리고 어떤 때에는 청라곡(靑蘿谷)에서 기다린다. 이미 취하도록 마시고 배불리 먹은 뒤에는 그와 함께 농산에 있는 농막에서 잠을 자는 것 또한 예이다". 용혈암은 백련결사의 주축이었던 천인, 천책, 정오 3국사(려말)의 정령이 깃든 수도원으로, 현재는 그 절터만 남아있다. 2013년에 지표 발굴조사를 통해 다량의 기와파편과 청자 불상의 파편이 발견되어 그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 능선을 따라 주작산 정상에 이르니 강진의 해맞이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연출되는 마량항과 고금도에서 떠오르는 일출이 장관이기에 강진군에서도 여기를 일출명소로 선택 했으리라. 앞뒤 좌우로 펼쳐지는 풍경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북쪽으로는 윤개보의 서루인 농산 별업자리가 눈에 들어오고 그 주변으로 펼쳐지는 야트막한 구릉과 평야지대, 그리고 간척사업을 통해 반듯하게 펼쳐진 논의 펼쳐짐이 평화롭다. 하산길의 동네를 지나며, 아직 농사를 시작하기는 이른 시기이나 가끔씩 농사 준비로 분주한 농부들을 본다. 남도의 부지런한 민초들 또한 그 풍경과 더불어 어찌 아름답지 않을 것인가. 해안선을 따라 포구와 어촌들의 풍경을 보기 위해 하루를 더 명발당에서 묵기로 했다. 장작으로 불을 땐 온돌방에서 윤선생의 호의에 호사를 따뜻하게 누린다. 아늑하다.



김억_南道風色_E.d 7_한지에 목판화_60×959cm_2016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며 작은 어촌 풍경과 사초리를 지나 완도대교가 있는 북평면에 다다른다. 사초리 마을은 아직 대보름날의 달집태우기와 풍어제를 지내는 동제가 남아있으며, 이른 봄 한철에만 진행되는 개불잡이가 이 마을의 특별한 행사이니 언제 다시한번 찾으리라 마음 먹어 본다. 완도대교를 지나 이진마을에 다다르면 지금은 작은 포구와 마을이 여느 어촌과 다르지 않다.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관두포)와 북평면 이진마을은 한양에서 내려오는 마지막 지점이자 한양에 오르는 첫 길이었다. 관두포항이 관리들이 주로 이용한 '관로'였다면 이진항은 민·관이 두루 활용했다. 이곳은 강진 마량항에서 고마도를 지나 완도와 해협을 이루는 길목으로 통한다. 이진 역시 수군 만 호가 주둔했던 주요 군사 거점의 하나이다. 이곳은 성을 쌓는데 제주사람이 동원될 만큼 한양∼제주를 오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지금은 성터와 마을 한가운데 우물터가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엿볼 수가 있다. ● 관두포는 조선시대 제주로 향하는 관청 '물목'이었다. 1653년 제주에 표류한 네덜란드 하멜 일행 36명이 이듬해 관두포를 거쳐 한양으로 압송됐다. 이 마을 오른쪽에 솟아 있는 관두산은 해발 178m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여수 돌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봉수터였다 한다. 한때 관리와 군졸·짐꾼·상인들로 북적였던 관동마을은 지금은 한적한 농어촌으로 변했고, 관동 방조제 방죽이 만들어지면서 옛 흔적은 찾을 길이 없어 보인다.


김억_南道風色_E.d 7_한지에 목판화_60×959cm_2016_부분


호남길 시발지인 관두포를 뒤로 하고 현산면 하구시 마을에 다다른다. 구시 저수지 뒤쪽으론 고산 윤선도가 54세(1640년)부터 9년간 머물렸던 금쇄동(金鎖洞) 산장이 자리하고 있다. 금쇄동 입구에 도착하니 출입금지 차단기가 막혀있다. 마침 서울에서 금쇄동 촬영을 위해 내려왔던 일행이 있어 윤정현선생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윤선생의 아제인 문인 윤재걸님 이란다. 윤재걸 선생은 해남윤씨 가문의 후손으로 언론인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와 집필과 시를 쓰며 지내고 계신다 하여 해남에 가면 꼭 한번 찾아보려 하였는데 여기서 만나다니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선생님 덕분에 차단기를 열고 재각이며 묘소를 들려 참배를 하고 산으로 오르니 구시저수시가 한눈에 들어오며 멀리 두륜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 산 정상부에 있는 금쇄동 일대에는 고산이 주로 기거한 것으로 추측되는 교의제 터를 비롯하여, 고산이 고기를 키우고 연꽃을 심었다는 연못터와 정자를 짓기 위해 석축을 쌓아 올린 터가 있는데, 마침 이곳엔 유적 발굴작업이 한창인 듯 하다. 고산이 보길도에서 지었던 어부사시사가 어촌을 배경으로 한 대표작이라면, 산중인 임천(林泉)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 것이 현산면 구시리 금쇄동에서 지었던 '산중신곡'과 '금쇄동기'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아직도 명확한 시기와 성격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성터가 금쇄동을 싸고 남아있어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 ● 모두 둘러보고 내려오니 윤재걸 선생님과 마침 촬영을 위해 내려온 황헌만 선생을 만났다. 황헌만 선생은 국토에 대한 열정과 시선으로 산하의 서정과 장쾌함을 담아내는 사진가다. 서울에서 뵌 적이 있는데, 여기서 또 뵈니 더욱 반갑다. 대흥사 입구의 산채집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맛있는 점심을 하니 그동안의 피로가 말끔이 가시는 듯하다. 저녁에 다시 선생님 서재에서 직접 담그신 술과 안주를 곁들여 밤 가는 줄 모르게 늦은 시간까지 정겨운 담소를 나누었다. 손수 군불을 때어 방을 덥혀 놓으시니, 객지에서 나그네의 잠자리가 이보다 편할 수는 없다. 홍복이다. 따스한 인심에 고맙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 이번 해남기행은 의미있는 답사였다. 그러나 스쳐 지나쳤던 기억의 모퉁이에는 여러 미련이 남아, 또 다시 나를 유혹 할 것이다. 그곳에서 풍경으로 들어가고, 사람들과의 인연을 쌓고, 마침내는 마음을 넉넉하게 열면서 국토의 근원적 생명성을 몸으로 새롭게 만나고 기록하고 표현하는 과정이 나를 기다릴 것이다. 그것은 재주가 박한 내게는 힘든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보고 겪은 좋은 이미지와 마음들을 어찌 그냥 둘 수가 있을 건가. 또 떠나고 또 만나고 또 판각할 것이다, 우리 국토와 거기에 살고 있는 민중들의 질긴 생명성을. 그게 아름다움이다. ■ 김억



Vol.20160706g | 김억展 / KIMEOK / 金億 / printing


지난 25일 오후 늦게 인사동에 갔다.
지난 번 오프닝 때 못 갔던 김석주씨 전시도 보아야하지만, 시나리오 작가 최근모씨와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사동거리에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가 있었는지, 전경들의 행군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인사동에 중요한 사태라도 벌어질 것  처럼, 주말의 복잡한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외곽 길을 두고 복잡한 길로 버젓이 활보하는 것은, 시민들이나 관광객의 불편도 불편이지만,

일종의 위압감을 조성한다.

    


 

전시가 열리는 나무화랑부터 들렸더니, 김석주씨를 비롯하여 춘천의 김윤기씨와 설치미술 하는 이혜련씨가 함께 있었다.

    







전시된 작품들은 몽따쥬와 꼴라쥬 기법을 통해 서로 어울리고 결합하는 뜻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수 없이 많은 손가락의 단절된 형상은 현 상황의 비유이자 단절을 넘어 통일에 대한 얽힘과 연대의

중요한 고리라고 작가는 말했다. 또한 사물과 지도의 병치를 통해 지역갈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었다.

작품 하나하나에 작가의 통일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작품들을 둘러보고 나니, 김석주씨가 술 마시러가자며 서둘렀다.

이혜련씨와 함께 두대문집으로 옮겼는데, 좀 불편하지만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김석주씨는 물론 화가이자 설치미술가인 이혜련씨 까지 농아작가였기 때문이다.

수화라고는 술 마시는 흉내 정도이니, 사사건건 종이에 메모해 생각을 주고받은 것이다.

 

그런데, 김석주씨의 주량은 소주 다섯 병이라 했다.

얼마나 빨리 마셔대는지, 덩달아 취해버렸다.

















최근모씨로 부터 전화가 와 먼저 일어났으나, 약속장소인 유목민은 문이 잠겨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그 날이 휴일이었다.










최근모씨와 포도나무집’으로 옮겨 한 잔 더했다.


최근모씨는 인사동에 관한 시나리오를 준비한다며 자문의 자리를 만들었으나,

이미 인사동 사람들블로그를 통해 인사동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훤히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몰랐던 은평구 청소년들의 오래된 사진아카이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음을 약속하고 헤어졌으나, 그가 내게 보여 준 책을 가져 와 버렸다.

술이 깨어 자세히 볼 작정이었으나, 아마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것 같다.

 

사진,/ 조문호





Storytelling of Gal apagos - Woodcut Prints & Hanji Relief

윤여걸展 / YOONYEOGEUL / 尹汝杰 / painting 

2016_0415 ▶ 2016_0503

갈라파고스_목판화에 한지 릴리프_88×110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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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윤여걸의 이번 전시는 그의 애니메이션 작업을 위한 스토리텔링에 근거한다. '갈라파고스'라는 명제로 명명된 이 연작은, 작가의 실제 삶으로부터 연유하는 실존적 사유와 생명성에 대한 복합적인 성찰이자 상징적 내러티브들이다.

갈라파고스_목판화에 한지 릴리프_88×132cm_2016

갈라파고스_목판화에 한지 릴리프_88×132cm_2016

갈라파고스_목판화에 한지 릴리프_88×132cm_2016

갈라파고스_목판화에 한지 릴리프_88×132cm_2016

갈라파고스_목판화에 한지 릴리프_66×110cm_2016

갈라파고스-깃_목판화에 한지 릴리프_각 28×36cm_2016


이 스토리텔링을 윤여걸은 목판화 부조 방식으로 형상화 했다. 그래서 각 장면들은 회화적 느낌보다는 그래픽이나 일러스트적 속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즉,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의 예의 회화적인 목판화에서 일탈해서 새로운 형식과 맛을 실험하고 시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갈라파고스-깃'이라는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의 기존의 본 작업에서의 압축된 회화적 분위기와는 다른 애니메이션에 맞는 형상성을 시도한 것이다. 이는 파인아트로 고정된 기존의 판화의 매체개념을 확장해서 타 장르와의 크로스오버를 통해 목판화의 새로운 서술적 표현문법과 기능성을 실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



Vol.20160415h | 윤여걸展 / YOONYEOGEUL / 尹汝杰 / painting



손기환展 / SONKIHWAN / 孫基煥 / printing
2016_0217 ▶ 2016_0227


손기환_한강-희망_목판화, 한지_55×78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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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산수 판화 ● 일반적으로 그림 제목으로 「산수」라고 하면 동양에서의 자연 풍경을 그린 한국화로 일컫는다. 산수화는 크게 실재 풍경을 사생한 실경 산수와 심상의 이미지를 보지 않고 그린 정신적인 관념 산수로 나뉜다. ● 나는 전통적인 목판화의 기법으로 이미지를 판에 새겨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생각과 판화가 갖는 특성 중 가장 큰 소통의 대중성을 담아 오랫동안 작품을 제작해 왔다. 그간 제작한 작품들의 주제를 보면 풍경을 주로 해 왔으며 특히 실경을 사생하고 나름대로 해석한 작품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초기작인 「강 건너 고향」은 다소 상징적인 이미지로 그려졌지만 실향이라는 정서에 기초 한 작품 시리즈였으며 이 작품들을 시작해서 수몰지의 아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물의 노래」를 거쳐 주변 삶에 공존하는 분단의 이미지를 간직한 「우리 동네」로 이어졌으며 이후, 오랜 역사의 감성을 담고 묵묵히 흐르는 「한강」시리즈를 제작해 왔다. 최근에는 여행하며 보고 느낀 자연의 아름다움과 서정성 그리고 역사성을 담고 싶은 풍경「제주」,「통영」 등을 제작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산수」로 쓰고 있는 풍경들은 대부분 사생에서 비롯되며 그림의 소재와 내용은 예전과 크게 바뀌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최근 작품「산수」는 단지 관념적인 이미지를 말하는 건 아니며 약간의 관조적인 관점으로 우리 자연과 풍경을 편하게 바라보는 입장을 담아내고 있다.


손기환_제주_목판화, 한지_50×86.5cm_2013


손기환_산수_목판화, 부조, 한지_34×53cm_2014


손기환_산수_목판화, 부조, 한지_34×53cm_2014


손기환_산수_목판화, 한지_30×45cm_2015


손기환_산수_목판화, 한지_36×25cm_2015


손기환_산수-제주_목판화, 한지_30×90cm_2015


손기환_통영_목판화, 한지_34×53cm_2015


손기환_산수-희망_목판화, 한지_30×45cm_2015


손기환_청산대련 Ⅱ_목판화, 한지_30×45cm_2015


그리고 목판화를 제작하는 방식에서 「산수」라는 제목과 연관된 부분을 볼 수 있는데, 나의 목판화 제작은 우선 대상의 이미지를 다수 스케치하고 이 스케치를 한 이미지로 조립하고 정리하면서 목판에 옮기게 된다. 제판 시 이미지의 변화나 감성이 들어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즉흥적인 스케치와는 창작 스타일이 매우 다른 점이 있다. 제판, 인쇄 과정은 해석과 노동이라는 부분이 많이 들어가며, 이 과정에서 조형적 조립이 더해진다고 볼 수 있다. 목판에 바로 스케치를 하기 도 하는데 이렇게 작업을 해도 마찬가지로 이미지의 해석과 조율, 그리고 이미지의 변용이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니 직접적인 스케치나 페인팅하고는 매우 다른 판화의 미학을 보여주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프로세스에 관조적 관점을 더 한다는 생각으로 산수라는 제목을 붙여 본 것 이다. 대부분 실경 스케치에서 출발하는 실경 산수이지만 이미지의 해석과 조정을 거쳐 관념적이며 상징적인 이미지로 판화는 완성되게 된다. 물론 주변, 극 사실적인 풍경을 제작하는 목판화가(畵家) 들이 있지만 내 작업은 결과적으로 처음과는 아주 다른 지점에 도달한다고 볼 수 있다. 목판화로 우리의 삶과 자연을 닮은 현실감 넘치는 풍경을 만들어 내려는 눈의 모험과 작품의 실재성과 현실성 사이를 좀 더 가깝게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으로 앞으로도 새로운 기법과 새로운 노동을 더 해보려 한다. ■ 손기환



Vol.20160217e | 손기환展 / SONKIHWAN / 孫基煥 / printing



인사동에서 좋은 전시를 보았다.

지난 9일 ‘나무화랑’에서 유화가 장경호씨가 주동이 되어 판을 벌였더라.
원주의 김진열씨를 비롯하여 정복수, 성병희, 이샛별, 이세현씨 등 여섯 명이 뭉쳤는데,
작가의 면면들이 모두 색깔 있는 작가라 기대한 바도 컸다.

전시장엔 참여 작가들을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하태웅, 배성일씨도 있었다.

반가움도 잠시, 전시장 한 가운데 서니 마치 고문실에 온 것 같았다.
전시장 구조도 그렇지만, 벽에 걸린 작품들이 하나같이
고통에 따른 상처로 얼룩져 있었기 때문이다.

거창한 서문도 제목도 없이, 그냥 작품으로 말하더라.
잘 못된 정치, 사회구조를 향한 풍자며, 바로 저항이었다.
거창하게 난리법석 떠는 여느 전시와 달리 조용한 울림을 주었다.

이 말없는 항변은 15일까지 이어진다.
안국역 6번 출구로 나와 인사동 대로에서 30m쯤 내려와 왼쪽 건물. 4층이다.
지나치는 걸음에 꼭 한 번 들려보라.
(전화 02-722-7760)


조문호





















목공예가 신명덕씨의 ‘겨울 날 들’전시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오는 8일까지 열린다.
첫 날 들린 전시장에는 작가 신명덕씨와 김진하관장, 정영신, 유시건씨가 있었다.

작가가 한 해의 작업을 마무리하는 전시를 해 온지가 10여년은 된 듯싶다.
힘들게 깎고 다듬은 작품들을 모아 매년 전시를 이어 왔는데, 정말 집념의 사나이다.
돈이 되던 안 되던 그런 건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다. 전시하며 스스로 즐긴다고 말했다.
돈 많은 자들이나 누릴 수 있는 그 특권을 가난한자가 넘보다니 가당찮다.


주변에 아직까지 그처럼 무모한 자들이 더러 살아남아 있긴 하나,

여지 것 굶어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 각박한 세상에 작가로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 깡다구는 있어야 될게다.

큰 나무둥지를 얇은 송판같이 깎아내는 아슬아슬한 공정들을 보노라면,

가끔은 미련한 곰처럼 보이기도 한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뭔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추억을 끌어내는 것 같은

신명덕의 곰 재주 한 번 보러 가자.


사진, 글 / 조문호

















신기루

전수현展 / JEONSUHYUN / 田秀鉉 / photography.video
2015_0610 ▶ 2015_0623

 

 

전수현_신기루-BLUE_합성사진_70×120cm_2015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1207j | 전수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5_0610_수요일_05:00pm

오프닝 공연 / 2015_0610_수요일_06:00pm연영석 '잃어버린 시간' 외

후원 / 서울시_서울문화재단_한국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1:00am~07:00pm

 

 

 

나무화랑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관훈동 105번지) 4층T

el. +82.2.722.7760

 

 

전수현의 개인전에 부쳐-떠도는 것들을 사랑하다 ● 이 글은 전수현의 개인전에 부치는 글이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적 관점을 제안하려는 의도로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그의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봐야 할지에 대하여 함께 고민해 보기를 권하는 내용으로 이 글은 채워져 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전수현의 작품이 천편일률적으로 읽혀지고 있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이다. 최소한 그의 주변에서는 전수현을 현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 매우 난감해하면서 그것을 작품의 주제와 연결시켜 정치적 의도를 어느 정도 갖고, 고발성 짙은 사회 이슈형 작업으로 보여주는 작가로 알고 있다. 그의 작품을 얼핏 보자면 그런 관점이 그다지 틀린 논점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개 사람들이, 최소한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관점에 동의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문제가 남아 있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것'과 늘 작업에 변화를 수용하는 그의 능동적 '태도'는 그런 방식으로 모두 설명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하고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할까?

 

전수현_신기루-RED_합성사진_66×150cm_2015
 

사람은 모여 산다. 모여 사는 중에 더러 혼자 살고 싶다고 아우성 칠 뿐이다. 하여간 모여 사는 이유는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모여 산다는 그것이, 그런 삶이 우리에게 항상 문제를 준다.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그리고 우리가 저희들에게 문제를 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문제를 늘 함께 풀어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그걸 혼자 풀겠다고 여기는 사람은 무지하다. 전수현의 작업은 이 무지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시점의 불안정이 우리가 그의 작품을 대할 때 만나는 당혹의 원이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안으로 무지한 이야기를 가지고 들어 올 때, 때로 너무나 익숙한 뉴-스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가지고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이야기가 가끔씩 초점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워 하기도 한다. 그것을 두고 "이야기가 깊어 졌어" 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감상자로서 혼동을 위장하기도 한다. 그의 작업은 이렇듯 작업 밖에서 늘 수다스러운 무지함까지도 쓸어 담는다. 전수현의 주제의식이 붙잡는 소재는 늘 명확하다. 무지함이 만들어 낸 고통(苦痛)이 그것이다. 괴롭고(苦) 아픈(痛) 삶은 너무 흔하다. 하지만 그 원인이 무지한 사람의 마음씀 없는 행패로부터 드러나는 아픔과 괴로움은 흔치않다. 그 흔치 않은 고통이 흔하게 느껴지는 것은 지금, 여기 우리 사회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님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전수현_신기루-위험한상상_합성사진_60×180cm_2015

 

흔히 고통은 지나치게 사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람과 결코 공유될 수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고통은 주관적인 것으로 이해될 뿐이어서 객관적으로 그 밖에서 치유하거나 위로한다 해서 경감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느끼고 만나는 그 흔한 고통은 결코 외롭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사적인 고통을 토로하고 울부짖는 때에, 그 곳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결코 뒤 돌아서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고통에 몸을 떨면서 소리쳐 호소할 때 "고통당하는 자의 그 고유한 소리(언어-표현)"를 들어줄 수는 있다. 그래서 삶의 흔한 고통은 견딜만해진다. 전수현이 집요하게 문제 삼는 고통은 무지한자들의 무심한 결과로 드러나는 아픔과 괴로움이다. 전수현이 물고 늘어지는 "고통"은 그들의 무지함이 만든 결과에 그들의 무심함이 덧씌운 참담이다. 그 무지함이 "함께 고통당하는 자의 소리"를 듣지 않아서 생기는 "절박함"으로 둔갑해버린 "그 고통"인 것이다. 이런 눈길로 전수현의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전수현_신기루-자이언트_합성사진_67×160cm_2015
 

그가 비디오 작업으로 다룬 "어떤 슬픔"에 관한 작품이 있다. 그 작품은 고요함이 전체를 압도하지만 이상한 '그 고요함'에 점점 감상자가 불편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그가 말해주기 전까지 결코 이 고요함과 그 이상함이 어디에 원인을 두고 있는지 모른다. 몰라도 그만이긴 하지만 작가가 조금 친절했다면 우린 무지함을 남에게 전가시키고 그저 돌아 서면서 잊었을 "그 슬픔"에 스스로 가책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슬픔에 내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곧 잘 잊는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공동체가 운명처럼 맞아들여야 할 역사적 슬픔이라면 우리는 무지한자로서 배려심 없는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전수현의 작품은 하나 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 앞에 보여주었던 '그 하나' 뒤로 숨어 있는 '나-우리'를 보자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화법 앞에서 경쾌하기만 반응했을 뿐이다.(모니터 안에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는 마주하고 섞이지만 결코 하나가 되지 않는다. 가끔씩 배가 오가지만 바다에는 항상 무엇인지 모를 것들이 많이 있다. 그 사실도 모니터 안에는 추론컨대 묘사되어 있다.)

 

 

전수현_신기루-대화_영상_2014

 

 

전수현이 보여주는 "가짜사진"은 디지털시대의 총아로서 "이미지"다. 하지만 그는 디지털로 바뀐 세상에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 현란한 노동집약적 통제 시스템에서 노동을 헌신적으로 수행하면서 고통의 절박에 대한 이야기를 세세하게 담아내려 한다. 당연히 그의 디지털 사진-가짜 이미지에서는 "물론이지, 노동"에 대한 의미를 더욱 새겨 넣는다. 아마도 그에게 고통의 절박은 노동에 대한 무지와 그것에 대한 마음씀의 건조함이 절대적 원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아마도 그렇게 여기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노동"의 의미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발생하는 고통 또한 개별적 사건으로 구체화되기에 사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의 해결안이나 방책 모두 신뢰할 수 없다는 절망으로부터 고통의 강도가 더욱 커진다. 이 커져버린 고통은 공동체적 참담과 빨리 연결된다는 점에서 "사회적 슬픔"으로 기억되는 사태와 사뭇 차이가 있다. 그래서 그는 노동을 하부주제(Sub-theme)로 다루는 작품에서 드라마형식의 이야기를 즐겨 사용한다. 아마도 노동의 문제가 가지는 본연의 그 참담함과 함께 우리를 "우리의 그 무분별함"으로 되돌아보게 하기 위해서 탈(脫)일상적인 드라마형식이 주효한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건이 발생하는 풍경이 등장한다. 그에게 풍경은 노동은 덧입어야 하기에 아직은 풍광처럼 보여주는 "진짜로 가짜가 성취된 인공의 세계"로써 "한 장면"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착안과 보여주기 기법과 그의 집요함이 만나는 이유를 우리는 감상자로서 생각해야만 한다. (성공한 자본주의 사회의 덕목으로 보이지는 야심찬 풍경 안에는 비까번쩍하는 것하고 동시에 참담함이 늘 공존한다. 이 풍경은 어떤 우리의 삶인지, 어떻게 거기에 우리가 모여 살고 있는지, 그래서 생기는 고통은 너의 것인지 아니면 내 것인지, 하여간 끊이지 않는 물음을 끌어들인다. 그것을 디지털 합성사진 형식으로 그는 태연하게 '착'하고 보여준다.)

 

 

전수현_전선위의참새_합성사진_77×120cm_2014

 

이 전시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작품들이 더 등장한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전수현의 작품은 한국 사회의 "지금, 여기-현실"을 "환상"이라고 말해주는 한 장의 사진이다. 먼저 그가 이 작품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었는지 우리는 조금 알 필요가 있겠다. 그 흔적이 작품에 남겨져 있으니 우리는 꼼꼼히 살펴보면서 그 시간과 노력을 찾아낼 수 있다. 한강변 그럴싸한 하루 낯 모습으로 그려진 우리의 현실-환상은 전수현이 찾아낸 '소리쳐도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는 고통의 극단'이다. 우리는 항상 이 극단적 시간에 밀려서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하루를 산다. 그 와중에 우리는 스스로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살아버린다. 허우적거리는 이 생활로부터 우리는 거꾸로 이행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전수현의 눈에 포착된 "환상적인 하루"를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이 고통은 서로 어울리지 못해서 생긴 '깊은 병'인데 우리는 그 고통에 그저 가격을 싸고-비싸게 매길 뿐이다. 아내의 생일엔 얼마짜리 선물을 사야하고, 어린이날에 얼마짜리 점심을 사먹어야 당당하며, 어버이날에 도대체 얼마나 드려야 나는 행복한가? 휴일에 우린 몰려다닌다. 고통을 서로 들어주기(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고통을 아무리 소리 쳐봐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무관심에 대한 '나-우리'의 선택은 보다 극단적인 무관심으로 대응하는 일이다. 그것을 우리는 싸고-비싸게 값을 매기면서 서로를 상쇄하려 한다.

 

 

전수현_신기루-여의도IFC_합성사진_34×220cm_2015

 

전수현_신기루-여의도IFC_합성사진_34×220cm_2015_부분

 

내 고통은 이제 오늘, 우리의 지금, 여기-현재를 환상으로 바꿔버리는 결정적인 원인일 뿐이다. 생활을 환상으로 대처해야만 하는 이 고통스러움의 근원에는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내가 얼마나 아프고 괴로운지 적절하게 호소할 수 있는 "말"을 모른 채 살아와서 그렇다. 아니, 우리가 왜 "말"을 모르겠는가?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말"은 내 고통을 밖으로 표현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말"이기 때문이다. 온 국민이 어떻게 '이 슬픔'을 감당해야 할런지 갈팡질팡할 때, "그것이 사실은, 엄밀하게 말해서「교통사고」라고" 말하는-어떤 국회의원의 생각 없음이-우리의 "말"은 고통의 근거가 된다. 말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사람이 "그 사람"이 되게 해주는 근거다. 전수현은 사실 여기까지 자신이 작가로서 자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밀고 들어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궁금해야 할 필요가 우리에겐 없다. 그는 예술가이기에 온 몸으로 하나의 사태를 알아버린다. 그래서 그는 "말할 수 없는 말"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환상-일상'의 고통스러운 관계를 작품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은 최종 크기와 사진의 세부적 모습, 꼼꼼한 수작업이 빛나게 드러남을 통해 더욱 적나라한 우리의 일상-환상/환상-일상을 보여준다. 어줍잘스레 이 작품을 후기자본주의의 양태파악으로 읽거나, 건강한 보통사람들을 이데올로기 안으로 들여와 읽다가는 정작 아프고 괴로운 우리의 삶을 작가가 가리키는 데로 보지 못한다.)

 

전수현_신기루-뻘짓_합성사진_50×120cm_2015

 

 

(* 부연: 제목에 "떠도는 것"과 "사랑"을 대비하듯 사용했다.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고통은 사실 어느 사회에서든 "떠도는 자"의 것이다. 그걸 마치 내 것인 양 사용하면 곤란하다. 그건 고통마저 훔치는 꼴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로서 전수현이 본 것, 그의 매일 화 나 있음, 발끈거림 등은 바로 이 떠도는 사람이 가져야 할 것을 훔치고, 모른 척하는 우리 꼬락서니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수현은 그저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원인으로서 아픔과 아픔의 근원을 찾아내려고 무지하게 고생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술가는 무엇을/누구를 사랑한다. 그래야 예술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따뜻한 마음씀을 갖고 그가 늘 작품을 만들었겠거니 생각했다. 부연인데 길다.) ■ 이섭

 

 

Vol.20150610h | 전수현展 / JEONSUHYUN / 田秀鉉 / photography.video

 

 

 

 


김진하 (미술평론가, 나무아트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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