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수요일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 정 나누는 날이다.
인사동 어디서든 반가운 사람들이 인사도 나누고, 차나 술 한 잔하는 날이다.
일 년이 아니라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인사동을 견우와 직녀가 만난 오작교로 생각하고 많이 들 나오시길...






지난 18일의 수요일엔 원로 문인과의 오찬 약속이 인사동 ‘나주곰탕’에서 있었다.
강 민, 구중서, 방동규, 김승환, 장봉숙씨가 나오셔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곰탕 건더기를 안주로 소주 한 잔 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한항공’ 오너 집안의 갑 질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가 되었다.
문학평론가 구중서 선생께서는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에 이어,
모든 원인은 가정교육이 잘 못되어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부모가 자식의 거울인데,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갑 질을 너무 많이 보아 온
자식들이 모두 체질화되었다는 것이다.




요즘 가정교육은 잘 못되어도 한 참 잘못되었다.
자기 자식만 소중한 줄 알고 남을 배려하는 인성교육이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대개의 사람들이 개인주의에 빠져 사회 전체가 개판이 되어버린 것이다.


 

방동규선생께서는 가벼운 운동을 습관화 하라는 좋은 말씀도 주셨다.
옛날 새마을 운동처럼 틈만 나면 온몸을 푸는 운동을 하라는데,
순서나 요령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들은 몸의 각도를 어떻게 하라는 등 이런 저런 규칙을 정하지만,
몸에 익지 않으면 자기 편한 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기지개를 펴는 것도 하나의 운동이라고 말씀하셨다.




식사가 끝난 후, ‘허리우드’에서 커피 한 잔했는데,
모든 계산을 장봉숙 선생께서 해버렸다.
점심은 쏘겠다고 일찍부터 말씀하셨지만, 찻값은 내가 내야 할 텐데,
낮술에 맛이 가, 허풍떠느라 놓쳐버린 것이다.




그 다음 일정은 ‘나무화랑’에 들려 손기환씨 전시를 관람하기로 했다.

가는 도중 임영주선생을 만나기도 했고, 40년 동안 인사동에서 행상하신 권경선씨도 만났다.

지팡이 짚고 4층까지 오르시느라 다들 고생 하였지만, 좋은 전시를 보게 된 것이다.
김진하관장이 반갑게 맞아주며 친절하게 작품설명을 해 주었다.




선생님들이 모두 떠나신 후, 저녁까지 기다리기 난감하여 사우나탕에 들려
물장난이나 치고 올 생각이었으나, 사진가 김수길씨를 만나 그를 따라 나서게 되었다.
‘부산식당’ 앞을 막 지나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술평론가 최석태씨의 반가워 하는 모습이 너무 정겨웠다. 몸까지 줄 것 같은...
화가 장경호씨와 ‘부산식당’에서 한 잔하다 지나가는 우리를 본 것 같았다.
그 자리에 퍼져 있다, 다시 ‘나무화랑’에 올라간 것이다.




전시 작가 손기환씨는 그 때까지 도착하지 않았지만,
김정헌씨를 비롯하여 박불똥, 박진화, 윤진섭, 이래훈, 김보중,
한상진, 송 창씨등 많은 화가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김정헌씨가 포장된 액자 하나를 김진하관장에게 전해주었다.
그 그림은 손기환씨가 46년 전에 그린 그림이라는 것이다.



사연 인즉, 김정헌씨는 옛날 손기환씨와 화실을 같이 사용했다고 한다.
김정헌씨는 대학원생 시절이고, 손기환씨는 균명중학교 3학년이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손기환씨가 김정헌씨에게 드린 그림을 여지 것 보관하고 있었다는 자체가 예사롭지 않았다,
일찍부터 손기환씨의 작가적 기질을 알아보았던 모양이다.
전시를 축하하러 오며 아득한 추억 하나 챙겨 왔는데,
손기환씨의 입장에서는 46년 전의 감상에 젖는 또 다른 감회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정겨운 모습이었다. 그림으로 맺은 정의 기나 긴 세월이...




좀 있으니, 학교 수업을 끝낸 전시 작가 손기환씨가 등장하였고,
화가 홍태림씨가 어여쁜 김은진씨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 날 김은진씨와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가져온 것이다.
처음 알게 된 가족연이지만, 홍태림씨가 가수 홍민씨의 차남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르는 분을 위해 결혼 날자와 예식장을 알려드리오니,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 주시면 고맙겠다.
5월 19일(토) 낮12시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 5층 조병두국제홀’입니다.




술시가 되어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화가 정복수내외가 오랜만에 등장하였고,
미녀 김정숙씨도 만날 수 있었다.
술자리에는 사진가 김수길씨, 조해인 시인, ‘샘터’ 이종원 편집장이 자리 잡았고,
주인장 전활철씨는 찾아오는 손님 맞느라 분주했다.




조해인씨는 오래 전 방송국 구성작가로 활동할 때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느라 입에 침을 튀기고 있었는데,
정영신씨의 고향인 함평 손불면 이야기라 귀가 솔깃했다.
그러나 귀가 신통찮아 대략은 짐작이 가지만,
정확한 내용을 모르니 글도 쓸 수 없지만, 정영신씨에게 옮길 수도 없구나.




그 날의 술값은 물론, 돌아 갈 여비까지 김수길씨가 챙겨 주었는데,
이 원수를 살아생전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부디 복 많이 받으시고, 다음 달에는 더 많은 분들 뵙기를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치적 팝, 팝의 정치학

손기환展 / SONKIHWAN / 孫基煥 / painting
2018_0404 ▶ 2018_0501



손기환_벽화를 위한 습작-불청객_혼합재료_190×300cm_198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71226c | 손기환 - 정치적 팝, 팝의 정치학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8_0404_수요일_05:00pm


손기환 화집출간 기념展

1부 / 2018_0404 ▶ 2018_0417 / 1980~90년대 작품

2부 / 2018_0418 ▶ 2018_0501 / 2000년대 작품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중략... 손기환은 어째서 '정치적 팝'이라는, 기시감이 들 되 낯선 경향으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 것일까. 답을 구하기 전에 먼저 그의 회화와는 다른 단서로 목판화를 거론할 필요가 있겠다. 손기환의 목판화작업은 회화에 비해 서정적이다. 또한 액티브한 칼맛과 이미지는 회화에 비해 표현적이기도 하다. 회화는 소재들과 역사적 의미항들의 재배치로 인한 사회적 사건과 현상을 '진술'하고, 목판화에서는 거기에 개인적 감성을 덧붙여서 '표현'한다. 다루고 있는 장르나 매체에 따라 자신이 정한 내용 전달방식을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만화와의 융합을 시도하는 회화, 정서적인 감수성의 회화적인 목판화, 기타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의 혼성적 형식이 손기환의 작업들에서 장르들 간의 속성을 넘나들면서 서사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손기환_불청객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80.3cm_1985


미디어마다의 어법이나 조형적 맥락을 달리하듯, 회화에서도 손기환의 소통을 위한 전략적 형식선택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다큐멘터리사진·만화·카툰·민화·문인화·근대기 딱지본 책표지·딱지·극장 간판 형식 등 이미 기호화되고 양식화된 대중적 시각이미지의 차용에 따라, 비슷한 주제라 하더라도 구사하는 문법과 형식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효과적인 전달을 확장하기 위한 형식 실험을 계속 진행한 것. 적절한 시각적 표지와 이미지를 제시하며 동시대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발언을 해온 것이다.


손기환_타!타타타타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130.3cm_1985


이런 방식은 표현적·서정적 회화가 갖는 작가의 주관적 감성보다는 객관적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중적 기호들을 분단의 기표로 전환시키며 시각적 관습의 해체 및 의미구조의 재생산을 꾀한다. "뻔"한 대중적 기호들을 차용하면서, 그 뻔한 소재들의 의미를 박탈하고 이를 또 다르게 재맥락화하는 데콜라주Decollage 혹은 브리콜라주Bricolage로, 그 의미를 전유하고 또 재전유Re-appropriation한다는 것. 손기환 본인의 사회·역사적 관점을 정치적 통찰로 번안하기 위해 팝적인 소재와 어법들을 전용한 것인데, 이는 기성정치와는 다른 화가의 시점에서 현실을 조망할 때 가능한 일이다.


손기환_우리동네9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94cm_1992


손기환_홍길동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3×100cm_2000


대중매체를 통해 소비되어진 보도(광고)사진이나 만화도상들의 차용은 스투디움Studium의 범주에, 그런 소재들을 차용한 재배치는 특정 의미로 작용하는 풍크툼Punctum으로 진화해서 기의화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풍크툼은 보통의 회화들과는 달리 '표현'에 의한 감성적인 '결론'보다는, 공감과 인지적 해석을 통한 내용 전달의 메카니즘을 말한다. 손기환의 작업이 작업내용뿐만 아니라 회화라는 매체의 개념까지, 즉 정치성을 담보하는 소통구조와 기제를 아우르는 인지적 연상과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일방적으로 내용을 전달하며 현실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직접적인 선전과는 다른 지점이다.


손기환_DNZ-풍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0×200cm_2015


손기환_3。-죽음의 백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584cm_2017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손기환(뿐만 아니라 모든 참여적 작가의) 작품이 당장 정치적으로 기능을 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알제리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필요한 빵 한 조각보다 유용하지 못한 소설쓰기의 무력감을 토로했던 샤르뜨르의 경우처럼, 정치를 다루거나 말하는 작품들도 현실정치에 곧바로 작동될 수는 없다. 현실정치와 문화정치학적 입장으로 개진되는 예술행위와의 간극이다. 작품이 현실정치에 작동하는 것은, 미적 형식의 감상과 함께 작품과 관객 사이에서의 다층적 작용에 의한 해석의 결과로 인해서다. 작가의 기표가 관객의 기의로 콘텍스트화된 메시지가 공감을 통해서 증폭하며 사회적 연대가 될 때, 비로소 그 작품은 현실정치의 영역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다....중략 (정치적 팝, 팝의 정치학-손기환의 회화 중에서) ■ 김진하



Vol.20180405c | 손기환展 / SONKIHWAN / 孫基煥 / painting


영소(詠宵)
박진화展 / PARKJINHWA / 朴珍華 / drawing
2018_0314 ▶ 2018_0403



박진화_영소(詠宵)_종이에 연필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61103e | 박진화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8_0314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영소(詠宵)' 드로잉 전시에 부쳐 ● 이번처럼 드로잉만으로 하는 전시는 서울에서는 2001년 가을에 갤러리 '신'에서 한 후, 거의 17년 만이다. 그 사이 나는, 내 그림의 내용은 어느 정도 달라짐이 있었을까. 사람들은 저마다 때마다 어떤 변화가 있게 마련일 텐데, 나로서는 그 변화의 정도가 도무지 명확하게 체감되지 않는다. 물론 나도 알게 모르게 그 시간만큼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박진화_영소(詠宵)_종이에 연필

박진화_영소(詠宵_종이에 연필


박진화_영소(詠宵)_종이에 연필


이번 전시를 앞두고 나는 크게 두 가지를 의식했다. 하나는 내 전시가 늘 그렇듯 전시된 작품들은 나름의 내용들로 읽히겠지만, 전체 분위기에 있어서는 그림에서 '소리의 문제', 즉 그림이 지닌 청각(聽覺)의 맛을 잃지 않으려 고심했다. 이 땅에는 보는 것만이 아닌 들리는 맛이 있는 그림도 필요할 거란 생각에서였다. 또 하나는 '의식과 사유의 문제'인데, 이 점에서 나는 특히 나만의 생각을 넘어 우리가 사는 땅 전체가 머금은 의미들(사연들)을 더 깊게 따르고 싶었다. 그래서 '땅'이 지닌 낌새는 앞세우고, '나'라는 주체적 취향은 뒤로 물러서 내가 덜 강조된 전시가 됐으면 하는 생각이 많았다. 그러나 '땅'을 앞세우고 '나'는 물리치려는 내용의 전시가 쉽겠는가? 때문에 이번 전시는 연필 드로잉이 갖는 특성에 의지하여 '(전체를 위해)내가 나를 물리치려는 노력' 정도의 성격으로 이해됐으면 싶다.

박진화_영소(詠宵)_종이에 연필


박진화_영소(詠宵)_종이에 연필 

박진화_영소(詠宵)_종이에 연필


참고로 이번 드로잉전시에 대하여 나는 『영소(詠宵)』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영소'는 동학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가 지은 '동경대전(東經大全)'에 실린 시문(詩文)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이번 드로잉전시 명칭은 '동경대전' 안에 담긴 '영소'라는 시문의 이름을 빌려온 것이다. 이 '영소(詠宵)'는 저녁 또는 밤을 노래한다는 의미다. 지난번 갤러리 '신'에서의 전시명칭이 『밤』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번에도 '밤의 노래'에 몸이 기울여진 건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왜? 나는 자꾸 '밤'에 기대는가. 하여간 이 '영소'라는 시문에 잡혀 연작으로 몇 점 그리게 된 배경은 그 시문이 지닌 어떤 장력(張力) 때문이었다. 알 듯 모를 듯한 그 시문들은 부족한 내가 보기에도 울림이 컸다. 매우 광활하면서도 세심하고, 현시(現時)적이면서도 초월성이 깃든, 한 두 문장으로 세상의 천리들을 오롯이 포괄해내는 짜릿함이 물씬했다. 커다란 우주의 자연성을 슬그머니 한 자루에 쓸어 담아 넣어둔 듯한, 작은 보따리를 풀어 뭇 생명체를 낱낱이 해방시킨 듯한, 그런 오묘함의 신비성이 나의 심경을 여지없이 잡아챘던 것이다. 이를 기회로 '수운사상'에 더 깊이 빨려들 것 같아 기쁘다. 전시를 마련해준 '나무화랑'에 깊이 감사드린다. ■ 박진화


 

Vol.20180314b | 박진화展 / PARKJINHWA / 朴珍華 / drawing



탐욕이 폭력으로 질주하는 비윤리성에 주목, 13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

2018년 03월 02일 (금) 13:32:22 조문호 사진가 press@sctoday.co.kr

화가 김재홍의 <살-(생.사.육)> 전시가 지난달 21일부터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살 연작'(108점)과‘Undressed’(5점), ‘동행’(6점) 등을 선보이는 14년 만의 유화작업이라 화단의 관심도 컸고 푸줏간을 연상시키는 전시이미지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SNS를 통해 공개한터라 나도 오래전부터 기다린 전시였다.




▲ 작품을 설명하는 김재홍 작가

내가 작가를 알게 된 것은 동강의 ‘두메산골사람’을 기록할 때다. 동강이란 동일한 대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김재홍씨 그림에 자연스레 관심을 가졌는데, 그가 동강에서 그린 작품 중 '모자상'은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뼝대가 수면에 반영되어 대칭을 이룬 작품으로 그 속에 모자의 얼굴을 형상화했다.


그는 그동안 그림책이나 동화책의 일러스트에 빠져 회화작업은 손을 놓고 있었다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작품을 2년 만에 완성했다는 점이다. 그것도 구상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1년이 걸렸다니, 실제 작업에 몰입한 시기는 1년 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그의 치열한 작가정신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인데, 얼마나 치밀했으면 처음 구상한 내용이 작업 도중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린다. 잘 그린 그림이 반드시 좋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이 좋은 그림이 아니던가?

그의 그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좋은 그림이다. 동강의 일련의 작품들이 그랬듯이, 이번에 선보인 <살-(생.사.육)>은 마음을 움직이기에 앞서 하나의 충격이었다.



▲ 동행, 91x182cmx3, Oil on canva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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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행, 122x244cm, Oil on canvas 2017

사실적인 김재홍씨의 그림들은 사진적이기도 하다. 마치 붉은 조명이 켜진 정육점 풍경 같기도 하고, 몸 파는 홍등가가 연상되기도 했다. 인간도 욕망의 고기로 팔린다는 점에 동질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잔인성과 비도덕성을 각인시킨 이번 전시는 이광수 교수 말처럼 ‘인간은 악이다’란 말이 먼저 떠올랐다. 가축의 털을 벗겨 드러난 살을 보는 순간, 온갖 위선의 거죽에 가려져 있는, 인간의 본질을 만날 수 있었다. 

 



▲ Undressed, 91x182cmx3, Oil on canvas, 2017


그동안 맛있게 먹어 온 닭고기에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이 일어났고, 더 이상 육식은 않겠다는 결심에 이르게 된 것이다. 별 생각 없이 먹어 온 육식에 대해 다시 한 번 반성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데, 아마 이보다 더 가치 있고 흡인력 있는 작업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살-연작' 108개로 이루어진 가축의 도살 형상들은 때로는 인체가 연상되는 그림도 있었다. 여러 개의 인체를 가축과 뒤섞어 배치했는데, 가축을 지배하는 인간과 지배 당하는 가축을 같이 본다는 의미다. 


미술평론가 임정희씨는 전시 서문에서 김재홍의 그림에서 이미지와 메시지의 단순 연결을 우려하기도 했으나, 이렇게도 말했다. “이미지 자체를 사회적 실천의 산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담는 기호로 확장시키면서, 이 이미지를 통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논쟁적인 사안들이 다루어지는 문화적 공론장의 중심을 세워가려는 참여적 실천행위였다”. 

자본주의의 탐욕과 인간의 폭력적 본능을 이처럼 실감한 적이 없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작품의 배치도 일조했을 것이다. 다닥다닥 붙은 이미지의 중첩성이 더 강한 메시지를 던진 것 같다. 

 



▲ 살 28x58cm 108개,유화)부분 2017


개막식 날 전시장에 들어서니 발 디딜 틈 없었다. 여지 것 내가 본 나무화랑에 이처럼 많은 작가들이 몰린 적은 일찍 보지 못했다. 다들 그의 작업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108점을 연결한 작품 '살'을 한 눈에 볼 수 없어, 사람들 사이로 한 작품 한 작품 뜯어봐야 했다.

가축의 생애는 비참했다. 온통 내장이 드러나고 털이 벗겨진 채 매달린 소름끼치는 장면이었다, 비좁은 공장식 사육장에서 사료로 키워지고 오로지 인간의 배를 채울 고기로만 살찌워져서 도살로 생을 마감한다.


인간은 더 많이 먹고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동물의 살육을 합리화한다. 인간의 탐욕이 폭력성으로 질주하는 비윤리성에 우리 모두 주목해야 한다.


이 전시는 오는 13일까지 열린다.




'

화가 김재홍의 “살-(생.사.육)”전시가 지난 21일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렸다.
푸줏간을 연상시키는 전시이미지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SNS를 통해 공개한터라 오래전부터 기다린 전시였다. ‘살 연작’(108점)과 ‘Undressed’(5점), ‘동행’(6점) 등을 선보이는 14년 만의 유화작업이라 화단의 관심도 컸다.

내가 작가를 알게 된 것은 동강의 ‘두메산골사람’을 기록할 때다. 동강이란 동일한 대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김재홍씨 그림에 자연스레 관심을 가졌는데, 그가 동강에서 그린 작품 중 “모자상"은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뼝대가 수면에 반영되어 대칭을 이룬 작품으로 그 속에 모자의 얼굴을 형상화하였다.




그동안 그림책이나 동화책의 일러스트에 몰두하느라 회화작업은 그의 손을 놓고 있었다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작품을 2년 만에 완성했다는 점이다. 그 것도 구상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1년이 걸렸다니, 실제 작업에 몰입한 시기는 1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의 치열한 작가정신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인데, 얼마나 치밀했으면 처음 구상한 내용이 작업 도중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린다. 잘 그린 그림이 반드시 좋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이 좋은 그림이 아니던가? 그의 그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좋은 그림으로 생각한다. 동강의 일련의 작품들이 그랬듯이, 이번에 선보인 “살-(생.사.육)”은 마음을 움직이기에 앞 서 하나의 충격이었다.


 



사실적인 김재홍씨의 그림들은 사진 적이기도 하다. 마치 붉은 조명이 켜 진 정육점 풍경 같기도 하고, 몸 파는 홍등가가 연상되기도 했다.

인간도 욕망의 고기로 팔린다는 점에 동질성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인간의 잔인성과 비도덕성을 각인시킨 이번 전시는 이광수교수 말처럼 ‘인간은 악이다’란 말이 먼저 떠올랐다.

가축의 털을 벗겨 드러난 살을 보는 순간, 온갖 위선의 거죽에 가려져 있는, 인간의 본질을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맛있게 먹어 온 닭고기에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이 일어났고, 더 이상 육식은 않겠다는 결심에 이르게 된 것이다.

별 생각 없이 먹어 온 육식에 대해 다시 한 번 반성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데,

아마 이보다 더 가치 있고 흡인력 있는 작업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살-연작"108개로 이루어 진 가축의 도살 형상들은 때로는 인체가 연상되는 그림도 있었다. 여러 개의 인체를 가축과 뒤섞어 배치했는데, 가축을 지배하는 인간과 지배 당 하는 가축을 같이 본다는 의미다. 미술평론가 임정희씨는 전시서문에서 김재홍의 그림에서 이미지와 메시지의 단순 연결을 우려하기도 했으나, 이렇게도 말했다. “이미지 자체를 사회적 실천의 산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담는 기호로 확장시키면서, 이 이미지를 통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논쟁적인 사안들이 다루어지는 문화적 공론장의 중심을 세워가려는 참여적 실천행위였다”





자본주의의 탐욕과 인간의 폭력적 본능을 이처럼 실감한 적이 없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작품의 배치도 일조했을 것이다. 다닥다닥 붙은 이미지의 중첩성이 더 강한 메시지를 던진 것 같다. 개막식 날 전시장에 들어서니 발 디딜 틈 없었다. 여지 것 내가 본 ‘나무화랑’에 이처럼 많은 작가들이 몰린 적은 일찍 보지 못했다. 다들 그의 작업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108점을 연결한 작품 “살”을 한 눈에 볼 수 없어, 사람들 사이로 한 작품 한 작품 뜯어봐야 했다.





가축의 생애는 비참했다. 온통 내장이 드러나고 털이 벗겨진 채 매달린 소름끼치는 장면이었다.

비좁은 공장식 사육장에서 사료로 키워지고 오로지 인간의 배를 채울 고기로만 살찌워져서 도살로 생을 마감한다.

인간은 더 많이 먹고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동물의 살육을 합리화한다.

인간의 탐욕이 폭력성으로 질주하는 비윤리성에 우리 모두 주목해야 한다.

이 전시는 3월13일까지 ‘나무화랑’(02-722-7760)에서 전시된다.
























































































살(생.사.육)
김재홍展 / KIMJAEHONG / 金宰弘 / painting
2018_0221 ▶ 2018_0313



김재홍_살_캔버스에 유채_58×28cm×108_2017_부분

초대일시 / 2018_022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파편적이고 비규정적인 이미지, 새롭게 존재론적 지평을 열다 ● 오랜만에 김재홍의 유화작업들을 만난다. 2월 21일부터 3월 13일까지 인사동에 위치한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으로. 14년만이다. 전시서문을 쓰기도 전에 화가 김재홍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SNS를 통해 전시될 작품들의 일부를 해상도 높은 사진 자료로 공개하였고, '살', '벌거벗은', '동행'의 세 가지 주제 범주에 따라 씌여진 작업노트도 공개하였다. 너무 선명한 작품 사진들과 작업의 의도를 매우 분명하게 밝힌 작업노트 때문에 전시 서문이 한낱 요식행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문을 쓴다면, 화가 자신이 전한 메시지와 화가가 그린 이미지 사이가 기울어진 경사면으로 이어지고 있고, 꽤 넓은 틈이 벌어져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경사 때문에 한 쪽으로 쏠리고, 틈새 때문에 새어나간 세계를 펴고 주워 메꿔서 사잇길을 다시 놓으려 한다. 이 사잇길에서 더 많은 세계들과 더 작고 더 짧고 더 긴 세계들이 만나기를, 불분명한 소리와 다양한 몸짓과 낯선 냄새로 소통하면서. ● 김재홍의 작업은 이미지를 일종의 텍스트로, 즉 인간이 서로의사소통하는 언어로 다루어왔다. 여기에서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는 일의적으로 확정될 수 없는 역사적 관계로 맺어져 있는데, 그 배면에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동질화 또는 이질화가 역사적 단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전제도 자리잡고 있었다(분단의 땅과 갈라터진 피부). 자연스럽게 화가는 이미지 자체를 사회적 실천의 산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지 자체를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담는 기호로 확장시키면서, 자신의 그림을 일정한 방식으로 의미작용의 조직체로 간주해서 상이한 단계에 맞춘 형상들을 작업해 왔다. 

 


김재홍_동행_캔버스에 유채_182×91cm_2017



이미지와 텍스트가 장애없이 전환되거나 번역될 수 있고, 이미지와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공통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화가의 입장에 근거해서야, 이미지를 이데올로기 비판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작업의 내재적, 심층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언어와 시각이미지가 공통적인 근원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 그 생각이 아마도 의미론적 차원에서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그림의 형태와 표현방식을 결정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의 형태와 표현방식에 일정 코드를 개입시키고 이미지의 담론적 성격을 강화함으로써, 관람자들 이 그림과 직접 조우하는 대신 관람자들의 자유로운 접근과 능동적인 참여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론장을 형성하고 공동의 가치와 공통의 의미를 확인코자 하였을 것이다. 그에게 그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참된 가치와 동형적인 이미지였고, 이 이미지를 통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논쟁적인 사안들이 다루어지는 문화적 공론장의 중심을 세워가려는 참여적 실천행위였을 것이다. ●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드러난 사상이라는 김재홍의 작업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김재홍은 하나의 동질적인 전체로 포괄될 수 없는 현실, 무한히 산재되어 있는 파편으로서의 세계, 세계와의 직접적 만남이 사라진 물화된 세계를 육감과 직관의 복귀를 통해 전면적으로 현전시킨다. 총체성을 파악하는 이미지의 종합으로서가 아니라, 이미지의 파편으로, 그리고 이미지의 비규정성을 토대로. 오랜만에 만나는 김재홍의 작업에서 우리는 균열의 시간, 비시간적 시간, 소멸의 시간이 흐르는 동요와 떨림을 '느낄' 수 있고, 죽어버린 시간에 자리한 어둠의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사라진 시간의 흔적을 '만질' 수 있다.






김재홍_동행_캔버스에 유채_182×91cm×3_2017



이번에 전시되는 그의 회화작업들은 이전 작업들처럼 서사와 구상을 미적 체험의 의미론적 조건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14년 전인 2004년 '사비나 미술관'에서 보여준 리얼리즘적 재현 형식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역사적 현상에 총체적인 시각을 부과하려던 유토피아적 추동력은 약화되거나 소멸되었고, 역사적 상황을 현실적인 매개로 단단하게 연결시켜 서로를 상관적으로 입증하려는 서사 구성의 유기적인 특성도 사라졌다. 또한 형식에 대한 주된 관심을 형태의 개별화와 단편화에 집중함으로써, 시각적 중심원근법에 따른 묘사의 일관성과 이미지의 안정적인 의미생산 코드를 동요시키고, 추상적 보편성과 초역사적인 함축에 갇혀 있던 리얼리즘 회화의 진부한 전통에서도 벗어나 있다. ● 놀랍게도 이번 전시 작품들의 서사와 구상은 전적으로 언어적 의미작용에 따라 이미 도식화되어 고정성을 획득한 것만을 직접 관계하지 않는다. 오히려 혼란스러운 감각을 용인하고 고정성을 유동화시키며 층위간의 상호전환을 활성화하는 잠재적 공간(예컨대 간간이 붓질의 흔적이 남겨진 검은 색조 띤 중립적 배경으로 이루어진 빈 공간, 그림 전체에 위치한 차갑고 음울한 배경면, 그리고 몸의 형상에 끼인 그림자)도 함께 관계 맺는다. 작가가 느낌으로 열어 보이는 세계인 이 잠재적 공간은 번역불가능하고 코드화되지 않고 비재현적이다. 잠재적 공간, 또는 잠재적 비존재가 출현함으로써 그의 그림에는 새롭게 존재론적 지평이 열렸다. 전시되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서사와 구상(형상)은 탈서사와 비구상(비형상)과 동시에, 언어와 이미지가 동시에, 형태의 출몰을 동시에,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풀고 엮는다. ● 관습적으로 선행경험에 의존하던 의미는 경험 중에, 경험의 경과 속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고통과 분노, 기쁨과 슬픔은 고통과 분노의 기억이나 기쁨과 슬픔의 기억에 의해서만 사후적으로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나 분노를 그리고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는 그 순간에도 새롭고 독특한 의미가 생겨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과 분노,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신체의 다양한 반응들, 몸짓과 표정, 근육의 수축과 이완, 피부의 땡김과 쳐짐처럼 의식의 통제를 벗어난 감각적 표현이라 해서 의미의 목록이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김재홍의 이번 전시에는 이전에 작품의 의미체계에 속해있지 않던, 또는 은폐되어 있던 감각적 표현이라는 항목이 추가되었고, 모호함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감각적 표현(또는 이미지의 세부)은 변형된 소재(도축된 닭의 몸통 그리고 그 위에 중첩된 인간의 몸), 주제의 특이함('육식의 종말'), 정서적 폭력성, 그리고 강한 색채감과 더불어 새로운 의미를 구성한다.




김재홍_Undressed_캔버스에 유채_182×91cm_2017

동일한 규격(28×58cm)의 캔버스에 그려진 108점, 244×122cm 크기의 작품, 91×181cm 크기의 6점 작품 등 모든 전시작품의 회화적 이미지는 시간의 어떤 순간을 그대로 담은 듯한 사진 이미지처럼 현재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 현재란 실제로는 공간적으로 '여기와 저기'(here and there), 시간적으로 '이미와 아직'(yet and not yet)의 사이에서 규정되지 못하고 긴장 속에 존재한다. 김재홍의 그림은 현재성에 담긴 이중 구조를 하나로 통합하지 않고 오히려 각도와 구성, 화면배치를 통하여 관람자들이 균열의 긴장을 느낄 수 있도록, 균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균열의 단면을 만질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의 배려는 균열적 성격을 극대화하거 나 강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훼손되거나 약화되지 않도록 적정수준을 가늠하는 일이다. 그래서 화면은 동적이며 정적이다. 균열의 방향이 화면 바깥의 외부를 향하기도 하고, 화면 안, 내부로도 향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균열의 정도가 크거나 깊지 않아서인지 잠재적으로 내비치는 불안한 감각은 때때로 안정과 지속의 가짜 현실을 좇아 균열의 긴장을 완화시키려 하거나 균열을 봉합하고자 한다. ● 화가는 닭의 몸통을 성적으로 모호한 모습으로 그렸다. 닭이건 사람이건 동물의 몸통을 비틀어 생식기가 관람자를 향해 정면에서 보이도록 배치했다. 몸에는 공공연한 털이 남아 있지 않고, 성기는 다리 사이로 길게 뽑혀져 있거나 두툼한살 사이에 베어져 들어가 있다. 때로는 양 성징(수탉과 암탉, 여자와 남자)이 함께 드러난 몸을 그렸고, 생물학적 성이 비워진 몸을 그렸다. 화가는 몸을 권력의 작동방식에 따라 함락당하는 수동적 육체의 궤적으로 드러내면서, 몸을 죽음, 폐기, 말소, 비어있음에 소속시켜 육체적 접촉이 차단당한 분리된 개별 이미지로 보여준다. 몸의 움직임이 생물학적 활동의 원리로서 중요성을 가지면 서야, 움직임의 자유로움은 생물을 자극하는 육체의 새로운 상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김재홍의 몸(살)의 이미지가 감각의 자극적인 교란(이것을 종교에서는 쾌락이라 부르지만)을 배제하고 죽어버린 시간에 갇혀버린다면, 흐르는 현재, 언제나 변화하는 현재, 미미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적인 운동, 작고 작은 순간적인 시간의 존재를 느끼는 것이 가능 할까를 묻게 된다. ● 화가 김재홍이 현실에서 취한 소재는 화가가 그것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해석적인 의도에 봉사하면서 변형되었고, 결국 생생하게 살아있는 소재(현실 소재)는 화가의 의도 속에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닭들이 공장식으로 사육된다 해도 숨 쉬고, 알을 품고, 모이를 쪼아 먹고, 소리 내고, 심지어 날기도 한다. 작품의 완성과 함께 소재에 해당하는 현실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닭들의 몸이 화가의 의도를 따라 변형되어 하나의 동질적 전체에 포괄되어서 관람자들의 놀라움과 감탄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다른' 현실의 생성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닭의 몸, 닭 껍질, 닭 피부 등의 소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결코 보지 못하고 지나친 세계를 촉각적 표면으로 가시화해 준다는 점에서, 전통적 리얼리즘 회화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감각적 표현의 의미화 과정을 새롭게 만나게 한다.



김재홍_Undressed_캔버스에 유채_182×91cm×3_2017


육식문화에 공고하게 다져진 특별한 관계는 여러 시기에 걸쳐 여러 장소에서 결합하였고, 모든 사회의 생태환경적·정치경제적·사회문화적인 원동력 형성에 도움이 되는 정교한 네트워크를 구축하였으며, 그 네트워크의 다양한 경로는 우리의 삶과 세계관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도축(살)장, 자동화된 공장형 비육장, 거대 축산단지 형성과 문화적·역사적 세력들과의 독특한 결합, 그리고 그것으로 초래되는 환경적 위협과 생태계 파괴, 인간을 위한 식량에서 가축을 위한 사료로 전환된 전 세계 곡물 등 김재홍의 전시 주제는 우리의 삶을 사회의 제반 현상과 연관시킨다. 시간성이 개입할 수 없는 회화의 매체적 한계 때문에 회화적 주제는 이미지를 읽기 대상으로 만들면서도, 이미지를 읽기에 저항하는 대상으로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미지는 이중 계열, 또는 상반된 두 흐름의 지속적인 긴장관계 안에 서만, 흐르는 시간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육식의 종말'이라는 주제는 어느 한쪽으로 파악될 때 더 올바르다거나 더 정확하다고 파악되는 것이 아니어서 중첩과 분리의 이중성을 이미지로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김재홍의 작업에서는 주제가 두 흐름으로 다루어지기는 하지만, 때때로 화가 자신이 내린 올바름의 판단이 흐름 간의 이동을 방해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미지 안에는 언제나 이질적인 두 흐름이 존재하고 어떤 흐름도 제거하지 않으며, 하나로 통합되지 않는다. ■ 임정희


김재홍_동행-4_캔버스에 유채_122×244cm_2017


살(생·사·육) ● 가축. 인간에 의해 생명을 얻은 후, 더럽고 비좁은 공장식 사육환경과 천의를 무시한 인공사료로 미쳐가고, 오로지 인간의 먹거리인 맛있는 고기로서만 살찌 워지는데 그 존재 의미가 강제지워진다. 뿐인가, 최소한의 생명윤리조차 배제된 도살로 생이 마감된다. 죽어서도 스스로가 아닌, 인간의 살이나 배설물이 된 뒤 에야 비로소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운명. '살-연작' 108개 중 가축형상은 인체가 연상되어지게 그렸고, 여러 개의 인체 도 가축과 혼돈되어지게 배치했는데, 지배자(인간)와 피지배자(가축)를 동등 하게 보도록 의도한 것이다. Undressed ● 털과 가죽을 벗긴 후 드러난 살을 보는 순간, 온갖 치장과 위선의 거죽 밑에 가 려져 있는, 가축의 그것과 다를 것 없는 인간의 본질이 오버랩 된다. 그 벗겨지 는 가죽은 인간의 옷 같다. 제복, 발레리나 무용복, 드레스… 등. 이런 인간과 가축간의 비윤리적이고 참혹한 '지배/피지배자의 관계', '식/육'의 관계가 인간과 인간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깊고 넓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 그 비극성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동행 ● 우주에서 볼 때, 극히 미미한 존재인 인간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매우 우스꽝스 러울 게다. 티끌보다 못한 지배욕구가 가진 비윤리성의 크기가 끝이 없어서다. 만약 내가 신이라면, 이 폭력적 권력자와 힘없는 약자의 위치를 동등하게 해 주고 싶다. 인간의 힘은 낮추고, 지배 당하는 생명들의 지위는 높게 해서 같은 계급을 갖게끔. 그래서 그려본 것이 둘이 공평하게 뒤섞인 새로운 종으로서의 생명체다. 人과 獸의 경계가 사라진 존재. 그리고 인간 ● 인간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선택적 살생을 넘어, 더 많이 먹고·저장하고·이 윤을 추구하기 위해 타 생명체들의 살륙을 합리화한다. 진짜 인간적 야만과 폭 력은 바로 이 지점부터 시작한다. 모든 죽임의 목적이 잉여자본의 힘으로 타자 에 군림하려는 탐욕, 즉, 과대욕망과 폭력성으로 진화하고 질주하는 신자유주 의와 같은 제도가 웃고 있는 바로 여기…, 말이다. ■ 김재홍



Vol.20180218a | 김재홍展 / KIMJAEHONG / 金宰弘 / painting





'정선 고드름축제'의 정영신씨 장터사진전을 지키다 서울로 도망쳐 왔다.
지난 12일 잠시 왔다 처음이니 일주일이 더 되지 않았는가?

아무리 사모님의 지엄한 분부에 따르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쉬어야 한다는 노동법까지 들먹이며 핑게거리 하나 만들었다.

21일은 셋째 수요일이라 인사동 사람들이 만나 술 한잔하는 날이라고...






더구나 21일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김재홍씨 전시 오프닝도 있지 않은가.
반가운 분들을 여럿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마지막 겨울을 인사동 사람들과 함께 나누자.
별 볼일 없다면, 모처럼 인사동 나들이 한 번 하심이 어떠신지요?

아래 사진은 지난 12일에 찍은 인사동 거리풍경이다.






인사동도 인사동이지만, 이 곳에서 긴 세월 살아 온 인사동 사람들이 더 반가웠다.
그 날은 30여 년 간 인사동 골목 골목을 누비며 행상을 해 온 권경선씨를 만났다.
올해로 아흔에 이르는 연세에 아직까지 인사동 주방을 기웃거리며 참기름이나 양념을 팔지만, 이제 잘 팔리지도 않는다.

요즘은 다들 일괄적으로 배달시키거나 사전에 시장을 보아, 행여 재료가 떨어 진 식당이나 기대해야 하니, 발품도 되지 않는다.
“이제 나이가 들어 일하기도 힘들다”는 권씨 할머니는 자리만 있으면 아무데나 앉아 쉰다.






그리고 인사동의 부자로 꼽히는 ‘아주화랑’ 이기준씨도 만났다.

30년 전 이분의 건물 옥탑 방에 세 들어 몇 해를 살지 않았는가?

항상 부지런하고 근면한 것은 좋으나, 이제 좀 편하게 지내도 좋으련만

부인과 딸까지 민예품 가게에 메 달려 억측 스럽게 사신다.
그 많은 돈, 죽을 때 아까워서 어떻게 죽을까?







이날은 공교롭게도 인사동의 돈 많은 부자도 만났고, 어렵게 살아가는 빈민도 만났다.

다들 뼈 빠지게 일하건만 있는 사람은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지만,

없는 사람은 평생을 거지처럼 살아야 하는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또 한 번 열 받는다.

두 분 다 고생스럽게 사시니, 어쩌면 똑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행복의 기준은 결코 돈이 아니니까...

사진, 글 / 조문호















 

산과 나무의 단상‘展 오는 13일까지 ‘나무화랑’에서 열려... 
2018년 02월 05일 (월) 14:54:18 조문호 사진가 press@sctoday.co.kr  


인사동에서 도예가 김용문의 도판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산과 나무의 단상‘이란 제목이 붙여진 도판화전은
오랜만에 보는 그의 귀국 전시로, 새로운 수묵드로잉까지 보여주며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김용문 하면 막사발이 먼저 떠오르고, 막사발 하면 머리말아 올린 김용문의 상투가 연상된다.




▲ 도예가 김용문씨, (사진=조문호)


가히 전설적인 장인이다. 젊은 시절부터 옹기에 매료되어 다양한 옹기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의 예술세계는 막사발을 만드는 도예에 한정되지 않았고 퍼포먼스에서 글과 그림까지 전방위 작가다.

그러한 다양한 작업들도 결국은 막사발을 위한 부대작업에 불과할 것이다. 오죽하면 ‘나는 막사발이다’라는 책까지 펴냈겠는가?


토우와 도자기로 삶의 애환을 담은 퍼포먼스도 여럿 있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도 단양 충주댐에서 가진 ‘수장제’였다.

84년 단양 하방리를 지켜 온 좌청룡과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의 네 풍수 동물을 토우로 빗거나 조각해

많은 이주민들이 울부짖는 통곡에 장단 맞춰 댐 속으로 잠기게 하는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최고의 퍼포먼스라 메스컴에서도 일제히 나발 불었다. 그리고 87년 대학로에서 가진 ‘옹관장전’도 파격적이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화가 강용대씨가 상여에 실려 가는 모습,

큰 칼로 옹기 작품을 내려치는 무속인 무세중씨의 모습은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인사동에서 한 전시도 여럿 기억난다. 인사동 거리에 좌판 깔아놓고, 푼돈 받고 토우 파는 전시에서부터,

인사동에서 제일 넓은 ‘아라아트’ 전시장 바닥에 수천 개의 막사발을 펼쳐 전시를 하는 등 특이한 전시가 많았다.



33x33cm 도판2 2017


그는 홍대미대 공예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토속적인 막사발에 승부를 걸고 활동 해 온 작가로,

지금은 터키 국립 하제테페대학교 도예과 초빙교수로 떠난 지가 8년째라 자주 볼 수 없는 작가다.


경기도 오산, 충청도 괴산, 전라도 삼례 등지로 막사발 박물관을 옮겨가며 ‘세계막사발축제’를 36년째 이끌어 왔다.

또한 세계막사발심포지엄 19회, 국내외에서 가진 개인전도 43회나 개최했다.


투박한 토속적 미감의 막사발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도예가 김용문의 도판(陶板) 그림전은

산과 나무를 대상으로 한 추상화인데,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예술혼을 담아냈다.



67x67cm 화선지3 2017


우리 문화의 속내가 들어다 보이는 대개의 작품들은 지두문(指頭紋) 기법으로 이루어졌다.

지두문(指頭紋)이란 유약이 마르기 전 빠른 손가락 놀림으로 풀, 나무 등의 문양을 그려 넣는 기법인데,

손가락이 스쳐간 자국들은 우리 선조들의 멋이고 아름다움이다.


대개의 지두화(指頭畵)가 둥근 접시나 정사각형 도판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보통 지름 25cm정도의 작은 작품서부터 지름 70cm가 넘는 대형 작품 등 다양한 크기로 제작된다.


이번에 처음 선보인 수묵드로잉전은 김용문씨의 또 다른 미적영역 확장이었다.

다들 자기 영역 밖의 작업을 하다보면 다소 어설퍼 보일 때가 더러 있으나, 거침없이 그려낸 그의 솜씨는 달랐다.

이는 막사발에 길들여진 원숙한 솜씨와 오랜 세월 몸에 베인 지두문 화법이 그대로 화폭에 옮겨 진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88x58,5cm 화선지7 2017

67x67cm 화선지1  2017


주로 먹과 안료, 붓과 지두문으로 표현한 드로잉은 때로는 힘이 솟는 박진감이 넘치고

때로는 막사발 질감처럼 투박하거나 거칠도록 자유롭게 넘실댄다. 여지 것 보아 온 수묵화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폭발력을 가진 작품이 있는가 하면,

전형적인 우리 민족의 미감을 드러낸 인물상에서는 마치 자애로운 불상을 닮은 듯 편안하다.



88x58,5cm 화선지4 2017


어떤 작품은 난을 치듯 나무나 잡초를 그리기도 했는데,

흥선대원군의 난이 여인네의 여림이라면, 김용문의 난은 남정네의 투박함으로 말할 수 있겠다.


지난 31일 가진 개막식에서 보여 준 강만홍교수의 퍼포먼스도 인상적이었다.

마치 도공들의 원혼을 불러 모우는 것 같은 동작으로 작품에 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이 전시는 2월 13일까지 ‘나무화랑’(02-722-7760)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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