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영태 화백의 ‘心象石’전이 지난 17일부터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2019년 ‘나무아트’의 '80년대 미술 되돌아보기 프로젝트-4'에 초대된 이 전시는

김포 '민예사랑'에서 열린 문영태 유작전을 보지 못한 분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다. 


 



문영태의 ‘심상석’에는 기층 민중의 질긴 생명력과 한의 정서가 듬뿍 배어있다.
돌에 마음의 상을 새겨 넣은 ‘심상석’시리즈는 80년 광주 민중의 상흔을 담은 역작이다.
상처받고 소외된 민중의 아픔을 형상화 한 작품을 통해 민중미술의 진중한 힘을 느껴보기 바란다.






문영태는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한 지사이며 작가로서 미술, 문학, 사진, 기획 등

문화 전역을 넘나드는 팔방미인이었다. 민주화와 통일을 향한 작가의 의지와 순발력 그리고 친화력이

80년대 우리나라 미술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문영태씨 이름 앞에는 지사, 선비, 작가 등 따라 붙는 수식어가 많지만,

그를 가장 우러러 보이게 하는 것은 자기를 숨기고 낮추는 겸손이었다.

그런 훌륭한 작가를 우리는 너무 일찍 잃었다.






지난 17일은 인사동에서 반가운 사람 만나는 셋째 수요일이기도 하지만, 이 전시는 빠트릴 수 없었다.

다시는 전시장에 드나들며 사진 찍어 올리지 않겠다는 글을 올린지가 잉크도 채 마르지 않았지만,

평소 너무 좋아하는 작가인데다, 미망인으로부터 많은 신세를 져 어쩔 수 없었다.






지난 김포 전시에서 작품을 보았으나 전시기획자의 작품 배치에 따라 느낌이 다르기도 하지만,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은근히 기다린 전시이기도 하다.





전시장에는 문영태 화백의 미망인 장재순여사와 딸 문지민씨, 그리고 딸의 품에는 외손자까지 안겨 있었다.

화가 김재홍씨와 성기준씨를 만났고, 김진하관장은 관람객에게 작품을 설명하는 조용한 분위기였다.

뒤늦게는 화가 송 창, 나종희, 미술평론가 곽대원씨도 나타났다.






전시된 작품들을 돌아보니 마치 문영태 화백의 유령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부드러우면서도 강단 있는 그의 미소가 작품마다 넘나드는 것 같았다.

상처 난 두상의 작품에서는 작가의 강한 저항이 느껴졌다.





화강암 같은 형상들의 질감을 위해 표면이 거친 속칭 '코끼리 똥지'를 사용했단다.
습기에 약한 누리끼리한 똥지에 그려진 그림들은 자연스럽게 얼룩덜룩한 무늬를 남겨
세월 풍화에 의한 고색창연한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이 전시는 5월7일까지 열리니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쓴 문영태 화백에 관한 글이니 참고하기 바란다.
http://blog.daum.net/mun6144/5148






















- 문영태, 변혁기의 作家 혹은 志士-


<작가·선비·지사>

영태형님은 사람들에게 인정 많고 관대했으되 그의 세계인식은 매우 단단한 분이었지 싶다. 80년대를 오로지 미술운동에 전적으로 투신하면서도 사적으로는 명예나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 신학철 선생 말씀처럼 큰 명분에 따라 행동하는 지사였다. 80년대 「서울미술공동체」등의 활동 땐 조직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후배들을 다독이며 지원을 했고, 「민미협」창립과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며 운동의 전면에 나설 때도 그랬다. 90년대 이후 김포로 낙향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문화운동에 관한 자신의 전력을 자랑하거나, 타인들을 비방하거나, 서운해하는 일이 일체 없었다. 여러 지식에 관해서는 달변이었지만, 미술판 얘기가 나오면 먼저 상대방의 말을 조용하게 미소 지으며 듣고 나서 말했다. 선비 같은 담담함. 신사이자 지사였다.


그러나, 확고한 세계인식과 담백한 인격은 작가로서의 출세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던 듯싶다. 작가는 자신의 내·외면을 아우르는 세계에 대해서 집요한 욕망으로 표현하거나 발언하는 존재인데, 그러기엔 영태형님은 그 품성이 너무 담백했다. 또 개인적 작품보다는 미술운동이라는 명분을 우선시했다. 그러다 보니 자기 내면으로부터의 온존한 개별성과, 시대현실과 더불은 운동미술과의 사이에서 작업은 그리 순탄치가 않았을 것이다. 괴리와 간극이 컸고 고민이 많았을 터인데, 작가적 욕망보다는 문화운동가의 대의를 선택했기에 영태형님의 작업은 자연스레 소극적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보다는 "사람의 재주는 그릇과 같아서 모나고 둥글고 한 것을 함께 갖출 수는 없다"라는 이인로의 『파한집 破閑集』한 구절을 옮겨 썼듯이, 그 스스로가 대의와 명분에 따라 운동가의 길을 선택했다고 여겨진다.


「그림마당 민」 관장직을 내려놓은 이후인, 91년도 '경의선' 모임을 통한 분단현장과 DMZ를 탐사한 사진작업의 국토문예적 '다큐' 혹은 '르포르따쥬' 작업은 영태 형님의 미술운동가와 작가 사이 간극을 성공적으로 좁혀주었다. 민중미술의 역사적·정치적 맥락을 수용한 작업이고, 또 그 개념적 접근이 성공적이기도 한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찌프차와 발로 답사하며 기록한 이 작업들을 형님은 개인전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작가 문영태에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80년대 미술운동으로 중단되었던 작가로서의 위치를, 이 변주된 장르와 형식으로 다시 확보할 수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2000년대 이후엔 거의 형님을 만나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 부분이 가장 궁금하다. 왜 그랬을까. 세속의 출세에 초탈한 선비라서 그랬을까. 맑은 물에 사는 물고기가 탁류에선 살지 못하는 법이라서 그랬을까…

언급했듯이 문화운동가인 영태형님은 미술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적·사회적 네트워크로 진보운동권 및 문화운동 사이 각 장르 간의 연대와 공동활동을 많이 실행했다. 그러나 엄연히 그의 미술운동의 출발점은 화가였다. 80년대 초중반 당시 20대였던 나를 비롯한 또래의 후배들에게 문영태 형님(이하 존칭 생략)은 스타였다. 후배들의 미술운동을 뒤에서 진심으로 지원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81년도 개인전의 '심상석' 연작의 깊은 인상 때문이기도 했다. 그 '심상석'으로부터 문영태란 작가의 이후 작업과 운동은 시작된다.


<심상석 心象石>

마음의 형상이 새겨진 돌. 혹은 돌에 새겨진 마음. 어떤 것이든 무형의 마음이 구체적 사물인 돌로 치환하는, 마음과 돌이 인과 혹은 등가의 의미를 띄는 단어다. 그리고 그 인과의 단서로 '상 象'이란 연결고리가 작용하는 보통명사다. 그런데 약간 갸웃거려지는 게 있다. 보통 '형상'이라고 하면 '코끼리 象'이 아니라 거기에 '사람人'이 붙은 '형상 像'을 쓰는데, 그래야 '마음이 새겨진 돌의 형상'이라는 의미가 정확해지는데, 문영태는 굳이 '象'을 쓴 것이다. 한문 내지는 한학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 왜 그랬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당연히 이유가 있을 터, 곰곰 생각하다가 얼마 전 우연히 본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정모 박사가 전한 '코끼리象' 문자가 만들어진 과정 얘기에서, 내 나름의 답을 얻었다.

거기에서의 설명은 이렇다. 본디 고대 중국에는 코끼리가 없었다. 인도에 다녀온 사람들이 코끼리를 묘사하는 설만 풍성했다. 말이 있으면 표기할 문자가 필요한 법. 코끼리를 묘사할 문자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문자를 만드는 사람은 코끼리를 본 적조차 없으니 난감한 일. 결국 살아있는 코끼리를 히말라야 넘어 중국으로 운송하기는 불가능해서 코끼리 뼈만이라도 갖고 오게 했다. 그리고는 갖고 오는 도중 순서가 바뀐 뼈를 바닥에 나열하고 살이 없는 그 형상에 다녀온 사람의 설명과, 문자를 만드는 사람의 상상을 첨가해서 '象'이란 문자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배치하며 그 상형을 본뜬 모양이다. 즉 '象'이란 글자는 상형이되, 입체가 아닌 평면적 형상이고 거기에 상상과 추리가 개입된 문자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문영태가 이미 개념적으로 규정된 형상을 의미하는 '像'을 선택하지 않고 관념과 상상이 개입된 '象'으로 '심상석 心象石'이란 작품제목을 정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사물이되, 자신의 관념과 상상이 개입된 돌이라는 의미. 즉 현상인 마음과 물질인 돌의 결합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개인으로서의 숱한 사람(민중)들의 접힌 주름 속의 삶과 상처와 애환에 대한 그의 마음을 표제화한 의도를 말이다.


'심상석'연작은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진행되었다. 모두 종이에 연필로 그렸다. 종이는 펄프성분이 많은 다소 거친 마닐라지 계열 같다. 충무로 인쇄골목 지업사를 돌며 물어보니, '코끼리 똥지'라고 말하는 분도 있다. 그래서 습기에 약한 그 용지엔 현재 얼룩덜룩한 무늬가 자연스레 남아있다. 화강암 같은 형상들의 텍스쳐 효과를 위해서 표면이 거친 이 용지를 선택한 것으로 추측된다. 거기의 형상들은 대체적으로 무겁고 심각하다. 타제·마제석기를 연상시키는 돌의 형태로부터, 심리에 이르는 형상성, 기복적인 민중신앙과 같은 샤먼이나 토템적 아우라(1977-78), 마음이나 정서에 상처입은 사람들의 한恨(1979-80), 혹은 물리적인 폭력에 의해 몸과 두개골 등에 상흔이 새겨진 사람들(1980), 그리고 일상적인 삶의 무게와 민중적 생명력에 관한 작가의 시선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져 있다.


단단한 돌에 풍화작용처럼 마음이 흔적(心象)으로 새겨진다는 것은 뭇 생명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생존에의 의지가 긴 세월 인고의 세월을 부침하며 견딘 결과다. 문영태의 심상석에서 기층 민중들의 질긴 생명력과 한의 정서가 동시에 묻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 이 작가가 지향했던 세계가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단서다. 신학철 선생의 언급처럼, 문영태의 초기 작업은 오윤의 그것처럼 기층민중적 한·투박한 생명의지·토속신앙적 생명관 등이 얽혀져 있다. 문영태가 자신의 호를 귀신들을 불러 모으는 의미의 '집신集神'이라는 전통적 샤먼의 의미로 지칭했음을 보면 그것은 더 선명해진다. 또한 90년대 후반부터 글쓰기를 통해서 기층 민중들의 생활사에 기반 한 민속·민예 문화를 연구했음을 보면 그의 내면적 세계관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상처받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무할 수 있는 문화를 미술로 꿈꾸었고, 그런 민초들의 생명력에서 서로를 보듬는 미술의 민중성을 믿고 지향했을 터다.


그러니까 1977~79년에 이르는 작업에서는 자연 그대로의 돌 자체에 대한 관념성(일테면 청마의 '바위'처럼 원초적 생명력에 대한 의지나 경외심 같은 샤먼적 요소)이나 석기시대 도구 같은 호모사피엔스의 문화인류학적 시점이 공존한다면, 그 이후부터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등 민중들의 주름진 삶의 표정이, 그리고 80년 광주항쟁 이후에는 두부에 가해진 물리적 상흔이 주 테마로 등장한다. 돌이라는 공통의 소재가 작가의 경험적 서사에 의해서 어떻게 심리적인 분위기에서 역사적인 민중성으로 바뀌어 가는지를 이 작품들은 증거해준다. 특히 마지막 심상석에서는 광주항쟁에서 군부가 광주시민들에게 가한 폭력성이 물리적 상흔(Scar)과 정신적 상처(Trauma)로 동시에 흔적화된 묵시적 형상성으로, 그리고 비판적 정치성으로 확장된다. 이 단계가 비로소 '심상석'이 당대의 정치사회적인 요소들을 그 내용으로 견인해나가려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심상석 연작은 여기에서 중단된다. 그 이유는 문영태가 80년대 내내 작업실에서의 작품제작보다는, 미술현장에서의 기획과 운동으로 활동의 방향성을 틀어버려서다. 작품의 소통을 통한 내용전달의 간접적 정치기능보다는, 실질적인 저항을 이끌어 내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문화운동가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1984년의 '힘전'사태를 통해서 현실권력이 미술에 가하는 부당한 탄압과, 이에 대치하는 조직인「민족미술협의회」가 생기기 전 80년대 초반 미술운동의 양상은 다양했다. 현실과 발언을 필두로 광자협·임술년·실천그룹·에스파그룹·목판모임 나무 등과 같은 정기적 단체전은 차치하고라도, 젊은 의식전·80년대 미술의 조망전·횡단전·시대정신전·토해내기전·거대한 뿌리전, 삶의 미술전·푸른 깃발전… 등의 단발 기획전, 거기에 문영태가 주축이 된 민중들과의 직접적인 교류와 공동으로 작업과정을 공유하는 「시민미술학교」의 개설 등 그 양상들은 쉽게 분류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했다. 게다가 작품의 경향들은 풍자적인 사회적 발언뿐만 아니라, 서술적 역사성, 개인적 실존성과 심리, 문명비판, 꿈과 환영을 그린 초현실성 등 70년대 모노크롬 미학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형상성의 경연장이었다.


전두환정권의 탄압으로, 「민미협」이 조직화되기 시작한 시기부터, 독재권력에 구체적으로 대응하는 미술운동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양상을 중심으로 전열이 가다듬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략 이 시기부터 문영태의 '심상석'작업은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사회과학적 입장과 정치적 선전선동이 필요한 조직적 미술운동의 입장에서 '심상석'과 같은 내용과 형식의 미술은 구체적인 기능이 어려운 것이었다. 미술운동의 중심에서 각종 기획과 더불어 「그림마당 민」의 전시까지 관여하면서 따로 작업을 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지만, 그런 정치미술의 환경과 문영태 본연의 민중적 생명관은 쉽게 용해되기가 어려울 정도로 가파른 시대였다. 정치와 미술전·통일전·반고문전·여성과 현실전·탄압사례전·풍자와 해학전 등을 통해 공권력과 마찰한 현장인 「그림마당 민」책임자로서 더더욱 '심상석'과 같은 상징적 관념성은 진행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작가는 체질적인 요소가 중요하다. 인식으로 작업할 순 있으나, 의식과 체질로 작업하는 이에게는 쉽지 않다. 심상석은 그런 체질을 반영하는 유형의 작업이었다. '심상석'과 90년대 분단현장을 가로지르는 현장 다큐사진작업 전인 83~87년 시기, 간간히 단체전에 발표한 복사기를 활용한 흑백 몽타쥬 작업의 게릴라성에 주력하되, 회화작업을 계속 진행하지 못한 이유는 여기에 있으리라 여겨진다.


<문화운동 기획들>

'심상석'개인전(1981, 관훈미술관)과, 겨울 대성리전(1981~83)의 현장 작업 이후, 종이판화(紙版畵)개인전(1983, 그로리치화랑)을 전후해서 문영태는 본격적으로 미술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그동안의 작업들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의 결과였을 것이다. 문영태 본인의 개인적인 관념세계와 시대현실과의 결절점에서, 작가이자 지식인의 실천적 미술을 지향한 것이다. 이미 '겨울 대성리전' 기획팀에의 참가도 기존 제도적 미술에 대한 거부의 태도를 띈 것이었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공고화한 사회적 미학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화가'가 아닌 동시대적 책무를 수행하는 '기획자'의 역할에 대한 정치적 행동이라 여겨진다. 여기서부터 문영태의 미술에 대한 실천은, 시민들을 향한 구체적인 소통을 담보하는 '문화운동'으로 바뀐다.


일반시민,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위한 「시민미술학교」(1984), 뜻이 맞는 후배들이 창립한 「서울미술공동체」(1984)의 회원가입, 화가 박건과 '시대정신기획위원회'를 결성하고 1983년 제1회 『시대정신展』기획 및 1984년 한국 최초의 미술무크지『시대정신』지 창간(1984~1986), 을축년 미술대동잔치(아랍미술관, 1985), '20대에 의한 힘전' 탄압사태 대책기구, '105인의 작가에 의한 삶의 미술전'(아랍미술관, 1985), '해방 40년 역사전'(광주, 대구, 부산, 마산, 서울, 1984)참여, 이후 「민족미술협의회」창립위원(1985), 김용태·홍선웅·유홍준과 더불어 「민미협」의 전시기구인 「그림마당 민」(1986)운영에 관여하고, 또 관장을 역임(1987~88)하면서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1987년 정치와 미술·우리시대의 판화전·장망 판화전·우리시대의 성전, 만화정신전, 통일전·천상병 시화전·반고문전·기금마련전·여성과 미술전·통일전·중국목판화전·풍자와 해학전·그리고 기타 여러 재야단체들과 연대하는 다양한 기금마련전 등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면서, 「그림마당 민」을 80년대 미술운동과 문화운동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만드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림마당 민」은 그 한 해 전에 개관한 비판적 형상미술 중심인 「한강미술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대안공간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그림마당 민」은 제도권 미술관이나 상업화랑에서 수용하지 못했던 당대의 정치·사회·문화적 이슈들을 과감히 수용하며 5공 정권하에서 민주화를 위한 미술문화운동의 중심공간이 되었다. 문영태의 진정성과 헌신성이 그 바탕에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문영태는 민중문화협의회(1984)-민중문화운동연합(1987)-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1989)에도 참가하며 문예운동을 실행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계 및 대학가의 각종 집회 현장과의 연대와 이미지 제공을 실행했다. 대표적으로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의 시위현장에서의 대형 초상화와 소형전단목판화(류연복 판각)를 기획해서 미술의 현장적 기능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이런 가파른 운동의 와중에 문영태가 개인 작업을 할 수 없었음은 자명하다. 그 결과, 90년대가 되었을 때, 화가의 리듬과 체질적인 내면의 드러냄이 중단되어 버린 상태에서 다시 화가로의 복귀는 쉽지 않았다. 그대신 변혁기 미술의 대 사회적·정치적·역사적·문예적 기능과 가치를 깨달았던 문영태는 사진매체를 통해서 다큐사진으로 작업을 전환한다. 80년대를 통해서 대중적 미디어가 갖는 위력을 절감한 터라, 사진이라는 매체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며 90년대식 역사적 담론을 위해 분단된 국토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게 된다. 『분단풍경 : 열일곱 사람의 경의선 사진작업』이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그 활동의 결과물들로 책을 기획하고 출판한다. 또한 시인 김정환과 공동으로 『이 시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두사람』이라는 글+사진집도 간행한다. 사진과 미술과 출판과 춤을 엮어낸 실험적 기획이었다. 90년대라는 바뀐 문화지형에서의 능동적인 발언을 모색한 운동의 일환이었다. 동시에 전통적인 민중문화와 민속문화의 연구와 글쓰기에 몰두하게 된다. 1996~1998 월간 『사회평론 길』에 연재한 「문영태의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性)」과, 2001년 사진가 이지누와 공동으로 발간한 계간『디새집』에 연재한 「궁시렁궁시렁 문영태의 집 이야기」와 같은 민속사회학적 글이 그것이다.


사실, 문화운동가로서 문영태는 일찌기 출판미디어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미술보다 대중적인 출판미디어의 소통성을 일찍 깨달아서 그렇겠지만, 그 자신의 독서열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전시장 미술로부터, 현장미술, 그리고 출판미디어의 활용 모두를 아우르며 미술이 어떻게 동시대적 문화로 그 정치성을 확보해야 할지에 대한 전략적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한 시대를 증거하는 아카이빙 기능에 대한 판단도 있었을 것이었다. 분단풍경 이전인 80년대에도 부정기 간행물이자 전시도록을 겸한 『시대정신』1·2·3권을 비롯해서, 정기간행물이자 민미협 회지인 『민족미술』, 『80년대 탄압미술사례집』등의 발간에 관여하며 동시대 문화의 정치적 운동성과 그 당위에 대한 소통공간을 확보하려고 애썼다.


기획력과 실행력, 그리고 순수한 열정으로 80~90년대를 관통하면서 민족민중미술에 뚜렷한 문화운동의 족적을 남긴 문영태였지만, 작가로서는 다소 불운했다고 볼 수 있다. 미술운동으로 인한 본인의 작업단절도 그렇지만, 90년대 야심차게 진행한 '분단풍경' 사진작업도 결국 빛을 보지 못해서다. 화가가 다큐사진으로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천성이 무욕인 문영태는 자신의 작업이 상업적으로 성공하거나, 작가로서의 지명도를 확보하는 데 대해선 무심했을테니 더 그렇다. 그래서 힘들게 DMZ를 답사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발표도 하지 않고, 타계할 때까지 그의 서재 깊숙한 곳에 보관만 한 것이다. 물론 90년대 후반의 『사회평론 길』과 『디새집』 연재에 대한 글쓰기의 연구와 부담감이 작용했었을 터이지만, 어떻게 보면 문영태는 참으로 욕심 없는 사람이라서 한편으론 아쉽다. 운동가로 또 한 인격체로서는 지금까지도 존경할 만한 선배지만, 그의 투명한 빈 마음으로 인해 축소된 작가적 활동은 우리 미술계에선 공실률이 커서 그렇다. 다만 이번에 그가 불편한 몸으로 직접 국토를 횡단하면서 남긴 90년대 '분단풍경' 다큐사진의 발견은, 비록 만시지탄이지만, 작가로서 문영태의 삶과 내공도 기획자로서의 그것 못지않게 결코 녹록치 않았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이라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팔방미인. 속되지 않음으로 속세의 출세는 못했으나 많은 사람의 기억에 오롯이 순수한 사람이자 운동가이자 작가로 남는 존재. 문영태는 바로 그런 선배였다.


<분단풍경>

1991년 문영태는 사진가 이지누와 화가 16인, 총 17명으로 '경의선' 그룹을 조직한다. 「그림마당 민」관장을 그만두고 난 얼마 뒤다. 이때 활동한 내용들을 엮은 책이『분단풍경 : 열일곱 사람의 경의선 사진작업』이다. 그리고 곧 이 그룹은 해체되었으나 문영태는 본격적으로 분단된 국토의 현장과 현실을 조망하는 작업을 자신의 작업테마로 잡고 사진가 이지누·소설가 김하기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분단현장. 그 공간은 한반도 왼쪽 끝 서해 백령도부터 오른쪽 끝인 동해 고성·양양의 7번 국도에 이르는 DMZ 남쪽, 북위 38~37°사이에 한정되어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서해안 교동도부터 서도면-강화도-김포반도-자신의 집이 있는 월곶면 보구곶리-임진강-오두산전망대-전곡-통일촌-도라산전망대-경의선잔해-경원선-전진교-철원-월정리-구철원-백마고지-태풍전망대-평화의 댐-생창리-백골전망대-땅굴-적근산·대성산-명월리-양대리-해안분지-땅굴-심곡사-을지전망대-도솔산-대암산-삼재령-까치봉-통일전망대-7번 도로 해안 등 한반도의 중앙을 수시로 횡단하면서, 90년대의 분단현장·분단현상·분단문화·야생식물·문화재·풍경·사람들의 모습 등 인문지리적 요소까지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35mm 슬라이드가 대략 수천 장 남아있으나, 96년부터 『사회평론 길』과 『디새집』에 연재하는 글쓰기에 몰입하면서 20년 이상 장기보관만 한 탓인지, 슬라이드 표면의 화학적 변용으로 상태가 좋지 않다. 아쉽다).


'심상석'과 같은 내면적 관념으로부터의 회화작업에 비해서, 역사적 현실인식이 구체적으로 반영되는 다큐사진의 소통성은 문영태에겐 분명 매력적이었다. 주관적 '관념'으로부터 객관적 '인식'으로의 작업태도 변화는 결국 '회화'에서 '사진'이라는 미디어의 탈바꿈으로 연결되었다. 그런데 10여년 만의 사진을 통한 개인 작업으로의 전환도 결코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문영태는 이 작업도 공동체적인 입장과 미학을 바탕에 두고자 했다. '경의선'모임을 조직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기존의 사진가들과는 또 다르게 화가들의 시선이 반영된 미적 형식을 추구했을 것이고, 동시에 사진가들과 보다 풍부한 내러티브와 형식의 결합도 바라서였을 것이었다. 분단시대 '분단'의 전형성을 찾기 위해서 동료작가들과의 공동체적인 협업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동시대적인 공론화를 시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평소 선후배나 동료들과의 인간적인 스킨십을 좋아했던 그의 성격상 작업과정도 '함께하는' 것에 의미를 두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발간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 '경의선'은 각 작가들마다의 스케줄로 인해 활동을 종료했다. 그리고 얼마 후 문영태는 앞서 언급했듯이 사진가 이지누, 소설가 김하기와 함께 155마일 DMZ를 횡단하는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이때 동행한 김하기는 이 경험을 써서 답사기행집 『마침내 철책 끝에 서다』(문학동네, 1995)를 발간했다.


회화·지판화·드로잉·복사와 마스타 인쇄방식의 판화·사진작업을 진행했던 문영태의 궤적 중에서 80년대 초반의 '심상석'과 90년대의 '분단풍경' 사진작업이 문영태 작가궤적의 뼈대로 보인다. 대략 15년여의 간극을 둔 시각물 작업인데, 이 두 작업의 내용만큼이나 그 장르와 매체적 특성도 다르다. 또한, 주관적인 내면·이웃들의 삶의 애환·거기에 80년 광주의 상흔을 오버랩하면서 민중적 서정성과 서사성을 확보하는 단계가 '심상석'의 진행과정이었다면, 10여 년의 문화운동가를 거친 후 진행한 '분단풍경' 사진에선 철저하게 역사적 현장성을 기록하는 국토문예학적 리얼리스트가 된 점이 달라진 점이다. 이 분단풍경 사진 작업으로 인해, 문영태가 문화운동가가 아닌 분단을 말하는 작가로서 최소한의 자기 소임이자 책임을 다했다고 여겨진다.


현재 남아있는 수천 장의 분단풍경 사진들은 동시대 현실과 역사를 관통하려는 문영태의 실존적·실천적인 작가적 '태도'를 증명하는 것이며, 동시에 겸허하고 성실하게 분단현장을 답사하고 연구한 정직성의 증거물이다. 작가적 성공에 대한 어떤 욕심도 없이, 이 땅의 민중미술가로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작업이었던 듯싶다. 그래서인가, 이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미술'에 대한, 혹은 '작업'이라는 것에 대한, 아니 '작품'이라는 것에 대한 어떤 선험적·제도적 명제를 버리고 그저 담백한 인간 문영태의 흔적인 자연스런 작품을 느낄 수 있었다. 미술 이전에 민중미술가·문화운동가·인간 문영태의, 속기나 작위성 없는, 선비·지사·민중적 작가의 풍모가 환기되어서 그럴 것이다.


<글쓰기>

다재다능한 사람은 남기는 것도 여러 가지다. 문영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화가로서의 작업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습득한 여러 지식의 잡학/박학다식, 미술에 관한 전문적 지식, 여타 인문학에 관한 폭넓은 독서는 문영태의 평소 언변과 잡설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평소 과문하다가도 대화가 될 양이면 그의 눈은 반짝이고 집중도는 깊었다. 특히 술자리에서 문영태는 대화의 흐름에 따라, 예의 그 느리되 약한 경상도식 억양으로 즉흥적이고 재미있는 얘기를 엮어냈다. 이쪽저쪽, 전통/현대, 한국/외국, 미술/인문, 고전/뉴스 등을 넘나들면서 여타의 우스개 농담에 이르기까지 사통팔달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인가 그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즐겁게 얘기할 때면, 말뚝이의 그것처럼 재미와 흡입력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 형님은 장편을 쓰면 정말 잘 쓰시겠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글쓰기도 그랬다. '분단풍경' 사진작업 이후 1996년부터 1998년까지 김포에서 집중한 글쓰기, 특히 『사회평론 길』에 연재한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性)」을 보면 온갖 지식들이 종횡으로 엮여진 이야기꾼의 기질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독특한 문장과, 구어체, 가끔씩 구사되는 비문, 그리고 술에 취해서 쓴 듯이 널뛰는 단락 넘나들기 등은 그야말로 생생하게 날 것의 이야기체다. 재미지다. 잘 다듬어진 글쟁이들의 세련됨에 비하면 이 덜 다듬어진 문체의 맛은 묘하게 중독성이 있다. 진중하다가도 가볍게 직진하고, 심각하다가도 농담이 튀어나오고, 인문적이다가도 세속적 세태가 엮어지면서 한바탕 판소리나 마당극처럼 풍자적이고도 해학적인 입담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성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에 이르면 철저하게 남녀평등의 젠더적 사유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걸진 음담패설로 전통적 풍속에 대한 재미를 돋우면서도 그 행간에서 남성중심의 위계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한 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정치·사회·민속·민예·미술·여성·역사·신화·그리고 풍속에 관한 다양한 시점(視點)으로 통섭한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성에 관한 이 글은, 글이 나온 지 2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새로운 서술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고담준론의 학자가 아닌, 전래적 이야기꾼이나 판소리 한가락처럼 민중적이다. 탁빼기 왕대포 한 잔 마시며 말하고 듣는 얘기처럼 흥취도 돋는다. 술술 읽힌다. 찰지다. 그래서 문영태'적(的)'이다. 거기에 비하면 2001년에 『디새집』에 연재한 「문영태의 궁시렁궁시렁-한국의 집 이야기」는 훨씬 소담하다. 재미진 요소를 빼고 다소 담백하게 썼다. 집을 의인화해서 접근한 민속적 생태성에 관한 서술방식이 새롭다. 아마도 화가의 글쓰기라 그런 모양이다. 원근법이나 명암법에 의한 서술성보다는, 그런 고착된 시선이나 감성의 서술방식을 전복하는 입체적 시각과 태도로부터 유래하는 파격에 대한 문영태의 기호(嗜好)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무튼, 이 글쓰기는 문영태의 작품·미술운동과는 또 다른 인문과 그의 삶이 교직된 세계다. '학자'라고 하는 특정한 영역으로 좁혀지지 않는 지식인이자 이야기꾼으로 자기 역할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이었던 셈이다. 김포에 은거하며 평소 관심 있었던 전통적 민중성과 민속적 영역에 대한 홀로서기 같은 작업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 글쓰기에서도 문화운동가로서 문제의식은 여전히 드러난다. 미술운동판을 떠나 유유자적하게 책읽기와 한학(漢學), 그리고 낙서들을 즐기면서도 세계에 대한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통찰은 가려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질이다. 그 기질이 오롯이 드러난 작업이 글쓰기였다고 생각된다. 서로 다른 장르이자 내용인 그림도, 사진도, 글쓰기도 모두 문영태'적(的)'이다. 팔방미인이되, 무엇을 하든간에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잘 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문영태는 '자기인생'을 자연스럽게 잘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그의 인격 아닌가.


<영태형님>

전 민예총 이사장 김용태 선생이 타계했을 때 영태형님은 한겨레신문의 「길을 찾아서-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란 연재기획에 추모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거기서 민미협과 그림마당 민 시절의 추억 중에 이름 장난의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다. 김용태 이사장, 문영태 본인, 후배인 미술평론가 최석태의 이름 마지막 글자로 말장난 농을 한 것이다. 이렇듯 이름자로 농을 할 만큼 80년대 미술운동과 문화운동현장에서 작고한 김용태 선생과 영태형의 헌신적인 역할과 동지애가 깊었다는 뜻이다.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이들은 치열했으되 여유가 있었고, 긴박했으되 위트가 있었고, 조직적이었으되 인간적 의리가 있었다. 게다가 문화운동의 중심에서 동지애까지 끈끈했다. 그렇게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을 가로지르며 맺은 인연의 끈은 아직도 그를 흠모하는 많은 후배들의 기억에 질기게 남아있다.

문화운동 하는 입장이니 본인도 별로 수입이나 여유가 없었을 터인데도 어려운 후배의 전시에서는 그림을 사주었고 술값도 도맡아 내주었다. 그리고 명분 있는 사업엔 사재를 아낌없이 냈다. 『시대정신』 발간도 그랬고, 「그림마당 민」의 운영도 그랬고, 또 『디새집』 발간 때도 그런 태도였다.


나는 다른 동료들에 비해선 영태형님과 비교적 적게 어울린 어린 후배였다. 술자리도 그리 많이 가지지는 않았다. 다른 동료작가들과는 달리 화곡동이나 김포 형님 댁으로 가서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미술판에서 형님의 순수한 활동은 늘 보았고, 그런 형님을 마음으로 존중했다. 90년대 이후 가끔 내 사무실에 들러 장익화 형과 나를 앉혀놓곤 신명나게 얘기하거나, 인사동 길에서 홀로 마주칠 때의 다소 쓸쓸한 듯 조용한 미소를 대할 때나, 형수님과 퇴근하는 형님께 예의바른 인사를 할 때면 악수를 하며 인자한 표정으로 지긋하게 바라보던 그 눈빛이 좋았다.

사람은 그릇에 담긴 물처럼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게 확실한 모양이다. 영태형님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나 후배라는 형태 없는 물을 담아내는 형태가 있는 큰 그릇이기도 했고, 또 그런 여러 타인이라는 그릇들이 둥글든지 모나던지간에 각자의 그릇 형태에 담담하게 자신을 맞추어 주는 물이기도 했다.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이란 노자와, 이율곡의 '水逐方圓器 空隨小大甁'이라는 구절도 떠오른다. 그 많은 선배·동료·후배들과 함께하며, 그 다른 여러 개성들을 담아내는 그의 유연함의 크기는, 자신의 욕망을 비워서 커진 마음으로 인해 가능했을 거다.

화단의 선배나 또래 작가들을 만나서 영태형님 얘기가 나오면 모두가 이렇듯 같은 말을 한다. 그랬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태형님은 인자한 선배이자, 열정적인 문화운동가의 순수한 모습으로 비친다. 고행의 한 시대를 그리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문득 생각해본다. 그런 삶은 쉽지도 않고 또 별로 많지도 않을 것이다. 80~90년대 작가시절, 그리고 인사동 문화운동시대, 그 이후 김포로 은거한 90년대 말부터의 고독한 글쓰기 세월, 그 격랑을 영태형님은 작가로, 문화운동가로, 학자로, 의리있는 사람으로 온전하게 자신의 진짜 삶을 품위있게 살아냈다. 그래서 나는 영태 형님을, 그 삶의 궤적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그는 사유가 깊었던 작가, 言과 行이 일치했던 문화운동가, 보고 따를 만한 진짜 '선배'이자 '형님'이었다는 생각에 말이다. ■ 김진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김석展 / KIMSUK / 金錫 / sculpture
2019_0403 ▶︎ 2019_0416



김석_녹색숙취_깨진 소주병 파편, 금속_58×55×33cm_201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61019c | 김석展으로 갑니다.

김석 홈페이지_www.kimsuk.com


초대일시 / 2019_0403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생각'의 '조각'1. 김석의 인체조각엔 고독한 현대인의 고뇌가 묻어있다. 30여 년 전 초기작인 소조 브론즈작업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료와 조각형식의 변주 과정에서도 인체조각을 통해서 이런 실존적 분위기는 지속되었다. 그런데 근작에선 그런 포즈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냉정할 정도로 감정선을 절제하고 있다. 현대인에 대한 입장을 진술하되, 한편으로는 그 내용을 어떻게 모던한 조각언어로 변환해서 제시할 것인지 형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서 그런 듯하다. ● 근작에서 김석의 이런 조형적 태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연필로 만든 인체작업이다. 2016년 김세중미술관 개인전에서 처음 선보였다. 지름 15cm 정도 굵기에 길이 1~2m에 이르는 대형연필을 나무로 먼저 만들고, 그것을 구체관절 인형처럼 몸통과 사지로 서로 연결해서 조립한 모양이다. 여기에서 연필은 물리적 질료, 내용적 소재, 반성적 사유의 단서로 등장한다. 그가 만든 연필에 대한 접근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해보자.


김석_녹색숙취_깨진 소주병 파편, 금속_58×55×33cm_2018_부분


연필은 쓰는 사람의 현재 상태를 기록(Homo Biblos)·표현(Homo Imago)함으로, 향후 타자의 읽기·보기·느끼기·해석하기·판단하기(Homo Sapiens)의 시발점이 되는 사물이다. 즉 연필은 필기도구인 사람(Homo Ludens)도 되고, 넓게는 그런 사람과 사람을 연결(homo communicus)하는 미디어이기도 하다. 김석의 작품에서 연필로 만든 인체는 기록하거나·표현하려는 사람의 현재진행형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과거를 인식하는 바탕에서 현재에 가장 충실한 행동인 그 행위들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표현의 본능이자 의지이고 또 가치다. "현재는 모든 과거의 필연적 산물이며 모든 미래의 필연적 원인이다. 현재에 열중하라. 오직 현재에서만 인간은 영원을 알 수 있다"는 괴테의 문장 중에서 "현재에 열중하라"는 구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바로 이런 기록과 표현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미래의 인류는 이 연필과 같은 도구에 의해서, 현재가 남긴 흔적(역사·예술)이 있어야만 비로소 과거인 현재를 통찰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된다. ●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시제를 넘나드는 김석의 작품명제는, 경화되고 고착화된 사고로부터 탈주하며 상대적 세계관을 지향하는 그의 현재와 현실에 대한 반성적 사유에 바탕한 것이다.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진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한번 그것에 빠져들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라는 까뮈의 지적처럼, 자신을 포함한 한국사회와 사람들의 이분법적인 현상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자 그런 경계를 짓는 사람들의 자기애적 집착에 대한 풍자적 레토릭이기도 하다. 누구나 쉽게 함몰되는 이항대립이나 흑백논리와 같은, 관성적으로 고체화된 맹신적 관념과 절대적 개념을 거부하는 태도가 그 바탕임은 물론이다.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4개의 연필_나무에 페인트, 금속_180×120×20cm_2018



2. 앞서 거론했듯 김석의 연필은 사람의 형상이다. 머리인 지우개, 몸체, 팔다리, 사지가 결합된 뼈대다. 인체의 원형적 구조로의 환원은 브랑쿠시를, 지방질과 단백질을 소거한 길쭉한 몸에서 풍기는 멜랑콜리는 자코메티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20세기적인 이런 특정 스타일의 특수성을 넘나들며, 지각과 감각이 동시에 노출되고 또 질량과 부피와 중량감이 거세된 이 조립식 인체조형은, 그 문체가 다면적인데도 불구하고 묘하게도 자연스럽고 리드미컬하다. 20세기 조각사를 관통한 이후, "바람에 걸리지 않는 무소의 뿔처럼" 자유롭게 형상의 내외공간을 관통한 모던한 작가의 내공이 그런 이분법적인 조형언어의 구분을 넘어서서 그런 것이라 하겠다. ● 이 인체들은 곧추서 있거나(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가리키는 사람), 십자가의 예수처럼 두 팔을 벌리고 외발로 벽에 기대어 있거나(지/그-4개의 연필), '펫 프로텍션 커버'를 목에 두른 작가의 자소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거나(지/그-천국), 지팡이를 짚은 불균형한 자세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지/그-안녕하세요 노마드씨).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천국_나무, 금속, 반려견 목 카라, 나무에 페인트, 석고_165×110×48cm_2018



그 자세에서 신체의 끝부분-손끝, 발끝, 지팡이 끝, 목발 끝-은 깔끔하게 깎인 뾰족한 연필심이다. 긴장된 상황의 암시처럼 보인다(혹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 상태로도 보이고). 미세하더라도 어떤 움직임에 의해 균형이 흔들리면 사지가 어딘가에 닿고, 그러면 자신의 체중과 하중에 따라 그 연필심의 마찰은 여러 종류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 가늘거나/길거나, 연하거나/진하거나, 직선이거나/곡선이거나, 끊어지거나/연속되거나.... 예측하기도 규정하기도 어려운 토로나 기록이 전이되는 이 불균형한 상태가 현대인의 보편적 일상이다. 그러나 쓰거나 그리는 행위와 더불어, 자신이 남긴 것을 보거나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여기는 건 큰 위안이자 고독을 극복하는 힘이다. 보편적인 사람뿐만 아니라 작가 김석에게도 작업의 가장 큰 추동력이 되는 부분일 게다. 작품의 궁극적 가치는 작가인 '나'로부터 감상자인 '당신들'에 이르면서 발생하는 교감과 공감의 프로세스에 있기에.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안녕하세요 노마드씨_나무에 페인트, 금속_170×90×60cm_2018



연필 인체는 그런 김석의 다양한 심리와 생각의 조각적 페르소나이자, 그의 작품을 보는 관객이 본능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페이소스의 단서이기도 하다. 작품이 읽히는 영역에서부터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겠지만, 그들이 좀 더 흥미롭게 읽고 보도록 소통체계를 흥미로운 형식으로 제시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기도 하다. 나무와 흑연(사물)-연필(도구)-기록·표현(기능)-읽히고(해석)-소통(현상)-의미(가치)에 이르는 제작과 소통과정 전체가 김석이 관심의 범주로 삼은 이유다. 의미 매개항(연필인체)-조형적 결과물(조각)-소통과정(개념적 사고)으로 주제에 이르는 프로세스와, 질료의 건조한 표정으로 구성된 이 기하학적 조형방식은 기존 조각의 관습으로부터 일탈하고 이탈하려 선택한 작가의 문체다.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가리키는 사람_나무에 페인트, 금속_202×117×80cm_2018



김석의 이 연필작업에서는 인체를 형상화하되 시각적/물질적 대상묘사의 방식에서 벗어난 점이 먼저 두드러진다. "현대적 사유는 재현의 파산과 더불어 태어났다. 동일성의 소멸과 더불어 동일자의 재현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모든 힘의 발견과 더불어 태어난 것이다." 들뢰즈의 이 말처럼 김석의 연필인체는 대상의 재현적인 서술방식으로부터 완전히 일탈했다. 뿐만 아니라 기존조각에 흙을 붙이거나 돌을 깎는 질료성과 신체적 표현성으로부터도, 또 조형으로 환원하는 추상성으로부터 비껴나간 것이기도 하다. 비물질적·비표현적·비서술적인 중성적 기호로, 그리고 그의 '생각'을 '조각'하는 '개념'적 문법으로, 대상의 재현에 가려졌던 힘인 '현대적 사유'를 들추어내려 한 것이다. ● 그래서 그는 "이렇다"라고 그가 규정한 내용을 작품에 담거나 제시하지 않는다. 기록과 표현을 남기는 현대인들의 실존적이고도 다층적인 상황만 새로운 조각형식으로 제시할 뿐이다. 작가인 그의 '생각'이 관객들 각자의 '생각하는 방식'과 접점을 이루는 지점을 확인하려는 의도다. 관객이 "왜?"라는 질문을 하면서, 그의 기의를 읽어내려고 다가오는 장소 말이다. 그곳은 작품의 소통회로와 소통현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해석이 이루어지는 생각의 활동공간이기도 하다. 그 장소를 비워놓은 채로, 작가에게도 관객에게도 동시에 해당하는 조각적 대화를 화두이자 공안으로 삼아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서 발생하는 '나'와 '당신'이 발견한 생각과 그것 사이를 잇는 또 다른 기록과 표현의 조형화가 바로 그의 연필형상 이면에 숨은 주제다. "당신이 본 이 조각이 당신에게 과연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키는가요?"라는...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절름발이 연필_나무에 페인트, 금속_217×48×7cm_2018



3. 사람이 살아온 삶의 궤적은 기록과 표현의 원형이다. 그 자체가 기표이자 기의들의 분모다. 호흡하는 짧은 순간부터 인생 전체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 뇌에 축적된 생각의 양은 방대하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많은 것을 망각하면서 저장된 데이터의 양을 축소한다. 또는 외적인 이유로 그 데이터들을 유실하기도 한다. 넘치는 기억과 정보량을 무의식적으로 조절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각자가 처해진 현실에서의 심리나 욕망 관념과 해석의 편차에 의해서, 그 기억은 다시 취사선택되고 편집되어서 전혀 다른 의미망으로 변주되거나 새로운 해석의 단서로 작용하기도 한다. ● 하물며 그 기록·표현을 읽거나·보는 타자의 해석이 개입하면, 텍스트가 콘텍스트로 전유되는 과정마다 주체와 타자 사이의 간극에 의해 배태된 차이의 너비는 더 넓어진다. 거기에서 '아포리아'라는 유격현상도 발생한다. A=B라는 등식의 고착을 넘어서서, 관객의 해석과 상상에 따라 A=B일 수도 C, D, E일 수도, 혹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이처럼 지시언어나 객관적인 기록조차도 사람마다 입장에 의해 다양한 코드로 변주되고 전치되어서 작용하는데, 상징적인 구조의 미술작품 해석은 더 많은 관념·개념과 유기적으로 연결되거나 불특정하게 단절되면서 전혀 다른 맥락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 이럴 경우, 롤랑바르트에 의하면, 타자에 의한 해석만 남고 저자(의 의도)는 죽은 것이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탈 지시 언어와 비유나 상징이 야기하는 이런 해석 불일치야말로 현대미술의 꽃이 아니겠는가. 비껴가는 해석의 과정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다양한 편차에 의해서 결국 관객과 작가가 만나는 통로(작품)는 고립되지 않고 더 다양하게 넓어진다. 김석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작가의 주제 제시와 관객 수용과정의 불일치라는 이런 소통과정에 대한 그의 입장도 담겨 있다. 세계와 조각에 대한 그의 '생각'을 '조각'해서, 다른 생각의 관객과 만나는 개념의 광장에 가 있겠다는 열린 태도 말이다.



김석_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녹색 바니타스_깨진 소주병 파편, 폴리에스터_22×20×15cm_2019



4. 이번에 김석은 연필인체와는 전혀 다른 표현적 맥락에서 깨진 술병의 파편을 집적한, 새로운 시도의 서정적인 작품도 전시한다. 녹색 소주병 파편을 가공해서 일일이 붙인 해골 형상인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녹색 바니타스」, 역시 소주병의 날카로운 파편을 집적한 「녹색숙취」, 와인병의 긴 파편을 활용한 「청춘숙취」란 인물 흉상이다. ● '현대인'이란 내용적 문제에 지속적으로 천착하는 그의 작업이, 연필인체 작업과는 다른 질료·어법·표현·분위기로 또 어떻게 새롭게 시도되는지 볼 수 있다. 이 작업에서는 깨진 술병과 파편이라는 날카로운 녹색의 물성이 빚어내는 서늘하고도 비애로운 이미지가 도드라진다. 이 즉물적인 형상은 생각과 판단 이전에 시각과 촉각의 범주에서 관객의 감성에 직접적으로 파고든다. 마치 권진규의 자소상 흉상을 연상시키는 형태의 이 흉상은 어떤 정신적 초월성의 이미지로도 연결된다. 실존의 무게에 짓눌린 현대인도 그런 일상의 와중에서 스스로 어떤 가치를 향해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다는 듯이. 왜일까. 어째서 연필인체의 개념적인 문법과는 정반대의 직접적 감성에 의한 표현을 시도하는 것일까. 술병의 유리 파편은 당연히 술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재다. 물리적 재료가 내용적 소재와 자동적으로 그 이미지의 일치를 이룬다. 깨진 술병조각으로 구성된 형상은 술 마시는 사람이나 행위로 연결된다.


김석_청춘숙취_깨진 와인병 파편, 금속_58×50×33cm_2019


술은 인간 스스로 자기정화 할 수 있는 기제이자, 자기를 혼탁하게 만드는 물질이기도 하다. 술의 위로와 해악은 기실 술 자체와는 별 상관이 없다. 술을 마신 사람의 반응에 의해서 술에 대한 긍/부정의 관념이 구축되는 것이다. 어떤 이가 마시면 즐겁고 흥겨운 신명이, 또 어떤 이는 심각하고도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나는데, 다른 어떤 이가 마시면 꼴불견과 폭력이 노출된다. 또 같은 사람이라도, 술을 마시는 이유·상황·기분·함께 마신 사람과의 관계 등에 의해서, 그때와 지금의 현상과 행동은 달라진다. 그러니까 김석의 이 술병파편 조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람에 대해서 갖는 판단과 편견의 절대성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기존의 관념이나 개념 이전에 우리는 우리가 보고 판단하는 모든 대상과 현상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순수한 '백지환원'의 입장에 서있는가 하는 질문으로써 말이다. 김석은 선험적인 관념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일상성으로부터 존재와 현상을 인식하려는 태도의 인간형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 다만 술병 파편의 날카로움과 작업결과인 묵직한 형상의 오버랩은, 연필인체 작업을 진행하면서도 동시에 거기서부터 탈주를 꿈꾸는 작가의 다음 작업에 대한 예시에 해당되는 것이라 하겠다. 또다른 형식에의 본능적인 욕망과 이질적 이미지에 대한 욕구는, 늘 어떤 작업인가의 진행과정에서 나온다. 연필인체의 개념적인 작업와중에 표현적인 충동이 이는 거, 작가의 곤두서있고도 벼려진 조각적 질료감과 감각으로 인해서다.



김석_미메시스풍경-명암_하네뮬레 파인아트지에디지털 파인아트 프린트_97×97cm_2018



5. 지난 30년간 김석은 질주하는 현대미술의 장르파괴 현상에 동승하지 않고 조각이란 장르를 구심점에 두고 실험과 변주를 시도해왔다. 이번의 연필인체 작업이 낯설되, 한편으로 친숙하게 보이는 것은 그가 이렇듯 조각이란 장르에서 이탈하지 않아서일 거다. 다만 흑묘든 백묘든 고양이만 잡으면 되듯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미학적 형식이 중요하지 그 장르적 카테고리가 뭐 그리 대수겠는가. 그의 주제에 대한 형식적 대처가 작가로서 그의 몫이고, 그의 조각적 비유들은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경계와 분별에 대한 유연한 넘나듦을 내용으로 제시하는 것인데 말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조각적 '장인'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조각적 형식으로 구사하는 타고난 '조각가'란 생각을 한다. 개념적인 문법과 소통방식을 추구했더라도, 그가 만든 인체는 물질을 가공해서 형상을 구축하는 전통적 조각 장르의 범주에 있어서다. 또 거기에 반응하는 그의 질료에 대한 반응 또한 여전히 뛰어난 몸의 감각적 반응으로부터 출발해서 인식의 지점에 닿는 과정을 보여서다. 그의 시도가 기존 조각으로부터의 탈영토화라기보다는, 장르의 경계에서 조각적 영토확장의 실험으로 여겨지는 건 그 때문이다. 사물들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제작과정에서 보이는 그의 조각가적인 조형근육과 의지도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큰 이유이기도 하고..., 아무튼 그의 뚝심은 그야말로 '조각가'다. ■ 김진하



Vol.20190403d | 김석展 / KIMSUK / 金錫 / sculpture


'인사동 정보 > 인사동 전시가이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시안내] 김정수展 '진달래-축복'  (0) 2019.04.10
정소연展 '면벽수행'  (0) 2019.04.08
황인란展 '영혼의 집'  (0) 2019.04.05
이승원展 'I Believe'  (0) 2019.04.04
강순득展   (0) 2019.04.04




강행복씨의 아티스트북이 ‘나무화랑’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다.
지난21일 오후6시 무렵, 정영신씨와 들렸더니 김진하관장이 전시장을 지키고 있었다.

2년 전 전시한 아티스트북을 연상했으나, 추측을 뒤집은 독특한 발상의 전시였다.

목판화를 자르고 잘라 파편화시킨 조각품들을 하나하나 실로 묶거나 꿰매어,

조그만 나무 상자에 넣어 또 다른 아티스트북으로 탄생시키고 있었다.






미련한 곰처럼 억측 서럽게 해냈는데, 속이 뒤집혀 어떻게 그리 꼼꼼하게 해 냈는지 모르겠다.

절집에 들어가 만들었다니, 그건 작업이라기보다 하나의 수행이었다.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수많은 손질의 반복은 바로 무념무상의 수행이었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의 말처럼 강행복의 작업 자체가 아름다움이자, 긴 밤 지새며 맞는 화엄이었다.

조그만 작품들의 배열 또한 얼마나 조형적으로 꾸몄는지, 그보다 더 멋진 장식은 없을 것 같았다.

작품 설치를 한 김진하관장의 센스가 돋보였다.






마치 밀폐된 공간을 훔쳐보듯, 하나하나 살펴보는 재미가 아기자기했다.

나무상자에 펼쳐 넣어지거나 세워지고 눕혀지는 등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조그만 상자에 갇힌 판화 조각들이 관객과의 대화를 유도하고 있었는데,

40여년을 작업해온 노련한 작가의 실험 정신이 돋보였다.






작품을 벽에만 거는 기존의 방식에서 벋어나라는 암시도 주었다.
많은 시간을 보내는 책상 머리 맡에 올려놓으면, 볼 때마다 불가의 화엄경 같은

작가의 아티스트북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전시는 4월2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02-722.7760)에서 열리니, 놓치지 마시길...



사진, 글 / 조문호














Artist's Book - 화엄 華嚴
강행복展 / KANGHAENGBOK / 姜幸福 / printing.installation

2019_0320 ▶︎ 2019_0402



강행복_Artist's Book - 화엄 華嚴展_나무화랑_201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70809b | 강행복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1:00p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강행복(1952~) 작가가 만든 무수한 오리지널 목판화아티스트북들. ● 목판화 제판과 프린팅을 거친 온갖 이미지들은 다시 파편화되고 이리저리 이산을 하면서 새로운 이웃으로 만난다. 그리곤 직접 작가의 손으로 하나하나 실로 묶이면서 새로운 책의 형태인 물리적 사물로 제본된다. 작업실에서 모든 준비를 마티고 산사로 들어간 작가가 여러 밤을 새우며 바느질로 제책을 하는 것이다. 한권, 두권...열권...백권...묶고 또 묶고..... 그렇게 제철된 책은 책장과 같은 박스에 고이 펼쳐져서 넣어지거나, 세워지고 눕혀지거나, 벽면에 걸리거나... 낙엽처럼 바닥에 우수수 쌓여서 설치된다.


강행복_BF-19652_목판화아트북_30×30×5.5cm_2019


강행복_BB-19648_목판화아트북_9.5×9.5×5cm_2019


강행복_BF-19647_목판화아트북_57×14.5×5cm×16_2019


강행복_BF-19647_목판화아트북_57×14.5×5cm×18_2019

강행복_Meditation-19653_목판화_53×35cm×18_2019


강행복_BB-18648_목판화아트북_9.5×9.5×5cm×20_2018


강행복_Artist's Book - 화엄 華嚴展_나무화랑_2019

그러니까 강행복의 목판화는 액자속에서 벽면에 구금된 채 졸고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의 몸과 피부에 직접 스치면서 보여지는 판화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설치된 이미지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은 관객에게 말을 건다. "일상에서 나 같은 판화 본 적 있나요?" ● 실험은 작가에겐 동맥이다. 40여 년을 작업해온 60대 후반으로 접어든 작가가 목판화 형식에 대한 또다른 일탈을 감행한다. 이미지를 품은 책의 형태로 말이다.

 ■ 나무아트


Vol.20190320g | 강행복展 / KANGHAENGBOK / 姜幸福 / printing.installation


한국현대사 6 - 달, 불을 삼키다.

송용민展 / SONGYONGMIN / 宋容旻 / painting
2019_0306 ▶︎ 2019_0319




송용민_김종태_합판에 아크릴채색_84×122cm_201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71116m | 송용민展으로 갑니다.


송용민 블로그_blog.naver.com/kollwitz91

초대일시 / 2019_0306_수요일_05:00pm

관람료 / 8,000원

관람시간 / 01:00p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김종태(1958. 6. 7 ~ 1980. 6. 9) ●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김종태 동지는 초등학교를 채 졸업하지 못하고 공장생활을 시작했다.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공사판과 공장을 떠돌며, 노동자의 처참한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한 동지는 77년부터 교회 청년들과 함께 전태일 추모회를 하는 등 동일방직사건에 지원세력이 되었으며, 노동운동의 정치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79년 9월 12일 YH 사건 이후 "한울 야간학교" 교사들이 경찰서로 연행되고, 학생들이 강제 해산되고, 그렇게 기다리던 민주주의가 광주학살로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분노를 참지 못하여 분연히 일어나 신촌 이대 앞 사거리에서 "우리는 어떠한 책동도 용납할 수 없음을 경고 한다", "유신잔당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를 외치면서 분신하여 광주영령들의 민주화 투쟁에 온몸으로 함께 했다.



송용민_김시자_합판에 아크릴채색_84×122cm_2019


김시자(1961. 10. 8 ~ 1996. 1. 13) ● 노동조합의 일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헌신적으로 일 해나가면서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순리적으로 하나씩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나갔던 김시자 동지. 그런 동지에게 최태일 어용노동조합 집행부는 1월 7일 '규약위반'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사유를 내걸고 징계위원회 개최와 출석을 통보하였다. 1월12일 오후 2시경, 경주 보문단지 내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한국전력노동조합 54차 중앙위원회는 첫번째 안건으로 김시자 동지와 오경호 동지(광주전력지부 위원장) 2인에 대한 징계를 결의할 예정이었다. 최태일 집행부의 짜여 진 각본대로 징계가 이루어지기 직전, 김시자 동지는 변론을 통해 "징계는 부당하다", "이런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 "이런 상태로 그냥 있으면 노동조합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못 한다"는 말을 남긴 채 아무도 모르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동지는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채 불덩어리가 되어 회의장 안으로 뛰어 들어왔고, 운명하였다.



송용민_이문철_합판에 아크릴채색_84×122cm_2019


이문철(1954 ~ 1988. 11. 6) ● 88년 6월 27일 대원여객의 노동자들이 연장근로수당 지급을 요구하며 운행을 거부하자, 회사 측은 승무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동지를 부당 해고시켰다. 이에 동지는 부당 해고에 항의하며 삭발을 결의하고 연장근로수당 지급과 사장면담을 요구하던 중, 부당한 해고조치에 격분하여 신나를 온몸에 붓고 분신을 감행하였다. 병원에서도 "업주들이 기사들을 속여먹고 노예취급을 한다. 돈 몇 푼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대접을 받고 싶다. 노동자를 하인이나 종 취급하는 사용자들의 정신상태를 뜯어 고쳐야 한다. 주종관계가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는 말을 끝으로 부인과 세 명의 자식들을 남기고 산화하여 갔다.



송용민_이영일_합판에 아크릴채색_84×122cm_2019


이영일(1962 ~ 1990. 5. 3) ● 평소 내성적이었던 이영일 동지는 89년 11월 조사통계부 차장과 90년 2월 노동조합 대의원이 되면서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강한 애착을 갖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주)통일 측과 경찰은 노동조합에 대한 끊임없는 탄압을 해왔는데 노모에게 노동운동을 그만 하게 하라는 협박을 통해 고통을 주었다. 90년 5월 3일 동지는 식당 옥상에서 악랄한 노동조합 탄압에 분노, 항의하면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내용과 어머님에 대한 따뜻한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는 내용과 통일이 되면 아버님 고향에 가보고 싶었는데, 어머님 뼈라도 고향에 묻어 드리고 싶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였다. 이후 이날 10시 50분경 창원병원에서 운명하였다.



송용민_박영진_합판에 혼합재료_84×122cm_2019


박영진(1960 ~ 1986. 3. 17) ● 동일제강 민주노동조합 건설에 핵심적 역할을 해낸 동지는 신흥정밀에 입사하여 부당노동행위 및 임금착취에 대한 항의 중해고 철회 투쟁을 벌이다가 공권력이 투입되자 경찰과 회사 측의 폭압에 맞서 "근로기준법 지켜라, 노동3권 보장하라"며 분신하였다. 동지는 병원에서도 "전태일 선배가 못다 한 일을 내가 하겠다. 1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하였다. 경찰은 동지의 시신을 탈취하고 유가족을 협박, 화장을 감행하여 한줌의 재로 변해 인근 야산에 유해를 뿌렸으나 그 직후 동료들이 수거하여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하였다.



송용민_성완희_합판에 혼합재료_84×122cm_2019


성완희(1959. 6. 24 ~ 1988. 7. 8) ● 성완희 동지는 1987년 8월, 강원탄광에서 파업을 주동한 후 회사 측의 계속적인 탄압에 맞서 싸워왔으며 87년 12월과 88년 2월 두 차례나 부당해고를 당했으나 헌신적인 투쟁을 통해 복직을 쟁취한 바 있었다. 그러나 동료가 자신의 복직투쟁을 도와준 혐의로 해고되자 자신의 일보다 더 열심히 복직투쟁을 전개하였고, 결국 노동부와 지방 노동위원회에서도 복직판정과 복직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강원탄광 측이 이를 거부하자 동지는 동료들과 함께 복직을 위한 단식투쟁에 참여하였다. 단식 8일째인 6월 29일 동지는 동료 5명과 함께 휘발유 1통, 석유 1통을 들고 노동조합사무실에 들어가 사무실을 폐쇄하고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곧이어 구사대원들이 사무실로 진입을 시도하자 동지는 "들어오기만 하면 분신 하겠다"고 말하였으나 구사대원은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난입하였고 동지는 휘발유를 끼얹고 성냥불을 그었다. 결국 죽음과 싸우다 7월8일 아침 7시20분 끝내 운명하였다. ■ 송용민



Vol.20190306c | 송용민展 / SONGYONGMIN / 宋容旻 / painting





어제는 새해의 셋째 수요일이라, 술 한 잔 하러 인사동 나갔다.

매번 셋째 수요일마다 인사동에서 오픈하는 전람회도 돌아보고
반가운 사람 만나 술 한 잔하는 날로 정한지가 오래되었지만,
반가운 사람 만나기란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






지난 16일은 점심때부터 강민선생님을 만나 뵙기로 약속했다.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청년 전만규 매향리 평화마을 기록전”에 들려 김진하관장을 만났다.





이 전시는 전만규씨가 주민들을 설득해 투쟁으로 일궈낸 매향리 폭격장 10년의 기록이다.
그동안의 자료를 얼마나 꼼꼼하게 챙겼으면, 격려의 글을 보낸 편지까지 모아두었더라.
투쟁에 사용되었던 깃발에서부터 시사만평에 나왔던 그림과 탄피에 이르기까지, 그 지난한 세월을 살펴보았다.
매향리에 가해진 폭력과 그 아픈 상처를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2월1일까지 전시되는 매향리 기록전을 놓치지 마시길...




 


전시를 돌아보고 있으니 ‘강민’선생님께서 오셨다.
이 추운 날, 먼 길을 마다않는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선생께선 한국전쟁을 직접 체험하셨으니, 그 기록의 감회도 남달랐을 것이다.
김진하관장 설명을 들으며, 지난 세월을 돌아보셨다.






선생님의 단골집 ‘나주곰탕’에 들려 소주 한 병에 곰탕 세 그릇 시켰다.
짐 때문에 차를 끌고 와 소주는 한 잔으로 끝내야 했는데,
선생님께서는 몸이 불편한지 따뜻한 물에 소주를 회석시켜 두세 잔 드셨다.
얼굴이 붉어져 낮술을 삼가한다는 김진하씨가 마실 수밖에 없었는데,
고맙게도 밥값까지 내 주셨네.






점심식사를 끝내고 커피 한 잔 하려니, 갈 만한 곳이 없다고 하셨다.
단골로 가던 ‘인사동 사람들’은 주인도 이름도 바뀐 식당이 되어버렸단다.
하는 수 없어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포도나무‘골목의 끝 집으로 향하다
길에서 안숙선 명창과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씨를 만났다.






강민선생께선 ‘창비’에서 낼 시집 원고를 다 넘겼다고 하셨다.
급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하셨지만, 벌써부터 시집이 기다려진다.

커피 한잔 시켜놓고 힘없이 앉아계신 선생님 모습이 오늘의 인사동 같았다.


떠나오며, 방향이 달라 신호등 따라 급히 달려간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민예총’ 사무실에 들려 짐 실어 둔 차를 끌고 녹번동으로 떠났다.
차를 놓고 와 술 한 잔 할 생각이었는데, 꾸물대다 시간이 지체되어버렸다.
‘나무화랑’부터 달려 갔으나, 이미 문이 닫혀있었다.
매향리 전만규씨를 만나 보고 싶었으나, 날 샌 것이다.






백범영씨의 ‘백두대간’전이 열리는 ‘동덕아트갤러리’로 갔더니,
미술평론가 유근오씨를 비롯한 일행들은 벌써 나오고 있었다.
전시장에서 작가 백범영씨와 미술평론가 황정수씨를 만났고,
김달진씨와 편근희씨도 만났다.






백범영씨는 '소나무 작가'라 불릴 정도로 소나무를 즐겨 그렸는데, 이번엔 ‘백두대간’이었다.
산 능선을 비롯하여 나무들과 풀꽃 등 자연을 이루는 다양한 것들을 보여주었다.
특히 백두대간의 맥을 잡아 그린 산수에서는 신비로움마저 느껴졌다.
자연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듬뿍 담긴, 이 전시는 28일까지 열린다.






전시장을 나와 ‘유목민’에서 이인섭선생을 만났다.
전활철씨와 셋이서 소주 한 잔 했는데,
앞으로는 박혜영씨에게 ‘유목민’을 맡기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했다.






이인섭선생께서 비약처럼 넣어 다니는 술 한 잔을 따라주었는데, 58도의 중국술로 이름 하여 ‘오빠’란다.
부드러운 향의 독주 한 잔에 춘삼월이 오가더라.






인사동에서 나주곰탕 한 그릇 드시고 가는 강민선생이나
‘유목민’에서 파적 한 장에 소주 한 병 드시는 이인섭선생이나
이 두 분이 인사동을 지키는 마지막 유목민이 아닌가 싶다.

인사동 풍류도 그렇게 가나보다.

사진,글 / 조문호



“청년 전만규 매향리 평화마을 기록전”










네오록에 소개된 '매향리기록전' 전시리뷰 http://blog.daum.net/mun6144/5038





백범영씨의 ‘백두대간’전





네오록에 소개된 백범영 전시리뷰 http://blog.daum.net/mun6144/5033











청년 전만규
매향리 평화마을 기록展


2018_0920 ▶︎ 2019_0201


월간 말, 2000년 9월호 표지 매향리 반미투사 전만규


초대일시 / 2019_0116_수요일_05:00pm @ 나무화랑


후원 / 경기도_화성시_경기문화재단_경기창작센터

경기만 에코뮤지엄_매향리 평화마을 추진위원회



2019_0116 ▶︎ 2019_0201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매향리 스튜디오는 1968년 미군과 마을주민이 함께 건립한 매향교회 구 예배당을 재생시킨 시설로, 한국 현대사의 상처와 파편들이 오롯이 남아있는 장소에서 『매향리 평화마을 기록전시-청년 전만규』를 진행합니다. ● 매향리의 옛 지명은 고온리(ko-on ni). 이곳은 미 공군 폭격 연습장과 사격장으로 2005년까지 사용되었고 미군들은 쿠니 사격장(koon-ni range)으로 불렀습니다. 주민과 사회단체의 끈질긴 투쟁과 노력으로 이제 마을에 폭격 소리와 화약 냄새는 사라졌지만 녹슨 포탄과 탄피는 아직도 길가에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이른 봄 마을에 퍼지던 매화꽃 향기를 뒤덮어 버린 폭격 소리, 지난 50년의 시간 앞에 삶의 평화를 외치고 살아온 매향리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짊어지기에는 너무도 무겁고 버거웠습니다. 한국전쟁은 남과 북의 전쟁이 아니라 동아시아 더 나아가 인류의 이데올로기 각축장이었으며 매향리 주민들은 전쟁의 처참함을 삶과 일상에서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매향1리 청년회_1988년 6월 주민에게 드리는 글


여기 평화를 위해 고단한 길을 걸었던 청년이 있습니다. 『매향리 평화마을 기록전시-청년 전만규』는 매향리에 폭격 훈련이 멈추고 평화가 오기까지 젊은 청춘을 바치며 마을 주민과 함께 투쟁했던 '매향리 평화마을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의 분신과도 같은 소장품을 전시합니다. 이 전시를 통하여 매향리에 행해졌던 폭력과 고통, 남겨진 아픈 역사와 상처,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는 평화의 소중한 의미를 함께 공감하려 기획하였습니다.


2000년 5월 13일 동아일보 동아희평


매향리 기록사진


매향리 기록사진


매향리 기록사진


매향리 기록사진


이곳에 미공군 사격장이 설치 주둔하게 된 동기는 6.25 사변으로 인해 크게는 국가적으로 작게는 이곳 지역 주민들도 인민군에 의하여 점령당해 정신적, 육체적인 노역을 당한 것으로 어르신들한테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난민촌인 석천4리가 바로 이웃에 형성됨으로 반공의식이 한층 더 고조되었을 것이고 미군이 일본군과 인민군을 내 몰아 주었으므로 맞이한 해방감과 자유에 만취되어 당시 비행기 소음은 아마도 대축제를 펼치는 폭죽이나 팡파르 쯤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또한 소음공해에 앞서 그들이 쏟아 붇는 구리탄피 등 고철이 당시 궁핍한 우리 주민의 생계에 도움이 되었기에 오히려 그들이 고마웠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농섬 기총표적판 수거작업


2010년 2월 농섬 갯벌 폭탄수거


"1988년 6월, 우선 청년들부터 설득했습니다. 오랜 세월 자포자기 심정으로 살아왔던 이들은 처음 저의 '투쟁' 제안에 반신반의하기도 하고, 경계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빨갱이'로 몰려 집안이 패가망신할 수 있으니까요. 이들과 함께 주민총회를 열고, 7월에는 마침내 주민대책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전만규)매향리 스튜디오



Vol.20180920b | 청년 전만규-매향리 평화마을 기록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