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하

김주호展 / KIMJOOHO / 金周鎬 / sculpture
2020_0325 ▶︎ 2020_0406


김주호_보인다_테라코타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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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태평천하. 이번 김주호 개인전 타이틀이다. 구전되는 요순시절을 제외하면 역사적 서술에는 없는 서술이다. 그런 역설을 현실에 대입해서, 김주호는 지난 1년간 그의 일상적 체험들에 대한 주관적 바램과 객관적 현상들을 기록(이자 표현)으로 모았다. 그 1년 동안 우리사회는 시소처럼 높이 솟았다가 밑으로 꺼지는 걸 반복했다. 남북간 평화협정의 기대에 들떴다가 가라앉은 분위기와 함께, 세대간·진영간·남녀간·지역간·빈부간 계층갈등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게다가 최근엔 국회의원 선거와 겹친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로 사회분위기는 흉흉하기까지 하다. 만화경이자 요지경 속 풍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집단지성과 이성적인 삶의 태도로 지금의 이런 갈등과 위기를 잘 돌파하며 또 극복해나가고 있다. 불안보다는 희망이 여전히 크다는 것.


김주호_꽃을 든 남자_테라코타_2020


김주호_내 손끝에 은하수 1_테라코타_2020


김주호_내 손끝에 은하수 2_테라코타_2020


'태평천하'란 이율배반적이고도 진솔한 명제는 바로 이런 희비극 같은 현실을 지켜보는 작가 김주호의 시선으로부터 도출된 오소독스이자 패러독스, 비판이자 위로, 슬픔이자 여유가 겹쳐진 동시대성에 대한 진술이자 풍자다. 또 삶의 진득한 정서를 온몸으로 살아낸 작가의 일상적 커멘터리이기도 하다. 그가 바라본 '우리'와 그에게 바라다보이는 '우리'가 어떤 전형성으로 형상화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레토릭이기도 하고.


김주호_넉넉한 주머니_테라코타_2020


김주호_대박을 물다_테라코타_2019

김주호_행복한 남자_테라코타_2020


김주호_함께 소중한 우리-성모병원에서_종이에 드로잉_2020




김주호_환영풍물시장-강화 풍물시장에서_종이에 드로잉_2020



김주호_태평천하展_나무화랑_2020


한편, 이는 미술 이전에 '인간'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미술 이후의 '사람'을 말하고자 하는 김주호의 작업태도가 드러나는 기제다. 질구이·버려진 폐품 오브제·드로잉·낙서·메모·기타 즉발적인 언어로 미술개념·이즘·형식·활동방식…등 기존 미술의 틀과 형식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과 이웃이 함께하는 작업의 원초적 의미를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최근 확실히 그는 과거보다도 더 미술판이나 미술을 둘러싼 제도로부터 확연하게 벗어난 듯 보인다. 스스로 '동네작가'로 만족하는 그의 미술 '이후'가 더 자유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다. ■ 김진하



Vol.20200325c | 김주호展 / KIMJOOHO / 金周鎬 / sculpture





몇 일 동안 여러 가지 고민에 휩싸여 죽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코로나119'로 사회적 거리두기란 캠페인에 방콕해서 그런 게 아니라

김명성씨로부터 전달받은 돈도 한 몫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검찰이나 정치꾼들의 비인간적인 꼴에 간도 뒤집히지만,

몇 일 전에는 동자동 쪽방 촌의 유영기씨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왜 나쁜 놈들은 잘 살게 놔두고 착한 사람만 데려가는지 모르겠다. 과연 신이란 게 존재하는 것인가?.

종교라는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역할은 하지만, ‘신천지꼴을 보니 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벌금 내라며 김명성씨가 200만원 상당의 사진을 팔아주었는데, 죽어도 벌금을 내기 싫은 것이다.

그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말할 것도 없고, 판결 내린 판사도 똑 같은 놈이었다.

돈에 눈깔 뒤집혀 자연환경을 망가트리는 개인의 명예가 중요한가? 공익이 중요한가?

그런 개좆같은 판결에 승복하는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서울역을 떠도는 부랑자나 쪽방 촌 친구들을 불러 모아 마지막 만찬이라도 벌이고 싶었다.

요즘 식당도 텅텅 비었으니, 도랑치고 게 잡는 격이 아닌가?

그러나 나를 걱정해 주는 이들이 눈에 밟히기도 하지만, 죽는다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몇 날을 누워 이런 저런 생각만 하다 보니, 일단 주변정리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쪽방에 갇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페친을 정리하는 일 뿐이었다.

그동안 내가 지적한 일의 반감으로 뒤통수치거나, 한 통속이 되어 반응 없는 페친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대부분 오래된 인연이라 차마 친구 끊기를 못했는데, 이참에 100여명을 골라 삭제해버렸다.

그 대신 페친이 넘쳐 받아주지 못했던 잘 모르는 분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분풀이 치고는 치졸했으나, 엉뚱한데 신경 쓰지 않고 내 일에만 전념하겠다는 각오였다.


 

지난 18일은 모처럼 외출할 준비를 했다.

정영신씨께 연락해 인사동 통인화랑에서 열리는 변승훈씨와 강경구씨 전시를 보기로 했다.

개막식은 오후 다섯시였으나 요즘 전염병 때문에 사람 많이 만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오프닝에 날아들 똥파리를 피해 일찍 나선 것이다.


 

인사동도 며칠 전과 달리 사람들이 제법 나왔더라.

달라진 풍경이라면, 때 거리로 몰려다니는 외국관광객이 사라졌다는 것과

수도약국 앞에 마스크 사려고 줄선 행렬이었다.


 

강경구씨 전시가 열리는 통인가게’ 5층부터 올라갔더니, 관우선생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따라주는 와인 한 잔들고 전시작들을 돌아보았는데, 작품이 너무 좋았다.

마치 고뇌하는 오늘의 인간상을 그린 듯한데, 어찌 보면 이글어진 내 모습 같기도 했다.

좋은 작품들을 보니 마음이 편안했다.


 

다음에 볼 전시는 지하에서 열리는 변승훈씨의 도예전 手作禪이었다.

반갑게도 작가 변승훈씨도 있었고 이계선관장도 있었다.

오래 된 작품에서 부터 최근작까지 골고루 전시되었는데, 분청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변승훈씨만의 독창적인 작업이었다.

특히 최근에 제작한 불상 형태의 작품들을 보며 신은 인간자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작품은 불상이 아니라, 안성장터에서 몇 십년 동안 자리를 지킨 할머니들을 모델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술의 힘은 무서웠다. 온갖 근심 걱정을 다 떠안은 불편한 마음이 눈 녹듯 녹아 내렸다.

전시들이 곳곳에서 열리지만, 별 의미 없는 불편한 전시가 더 많은 현실이라 운도 따라야 한다.




인사동에서 믿을 수 있는 갤러리로는 통인가게전시장과 나무화랑정도로 꼽는다.

통인은 대관에 의지하지 않고, 관우선생과 이관장의 안목으로 초대되는 전시라 일단 보증할 수 있고,

나무화랑역시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운영하는 화랑이라 실망시키는 전시가 별로 없다.


 

좋은 전시들을 보아 기분이 좋으니, 반가운 연락까지 왔다.

정영신씨가 며느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데, 아들 내외와 손녀 하랑이가 온다는 것이다.

부리나케 정영신씨 녹번동 집에 갔더니, 더디어 귀여운 공주님이 나타난 것이다.



귀신같이 생긴 내 모습에 울기도 하고, 제 모습을 담은 동영상에 깔깔거리기도 했다.

변화무쌍한 하랑이의 표정과 쉼 없이 휘젓고 다니는 모습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부근에 있는 연안식당으로 옮겨 외식까지 했는데, 밥도 엄청 잘 먹었다.


 

그래, 좋은 일에 위안 받고 살자. 사는 게 별 것 있겠나.

 

사진, / 조문호













 

 





인사동 거리를 가득 메우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 갔을까?
징그럽도록 많은 인파와 상인들의 장삿속에 진저리를 쳤지만, 막상 사람이 없으니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코로나 19’가 휩쓴 여파가 실로 대단했다.
사람이 나오지 않으니, 문 닫은 가게가 속출하고 건물을 헐고 다시 짖거나 실내장식 하는 점포도 있었다.




돈 많은 사람들이야 한동안 쉬면되겠으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그 비싼 가게 임대료에 얼마나 버텨낼지 모르겠다.
소비심리마저 꽁꽁 얼어붙어, 이러다 나라는 배겨날 수 있을까?




남 탓할 일은 아니지만, 이제 사이비종교는 과감히 정리해야 할 것 같다.
아무리 종교의 자유라지만, 사람을 쇠뇌 시켜 갈취하는 일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행사는 물론 사소한 모임까지 취소하는 판국에
신도들을 교회에 집결시키는 인간들이 살인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신천지’란 정신 나간 교주 말에 어떻게 그 많은 신도들이
모든 걸 다 갖다 바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한 둘 아니었다.
아무리 사람이 영악해도 참 어리석다는 생각도 들었다.
‘천국 좋아 하지마라.’ 죽고 나면 한 줌의 흙일 뿐이니, 제발 사람답게 살아라.




인사동에 사람 찍으러 왔으나, 사람이 없으니 찍을게 없었다.
사람만 보이면 쫓아갔으나, 그마저 마스크로 무장한 괴한 같았다.
미세먼지도 심각한데다 전염병마저 설쳐대니, 머지않아 거리엔 얼굴가린 사람뿐일 게다.
어쩌면 산소 호흡기를 짊어지고 다닐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이달 전시소식지 한 권 구해, 손기환씨 판화전이 열리는 ‘나무아트’로 올라갔다.
전시장에는 김진하관장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하루 관람객이 몇 명되지 않는다며, 한 숨을 쉬었다.




전시작을 돌아보니, 거친 칼질이 빚어낸 반 풍경적인 궤적들이 마치 지옥도를 보는 듯 했다.
분단현실을 상징한 정치적 도해가 한스럽게 또는 격렬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칼질의 힘을 한지릴리프기법에 의한 요철로 드러내어 더 강한 느낌을 주었다.
그동안 궁금하게 여겨 온 릴리프기법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김진하씨가 상세히 가르쳐주었다.
그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룩해낸 작품들이라 작가에 대한 존경감이 일었다.




전시장에서 커피도 얻어 마시고, 제작기법까지 상세히 설명해 주었는데,
손기환 판화작품집도 한권 가져가란다.
벼룩도 낯짝이 있지 판매하는 책을 어찌 그냥 가져올 수 있겠는가?
소중한 책 한 권 살 수 없는 형편이 부끄럽긴 했으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모두 돈을 우습게 여긴 죄다.
그러나 아무리 무식하고 거지같이 살지라도, 돈만은 발가락 사이 때보다 더럽게 여기며 살 것이다.




인사동거리는 가보지도 못한 평양거리처럼 적막에 휩싸였으나,
전시장에 들어가면 인사동만의 또 다른 기쁨조들이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야! 봄 가기 전에 빨리 물러가거라.
양심은 전당포에나 맡긴 정치꾼과 사기꾼들이 우글대는 이 더러운 세상,
꽃놀이라도 한 번 가보고 죽어야 할 것 아니가.

사진, 글 / 조문호














손기환·목판화 2019-1981

손기환展 / SONKIHWAN / 孫基煥 / painting 

2020_0226 ▶︎ 2020_0310



글_손기환, 김진하 || 판형_국배판 22.5×28cm || 초판발행_2019년 12월20일

ISBN_979-11-88845-02-6(부가기호 97650) || 정가_20.000원 || 발행인_김진하 || 발행처_나무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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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시공의 단층과 떨림-손기환 목판화의 역사적 형상성 ● 가로로 길게 늘어지는 풍경이 어느 지점에서 단층처럼 어긋나고 다시 다른 시점의 풍경으로 연결된다. 또 그 풍경은 거기 그렇게 가만히 있지 않고 진동한다. 대기도, 산도, 물도, 나무도, 기타 건물도 모두 비끼어서 흔들리듯 정지를 거부한다. 떨림-움직임-흔들림의 칼의 궤적, 시공을 건너뛰는 입체파적인 공간 몽타쥬, 호방하게 편집된 구도 등이 화면을 거침없이 견인한다. 그 화면은 "풍경화인가?" 싶을 정도로, 대상은 풍경으로 묘사되지 않고 활달한 필치의 밑그림과 듬뿍듬뿍 퍼낸 칼질로 거칠다. 풍경은 풍경이되 시각적 대상으로 소위 '멋진' 풍광은 해체되고 의도와 표현의 결과물인 어떤 상징이 '풍경'을 대신한다. 풍경이라기보다는 풍경을 통한 작가의 이념 혹은 지향성의 기호라고나 할까, 그도 아니면 감각 뒤에 숨겨진 분단의 현실적 리얼리티를 풍경으로 번역한 것이라 할까. 그러니까 그것은 그 풍광을 감상이나 관조의 대상을 넘어서서 현재 그렇게 존재하는 풍경의 조건에 대한 인식적, 그리고 반어적 접근으로의 풍경, 즉 시각에 대한 '反-풍경'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손기환_산수 A Scene at Korea_A.P 1/ Ed. 5_목판화에 한지릴리프_68×140cm_2017


"反-풍경. 풍경에 反한다는 것. 눈으로 보는 시각의 범주를 넘어서서 풍경을 풍경이 아닌 것으로 보는 것. 왜일까. 근대 이후 풍경은 죽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게 하라"는 명제처럼, 산업사회 이래로 인류는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지명하고 그 능동성을 사살했다. 그런 폭력적 인위에 의해서 풍경도 자연과 함께 그 성격을 박탈당했다. 한국에서는 제3공화국에 들어서 서구의 근대적 개발방식을 추종했다. 국토는 난개발 되었고, 거기에 분단국의 군사적 목적까지 더해져서 풍경은 더 능욕을 당했다. 손기환의 「한강」연작은 이런 국토와 풍경의 죽음을 쓸쓸하게 독백한다. 자연은 간데없이 회색 가득한 화면에 GP와 벙커 넘버만 기입된, 전술적 작전지도의 개념이 '풍경화'를 대체한 현실을 형상 없이 그렸다. 뿐인가, 「DMZ-강박산수」연작에서는, 그가 근무했던DMZ의 기억과 전통적인 조선시대 문인화나 산수화에서의 풍경들이 오버랩되는 강박을 기록한다. 거꾸로 옛 산수화를 보면 DMZ의 풍경이 떠오르는 강박도 동시에…. 그것도 명료한 형광색으로. 그래서 손기환의 '산수山水'는 풍경이되 '反-풍경'이다. 한반도의 풍경, 그 표피적 일루젼 뒤에 감추어진 분단현실의 심리적 풍경이자,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도해라서 그렇다." (김진하, 『정치적 팝, 팝의 정치학-손기환의 회화』 중에서, 나무아트, 2017)


손기환_산수 A Scene at Korea_A.P 1 / Ed. 5_목판화에 한지릴리프_68×140cm_2017


'반-풍경' 작업을 하는 이유는 작가의 동시대적 상황에 대한 태도와 통일하는 미적 이념에서 기인한다. 즉 그의 세계관과 미학이 향하는 건 감상의 대상인 경치가 아니라, 그런 작가의 생각과 시선을 반영하는 감성적 기호(記號)로써 분단풍경의 드러냄이다. 손기환만의 개인적 서정과 역사적 서사, 조형방식, 화면배치, 판각기법 등을 통해서 형상화된 도상의 상징적 조형방식으로 말이다. 손기환의 목판화에서 상징을 유발하는 주된 매개 이미지는 산수(山水), 즉 산과 강이다. 풍경으로 산과 더불어 강은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성을 아우르면서 항일, 분단, 그리고 그런 역사적 사건들이 문화적인 결과로 반영되는 시간적 흐름과 공간에 대한 서술적·상징적 표지(表識)다. 거기에서 물이란 소재는 한강이나 임진강 등을 의미하기도, 또 현재적 일상과 과거의 역사를 연결하는 시간성을 리드미컬하게 매개하는 역할도 한다. 실제로 물이란 소재는 문예작품에서 그런 이미지와 역할을 한다. 예컨대 한 시대와 지리를 가로지르는 장편의 문학작품엔 큰 강을 의미하는 대하(大河)란 접두어를 그 장르적 특성으로 쓴다. '임꺽정'이나 '토지'와 같은 대하소설이나 '한라산'과 같은 대하시처럼 물은 역사성을 함축한 의미다. 장엄한 국토풍경과 함께 민중에 대한 삶의 이력이 산과 골, 강과 호수, 도시와 마을마다 유장하게 배어있다. 그 삶의 애환이, 역사로, 그리고 현장의 삶의 애환으로 드라마틱하게 스토리텔링으로 펼쳐지는 것이 대하문학작품이다.



손기환_산수 A Scene at Korea_Ed. 5_목판화에 한지릴리프_50×135cm_2016


물론 손기환의 회화나 판화는 장르와 형식적 조건상 그런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은 아니다. 그 길고도 긴, 질기고도 질긴, 민중의 역사가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되고 환원된 형상을 띄는 핵심적 이미지로, 손기환의 정서와 지향성을 드러내는 표현적이면서도 개념적인 사유의 결과다. 작가는 그 핵심적 형상으로 말을 대신하고 싶은 것이다. 역사에 대해서, 분단조국의 현실에 대해서, 월남한 아버지의 기원과 자식인 자신의 희구를 반영하면서 목판화란 장르형식과 드로잉, 그리고 칼과 맛 프린팅으로… 바로 그런 과정이 화면에서 목판화적인 상징성으로 돌올하게 된다. 특히 근작에서 이 모두를 아우르는 조형적 질료인 '물(水)'은 새로운 형식인 '릴리프'기법을 구사하는 더 큰 단서가 된다. 물이 있는 빈 여백을 채우는 묘철의 한지 표정으로 말이다. 이런 손기환의 목판화를 통해서 40여 년을 가로지르는 작업의 줄기는, 결국 역사는 단절되거나 정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로 끊임없이 시제와 공간을 유동하며 넘나드는 움직임 혹은 운동의 맥락이라는 것이다. 그의 판화에서 한강이나 임진강(『강 건너 고향』 연작), 기타 통영이나 제주 풍경 등에서 물의 흐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런 시간성과 공간성이 역사성으로 대체되는 한 징표다. 그것은 일종의 염원이다. 크게는 비극적인 근현대사를 대체하는 성숙한 민주주의와 통일, 작게는 남북 이산가족의 재회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즉, 식민지와 분단 이후 군부독재로 대변되는 산업화시대를 거친 지식인 작가가 조국의 상황에 대한 정치적 인식의 문제의 의지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월남한 부친의 실향에 대한 슬픔-망향-그리움-귀향에 대한 간구가 그의 정서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한 가족이 피난과 이산을 통해서, 남쪽에서 정착하는 과정과 그 이후 귀향에의 염원을 안고 사는 것은, 분단이라는 정치사회적 사건과 문화현상의 한 전형이라 하겠다. 문학에서야 분단문학을 통해서 이런 크고 작은 실례들이 다양하게 형상화 되었지만, 미술에서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서구 미술의 세례를 받은 모더니즘 형식론이 화단의 축을 형성하면서 그 서사적 형상성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런 와중에 손기환은 회화와 만화를 통한 '팝 Pop'적인 방식으로 대하적 역사성을, 목판화를 통해서는 가족사로부터 분단으로 확대되는 제유(提喩)방식의 서사적 서정성을 펼쳐 보인다. 「물의 노래」, 「의병」, 「강 건너 고향」, 「우리 동네」 등으로 명제화 된 다소 을씨년스런 풍경들의 '분단기호'를 통해서 그의 이 '반(反)풍경'적인 풍경들은 한스럽게, 때로는 건조하고 을씨년스럽게, 또 때로는 장렬하고도 크게 우리 근현대사를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풍경화'나 '산수화'의 자연 감탄의 풍경과는 전혀 다르게 한국현대사적 맥락으로 '山水'를 소환하며 재개념화하면서 내용과 형식의 연관이 자기 완결성을 띄고 있다는 점에서, 손기환의 목판화가 주목받아야 하는 근거는 충분하다. 기실, 한국 근현대목판화에서 역사·정치·사회를 정면으로 소재화해서 다루는 경우는 그리 많지가 않았고 또 단편적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양기훈의 『혈죽도』, 1909년 『대한민보』의 이도영 그림-이우숭 판각의 만평 형식의 연재물, 그리고 1932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이북명의 소설 『질소비료공장』의 이상춘 삽화가 있다. 이후 해방공간에서 정현웅·손영기·최은석 등의 좌파적 문예운동 이후 1980년대 민중미술에 이르기까지 그 맥락은 끊어졌었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후반 오윤과 이상국의 등장, 80년대 이철수·조진호 · 홍성담 · 『두렁』 · 『목판모임-나무(손기환 · 이상호 · 이섭 · 정원철 · 김억 · 김진하…)』 · 화가 문영태가 기획한 『시민미술학교』 · 홍선웅 · 김준권 · 류연복 · 최병수… 등의 활동, 90년대의 이윤엽으로 다시 연결된다. 그러니까 손기환은 80년대 초반부터 『서울미술공동체』 · 『민족미술협회』 · 『목판모임 나무』를 통해서 목판화운동의 주역 중 하나로 지금까지 작업해오고 있는 것이다.

손기환_물의 노래-한강, The song of Water-Han river_A.P 2 / Ed. 25_한지에 목판화_12×90cm_1995
손기환_물의 노래-한강, The song of Water-Han river_A.P 2 / Ed. 10_한지에 목판화_12×90cm_1995
손기환_한강 Han River_A.P 2 / Ed. 10_한지에 목판화_12×90cm_1995
손기환_한강 Han river_A.P 2 / Ed. 10_한지에 목판화_12×90cm_1995
손기환_한강 Han river_A.P 2 / Ed. 10_한지에 목판화_12×90cm_1995


최근 손기환의 목판화는 그 형식에 있어서 하나의 전기를 맞았다. 일단 스케일이 대형으로 커지고, 그다음으로는 프린팅 과정에서 한지릴리프(Relief) 기법을 수용했다. 규모가 커진 작업은 판각이전 활달하고 액티브한 드로잉의 힘을 묘철의 표정으로 더 깊이 반영한다. 전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몸의 반응을 실어냈다는 것. 저간의 손기환의 작업은, 회화와 판화를 막론하고, 디테일을 생략한 채로 짧은 작업시간의 집중력에 의한 표현성과 작업내용의 통일이 빚은 형상으로 그 개념성이 강했다. 그런데 큰 판화로 전이되면서 드로잉의 붓 맛은 더 강하되, 칼의 쓰임이 자유로워지면서 오히려 심미적인 '기운'이 더 '생동'하게 된 것이다. 뭐랄까, 서사적인 풍경화의 개념을 유지하면서도 추상표현주의적인 몸짓으로 드로잉하고 판각한 화면은, 그래서 살아서 진동하고 요동치는 듯 활발해진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역설적으로 한지 저부조(低浮彫) 기법의 장인적 과정을 수용하면서 더 꼼꼼해진 입체적 화면은, 한지의 물성을 제대로 발현하며 질료적 물질성과 촉감이 더 견고해졌다. 판각하고 찍은 판화를 다시 빈 여백에 묘철로 텍스쳐를 준 판에 대략 6~7겹의 배접으로 릴리프를 한 이런 방식은 한지로만 가능한 기법이다. 긴 시간 반복되는 단순한 노동력과 작업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까 드로잉과 판각에서의 회화적인 액션과, 릴리프 과정에서의 정교한 공예성을 합치면서 이전의 판화와는 다른 얼굴이 탄생한 것이다. 작업 내용과 개념이란 몸과 뼈대는 여전하나, 피부와 옷은 훨씬 세련되고 중후한 묵직함을 더하게 된 것이라고나 할까. 아니, 조형적 근육을 더 튼실하게 키웠다는 표현이 맞겠다.


손기환_희망 Hope_A.P 2 / Ed. 10_한지에 목판화_44×38cm_1994


한편 손기환의 또 다른 특징인 대상의 구체적인 묘사를 많이 생략해버린 실루엣의 형상은 여전하나, 근골과 뼈대로 구축된 대상의 형태감과 큐비즘적 공간 및 시간의 몽타쥬 형상은 강력하고 동적인 이미지로 확장되었다. 거기에 대담하고 호방한 터치를 곁들인 칼의 구사는 소재인 강과 산, 그리고 여타의 구조물과 건물들을 진동시키듯 시공을 흔든다. 대상의 정밀한 재현보다는 화면 전체를 동적인 움직임의 궤적으로 표현해냄으로 인해서 가능한 방식이고, 그것은 실루엣으로 대상의 외적 형태를 취했을 때 원근법이나 명암법이 제거된 평면성의 형태적 미감과 칼의 표정 때문에 그렇다. 마치 수묵화에서 운필의 운용이 빚은 이미지가 대상의 객체성을 대체한 주관적 표현성처럼 말이다. 이 지점은 손기환의 회화와 목판화가 완전히 다른 조형적 감수성을 띄고 있음을 의미한다. 개념과 인식을 통해서 대상을 파악하고 발언하고 소통하는 '물리적 풍경'이란 반성적 사유의 회화에 비해, 이 목판화는 '심리적 풍경'으로 좀 더 강한 표현적 감성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월남한 부친의 귀향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손기환이 대신해 드러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손기환_6월-고문 June-pain_A.P 1 / Ed. 5_한지에 목판화_38.5×65cm_1987


이처럼 미디어와 장르에 따라 같은 소재라도 작가적 어법과 장치를 달리하는 건 분명히 긍정적이다. 다양한 여러 장르의 미디어를 다루고 있는 작가(손기환은 회화, 만화, 애니메이션, 목판화 등의 다양한 장르를 다룬다)에게서는 각 미디어마다의 특징에 따라 진술방식을 달리해야 하는 멀티플레이어의 면모가 필요하다. 회화와 목판화에서는, 적어도, 손기환이 나름의 자기 언어와 스타일을 각기 독립적으로 확보했음은 분명하다(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쪽은 필자가 그 정보나 전문성이 모자란지라 여기서는 언급을 생략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증거하는 그의 독자적 시각작업의 형식성이 정치적 함의를 자연스레 발생시키는 소통성으로 연결되는 문제의식을 분명하게 보이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관객들에 대해서 계몽적인 태도로부터 벗어난 수평적인 작품의 언술과 제시방식이 주는 교감의 폭이 넓어서 그렇기도 하다. ● 손기환은 난해한 미학적 수사를 통해 관객에게 선험적인 미적 아우라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의 미적 방식인 '팝'적 이미지와 거기에서 연유하는 소통과정의 정치적 공감력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내용과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목판화에서 이런 소통의 시도는 자연스럽다. 형식이 내용을 견인할 수 있는 튼실한 기량이 있어서다. 미술작품의 이미지가 어떻게 소통의 정치학으로 연결되는가는 작가의 세계와 작업에 대한 태도와, 거기에 비례하는 매체에 대한 인식, 그리고 표현 역량에 의해서 증명된다. 목판화를 다루는 손기환은 능숙하다. 그러면서도 기술적·기능적으로만 작업에 매달리지 않는다. 무엇을 위한 테크닉인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최근 많은 목판화가 작가의 뛰어난 기술력은 보여주고 있으나, 적어도 자신의 미학적 이념과 목판화라는 매체의 개념적 합일에 대한 인식적 논리를 드러내는 경우는 빈약하다. 그런 기술과 기교가 무기력하고 무용한 이유다. 손기환은 자신이 목판화를 진행하는 분명한 목적성과 거기에 따른 문제의식을 스스로가 작업으로 증명하고 있기에, 우리시대 중요한 목판화작가 중 하나라고 단언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목판화 작업에 대한 관념적·문화속물주의자의 껍데기는 모조리 벗어 던진 채 자신의 미학적 목표점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하다. 특히 그의 근작은 이런 지점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Well made'의 미적 표현성과 함께, 동시대의 사회적 문제를 말하는 그의 목판화에 대한 역사적·조형적 문제의식으로 말이다. ■ 김진하



Vol.20200223a | 손기환展 / SONKIHWAN / 孫基煥 / painting




류연복의 온 몸은 길이다전이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열리고 있다.


 

개막식이 열리는 날, 정복수, 정영신씨와 전시장을 찾았는데, 

전시작가 류연복씨를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화가 이흥덕, 송 창, 김재홍, 장경호, 성기준,

김이하씨 등 많은 분이 와 있었다.



전시작들을 돌아보니, 지난 해 진천 전시 때 빠진 작품과 신작도 있었다.


류연복씨의 목판화에는 힘이 흘러넘쳤다.

여러 번의 칼질이 아니라 단칼의 칼질이 빚은 선명한 골격이 돋보였다.

풍경조차 서민적이고 민중적이라 풍경의 수려함 속에 비극적 슬픔이 깔려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를 토해냈다.

저항적이고 비판적으로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때로는 서정적으로 다독였다.

날카로운 칼로 한의 정서를 새겼으나 보는이에게는 따뜻하게 다가온다.

풍경 에너지와 사람의 삶을 응결시키려는 속내가 엿보였다


 

류연복씨의 목판화는 국토에 대한 애정과 자연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베어 있다.

풍경을 이루는 산과 강의 흐름은 강력하고 마을의 경계는 선명했다.

넓고 탁 트인 시선에서 부터 작고 가까운 곳을 바라보는 섬세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명료했다.

국토에 대한 형상성은 두드러지고, 부분적인 독자성은 분명했다.



사계절의 담쟁이 덩굴을 새긴 '온몸이 길이다'는 심오한 경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폐기된 온갖 무기들이 탑처럼 쌓인 꼭대기의 야생화 한 송이는 전쟁에 대한 거부를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류연복씨는 작품도 좋지만 사람은 더 좋다. 많은 사람들이 류연복씨를 좋아하는 이유다.

비실비실 웃으며 바람처럼 살지만, 항상 말보다 행동이 앞서고 불의에 굴하지 않는다.




대개 작품을 먼저 알고 나중에 작가를 만나는 경우가 많은데, 실망스러운 경우를 종종 접한다.

작품은 좋으나 인간성이 형편없는 작가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 만드는 기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람 나고 작품도 있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국토와 민중에 대한 애정, 작가로서 목판화에 대한 자기표현의 정합성,

그리고 동시대에 대한 지식인적인 실천적 참여라는 삼위일체가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간단명료한 잠언으로,

또 때로는 웅대한 서사적 서정으로 갈무리 지어지고 있다.”고 서문에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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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는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24일까지 열리니,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진, / 조문호




























生·물
최경선展 / CHOIKYUNGSUN / 崔敬善 / painting
2019_1002 ▶︎ 2019_1029


최경선_Watering_캔버스에 유채_160×140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70913d | 최경선展으로 갑니다.

최경선 블로그_outframe.kr


초대일시 / 2019_1002_수요일_05:00pm


1부 『양생(養生)』 / 2019_1002 ▶︎ 2019_1015

2부 『기화(氣化)』 / 2019_1016 ▶︎ 2019_1029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최경선의『生·물』- 양생과 기화의 치유記1. 녹록치 않다. 산다는 것은. 현재는 과거가 과거는 그보다 더 오래된 과거가, 그리고 현재는 미래에, 또 미래는 과거인 현재의 자장에 의해 비정형적인 삶의 형태를 만든다. 특정한 셈법이나 기억으로 규정할 수 없는 다면적 모습들. 혼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삶에 다양한 방정식을 대입하나, 수학처럼 정해진 답이 도출될 리는 없다. 여러 유형의 레이어가 겹겹이 쌓인 채, 통합하지 못한 파편들로 미완의 일상성은 유지된다. 감정·생각·의지·지향·욕망·가치가 혼재된 상태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있을지라도, 삶은 결코 만만치 않은 통증과 갈증으로 불확정적이다. ● 삶은, 생명은 살아있는 그 자체로, 또 삶을 지향하는 의지와 인내로 인해서 위대하다. 자신의 선택으로 이 지상에 온 건 아니지만, 삶의 과정에서 에고(Ego)로부터 수퍼에고(Super ego)에 이르는 '이타(利他)'의 성숙하고 숭고한 단계에 다다를 수 있어서다. 피투성(被投性)이나 불연속성과 같은 실존적 조건과, 사회적 구조와 조건들에 의해 타율적으로 규정되는 존재의 부조리한 상황, 또는 물리적이고도 생물학적으로 우리들 삶에 영향을 끼치는 생활환경 속에서도 "살아내고" 또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건 그 때문이다. 살아야만, 아니 살아내야만 이타라는 궁극적 가치에 도달할 수 있어서다. ● 작업행위도 그렇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인 타자와의 위화와 화해를 통해서 어떤 깨달음과 미적 표출에 이르는 것. 그 결과를 나누면서 인식의 열린 지평으로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 작업이라는 심장의 울림, 그 즐거운 고통의 굴레에 평생 갇힐 수밖에 없는 이유다. 특히 작가가 지향하는 세계를 증명해야 하는 '형상회화'는 작가의 개별서사로부터 확장되는 주제를 이끌어내야 하는 형식으로 인해 더 그렇다. 대상성을 넘어서는 수사와 상징으로, 고양된 미적 형식과 지향적 메시지를 어떻게 도출해내는가에 따라 그 가치와 소통의 질은 달라진다. ● 그 작업은 결코 만만치 않다. 시각언어의 내밀한 상징성에 따른 타자와의 해석의 오차는 오히려 작가를 작업으로부터 소외시키기도 한다. 작업과정에서도 화두만 끊임없이 만지작거릴 뿐 좀처럼 결론엔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난이도 높은 과정이야말로, 살아내야만 이타에 이르는 삶처럼 작업행위의 근원적인 동력일 것이다. . ● 그 와중에 작업의 현재 지점을 확인하는 형식은, 발언의 깊이와 공감의 너비를 확장할 수 있는 주요한 미적 단서다. 태도가 주제를, 주제가 서사를, 서사가 형식을 선택하고, 다시 형식이 주제인 메시지를, 그리고 그 주제와 형식이 동시에 작가와 관객의 마음을 넘나드는 공감의 언어가 되기에 그렇다.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수공미디어인 회화가, 숱한 현대적 하이테크놀로지가 창궐하는 21세기에도 우리들의 삶에서 여전히 미적 기능을 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몸으로부터 유래하는 상징 언어의 민감함이 좀 더 깊숙하게 타자에게 각인될 수 있어서다. 형상회화는 작가의 내면, 작업의 형식, 타자와의 소통과정 모두 그런 구조에 가장 기민하게 적응하면서 메시지를 송·수신한다. 때로는 선명한 발언으로, 또 때로는 은밀한 비유나 속삭임으로. 소리치거나, 말하거나, 독백이거나, 방백이거나…



최경선_Watering_캔버스에 유채_140×190cm_2007

2. 이번 『최경선-生·물』은 베이징에 거주한 2006년부터 2012년까지의 작품과 2013년 귀국이후부터 2019년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물이란 소재가 견인한 회화작품으로 구성된다. 물의 의미론적 현실과 조우한 그때, 올림픽을 전후한 당시 베이징은, 최경선이 작품주제와 형식을 착상하고 발견한 시공간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다. 물의 부재/실재라는 현상을 일상에서 존재론적으로 체험하고 그에 대한 사유를 작품으로 옮긴 현장이자, 당시 작가 내면이나 베이징의 분위기와 시대상이 작업을 구성하는 주요한 서사적·공간적 배경이 되어서 그렇기도 하고. ● 1부 「양생(養生)」은 「워터링Watering」이란 명제의 2007-2008년 작품들을 중심으로 한다. 작가는 관찰자 시점에서 인공으로 물을 공급하는 성인 어른을 그렸다. 2007년 베이징에서 최경선이 실제로 보고 관찰했던 소재다. 당시 30대 중반인 자신의 실존을 투사한 내용도 된다. 2부는「기화(氣化)」라는 타이틀로 2012년 「빈 집」연작에 초점을 맞췄다. 변두리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서, 유년기 자신의 결핍을 보고 그들에게 공감(empathy)하는 대자적 시선이다. 3부「치유(治癒)」는 2013년 귀국이후의 작업인 「비오톱biotope의 저녁」이란 일련의 작업들로, 작가가 희구하고 지향하는 세계를 형상화했다. 풍부한 습지에서 운디네(Undine)처럼 빛나는 아이들의 풍요로운 생명성에 위로를 받는 내용이다. 모두 물이 소재이고, 그 물은 최경선의 작업주제에 이르는 핵심 기제다. ● 물은 생명의 시원에 관한 원형적(Archetype) 기호(記號, Symbol)다. 대지와 함께 여성성의 대표적 표지이기도 하다. 최경선에게 있어서는 주제를 향하는 상징적 코드다. 베이징 도심(양생)과 외곽(기화), 그리고 안락한 서식지(치유)에서의 경험적 서사들의 변주와 전복을 통해, 독자적 언술과 시각적인 형상성을 도출해내는 키포인트이기도 하고. 물이 어떻게 표현되고 작용되었든 간에 화면의 형상들은 최경선이 직접 체험한 일상사로부터의 귀납적 진술이며, 거기에 최경선의 직관과 사유가 더해져서 회화적 상징으로 연역된 것이다. 따라서 물은, 최경선의 현재 세계에 대한 관찰-내면(혹은 기억)-서사적 진술-표현이 통일된 영감의 에너지원(原)이고, 그녀 스스로를 정화하는 작업의 단서도 된다.


최경선_빈집 앞_캔버스에 유채_140×160cm_2011

양생(養生)-성찰의 시작 ● 양생의 주축은 「Watering」연작이다. 세상의 소금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존재의 고립을 관찰하는 작가가, 그 대상에 이입되는 현상을 그렸다. 베이징 체류 초기, 긴 도보산책 중에 경험했던 일일게다. ● 화면엔 잿빛 대낮의 건축현장에서 홀로 물을 뿌리는 사내가 등장한다. 양생을 하는 인부다. 양생. 콘크리트가 완전히 굳을 때까지 적당한 수분을 유지하면서 더 단단하게 굳도록 만드는 건축과정이다. 양생이 부실하면 시멘트가 빨리 갈라지거나 부스러진다. 견고한 고체화를 위해 물을 공급 한다는 건 뭔가 이율배반적이지만, 물로 인해서 시멘트가 더 강하게 응고되는 건 과학적 사실이다. 그런 양생은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질병에 걸리지 아니하도록 건강관리를 잘하는 것. 평소 양생이나 섭생을 게을리 하면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림"이라고 한방에서는 정의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물이 양생의 첫 번째 조건이다. ● 그러니까 물을 주는 양생은, 사물은 단단하게 만들고 사람이나 생물은 힘차게 생장하는데 도움을 주는 현상이란 뜻이다. 헌신과 희생을 담보로 한 부모의 사랑이 먼저 떠오른다.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타자에게 "가 없이" 주는 행위는 그 자신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뜻도 되겠다. ● 「Watering」 연작에서 물은 그런 양생의 알레고리이자 형상성의 상징질료다. 사내가 물을 뿌리고, 바닥엔 그 물이 질펀하게 고이거나 흐른다. 또 물은 구멍을 통해 아래로 쏟아져 내리기도 한다. 물을 뿌리는 행위가 끝없이 이어지는 모양새다. 드넓은 건축현장과 대비되는 작은 주인공을 보면 이 노동이 마치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지루하고도 지난한 반복행위임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불을 훔쳐온 프로메테우스의 고난의 서사도 겹쳐진다. 그러나 현재 이 그림의 주인공은 과도한 노동을 하고 있는 일용직 인부일 뿐이지 신화속의 영웅이 아니다. 왜소해져버린 우리시대 신화를 대체한 현실의 프로메테우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희생의 숭고함과 궁핍한 가장(家長)의 양면적 캐릭터다. ● 그 가장은 가끔씩 시멘트 바닥 사이로 난 핑크색 거대한 구멍(Hall)에도 물을 뿌린다. 허탈한 행위다. 물은 아래층으로 낙하한다. 넓은 표면에 광범위하게 수평을 이루던 물이 수직으로 날카롭게 떨어질 때, 양생으로부터 절망으로 변하는 주인공의 행위는, 지켜보는 최경선의 의식을 두드리고 깨우는 현상으로 역전된다. 화면내의 모델이 화면바깥 작가에게 반성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처럼. 당연히 충격이 동반된다.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지는 김수영의 폭포처럼 물의 액티브한 파열의 맛은 회화적 쾌감과 자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증폭시킨다. ● 이 시기 최경선 작업의 매력은 양생하는 사람을 응시하는 자신의 관찰자적 시선과 함께, 이런 붓질에 의한 "나태(懶楕)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는 듯한 회화적 표현으로 자신을 자각하는 데 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녀는 자신을 편히 두지 않은 채 깨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분열적인 노동을 하는 그 인부와, 그림을 그리는 자기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존재론적 화두를 잡고서 말이다. 고독하게 물 뿌리는 회색의 사람은 작업실에서 그리기에 몰두한 작가 자신이 투사된 인물이며, 그의 '희생/절망'의 양면성은 작업이 타자들에게 양생의 기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하는 작가자신의 상황과 동일하다. 그러니까 양생을 소재로 한 이 시기의 작업은, 아직 베이징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는 본인의 작가적 입장과 일상적 삶의 간극에 대한 자기성찰과 반성을 형상화한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최경선_잃어버린낙원_캔버스에 유채_110×140cm_2013~9

기화氣化-공감의 에너지 ● 땅거미 지는 저녁이 되어도 돌아갈 집이 없는 아이들은 「풀 자라는 집」과 「For Your Best House」와 같은 역설적인 카피의 간판이나, 「Return Sweet Home」 같은 변두리 「빈집 앞」, 「검은 길」에 접한 폐가, 폐 공장, 「겨울 집」, 철문 닫힌 유원지 근처 을씨년스런 잡초밭에서 삼삼오오 배회한다. 'Watering' 연작에서의 주인공의 퇴근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저녁나절이다. 기다림은 길고 아버지는 아직 귀가하지 않는다. 윤택한 가정은 언감생심, 부랑의 우울이 짙은 어둡고 칙칙하고 메마른 헤맴. 쓸쓸한 무채색조의 신산한 읊조림. 건조하고 창백하다. ●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집으로 하나둘씩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있나"# 라는 모 가수의 절창처럼, 그곳은 「길이 사라지려고 할 때」 다다른 아이들이 맞닥뜨린 막다른 장소다. 혹, 돌아갈 집이 있더라도 아직은 빈 집이다.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빈집은 "가엾은 내 사랑" 이 갇힌, 기형도 시인과 최경선의 유년의 기억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거기에서 작가는 그런 아이들에게 감정이입하고 공감하는 자신을 본다. 보호는커녕 방치된 그 아이들의 도저한 현실은 쓸쓸하다 못해 차라리 그로데스크한 연극처럼 두려움과 결핍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 꿈같은 쉬르적 분위기가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성을 정밀하게 주조해낸다. 구상이 아닌 형상회화가 증폭할 수 있는 설정과 표현성으로

● 이 기화 시리즈에서는 흘러내리는 듯 빽붓의 큰 필치로 화면전체를 가로지른, 말라버린 액체의 흔적이 까슬까슬하다. 저채도 안료의 얕은 두께감과 옅은 습성(濕性)의 말라버린 흔적만 남은 이곳은, 지금은 양생을 할 수 없는, 물이 고갈된 상황임을 암시한다. 물이 있더라도 「검은 물」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이변이거나, 외등이 켜진 「하얀 문」 앞일지언정 발목까지 물에 잠긴 아이들은 굳게 잠긴 그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암울함. 그리고 안타까움. 이곳이 아이들에겐 기껏 「Lost Paradise」에 지나지 않는 생명 부재, 불임의 땅, 디스토피아임은 자명하다. ● 그런 아이들의 상황을 가장 극적으로 확장한 게 「겨울 물놀이」다. 당시 한국에서 전해진 소식으로, 청소년이 엄마를 살해한 비극적 사건을 소재로 했다. 한겨울 살을 에는 추위에 예쁜 푸른색과 녹색의 물 바깥 지대의, 오염된 검은 물에서 아이들이 발가벗은 채 물놀이하는 장면. 극한에 몰린 아이의 심리적 위기감에 자신의 안타까운 감성을 덧입히고 이입해서 그린 것이다. 그러나 그 화면은 어떤 따뜻함도 배제한 채 거리두기의 진술로만 구성되었다. 그 사건에 눈물을 더하기보다는, 냉랭하게 드러냄으로, 그림을 보는 어른관객들에게 생각하기를 요구하듯이. 그래선지, 저 드라이한 화면이 최루성 분위기보다 더 슬프고도 무겁게 다가온다, 내겐.


최경선_겨울 물놀이_캔버스에 유채_181.8×227.3cm_2012

부재는 욕망의 이음동의어다. 그러니까 이 건조한 빈집 연작에서의 물과 온기의 부재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물을 주고 싶은 최경선의 바램이 역설적으로 도드라진 현장성의 재현이다. 아이들과 동화하려는 의지와 함께 내면으로부터 이타에의 공감이 발생한 것이기도 하고. 타국에서 방치된 많은 아이들에게 실질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이방인의 좌절감이 공감의 에너지로 기화하는 건, 결국 그의 그림에 반영된 내면의 정서와 문제의식에서다. 수분을 증발시키는 에너지처럼, 아이들과의 공감은 그림 바깥 현실에서는 가시적일 수 없다. 이런 안타까운 마음의 회화적 커멘터리가 베이징에 정착한 2012년 경 작업의 요체로 보인다. ● 「빈집」연작은 평론가 유경희가 비유한바 그 이미지가 '음화(陰畵 Negative picture)'에 가깝다. 사진을 인화하기 전 현상된 필름의 음양이 반전된 몽환적 이미지. 물론 최경선의 그림은 명암이 뒤바뀐 음화는 아니다. 절제된 무채색조로 인해 꿈속처럼 그 리얼리티는 낯섦(Strange)을 동반한다. 유화물감과 테레핀의 농도배합과 그 변주에 따른 다양한 수성의 느낌, 그리고 그런 물의 이미지를 포착하되 작가의 빠른 붓질과 질료를 구사하는 능숙한 몸의 반응이 두루 열려서 재현을 넘어서는 표현이 그 낯섦을 더 부추긴다. 정적인 폐허의 풍경으로 흡수되듯이 처리된 인물들의 사라질 듯한 화면처리는, 메마른 질료감으로 인해 더 유연한 동세로 이어진다. 아득하다. 그만큼 아이들에게로 마음이 따라간다. ● 거기에서 나는 올림픽을 전후한 베이징 변두리의 남루함과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의 위기의식을 대리 체험한다. 동시에 그 화면과의 대면에서 발생하는 너무나 리얼하게 서걱이는 촉각적 경험으로 인해, 나의 실제 기억도 저절로 떠오른다. 30년 전 서울올림픽에 때맞춘 재개발 붐, 변두리 주변부에서 남루한 보금자리조차 잃고 공권력에 의해 추방된 도시빈민들의 강제된 소외 말이다. 그래서 최경선의 저 낯선 '음화'는 생생하고도 현실적인 리얼리티로 내게 전유된다. 시각과 촉감이 인식으로 진화하는 기억의 촉지감(觸知感)으로.


최경선_Washing_캔버스에 유채_162.3×130.3cm_2010

습생(濕生)-치유의 길 ● 2013년 베이징에서 귀국한 최경선은 몇 년간 제대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본인의 건강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틈틈이 제작한 건 주로 소품이었다. 북경의 드넓은 작업실에서의 대작에 비하면, 좁은 자택에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다소 불편한 공간적 조건도 그 이유였겠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시기에 제작한 「비오톱(Biotope)의 저녁」 연작은 이전의 배경공간에 비해 한결 풍요로운 물의 능동성을 반영한다. 비오톱은 생명(bio)+땅(topos)의 합성어다. 생명을 고양시키는 장소 정도로 해석하면 될까. 그런 녹색의 우거진 숲, 풍부한 수량의 늪지와 같은 서식지에서의 습생은 평화롭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아이들은 요정처럼 빛나고 생명은 원시림의 식물성으로 싱싱하다. 아팠던 자신의 몸과 정신, 그리고 타자들의 아픔도 함께 치유되기를 간구하는 시선이다. '양생'에서의 가장이, '기화'에서의 기다리던 아이들과 함께, 물과 나무들과 함께하는 풍요로운 서식처 비오톱에서 '습생'의 치유를 하는 스토리가 연상된다. 그러나 이런 작가의 희구에 의해 구성된 아이들의 맑은 생명성엔, 동시에 아픈 슬픔도 녹아있다. 이 시기 세월호를 겪으며 절망했던 작가의 모성은 아이들을 더 빛나는 요정으로 이미지화 했다. 그 아이들을 통해서 상처의 고통과 순수를 함께 아우르며 모두의 회복을 희망하는 경건함은 「물고기 1, 2, 3」이나 「수레국화」에서 싱싱한 생명성의 군더더기 없는 체현과 미적 성취를 이룬다. ● 앞서 말했던 바, 「Watering」이 작가가 성인의 실존적 세계를 '관찰'하는 시선이라면, 「빈 집」은 변두리를 부랑하는 아이들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 '이입'되는 공감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것이 「비오톱」에 이르면 아이/어른, 자아/타자, 타자/타자 간 개체의 차이를 넘어서서 함께 누리는 이상적인 생명성에 대한 작가의 희구로, 또 「치유」에의 의지로 형상화된 것이다. ● 이런 풍요로운 물의 치유 이미지는, 그러나 앞서 이미 베이징 시기의 작품에서도 있었다. 도심의 짜증을 날려버릴 듯 화면 중앙으로 난데없이 쏟아지며 돌올된 물 폭풍 장면. 서사를 생략한 비현실적 상상이었다. 「Washing」이란 2010년도 작품. 당시 작가의 내면이 얼마나 시원한 물을 갈구했는지, 그리고 작업으로 스스로를 어떻게 위무했는지를 증명하는 작품이다. 바로 이 감각적 쾌감의 해방감은 귀국한 이후 「비오톱」시리즈의 능동적 생명성으로 연결된다. 현실에 바탕한 형상도, 작가의 기원이 변형된 상상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주제로 소급되었다. 치유를 주제로 한 「비오톱」시리즈는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비오톱」연작의 전후로 진행된 작가의 긴 작업궤적과 호흡을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최경선_그물을짜는시간_캔버스에 유채_91×116.5cm_2016

물론 구체적 서사를 생략한 이런 상상은, 현실성을 결여한 채 자신이 처한 억압이나 굴레로부터 도피하려는 심리적 판타지의 도해 내지는 관념의 도상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회화의 리얼리티는, 발언하고자 하는 주제의 필연성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내면적인 기원과 바람이라는 환영을 그렸을지라도, 그 바탕인 현실적 서사·인간적 사유·작가적 표현의 진지한 추구는, 이렇게 제시된 내용의 개연성을 필연성으로, 또 현실성으로 재 맥락화시켜 준다. 이 작품에서 형상성이 일견 관념적이면서도 그런 관념의 틀을 넘어서는 실재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현실에서 조우한 서사에 자신을 투사하면서 지향하는 세계를 향한 감성으로 변주하고, 마침내는 몸의 행위와 질료의 반응으로 회화적 필연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라는 것. 이에 대한 적합한 서술이 지난 2017년 그의 개인전 서문에 요약되어있다. ● "최경선은 순례자의 눈을 지닌 화가다. 길 위의 순례자는 항상 낮은 곳에서 진실을 찾으며 주변의 모든 존재들로부터 의미를 성찰하여 진리로 나아가는 이정표로 삼는다. 작가는 인간에 대한 관심을 그것을 둘러싼 시공간에 대한 인식으로 확대시켜, 그들 사이에 맺어진 관계적 의미를 감각의 영역에서 전달하고자 하였다." (김문정, '순례적 공간의 더께와 빛' 중에서) ● 순례자의 눈을 지닌 화가이자 사람, 공감한다. 최경선의 회화는 그 순례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내면은 순례의 과정에서 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통찰이자 공감의 보고서다.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의식을 자연스럽게 형상회화로 연결하는 것이기도 하다. 낮은 곳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관계의 의미를 찾는 순례자란 비유는, 그래서 작가 최경선에게 적절하다.


최경선_흐르는 빛_캔버스에 유채_53×72.5cm_2015

3. 최경선의 그림에 드리운 타자들과의 체험적 일상서사가 심리적인 형상으로 전치되는 과정은 주체와 타자의 성격을 버무린 어법으로부터 시작한다. 등장인물들은 각자 분명한 캐릭터로 묘사되지 않고, 익명으로 분위기와 상황에 녹아든다. 물을 뿌리는 성인 남자, 변두리를 헤매는 아이들, 기타의 인물들 모두 일상에서 직접 만났던 사람들이나, 동시에 그들에게 투사된 작가자신이다. 작가와 타자, 서로 다른 성격의 중첩으로 인해 화면의 인물은 익명으로 그 성격이 모호해진 것이다. 이목구비와 표정의 생략, 반복된 단순한 복장의 유사성으로 인해 몰개성적이기도 하다. 제스처와 동작만이 남은 그 인체에 자아를 투사하는 작가의 행위는, 결국 타자에 공감한 주체의 자연스런 반응이다. 혹은 타자의 특정한 행위에 대한 의식적인 동질감의 드러냄이기도 하고. ● 최경선의 화면에서 감성은 타자에 대한 '연민'을, 인식은 그를 통한 '연대감'을 이끌어 낸다. 그 연민과 연대감을 통해서 작가는 타자와 공감하게 되고, 비로소 자기 내부에 응축된 기억이나 무의식적 상처와 같은 삶의 편린들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된다. 응시는 의지와 인식을 단서로 한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무의식적 시선이나 주체를 비운 채 바라보는 관조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타자와의 사이, 현재와 과거 사이, 나와 나 사이의 '관계'에 개입하는 것이다. 그런 응시를 통한 타자와 세계에 대한 응대와 환대의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를 보듬고 트라우마도 치유하게 된다. 스스로 성숙해지고, 스스로를 살아내게끔 이끄는 것으로 작업을 통해 축적된 힘이 현실에서 작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유기적인 생명활동이다. 더불어 그런 작품과 함께한 또 다른 타자에게 그런 힘은 전유된다. 진실된 과정이 이끌어내는 능동성. 미술은 그런 것이다. 작가의 표현이란 미적 가치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공존이란 사회적 가치도 동시에 지향한다. ● 작품의 소통이란 그런 건가 보다. 긴 시간 그 도저했던 그의 작업궤적이 내겐 미적 쾌감으로 전유되어 남았으니, 작품을 통한 그와 나는 공감의 동지다. 내가 그의 작품에 공감하듯, 최경선도 그의 그림에 소재로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과 현실에 공감했다. 타자에 대한 공감의 마음으로부터, 작업을 통한 정서가 내게(또 다른 관객에게) 이입되고 공유되는 것, 그게 바로 미술이 아니겠는가. 각자가 자유로운 사람들이 그런 공존의 감성공동체, 인식공동체를 만드는 게 미술의 역할 아닐까.


최경선_Road of time_캔버스에 유채_100.3×80cm_2006

4. 회화적 상징은 대상의 재현 체계에 기반 하지 않는다. 근대 이전의 회화에선 일정부분은 그런 부호나 심볼과 같은 요소가 상호 서술적 연계로 그 내용을 드러냈지만, 현대회화에선 텍스트와 해석학의 관계처럼 기표와 기의는 다른 위치에서 발신자와 수신자의 주파수를 맞추거나 비끼어가며 작동한다. 형상회화는 이런 조건들을 따지지 않고 수용하고 또 탈주한다. 고정되지 않은 체계라는 것. 작가가 설정한 요소들을 선택해서 조형화함으로써 지시언어적 구조로부터도, 연극성이나 사물성이라는 강박으로부터도, 시공간적 조건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다만 서사를 바탕으로 자기만의 어법으로 형상적 주제와 메시지를 발신해야하는 형식은 반드시 필요충분조건이다. ● 작가는 평소에 자신의 작업내용이나 형식을 생각하거나, 그 내용에 맞는 소재들을 찾거나, 새로운 시도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을 한다. 추구하는 주제와, 거기에 합당한 단서인 자신의 감정과, 이념과, 지향성과, 체질과, 형상문법, 매체개념, 동시대성 등을 버무려서 어떻게 자기형식으로 연결할지 모색을 한다. 그런 과정의 출발점인 서사는 작업의 화두를 풀어내는 시작점이다. 그 다음으로 그리기라는 물리적이고도 현상적인 몸의 체현이 있다. 실질적 제작과정이다. 형상회화도 여타의 회화와 마찬가지로 종이나 캔버스와 같은 바탕(Plate)에 가하는 작가의 몸짓을 수용하는 예민한 촉감이 필요하다. 붓질의 느낌과 맛, 바탕에 스미거나 붙는 질료, 그 접점에서의 표현적·미적 쾌감이 작업의 운행을 더욱더 예민하게 만드니까. 이때 집중은 깊고, 그것은 삼매의 경지처럼 작가의 몸과 마음과 질료를 물아일여(物我一如)의 몰입상태로 이끈다. ● 이런 흐름에서 비교적 일관되게 긴장도를 유지하며 작업을 진행하는 작가라도, 상황·시기·환경 등에 따라서 그림의 분위기나 표현은 변한다. 그림을 통해서 당시 작가가 처한 상황이나 생각의 역추적이 가능한 이유다. 그만큼 회화는 작가의 몸과 마음이 물질인 안료와 직접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다. 서사로부터 표현에 이르는 여러 형식조건들을 아우르면서도, 메시지를 드러내야만 하는 형상회화는 더욱 더 섬세하고 예민하게 전체과정을 아우르고 장악해야 한다. 이야기나 서술이 아닌 묵언의 형상성으로 상징화하는 지향성의 세계. 거기에서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가 발생하고 또 타자에게 그 진심이 전달되는 것이다. ● 최경선의 형상언어가 독자적인 스타일로 진행되어온 지난 시간은, 그런 메시지의 발신/수신의 토대인 공감과 연대가 진화해온 궤적이었다. 그는 뚝심과 집중력으로 이런 과정을 일관되게 이끌어냈다. 탄탄한 표현력에, 자신의 경험과 문제의식과 작업내용을 관통해서 성찰하는 힘까지 지녔음은, 작가로서 분명한 장점이다. 그러나 더 큰 장점은, 회화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론적 지향점을 인식하고, 그 세계를 말하려는 형상적 태도다. 그의 그림에 진지한 힘이 실려 있는 건 이 때문이다. 더불어 자신을 진솔하게 실어내면서도 그 중량에 함몰되지 않고, 작업내용과 거리두기도 할 수 있는 모던한 태도 또한 그의 내공이다. 작업에 관한 한 그는 백면서생처럼 여리게 보이나, 사실은 힘을 빼고 공력을 시전 할 수 있는 고수에 다름 아니다. ■ 김진하



Vol.20191003b | 최경선展 / CHOIKYUNGSUN / 崔敬善 / painting


이웃 작가들

송창_김보중_이흥덕_손기환_박영균_최윤정_최경선展
2019_0812 ▶︎ 2019_0901



김보중_아차산_캔버스에 유채_2018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이웃 작가들展』은 회화를 통한 자기'형상성'을 추구하는 작가들의, 형상회화에 관한 이합집산 전시다. 나무아트의 타 전시와는 달리, 느슨하게 전시컨셉 없이 작업과정을 있는 그대로 노출하는 형태다. 본디 분당의 이웃에 거주하는 송창, 김보중, 이흥덕 3인의 전시로 출발했다. 이들은 평소 서로의 작업실을 넘나들며 작품과 미술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그 일상적 작업과정과 대화의 자연스러움을 전시공간으로 그대로 옮겨보고자 한 것이 이 전시의 연원이었다. 그러나 이왕이면 타 지역에 있더라도 함께 이런 분위기를 공유할 수 있는 작가들로, 또 년배가 젊어지는 작가들로 형상성에 관한 범주를 넓히면 더 재미가 있겠단 의견에 약간의 변주를 하게 된 것이다.



박영균_이덕구 산전 가는 길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5×210cm_2017


손기환_강릉 가는 길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73×232cm


송창_남계리에서_천에 유채_80.3×100cm_2015


이흥덕_여름휴가_캔버스에 목탄_91×91cm_2018


최경선_Cold Flower 1, 2_2019


최윤정_Pop kids #96_캔버스에 유채_53×53cm_2016


그래서 작년 3회 때부터 손기환과 최경선이 동참해서 5인展으로, 또 올해는 박영균과 최윤정이 합류해서 7인展이 되었다. ● 아무튼, 요즘의 분명한 목적성과 정교한 전시공학으로 얼개를 치밀하게 만드는 전시기획방식과는 거꾸로, 느슨함과 느림과 작가간 인간적 교류를 작품 만큼이나 중히 여기는 이 무위의 『이웃 작가들展』을 통해서 형상회화에 대한 또 다른 부딪힘과 어긋남이 작동하기를 기대해 본다. ■ 나무화랑


Vol.20190812b | 이웃 작가들展


현실처럼 낯선 Strange like a reality of life


김영진展 / KIMYOUNGJIN / 金榮鎭 / painting


2019_0619 ▶︎ 2019_0702



김영진_촛불_캔버스에 유채_227×182cm_201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60910h | 김영진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el.+82.(0)2.722.7760



김영진의 그림은 무겁다. 그리고 보는 나는 버겁다. 그 무거움과 버거움에서 김영진의 그림은 정직하게 작동한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을 분석하며, 모순된 지점이나 아픔을 객관적인 서술과 주관적인 표현(진술)을 아우르는 회화적 장치로 드러내서다. 




김영진_Revolution_캔버스에 유채_90×130cm×4_201
김영진_Winner take all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1

김영진_법원_캔버스에 유채_65×91cm_2019


김영진은 그의 개인적 일상과 신자유주의하에서 우리들 삶의 전형성이 교직되는 지점을 리얼하게 포착해왔다. 자본·독점·혼돈·폭력성…으로 연결되는 「Winner take all」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연쇄구조내에서, 휘청이는 그 자신과 또 휘청이는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전형화해온 것이다. 그 장면을 보면 그가 나고 내가 곧 그가 된다. 그림을 통한 교감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 자본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우리들의 공통된 실존적·존재론적인 현실이 아니던가.


김영진_술집_캔버스에 유채_65×91cm_2019
김영진_술집_캔버스에 유채_65×91cm_2019

작가자신의 내면과 시대현실을 아우르는 그의 회화적 필법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카데믹한 재현적 방식이다. 유화라는 질료성의 고전적 적용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는 것. 그 이유는 그가 회화를 통해 추구하는 그의 '화가'로서의 '입장'에 있다. 단순히 고발이나 비판의 입장이었다면 다른 여러 모던한 매체들을 사용했을 것이나, 자신의 내면/심리/정서를 또한 드러내야 했기에 전래적인 그리기 방식을 고수하는 것일 게다. 다소 올드해보이는 화면구성방식이지만, 그가 드러내려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개인적 체험과 감성/사회적 현상에 대한 인식을 통일하려는 전형성과 총체성에의 지향이 집요하리만치 과거의 미디어인 유화의 그리기 방식에 집중하게끔 만든 모양이다.


김영진_우리는 행복해요_캔버스에 유채_130×356cm_2019

아무러면 어떤가. 흑묘든 백묘든 쥐만 잡으면 되는 것. 김영진의 주제에 대한 문제의식과 화면 견인방식은 여전히 묵직한 것을. 그의 사람됨과 성격이 그리한 것을… 또 나는 여전히 그의 독자적인 작업궤적과 형식과 작업의 가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 김진하


Vol.20190619f | 김영진展 / KIMYOUNGJIN / 金榮鎭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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