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건너기

 

원치용展 / WONCHIYONG / 元致鎔 / painting 

2022_0406 ▶ 2022_0419

 

원치용_철길_종이에 과슈, 색연필, 아크릴채색, 잉크_89.5×130.5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원치용의 '길 건너기' ● 35년 쯤 전 그를 처음 보았던 듯싶다. 서교동 한강미술관의 어떤 단체전 오프닝이었을 것이다. 자주 어울리는 화가들끼리 모이다 보니 낯선 이는 쉽게 노출되었는데, 그때 낯선 그와 자연스레 인사를 하고 몇 마디 얘기를 나누었다. 오랜 기간 파리에서 살았다는 것과, 대학 전공은 미술이 아니지만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해서 기억에 남았다. 1989년 한강미술관이 폐관을 하고 그를 보지 못하다가, 세월이 한참 지난 2005년 어떻게 연락이 되어 과거 지인 몇몇과 함께 그의 개인전이 열리는 토포하우스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여전히 외국계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니 전업 작가의 길을 걷지 못했으되, 틈틈이 그린 그림들로 미술에의 갈증을 푸는 정도를 하고 있다면서.

 

원치용_북극곰 어미와 새끼들_종이에 과슈, 색연필, 아크릴채색, 잉크_80.51×117cm×3_2022_부분

길지 않은 서문에서 개인사적인 이런 얘기를 먼저 꺼낸 이유는, 이 작가뿐만 아니라 작업을 하는 여러 입장들이 떠올라서다. 누구는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서 작업을 하고, 누구는 돈을 벌기 위해, 누군가는 예술가적 제스처로 낭만적 딜레땅뜨나 스노비스트의 삶을 즐기기 위해서, 누군가는 가진 재주가 이것밖엔 없어서, 누군가는 취미생활로 일상의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작업 아닌 것으로는 온전히 말을 할 수 없어서… 등 그 입장은 수없이 많다. 돈과 명예를 가득 채운 작가라 해서 더 가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인의 취미생활이라 해서 몰가치 한 것도 아니다. 작업을 하는 것이 그만큼 자신의 절실함·해방감·의무감·즐김 등에 바탕 하는 한, 미술 행위는 그 누구에게든지 필요하고 또 가치 있는 것이니까. 100m 전력 질주해서 인간의 한계기록에 도전하는 엘리트 스포츠가 중요하듯, 시민 각자의 건강을 위한 생활체육도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처럼. 뛰어난 미적 이념과 감수성으로 탁월한 작가의 미술뿐만 아니라, 그를 감상하거나 창작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작업을 "누리는" 시민의 미술행위가 중요한 것은 그래서다. 전문가의 작품과 일반시민이 주체가 되는 생활미술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코 분리될 성질이 아니다. 미술은 작가와 관객이 소통하는 감성의 사회적 분배이자 삶의 질을 고양하는 문화적 생성에 의한 생산의 가치니까. 기존 미술 제도나 시스템 안에 있지 않더라도, 자기 삶을 반영하는 언어를 담지한 모든 작업이 사회적으로 수용되어야 함은 그래서 당연하다고 하겠다.

 

원치용_사자 어미와 새끼_종이에 과슈, 색연필, 잉크_80.5×117cm×3_2021~2_부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수십 년 직장 생활과 더불어 진행해온 원치용의 그림은 위에 거론한 유형 중 어디에 속할까. 아마도 마지막 거론했던 "자신의 삶을 작업 아닌 것으로는 온전히 말을 할 수 없어서"에 해당 되는 듯 여겨진다. 미술 전공자가 아니어서 습작기 훈련의 결여. 생활인이라 작업에 투자하는 시간과 집중도의 결여, 작가로 활동하며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의 결여 등 많은 과정을 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묵묵하고도 끈질기게 작업을 지속해온 (한국미술계로 보자면)이방인인 이 60대 중반 작가(지망생)의 태도를 보면 말이다. 걸어왔던 인생길 한쪽을 마감하고 이제 비로소 미술을 온전히 시작하는 그의 모습은, "나는 다름 아닌, 내가 걸어온 세계다"라는 어느 외국 시인의 말처럼 묵직해 보인다. 소 고삐를 잡고 삶을 가로지르는 그의 「길 건너기」의 현대판 '심우도尋牛圖'로도 여겨지고...

 

원치용_코뿔소 가족_종이에 과슈, 색연필, 유채, 아크릴채색, 잉크_80.5×117cm×3_2022_부분

고대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했다. 이후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게 하자"는 근대 합리론자 데카르트와, 자연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자연을 더 손쉽게 지배할 수 있다"는 경험론자인 프란시스 베이컨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서구 근대주의는 인간 이성을 중심축으로 오늘의 문명과 문화를 구축해왔다. 법·경제·산업·과학·기술·인문·예술 등 모든 영역에서 그 근대성을 바탕으로, 인간 이외 모든 것을 극복해야 할 타자로 배제하면서 오늘의 지구를 만들어 왔다. 거기에 자본주의는 끝없는 욕망의 근골과 근육을 강화한 적자 주류 이데올로기로 작동했고. ● 그러나 '만물의 척도'이자 '자연의 주인'인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합리적 이성주의가 극한으로 진화(?)한 신자유주의와 4차 산업혁명의 장력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입장에 따라 답은 다르겠지만, 미증유의 팬데믹을 거치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호흡도 통제를 받고, 사람 사이 거리조차도 '만물의 척도'답지 않게 제도와 정책에 의해서 조절-지배되는 이 피동적 현실에서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근대성의 가장 주요한 가치인 개별적 '주체성'이, 근대성의 가장 중요한 기제인 '이성'에 의해 억압받는 모순된 현실에서는 더더욱 긍정적인 답은 나오기 어렵다. 더불어 근대적 이성이 생산한 이 엄청난 과학기술과 속도에 의해, 전쟁과 살육, 환경재앙과 기후재해의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과연 행복한 인간다움이 원론적으로 가능한 것인가를 되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원치용_명동 밤 골목길_종이에 과슈, 색연필, 아크릴채색, 잉크_100×75cm_2019

원치용의 이번 전시 작품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 근대성이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현현되고 있는지, 그의 일상적 경험 서사(풍경)와 인식적 판단(풍경에 반하는 소재의 배치)의 몽타주로 엮어낸다. 자신의 일상적 현실을 접하는 감각적 현상으로부터, 반성적 사유와 상상, 그로 인한 결과적 형상에 이르기까지 결코 유쾌하지 않은 반생명적 공간체험이 그 바탕을 이룬다. 서울역·명동골목길·쇼핑센터·철거 예정지 등의 도심으로부터 철길과 고속도로와 송전탑을 거쳐 주변부로의 공간 이동과 확장을 통해서, 분당에서 살던 직장인이었던 본인이 퇴직 이후 파주에 정착하면서 체험한 서정과 공간 서사를 서술하면서, 또 거기에 상상으로 소환한 각종 동물(오리·코뿔소·북극곰·호랑이·송아지)과 충돌하는 현대문명의 부조리한 현실풍경을 대비하면서 말이다. ● 도시가 넓어지고 교통이 발달할수록 본래 그 공간의 주인이던 생명들은 삶의 터를 빼앗기고 멸종이라는 극점으로 밀려난 게 20세기 역사였다. 그 바탕에서 여전히 개발되고 있는 공간(장소)에서의 실제 풍경과, 문명에 대한 원치용의 반성적 성찰이 자연스레 교직된 형상으로 도출되어 나온 것이 이번 전시 작품의 내용적 축이다. 편안한(?) 퇴직 이후 전원생활을 꿈꾸던 그는 결국 다시 서울과 거주지를 오가는 공간에서 불편한 실체적 모순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고, 기실,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일상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원치용_길 건너기_종이에 과슈, 색연필, 잉크_65.5×100cm_1995

회화에서 이런 방식으로 주제를 연동시키는 화면 구성 형식과 수사법은 물론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러나 원치용이 포착해낸 현장에 대한 리얼한 분위기, 즉 현장성은 철저하게 본인의 공간에 대한 실존적 체험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점에서, 풍경 자체가 비판적 분위기로 응축되며 주제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소재인 풍경과 이질적인 동물과의 몽타주라는 연상적 내용 전개 방식을 제거하더라도, 풍경 자체가 이미 건조하고도 메마른 '불안'과 '소외'의 작가 심리를 표출하는 표현성을 띠고 있어서 그렇다. 예컨대 2019년 작품인 「명동 골목길」은 철거 예정지의 을씨년스런 서정성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감정과 심리를 돌올 시키고, 「고속도로 옆 송전탑」이나 부처를 등장시키며 복선적 상징코드를 배치한 「길 건너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대비와 서술에 의한 내용 전개의 설명적 방식보다는, 표현법과 그리기 자체에 의한 주관적 발성과 음색이 오히려 내용을 회화적으로 더 풍성하게 전달시켜준다는 뜻이다. 사실 다른 그림들도 동물을 넣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로 상징성을 충분히 띤다. 체질에 의한 그리기의 형상성이 소재의 소환과 배치에 의한 몽타주 방식의 기호성이나 서술성보다 더 민감하게 독자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이런 드로잉 방식의 표현법은, 그 자체가 서정적 주제를 견인해내는 형식으로 적절해 보인다.

 

원치용_고속도로옆 송전탑 1_종이에 과슈, 색연필, 잉크_38.5×53cm_2014

시간은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다. 주인이 없다. 누구나 안다. 시간과 더불어 공간도 주인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내 땅"이나 "내 집"이란 사물에 소유격을 부과함으로 마치 자기가 그 공간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한다. 이 지구상에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객일 뿐인데도 말이다. 그 객이 주인행세를 하면서 뭇 생명을 배제한 들판(신도시)은 쓸쓸하다. 아파트가 건설되고 아스팔트가 넓어지고 사람들의 공간이 커질수록, 소멸된 동물의 운명처럼 우리의 미래도 어둡고 좁아질 수밖에 없다. 원치용의 그림은 바로 지금 그가 속도감 있게 지나치며 마주하는 (이미 죽어 버린) 풍경의 현장에서 뚜렷하게 감지한 그런 디스토피아를 경고하는 비판이다. "자연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만물의 척도"가 벌이는 반생명적 개발행위들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형상으로 질문하면서. ● 형상성은 비판성을 담보로 한다. 지난 30여 년간 자신만의 감수성과 인식으로 진행해온 원치용의 작업도 이런 그의 내적 필연성에서 기인한 형상이다. 망칠의 연배에 굳이 작가로 '성공'한다거나 작품을 판매해서 돈을 '번다'는 것보다-그는 이런 쪽으론 아예 생각 조차 않고 있다-미술이란 매체로 세계에 대해서 말을 한다는 겸허한 행위가 그에겐 뜻깊은 일이기에 그럴 것이다. 이렇듯 삶의 경험과 통찰에 바탕한 자기 형식의 발언으로 보자면 이미 그는 '길'을 건너온 작가라 하겠다. 늦은 나이, 퇴직 이후 두 번째 개인전을 갖는 그의 결연함에 성원을 보낸다. 치열하게 작업하시라. 그리고 더 많은 시도를 하시라. ■ 김진하

 

 

Vol.20220406c | 원치용展 / WONCHIYONG / 元致鎔 / painting

지난 주말엔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인사동에 나갔다.

한산했던 인사동 거리가 주말이라 그런지 제법 많은 사람이 나왔더라.

 

술 마시기는 좀 이른 것 같아 '나무화랑'부터 올라갔다.

전시장엔 용해숙씨의 '유토피아 삼경'이 열리고 있었는데,

작가를 비롯하여 최석태, 김구, 김이하 시인등 여러명이 있었다.

 

전시는 특정 장소를 입체 거울을 통해 재구성한 사진전인데,

일곱 개의 삼각 피라미드로 구성된 입체 거울이 전시장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보기로는 거울 같지만, 잘 가공된 스테인리스였다.

 

가로 3m,·세로 1m의 대형 설치물이라 전시장에 올릴 때 고생했겠더라.

전시하는 사진이 각진 거울의 반사를 통해 태어났으니, 설치물 자체가 작품의 모태인 셈이다.

 

작가는 최석태씨에게 작업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으나,

귀가 어두워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거울에 반사된 다각도의 이미지가 장소의 고유성을 허문다는 것 같았다.

 

작가 용해숙씨를 처음 보았는데, 대단한 열정을 가진 여장부란 생각이 들었다.

그 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모르지만, 주목해 볼 작가로 생각되었다.

 

법당 단청을 거울에 반영시켜 유토피아가 존재하는 공간으로 재구성했는데,

공간을 바라보는 인간 중심적 관점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이야기 같았다.

 

거울에 비친 허상으로 기록의 매개인 사진마저 무위라는 걸까?

사진이 폭 넓게 활용되며 사진 본연의 목적에서 점차 멀어 간다는 씁씁한 생각을 하며 내려왔다.

 

벽치기 골목의 ‘유목민’은 초저녁인데도 손님이 많아 앉을 자리가 없었다.

좀 쌀쌀했지만, 담배 피우기 좋은 골목에 상을 차렸다.

 

안쪽에서 마시던 김태영, 이승철 시인, 전상기 문학평론가 등

몇몇 분들이 담배 피우러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최석태, 김구, 김이하씨도 전시장에서 왔으나 자리가 없어 ‘사랑채’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김태영씨가 ‘이즈’에서 그림전시를 한다는 소식을 주었다.

시간이 늦어 볼 수는 없었으나, 전시 리프렛과 새로 펴낸 시집

‘버드나무 버드나무 흰 그림자’ 한 권을 선물 받았다.

 

그 자리에서 시집은 읽을 수 없었으나, 리프렛에 실린 그림은 볼수 있었다.

그림에 환영어린 몸짓 같은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흐릿한 붓질에서 인간의 불안감이나 삶에 대한 허무감 같은 것도 고개 내밀었다.

 

그 날은 ‘유목민’과 ‘사랑채’를 넘나들며 마실 수밖에 없었는데,

뒤늦게는 '사랑채'에 안원규씨와 우문명씨도 나타났다.

여기저기 옮겨가며 마셔 그런지 주량을 한참 초과해 버렸다.

 

필름이 끊겨 어떻게 돌아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카메라에 찍힌 사진을 보며 그 날 방기식씨가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 와중에 선물 받은 김태영씨 시집을 흘리지 않은 게 신통했다.

 

속은 쓰렸지만, 화장실에 들어가 시집부터 읽었다.

김태영씨 그림과 시의 연관성이 궁금했는데, 공통점이 보였다.

 

 

첫장에 실린 ‘만종’이란 제목의 시는 이러했다.

 

“묻지도 않고

스포츠로 민 머리

손수 감겨주고

뽀드득,

물기를 훔친다.“

 

‘잠꼬대’란 시는 더 난해했다.

“비단길 흰 허벅살 한 입의 사과즙”

 

‘즉물성의 감각, 즉물성의 형이상학’이란 제목의 발문을 쓴 문학평론가 전상기씨는 김태영시의 불친절함을 이렇게 말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나 전봉건의 초현실주의시, 아니면 김종삼의 음악을 들으면서 떠오르는 감흥을 시화한 방식에 견준다면 어떨까. 예의 없고 불친절하며 뜬금없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이 시를 보노라면 김태영의 시가 어떨지 감이 올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의 시는 시적 화자의 시작 당시의 생각과 감성을 드러내는데 집중한다고 했다. 즉흥성과 즉물성의 감각을 이미지화하는 것, 다시 말하면 거기에 집중하는 미세하고 예리한 감각의 움직임을 포착해내는 것이 김태영의 시작 목표라고 적고 있다.

 

시어가 잠꼬대 같기도 하고, 아니면 단어를 나열시킨 무슨 암호 같았다.

김태영의 시는 세심한 독해력이 요구되었다,

 

‘고아’

 

​엄마는 어쩌자고

뻐꾸기 둥지였을까

나는 삐뚤빼뚤

도대체 천사는

언제까지나 유구할까

 

임동확 시인은 김태영의 시집에 ‘모순과 소퉁의 시학’이라는 추천사를 썼고,

홍일선 시인은 “천길 나락 ‘절벽’ 속에 피워낸 만다라 시편”이라는 글을 썼다.

요즘 작품들은 너무 난해하다. 

 

사진, 글 / 조문호

 

 
 

 

강행복선생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오 가는 세상이치야 어쩌겠습니까만

그 작업은 무념무상의 수행이었습니다.

 

한 올 한 올 쌓은 목판화 아티스트북이 있어

적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승에서 못 이룬 화엄의 경지, 저승에서 이루세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래는 인사동에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주로 ‘유목민’ 아니면 ‘나무화랑’이네요.

지난 모습을 추억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세요.

 

그리고 역병때문에 문병오시는 걸 가족들이 사양한답니다.

저승 가는 노잣돈이라도 드릴 분은 아래로 보내주세요.

 

 

부고

-상주: 조진숙, 강성민, 강민정, 강행자

-빈소: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8호실 (대학로)

-발인: 2022.2.10.(목)

-장지: 서울추모공원

상주 강성민 계좌번호

국민은행 567001-04-320280

 

성원해 주신 덕에 ‘인사동 이야기’ 출판기념전을 잘 마쳤습니다.

 

그러나 코로나가 설치는 때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편치 않은 전시임은 틀림없었다.

한 달 전의 민폐가 체 가시기도 전이라 염치없는 짓이었다.

 

책이라도 좀 팔려는 욕심의 신중하지 못한 결정임을 뒤늦게 후회했으나

이미 전시안내를 올린 터라 빼도 박도 못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보도자료에서 부터 일체의 전시홍보를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일기처럼 매일 올리는 중계방송까지 멈추고, 한 분이라도 알게 될까 전전긍긍한 것이다.

그러나 다녀간 분들의 페북 연결로 알만한 분은 다 알게 되어버렸다.

 

그 벌은 전시장을 지켜는 내내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아는 분이 오시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으니, 고문도 그런 고문은 없었다.

심지어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 중에 자기가 왜 빠졌냐며 원망하는 지인까지 여럿 있었다.

그래서 정동지에게 맡겨둔 채 전시장 비우기를 밥 먹듯 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한정된 지면에 어찌 다 수용할 수 있겠는가?

11년 전 초판 나올 때 찍은 분도 다 게재하지 못한 상황에서 추가 촬영까지 했으니 쩔쩔 맨 것이다..

하다못해 사진 질에 따라 선정하라며 출판사 편집자에 위임해 버렸다.

 

예전에는 만나는 대로 촬영했으나 이번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친분보다 인사동과의 관계성에 중점을 두어 신중하게 선택했지만, 이 또한 갑 질에 다름 아니었다.

 

내년에 출판될 인사동 책에는 개인 입상사진보다 인사동 행사장을 비롯한

특정 공간에서 찍은 단체사진을 많이 할용해 당시의 현장 이야기까지 곁들일 생각이다.

많은 분이 참여할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 것도 약속드린다.

 

이번 전시로 인해 많은 분들에게 민폐는 끼쳤지만, 더 좋은 책을 준비하는 수업료로 여긴다.

그 덕에 ‘인사동 이야기’ 책도 100여권이나 팔았고, 사진도 여러 점 판매해 손해는 보지 않았다.

 

그런데, 대전에 계시는 사진가 박순규씨는 전시 때마다 먼 길을 찾아주는 것도 고마운데,

마치 자식 챙기듯, 올 때 마다 농산물이나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 송구스럽게 만들었다.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을 찾아 주신 많은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전시 첫날인 24일은 ‘유목민’에서 간단한 뒤풀이를 했는데,

이한성씨가 술값으로 백만원을 술집에 맡겨주는 통에 지난 전시 때와 달리 술값 걱정은 덜게 되었다,

그 날은 조해인, 김수길, 정동용, 김 구, 김제홍, 장경호, 임경일, 이명희씨와 함께 마셨다.

 

그 다음 날인 25일에는 마지막 들린 황정수씨 내외와 한 잔했는데,

먼저 술집으로 안내해 드린 화가 김정헌, 이태호씨도 자리 잡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황정수씨와 사진가 양승우씨가 친하게 된 경위와

서지학자 김영복씨와 오랫동안 함께 했던 관계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셋째 날인 26일은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와 조준영씨가 전시장 문 닫을 무렵에 나타나

모처럼 ‘부산식당’에서 생태찌개를 먹을 기회가 생겼다.

 

오랜만에 들린 ‘부산식당’은 방에서 의자로 실내장식이 바뀌었으나

13년 전 찍어 준 조성민씨 사진은 그대로 걸려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아들이 물려받았는데,

마치 부친의 입상사진이 ‘부산식당’ 트레이드 마크처럼 벽면을 지켰다.

 

27일 늦게는 판화가 류연복씨, 사진가 김문호씨, 화가 신상덕씨가 나타나

전시장에서 와인으로 목을 축이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다.

 

술 마시는 중에 신상덕씨와 ‘귀천’에 모과차 마시러 갔더니 목영선씨가 반겼다.

목순옥여사가 운영했던 ‘귀천’을 조카 목영선씨가 물려받았는데, 벌써 23년의 세월이 흘렀단다.

다섯 살짜리 아들이 스물여덟의 청년이 된 것이다.

 

28일은 ‘진인진출판사’ 김태진대표가 꽃다발과 축하선물까지 사 오셨다.

오래전 부터 인사동에 관한 출판 계약을 한 상태에서 같은 주제의 사진집 복간 기념전을 열었으니,

죄송스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고마운 분이다.

 

그 날은 마지막 들린 화가 이인철씨와 어울려 불편한 마음을 위안했다.

 

전시 철수 전 날인 29일은 최석태, 장경호씨 등 여러 명과 어울려 자리를 옮겨가며 마셨다.

 

전시장에선 매일 주눅 들어 지내지만 문 닫기가 무섭게 술집에서 지냈다.

 일주일 내내 술독에 빠지는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그런데 전시 끝나는 날 이한성씨가 다시 나타났다.

맡겨두고 간 술값이 소진될만하니 다시 찾아 온 것이다.

그 날은 장경호씨 앞으로 술 값 백만원을 맡겨두고 간 것이다.

 

이한성씨는 20여 년 전 인사동 주막 ‘작은뜨락’을 자주 찾았는데,

늘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자선 사업가다.

재산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야박한 현실이 아니던가?

이런 분들이 인사동 풍류객의 주체로 버티는 한 인사동 앞 날은 결코 어둡지만 않을 것이다.

 

전시를 철수하는 날은 전시 디피에서부터 마무리까지 도와 준 김진하관장과 한 잔 했는데,

김수길, 전활철, 임경일, 노광래씨와 어울려 마지막 술잔을 들었다.

 

그동안 전시장을 비워 만나 뵙지 못한 분들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해 아쉽지만, 아래 방명록에 적힌 성함이라도 오래 동안 기억하렵니다.

"고마웠고, 미안합니다"

 

조해인, 이명희, 한배규, 석은미, 김인재, 박경하, 이종승, 전강호, 양시영, 박홍순, 노광래, 박상희, 변정대섭,

편근희, 손기환, 전태수, 양상용, 김이하, 정영철, 나종희, 조정애, 김재홍, 황영선, 우문명, 곽숙경, 공윤희,

박옥수, 박서연, 박상희, 박 건, 조경연, 박불똥, 임태종, 서인형, 박태종, 김진하, 박서호, 안정희 ,최인기,

임경일, 안동해, 정동용, 김 구, 김수길, 박은태, 변성진, 박찬원, 성기준, 현영애, 박순규, 최효준, 이종구,

김발렌티노, 이태호, 김정헌, 황정수, 이만주, 김윤기, 최연하, 이규상, 조준영, 최영호, 이기정, 이성은,

김지연, 곽명우, 최태만, 양정애, 최동락, 박종면, 고 헌, 송주원, 전민조, 김문호, 유광식, 신상덕, 류연복,

이승곤, 양재문, 이병진, 김태진, 이인철, 문성식, 박순영, 이한복, 서정란, 임정희, 강찬모, 이상훈, 최석태,

금보성, 하형우, 이태호, 임동은, 고영준, 전활철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지난 20일은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인사동이야기사진전을 준비하는 날이다.

 

승용차에 가득 싣고 간 사진액자를 4층까지 올리기가 만만찮았다.

5분이 초과하면 주차위반으로 카메라에 찍힌다기에

숨 쉴 틈도 없이 바쁘게 들어 올렸다.

 

너무 많이 준비한 액자 때문에 걸 일이 걱정되었으나

차를 주차장에 옮겨놓고 돌아오니 김진하관장이 적절히 자리를 잡아놓았다.

 

일사불란하게 설치하는 김관장의 디피 솜씨는 장인의 경지에 달해 있었다.

그 많은 액자를 짜임새 있게 걸어주어 우려를 덜었다.

조명 조정까지 잘 마무리했다.

 

김진하, 장경호, 전활철씨와 어울려 유목민에서 저녁식사를 겸해 술 한 잔했다.

전시는 30일까지니, 시간 나시면 관람하시길 바란다.

 

사진, / 조문호

 

 

인사동의 전통문화가 퇴색되고 예술가들의 풍류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인사동이 관광지로 바뀌며 점차 황폐화되어가는 현실을 말하고 싶어 ‘인사동 이야기’ 사진전을 마련한다. 

이 전시가 인사동 반세기를 정리하는 서곡이기도 하다.

 

2009. 80x5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은 긴 세월 많은 사람에게 예술적 영감을 일깨워온 곳이다. 어찌 보면 예술을 공유하는 장터나 마찬가지다. 장에 갔다가 반가운 사람 만나 즐기듯이, 다들 뒷골목 주막에 모여앉아 정 나누어 온 장소다. 혁명을 외치고 사랑과 예술을 노래하며 꿈을 펼친 곳이다.

이제 문화 특구로 내세울 만한 예스러움이나 인사동 풍류는 오 간데없다. 더러는 인사동이 끝났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도 한다. 그러나 인사동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이상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전통 가게나 문화공간들이 어려워도 군데군데 버텨나갈 것이고, 예술가들도 작품을 펼쳐 놓고 어느 골목 주막에 모여앉아 담론으로 꽃 피울 거다. 그래서 인사동 노래를 부르기로 작정한 것이다.

 

2006. 65x40cm. 디지털프린트

이번 전시는 20년 이전에 촬영한 흑백사진을 제외한, 그 이후에 촬영된 컬러사진에서 골라냈다. 인사동의 변해가는 풍경을 년 대별로 보여주는 작품 30여 점을 주축으로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 입상 사진 20여 점도 함께 전시한다.

 

2010. 33x2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 이야기에 비켜선 입상 사진을 내건 것은 인사동이야기사진집의 많은 지면을 인사동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기도 하지만, 본래 의도한 제목도 인사동 이야기가 아니라 인사동 사람들이었다. 비단 인사동만이 아니라 장소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에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어쩌면 그 사람들이 인사동을 지켜나갈 전사이기도 하다.

 

2016. 33x2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 사람들' 작업은 1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2007공화랑에서 개최한 인사동, 그 기억의 풍경사진전과 2010북스갤러리에서 개최한 인사동, 봄날은 간다사진전에 이은 세 번째 전시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을 각자가 추억하는 특정 장소에서 촬영하여 지난날을 되새기게 했다. 앞으로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촬영은 계속 이어지겠지만, 이 전시를 계기로 그동안 기록한 인사동 사진들과 사료를 정리하기로 했다.

 

2011. 65x40cm. 디지털프린트

길고 긴 인사동 이야기를 들추려니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야겠다. 조선시대에는 궁중 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가 인사동에 있었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고, 400년 된 회화나무와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 대감의 옛 저택인 민가다헌’, 박영효 대감댁이었던 경인미술관한옥도 인사동 유적이다.

 

2012. 33x20cm. 디지털프린트

19세기 말 개화 바람이 불면서 인사동 일대는 교회, 요릿집, 병원 등이 들어서며 신식 동네로 변해갔다. 태화관 터, 천도교 수운회관, 숭동교회, 해정병원 등이 다 그 때 생긴 것이다. 1924년 김정환 옹의 통인가게가 생기면서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34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책방, 산기 이겸노옹이 운영한 통문관도 들어섰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고가구나 고미술품 등 골동이 인사동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1960년대까지 고서점, 고미술상, 필방, 표구점 거리가 되었다. '구하산방'과 수도약국도 그 때 생겨난 것이다.

 

2013. 65x40cm. 디지털프린트

일제강점기에 형성되었던 골동품 상점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 초까지 성시를 이루었는데,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먹고살기 힘들어 많은 골동품이 인사동으로 몰려들었다. 미군 장교 출신 막 뮐러가 골동품을 몇 트럭이나 사들여 번 돈으로 천리포수목원도 만들었고골동상들도 때 돈을 벌었다그리고 사기 사건도 성행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가짜 고서화사건, 금당 살인사건이다.

 

2014. 80x5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이 갤러리 타운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박명자씨의 현대화랑이 관훈동에 문을 연 것을 기점으로 1974'문헌화랑', 1976'경미화랑' 등 상업 화랑들이 속속 모여들어 미술문화의 거리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박주환씨가 '동산방'1976년 열었고, 1977년에는 김창실씨가 '선화랑'을 열었다. 1983년 이호재씨의 가나화랑과 공창호씨의 공창화랑’, 김완규씨의 '통인화랑', ‘관훈갤러리’, ‘학고재’, ‘경인미술관등이 개관하므로 인사동은 명실상부한 화랑가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그 후에도 김진하씨가 운영한 나무화랑을 비롯하여 많은 화랑이 생겨났다. ’나무화랑그림마당 민에 이은 민중미술의 교두보로 자리 잡았다.

 

2015. 65x40cm. 디지털프린트

상업화랑이 생겨나기 이전인 1959년에는 종군사진기자 임인식선생이 관훈동에 사진전문화랑인 '신한화랑'을 차린 적도 있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김영섭화랑과 이순심씨가 운영한 나우와 룩스가 생겼으나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최건수씨가 '룩스'를 인수하여 인덱스’로 개명한 것이 인사동의 유일한 사진화랑으로 남았다.

시인들의 아지트로는 84년 정동용 시인이 운영한 시인학교를 시작으로 이생진 시인의 단골 모임터 순풍에 돛을 달고’, 김여옥 시인이 운영한 시인 과 강고운시인의 '무다헌'이 운영되다 문을 닫았고몇 년 전 문을 연 이춘우 시인의 시가연만 남아 있다.

 

2016. 80x5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은 예술단체들이 모여 있었다는 점도 또 하나 특징이다.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자리에는 초창기 예총회관이 있었고, 80년대 중반에는 민미협이 창립한 데 이어 88년에는 민예총이 창립되어 건국빌딩에 사무실을 차렸다. ‘민미협 창립과 함께 그림마당 민이 생겨나는 등 인사동이 민중미술의 본거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99년에는 민사협이 북인사마당 입구에 둥지를 틀었다.

 

2017. 65x4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에 예술가들의 풍류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로 알려지고 있다. 명동을 주 무대로 모이던 문인들이 종로 관철동 시대를 거쳐 인사동으로 옮겨오며 시작된 것이다.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는 민병산 선생을 앞세워 천상병, 박이엽, 민영, 신경림, 강민, 구중서, 신동문, 박재삼, 황명걸, 방영웅씨 등 많은 문인들이 인사동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2018. 65x4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에 예술가들이 모이는 곳은 주로 기원이나 찻집, 그리고 대폿집이었다.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씨가 차린 귀천과 장문정씨의 수희재’, 최정해씨의 초당같은 찻집, 그리고 술집으로는 실비집이나 고갈비 양푼집 등 이름도 없는 대폿집이 주 무대였다. 실비대학이라 불린 '실비집'은 항상 빈털털이 예술가들이 우글거렸다.  하가'레떼', '춘원', '누님칼국수등이 연이어 생겨났고, 전시 뒤풀이 장소였던 부산식당에 많은 작가들이 어울렸다. 그 이후 생겨 난 전유성의 학교종이 땡땡땡과 사진가 김수길의 '구름에 달 가듯이', 노인자의 뜨락이나 ‘소설’, 이해림의 평화만들기’ 이미례 영화감독의 여자만’, 송점순의 사동집’, 유재만의 아리랑가든’, 박중식 시인의 툇마루같은 술집이나 밥집에 많은 예술가들이 드나들었다. 그 뒤에는 최동락씨가 운영한 풍류사랑’과 전활철씨의 유목민’, 최일순씨의 푸른별 이야기도 생겨났고, ’풍류사랑은 김용태 미망인 박영애씨가 이어받았다.

 

2018. 33x20cm. 디지털프린트

인사동 술집 곳곳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북적이며 개똥철학을 풀어댔다. 그러나 술판의 끝자락은 언제나 소란했다. ‘평화 만들기에 평화가 없던 그때가 인사동의 전성기였는지 모른다.

 

2019. 65x40cm. 디지털프린트

이 전시는 1124일부터 30일까지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열린다.

꺼져가는 등불처럼 가물거리는 인사동의 부흥을 위해 다 같이 힘을 모우자.

 

2016. 65x40cm. 디지털프린트

개정판으로 나온 인사동 이야기 사진집에는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 124명의 입상사진을 바탕으로

강민시인을 비롯한 43명의 작가가 쓴 48편의 인사동에 관한 글과 인사동 사진 37점이 소개되어있다

 

눈빛출판사 / 가격25,000원

 

 

 

포토콜라주- 한국현대사

 

신학철展 / SHINHAKCHUL / 申鶴澈 / mixed media 

2021_1006 ▶ 2021_1101

 

신학철_한국근대사_콜라주_79×103.5cm_199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90412e | 신학철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신학철의 한국현대사 - 그 뿌리, 포토꼴라주 ● 신학철의 포토몽타주·포토콜라주에 의한 『한국근대사-한국현대사』 연작은 한국현대미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 작업 내용과 형식,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 미학과 정치의 관계성, 기타 문화운동 등에 있어서 작가와 미술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주요한 실제적·이론적 실례가 되어서다. 그만큼 신군부가 등장하던 시기와 궤를 맞추며 등장한 신학철의 『한국근대사』 와 『한국현대사』 는 이후 80년대 민중미술의 핵심적 가치로, 지금까지도 현실주의적/비판적 형상성의 주요한 미학적 모범으로 작동하고 있다. ● 1970년대 초 전위미술 단체인 AG의 실험미술로부터 시작해서, 80년대 민중미술 시기를 관통하며 현재에 이르는 40년은, 오로지 『한국근대사』 와 『한국현대사』 작업에 화가 자신을 투여한 궤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83년 『한국근대사-종합』, 2002년에 완성된 20m의 『한국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 , 현재 진행하고 있는 40m가 넘는 초대작을 비롯한 여타의 회화연작으로 이 포토콜라주는 신학철의 자전적 체험과 역사적 의식을 미적인 메시지로 전환해준 주요한 어법이자 기법이었다. 최종 완성작이자 대형의 포토몽타주 회화들은 우리들의 눈에 익지만, 기실, 이 작업의 가장 중요한 원천적 뿌리인 에스키스이자 독립된 작품이기도 한 포토콜라주 원작은 발표가 된 적이 그리 많지 않고 또 회화에 비해 조명을 받지 못했다(1980년대 초반 초기작들은 여러 잡지와 전시를 통해서 많이 알려진 바 있으나, 이후 회화가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으면서 콜라주 작업은 상대적으로 공개의 기회가 별로 없었다). 실제 사진과, 사진을 복사한 한국 근현대사의 도상(신학철은 이 사진들을 리얼리티 그자체인 오브제로 여긴다)을 채집-맥락과 주제에 맞게 선별/분류-그것을 상호 연결하거나 축소/확대복사를 통해서 특정한 형상으로 조합-이를 변주해서 콜라주 하는 과정이 신학철 작업과정의 뼈대라 할 수 있다. 작품마다의 특정한 소재이자 내용적 서사로 형상화한 이 원안의 콜라주야말로, 신학철의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를 가장 래디칼하게 반증하는 신학철 어법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신학철_한국현대사_포토콜라주_77.8×48cm_2013
신학철_한국현대사-6.25(통곡)_포토콜라주_107.7×87cm 2018
신학철_한국현대사-10.26_콜라주_78.87×58.8cm_2013

신학철의 한국현대사 속 신체들은 왜곡되고, 뒤틀리고, 해체되고, 또 재조립된다. 그러나 그 신체들은 결국 또 다른 형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내용적 단서이고, 우리가 결과적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형상에 의한 상징의 영역이다. 화면에 단서로 제시된 인체와 그를 결합한 서사적 주제의 배후에서 조형적·심리적 힘으로 좀 더 심층적 소통을 작동시키는 건 만드는 건 바로 이 형상성 때문이다. 작가의 체질, 무의식적 의지, 기억, 그리고 체험 등이 어우러지면서 풍기는, 작가와 떼려고 해도 뗄 수가 없는 체취 같은 것 말이다. 신학철에게 있어서 이는 그의 언어를 이루는 음소이자, 엄밀하게는 그의 포토콜라주와 몽타주회화를 가로지르는 힘줄이자 신경망이라 하겠다. 예민한 촉수로 세계의 비극을 감지하고, 물리적 폭력으로 분절·해체된 사람들의 신체를 자신이 원하는 에너지로 재조립하는 것인데, 이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미 숱한 사건과 죽임으로 분절된 이름과 신체들을 다시 호명해서 그 비정형적인 혼을 위로하는 일종의 제의라 하겠다. ● 바로 그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려내려는 무의식적 의지. 생명성. 신학철의 작품에서 그렇게 재조립된 인체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드러내야만 비로소 역전의 에너지가 발현하는 장(Field)이자, 그런 에너지가 용트림하는 형상으로서의 실체다. 화면의 몸은 바로 그런 욕동하는 생명의 현장이고. 신학철의 형상이 이처럼, 기괴한 그로데스크로 전락하지 않은 이유는 역사적 팩트와 자신 내면의 무의식을 긴밀하게 콜라주한 그의 조형적 능력 때문이기도 하다.

 

신학철_한국현대사-관동(간토)대지진(한국인 학살)_포토콜라주_77.8×108cm_2011

1980년대 민중미술 시기를 관통하며 현재에 이르는 40년간,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 작업에 화가 자신을 온통 투여한 궤적을 보라. 어째서 그런 이해하기 어려운 작업에너지가 그에게선 가능할까. 그것은 그가 작업을 머리로만 하지 않아서다. 한국현대사와 자신의 자전적 일대기가 결합하고, 또 미술과 역사와 정치가 두루 얽히는 혁명에의 열망이 여전히 그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리라. 그런 자전적 체험과 역사적 의식을 미적인 메시지로 전환해준 주요한 어법이자 기법인 포토콜라주 형식이 그에게 여전히 재미를 주어서 그렇기도 할 것이고. 수많은 사진을 채집해서 의도한 맥락과 주제에 맞게 선별하고, 그것을 상호 연결하거나 축소/확대복사를 통해서 특정한 형상으로 조합한 신학철의 포토콜라주와 회화는 이제 그 자체가 한국현대미술에서는 신학철이라는 이름의 포토콜라주 장르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것은 한국현대미술에 있어서 일대 사건이지만, 동시에 한국현대사에서 변혁기 문화운동을 추증하는 에너지이자 원기소이기도 했다. 이처럼 자신의 양심과, 정치·사회적 실천과, 조형적 특성을 통일시킨 작가는 드물다. 신학철이란 사람이 곧 그의 작품과 일치된 미술이라고 느끼는 이유다.

 

신학철_한국현대사-자유(5.18)_콜라주_78×54cm_1994
신학철_한국현대사-초혼곡_콜라주_182.7×51cm_1995

올해 78세인 신학철은 여전히 현역 화가다. 혼자 숱한 이미지를 오리거나 변형하면서 아주 긴 시간 콜라주로 에스키스를 하고 더 큰 회화로 정교하게 옮기면서, 오로지 자신의 몸으로만 그 지난한 작업 과정과 노동을 견딘다. 거기에서 여전히 긴 시간이 걸리는 포토콜라주와 엄청난 대작의 회화가 완성된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힘이 "쎈" 작가로 여겨지는 것이리라. 바로 진짜 사람인 작가의 힘으로 말이다. ● 이번 전시는 그동안 제작했던 콜라주 소품 중 작가에게 남아있는 170여점 가운데 50여 점으로 구성한다. 상당 부분 미발표작이다. 대략 90년대~2019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들이다. ■ 나무화랑

 

Vol.20211004e | 신학철展 / SHINHAKCHUL / 申鶴澈 / mixed media

 

보름 동안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과 노숙인 현수막전 치르느라 곤죽이 되었다.

매일 반가운 분들 만나 졸라 퍼 마시고도 살아남은 것이 용 타 싶다.

전시가 끝나자마자 신학철 선생 전시까지 이어졌는데, 이러다 알콜 중독자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그동안 전시를 하면 힘들고 돈만 까먹는 일이라 피해 왔으나

사진집이 나오면 전시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팔리지 않는 책을 어렵사리 만들어 주었는데,

전시라도 해서 책이라도 좀 팔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번 정영신씨는 책만 아니라 작품도 제법 팔렸다.

큰 작품이 세 점이나 팔렸고, 소품은 30여 점이나 팔았다.

십만 원 하는 소품은 제작비와 갤러리 마진 제하면 몇 푼 남지 않지만,

보리 흉년에 이게 어딘가?

 

그나저나 다시 사진을 만들어 포장하고 배달하는 일도 만만찮았다.

그동안 전시 때문에 보지 못한 류연복씨 전시 보러 가다가 차가 밀려 진을 빼기도 했고,

미루어 둔 일 하느라 낑낑거리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지난 11일은 미처 철수하지 못한 노숙인 현수막 거두러 인사동 나갔다.

판매 작품 중 ‘나무화랑’에 맡길 사진도 있지만, 현수막은 빨리 거둬야 했다.

그냥 두어도 오가는 사람들이 보면 홍보야 되겠지만,

자기 들어간 현수막 사진 받으려고 기다리는 노숙인들 때문이다.

그리고 햇볕을 오래 받으면 탈색할 염려도 되었다.

 

며칠 만에 나간 인사동 거리는 월요일인데도 나들이한 사람들이 많았다.

액자를 갖고 ‘나무화랑’에 올라갔더니, 생각하지도 못한 류연복씨가 반겼다.

어제 안성 전시장에서 만났는데, 또 만난 것이다.

안성은 월요일이 휴관일이라 모처럼 짬 내어 신학철선생 전시 보러 왔단다.

 

사진을 전해주고 다들 유목민 골목으로 옮겼는데,

골목 어귀에 문 닫은 포도나무집을 보니 지난날이 생각났다.

돌아가신 강민 선생의 단골집으로 추억이 많은 주막이었다.

폐가처럼 창을 가린 대나무 잎이 강민 선생의 넋 인양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옆에는 거리 아티스트 이태호씨의 김수영시인 판화가 붙어있었다.

낡은 가스 배관 틈에 붙었는데, 그 밑에는 재떨이와 종이컵까지 놓여 있었다.

마치 김수영시인 100주년을 기념하는 제단 같았다.

큰길에서는 볼 수 없는 인사동 풍류 잔재다.

 

류연복씨 도움으로 현수막 철수는 간단히 끝냈으나, 그냥 헤어질 순 없잖아.

‘유목민’의 별미 감자전을 안주로 막걸리 한잔했다.

어제는 게장 집에서 밥은 얻어먹었지만, 차 때문에 술 한잔 못했다.

 

그런데, ‘유목민’ 전활철씨와는 같은 홍대 미대 출신이지만 서로 몰랐다.

전활철씨가 삼 년 선배라는데, 군 복무하느라 서로 마주치지 못한 것 같았다.

서로 안면도 터고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며 시간 보냈다.

 

류연복씨도 갈 길이 바쁘지만, 나도 동대문시장 가야 했다.

현수막을 사진 별로 재단하여 올이 빠지지 않도록 박아야 했다.

막걸리 세 병으로 끝낸 아쉬운 술자리였지만,

우연히 만나는 이런 맛에 인사동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달은 고생했으니, 사모님께서 보너스라도 좀 주실지 모르겠다.

야무진 꿈이라도 꾸어 보는 희망도 없다면야 무슨 재미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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