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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20-7,13

 

거리의 표정을 살피고 다니던 작가에게 어느 날 간판만 덩그러니 걸려있는 낡은 상점이 눈에 들어왔다.


김라연 / 희 망 상 회

 
살던 사람은 이미 떠나버린 빈집에, 앞날을 꿈꾸는 말 ‘희망’과 이제는 구식이 되어버린 용어 ‘상회’가 나란히 적혀있다니 생각할수록 아이러니한 조합이었다. 닳을 대로 닳아 글씨가 떨어져 나간 간판의 겉면에는 그만큼 무상한 세월이 담겨있었다. 한때는 누군가 일상을 일구던 곳이었을 텐데, 그런 곳이 주변에서 자꾸 사라져갔다. 말릴 새도 없이, 아쉬워할 새도 없이.

그럼에도 삶은 이어졌다. 쓰던 사람은 없어져도 사물은 남아 묵묵히 빛을 받으며 자신의 존재를 수긍하고 있었다. 사람이 떠난 빈 땅에는 식물이 자라나 저마다의 생(生)을 이루었다. 그러니 작가는 그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을 막을 수야 없지만, 이 도시가 바뀌어가는 것을 똑똑히 보고 그릴 수는 있으니까 땅 위에 쌓인 건물이 걷어지고, 맨땅이 드러나고, 다시 풀이 땅을 뒤엎는 과정을 보고 상상하며 캔버스에 옮겼다. 헐벗은 사물과 장소가 보내는 시선과 마주하며, 나지막이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하며, 바뀌어가는 도시의 표면을 붓질로 보듬었다. 그렇게 이번 전시는 만들어졌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아직도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변해가는 세상을 향해 성급한 대안과 분노에 찬 악다구니를 쏟아내는 대신 김라연은 차분히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음을 다해 오늘을 기록한다. 그의 희망을 듣기라도 하는지, 저 먼 곳으로 보낸 작가의 시선에 풍경은 다만 나지막한 침묵으로 답을 보낸다.

 

 김소라 (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빈 땅에 말 걸기


 

 

우리는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도시는 너무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과 너무 낯설어서 지워진 것들 사이에서 결여되었습니다. 도시의 욕망을 더듬으며 누군가는 너무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시 불러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너무 낯설어서 지워진 것들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상실에 대한 우울증적 숭배를 앞세워서 때로는 시대의 우울을 선언하면서 말입니다. 현재의 이미지는 그렇게 다시 한번 더 숭배와 선언 사이에서 결여되었습니다1. 그렇다고 실상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선이 그렇게 냉철하지도 회의적이지도 않습니다. 어떠한 정치적 올바름도 우리의 삶을 위로할 수 없듯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찌꺼기는 가장 안락하고 가장 은밀한 앙금으로 가라앉아있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사물의 아우라가 상실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시선은 모든 사물의 이미지에 남겨진 찌꺼기라는 말을 했지요. 주어진 이름을 배반하고, 통속적인 연상에 반항하며, 집단적 맹목을 거부하는, 시선은 인간의 찌꺼기이다2. 인간에게 남겨진 마지막 한 방울이 조금은 그대로 내버려질 수 있도록 행여 벌거벗겨져 있더라도, 그 사고의 여백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합니다.

 

스산한 가을이었던 것 같습니다3. 모래가 많아서 물이 늘 모래 밑으로 스며 내려간다고 해서 불렸던 모래내. 이제 막 들어선 아파트의 시멘트 냄새를 뚫고 다다른 곳은 아직은 다세대 촌으로 남아있는 남가좌동 시장 골목 지하의 작은 전시장이었습니다. 눅눅한 기운이 낯설지 만은 않았으나 조금 일찍 도착한 터라 가까운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던 작가에게 저는 어딘가 이방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가는 공사장 펜스를 화폭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녀의 몸도 야밤의 도시 한복판으로 잠입했습니다. 한쪽에는 공사장 펜스가 (실제 용도는 옆으로 미뤄놓은 채) 그 프레임만 남아 무성한 인공 섬을 다소곳이 감싸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 작가는 두 팔을 쭉 뻗어 도시의 미래를 지지하는 간판들에 써늘한 개입을 시도합니다. PARADOX HOTEL4. SANGDO DOOSAN WE’VE NOTHING5. 문득 간판을 수집하고 있던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작업실의 한구석이 떠오릅니다. 그곳에서 학생이었던 김라연은 무언가를 소중히 담고 있었고 반면에 무언가를 소심하게 탓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 학생의 행위를 수집이라고 하고 그 학생의 태도를 저항이라고 한다면 수집과 저항은 과연 함께 할 수 있을까요? 그 사이에 무엇이 잠식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단한 스펙타클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학생이었던 김라연의 수집과 저항 사이에서 일어나는 고요한 소요6를 비로소 만난 곳은 양재동의 한 아파트 상가의 지하 주차장이었습니다.

 

화창한 가을의 아직 지하 주차장이 들어서지 않은 비교적 오래된 아파트였던 것 같습니다7. 지상주차장이 꽤 넉넉하게 동과 동 사이에 펼쳐져 격자를 그리고 있었으니까요. 아파트 상가에서 전시장으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아 헤매다가 발견한 것은 화물용 대형 엘리베이터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자동차용 엘리베이터였나 봅니다. 화창한 가을 햇살에 비해 썰렁한 지하의 기운에 숨기운이 싸해졌고 정면 어디선가 넘쳐 흘러내릴 듯 고여있는 물웅덩이가 곧게 서있었습니다. 녹는 땅8. 그린 것과 보여지는 것의 오차를 경험할 때 그 간극에는 일종의 시적 여백이 만들어집니다. 그 여백에서 보는 이는 낯선 시각으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시각적으로 공간적으로 감각적으로 낯선 이미지와 이야기들의 파편들은 (상반된 것이 아니라) 불일치 되면서 결여됩니다. 마치 공사장 흙더미에 묻혀져 사라져버렸을 이름 모를 식물들의 이름을 조사하고 학명을 부르기 대신에 자신만의 문장으로 이름 부르듯이. 혹은 독일의 한 시골길에 피는 꽃 이름을 조사하고 둥근 덩어리에 새겨 물감을 칠하고 낯선 친구들의 손을 빌어 흰 캔버스에 굴리듯이9. 침전된 도시 경험은 언어의 파편이 만들어내는 여백으로 은폐됩니다. 어쩌면 도시 경험은 은폐될 운명에 처해있는 우리 현재의 이미지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작가는 이름 모으기와 이름 부르지 않기를 동시에 작동시킵니다. 수집(이름 모으기)과 저항(이름 부르지 않기) 사이에 일어나는 고요한 소요란 어쩌면 작가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닌 보는 이에게 출현하는 사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18년 봄 신한갤러리 광화문에서 김라연은 양재동 스페이스 엠의 전시장을 다시 불러옵니다. 어느 미술가가 점점 쌓여가고 있던 쓰레기를 치우고 생활오물과 무관심 속에 묻혀있던 곳을 전시장으로 개조했고 작가는 그곳에서 《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부르다》를 보여줬습니다. 안타깝게도 스페이스 엠이 건물주인의 요구로 더 이상 전시장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작가는 그 공간에서 전시했던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고 신한갤러리 광화문에 재배치하는 《하나 그리고 두 개의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린 빈 땅에 도시 기표를 위한 무덤을 만들어가듯이 도심 한복판에 사라질 운명의 공간을 다시 불러오고. 대지를 절단하는 펜스를 열어 봉긋한 봉우리를 만들고 무한한 지평선을 열어가듯이 생명을 다한 공간들 사이로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명명된(naming) 파라다이스를 접어 희망의 소명(calling)을 다 하듯이 김라연은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떠도는 이미지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19년 봄 흐드러지게 만개했던 배꽃이 거의 떨어져가던 이화여자대학교 교정을 지나 김라연의 작업실에서 저는 빈약한 흰 봉우리를 만났습니다. 어쩌면 누군가의 에베레스트 산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알프스 산일 수도 있겠습니다. 잔털이 많은 낙타 등처럼 휜 빈 땅을 뚫고 올라오는 날이 선 봉우리는 밝고 희망찬 내일을 숭배하지도 그렇다고 희망찬 내일을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흰 봉우리는 꽃이 다 떨어진 배나무의 앙상한 가지처럼 벌거벗었습니다. 동시에 흰 봉우리는 불려진 이름과 결별(disconnected)하면서 자신의 소명을 찾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고의 여백을 준비하는 제 마음은 벌거벗은 흰 봉우리에서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김라연의 빈 땅은 벌거벗은 이미지들과 언어들을 위한 공간인 모양입니다. 그 빈 땅에 출현하는 이미지와 언어는 그렇게 냉철하지도 회의적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가장 안락하고 가장 은밀하게 가라앉은 앙금을 위한 작은 우주를 만들어냅니다. 그 작은 우주는 빈 땅에 말 걸기로 시작됩니다.

 

알랭 바디우, 「현재의 이미지」, 『오늘의 포르노그래피』, 강현주 옮김, 북노마드
2발터 밴야민, 「안경점」, 『일방통행로』, p.120-121, 조형준 옮김, 새물결
3도시전치 City Displacement》, 갤러리 라온, 2015년 10월 1일 – 9일
4김라연, 〈Paradox Hotel〉, 디지털 C 프린트, 2013
5김라연, 〈We’ve Nothing〉, 디지털 C 프린트, 2014
6김라연의 작가 노트 2, 《하나 그리고 두 개의 전시》, 2018 신한 영아티스트 페스타
7《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부르다》, 스페이스 엠, 2017년 11월 8일-29일
8김라연, 〈녹는 땅〉, 캔버스에 유채, 162.2×130.3 cm, 2017
9김라연, 〈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묻다〉, 2 채널 비디오, 9분 19초, 2015

 

배은아(큐레이터)



 작가 약력
www.rayeonkim.com
 
학력

이화여대 서양화과 박사 과정
이화여대 서양화과 석사
이화여대 서양화과 학사

 

개인전

2019 《희망 상회》, OCI미술관, 서울
2018 《하나 그리고 두 개의 전시》, 신한갤러리 광화문, 서울
2017 《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부르다》, 스페이스 엠, 서울
2015 《영 아티스트 소개 우수작가: 도시전치》, 갤러리 라온, 서울

 

단체전

2018 《사물의 알리바이》, 동덕아트갤러리, 서울

《Axis 2018》, 021갤러리, 대구

2017 《Was sich abzeichnet》, Forum Alte Post, Pirmasens, 독일

《What’s Unfolding》, Arp Museum Bahnhof Rolandseck, Rolandseck, 독일

《出口戰略 (출구전략, Exit strategy)》, 스페이스 엠, 서울

2016 《Outskirts: 경계의 외부자들》, 스페이스 빔, 인천

《Made in Balmoral》, Made in Balmoral, Bad Ems, 독일

《2016 고양 레지던시 입주 작가 소개전 INTRO》, 고양 레지던시, 고양

2015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2015》, 아트선재센터, 서울; 동송세월,

철원군 DMZ 접경지역, 강원도

《Homeless》, 홍익대 문헌관 현대미술관, 서울

2014 《new generation 2 텍스트 풍경》, Atelier 35, 수원
2013 《동방의 요괴들 트라이앵글 아트 페스티벌》, 대구예술발전소, 대구;

홍익대 홍문관 현대미술관, 서울

2011 《Frozen Music》, 스페이스 15번지, 서울

서성이다, 이화아트센터, 서울

2008 《drawing books of 20 young artists》, 미술 공간 현, 서울

 

수상/선정

2019 OCI Young Creatives 선정
2018 신한갤러리 광화문 개인전 지원
2017 서울문화재단 최초 예술 지원금 선정
2016 Künstlerhaus Schloß Balmoral, 고양레지던시 국제교환 입주프로그램,

바트엠스, 독일

MMCA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12기 입주 작가

2015 융복합 예술 창작기획사업 생태예술프로젝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주관,

국립 생태원과 협력, 갤러리 팩토리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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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20-7,13


 

박신영 / 출구 없는 도로에서

 

 

길을 걷다 보면 익숙한 거리가 기괴해 보일 때가 있다.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를 길이 골목마다 뻗어 나가고, 누군가는 바삐 스쳐 지나치고, 또 어느 날에는 불쑥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가 도로에 놓여있다가도 금세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사라지기도 한다. 어렴풋이 기시감이 들면서도 매번 새로운 도시의 풍경은 어딘지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박신영의 작업은 바로 도시의 생경함에서부터 시작한다. 지금껏 나고 자랐는데 이곳의 삶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걸 보면, 어쩌면 내가 여기에 불시착한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상상이 꿈처럼, 만화처럼, 영화처럼 이어져 화폭 위의 세계를 구축한다. 어디서부터가 현실이고 가상인지도 뒤죽박죽 섞여버렸다. 어느 거리에서든 우리는 단지 생존을 위해 헤매고 있을 뿐이니까 딱히 구분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실제 거리나 모니터 속에서라도 언젠가 보았으니 차라리 이 풍경을 ‘사실적’이라 해야겠다. 현실 세계의 메타포이자 평행우주인 박신영의 녹색 행성은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불분명한 불안감과 불확실함으로 거리를 잠식하며, 이 여름, 우리를 출구 없는 모험의 세계로 이끈다.
 

 김소라 (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

 


 

현실과 상상의 중간지대, 21세기 몽유도원도



“작가로 살아간다면, 작가로 살겠다고 결정하면 혼자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시간들은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사회에서 주목하는 작가의 연령대가 너무 낮아졌어요. 이제 막 시작한 단계인데 자신의 스타일을 굳힌다거나, 주변의 반응을 고려해 유행을 여과 없이 쫒아갑니다. 호흡이 너무 빨라요.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놓치는 게 아닐까요?”

 

– 유근택 『지독한 풍경 – 유근택, 그림을 말하다』 북노마드, 2013

 


 
박신영의 그림 이야기에 앞서 작가 유근택의 말을 먼저 인용한다. 작가로서의 ‘태도’와 관련된 의견이자 조언이다. 자칫 일반화의 오류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요즘 (일부) 젊은 세대 작가에게 흔히 발견되는 조급함과 미성숙에 대한 현상을 날카롭게 지적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세태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100% 동의한다.
이런 전제에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신영은 유근택이나 내가 우려하는 그런 작가가 아니다. ‘호흡이 너무 빨라서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젊은 작가’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좀 느리고 심지어 또래 작가들에 비해 뒤처진 것처럼 보이기도 할 지경이다. 대기만성(大器晩成)! 박신영은 천성이 무덤덤하고 조바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성격이다. 그러니 남이야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다. 주변 상황에 아랑곳없이 자신만의 속도로 묵묵히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대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박신영이 유근택이나 김동유처럼 ‘지독한’ 작가는 또 아닌 것 같다. (2010년 성곡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타이틀이 ‘지독한 그리기’였다.) 박신영은 그저 그림 그리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좋아하고 재미있고,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인지 억지로 그리지도 않는다. 그림은 이미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박신영에게 그림 그리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습관과도 같다. 아니, “독서는 습관이 아니라 쾌락이다”라고 주장한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박신영에겐 그리기가 습관을 넘어선 쾌락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좀 고리타분한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일컬어 ‘운명(運命)’ 혹은 ‘숙명(宿命)’이라고 하나 보다.
아무튼 나는 박신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몇 차례 전화통화를 했고 작업실을 두 번 방문한 게 전부다. 그러면서 아주 무미건조하게 ‘용건만 간단히’ 식의 대화를 싱겁게 나눴을 뿐이다. 그 흔한 커피는커녕 물 한 잔도 같이 마시지 않았다. 시간도 길지 않았다. 그럼에도 앞서 밝힌 것처럼 나는 박신영이라는 인물의 캐릭터를 나름대로 단정 졌다. ‘평생 동안 꾸준히 그림을 그릴 사람’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판단은 정확하지 않고 틀릴 수도 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피상적인 선입견일지도 모르니까. 그럼에도 이런 배경을 전제로 박신영의 그림을 찬찬히 살펴본다. 그가 그린 그림은 도통 알다가도 모를 요지경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림 그리는 재미를 뜯어보는 또다른 재미
박신영 그림의 첫인상은? 불친절하다. 구체적 형상이나 내용이 한눈에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보면 뭘 그린 그림인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그저 그린(green) 계열 컬러와 붓 터치만 먼저 보인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 일정 시간 동안 그림 앞에 서서 구석구석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그러면 보이지 않던 형상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와 가로수, 건물과 벽돌로 쌓은 벽, 공원과 그 안에 있는 불분명한 오브제 등이 뒤엉킨 도시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캔버스 크기는 달라도 모든 그림이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프나 소재도 많다. 찻길과 자동차가 대표적이다. 둥근 접시모양 위성안테나, 유류저장 탱크 혹은 폐기물 처리장처럼 보이는 동그란 형상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군데군데 송전탑도 있고 나무와 숲, 부엉이도 보인다. 그리고 뜬금없이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로봇도 그려져 있다. 이런 요소는 인과관계나 동일한 스토리로 엮여 있지 않다. 서로 아무 상관없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을 뿐이다. 특히 인물도 잘 보이지 않는데, 설령 있더라도 주변 풍경과 섞여 있어서 마치 온몸을 위장한 채 은폐하고 있는 군인처럼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 박신영의 그림은 가까이에서 보면 뭐가 뭔지 잘 모른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봐야한다. 그러면 붓질의 흔적과 컬러 속에서 무엇인가 어렴풋하던 형상이 조금씩 구체적으로 드러나 보이기 시작한다. 박신영은 이처럼 알쏭달쏭한 자신의 그림을 ‘풍경화’라고 명쾌하게 정의한다. 그런데 이 풍경은 실재하는 풍경이 아니다. 사실과 허구, 현실과 상상이 뒤섞여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초현실적인 풍경처럼 보인다. 하지만 개념적으로는 사실적인 풍경화다. 이것이 박신영 그림의 진짜 정체다. 도시에서 포착한 이미지를 모티프로 한 박신영의 그림은 수수께끼처럼 비밀이 많다. 실제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에 의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사실과 상상으로 만들어낸 도시 풍경은 SF 영화처럼 낯설고, 공상과학 만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사회적 이슈나 이념적인 주장이 담긴 메시지를 담고 있지도 않다. 평소 도시풍경을 보면서 경험한 느낌을 고유한 회화적 언어로 형상화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말로 직접 설명할 수 없는 도시의 느낌과 전통적인 풍경화가 지닌 ‘숭고미’가 관객들에게 전달되길 원한다.
박신영에게 유화는 아주 적합한 기법이다. 그는 처음으로 그린 붓 자국과 그 흔적에 반응하면서 또 다른 붓질을 중첩하고 쌓아간다. 그림이 그려지는 중간에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셈이다. 이런 제작방식은 즉흥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심리적 풍경화
한편 이번 개인전에 출품된 대형 작품, 즉 크기가 가로 680cm × 세로 180cm에 이르는 <출구 없는 도로에서>를 보면서 안견이 그린<몽유도원도>를 보았을 때 기억이 오버랩 됐다. 현재 일본 덴리대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몽유도원도>원본은 지난 2009년 가을,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특별전>에서 단 9일 동안 일반에게 공개된 바 있다. 그때 나는 이 그림을 가까이에서 직접 봤다. 그래서 박신영의 그림을 보면서 <몽유도원도>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안휘준 명예교수는 우리 고미술의 우수성을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키워드로 짚어냈다. 그리고 그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산수화로 손꼽은 그림이 바로 <몽유도원도>다. 안 교수는 “동양의 두루마기(卷) 그림에서는 이야기가 오른쪽에서 시작되어 왼쪽으로 전개되는 것이 통례인데 반하여 <몽유도원도>는 그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편으로 이어져서 색다르다. 그것도 왼쪽 하단부 구석에서 시작하여 오른편 상단부의 구석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사선(斜線) 혹은 대각선을 따라 전개되고 있어서 매우 특이하고 독보적이다. 또한 이 사선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편 상단부로 옮겨 갈수록 점점 웅장감이 더 커지고 고조된다. … 고원(高遠), 평원(平遠), 심원(深遠)의 삼원법이 갖추어져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밖에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도원을 넓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부감법을 구상하였고, 가장 가까운 근경에 위치한 산의 높이는 대폭 낮추어 표현한 사실에서 안견의 뛰어난 기지를 엿볼 수 있는 점도 괄목할 만하다”고 해석하고 평가한다.

 

다소 긴 인용이었지만, 이런 해석을 박신영의 작품 <출구 없는 도로에서>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옆으로 긴 화면을 직선 도로가 수평으로 가로지르며 화면을 위아래로 나눈다. 그리고 이 도로를 중심으로 상상의 도시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몽유도원도>의 시선이 복합적이듯 <출구 없는 도로에서> 역시 정면, 측면, 위에서 내려다본 장면이 한 화면에 등장한다. 풍경이 뒤죽박죽이듯 이야기도 초현실적이다. 이처럼 박신영의 <출구 없는 도로에서>와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상상의 풍경화’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더불어 풍경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표현하는 작가의 시점, 그림 속에 등장하는 초현실적 요소 등 여러 측면에서 두 그림은 시대를 초월해 교감하는 점이 많다. 관객은 박신영의 그림 앞에서 실제 도시 공간을 거닐 듯 좌우, 상하로 눈길을 옮겨 가며 찬찬히 내용을 읽어 내려가게 된다. 어쩌면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보았다는 안평대군처럼 비현실적인 공감각을 체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친김에 이런 사족을 덧붙여 본다. 안견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해주었던 안평대군이 OCI미술관 전시장에서 박신영의 그림을 본다면 과연 어떤 말을 할까?


이준희(건국대 겸임교수)


 작가 약력

themuses@naver.com
 
학력

홍익대학교 회화과 석사
홍익대학교 회화과 학사

 

개인전

2019 《출구 없는 도로에서》, OCI미술관, 서울

 

단체전

2018 《공백이 가득한 행성》, 합정지구, 서울

《얼굴로부터》, 2/w, 서울

 

수상/선정

2019 OCI Young Creatives 선정
2017 최초예술지원,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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