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

전수현展 / JEONSUHYUN / 田秀鉉 / photography.video
2015_0610 ▶ 2015_0623

 

 

전수현_신기루-BLUE_합성사진_70×120cm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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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0610_수요일_05:00pm

오프닝 공연 / 2015_0610_수요일_06:00pm연영석 '잃어버린 시간' 외

후원 / 서울시_서울문화재단_한국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1:00am~07:00pm

 

 

 

나무화랑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관훈동 105번지) 4층T

el. +82.2.722.7760

 

 

전수현의 개인전에 부쳐-떠도는 것들을 사랑하다 ● 이 글은 전수현의 개인전에 부치는 글이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적 관점을 제안하려는 의도로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그의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봐야 할지에 대하여 함께 고민해 보기를 권하는 내용으로 이 글은 채워져 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전수현의 작품이 천편일률적으로 읽혀지고 있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이다. 최소한 그의 주변에서는 전수현을 현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 매우 난감해하면서 그것을 작품의 주제와 연결시켜 정치적 의도를 어느 정도 갖고, 고발성 짙은 사회 이슈형 작업으로 보여주는 작가로 알고 있다. 그의 작품을 얼핏 보자면 그런 관점이 그다지 틀린 논점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개 사람들이, 최소한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관점에 동의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문제가 남아 있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것'과 늘 작업에 변화를 수용하는 그의 능동적 '태도'는 그런 방식으로 모두 설명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하고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할까?

 

전수현_신기루-RED_합성사진_66×150cm_2015
 

사람은 모여 산다. 모여 사는 중에 더러 혼자 살고 싶다고 아우성 칠 뿐이다. 하여간 모여 사는 이유는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모여 산다는 그것이, 그런 삶이 우리에게 항상 문제를 준다.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그리고 우리가 저희들에게 문제를 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문제를 늘 함께 풀어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그걸 혼자 풀겠다고 여기는 사람은 무지하다. 전수현의 작업은 이 무지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시점의 불안정이 우리가 그의 작품을 대할 때 만나는 당혹의 원이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안으로 무지한 이야기를 가지고 들어 올 때, 때로 너무나 익숙한 뉴-스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가지고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이야기가 가끔씩 초점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워 하기도 한다. 그것을 두고 "이야기가 깊어 졌어" 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감상자로서 혼동을 위장하기도 한다. 그의 작업은 이렇듯 작업 밖에서 늘 수다스러운 무지함까지도 쓸어 담는다. 전수현의 주제의식이 붙잡는 소재는 늘 명확하다. 무지함이 만들어 낸 고통(苦痛)이 그것이다. 괴롭고(苦) 아픈(痛) 삶은 너무 흔하다. 하지만 그 원인이 무지한 사람의 마음씀 없는 행패로부터 드러나는 아픔과 괴로움은 흔치않다. 그 흔치 않은 고통이 흔하게 느껴지는 것은 지금, 여기 우리 사회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님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전수현_신기루-위험한상상_합성사진_60×180cm_2015

 

흔히 고통은 지나치게 사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람과 결코 공유될 수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고통은 주관적인 것으로 이해될 뿐이어서 객관적으로 그 밖에서 치유하거나 위로한다 해서 경감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느끼고 만나는 그 흔한 고통은 결코 외롭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사적인 고통을 토로하고 울부짖는 때에, 그 곳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결코 뒤 돌아서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고통에 몸을 떨면서 소리쳐 호소할 때 "고통당하는 자의 그 고유한 소리(언어-표현)"를 들어줄 수는 있다. 그래서 삶의 흔한 고통은 견딜만해진다. 전수현이 집요하게 문제 삼는 고통은 무지한자들의 무심한 결과로 드러나는 아픔과 괴로움이다. 전수현이 물고 늘어지는 "고통"은 그들의 무지함이 만든 결과에 그들의 무심함이 덧씌운 참담이다. 그 무지함이 "함께 고통당하는 자의 소리"를 듣지 않아서 생기는 "절박함"으로 둔갑해버린 "그 고통"인 것이다. 이런 눈길로 전수현의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전수현_신기루-자이언트_합성사진_67×160cm_2015
 

그가 비디오 작업으로 다룬 "어떤 슬픔"에 관한 작품이 있다. 그 작품은 고요함이 전체를 압도하지만 이상한 '그 고요함'에 점점 감상자가 불편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그가 말해주기 전까지 결코 이 고요함과 그 이상함이 어디에 원인을 두고 있는지 모른다. 몰라도 그만이긴 하지만 작가가 조금 친절했다면 우린 무지함을 남에게 전가시키고 그저 돌아 서면서 잊었을 "그 슬픔"에 스스로 가책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슬픔에 내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곧 잘 잊는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공동체가 운명처럼 맞아들여야 할 역사적 슬픔이라면 우리는 무지한자로서 배려심 없는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전수현의 작품은 하나 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 앞에 보여주었던 '그 하나' 뒤로 숨어 있는 '나-우리'를 보자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화법 앞에서 경쾌하기만 반응했을 뿐이다.(모니터 안에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는 마주하고 섞이지만 결코 하나가 되지 않는다. 가끔씩 배가 오가지만 바다에는 항상 무엇인지 모를 것들이 많이 있다. 그 사실도 모니터 안에는 추론컨대 묘사되어 있다.)

 

 

전수현_신기루-대화_영상_2014

 

 

전수현이 보여주는 "가짜사진"은 디지털시대의 총아로서 "이미지"다. 하지만 그는 디지털로 바뀐 세상에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 현란한 노동집약적 통제 시스템에서 노동을 헌신적으로 수행하면서 고통의 절박에 대한 이야기를 세세하게 담아내려 한다. 당연히 그의 디지털 사진-가짜 이미지에서는 "물론이지, 노동"에 대한 의미를 더욱 새겨 넣는다. 아마도 그에게 고통의 절박은 노동에 대한 무지와 그것에 대한 마음씀의 건조함이 절대적 원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아마도 그렇게 여기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노동"의 의미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발생하는 고통 또한 개별적 사건으로 구체화되기에 사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의 해결안이나 방책 모두 신뢰할 수 없다는 절망으로부터 고통의 강도가 더욱 커진다. 이 커져버린 고통은 공동체적 참담과 빨리 연결된다는 점에서 "사회적 슬픔"으로 기억되는 사태와 사뭇 차이가 있다. 그래서 그는 노동을 하부주제(Sub-theme)로 다루는 작품에서 드라마형식의 이야기를 즐겨 사용한다. 아마도 노동의 문제가 가지는 본연의 그 참담함과 함께 우리를 "우리의 그 무분별함"으로 되돌아보게 하기 위해서 탈(脫)일상적인 드라마형식이 주효한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건이 발생하는 풍경이 등장한다. 그에게 풍경은 노동은 덧입어야 하기에 아직은 풍광처럼 보여주는 "진짜로 가짜가 성취된 인공의 세계"로써 "한 장면"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착안과 보여주기 기법과 그의 집요함이 만나는 이유를 우리는 감상자로서 생각해야만 한다. (성공한 자본주의 사회의 덕목으로 보이지는 야심찬 풍경 안에는 비까번쩍하는 것하고 동시에 참담함이 늘 공존한다. 이 풍경은 어떤 우리의 삶인지, 어떻게 거기에 우리가 모여 살고 있는지, 그래서 생기는 고통은 너의 것인지 아니면 내 것인지, 하여간 끊이지 않는 물음을 끌어들인다. 그것을 디지털 합성사진 형식으로 그는 태연하게 '착'하고 보여준다.)

 

 

전수현_전선위의참새_합성사진_77×120cm_2014

 

이 전시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작품들이 더 등장한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전수현의 작품은 한국 사회의 "지금, 여기-현실"을 "환상"이라고 말해주는 한 장의 사진이다. 먼저 그가 이 작품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었는지 우리는 조금 알 필요가 있겠다. 그 흔적이 작품에 남겨져 있으니 우리는 꼼꼼히 살펴보면서 그 시간과 노력을 찾아낼 수 있다. 한강변 그럴싸한 하루 낯 모습으로 그려진 우리의 현실-환상은 전수현이 찾아낸 '소리쳐도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는 고통의 극단'이다. 우리는 항상 이 극단적 시간에 밀려서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하루를 산다. 그 와중에 우리는 스스로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살아버린다. 허우적거리는 이 생활로부터 우리는 거꾸로 이행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전수현의 눈에 포착된 "환상적인 하루"를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이 고통은 서로 어울리지 못해서 생긴 '깊은 병'인데 우리는 그 고통에 그저 가격을 싸고-비싸게 매길 뿐이다. 아내의 생일엔 얼마짜리 선물을 사야하고, 어린이날에 얼마짜리 점심을 사먹어야 당당하며, 어버이날에 도대체 얼마나 드려야 나는 행복한가? 휴일에 우린 몰려다닌다. 고통을 서로 들어주기(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고통을 아무리 소리 쳐봐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무관심에 대한 '나-우리'의 선택은 보다 극단적인 무관심으로 대응하는 일이다. 그것을 우리는 싸고-비싸게 값을 매기면서 서로를 상쇄하려 한다.

 

 

전수현_신기루-여의도IFC_합성사진_34×220cm_2015

 

전수현_신기루-여의도IFC_합성사진_34×220cm_2015_부분

 

내 고통은 이제 오늘, 우리의 지금, 여기-현재를 환상으로 바꿔버리는 결정적인 원인일 뿐이다. 생활을 환상으로 대처해야만 하는 이 고통스러움의 근원에는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내가 얼마나 아프고 괴로운지 적절하게 호소할 수 있는 "말"을 모른 채 살아와서 그렇다. 아니, 우리가 왜 "말"을 모르겠는가?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말"은 내 고통을 밖으로 표현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말"이기 때문이다. 온 국민이 어떻게 '이 슬픔'을 감당해야 할런지 갈팡질팡할 때, "그것이 사실은, 엄밀하게 말해서「교통사고」라고" 말하는-어떤 국회의원의 생각 없음이-우리의 "말"은 고통의 근거가 된다. 말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사람이 "그 사람"이 되게 해주는 근거다. 전수현은 사실 여기까지 자신이 작가로서 자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밀고 들어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궁금해야 할 필요가 우리에겐 없다. 그는 예술가이기에 온 몸으로 하나의 사태를 알아버린다. 그래서 그는 "말할 수 없는 말"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환상-일상'의 고통스러운 관계를 작품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은 최종 크기와 사진의 세부적 모습, 꼼꼼한 수작업이 빛나게 드러남을 통해 더욱 적나라한 우리의 일상-환상/환상-일상을 보여준다. 어줍잘스레 이 작품을 후기자본주의의 양태파악으로 읽거나, 건강한 보통사람들을 이데올로기 안으로 들여와 읽다가는 정작 아프고 괴로운 우리의 삶을 작가가 가리키는 데로 보지 못한다.)

 

전수현_신기루-뻘짓_합성사진_50×120cm_2015

 

 

(* 부연: 제목에 "떠도는 것"과 "사랑"을 대비하듯 사용했다.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고통은 사실 어느 사회에서든 "떠도는 자"의 것이다. 그걸 마치 내 것인 양 사용하면 곤란하다. 그건 고통마저 훔치는 꼴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로서 전수현이 본 것, 그의 매일 화 나 있음, 발끈거림 등은 바로 이 떠도는 사람이 가져야 할 것을 훔치고, 모른 척하는 우리 꼬락서니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수현은 그저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원인으로서 아픔과 아픔의 근원을 찾아내려고 무지하게 고생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술가는 무엇을/누구를 사랑한다. 그래야 예술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따뜻한 마음씀을 갖고 그가 늘 작품을 만들었겠거니 생각했다. 부연인데 길다.) ■ 이섭

 

 

Vol.20150610h | 전수현展 / JEONSUHYUN / 田秀鉉 / photography.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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