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TERSCAPE_물我一體

송창애展 / SONGCHANGAE / 宋淐愛 / painting
2015_0617 ▶ 2015_0714

 

 

송창애_워터스케이프 Waterscape 작업과정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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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애 홈페이지_www.songchangae.com

 

초대일시 / 2015_0617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아라아트센터AR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인사동 9길 26(견지동 85-24번지) 4,5층

Tel. +82.2.733.1981

www.araart.co.kr

 

송창애의 회화: 흐르는 물처럼 ● 강물 옆에 집을 지으면 사람이 우울해진다고 했다. 허구한 날 강물을 쳐다보고 있으면 강물에 내가 동화되는 탓이리라. 강물에 내가 동화돼 우울해진다? 강물에 내가 모르는 무슨 능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를테면 사람을 빨아들여 우울하게 만드는 주술이라도 거는 것일까. 사람을 홀리는 것이며 사로잡는 것인데, 전통적인 개념으로 치자면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가 되겠다. 물론 물아일체 자체는 사물과 내가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합치되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처럼 주와 객이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합체되는 차원으로 치자면 물보다 더 적절한 예를 생각하기 어렵다. 사물을 물로 대체해 읽을 때 물아일체의 경지가 더 실감나게 와 닿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물은 사람을 빨아들이고 홀리고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렇게 사로잡아 우울에 빠트린다. 여기서 우울은 우울 자체로서보다는 내면의 유비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물은 말하자면 우울에 빠트리면서 사실은 내면에 빠트린다. 물에 빠진다는 것은 곧 내면에 빠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물이 온통 내면이 된다는 말이며, 그 흐름에 의탁해 온갖 생각들이 파노라마처럼 흐른다는 말이다. 그렇게 물이 곧 내가 된다는 말이며, 흐르는 강물이 곧 내면에 흐르는 강물이 된다는 말이다. ● 그렇게 나는 물이 되고 물은 내가 된다. 그러므로 강물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는 것은 사실은 내면화한다는 것이며 자기와 만나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물을 그린다는 것은 나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다는 것이며(나르시스의 신화를 되새김질하는 행위?),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다는 것이며, 존재의 원형 아님 원형적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다는 것이다.

 

송창애_워터스케이프 Waterscape-물풀 1501_캔버스에 분채, 물드로잉_180×244cm_2015

 

송창애_워터스케이프 Waterscape-물풀 1505_장지에 분채, 물드로잉_200×100cm×2_2015
 

송창애는 물을 그린다. 그런데 그냥 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물로써 물을 그린다. 물과 내가 동화되는 것으로 치자면, 그 동화가 더 잘 일어나는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그냥 물을 그리는 것이 물과 나 사이에 일정한 거리두기가 유지되는 경우이며 주와 객이 분리된 경우라고 한다면, 물로써 물을 그리는 것은 그 거리가 삭제된 것이며 소거된 경우이기 쉽다. 아마도 작가가 굳이 물로써 물을 그리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물을 그리면서 물 자체(아마도 칸트의 물 자체와 그 의미가 다르면서 통할)를 그리고 싶었고, 물에 동화되고 싶었고, 그렇게 물을 그리면서 사실은 나를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곧 물이고 물이 곧 나라고 말하고 싶었고, 내가, 존재가, 세계가, 우주가 다름 아닌 물이라고(아님 물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지며 차원을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실제로 작가는 사진의 장노출 기법을 이용하여 자신과 물 그림이 하나로 동화하는 과정을 예시해준다). (평론 中) ■ 고충환

 

송창애_워터스케이프 Waterscape-물풀 1508_장지에 분채, 물드로잉_130×162cm_2015

 

송창애_워터스케이프 Waterscape-물풀 1514_장지에 분채, 물드로잉_130×162cm_2015
 

워터스케이프(Water_scape)는 '물 풍경'이란 뜻으로 '물로써 그린 물 그림'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물은 작품의 소재, 주요 표현기법, 그리고 그 안에 함축된 의미 모두를 담는 하나의 그릇이다. 물이라는 메타포를 통하여 생명의 본질과 존재의 원형에 대한 시각적 고찰을 다룬다. 부제인 '물我一體'는 물(water)과 나의 혼연일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번 전시의 핵심 화두이다. 주체와 객체, 관념과 현실, 물질계와 정신계 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항대립적 관계로부터 벗어나 바깥 사물과 내가 하나 되는 비분별지의 세계를 어떻게 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드러낼 수 있을까 고민하였다. 과연 의식과 무의식은 분리될 수 있을까? 모든 이성과 논리의 세계를 뛰어넘는 감각적 실재의 세계는 무엇일까? 또 그 '힘'은 무엇이며 시각조형언어를 통해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 비정형의 물을 그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애초에 물의 외형적 재현보다는 물이 지닌 속성들(유동성, 가변성, 정명성)을 통해 생명의 본질과 존재의 원형을 시각적으로 조형화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물로써 물을 그린다. 보통 하나의 그림을 시작에서 완성까지 단숨에 그리곤 하는데, 끊임없이 흐르는 물을 컨트롤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저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물과 함께 흐르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나의 의지가 앞설라치면 선은 딱딱하고 생명성은 사라진다. 그만큼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며, 즉흥성과 우연성의 개입은 워터스케이프의 필수불가결한 조형적 특징 중 하나이다. 이성의 개입은 최소화하되 직관과 본능에 집중한다. 물과 내가 일체가 되었노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작업을 하는 내내 나는 늘 물과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곤 한다.

 

송창애_워터스케이프 Waterscape-물풀 1522_장지에 분채, 물드로잉_100×200cm×2_2015

 

송창애_워터스케이프 Waterscape-청산 1501_장지에 분채, 물드로잉_100×200cm_2015
 

나에게 블루는 현실적인 듯 비현실적인 색이다. 투명한 블루는 자궁처럼 평안한 감정을 주는 동시에 나를 현실 너머 어딘가로 데려가는 힘이 있다. 원초적 끌림이랄까. 푸른 물속에서 유영하며 춤을 추는 물풀은 뒬레즈의 노마디즘적 사유를 드러낸다. 뭉치고 흩어지는 가운데 풀들은 무언가 새로운 생명체를 형성하고, 이는 원초적인 욕망으로써의 생성의 힘을 느끼게 한다. 리좀과 같이 자유로운 방향성을 띠고 흔들리며 흐르는 상태를 통해 원형적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끊임없이 탈영토화를 꿈꾸는 자아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모든 인위와 인욕이 사라진 순수본성 그대로의 상태, 즉 절대자유를 꿈꾸는 물풀들. 나는 과연 물인가 풀인가. ■ 송창애

 

 

Vol.20150617e | 송창애展 / SONGCHANGAE / 宋淐愛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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