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OCI YOUNG CREATIVES

양정욱_씬킴展
2015_0618 ▶ 2015_0714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5_00618_목요일_05:00pm

 

 

양정욱展 / 『은퇴한 맹인 안마사 A씨는 이제 안마기기를 판다』

씬킴展 / 『버려진 미래』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카프카적 시각예술, 혹은 양정욱식 융합미술 - 1. 요점 ● 양정욱은 거대하면서도 섬세하고, 기계적이면서도 서사적이고, 신비하면서도 세속적이고, 구조적이면서도 시적인 미술을 한다. 이 작가의 작품은 말 그대로 질료를 갈고 닦아 만든 조각, 특정한 공간과 시간을 조건으로 한 설치미술이다. 동시에 그것은 간단한 동력장치가 수없이 많고 다양한 부속장치를 작동시키는 큰 기계, 빛과 그림자와 소리와 움직임이 어우러진 연극, 시각이미지로 직조된(텍스트의 어원 'textum'이 지시하듯이) 문학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양정욱의 미술은 이 모든 속성과 형식을 동시에, 한꺼번에 가진 복합체이자 다면체라고 해야 옳다. 싱겁게 들리겠지만, 그의 작품 하나하나가 그 같은 미학적 속성을 종합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그의 작업을 어떤 특정 예술 양식이나 장르로 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 2008년을 기점으로 양정욱은 작은 나무막대들을 끈(실, 노끈, 철사 등)으로 엮어 몸의 관절들처럼 세심하게 조립하고, 거기에 모터를 달아 스스로 움직이도록 한 입체 구조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작가는 그것들을 조명을 어둡게 조정한 전시장에 설치하는데, 그 입체 구조물들은 일정한 동작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소리를 내고, 벽에 자신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양상으로 구현된다. 때문에 양정욱의 작품은 단지 조각에 머무르지 않고, 뭔가 알 듯 모를 듯하고, 뭔가 시청각적이면서도 서술적인 '이미지-이야기'가 풀려나오는 색다른 서사장치, 연극무대, 시나리오 지면(紙面)의 양상을 띠게 된다. 요컨대 머릿속 기억나는 이미지에 대입해보자면, 영화「델리카트슨(Delicatessen)」에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낀 미적 성질(aesthetic quality)이 거기에는 있다. 수공의 질감, 기괴한 리듬감, 미스터리한 분위기, 동화적 색채, 냉혹한 정서, 기기묘묘한 이야기, 신경질적 사운드가 양정욱의 작품 안에 응축돼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응축된 것들은 감상자와 조우하는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일정한 규칙이나 단일한 해석의 범위를 넘어 기어/뿜어져 나온다.

 

양정욱_기억하는 사람_나무, 모터_가변크기_2015_부분
 

2. 헛다리짚기 ● 위에서 말한 '2008년'이란 연도는 이전까지 "그림 작업만"(작가의 포트폴리오에서 인용. 이하 주석 없는 인용의 출처는 이것이다.)하던 양정욱이 처음 운동성이 있는 입체조각을 만든 ―여자 친구를 위한 선물「남희에게 주는 양태환 선수」― 일종의 분기점이 되는 해다. 또 '이야기'는 작가가 쓴 작품제목이나 텍스트(때때로 작품의 일부인)는 물론,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의미로 작품 전체가 감상자의 상상력을 자극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게 만드는 일종의 이미지서사(visual narrative)를 가리킨다. 여기서 이 두 가지 사안을 새삼 부각시키는 이유는, 내가 양정욱 미술의 핵심이라 생각하는 '이중성' 또는 긍정적인 의미의 '의뭉스러움(subtleness)'을 그로부터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 두 사실은 일차적으로, 양정욱이 2008년 이전에는 그림만 그렸다는 점, 그의 작업은 미술임에 분명하지만 서사성이 강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차적으로 그 사실들은 양정욱이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했다는 사실을 통해 당연함으로부터 한 번 미끄러진다. 나아가 그러던 그가 굳이 분류하자면 다시 조각에 가까운 작업을 하는데, 그것이 전통 조각에서는 한참 떨어진 작업, 이를테면 서두에 말한 다양한 속성과 형식의 융합형 미술이라는 점을 통해 또 한 번 미끄러진다.

 

양정욱_인터넷 수리기사는 며칠 간 집에 전화를 못 했다_나무, 모터_가변크기_2015_부분
 

일견 사람들은 양정욱의 작품에서 테오 얀센(Theo Jansen)이나 최우람의 그림자를 발견할지 모른다. 이를테면 그의「바람의 사생활」(2010)은 얀센의「해변동물(Strandbeest)」(1990~)과 겹쳐 보일 수 있다. 또 그가 움직이는 조각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그 무렵 본격적으로 각광 받은 작가 최우람의 유사 과학적(pseudo-scientific) 키네틱 조각 탓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양정욱의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입체 구조물 작품들은 이십여 년도 훨씬 전부터 얀센이 만들고 있는「아니마리스(Animaris)」연작의 외관을 포함해 기술공학적 구조와 역학까지 꽤 닮았다. 또 재료나 시각적 이미지의 유사성은 덜하지만 키네틱 아트라는 범주와 모터를 이용한 부분 관절의 운동이라는 메커니즘 면에서 최우람의 조각과도 분명 동종 관계에 있다. ● 하지만 나는 처음 양정욱의 작품을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카프카, 그러니까 「변신」과 「성」과 「유형지에서」를 쓴 근대의 문제적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그 위로 겹쳐 보인다. 피상적으로만 봐도 카프카가 자기 소설에 여러 다양한 기계장치를 제시했다는 사실을, 양정욱이 기계장치의 내/외양을 가진 작품 제작에 열중한다는 사실과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양정욱의 예술적 젖줄은 첨단의 미술 또는 조각의 영역이 아니라 일상에 붙들려서(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문학적 상상력이 극대화됐던 "어느 소수적인 문학(a minor literature)"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카프카는 단호히 언명한다. 소수적인 문학은 문학의 질료를 훨씬 더 잘 다룰 수 있다고" 말이다. (Gilles Deleuze & Felix Guattari, Dana Poran(trans.), Kafka: Toward a Minor Literatur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6, p. 19.) 그와 비슷하게 양정욱은 미술의 질료를 더 잘 다룸으로써 소수적인 언어, 표현, 감수성에 근접해 가고 있다.

 

양정욱_전시를 위한 드로잉_종이에 연필_2015
 

3. 노동을 볼 줄 아는 작가 ● 양정욱은 마치 카프카가 그랬던 것처럼 예술만 하고 싶었지만, 밥벌이가 무엇보다 급선무이므로 생계를 위해 "인사만 하던 가게에서" 일했다. 외진 곳에 있어 손님도 거의 없고, 오는 손님이라야 딱히 매상을 올려줄만한 것을 사지도 않고 괜히 서성거리다 사라지는 밤의 편의점. 장사가 잘 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는 그곳에서 간혹 찾아온 손님을 상대로 말 그대로 인사만 하는 알바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루해서 죽을 것만 같은 긴긴 노동의 시간을 사람들의 모양새를 관찰하고, 사물의 의미를 유추하고, 바야흐로 권태로운 습관까지 즐기는 식으로 변질시키며 온갖 질료를 예술로 연마하는 연습을 했다. 그의 첫 개인전 『인사만 하던 가게에서』(2013)가 그런 경험과 노고의 결정체다. 출품작들은 현실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 우리네 삶의 피곤하고 하찮은 지점을 절묘하게 건드렸다. 예컨대 경비실 초소를 지키는 경비원의 졸음을 모티프로 한「언제나 피곤은 꿈과 함께」는 모터로 작동하는 나무막대들이 상하운동을 하며 규칙적으로 플라스틱 병을 치는 작품인데, 그 움직임과 소리는 꾸벅꾸벅 졸다가 화들짝 놀라 깨는 경비원의 지각상태 자체다. 거기에 작가는 "그 후로도 몇 번의 급여를 다시 받았는지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로 끝나는 텍스트를 부가해 그런 경비원이 현실 너머에 있는 존재인 것 같은 느낌을 강화시켰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양정욱이 일이라는 족쇄를 찬 채로/피하지 않은 채로 그로부터 현실적 지각과 현실 초과적 내러티브를 발전시켰다는 사실, 그렇게 해서 자신만의 작품을 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는 보험회사 직원 카프카가 글 쓸 시간을 뺐기기 때문에 생계 일을 끔찍이 싫어했으면서도, 바로 그 사무에 대한 증오와 문학에 대한 갈증 내부로 파고들어 누구도 쓸 수 없는 글을 쓸 수 있었던 상황과 닮았다.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Felix Guattari)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가 구멍을 파는 것 같은 글쓰기, 쥐가 굴을 파는 것 같은 글쓰기" (같은 책, p. 18.)말이다. 요컨대 이 둘은 싫어하는 대상에서 예술/미적인 것을 파헤쳐낼 줄 알았고, 덕분에 자신의 작품이 범상치 않은 이중성, 깊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의뭉스러움을 풍길 수 있게 됐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양정욱_전시를 위한 드로잉_종이에 연필_2015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작업에 시간을 바치고, 글쓰는 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글쓰는 시간이 더 이상 작업이 아닌 다른 시간으로 들어가, 시간이 상실되는 지점, 시간의 부재가 주는 매혹과 고독으로 들어서는 그 지점에 다가서는 것" (Maurice Blanchot, De Kafka a Kafka, 이달승 역,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그린비, 2013, pp. 113-114.) ● 위 인용문에서 블랑쇼(Maurice Blanchot)가 말하듯, 카프카는 시간을 변질시키고 시간을 부재하게 만드는 식으로 글쓰기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우호적 현실로부터의 퇴각도 아니고, 반대로 급격한 세속화도 아니다. 사실은 현실 내부에 똬리를 틀고 앉아 다소간 환상적이고 다소간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그려내는 방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 결과 카프카의 문학은 소수자적이면서 강렬하고, 비의적(esoteric)이면서 비판적인 무엇이 될 수 있었다. ● 그런데 사실 나는 이 말을 카프카를 향해서가 아니라, 양정욱을 향해서 하고 싶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양정욱의 작품과 감상자의 작품 향유가능성을 근거로 말이다.「아버지는 일주일동안 어떤 잠을 주무셨나요」(2014)는 유리창에 발린 노란 기름얼룩 위로 로봇 팔처럼 만든 나무막대가 자동운동을 하면서 궤적을 남기는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의 모티프를 아침이면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질 새도 없이 바삐 일하러 나가야 하는 대한민국 현실 속 아버지들 뒤통수에서 얻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 앞에서 감상자는 나무막대가 그리는 궤적을 좇으며 아버지들의 지난 밤 어지러운 꿈을 훔쳐볼 수 있다. 또 그 노란 얼룩에서 아버지들 베개에 낀 묵은 때나, 까치집처럼 뒤집힌 그들의 뒤통수 모양새를 떠올리며 무겁고 기묘한 기분에 휩싸일 것이다.

 

 

양정욱_그는 수술을 앞둔 어느 가장이었다_나무, 모터_가변크기_2015_부분

 

 

양정욱은 2015년 6월 OCI 미술관 개인전에 선보일 작품들도 이제까지처럼 현실, 특히 노동의 현장으로부터 근거와 모티프를 찾아내 그와 관련된 사람의 양태, 도구, 행동 메커니즘, 감각 등을 상징화하거나 이미지화하는 식으로 준비하고 있다.「은퇴한 맹인 안마사 A씨는 이제, 안마기기를 판다」가 그것이다. 이미 제목이 힌트를 주듯 작품은 안마기기의 형태와 운동성을 가질 것이고, 딱히 불가능하거나 이상한 점을 집어낼 수는 없지만 뭔가 부조리하면서 허구적으로 여겨지는 이야기를 자아낼 것이다. 가령 맹인 안마사는 자신의 일을 안마기기/작품에 뺏겼는데, 그 미운 것을 팔러 다닌다. 과연 그 안마기기/작품은 인간 안마사만큼 우리 몸에 알맞게, 구석구석 시원시원하게 주물러줄 수 있을까. 어쩐지 컴컴한 어둠 속에서(왜냐하면 맹인이니까), 검은 색 비닐가죽이 씌워진 안마의자가(왜냐하면 시장에 나온 상품들이 대체로 그러니까), 부들부들 제 몸의 구석구석을 떨면서(왜냐하면 안마기기니까)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풍경이 그려지는데. ● 이런 이야기, 이런 감각, 이런 지각, 이런 상상이 바로 카프카식 시각예술가 양정욱이 고안해낸 융합미술, 쉽게 말해 입체이고, 움직이며, 소리를 내고, 빛과 어둠 또는 현실과 상상에 비율을 따질 수 없는 정도만큼씩 양 발을 걸친 작품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미적 경험이다. 소수자적이고 평범한. ■ 강수미

 

씬킴_끝의 시작 Ⅲ_장지에 먹, 금분, gutta안료, 플라스틱 장식품_160×240cm_2013

 

 

혼연일체(渾然一體)로서 감통(感通)의 원기(元氣) ● 천지만물의 원기(元氣)를 유기체의 과정으로 탐구하고 있는 씬 킴(Ssin Kim)은 오늘날 주목받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그에 걸맞게 우주론과 자연관, 그리고 동양철학과 예술성에 심취한 듯하다. 지금껏 그의「황금지대(golden area)」와「부드러운 장소(soft place)」연작은 인간이 느끼는 감통(感通)의 입장에서 숭고와 경외감, 공포심을 주로 다루고 있다. 더 나아가서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인류와 문명에 신선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의 상생 관계를 강조하려고 한다. ●「황금지대」연작은 대자연의 웅혼한 느낌을 '역(易)'의 순행 이치로서 풀어낸다. 이른바 무모하게 자연에 다가선 인간의 태도를 수정하려는 작가의 문제의식이 짙다. 그런즉,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깨뜨리려는 모습을 상징화하면서, 한편에서는 결코 정복할 수 없는 대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부드러운 장소」연작은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발생하는 동물학대를 경고하고 있다. 이 연작은 그렇게 죽어간 동물들의 쉼터이자 안식처를 상징한다. 생명의 존엄성을 정(情)과 연민의 감정으로 표출하고 있는 셈이다. 동물의 영혼을 달래며, 자기 속죄를 담으려는 작가의 인간미가 배여 있다. 그러한 실천을 다스리는 마음의 모습은 양명학(陽明學)의 왕수인(王守仁)이 성정(性情)을 강조한 '심즉리(心卽理)'의 논법과도 무관하지 않다. ● 이로써「창세 이전에(before the beginning)」에서 태초의 모습을,「끝의 시작(Beginning of the end)」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버려진 미래(last days of us)」에서 인류 최후의 모습을 진지하고도 무심(無心)한 자세로 바라보고 있다. 무욕(無慾)의 입장이어서 자연을 끌어안으려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형편이다. 그의 말처럼, "어떻게 하면 현대인들이 '자연과 인간의 조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까"를 무아(無我)의 궁극으로서 궁리하고 있다. 이른바 여기서의 조화는 만물일체(萬物一切)의 순리를 따른다.

 

씬킴_Last days of us_장지에 분채, 금분, gutta안료, 모래, 방해말_227×390cm_2014
 

특히「창세 이전에」는 마치 천지개벽 이전의 혼망(混.) 상태를 재현하는 듯하다. 이 역시 속박됨에 물들지 않는 무염(無染)의 자세로 접근하려는 의지 탓이다. 무염함은 곧 이미 물들어감에서 멀어졌다는 의미이다. 자연에 굴복(submission)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헛된 욕망을 버리고 무위(無爲)로서 운필(運筆)을 다스리는 까닭이다. 이는 용묵(用墨)이나 필치(筆致)의 쓰임새에서도 집착을 버리려는 흔적이 확인된다. 묵빛의 현현(玄玄)함과 금분의 조화는 인간과 자연의 또 다른 유기체 관계를 자아낸다. 그러므로 바라만보는 경물(景物)의 축적에만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무소유로서 만상(萬象)을 잊는다. ● 자고로 망심(妄心)이나 망념(妄念)을 따진다는 태도에는 이미 경계가 설정된 연후에 나타나는 집착 현상이 서려있다. 견(見) 역시 바라보기 때문에 보지 못함을 동시에 동반하는 업(業)의 심성(心性)이 일어나는 결과로서 가능하다. 따라서 잊혀짐(妄)은 잊으려는 마음에서 상대화로서 발생하므로 그 자체를 아예 망각할 생각조차도 갖지 말아야 옳다. ● 더 나아가서 명경(明鏡)의 원리처럼, 거울에 상(像)이 맺힘은 또 다른 영상(影像)을 자아내는 식별이 요구된다. 이는 분별의 식견으로서 안식(眼識)이 주어져도 그 상이 안과 밖을 두루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얽히고설켜 엮이는 인연인 반연(絆緣)으로서, 서로서로가 비추는 무분별상(無分別相)으로 잔류하게 된다. 어쩌면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현상학(phenomenology)에서 "사이 세계(l'intermonde)"를 표방하는 애매성, 그리고 "서로서로 뒤섞인 관계(le rapport d'Ineinander)"(M. Merleau-Ponty, Resumes de cours, Gallimard,1968, p.177.)와 유사한 형국을 취한다. 그런 차원에서 씬 킴의 그림에 나타난 음양의 법칙, 밝음과 어두움의 대비, 동정(動靜), 장단(長短), 고저(高低)의 필법에는 집착이 없어 보이며 반연의 묘리를 드러낸다. ● 혹여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생각이 표현의 형세마저 지배할 경우, 번뇌의 잔존물인 습기(習氣)로 인해 미혹(迷惑)의 경계에서 해탈(解脫)을 얻지 못한다. 분명 인간과 자연의 문제는 혼돈(混沌)으로부터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을 주재(主宰)하는 순리로 이해하여야 마땅하다.

 

씬킴_버려진 미래_장지에 먹과 금분,분채_130×690cm_2015

 

 

이처럼 자연을 유기체 입장에서 접근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시간관이 회전 주기로 점철된 탓에 지극히 순응과 영속성을 유연하게 낳는다. 이를테면 자연은 유기체철학(philosophy of organism)으로 이해된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가 이성의 기능(The function of Reason)과 관련하여, 물리로서 해체에 대항하는 기운이 자연에 서려있다는 논리와 짝을 이룬다. 즉, 그가 "피조물은 사라지지만 또한 불멸한다(The creature perishes and is immortal)"(A. N.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New York: The Macmillan Co., The Free Press, 1969, p. 99.)는 논리에는 소유가 깔려있지만 순응(conformation)을 요구하는 경우 시간관이 함유된다. 이러한 시간관은 영속성(permanence)을 전제하는데, 그래서 직접성(immediacy)을 떠난 영상(moving)은 순간순간 끊임없이 유동하면서 되살아난다. 이를 두고 주체(subject)로부터 아예 사라진 상태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씬 킴의 그림은 이러한 상호 순환의 유기 관계를 놓치지 않고 있으며, '변환'으로서 '합생'의 구조마저 이해하고 있다. ● 그런 즉, 화이트헤드의 유기체는 '변환(transmutation)'으로서 파악된다. 이른바 상호 발생의 관계가 전제된 탓에, 그 어디에도 한정을 짓지 않는다. 이는 동시태(contemporaneousness)로서 인과(causal) 관계를 엮는다. 곧 미시세계에서 거시세계로 이전하는 작용을 파악(prehension)으로 느낀다.(A. N. W, Process and Reality, p. 155.) 이러한 파악은 우주의 수많은 개체가 하나의 구조로 통일되는 일원의 과정으로서 '합생(concrescence)'을 반영한다.(A. N. W, Process and Reality, p. 79.)

 

씬킴_Before the beginning Ⅱ-1_장지에 먹과 금분, 금박_90×60cm_2012

 

 

이제 대자연(天下)을 바라보는 인간의 자세는 정복과 소유로부터 벗어난 상생의 조화, 즉 '변통(變通)'의 이법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 이에 따라 씬 킴은 숭고와 경외감이 느껴지는 존재로서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를 만물의 변통으로 자아내려고 시도한다. 그의 자연관은 필(筆)과 묵(墨)이 서로 혼연일체(渾然一體)를 이루는 지경이다. 의미나 형식에 욕심이 없는 탓에 별도의 작위가 필요치 않다. 그래서 무위를 따르고 무욕에 순응하는 대자연을 품어낼 수 있다. 이를 두고 천지(天地)의 혼돈(混沌) 상태, 곧 '인온(絪縕)'을 펼치는 형세라 부른다. 최소한 '인온'은 작위를 잊고 사로잡힘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짙다. 왜냐하면 작위는 언젠가 소멸을 양산하게 되며, 또한 사로잡히게 되면 소유의 욕망에 갇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만물을 상대하는 태도가 그저 스스로 흘러감을 우주의 순리로서 따라야 온당하다. ● 씬 킴의 그림에 드러난 대자연의 위엄과 위압은 과히 대천지의 웅장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웅혼하게 요동치는 만물상은 그 어디에도 거리낌이 없어 보이는 '무작위'를 추구한다.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의 경외감과 외경감이 동시에 겹친 듯하다. 이러한 연작들은 태초의 모습이나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세계, 즉 자연의 숭고함과 경이로움에서 천지자연이 왕성하게 펼쳐지는 '봉발(逢勃)'의 기세를 느낄 수 있다. 천지는 일체(一切)의 경물(景物)이 만물을 이루는 형국이다. 이를 비유하면 「노자(老子)」40장에 "천하만물은 유에서 드러나고, 유는 무에서 드러난다(無法生有法)"는 말과 같은 섭리이다. ● 이에 그가 표현하려는 대자연의 운필(運筆)에는 홀연히 혼화(混化)로서 융화(融化)를 품어낸다. 이른바 만물이 혼연(渾然)하여 일체(一切) 원만하니 혼목(混穆)을 머금는다. 말하자면 혼목하니 원만한 공경이 따르고, 원만하니 고요가 찾아든다. 그러므로 혼연하고 고요하여 목연(穆然)을 끌어안는다. 이로써 욕심 없는 모양으로서 담연(澹然)을 이룰 수 있다. 역시 '역(易)'의 순리와 다를 바 없다. 이른바 '역'은 형체도 사고도 이행함이 없는 까닭에 스스로 고요하면서도 감(感)함을 서로 교환하는 이치이다. 그의 산수 형세는 맥과 맥으로 연결되어 높고 낮은 봉우리가 빼어난 봉만(峰巒)을 이루니, 구애받지 않는 쇄락(灑落)을 점점 형성하게 된다. 이럴 경우, 신묘한 운치의 신운(神韻)과 더불어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쇄탈(灑脫)스러움을 얻을 수 있다.

 

씬킴_Before the beginning Ⅱ_장지에 먹과 금분_240×50cm_2012
 

한편 생성과 소멸이 쉼 없이 운행되는 자연의 원기에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연기론(緣起論)과도 같이 윤회(輪廻)의 이치를 따른다. '인연생기(因緣生起)'라고 일컫는 연기론은 직접원인(因)과 간접원인(緣)으로서 윤회의 공(空)사상에 근간을 이룬다. 따라서 세상 만물은 융화의 순리로서 작동의 순환 고리를 끊임없이 잇는다. 이것은 작가가 현대인에게 던지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그가 담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역시 '인연생기'의 순리로서 바라보고 있다. 인간이나 자연을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고(無二) 상생의 섭리를 끌어안는다. 언필칭 분별이 없어서 분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까닭에 '무분별(無分別)'로 남는다. 나누어지지 않으므로 이미 하나라는 말이다. 이를테면 자연의 순행 질서로서 무한대(無限大)와 무한소(無限小)를 동시에 발출한다. ● 이제 자연을 우주의 원기로 섬기려면 융화로 다가서야 온당하다. 이른바 마음의 욕정과 침탈의 흉물을, 데리다(Jacque Derrida)가 강조한 "흔적(trace)은 곧 자기의 삭제(erasure of selfhood)"임을 되새길만하다.(Jacque Derrida, L'ecriture et la difference,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1978. p. 230.) 어떻게 보면 인간이 자연에 저지르는 몽매한 행동은 욕망(desire)의 단편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욕망은 "요구(demand)와 욕구(need)가 분리되는 여백(margin)의 범위에서 형성"(J. Lacan. Ecrits, New York.London, 1977, p. 311.)된다는 라캉의 말처럼 여기에는 소멸(obliteration)과 소유로서의 충족 의지가 강하게 내재되어 있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잠식시키려는 태도이다. 씬 킴이 그림에서 제시하고 있듯이, 이제 인간과 자연은 상호소통(communication)의 대화(colloque)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현대인은 공적(空寂)한 마음으로 청정(淸淨)함을 자연과 공유하여야 마땅하다. 그런 이유로 그의 그림과 사상에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융화를 만끽하려는 자태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어서 지속으로 관심과 찬사를 받을만한 작가이다. ■ 황의필

 

 

Vol.20150618a | 2015 OCI YOUNG CREATIVES-양정욱_씬킴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