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동강댐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90년대 후반 무렵이었다.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 자연 탐사에 나섰는데, 강가에는 환경단체의 출입을 금한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고, 주민들의 반감이 만만찮았다. 동강 주민들의 현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일방적 여론 형성에 더 분노한 것 같았다. 동강댐을 건설하라는 주민들의 항변에 앞서, 사람이 살아야 자연도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들과 함께했다그러나 주민들이 외지인에게 보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특히 동강 댐을 반대하는 환경단체는 접근도 할 수 없었다. 사진 찍는 일보다 그들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인사동 예술가들의 모임인 창예헌과 손잡고 귤암분교에서 동강 변 주민들을 위한 굿 마당을 열었다.

퍼포먼스를 벌일 무세중 선생 일행은 행사 이틀 전에 오셨는데, 저녁나절 동네 주민들과의 술자리에서 걱정했던 일이 벌어졌다. 동강 댐 이야기를 꺼내 언쟁이 벌어졌는데, 혹 떼려다 붙인 격이 되어버렸다. 내가 주민 편들어 사태는 진정되었으나, 후폭풍은 거세었다. 그 이튿날 행사 준비는커녕 방에서 꼼짝도 않으시는 것이다. 잘못했다고 빌고 또 빌어, 서울에서 출발한 일행들이 도착하기 직전에야 일어나 퍼포먼스를 준비하셨으니, 정말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

 

잇따라 버스 두 대에 나누어 탄 인사동 주류 예술가 70여 명이 동강에 도착했고, 정선 용탄리에서부터 영월 삼옥리에 이르는 동강 변 주민들도 속속 행사장인 구귤암분교에 도착했다. 조용한 강변 마을에 갑자기 너무 많은 차가 모여들어 길이 막히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원창 정선군수와 원로시인 민영 선생의 인사로 시작된 동강 변 주민들을 위한 굿 마당은 동강변 주민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강가에서 벌인 무세중 선생의 깃발 퍼포먼스가 볼 만 했는데, 손님 안내하느라 구경은 커녕 사진 한 장 찍지 못했다. 마침 사진가 하형우씨가 찍어 보내주었으나, 정선집 불날 때 그 자료까지 모두 태워버렸다. 주민들과 예술인이 어우러진 멋진 한 마당이었는데, 얼마나 바빴으면 그날 나온 조해인 시인의 어라연 뱃사공시집과 나의 동강백성들포토에세이는 저자도 보지 못한 채 나누어 주었다. 그날 굿 마당 행사 비용을 창예헌이사장이었던 김명성씨가 부담해 주어 가능했다.

 

아무튼, 당시로서는 동강댐 백지화에 따른 보상이 빨리 이루어져야 했다. ‘고래 싸움에 세우 등 터진다는 말처럼 정부와 여론의 긴 싸움으로 동강 주민들만 희생양이 된 것이다. 온통 동강 이야기로 시끌벅적했으나 아무도 동강 원주민들의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았다.

 

1990년 동강 주민 160여명이 홍수로 사망하자 노태우 대통령 지시로 발단되었다. 동강댐 논란이 언론에 뜨기 시작하자, 고요한 정적만 흐르던 동강은 어두운 먹구름이 일기 시작했다. 발 빠른 레저업자들의 사라질 비경이라는 부추김에 주말은 온통 사람과 차량으로 뒤 덥혔고, 비오리와 어름치가 사라진 강변에는 쓰레기와 오물이 난무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오랜 세월 강과 더불어 살아왔던 순박한 원주민들의 삶이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수몰 지역으로 내정되면서 집을 짓거나 고치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길 닦는 일에서부터 영농지원금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이 살아갈 최소한의 지원도 중단되었다. 거기에 더해 수자원공사를 등에 업은 장사꾼과 투기꾼들이 개입하여 순박한 사람들을 유혹하며 문제가 불거졌다. 평생 소외된 환경에서 살아왔던 산골사람들에게 작지 않은 보상의 유혹은 욕심 이전의 생각을 갖게 했고, 들뜬 마음은 일손을 놓게 만들었다. 묘목상들의 농간으로 농사지을 땅에 가꾸지도 못할 유실수를 빚내어 심었다. 농산물이 줄어 가난한 살림은 더욱 쪼들렸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는 그들의 삶을 절박하게 만들었다.

 

그들도 처음엔 댐 건설을 반대했다. 10년 넘게 끌어 온 지루한 댐건설 논란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시행되지 않으면 연대보증에 의한 채무로 모두 도산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동강을 살리자는 강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댐을 건설하라는 항변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군 농약 마셔 자살하고 누군 강에 빠져 자살하는 등 사람이 줄줄이 죽어가는데, 자연 탐사가 무슨 말인가? 우리의 후손이 영원히 뿌리를 뻗고 살아야 할 땅을 지키려면 그 땅에서 태어나 살고, 그 땅으로 돌아갈 백성부터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동강을 잘 알고 제 몸처럼 다스렸던 그들이 살아야 동강도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 자연환경을 기록하는 다른 회원과 달리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했다. 자연환경을 지키는 것에 반할지라도 주민 편에 설 수밖에 없다. 당시 귤암리 만지산 농가를 캠프로 사용하며 주민들과 머리 맞대어 보상받을 방안을 협력했다.

 

2000년의 해를 넘기는 추운 겨울, 동강지역 주민 400여 명이 데모하러 서울 간다기에 따라 붙었다. 빚에 쪼들려 자살하는 주민이 줄을 잇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태국에 사는 고영준씨가 사무국장으로 충무로 사무실에 상근할 때인데, 그 사무실을 거점으로 움직였다. 충무로 지하철역과 혜화역에서 가진 동강백성들사진전에서 행인들에게 실상을 알리는 리프렛을 나누어 주는 등 전 회원이 발벗고 나섰다.

 

동강 주민들은 명동성당 입구에 진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으나 갑자기 날씨가 추워 걱정이었다. 하는 수 없어 밤에는 노인들을 충무로의 한국환경사진가회강당으로 모셨다. 그 강당은 본래 삼성카메라클럽에서 밀려 나온 현대사진가회에서 사진 강의실로 사용했는데, 마침 환경사진가회도 그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었다강당에 있던 탁자를 치워 노인들만 주무시게 하고, 사무실에서는 시민들에게 뿌릴 전단지와 보도자료를 만들어 각 신문사 사회부에 돌렸다. 그에 앞서 김대중 대통령께 동강의 현실을 적은 편지와 함께 동강 백성들포토에세이 한 권을 보내 드렸다.

 

다행히 '문화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에 기사가 실려, 사람이 죽어가는 동강 주민들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맙게도 다음 날 청와대에서 마을 대표를 찾는 호출이 온 것이다. 이영석 대책위원장을 비롯한 마을 대표가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모든 일은 해결되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께서 동강댐 백지화를 선언하며 그 기나긴 동강댐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용단에 동강도 살고 주민도 살았으니, 어찌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있겠는가?

 

보상책으로 농가 부채 감면과 더불어 가구마다 집 짓는데 4천만원을 무상 지원했고, 축사나 비닐하우스 등 농가에 필요한 시설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국적 불명의 집들이 동강 변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산꼭대기에 세워진 송신탑으로 집집마다 티브이 방송도 들어왔다. 흑백 티브이도 보지 않던 시절에 티브이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두메산골도 그런 두메산골이 없었다는 말이다.

 

'한국환경사진가회'에서는 동강환경사진집을 펴냈고, 개인적으로는 동강백성들포토에세이와 두메산골 사람들사진집을 펴냈다. 모든 일은 끝났으나 정든 동강을 떠날 수 없어 하릴없이 구름에 휩싸인 산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평생 주제였던 사람과 달리 사진은 팔렸으나, 쪽 팔렸다. 사기는 치기 쉽지만, 지우기는 쉽지 않았다.

 

동강 작업의 주체였던 한국환경사진가회939월에 발족하였다. 나를 비롯해 고영준, 이석필, 이수영, 한상근, 정원일, 이희배, 배병수씨등 중견 사진가 몇 명이 뜻을 모아 만들었다. 수질이나 대기오염 등 자연훼손을 기록하는 환경 분야는 물론, 사람이나 야생화, 동굴, 조류, 곤충, 어류 등 22명의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활동한 단체다, 10여 년에 걸쳐 우포늪’, ‘동강’, ‘서울환경등의 사진집도 발간했으나, 2005년부터 이희배씨가 회장을 맡으며 본래의 취지와 달리 조직 규모에 집중하는 단체가 되어버렸다, 그 후 대부분의 창립 맴버들이 탈퇴하여 지금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남의 일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 동자동에 살며 간간이 만지산을 찾았는데, 세상은 그냥 내 버려두지 않았다. 3년 전 옆집의 화재가 옮겨붙어 20여 년 동안 기록한 동강 자료를 모두 태워버린 것이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한 욕심이 화를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사 모든 게 새옹지마라지만, 어찌 그 사연들을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마침, 지인으로 부터 동강댐과 김대중대통령과의 관련 자료가 없느냐는 메시지를 받아  블로그를 뒤져 보았으나 토막 이야기 뿐이었다. 그래서 여기 저기 기억을 들추어 뒷북을 치는 것이다.

 

그러나 동강 변에 살며 한가지 깨우친 것은 있다. 돈이 얼마나 무서운 요물인지, 그때 새삼 절감했다. 그렇게 순박한 산골사람들이 돈에 병들어 가는 과정을 똑똑이 지켜봤기 때문이다. 사람 탓 할 게 아니라 모든 게 돈이 원수다.

 

사진, / 조문호

 

 

지난 23일은 정선 만지산 불난 집터 측량하는 날이었다.

아산의 김선우씨가 일주일 전부터 신청해 둔 측량이라, 모처럼 정동지와 함께 정선 간 것이다,

 

오전10시에 출발했는데, 차를 교체한 후 첫 장거리 운행이었다.

‘투싼’은 승차감도 좋았지만, 확 터인 시야라 지난 번 ‘크루즈’보다 훨씬 편했다.

양평을 경유하여 네 시간 만에 도착했는데, 측량시간이 오후2시라 한 시간 정도 남았더라.

 

불난 집터만 보면 속이 뒤집어져 창수네 집부터 올라갔다.

집에 아무도 없어 전화를 걸었더니, 밭에서 옻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부지런함은 여전한데, 일을 마무리하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친정 식구들이 몰려와 몇 날 며칠 동안 술파티를 벌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큰아들 창수가 속 썩인 일까지 구절구절 풀어댔다.

 

지난 해에는 고추농사는 짓지 않고 고사리 농사에만 공을 들여 팔백만원이나 벌었고,

다른 집에서 일 해주고 받은 품삯도 오백만원이 넘었는데, 

자식이 사고를 쳐 한 입에 털어 넣고 말았다는 것이다.

 

큰 아들 창수가 갑자기 정신 장애를 일으켜 큰 사고를 냈다고 한다.

 보상해 준 돈만도 만만찮은데, 카드로 주문한 책이 산더미처럼 왔다는 것이다.

조금만 관심가면 모두 구입한 것 같은데, 책 값만 몇 백만원이 된다고 했다.

대부분 필요 없는 책이라 새 책을 폐품으로 파는 어이없는 일도 있었단다.

“자슥 놈이 웬수야! 웬수~”라는 창수 엄마의 하소연에 한이 맺혔다.

 

농막에서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는데, 아산에서 출발한 김선우씨가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집터 측량하러 왔다는 말에 창수엄마도 따라 나섰는데,

측량기사도 네 분이나 왔지만, 김선우씨는 김창복씨와 함께 왔더라.

 

아산의 김창복씨는 농지에 관한 행정이나 농막 관례에 해박한 전문가로

지난 해 불 난 직후에도 모시고 와 도움을 받았는데,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하루 종일 차 속에 시달릴 걸 생각하면, 자기 일이라도 쉽게 나서지 못할 일이 아니던가?

 

측량 기사들은 측량하느라 왔다 갔다 했지만,

선우씨 일행을 비롯한 동네사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웅성거렸지만, 불 낸 옆집에서는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측량 결과가 나왔는데, 20년 전 측량한 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우리 집터에서 동쪽으로 2미터 정도 밀려 난 것 외에도

북쪽에서도 2미터 정도 남쪽으로 내려와 창수네 밭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지켜보던 창수엄마의 낯빛이 편치 않아보였다.

 

그 땅은 창수가 아무 일을 못해 둘째 아들 용순이를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용순이 집터로 정한 땅이라며 난처해했다.

오죽하면, 다시 측량하게 되면 위쪽으로 올라 갈 것이라고 했을까?

 

그런데, 아산 김창복씨가 문제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옆집과 경계를 이룬 남쪽지점과 북쪽 지점에 눈금을 대 보고는

옆집에서 지은 농막이 집과 집사이의 5미터 틈을 두지 않았고,

한 쪽 지붕 끝이 이쪽 땅을 침범했다고 한다.

새로 지은 농막을 보호하기 위해 이쪽 땅에 돌 턱을 쌓은 것도 잘 못이란다.

 

이 문제는 우리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농막 규모도 여섯평을 한참 초과했고

집도 한 채가 아니라 대형 저장고까지 세동이나 되었다.

그래도 부족한지 빈터에 건축자재를 잔뜩 쌓아 놓았더라.

우리 집터는 오래전부터 옆집의 주차장이고 자재 보관소였다.

문제점을 따지고 싶었으나, 사람이 나오지 않아 민원을 제기할 수 밖에 없었다.

 

불난지 1년이 지났건만 보험회사는 물론, 불 낸 사람도 전화 한 통 없다.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 뺀다’는 속담처럼, 상대를 열 받게 해 스스로 나가길 바랄까? 

솔직이 사람이 보기 싫으니, 정선 만지산에 대한 애착도 사라졌다.

 

군청에 가서 알아보자는 손님 말씀도 있었지만, 읍내 나가 밥부터 먹어야 했다.

군청과 읍사무소에 들렸다가 시장 곤드레 밥으로 허기를 메웠다.

차 한 잔 나누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선에서 못 살것 같았다.

홧병으로 목숨을 재촉할 것아 다른 곳에 집터 알아보라고

모든 일을 정동지와 김선우씨에게 넘겨버렸다.

 

사실은 6년 전 정영신씨와 이혼할 때, 위자료조로 정선 집을 준다고 했으니 정동지 집이다.

집터 압류가 풀리지 않아 명의 이전을 못하고 서약서만 남겼으니,

내가 결정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도움주신 분들과 함께 사용할 에술창고를 만들겠다는 약속은 지켜야 해

어디든 적당한 부지를 찾아보라는 부탁은 했다.

매사가 분명치 못하니 김선우씨가 모든 일을 해결해 주는데,

그 많은 도움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선 만지산은 25년 동안 정들었던 제2의 고향이었다.

자연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나 많은 것이 바뀌었다.

순박했던 동강 원주민들이 더러 세상을 떠나기도 했지만,

산골까지 파고든 물질문명으로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

 

정선과의 인연을 끝내려니, 한 마디로 시원섭섭하다.

“잘 있거라. 정선아! .”

 

사진, 글 / 조문호

 

 

25년 동안 기록한 작업들을 돌아 보며 정리해 둔다

 

-축제-

동강변 주민들을 위한 굿마당 2000, 9 / 구 귤암분교

제1회 만지산 서낭당 축제 2007, 10 / 만지산 사진굿당

제2회 만지산 서낭당 축제 2008, 9 / 만지산 사진굿당

 

-전시-

동강환경사진전, 1999. 10 / 서울, 충무로 갤러리

‘동강백성들’사진전, 2001, 11 / 서울, 충무로 지하철역과 혜화역 지하철 전시장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전, 2004, 12 / 서울, ‘덕원갤러리’

찾아가는 예술여행 ‘두메산골 사람들’전 2005 / 정선, 평창, 영월 산골마을 분교 10곳

‘신명’ 설치 사진전, 2005, 9 / 만지산 사진굿당

강원다큐멘터리 특별전, 2005, 7 / ‘동강사진박물관’

‘산을 지우다’ 사진전, 2008, 9 / 서울, ‘통인옥션갤러리’

‘산골 사람들’ 사진전, 2018, 5 / 정선, G갤러리

 

 

-출판-

‘동강백성들’ 포토에세이 발간 / 2000, 9 /도서출판 명상

‘동강’환경사진집(한국환경사진가회) 2000, / 도서출판 포토뉴스

‘두메산골사람들’ 사진집 발간 / 2004, 12 / 눈빛출판사

 

 

요즘 나를 열 받게 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정치판 돌아가는 것과 검찰에 이어 법관 놈들 하는 짓거리,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불난 정선집이다.

정치판이나 법관들이야 고개 돌리면 그만이지만, 정선 집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불낸 옆집에서 땅을 다시 측량해 우리 집 있던 자리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그 문제도 자세히 알아봐야 겠지만, 어머니 산소 문제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정선까지 가기 힘들어 어머니를 서울근교의 납골당에 모시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몇 개월간 산소에 가보지 못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추석 전에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 정선읍사무소에 묘지 개장신고서 등의 서류를 준비하러

지난 금요일 새벽 무렵 정선으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버렸다. 양평쯤에서 주유소에 들려 기름을 넣다보니 핸드폰을 두고 온 것이다.

현금도 없는데다 핸드폰 속에 결제할 카드가 있기 때문이다.

전화야 주유소에서 빌리면 되겠으나 아무 번호도 기억나지 않아 연락할 수가 없었다.

숫자 기억이 어두워 내 전화번호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거의 치매수준이다.

아무리 정영신씨 전화를 기억하려 안달했으나 뒷자리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수첩을 뒤적여보니 마침 아들 햇님이 전화가 적혀있어 위기는 모면할 수 있었다.

‘늙으면 죽어야지’를 되 뇌이며 정선으로 떠났다.

 

먼저 읍내에 들려 읍사무소 서류부터 준비해 두고, 농기구가 불타 벌초할 낫부터 하나 샀다.

일을 마무리하고 만지산 집에 가보니 화가 나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우리 집 불탄 자리 반쯤에 걸쳐 옆집에서 집을 짓고 있었다.

그 문제는 옆집과 다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살 때 측량한 지적공사와 싸워야 할 문제였다.

 

밭은 물론이고 산소는 잡초가 무성해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

불난 와중에 심어두었던 옥수수는 잡초 속에 묻혀 성장을 멈추고 있었다.

돌보지도 않고 수확을 바란 내가 도둑놈 심보였다.

밭은 내 팽개치고 산소 벌초부터 하며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 미안합니더! 내가 제대로 못 모셔 다른 곳에 모시기로 했습니더.

“다 알고 있다. 죽은 내가 감 나라 콩 나라 할 수야 없지만, 사겨 놓은 이곳 친구들과의 이별이 섭섭하구나.” 

유달리 친구들을 좋아하셨던 어머니께서 만지산 귀신들과 많이 사귄 것 같았다.

 

아뿔사! 낫질을 잘 못해 그만 한 칼 먹어버렸다.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야! 이놈아 술안주 담아 온 비닐로 손가락부터 감아라. 어디다 정신 팔고 낫질을 그따우로 하노”

“정신이 하나도 없소. 제발 잔소리 좀 하지마소”

 

처삼촌 벌초하듯 대충 끝내고 일어서려다 잔디에 미끄러져 넘어질 뻔 했다.

급히 잡은 나무가 개 복숭아 가지였는데, 개 복숭아 한 알이 정신 차리라는 듯 머리에 뚝 떨어졌다.

 

“우메! 일에 정신 팔려 개 복숭아 열린 것도 못 보았네”

차에 있는 망태하나 챙겨 와 효소 담으려고 손에 닿는 것만 따 담았다.

어머니가 준 마지막 선물로 생각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선을 떠나왔다.

 

차 안에서 걱정에 걱정을 머리에 이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화재 보상문제로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껴안고 살아야하는가?

이웃과 마음 상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다독였으나 마음이 쉽사리 풀리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세월이 약이겠지...”

 

사진, 글 / 조문호

 

“아! 너무 허무하다.” 모든 게 한 순간이구나.

 

어제 오전 7시 무렵, 녹번동 정영신씨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선 만지산 집에 불이 나 모든 게 타 버렸다는 비보였다.

 

그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설마, 누군가 빨리 오라는 장난 전화를 했겠지”라고 위안했으나

부리나케 정동지를 만나 정선으로 떠난 것이다.

 

연락에 의하면 밤1시 40분 경 옆집에서 불이 나

우리 집으로 옮겨 붙었는데, 원인은 누전이란다.

옆집 한씨가 전기기술자인데, 누전으로 불났다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 집은 동강 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옛집이 아니던가?

동강 댐이 무산되어 주민들에게 주택건설비를 지원할 때

동강 변에 있던 집들은 모두 헐려나가며 국적불명의 주택이 들어섰다.

 

집만 아니라 그 안에는 동강 사람들의 삶의 변천사가 담긴 자료는 물론,

긴 세월 수집해둔 소중한 사진자료들이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었다.

한 달에 두 번씩 정선 갈 때마다 새로 생긴 자료들을 챙겨가

정선 집은 자료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부엌 헛간을 개조해 암실과 작은방까지 만들어 두었으나

방은 물론 암실 기자재 위에도 숱한 짐이 쌓여 창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그 곳에 남겨 둔 필름 박스였다.

필름 박스 두 개 중 한 개는 스캔받기 위해 녹번동으로 옮겼지만,

한 개는 만지산 집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자동에 들어 간 이후 몇 년 동안 필름박스를 손도 대지 못했다.

그 일만 끝냈다면 나머지 것과 바꾸어 필름 이미지는 건졌을 것이다.

 

그 집에는 동강자료 뿐만 아니라 나는 물론 정영신씨가 전시한

수 많은 사진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스캔된 이미지야 다시 만들면 되겠지만 사라진 이미지는 어쩌냐?

 

그리고 둘 만의 작품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그림이나 도자도 있었다.

강용대 그림에서부터 초창기의 강찬모 그림과

수안스님, 최울가, 이존수, 신동여, 이청운작가 등 십여 점이 보관되어 있었고

나를 그려 준 박재동선생 그림을 비롯한 초상화도 여러 점 있었다.

그리고 통도사에 계신 수안스님께서 방문하여 ‘몽암’이라는 현판까지 달아주셨다.

꿈의 암자라고 이름 지었는데, 결국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정선 만지산에 도착하니, 옆 집 두 채와 우리 집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포크레인만 불탄 현장을 지킬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화재 규명은 물론 불탄 필름 흔적이나 피해 자료를 찾아야 하는데,

왜 포크레인이 현장에 들어 와 헤집어 놓았을까?

한 쪽에선 불씨가 남았는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굶주려 지친 개들만 여기 저기 퍼져 있었다.

 

불탄 잔해를 살펴보니 그동안 아무리 찾아도 없었던

90년도 만든 ‘전농동588번지’ 전시 팜프렛 잔해도 보였다.

그렇지만 건져낼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윗만지 창수네 집으로 올라갔다.

고사리 꺾던 이선녀씨는 하던 일을 제쳐두고 술상부터 차렸다.

마음을 위안해 줄 게 술 밖에 더 있겠는가?

 

막걸리가 몇 잔 들어가니 한결 마음이 편하더라.

들려준 바에 의하면 동네사람들이 밤잠을 설쳤고, 소방차가 일곱 대나 동원되었단다.

다들 산으로 번지지 않도록 막았을 뿐,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누전이란 것은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어제 손님 네 분이 윤인숙씨 집에 와 묵었는데, 늦도록 고기 구워 술을 마셨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불씨가 살아나 옮겨 붙은 것으로 추정한단다.

 

불난 집 이야기에서 웃기는 이야기로 불이 옮겨 붙었다.

살러 온 색시마다 도망쳤다는 뱃사공 유춘식씨 이야기에서부터

한 밤중 일 치던 내외가 석유병을 들기름으로 착각해

거시기에 불이 붙은 비화 등 배꼽 잡을 옛날 이야기들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이선녀씨가 따 놓은 두릅을 두 보따리나 챙겨주었다.

두릅 값으로 신사임당 한 장을 꺼내주었더니, 감동적인 말을 했다.

“인정을 돈으로 계산하지 말자”는 거다.

 

마을 이장 처럼 항상 보살펴주는 최연규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다들 불난 집에 와 있단다.

 

 

내려 가보니, 동내 사람들이 술 한 잔 마시며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나야 보험이라고는 자동차 보험 밖에 없지만, 옆집도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집 공사 중이라 현금을 칠백만원이나 두었는데, 그 것까지 홀랑 태웠다는 것이다.

보상 받기 위해 잿더미를 뒤적거려 이백만 원 정도의 흔적은 찾았다고 한다.

 

자칫했으면 생사람 잡을 뻔 했더라.

숨이 막혀 일어나니 연기가 차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돈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팬티 바람으로 튀 쳐 나갈 수밖에 없었단다.

천만다행인 것은 그날 밤 바람이 한 점도 없었다는 점이다.

불이 산으로 옮겨 붙었다면 대형 산불로 번질 가능성이 많았다.

동원된 소방관들도 불이 윗쪽으로 번질 것을 대비해 포진했지만,

일방통행인 만지산 길에 물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진화가 더 더뎠다고 한다.

 

늦게 불붙은 우리 집은 소방관들이 조금만 빨리 출동했어도 옮겨 붙지 않았을 거고,

물 공급만 원활했어도 자료의 반이라도 건져낼 수 있었다고 한다.

산불이나 마찬가진데, 소방헬기는 왜 동원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동강 댐으로 시끄러울 때 왔으니, 어언 이십 오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다.

환경 사진가들이 만지산에 둥지 틀고 물고기나 곤충, 들꽃 등 각자 전문분야를 기록했는데,

난, 동강 변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 불탄 집이 그 당시 캠프로 사용했던 집이다.

 

2000년, 동강 사람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담은 ‘동강 백성들’ 사진 산문집과

조해인시인의 ‘어라연 뱃사공 이해수씨’라는 동강 시집이 나올 무렵에는

‘동강주민을 위한 굿마당’을 옛 귤암분교에서 열기도 했다.

 

김명성씨가 주동이 된 ‘창예헌’ 예술가들이 버스 몇 대에 나누어 타고 찾아 와

밤늦도록 주민들과 어울렸는데, 이원창 사또 나리께서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좁은 도로가 마비되는 등 조용했던 동네에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그 무렵은 다들 동강 댐 찬성하는 주민들을 나쁜 놈으로 몰아세웠다.

댐을 만들라는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는 속 사정은 일언반구도 없이

여론몰이 하는 형태는 지금의 기레기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환경운동연합’과도 반대의견을 낸 것은 사람이 살아야 동강도 살수 있다는 말이다.

 

빚에 쪼들려 물에 투신하거나 농약먹고 자살하는 등

동강 사람들이 여럿 죽어나가자 주민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명동성당 앞에 진을 쳤는데, 날씨마저 얼마나 추웠는지 모른다.

그 당시 충무로에 있던 ‘현대사진가회’ 강의실을 비워 귤암리 노인들을 모셔놓고

밤 세워 전단지 만들고 보도자료 보내느라, 사진단체 사무실이 동강사람들 전진기지가 되었다.

이틀 날 ‘문화일보’ 사회면에 동강주민 살리라는 사회면 특집기사가 실린 것이다.

 

주민대표 이영석씨를 비롯한 몇 명이 김대중 대통령 호출로 청와대에 불려갔다.

피해주민에게 주택자금 지원과 부대시설을 지원하기로 약속받는 등 난제를 해결했다.

그 때 출판한 ‘동강환경사진집’과 ‘동강 백성들’ 산문집으로 환경단체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두메산골사람들’과 '산'을 주제로 사람과 자연 환경을 찍으며 혼자 눌러 앉았다.

 

그 곳은 자연 환경도 아름답지만, 절처럼 마음이 편안해 떠나기 싫었다. 

몇 년 지난 후 프로젝트에 같이 참여한 사우가 그 집을 자기가 사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빚내어 사게 된 것이다.

그 많은 짐을 옮길 곳도 없었지만, 하던 작업이 끝나지 않아서다.

오죽했으면 역마살이 끼어 한군데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버릇을 알아

돌아가신 어머니까지 만지산에 묻었겠는가?

 

20년 전 평당 팔만원에 400평을 샀다.

당시의 시세가 평당 만원정도 했으니, 바가지도 그런 바가지가 없었다.

 집도 밭에다 지은 무허가 농가였다.

문제는 한 집이었던 옆집을 다른 사람에게 잘라 팔며 절집 같이 고요한 만지산의 낙원도 끝나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거나 지나치는 사람들로 정동지가 정선 집에 가기 싫어했다.

욕실도 없고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있어 밖에서 목욕을 하거나 소변을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예 우리 집 마당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며 들락거리니, 나 역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옆 집은 한 때 대학로에서 카페를 운영 했다는 박진기씨가 살았으나

땅 살 형편이 못 되자 미국 사는 친구를 끌어들여 사도록 부추긴 것이다.

옛 말을 믿을 수는 없으나, 그 집에 우환이 생긴 원인은 집 구렁이 때문이 아닌가도 추정된다.

 

2002년 여름, 우리 집 모퉁이에 팔뚝 굵기의 능구렁이가 똬리 틀고 있었다.

최종대씨가 얼른 잡아 옆집 부엌의 빈 장독 속에 넣어둔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옆집은 최종대씨 장인인 이관옥씨가 오가면 사용한 집인데,

이튿 날 뱀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집 구렁이를 잡아서 안 된다는 옛말이 생각나 늘 마음이 꺼림직 했다.

 

이번에 불난 발화지점이나 사람 죽은 방도 그 부근이었다.

비록 그 일 때문은 아니겠지만, 우환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 집을 산 성수씨가 어느 날 술이 취해 부얶 방에 들어가다 깨진 방문 유리에

동맥이 찔려 죽는 변을 당하는가하면, 처음 잠깐 살았던 박진기씨도 아내와의 불화로

집에서 석유를 몸에 붓고 불을 붙여 자살한 것이다.

 

성수씨가 갑작스런 변을 당하자 아내가 무서워 못살겠다며,

이사 가려고 급히 집을 내놓았는데, 그 집을 산사람이 이번에 불 난 윤인숙씨다.

세상을 하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구렁이를 잡은 최종대씨도 나이에 비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어지는 우환이 우연치고는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일찍부터 ‘사진 굿당’이란 이름을 내걸고 여러 가지 일을 벌였다.

산삼 심는 ‘농심마니’ 팀들을 초대하여 만지산에 산삼을 심었고,

사진굿당 앞 서낭당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때로는 굿당 축제에 무세중씨나 정선 무당을 모셔 와

밤 세도록 징소리 울리며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축제를 연 것도 동강사람들 자료관으로 자리잡기 위해서였다. 

타지의 예술인들을 불러 모아 수시로 놀이판을 만들어 문화적 역량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동강과 사람들에 대한 숱한 자료들을 모아 왔으나, 그 꿈은 순식간 화마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우연치고는 근래에 생긴 일들도 예사롭지 않았다.

여지 것 그 집을 전혀 손대지 않았던 것은 돈도 없지만,

집 자체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불편함을 토로하는 정동지의 불만을 깔아뭉갠 것이 미안할 뿐이다.

 

그런데, 보름 전 느닷없이 옆집에서 우리 집에 신식차양을 달아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좋아하는 정동지를 보며 어찌 반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다음 주에 정선군청에 들어갈 작정으로 구체적인 기획안까지 만들어 두었다.

그 집에 보관된 동강자료는 물론 집 자체를 정선군에 넘겨주기 위해

실무자를 만나 손 털 계산을 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인사동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손대지 않고

쳐 박아 둔 녹번동 필름박스를 정리하기로 작정했다는 점이다.

그 필름을 스캔 받은 후 정선 필름과 바꾸어왔다면 이미지는 살아남지 않았겠는가?.

한꺼번에 일어난 이 일련의 갑작스런 변수들이 화재와 연관은 없었을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 걱정이 태산 같다.

아무래도 윗만지산의 마지막 우환은 내 차례가 될 것 같다.

이년 쯤 후에는 동자동 쪽방 일도 마무리 될 것으로 여겨진다.

재건축이 끝나 다들 한 곳에 머물게 되면 더 이상 할 일은 없다.

그 때쯤 집터에 오두막 지어 살다 만지산에 뼛가루를 뿌리게 할 예정인데, 뜻대로 될지 모르겠다.

 

동네 주민들이 위로 차 여럿이 모여 술잔을 돌렸으나

예전부터 살던 주민은 최연규 내외와 김순배씨 뿐이었다.

 

다들 낯설거나 안면 정도 있었는데, 술 마시는 분위기가 무거워 노래 한 곡 불렀다.

그런데, 웃기려 불렀던 성냥공장 노래마저 노동가처럼 비장감이 뚝뚝 흘렀다.

 

“만지산 성냥공장

성냥 만드는 아저씨

하루에 한 갑 두 갑

낱 갑이 열두 갑

바지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오다

바지 밑에 불이 붙어

자지털이 다 탔네

만지산 성냥공장

아저씨는 백자지 백자지“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십 년 전에 심은 만지산 집 살구나무,

살구 좋아하신 장모님 나무다.

열리라는 살구는 열리지 않고

꽃만 흐드러지게 피는 살구나무

꽃 무게에 넘어질까 지팡이도 짚었다.

지천에 온갖 꽃이 다 피어도

살구꽃처럼 예쁜 꽃은 없다.

살구 맛도 못 보고 가신 우리 장모님

꽃이라도 보실지 모르겠다.

늙은 이내 가슴 다 녹는다.

 

지난 주말 정선 만지산에 파종하러 갔다.

모처럼 정영신씨와 나선 걸음이라 자동차도 신 났다.

 

만지산엔 온갖 꽃이 만발했다.

살구꽃을 비롯하여 진달래, 철쭉이 반겼고,

옆 마당의 벚꽃은 하늘을 뒤덮었다.

 

지난 번 봉우리 맺혔던 목련은 처참하게 떨어졌다.

그렇지만, 꽃구경할 겨를이 없다.

당일 떠나려면 일을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정동지는 야채모종 심느라 바빴고,

나는 땅 고르고 씨 뿌리기 바빴다.

 

옆집의 한순식씨는 집수리부터 하란다.

천막 떨어져 나간 자리에 공사판에서 챙겨 온 아크릴 차양을 달란다.

 

주는 것도 고마운데, 두 내외가 더 설쳤다.

발가락 부러진 윤인숙씨는 깁스까지 했으나

비닐봉지로 감싼 채 물청소를 하고,

한순식씨는 차양 다느라 애썼다.

 

이젠 우리 집도 신식 차양을 달았다

한 때 동강 댐 보상 턱으로 집 지어줄 때,

동강변 일대의 헌집은 모두 헐려 나갔다.

 

우리 집이 동네에서 유일한 헌집인데,

아직 석면 스레트 지붕을 달고 산다.

읍사무소에서 무상으로 교체해 주었으나

우리 집만 잔재를 그대로 남겼다.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미련하게 보이겠나?

돈이 없어 새집을 짓지 못했지만,

어찌 보면 동강 변의 유일한 옛집이라

주택 변천의 자료적 가치는 있을거다.

 

새집이야 돈만 있으면 언제나 지을 수 있지만,

헌 집은 허물면 다시 볼 수 없지 않겠는가?

 

살기가 불편해 정동지 마저 정선가길 싫어한다.

나야 어디서나 지내는 야생의 습성을 지녔지만.

따뜻한 물은커녕 씻을 곳조차 마땅찮은 시골집에

어느 여인네가 가고 싶겠는가?

 

돈 생기면 조립식 주택이라도 옮겨주겠다고

둘러 댄지가 10여 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런 처지에 비 피할 수 있는 차양이라도 올렸으니

공사 중의 공사고 경사 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달아 준 것만도 황송하기 그지없는데,

부침개까지 부쳐 술상까지 차려 주었다.

상낭식이 아니라 차양식이 된 셈이다.

아랫집 김익수씨와 윗동네 두 내외도 합류했다.

 

그나저나 보답을 해야 하는데, 돈이 십 만원 밖에 없었다.

윤인숙씨께 수고비로 털어 드리고,

사진 작품 하나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물었더니, 만지산 사진을 택했다.

 

운전 때문에 술 한 잔 못 마셨지만, 기분은 째지더라.

차양을 달아서보다 정동지가 좋아하니까...

 

어두워지기 전에 마무리 할 일만 남았다.

서두러느라 대마씨는 제대로 뿌려졌는지 모르겠다.

힘들지만 이게 산골 사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올 여름엔 지인들 불러 잔치 한 번 벌일까보다.

 

사진, 글 / 조문호

 

세상 사람들 요~. 이 내 사연 한 번 들어보소.

옛날 같으면 고려장 할 이 나이에

소가 갈아야 할 땅 파 엎느라 녹초가 되어부럿소.

손바닥 물집은 터지고 허리는 펴지지도 않는데,

슬피 울어주던 새소리 끊긴지도 오래 되었소.

사는기 죽는 긴지, 죽는기 사는 긴지 나도 모르것소.

이 좋은 봄날, 신세타령 한 번 합니더.

 

옛날 할매들의 한 맺힌 팔자타령을 늘어놓는 것은 이 보다 더 좋은 위안의 말이 없어서다.

 

지난 주말 이틀 동안 정선 만지산에 농사 지으러 갔는데,

이제 체력의 한계가 서서히 느껴졌다.

매년 반복되는 농사지만, 땅 파 뒤 짚는 일이 제일 힘든 일의 하나다.

소도 경운기도 없이 오로지 곡괭이로 파 엎어야 하는 데, 간이 쑥 둘러빠지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곡괭이질도 서서히 느려질 수밖에 없다.

한 번 파고 헉헉대고, 두 번 파고 낑낑대다 결국 한 밭때기는 남겨야 했다.

 

몇 년 전만해도 밭 주변 나뭇가지에 다양한 산새들이 날아들었다.

힘들어 낑낑대면 새들이 조잘대며 다독이거나

뻐꾹뻐꾹 노래도 불러 주었으나 이제 새소리 멈춘 지도 오래다.

온 산을 개간해 농약을 뿌려대니, 새들도 더 이상 살 곳이 아니라 여겼는지 모두 떠나버렸다

 

어둡기 전에 집 주변 청소부터 해야 했다.

겨울내내 집을 비웠으니 집 주변에 몰린 낙엽이나 나뭇가지가 흩어져 할 일이 태산 같다.

오랜만에 지피는 군불이라 온돌 데우려면 불도 많이 지펴야 한다.

태울 것들 부엌에 가득모아 낙엽을 의자삼아 군불을 지피는데, 연기가 장난이 아니다.

더구나 호흡기에 문제가 있어 약과 흡입기를 입에 달고 살지 않는가?

숨이 차고 눈물이 나도, 낙엽 타는 소리와 구수한 냄새가 정겨워 참는다.

 

낙엽과 가지들을 다 태우고 나니 방안에 연기가 들어차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바닥 곳곳에 구멍이 생겨 연기가 방안으로 들어 간 것이다.

방안 가득 찬 연기가 다 빠져 나가려면 오래 걸리지만,

검은 산 바라보며 잡 생각에 빠지는 시간도 싫진 않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연기가 다 빠져나갔는데,

라면 끊여먹고 방 청소 하니 밤 두시가 가까웠지만, 이 얼마만의 안온함이냐?

따끈따끈한 온돌에 아픈 등 지지는 그 노골 노골한 맛을 알랑가 모르겠다.

가히 여인네 품속과도 비길 수 있는데, 만약 품속까지 있다면 난리 나는 거지.

 

동창이 밝아 눈을 떠니 오전 아홉시가 되었다.

예전에는 창이 밝아오면 새 소리가 시끄러워 늦잠을 잘 수 없었는데.

깨워 줄 새들이 사라졌으니, 일손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온돌 덕에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돌아가신 강민선생의 동오리 집 방문앞에 핀 목련꽃에 반해

심었던 목련의 키가 지붕을 훌쩍 넘었는데,

이제 막 피어나려고 봉우리를 맺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목련 꽃 아래서 술 한 잔 할 수 있겠구나

 

저녁 무렵 서울로 돌아가려면 할 일이 바빴다,

먼저 산소부터 들려 아머니께 인사드렸다.

“엄마! 저승에는 코로나가 없는기요?” 물어도

오랜만에 찾아 삐쳤는지 대답도 없더라,

 

땅에 밑거름 뿌리려면 정선 읍내 퇴비 사러 가야했다.

가는 길목에 핀 ‘동강 할미꽃’에 어찌 문안드리지 않을소냐?

아직은 이른 시기지만 성질 급한 할미 몇몇은 벌써 고개 내밀었더라.

벼랑에 핀 할미 보며 노래 불렀다

 

“동강 할미야

열길 높은 벼랑에

누굴 그려 피었느냐?

칼바람에 오무렸다

햇살에 핀 동강 할미야

죽은 울 엄마 생각나는 동강 할미야.“

 

정선농협에 비료 사러 갔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 아니라 점심시간이었다.

마음은 바쁜데, 시간만 죽여야 했다.

퇴비 열 포 사 싣고 만지산에 돌아온 것 까지는 좋으나

또 하나의 고난도 일거리가 남았다.

마당에서 밭까지 퇴비를 올리는 일이었다.

 

언덕에 박아 놓은 토끼궁댕이 같은 돌계단 따라

비료 들어 올리는 일은 그의 곡예에 가깝다.

퇴비 무게에 자칫 중심을 잃으면 나자빠지기 십상이다.

줄 타듯 중심 잡아 올라가는데, 깜짝 깜짝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힘만 좋다면야 등짐으로 올리면 좋으련만,

힘이 딸리니 기생첩 끌어 안 듯 가슴에 안아 오르는데,

평소 여인네를 그렇게 끌어안아 주었다면 말년이 이렇지는 않을 게다.

 

어렵사리 퇴비 다 뿌리고 떠날 채비를 했다.

점차 힘들어지는 농사를 그만 두겠다며 다짐에 다짐하지만 봄이 오면 다시 반복한다.

작년에는 땅에 휴식년 준다는 결심까지 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땅을 놀리면 안 된다’는 농꾼들의 지론을 핑게 삼지만,

그 일마저 그만둔다면 이 산골에 일 년에 몇 번이나 올 수 있으며,

산 위에 누운 울 엄마는 얼마나 외롭겠는가?

그리고 정동지에게 무공해 야채를 전해 주는 그 즐거움은 어쩌랴?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약으로 긴 세월 애용했던 대마다.

농작물이야 농사 짓지 않아도 어디서나 구할 수 있으나

마약 올가미 씌워 놓은 대마는 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밭 언저리에 몇 포기 심어 나물도 무쳐먹고, 강정도 만들어 먹고 술도 담아 버티는 것이다.

몇 년이나 더 버틸지 모르지만, 살아 움직이는 동안은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강변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나른한 밤길 운전에 졸음까지 몰렸으나, 졸음 쫒는 특효약을 잊어버렸네.

깜빡대는 졸음에 놀라 몸을 꼬집기도 빰을 때리기도 했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차창을 모두 열어 재치고 미친 놈처럼 노래 불렀다.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 없는 이 발 길...”

 

사진, 글 / 조문호

 

정선가는 길은 언제나 아름답다.

양수리 물안개를 밟고 구불구불 구름을 넘어

조양강에 이르면 만지산 살팔봉이 반긴다.

 

가을걷이로 정영신씨까지 대동했으나, 별로 거둘 것도 없다.

어머니께 내년에 오겠다는 인사나 마찬가지다.

 

농사란 공들인 만큼 돌아오는데, 나그네처럼 집 떠날 때가 더 많으니 될 리가 없다.

남은 거라고는 무와 들깨 조금이고. 산소에 핀 들국화 따는 일이 고작이다.

 

만지산에 도착하니, 현영애감독을 비롯한 손님들이 먼저 와 있었다.

울 엄마 무덤에도 갔다 오고, ‘대마불사주’도 자랑했다.

아직 좀 일렀지만, 술은 잘 익어가고 있었다.

 

손님 접대할 음식이 아무 것도 없어 현감독 일행과 읍내에 나가야 했다.

‘정선아리랑시장'에서 곤드레 밥에다 모듬전까지 시켜 먹었다.

맛있게 먹었으나, 밥값을 손님이 계산해버렸네.

 

식당에서 일어났으나, 일하러가기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만지산에 다시 한 번 와야 할 것 같았다.

모처럼 정영신씨도 왔는데, 힘들게 할 수야 없지 않은가?

시름시름 운전해 녹번동에 도착하니, 오후 아홉시가 가까웠다.

 

그런데, 짐 내리러 자동차 트렁크를 열어보니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술 항아리가 넘어져 굴러 다니다, 숨구멍이 열려버린 것이다.

한 말이나 되는 술을 다 쏟아냈는데, 진한 술 냄새에 어질 어질했다.

 

정영신씨가 어디서 소독약 냄새가 난다고 한 이유를 알겠더라.

차가 취했는지, 차도 왔다 갔다 했다는 증언도 뒤따랐다.

그 술에 들어 간 공력이 얼마며, 또 돈은 얼마나 들어갔나?

 

보조타이어 탱크에도 흥건히 고여 있어, 퍼 마시고 싶더라니까.

나야 안 마시면 그만이지만 맛보여주겠다고 떠벌린 약속은 어쩔거냐?

정영신씨는 새 술로 우려내라지만, 꼴도 보기 싫었다.

 

술만 버렸으면 모르겠으나, 수확한 농작물까지 술에 취해 버렸다.

모든 걸 자제하라는 계시로 받아들였으나, 기분 좆 같았다.

내년에는 일체의 농사를 짓지 않고 땅에 휴식년을 줄 생각이다.

 

길에 쏟아 붓는 기름 값도 만만찮지만, 더 이상 힘들어 못 다니겠다.

하는 일에나 집중해야겠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정선 만지산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간밤의 폭우로 강물이 넘쳐 다리가 물에 잠겨버렸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잠수교라 비가 조금만 많이 와도 다리를 건너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높은 다리를 만든 다음부터는 다리가 잠겨 고립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10년 전에는 정선 읍내 장 보러 갔다 오니, 그 사이에 강변길이 침수되어

이틀 동안 정선읍내 여관에서 물 빠지기만 기다렸던 때도 있었다.

물가에 산다는 것이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오래전에는 옛 귤암분교를 빌려 레프팅업을 운영하던 외지인이 갑자기 물이 불어나자

 서둘러 다리를 건너다 차가 물에 떠밀려 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산길로 돌아 갈 수도 있었는데, 무엇이 급해 목숨까지 버렸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물이 빠지도록 집에서 기다리면 되겠지만,

이튿날이 생일이라 아침식사를 같이 하자는 정영신씨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이틀 전부터 구름이 오락가락하며 뜸을 들이더니, 엄청난 폭우를 쏟아 부었다.

 

윗만지산 중턱에 있는 우리 집은 사방이 산으로 가려있어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다.

20여 년 동안 살며 한 번도 폭우나 태풍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다.

 

2002년 8월 태풍 루사가 몰아 닥쳤을 땐, 이변도 있었다.

한 밤 중에 산에서 돌이 굴러 부딪히는 소리가 대포 터지는 소리를 방불케 했다.

무서워 꼼짝도 못하고 밤을 지샜는데, 새벽에 나가보니

서낭당 앞 공터가 폭격을 맞은 듯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돌덩이가 개울과 도로 따라 굴러 우리 집 주변은 아무 피해가 없었다.

 

10년 전에는 스님 한 분이 찾아와 집 터에 절을 짓겠다며 땅을 팔라고 종용한 적도 있었다.

풍수지리적 여건이 자기가 찾던 곳이라지만, 살고 있는 집을 팔수야 없지 않은가?

아마 명당인 것을 알아본 듯 했다.

 

첫날은 비 때문에 일을 못하고, 둘째 날은 땅이 질퍽거려 일을 못했다.

방안에서 혼자 노닥거리려니 무료해 미칠 지경이었다.

만지산에는 티브이도 인터넷도 없어 책 볼일 밖에 없는데,

요즘은 시력에 문제가 생겨, 책도 오래보지 못한다.

 

무료한 마음을 아는듯, 아랫만지 사는 최연규씨가 찾아왔다.

집에 술안주가 없는 것을 눈치 챘는지, 윤인숙씨가 사는 옆집으로 오라고 했다.

술 마시러 온 것이 아니라, 술꾼을 모으러 온 것 같았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자기 집으로 가자는 것이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차를 타고 아랫만지로 넘어갔다.

아랫만지 가는 도로도 물에 잠겼으나 사륜구동이라 산길을 넘어갈 수 있었다.

아랫만지 아낙들이 물 구경하느라 입구까지 나와 있었다.

 

최연규씨 댁은 농지가 많은 대농이라 일반 농작물만 아니라 사과나 배 등 과일도 없는 것이 없다.

소도 여러 마리 키우는데, 그 많은 일을 두 내외가 맡아, 농사철에는 한가하게 만나기도 쉽지 않다.

얼마나 부지런한지 모든 농작물이 풍작이었다. 고추도 과일도 주렁주렁 달렸다.

 

그 날 아낙들은 깻잎을 땄지만, 남정네는 냉동실에 있는 홍어를 안주로 술을 마셨다.

홍어가 부족한지, 이번엔 매운탕 끓인다며 물고기 잡으러 가자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물이 넘쳐 고립되면 항상 즐기는 놀이지만, 대개 조그만 피라미들만 잡힌다.

그물 채를 급조하여 물가로 나가보니, 아까보다는 물이 많이 빠져 있었다.

강변길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으나, 다리는 그 때까지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길가에 심어 둔 농작물들은 휩쓸렸고, 떠내려 온 쓰레기들만 나무에 엉켜 붙어 있었다.

쓰레기 더미에는 고구마가 능쿨채 떠내려 와 걸려 있기도 했다.

밤 늦게는 물이 빠져 다리를 건널 수 있을 것 같아, 자리를 슬쩍 피해버렸다.

고기를 잡은 후 계속 술을 마신다면 나중에 출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술을 깨기 위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옆집의 윤인숙씨가 데리러 왔다. .

손사래를 친 후, 밤 열시쯤 출발해 보니 길가의 물은 빠졌으나 진흙 투성이었다.

 미끄러운 길을 힘들게 뚫고 나갔으나, 다리가 막혀있었다.

 

다리에 물은 남았지만 갈 수는 있었는데, 떠내려 온 나무둥치가 다리 중턱을 가로막았다.

늦은 시간이라 이웃의 도움은 물론 기계 톱도 빌릴 수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영신씨에게 전화 걸어 아침 약속을 저녁약속으로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돌아 오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진흙에 바퀴가 빠져 계속 헛바퀴를 돌렸다.

핸들을 돌려가며 계속 페달을 밟았더니,

차가 앞으로 가지 않고 옆으로 미끄러지며, 뒷 범퍼가 돌벽을 치고 빠져 나왔다.

범퍼 부딪히는 소리가 가볍기에 확인해 보지도 않고 돌아 와 버렸다.

 

그 이튿 날은 새벽부터 일어나 열무도 솎아내고

지난번에 수확하고 남겨 둔 옥수수대와 무성한 잡초들도 제거했다.

마른 땅이라면 옥수수뿌리는 괭이로 캐야 겠지만, 땅이 질어 손으로 뽑기 시작했는데,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새벽부터 시작한 일이 점심 때가 지나서야 끝났다.

 

그 때사 시장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는데, 허리가 아파 일어서지도 못하겠더라.

한번 일에 빠지면 힘든 것조차 잊어버리는, 고질병이 아닐 수 없다.

정선만 갔다 오면 그 다음 날 곤욕을 치루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다.

 

라면으로 허기를 메운 뒤, 수확한 농작물과 짐을 싣다보니, 차가 엉망진창이었다. 

간밤에 진흙탕에서 씨름하였으니 깨끗할리야 없지만, 뒷 범퍼 모서리가 쩍 벌어져 있었다.

 

얼마 전에도 문짝이 망가져 중고 문짝을 60만원이나 들여 교체했는데,

차주인 정영신씨에게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기초생활수급비 받아, 정선 오가는 기름 값과 차 유지비에 대부분 소모하는 편인데,

더 이상 수리할 여력이 없어 난감했다.

 

부득이 내년에는 땅도 쉴 겸, 농사를 짓지 않을 생각을 했다.

길에 돈 뿌려가며 농사 지어도 모종 값과 비료 값이면 사먹고도 남는다.

 

정선 만지산에서 출발한 시간은 오후1시 무렵이었느데,

언제 물난리가 났느냐는 듯, 도로와 다리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너무 무리하게 일해 손가락은 깨졌고 팔목은 삐었지만, 운전을 마다 할 수 없었다.

 

오다보니, 강변 도로에 아스팔트 조각들이 떠 내려와 쌓여 있었다.

몇 달 전에 시멘트 포장이 된 산길을 모두 아스팔트로 덧 입혔더라.

낭비가 심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좋아하는 주민도 있어 입을 다물었는데,

이게 토목업자와 군의원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멀쩡한 포장길에 왜 날림공사 하느라 돈을 쏟아 붓는지 모르겠다.

정선군은 돈이 남아돌아 탈이다.

 

매번 정선 갈 때는 새벽에 출발하고, 올 때는 한 밤중에 출발한다.

그래서 자동차가 정체를 한 번도 겪지 않았는데,

이 날은 하는 수 없이 한 낮에 출발하여 엄청난 곤욕을 치루었다.

양평을 경유하는 국도는 늦어도 네 시간이면 충분한데, 이 날은 일곱시간 걸렸다.

 

양평부터 밀리기 시작하더니, 퇴근 시간과 마주친 서울에서는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저녁식사를 일찍하는 정영신씨가 기다려줄지 걱정했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밥상은 차려 놓고, 아들 햇님이 내외와 손녀 하랑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 있으니 가족들이 나타났는데, 예쁜 하랑이 덕분에 지친 피로도 잊어버렸다.

생일케익까지 사와 복에 없는 생일잔치까지 열게 된 것이다.

 

생일밥 먹기가 이리 힘들다면, 다시는 생일을 맞지 않으리...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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