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에서 인사동, 인사동에서 녹번동으로 다람쥐 체바퀴 돌 듯 살았지만,
가끔은 서울을 벗어나 한적한 산골 정취에 빠지는 시간도 누렸다.
그동안 만지산 중턱에 텃밭을 가꾸었으나
20여년 살아 온 만지산 집이 잿더미가 되는 통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지가 2년이 가깝다.
다행히 아산의 김선우가 소유한 야산에 묏자리가 아니라,
집 자리를 내 주어 집 지을 채비를 서두른다.
그 방향으로 가는 촬영 길을 일부러 만들어가며 들렸으나, 이번엔 오랜만에 들렸다.
선우가 가을걷이를 가져가라는 연락도 왔다지만,
나 역시 다른 집에서 내다 버린 나무 의자를 두 개 주워,
그곳으로 실어 날라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디데이로 잡은 지난 토요일 오후에 정동지와 떠났는데,
너무 일찍 왔는지 집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여기 저기 고양이만 집을 지켰다.
할 일 없이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는데,
연못 위에 언덕 길을 만들어 휴식처를 만들어 놓았더라.
부지런한 김창복선생의 조경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헛간이나 비닐하우스 구석구석에 토속적인
기와나 멍석, 돌절구통 등 갖가지 생활용품이 쌓여 있었다.
이 지역을 예술과 자연이 숨 쉬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오래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온 것 같았다.
아산에서 '공유공간 마임'을 운영하는 김선우는 덩치는 작지만 여장부다.
부지런하기도 하지만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웬만한 사내 뺨친다.
선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선우가 나타났다.
정동지가 부탁한 신품종 사과를 구하러 갔다 온 모양이다.
조그만 비닐하우스에서 차 한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바닥의 흙냄새가 그렇게 정겹고 포근할 수 없었다.
흙도 다져진 땅이나 야외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비닐하우스 안 인데다 바닥의 흙까지 파헤쳐 놓아 그런지,
오랜만에 진한 흙냄새의 아늑한 향수를 맛 본 것이다.
같이 저녁 식사만 하고 헤어지기로 했는데,
저장고에 넣어 둔 농산물을 바리바리 차에 실어 주었다.
마치 친정 엄마가 딸자식 챙겨 주듯...
이곳만 오면 삽교천 회센타로 끌고 와 부담스럽다.
정동지가 좋아하는 참게도 포장하고 갖가지 회를 시켰는데,
때마침 이가 아파 아무것도 씹지 못할 지경이 된 것이다. 먹을 복도 지지리도 없지...
정동지는 잘 먹었으나, 선우는 내가 걱정되는지 잘 먹지도 않더라.
얼큰한 매운탕에 말아 밥 한 술 떴는데, 매운탕 맛을 보니 소주 생각났다.
운전할 놈이 술 생각하는 걸 보니, 아직 덜 아픈 모양이다.
선우 덕분에 모처럼 흙냄새 맡으며 한가한 하루를 누렸다.
그 이튿날은 일찍부터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녹번동으로 처들어 왔다.
주말에 녹번동 있다는 걸 알아, 장 보러 가는 길에 들려 가끔 낮술에 취하기도 한다.
사 온 소주가 바닥나 숨겨 둔 상황버섯주까지 꺼내 마셨는데,
어제 주입하지 못한 알콜, 아침부터 넘치도록 주입한 것이다.
낮술에 취하면 부모도 못 알아본다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이 나타날리야 없지 않겠느냐?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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