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기 '노량진수산시장' 사진집

눈빛출판사, 184, 25,000

 

 

최인기의 노량진수산시장눈빛출판사에서 펴내는 오늘의 다큐일곱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오늘 발생한 사회 제 문제를 사진가들이 어떠한 관점으로 사진에 담아냈는가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사진집 총서다.

 

 

 

이 책은 서울시민의 집단기억이 숨 쉬고 있는 노량진 구수산시장이 선진화와 현대화라는 미명하에 어떻게 풍비박산되었고,

그곳을 생계의 터전으로 살아온 시장 상인들의 삶이 변모하였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서울시민들에게 수산물을 제공하고 있는 노량진수산시장의 역사는 멀리 일제강점기까지 올라간다. 1928년 서울역 염천교 근처에 경성수산주식회사가 생겨난 이래 서울의 대표적인 이 수산시장은 1975년 한국냉장()이 시장을 인수해 노량진으로 장소를 옮긴다. 겉으로 보면 싱싱한 해산물의 도소매가 이뤄지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겨날 것 같은 수산시장이지만 2002년 공기업 민영화가 시작되면서 갈등이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2008년 수산물유통체계 선진화라는 명목으로 현대화사업이 추진돼 2016년부터는 신시장에서 본격적인 경매가 시작되었지만 40퍼센트 가량의 구시장 상인들은 신시장 입주를 거부하고 노량진 구수산시장 부분존치와 생존권 보장을 주장하며 농성을 벌여오고 있다.

 

 

 

이 사진집은 다큐멘터리 사진가 최인기씨가 지난 3년 동안 노량진 구수산시장 상인들의 생업과 투쟁 현장을 기록한 컬러 사진으로 구성돼 있다. 비린내 물씬한 수산시장과 활기 있는 상인들의 모습을 통하여 그들의 삶의 현장을 들여다볼 수 있다.

 

 

 

킹 크랩을 자랑스레 들어 보이는 아주머니, 손님이 뜸한 틈을 이용해 좌판 옆에서 잠이 든 할머니, 수조에 생선을 넣는 청년 등 수산시장의 일상적인 장면들로 이 사진집은 시작된다. 연탄난로에 발을 녹이는 할머니, 주문한 음식을 머리에 이고 배달 가는 식당 아주머니 그리고 장이 파한 후 한데 모여 여흥을 즐기는 시장 상인들의 모습을 통하여 현대화 이전 구시장의 평온한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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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의 생계 터전은 현대화와 법을 앞세운 폭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린다. 경찰의 비호 아래 용역들이 들이닥치고 상인들은 이들과의 힘겨운 공방 끝에 202010월 지하철이 다니는 25천 볼트 고압선 위 육교로 쫓겨나 지금까지 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생업에 열중하면서 손님을 맞이하고 주변 동료 상인들과 어울려 살아온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들이 갈등과 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과정을 사진가는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기록하였다. 결국 이 사진들은 국가와 사회가 소시민의 삶을 보호하지 못하고 투쟁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직권남용에 대한 분노의 서사인 것이다.

 

 

 

지난 64일 오후630분경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최인기의 노량진수산시장사진집 출간을 기념하는 사진전이 개막되었다.

 

 

 

전시장에는 사진가 최인기를 비롯하여 김남진관장,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 엄상빈, 김보섭, 김문호, 정영신, 김동진, 김영호, 곽명우씨 등의 사진가들이 함께하여 최인기의 노량진수산시장전시와 사진집출간을 축하했다.

 

 

 

이 전시에는 다큐멘터리 은석 감독이 촬영한 '시장으로 가는 길' 도 함께 방영되었다.

 

 

 

눈빛의 이규상대표는 작가를 소개하는 인사말에서 사진가이기 이전에 투쟁현장의 전사로서 최인기의 부지런한 모습을 전하며 키가 작아 용역 깡패들 가랑이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촬영 한다는 우스개 소리를 했는데, 진짜 그는 못 말리는 전사고 못 말리는 찍사다.

 

 

 

60년대 말 청계천을 기록한 빈민들의 성자 노무라목사의 영향을 받아 사진의 길로 들어선 사진가답게 특정 도시공간 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들을 기록해 왔다3년 전에는 '청계천 사람들'이란 주제로 노점상들의 투쟁을 다룬 전시와 사진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노량진수산시장 상인들의 삶의 투쟁을 기록한 이번 사진집 표지 사진은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식칼을 허리 뒤에 감춘 크로즈 업 사진 한 장으로 전체 투쟁의 내용은 물론 사진집에 실린 상인들의 분노가 고스란히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적 표현은 작가나 사진기자들이 쓰는 표현 방법이지, 당사자와 같이 살거나 함께 투쟁하는 사진가는 잘 선택하지 않는 접근법이다. 왜냐하면 사진보다 사람이 먼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인기의 표지 사진은 연출이 아니라 실제 상인의 현장 모습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당사자와 함께하는 사진가는 일상적 기록 이외의 사진가적 욕심을 버리는 것이 도리이기도 하지만, 눈에 띄는 사진을 만들기 위해 사진 앵글을 과장하는 트릭이나 연출은 일체 용납할 수 없는 짓거리다.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의 6-70년대 청계천 사진이나 최인기 사진이 대표적으로 당사자와 함께하는 사진인데, 튀는 사진이 없어 지루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민중들의 삶은 원래 자극거리가 없어 지루하고 따분하다. 그러나 이런 사진들이 우리에게 너무도 값진 진실 하나를 일깨워주고 있다. 세상에 따분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은 것들은 이상하게도 금방 싫증을 느끼게 되고, 또 싫증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은 대개 지루하거나 따분한 것들이라는 사실 말이다.

 

 

 

같은 눈높이에서 찍은 평범하고 소소한 기록들이야 말로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가치를 발휘해 인간 삶의 중요한 역사적 단서와 함께 사료가 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어려운 현실에서도 출판과 전시를 할 수밖에 없었던 사진가 최인기씨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라.

사진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어떤 사진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촉매제가 된다는 것이 제가 지속해서 전시와 출판을 하는 이유입니다. 가난은 드러내 공론화시킬 때 해결이 모색된다는 것도 평소 제가 가진 지론이기도 합니다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는 최인기의 노량진수산시장사진전은 13일까지 이어진다.

 

 

사진, / 조문호

 

 

 

 

 

옆 방 사는 최군은 정신이 왔다 갔다 하여 다들 미친놈이라 부른다.

그러나 미친놈이 미치지 않은 놈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그는 돈 있은 놈보다 없는 놈을 더 좋아한다.

제 몸 눕기도 비좁은 쪽방에서 물고기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가하면

매달 받는 기초생활수급비 대부분을 노숙자들 술 사주는 데 써 버린다.

 

가끔은 방안에서 발작 일으키는 소란에 관리인 정씨에게 혼 줄도 나지만 아무 소용없다.

정씨 역시 금방이라도 쫒아 낼 듯 욕을해대도 그의 인정스러움을 알아 그 때 뿐이다.

 

요즘 관리인 정씨가 허리를 다쳐 꼼짝을 못하는 와중에 최군의 발작이 도졌다.

갑자기 갑갑한지 팬티만 걸치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괴성을 질러댄다.

 

아무도 방문조차 열지 않아 그런지 골목으로 나가더니,

지나치는 이들의 심상찮은 반응에 다시 들어왔다.

 

조용해 방문을 열어보니, 발작이 끝났는지 큰 대자로 뻗어 자고 있었다.

이제 한 숨 돌렸다! 이 더러운 세상 어찌 미치지 않고 살 수 있겠나?

 

마음껏 소리 지르며 억눌린 마음을 풀고 나면 훨씬 편할 것 같았다.

미쳐버리면 모든 걱정도 잊지 않겠는가?

 

일손이 잡히지 않아 하릴없이 거리를 돌아 다녔다.

동자동이나 서울역이나 그 풍경이 그 풍경이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돈 많은 사람은 여전히 많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마스크도 멋인지 마스크 전문 매장이 생겼더라.

 

최군이 미친 게 아니라 세상이 미쳤다.

미친 자가 미친 것을 모르듯, 다들 모르고 살아갈 뿐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얼마 전 정동지 따라 지리산 권역의 산청으로 갔다.

 

산청하면 지리산이 생각나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이지만, 5월에는 산청한방약초축제나 황매산 철쭉제도 열린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곳은 장터 아니면 유적지 뿐이다.

 

정동지의 취재 일정이 어떻게 짜였는지 모르지만, 일단 산청 장부터 들렸다.

 

읍내 산청리에서 열리는 오일장은 시골장답게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산청장 역시 여느 장과 마찬가지로 기존장옥에는 사람이 없고 골목에만 행상들과 손님이 몰려 있었다.

 

점포를 지닌 기존상인만 힘들게 하는 이러한 전국적인 현상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박근혜정부의 문화관광형시장 정책 때문이다.

전통시장의 특성을 무시한 채, 장옥현대화에만 돈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토목 업자 배 불리는 일에 올인 한 것은 떨어지는 떡고물이 많아서 일까?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어울리는 우리네 정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판이었다.

이에 따른 또 하나의 문제는 장터 박물관 하나 없는 우리의 현실에

수십 년 된 기존의 장옥을 모두 철거해 오래된 장옥의 씨를 말렸다는 점이다.

 

나랏돈 쏟아 부어 장터 기능 망친 책임을 누군가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입안한 정책 책임자를 찾아 책임을 묻지 않으면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기 때문이다.

 

골목 장터에는 한 할머니가 집에서 따온 딸기를 팔고 있었는데, 뼈마디 마디 앙상한 거친 손이 딸기에 물들어 있었다.

정동지는 할머니 손을 어루만지며 안 서러워 하다, 딸기 한 바구니를 사 드렸다.

긴 시간동안 차에 실려 다니다 뭉개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옆에서는 한 아낙의 손님 부르는 호객소리가 구수하다.

“산에서 금방 따온 드릅 입니더. 한 소쿠리 만원만 주이소“

 

장터에서 나와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덕천서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숲이 많아 산그늘이 진다고 해서 산음(山陰)이라고도 불린 산청은 온통 갈맷빛이었다.

물기 머금은 산은 영롱한 초록빛으로 눈부셨다.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의 학덕을 기리는 서원으로 1576년 선조 때 세워졌다.

 

정문을 들어서면 교육공간의 중심건물인 ‘경의당“과 함께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동제와 서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경의당은 서원내의 여러 행사와 학문을 논의하는 강당으로 ‘敬’과 ‘義’를 중요시한 남명선생의 학문정신을 담은 곳이다.

 

뒤편에 자리한 승덕사는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곳에서 매년 봄가을에 두 차례의 향례를 올리며 선생의 덕을 추모하는 남명제를 지낸다.

 

덕천서원은 1600년 임진왜란과 1870년 고종 때 불탄 것을 다시 중건하였다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30년대에 유림들에 의해 복원된 서원이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로는 사당과 신문, 강당, 동재와 서재, 외삼문 등이 있다.

공부하는 공간이 앞에 있고 사당이 뒤편에 있는 전학 후묘의 배치로, 지금은 서원의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았다.

 

고즈넉한 고건축들이 적절한 위치에 자리 잡아 옛 서원의 풍모를 자랑했는데,

서원 맞은 편 물가에 ‘洗心亭’이란 편액이 걸린 정자 하나가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곳에 앉아 마음을 씻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 마냥 아쉽다.

 

그 다음에는 삼국시대 창건된 지리산 동쪽 기슭의 ‘대원사‘로 갔는데, 절 앞에는 지리산 계곡이 펼쳐져 장관을 이루었다.

 

이 절은 1685년(숙종)에 ‘대원암’으로 창건하였으나, 1890년(고종)에 중건하며 대원사로 격을 높였다고 한다.

그리고 1955년에 중창하여 비구니 선원을 개설하였다. 선원은 석남사, 견성암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참선 도량으로 꼽힌다.

 

해인사 말사인 대원사 당우로는 대웅전, 원통보전,·응향각,·산왕각, ·봉상루, 천왕문,·범종각, 등이 있으며 절 뒤쪽에는‘사리전’이란 암자가 있어 수도하러 온 여승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절 입구에는 부도와 방광비가 있고, 선비들의 수학처인 거연정도 있다.

 

보물로 지정된 다층석탑은 사리전 앞에 우뚝 서있다.

646년 자장이 세웠다는 이 탑은 돌에 철분이 많이 함유된 탓으로 붉은 물이 스며 나와 탑신의 전체형상이 강렬한 느낌을 준다.

이 탑은 드물게 남은 조선 전기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8층의 탑신을 세웠다. 전체적인 체감비율이 뛰어나고 조각은 소박하다.

 

이 탑에서 가장 주목받는 부분은 기단 위층 모서리다.

기둥 모양을 새기는 대신 인물상을 두었고, 4면에 사천왕상을 새겨 놓았다.

탑신의 각 지붕돌은 처마가 두꺼우며 네 귀퉁이가 약간 들렸는데, 8층 지붕돌에는 풍경을 달아 놓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탑에서 서광이 비치고 향기가 경내에 가득했다고 한다.

마음이 맑은 사람은 근처 연못에 비친 탑 그림자로 탑 안의 사리를 볼 수 있었다고도 한다.

 

마지막으로 산청 도전리에 있는 마애불상군을 찾아 나서다 ‘남사예담촌’에 잠시 차를 세웠다.

담장 너머로 한옥의 아름다움을 살펴보며 잠깐 쉴 작정이었는데, 부부회회나무를 비롯하여 18~20세기에 지은 전통 한옥 40여 채가 남아 있었다. ‘예담’이란 이름은 옛 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담장 너머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을 가지고 있단다.

 

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마굿간 갤러리’에 들어가 보았다.

고가를 활용한 창작공간이라 참고할 점이 많을 것 같았는데, 대문에 ‘색과 서에 빠지다’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다.

 

누구의 작업장인지는 모르겠으나 천연염색을 한 천이 빨랫줄에 널려 있었고, 다양한 글귀가 집안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고즈넉한 예향에 빠져들 수 있었는데, 머물고 싶은 곳이 아니라 살고 싶은 집이었다.

저만한 고택을 구할 수야 없겠지만, 정선 만지산에도 저런 집을 짓고 싶었다.

 

한옥에서 다시 도전리로 향했는데, 마애불상군으로 오르는 길은 소나무 사이로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니, ‘부처덤’으로도 부른다는 자연석 암벽이 나왔다.

 

그리 넓지 않은 자연암벽에 29구의 불상들이 조밀하게 새겨져 있었다.

4단으로 새겨놓은 불상은 1층에 14구, 2층에 9구, 3층에 3구, 4층에 3구가 있었는데, 크기는 30cm 안팎이었다.

 

대개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으며, 머리칼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고, 얼굴은 둥글고 몸은 사각형이면서도 단아해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 강했다. 대개 비슷비슷하게 새겨졌으나 옷 모양이나 손모양 등의 세부표현에서 다소 차이를 보였는데, 이목구비가 심하게 마모되어 있다.

 

찾아다닌 유적지 외에도 산성이나 단계리 석조여래좌상 등 가 볼 곳이 많았지만, 당일치기로는 무리였다.

장거리 여행에서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지만, 그래도 정동지 와의 유적 여행이 유일한 낙이고 행복이다.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 보시라”

 

사진, 글 / 조문호

 

 

산그늘 품은 마을 진뫼

 

한금선展 / HANGEUMSUN / 韓錦宣 / photography 

2021_0520 ▶ 2021_0611 / 일,공휴일 휴관

 

한금선_산그늘 진뫼_015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70820b | 한금선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21_0520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KP 갤러리

Korea Photographers Gallery

서울 용산구 소월로2나길 12(후암동 435-1번지) B1

Tel. +82.(0)2.706.6751

kpgallery.co.kr

 

 

진뫼의 시간 ● 한금선 작가의 사진 앞에서 한참 동안 서성였던 적이 있다. 이국에서 찍은 명절의 식탁 풍경이라고 했다. 식탁 위에 종횡으로 도열한 접시들은 간극을 허용하지 않은 채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식탁을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나도 함께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응시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토록 촘촘한, 무뚝뚝하고 꾸밈없는, 그러나 보기만 해도 배부른 밥상이 내 허기를 채워 주는 것만 같았다. ● X선을 인체에 투과하면 우리 몸의 내부 구조를 볼 수 있다. 그때 나는 조금도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X선처럼 내 마음을 관통한 그의 사진은 드러나지 않은 내 굶주림을 포착했다. 함께 나누어 먹기 위해 마련된 거대한 식탁 사진 속에서 당시 나는 내 삶의 결핍과 만났다. 한금선의 사진은 내게 누구도 알지 못한, 어쩌면 나 자신도 알지 못한 병증을 조용하게 선고했다. 그날부터였을까. 집으로 돌아와 한금선의 사진을 찾아본 것이. 그 후로 나는 한금선의 팬이 되었다. 보면 볼수록 그의 작업이 인간 몸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투과되는 X선 촬영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의 X선은 한 사람의 몸이 아니라 한 사회의 몸을 투과하고 있었다. 드러나지 않은 숱한 질병들이 그의 사진을 통해 발견된다. 사진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기 위해 보이는 것을 찍는다.

 

 

한금선_산그늘 진뫼_007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1
한금선_산그늘 진뫼_031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1

농촌이라는 명사가 우리에게 환기하는 이미지는 다양하지 않다. 동시대의 이면이거나 과거를 향한 향수. 다큐멘터리 사진가 한금선이라면, 그러니까 인간 사회의 X선을 자처하는 한금선이라면, 이면으로서의 농촌을 담았을 것이라는 예측은 사뭇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한금선의 이번 사진들은 '익숙한 농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애롭고 목가적인 전원으로서의 농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왜 진뫼로 갔을까. 그가 진뫼에서 찍은 것은 무엇일까. 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진뫼와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

 

한금선_산그늘 진뫼_018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1

전라북도 임실군 장암리에 위치한 산골 마을. 진뫼는 말에는 '긴 산'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전라도에서는 '길다'를 '질다'고 말한다. 산이 굽이쳐 흐른다는 뜻에서 진뫼라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굽이쳐 흐르는 강만큼 긴 산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그런가 하면 뒷산이 길어 장산 마을이라 부른다는 얘기도 전해지는데, 역시 산이 길다는 내용에 공통점이 있다. 편하게는 질메나 진메라는 이름으로도 부르기도 한다. '뫼'를 친화적으로 부른 것일 테다. 진뫼든 장산이든, 질메든 진메든, 조금씩 다른 이름들은 하나같이 섬진강 줄기 따라 펼쳐진 소담한 이 마을이 산마을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그가 찍은 것은 진뫼라는 어느 '산마을'이다.

 

한금선_산그늘 진뫼_006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1

섬마을이 익숙한 데에 비해 산마을이라는 표현은 익숙하지 않다. 좀처럼 입에 잘 붙지 않는다.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누구도 일상적으로 쓸 것 같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산마을보다는 산골짜기가 자연스럽다. 그러고 보니 나도 진뫼를 설명하면서 가장 먼저 산골 마을이라는 표현을 썼다. 산에 있는 마을이라면 으레 산'골'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무의식의 작용이었을 것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라면 그저 산이 아니라 산'골'이라 해야 주변과 차단되어 있어 있는 고립된 농촌의 이미지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산마을을 산골짜기로 부르는 마음은 바깥의 시선이다. 바깥에서 바라보면 산으로 둘러서야 있다는 것은 산으로 가로막혀 있다는 뜻이니까.

 

한금선_산그늘 진뫼_022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1

그러나 한금선은 안에서 본다. 그의 사진은 안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러므로 한금선의 진뫼 작업은 안에서 바라본 산마을 풍경이다. 잠깐. 풍경이란 말이 그의 사진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단어일까. 그가 찍은 건 풍경이 아니다. 특정한 지역의 모습을 찍은 건 사실이지만 그의 사진에 담긴 이미지는 섬진강변에 자리한 어느 마을이 아니라 그 마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상상된 역사다. 보이지 않는 시간을 찍는다는 것은 보이는 사물이나 환경 속에서 지나온 역사를 읽는다는 것이다. 사진들은 모두 3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허리 화전밭과 생산의 초상, 그리고 정월 대보름 제사다. 각각의 시간과 그 시간이 품고 있는 역사를 상상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한금선의 사진과 만나게 된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이미지에서 비롯된, 내가 상상한 진뫼의 시간과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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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허리 화전밭'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자연의 시간이다. 울창하다는 말로는 다 끌어안을 수 없는 광경을 바라보다 나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침묵에 그만 질리고 말았다. 한때 화전으로 일군 밭이었을 공간은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발길도 손길도 닿지 않는 먼 산이 되어 큰 짐승의 포효처럼 홀로 압도적인 존재가 되었다. 불을 질러 나무를 태우고 그 자리에 밭을 일구었던 시절이 그치자 산속을 흐르는 건 오직 자연의 시간뿐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무서울 정도로 증식해 나가는 무자비한 변화를 품은 산. 화전의 기억을 안고 있는 산은 백 년 동안 살아온 인간처럼 조용히, 그러나 모든 변화를 품은 오래된 인간의 고독한 등을 닮았다. 굽은 등이 말해 주는 꼭 그만큼의 침묵을 산에게서 듣는다.

 

한금선_산그늘 진뫼_041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1

생산의 초상'은 자연의 시간과 발맞추는 인간의 시간을 기록한다. 진뫼 사람의 손에는 어김없이 수확한 작물들이 들려 있다. 가까이에서 찍은 손과 발은 그들이 들고 있는 것들과 다르지만 그들이 들고 있는 것과 구분되지 않는다. 분명 다르지만, 결코 다르지 않다. 흙을 밟고 있는 발이 아니라 흙과 닿은 발이다. 토란을 들고 있는 손이 아니라 토란과 닿은 손이다. 짚을 메고 있는 등이 아니라 짚과 하나가 된 등이다. 인간의 육체와 자연의 육체가 만나는 순간은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조우하는 가없는 노동의 시간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미화도 장식도 없다. 그저 담담히 흙으로 돌아갈 발과 곡식을 길러줄 흙이 조우하는 순간을 포착할 뿐이다. 자연으로서의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자연이 교차하며 두 개의 시간이 뒤섞인다. 뒤섞이며 하나가 된다.

 

한금선_산그늘 진뫼_010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1

'정월대보름 제사'는 영혼의 시간이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내포함으로써 서로를 넘어서는 것이 바로 영혼의 시간일 것이다. 정월대보름 제사를 보름고사라 하는데, 설날이 모두의 명절이라면 보름고사는 농사짓는 사람들의 명절이다. 이날 사람들은 풍년을 상징하는 대보름달처럼 한 해가 풍요롭길 바라는 마음으로 음식을 마련해 차례를 지낸 뒤 이웃과 그것을 나눈다. 그런데 사진 속 제사상에는 상을 받는 사람이 없다. 말하자면 이 제사는 무명(無名)의 제사다. 이제는 거의 사라져 버린 이 수신 불명의 제사는 추모받을 수 없는 죽음을 기리는 종교적 의식이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초월의 시간이다. 사제의 마음으로 '우리'의 안녕을 비는 이 시간을 찍은 장면은 그 자리에서 함께 기도하지 않은, 지금 여기 있는 우리에게까지 안녕의 능력을 나눠 주는 것 같다. 이국의 잔칫상이 산 자들을 위한 만찬이었다면 진뫼의 제사상은 죽은 자들을 위한 만찬이다. 그러나 잔칫상이든 제사상이든, 두 개의 식탁은 모두 '내어 주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내어 주는 마음은 안에서만 볼 수 있다. ● 침묵하는 산, 부지런한 땅, 기도하는 손. 한금선이 진뫼에서 찍은 것은 바깥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산마을의 시간이다. 산그늘이 질 때 마을 사람들의 내면에 어떤 그림자가 드리우는지,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매일의 일상에 어떤 영원한 것들이 깃들어 있는지, 안에서 찍는 사람만 간신히 발견할 수 있는 예외적 순간이 이번에도 내 허기를 채워 준다. 가난한 세상의 허기를 채워 준다. ■ 박혜진

 

한금선_산그늘 진뫼_030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21

"짚자리에서 6섯을 낳았다. 그 위에 홑치마 하나 입고 앉았으면 맘이 편해 졌다. 그러고 있으면 신랑이 지 엄니에게 조르륵 가지. 우리 아가 명은 동방생명으로 해주고, 산에서는 산신님네, 하늘에서는 일곱 칠성님네, 물에서는 용왕님네, 집에서는 성주님이여! 이렇게 불러대며 아가를 빌어준다. 7일마다 기도해주고, 7번을 해야 금줄을 거둔다. 젖도 많이 태워주고, 복도 많이 태워주고, 대롱에 물새듯이…. 그리군, 사흘만에 다시 논 밭으로 나가지. 나무 없으면 장작패고, 멍청할수록 꽤가 많아야 허고, 비탈진 언덕 밤나무 딱 묶어서 딩굴리면, 신작로로 딱 떨어진다니까!" 진뫼엄니 박덕성 ■ 한금선

 

Korea Photographers Gallery(이하 K.P 갤러리)는 한금선 사진가의 『산그늘 품은 마을 진뫼』 전시를 2021년 5월 20일부터 6월 11까지 K.P Gallery에서 개최한다. 진뫼 마을은 전북 임실 섬진강의 한 자락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작가는 2007년부터 2012년까지 6년에 걸쳐 때로는 그곳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때로는 마을을 오가며 기록하였고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이미지 중 50여 작품을 이번 전시를 통해 소개한다. 『산그늘 품은 마을 진뫼』 전시는 작가를 닮아 문학적이고 시적이다. 작가는 전시를 통해 진뫼 사람들의 웃음과 그 사람을 기다리는 나무, 함께 호흡하는 마을과 섬진강을 이야기한다. ■ KP 갤러리

 

 

Vol.20210520e | 한금선展 / HANGEUMSUN / 韓錦宣 / photography

 

걱정이 많아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다.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으나, 몸이 버텨내지 못한다.

고질병인 호흡장애와 원인모를 두통에다 기력까지 쇄진하니, 사는 것 자체가 비참해 진다.

 

 

 

한 때는 심한 호흡장애로 입원도 했으나, 기관지 확장제인 ‘테오란-비’를 먹고 ‘아노로 엘립타’를 매일 흡입하는 식으로 버텨냈는데, 이젠 마스크까지 써야 하니 죽을 지경이다. 밖에 나가지 않는 게 상책인데, 갑자기 날씨마저 더워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바람이라도 씌러 서울역광장으로 나갔더니, 노숙하는 박씨가 죽은 사람 만난 듯 반긴다. “형님!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 한 잔합시다” 술 생각이 간절한 모양인데, 나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아 같이 마신 게 화근이었다. 서너 잔 마셨는데, 갑자기 숨이 가빠지며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박씨가 “어디 아픈가베! 빨리 병원 가보라”며 술잔을 거두었다.

 

 

 

한참을 엎드려 있었더니 어지럼증이 좀 안정 되었다. 영문을 모르는 지은이는 “술을 혼자 많이 마셔 벌 받았다”며 낄낄댄다. 어디서 구했는지 헬멧을 쓰고 목에 채인 까지 감고 있었다. 지은이를 보니 갑자기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비록 노숙하는 처지지만 아무런 걱정 없이 즐겁게 살아간다.

 

 

 

그래! 아무 것도 없는 게 속 편할거다.

 

 

 

나 역시 아무것도 없는데, 난 왜 편하지 않을까? 나에게는 쪽방도 있고, 좋아하는 동지도 있고, 케메라도 있지 않은가? 그 세 가지만은 아무리 생각해도 버릴 수가 없었다. 아직 수양이 덜 된 것 같았다.

 

 

 

곳곳에 쓰러져 자는 노숙인이 널려 있었다. 밥 얻어먹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으니, 잠 잘 일 밖에 더 있겠는가? 어쩌면 그들도 나처럼  아플지 모르겠다. 아파 딩굴다 눈감으면 아무도 슬퍼해 줄 사람도 없다. 짐승보다 못한 삶이지만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정치꾼들은 걸핏하면 복지복지 노래 부르지만, 말짱 개소리다.

 

 

 

그래도 그냥 들어 갈 수는 없어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 있는 한 이 짓은 반복할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다. 세상에 별의 별 병이 많지만, 이 병도 마약처럼 하나의 정신병에 속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관속에 들어가 눕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관 치고는 큰 방이지만, 계단 오르는 일이 너무 힘들다. 쉬엄쉬엄 올라오긴 왔는데, 오자마자 그대로 뻗어버렸다. 숨을 못 쉬어 자다 죽는 것도 괜찮을 텐데, 그런 복이 내게 올 리는 없다.

 

 

 

누워 있어도 할 일이 눈에 어른거려 미칠 지경이다. 지금쯤 정선에 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집을 지어야 한다는 심적 부담이 병이 된 것 아닌지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전국을 헤집고 다니는 장돌뱅이 사진가 정영신씨도 모르는 장이 있었다. 전국장터 목록에도 빠진 아산 둔포장을 김선우씨로부터 알아낸 것이다.

 

 

 

지난 12일 동자동에서 열렸던 정의당 공공개발 현장간담회 끝나기 무섭게 정동지와 함께 아산 둔포로 내려갔다.

 

 

 

네비 안내 따라 정오 무렵 둔포 장에 도착했는데, 아마 대한민국에서 제일 작은 장이 아닌가 싶었다. 고정 상가라고는 식당뿐이고, 잘동뱅이 열 한 팀이 자리 잡은 조그만 장인데. 손님이라고는 30여분 동안 일곱 명 밖에 보지 못했다. 품목도 야채모종이나 과일, 옷 등 몇 가지뿐이라 사라져가는 오일장의 마지막 풍경 같았다.

 

 

 

장터는 보잘 것 없으나 먹을 복은 있는지 식당은 근사했다.

아산 ‘공유공간 마인’의 김선우씨를 만나 보리밥집에 들어갔는데, 음식이 정갈하고 푸짐했다.

 

 

 

시골에서 9천 원짜리 비빔밥이면 비싼 편이지만, 수육까지 나왔다.

 

 

 

맛있게 얻어먹고 김선유씨 안내에 따라 ‘백암길185 미술관’ 터가 있다는 염치면 백암리로 갔다.

 

 

 

 

현충사 둘레길이라는 현장에 도착해 보니, 한적한 길가에 자리잡은 시골 집 이었다; 가난한 목수와 딸이 살다 떠난 집이라는데, 곳곳에 부녀의 체취가 남아 있었다. 작은 문으로 빠져 나가지 못해 가동된다는 냉장고만 버틴, 천장 낮은 아담한 공간이었다. 벌써 날씨가 더위지기 시작해 마당에 퍼져 앉았는데, 김선우씨가 냉장고에 넣어 둔 수박을 가져왔다. 

 

 

김선우사진 스크랩

 

'공유공간 마인'에 이어 두 번째 준비하는 ‘백암길185 미술관’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신 할지 기대된다. 현충사 둘레 길 모퉁이에 자리 잡은 ‘백암길185 미술관이 또 다른 아산의 문화아지트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2일 오전10시부터 동자동 새꿈공원에서 ‘동자동 쪽방 공공주택사업 주민대책모임’과 ‘정의당’이 공공주택사업 추진을 위한 현장간담회를 열었다.

 

 

 

지난달에는 건물주들의 대책위와 ‘국민의 힘’이 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정의당’은 정부에서 발표한 공공개발이 차질 없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국민의 힘’에서는 개발이익이 우선인 민간재개발을 부추기고 나선 것이다.

 

 

 

분양하여 돈을 벌어야하는 민간개발은 도시주거환경정비법에 따라 주택지는 15%, 상업지는 5%만 공공임대주택을 지으면 되지만 공공개발은 공공주택 특별법에 따라 공공임대주택을 35% 이상 지어야 한다. 동자동의 경우 전체 주택 중 52%가량을 공공임대주택으로 짓는다고 발표했으니, 건물주들은 용산지역 전체 부동산시세 하락까지 들먹이며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간담회가 열릴 동자동 새꿈공원은 아침부터 쪽방주민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취임하며 건물주들의 목소리가 강해지며 민간재개발로 바꾸려는 낌새에 주민들은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쪽방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정의당과의 간담회 소식에 한 가닥 희망을 갖고 나온 것이다.

 

 

 

동자동 공공주택사업 추진을 위한 현장간담회에는 정의당에서 배진교 원내대표와 심상정 의원이 참석했고, 주민 대표로는 ‘동자동사랑방’ 김호태 대표와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 김정호 이사장, ’빈곤사회연대‘ 이원호 집행위원장이 발제 및 토론자로, ’동자동사랑방‘ 박승민 활동가가 사회를 맡았다. 간담회가 열린 새꿈공원에는 기자들과 주민 등 100여명이 참석하여 간담회를 지켜보았다.

 

 

 

인사말에 나선 동자동사랑방 김호태 대표는 첫마디에 “이제 대표직을 내려놔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며 마지막 자리임을 시사하는 아리송한 말부터 꺼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민간개발이 되면 주택 값이 뛰어올라 아무 것도 없는 쪽방주민들은 살 수가 없다며, 공공재개발을 흔드는 세력을 나무랐다. "건물주들은 여기 살지도 않습니다. 전기가 나가도 고쳐주지 않고 겨울에 보일러도 하루에 두 번 밖에 안 틀어줍니다. 전기세 많이 나온다고 전기장판도 못 쓰게 합니다. 한 번은 너무 추워 보일러를 더 틀어달라고 부탁하니 3만 원을 받아 갔습니다. 돈 내기 싫거나 맘에 안 들면 나가라는 식이에요." 건물주들은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며 “우리와 같이 살면 자기들은 죽는다”고 말했단다.

 

 

 

동자동 주민대책위원회란 간판으로 바꾸어 단 후암특별계획1구역 재개발 준비추진 위원장의 언론 인터뷰에 따르면, 동자동에 거주하는 소유주는 10%에 그친다고 말했다. 많은 소유주들이 동자동에 살지 않으면서 투자를 목적으로 건물을 소유한다는 자백인 셈인데, 관리인을 통해 월세는 하루만 늦어도 쫓아내지만 비싼 월세를 현금으로만 꼬박 꼬박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의당 배진교 원내대표는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반 지하방보다 더 열악한 공간이 쪽방이라고 말했다. 겨우 한 몸 누일 좁은 공간에서 문이 없어 비닐로 바람을 막고 화장실이 없어 공공화장실을 이용하는 상황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라며 “소유주의 재산권보다 거주자의 주거권을 보장하는 것이 공공재개발의 의미”라고 말했다.

 

 

심상정 의원은 ”내 무덤 위에 공공임대를 지으라“, 용산참사 피바람 각오하라”며 빨간 깃발을 내걸던 건물주들이 갑자기 ‘쪽방 주민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민간개발“ 운운하며 상생하자는 현실에 큰 비애감을 느낀다고 했다. “물새고 천장 내려앉아 어려움을 외칠 때는 눈 막고 귀 막고 있던 분들이 아니냐며, 동자동개발은 40년간 최저 주거기준에 미달하는 삶을 버텨온 주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와 정치권에서 해야 할 일은 집 가진 자들의 개발 이익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 집 없는 서민들이 집다운 집에서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라며, ‘국민의 힘’ 오세훈씨가 서울시장이 되었지만, 시장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민간재개발을 요구하는 국민의힘에 대해서도 규탄의 메시지를 보냈다. '민간재개발을 해야 주택을 더 많이 공급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번 개발은 수 십 년간 최저주거기준에도 미달하는 삶을 살아 온 동자동 주민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며 "공공주택은 생색내기로 조금 만들고, 나머지 주택을 가지고 시세차익을 노리는 그런 개발은 절대 반대 한다"며 "정부와 정치권의 역할은 집 가진 이들이 개발이익을 더 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게 아니라 집 없는 서민들이 집다운 집에서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분들이 집 걱정 없이 두 발 뻗고 주무실 수 있도록 저와 정의당이 공공주택사업을 확실히 챙기겠다"며 약속했다.

 

 

 

동자동 주민협동회 김정호 이사장은 적어 온 글을 차근차근 읽으며, 붉은 깃발과 과격한 현수막은 가진 자들의 횡포라고 꼬집었다. 건물주들은 더 좋은 집을 지어 주겠다지만, 개발이익이 우선인 그들로서는 입에 발린 헛소리라고 말했다. 건물주들이 찾아와 “요구하는 게 뭐냐?‘고 묻는데, 화장실도 갖고 싶고 밥해 먹을 부엌도 갖고 싶다. 우리도 이제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말했단다. ”공공개발이 안 되면 대한민국 무너진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빈곤사회연대 이원호 집행위원장은 동자동 공공주택사업의 의미와 쪽방 주민 주거권 강화방안을 비롯하여 동자동 쪽방촌의 현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공공개발의 장점은 공공임대주택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다는 점과 선(先)이주·선(善)순환을 꼽았다. 선 이주·선 순환은 지구 내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 해 이주 단지를 만들어 쪽방 주민을 임시 거주하게 하고 공공주택이 건설되면 이주하게 하는 방안으로 원주민들이 동네를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 위원장은 “재개발 방식으로는 순환개발과 전면철거가 있는데, 순환 개발은 사업이 오래 걸리는 만큼 비용이 든다. 개발 이익이 우선인 민간재개발은 전면철거를 하지만, 공공재개발은 시간과 돈을 들여서라도 순환 개발을 선택한다”고 부언했다.

 

 

 

주민 질의 시간이 되자 처음엔 물어볼게 없는지 서로 마이크를 미루던 주민들이 나중엔 마이크 없이도 여기저기서 공공개발의 필요성과 공공개발을 원한다는 말들을 쏟아내며 정의당에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간담회가 끝난 뒤 의원들은 주민들 안내로 쪽방촌의 비참한 현실을 돌아보며 현장간담회를 마무리했다.

 

사진, 글 / 조문호

 

 

 

당집처럼 붉은 깃발을 펼럭이며 ‘용산참사 피바람 각오하라’는 험악한 글이 나 붙은 거리도 이제 익숙한 동자동 풍경이 되어 버렸다.

 

 

 

그토록 공공주택 건설을 강하게 반대하던 재개발조합에서 갑자기 ‘동자동 주민대책위’로 간판을 바꾸어 달고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며 쪽방 주민들을 회유하려 들고 있다.

 

 

 

이 문제는 지난 2월 정부에서 동자동 쪽방촌을 공공주택으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시작되었다.  LH와 SH를 공동사업시행자로, 서울역 근처 동자동 일대에 공공주택 1450호와 민간분양주택 960호를 짓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쪽방 주민들은 임대주택에 입주할 수 있게 되었고,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임시거주지도 제공한다는 발표에 빈민들의 기대가 컷다.

 

 

 

이미 지난 2월19일 주민들의 의견 청취를 마쳤고, 올해 안에 국토교통부가 공공주택지구 지정을 완료하면 내년부터 지구계획 승인과 보상 절차가 진행된다. 2023년 임시이주와 공공주택단지 착공에 들어가며 입주는 2026년이고 2030년에 민간분양 택지개발이 완료되는 사업이다.

 

 

 

그러나 이 지역 토지·건물주들이 추진한 동자동재개발조합에서 공공개발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는데. 갑자기 쪽방주민들에게 “더 좋은 집을 지어주겠다”고 달래며 쪽방 전체 주민을 대표하는 듯한 '동자동 주민대책위'로 간판을 바꾸어 다는 위선적인 전략을 취한 것이다.

 

 

 

동자동 재개발조합은 2018년부터 만들어졌지만 여러 장애에 걸려 여지 것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재개발조합에서 못하는 것을 정부에서 해 주겠다는데, 왜 눈에 쌍심지를 켜는지 모르겠다. 떨어지는 떡고물이 적어서 일까?

 

 

 

그 강경했던 거리 펼침막을 지난 달 중순부터 두리뭉실한 내용으로 바꾸어 달았다. “쪽방 주민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민간개발, 동자동 주민대책위원회가 만들겠습니다.”  재개발조합을 좌지우지하던 여인네 직함도 “동자동 주민대책위원장”으로 바뀌었더라. 누가 완장을 채워주었는지 모르지만, 갈수록 가관이다. 대개의 쪽방 건물주들은 투기꾼에 다름아니다.

 

 

 

쪽방 주민들도 비열한 그 따위 수법에 넘어가지 않는다. 주민들의 협동체인 “동자동 사랑방”에서 건물주들의 붉은 깃발에 맞서 “공공주택환영”이란 글귀를 곳곳에 써 붙이며 음흉한 공작에 대처했다. 주민들은 건물주들의 위선에 분통을 터트리며 “공공주택 개발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지난 7일에는 새꿈공원에서 쪽방주민들이 찍은 특별한 사진전도 열었다. 자신이 사는 주변 환경을 핸드폰으로 찍어 보여주는 사진전이었다.  사진작가들의 주관적인 앵글보다 주민들이 찍은 가식없는 현장사진이 더 가슴에 와 닿았다. 이처럼 리얼한 현장 사진을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방에 물이 새도 그만, 공동화장실이 막혀 용변을 못 보아도 모른채 하며 건물관리는 뒷전이었지만, 비싼 방세는 하루만 늦어도 쫓아내는 악덕업주들이 아니던가? 방세 또한 계좌이채도 안 되고 오로지 현금만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더럽게 벌어 탈세까지 하려드는 것이다.

 

 

 

건물 소유주들이 공공개발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은 민간개발에 견줘 그들에게 돌아오는 개발이익이 적어서다, “내 무덤 위에 공공임대주택을 지어라”며 극력 반발하던 소유주들이 이제 와서 ‘쪽방 주민들과 함께’하겠다며 알랑방귀 뀌는 꼴 사나운 수작들을 어찌 두고 볼 수 있겠는가? 

 

 

 

평당 임대료로 치면 고급아파트보다 더 비싼 동자동 쪽방은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짐승우리보다 못하지만 정부가 지급하는 주거급여가 오르면 월세도 따라 올렸다. 건물주들은 동자동에 살지도 않고 관리인을 통해 월세만 꼬박꼬박 받아 챙기는 주제에 이제 와서 ‘함께하자’ ‘우리 얘기도 들어 달라’고 나서니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동네에 붙인 유인물에는 “저희는 쪽방 주민 여러분들을 내쫓을 생각이 전혀 없다. 닭장 같은 쪽방에서 또 다른 쪽방으로의 이전이 아닌 집다운 집, 질 좋은 집을 지어드리고 싶다”는 말을 적어 놓았다. 그런 입에 발린 소리를 믿을 사람이 있겠는가? 이미 2015년부터 후암동 특별계획구역으로 지정해 개발을 추진했지만, 소유주들끼리 합의가 안 돼 실패했다. 그땐 쪽방 주민들 의견은 물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공공주택 계획이 발표된 이후 치러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민간주도 재개발을 공약한 오세훈 시장이 당선된 게 문제였다. '국민의 힘'은 지난 달 중순 건물소유주들과 간담회를 열어, 정부의 공공주택 사업을 ‘재산권 침해’라 비판하며 가진 자들의 편을 들기도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건물주들의 목소리보다 밑바닥에서 허덕이는 빈민들의 삶을 살펴보고 대처해야 한다. 당리당략보다 동자동 공공주택개발 사업이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주거권을 보장하는 표본이 될 수 있도록 망설이지 말고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건물주들은 당장 ‘동자동 주민대책위원회’란 위장 간판부터 내려라.

그리고 정부의 공공개발 사업에 적극 협력하라.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더냐?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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